-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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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T.S. 엘리엇: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황무지>의 재발견
?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omas Stearn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 (혹은 이 작품에 포함될 운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402).
엘리엇의 성장 배경
?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고 썼다 (404).
? 모든 기록을 통해 보건대, 어린 엘리엇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아이였다. 누이에 따르면, 아직 말을 배울 무렵에도 단어 꼴도 만들지 못하면서 운율에 맞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떤 냄새나 소리, 장면과 같은 감각적인 인상에 넋을 잃곤 했고, 조상이나 양초, 향기에 정신이 팔리기 일쑤였다 (404).
? 감각적인 인상에 이처럼 강하게 매료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유별난 일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이나 어릴 때 받은 인상을 시에 담아내려는 강한 성향은 더욱 더 유별난 점이다 (405).
? 10대가 되자 항해 소설과 광시 그리고 좀 더 진지한 운문을 썼고, 남태평양과 하와이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내면서 환상에 빠져들곤 했다. … 재치 있게 모방하는 재능도 뛰어난 편이어서 열여섯 살 때는 벤 존슨의 작품을 훌륭하게 모방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405).
? 그는 평생 동안 과학에는 관심도 재능도 보여주지 못해서, 과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스노우의 설명법에 따르면 엘리엇이 두 학문적 문화 중에서 고대적인 성격이 더 짙은 인문학 전통에 철저히 몸을 담갔음을 알 수 있다 (405~6).
하버드 대학교와의 불화
? 엘리엇에게 하버드는 무미건조한 곳이어서 그는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꼈다. 엘리엇은 내면에서 일고 있는 상반되는 충동을 느꼈다 (407).
? 엘리엇의 하버드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서 시몬스의 “상징주의 문학 운동”을 만난 일이었다. 엘리엇은 산문적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예술을 일종의 종교로 간주하면서 시적 상징이 존재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영적인 비전을 추구하는, 나아가서 시란 외부와는 절연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시몬스의 문학관에 열광했다. 시몬스는 엘리엇의 관심을 프랑스 시로, 특히 별로 알려지지 않은 19세기 시인 쥘 라포르그 (Jules Laforgue)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407~8).
? 훗날 엘리엇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감사한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라포르그만큼 나에게 의미가 있는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408).
? 엘리엇은 최근에 발견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이보다 앞선 시기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있었다 (408).
?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보스턴 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고 있던 그는 거리가 수축하고 갈라지면서 자신이 거대한 정적의 심연 속에 빠져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환각적인 경험에 대해 훗날 엘리엇은 “신과 교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정신이 결정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409).
?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엘리엇은 점차 소외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시의 보스턴과 세인트루이스와 미국을 싫어했다 (409).
? 엘리엇은 다른 세상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매력을 느꼈다. 훨씬 더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철학 공부에도 마음이 끌렸지만, 구체적인 정서와 강렬한 감정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종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410).
새로운 삶
? … 재능 있는 여느 젊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저 새로운 지식과 인상을 흡수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411).
? 실제로 엘리엇은 유럽 체류 기간에 밤마다 끔찍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 때는 엘리엇이 마음 속에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이나 자기 나름의 철학과 표현 방법을 결정하느라 고심하고 갈등하는 시기였다 (412).
?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서 힌두교와 불교의 경전을 읽었고 계속해서 시를 썼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의 용어로 말하면 엘리엇은 다수의 정체성과 상이한 목소리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이 기간 동안 그의 필적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412).
? 대학원 시절에 엘리엇은 동시대의 영국 철학자인 브래들리의 저서를 탐독했다 (412).
? 이와 같은 영원한 철학적 문제는 엘리엇의 흥미를 끌었고, 그는 결국 이런 문제를 자신의 시와 글에서 다루었다 (412).
? 엘리엇과 브래들리는 둘 다 제의와 인간 실존에서 질서가 담당하는 역할에 관심이 많았고, 주관적인 체험에 흥미를 느꼈으며, 조화되지 못하는 신념들을 통합시키는 방도에 관심이 많았고, ‘개념적’ 지성을 믿지 않았다 (412).
두 시인이 힘을 합치다
? 젊은 엘리엇이 편안한 미국인과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예술가로 입신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만한 자신감이 필요했다 (413).
? 하지만 엘리엇에게는 아이다호 주 출신으로 1908년에 유럽에 이주한 젊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선례가 있었다 (414).
?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414).”
?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에 주로 영향을 받은 미국 시인의 작품이 어째서 영국의 문학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는지 당연히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중요한 변화가 서양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붕괴 및 도시화 등)… 이러한 파괴적인 동향은 세기말의 예술에 이미 암시되었다 (415).
? 하지만 대영 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416).
?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영국 문학계는 영국 태생이 아닌 작가들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 이들은 영어에는 당연히 능통했지만, 본래는 외국인인지라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감지하기 어려운 동향을 인식할 수 있었다 (416).
? 본토박이가 아닌 경계인 작가들은 영국의 예술 형식이 더 빠르게 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영국의 예술 작품에 국제적인 흔적을 각인시켰다 (416).
? <프루프록>과 두 번째 초기시인 <여인의 초상>은 엘리엇이 재능 있는 젊은 시인임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418).
? 사춘기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시인들은 급속하게 성장한다. 불과 몇 년 만에 자기만의 개성적인 목소리 (엘리엇의 경우는 여러 개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 엘리엇은 철학적인 목소리와 산문체의 평범한 목소리를 결합시켰고, 일상 생활의 언어와 이미지로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적인 주제를 표현 할 줄 알았다 (419).
? 일찍이 엘리엇은 모방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손쉽게 다양한 문학 양식을 패러디하곤 했다 (419).
유럽에 정착하다
? 아직 신혼이던 시절에 “지난 6개월 동안 장시를 쓰기에 충분할 만큼 온갖 일을 겪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엘리엇은 점점 더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황무지>를 쓰기 직전의 몇 달 동안은 신경 쇠약으로 고생했다 (421).
? 한동안 엘리엇은 젊은 예술가가 대개 그렇듯이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힘들게 살아 갔다 (421~2).
? 빚지지 않고 생활을 꾸려가느라 고생하면서 시도 많이 못 쓰고 보람 없는 결혼 생활을 고통스럽게 유지해 가는 와중에도, 엘리엇의 문학적 이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422).
? 널리 영향을 미친 비평서 <신성한 숲>이 1920년에 출간되었다 (422).
? 엘리엇은 영향력 있는 문학인과 지식인들의 모임으로서 포스터와 리턴 스트레이치, 버지니아 울프 등이 속해 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동반자였다. 그는 특히 울프에게서 작품 세계와 기질 면에서 친화성을 느꼈다 (423).
? 엘리엇의 성공에는 그 자신의 노력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 처음부터 엘리엇은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는 데 꽤 신경을 썼다. … 그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친분을 쌓기 위해 신중하게 노력했다 (423).
? “중요한 작가가 되는 데는 오직 두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작품을 써서 온갖 지면에서 제 작품을 볼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쓰는 거지요 (424).”
? 1914년 영국으로 영구 이주한 이래 1930년에 세계적인 시인이 될 때까지, 엘리엇은 자신의 경력에 중요한 활동을 할 때마다 세심하게 계획하고 깊이 생각했다 (425).
? 점잖고 신중한 태도며 별로 드러내지 않는 박학다식과 우아한 유머 감각 그리고 영원한 경계인의 표지는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425).
<황무지>: 작시 과정과 배경
? 엘리엇은 벌써 1914년에 ‘장시’를 쓰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후 몇 해 동안 단편적인 구절을 써서 모으는 일을 계속했다 (425).
? 엘리엇은 3개월 동안 거의 홀로 지내면서 3천 행에 육박하는 시의 초고를 완성했다 (427).
? 엘리엇은 1921년 말 즈음에 파운드에게 초고를 건넸고, 파운드는 이것을 가차 없이 편집했다는 점이다 (427).
? 독자는 이제 곤혹스러운 중년 남자의 언어만이 아니라,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427).
? 시를 쓸 무렵 엘리엇은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문학계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대단한 성공이 가능한 작품을 난삽하게나마 탈고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줄지가 의문인 작품이었다 (429).
? 그럼에도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가까운 두 사람이 작업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429~30).
? 중대한 혁신을 감행한 창조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엘리엇도 새로운 상징체계 혹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투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절망과 유럽 문명의 몰락을 담아낼 수 있는 시적 목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힘겹게 노력했다 (430).
? … 이번에도 역시 창조적인 인물이 자신의 가장 극적인 업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부모 자식 간이나 동기 간에 버금갈 만큼 매우 친밀한 사이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430).
? 엘리엇은 한때는 통합된 전체를 이루었지만 이제는 점차 조각나고 해체되어 무력화된 유럽 문명의 묵시록적 종말, 유럽 문명에 만연되어 있는 병적인 불안감을 시라는 언어 예술에 담아냈다 (431).
? 이러한 감수성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었다 (431).
<황무지>에 대한 반응
? <황무지>에 대한 초기의 서평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같은 다른 획기적인 작품에 비하면,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432).
? <황무지>는 당대의 다른 어느 시작품보다 동시대 교양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과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500행에서 다소 모자라는 시행에서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시행 하나하나 연 하나하나가 의미로 가득했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 독립적인 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굉장한 특성으로 인해, 독자는 하나의 거대한 시세계 (사실은 여러 세상)을 음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관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435).
?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35).
?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정조는 무모하고 헛된 전쟁 (엘리엇이 십여 년 전에 보스턴 거리에서 예기했던 환상)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유럽인의 정서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436).
? “<황무지>는 전쟁 직후에 심리적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들의 정신을 진실되게 포착한 작품이다.” 문학 비평가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평범한 독자들도 <황무지>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436).
? 엘리엇은 20대 초반에 <프루프록>을 썼고, 30대 초반에 <황무지>를 썼다. 이번에도 앞서 말한 10년 규칙이 적용됨을 볼 수 있다 (436).
? 시란, 특히 서정시란 젊은 시절에 문제작을 내는 경우가 많은 장르이다 (437).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로버트 펜 웨렌처럼 중년 이후에 대단한 작품을 쓴 시인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 역시 중년 이후에 정점에 오른 소설가나 작곡가, 화가에 비하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소설가 마샤 데이븐포트 (Marcia Davenport)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437).”
공인으로서의 엘리엇
? <황무지>가 출간되었고 엘리엇도 자기 세대의 대변자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가정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437).
? 엘리엇은 개인적인 불행을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 하루에 열두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일했다 (438).
? <크라이테리언>의 편집자로서, 그리고 출판과 관련해서 엘리엇이 다양한 사람들과 교환한 서신을 읽으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계에서 볼 수 있었던 특징인 음모와 다툼이 이 분야에서도 만만찮게 벌어졌음을 알게 된다 (439).
? 실상 재원이 충분치 않은 사람이 예술과 사상의 세계에서 중심 인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복잡한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다 (439).
? 그는 이런 것을 문학계의 필요악으로 여겼을 뿐이고, 사소한 다툼을 후배들에게 맡겨 두고 문학계의 원로 자리로 조용히 물러 설 수 있었을 때 오히려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던 듯하다 (439).
? 이후 남은 생애 동안 그는 파버 앤 파버 (Faber and Faber) 출판사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면서 유망한 젊은 시인들을 키워냈다. … 엘리엇은 1급의 편집자이자 뛰어난 회사 임원이었다 (439).
? 놀랍게도 엘리엇의 사상에는 점점 더 보수적인 색채가 짙어갔지만, 그 자신은 (스트라빈스키와 마찬가지로) 폭넓은 문학관을 견지했고 다양한 성향과 스타일의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440).
중년의 문학인
? 엘리엇은 당대의 영국 문학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고,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이웃 유럽 문학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식견을 갖고 있었다 (441).
?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할 분명한 근거를 내세웠다. 오직 국외자만이 총괄적인 평가를 내리는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인들이 편견 없는 맑은 눈으로 사태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헨리 제임스의 견해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인은 영국인과 다른 방식으로 유럽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43).
?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동시대 모더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만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443).
?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444).
?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내가 계속 놀란 점이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446).
?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은 한 분야에서, 드물게는 여러 분야에서 기존의 업적을 완전히 배워 익힌다. 이미 당대의 첨단에 이른 자들은 한층 더 나아가기를 열망한다. 이들은 발달 과정의 중요한 시점에서 금방 동료를 알아 본다 (447).
? 엘리엇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예술가를 존경했다. 당대의 걸출한 대가로 인정한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경외감마자 느꼈다 (448).
? “내가 존경하는 조이스는 외부의 자극에 초연하고 죽을 때까지 1급의 작품을 창조할 사람이다.” 그가 동료로 인정한 또 한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였다 (448).
만년의 엘리엇
? 내가 보기에 <4개의 사중주>는 창조성의 10년 혹은 20년 규칙에 부합하는 주요한 작품이다. … 예술 전통과 오랫동안 간직해 온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 <4개의 사중주>는 다른 거장들의 후기 작품과 달리 어떤 돌파를 보여준 작품은 아니다. … 언제나 과거에 큰 영향을 받았던 엘리엇이 이제는 아주 과거에서 살아가는 듯 했다 (451).
? 이들 후기 작품은 종교와 영혼의 문제를 다루며, 수학적인 구성과 구도, 희극과 비극의 혼합, 아이러닉한 태도 등을 특징으로 한다 (452).
? 엘리엇의 시가 생생한 인격화와 화자의 목소리가 특징인 극적인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주목받았는데… 무대에 올려 공연해도 좋고 그냥 읽기에도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이들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하지만, <칵테일 파티>와 <대성당의 살인>은 특히 자주 상연되었다 (452).
? 런던이나 뉴욕의 무대에서 그토록 대중적이고 위험성이 많은 예술 매체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위험에 내맡긴 것은 이미 시인과 비평가로 존경 받고 있었고 수줍음이 많았던 엘리엇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452).
? … <황무지>는 이 시대의 인장과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엘리엇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시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454).
? 우리가 다루는 현대의 거장들은 모두 여러모로 경계인으로 불 수 있다. 마사 그레이엄은 남성 위주의 무용계에서 혁신적인 안무가와 무용단장으로 활약한 여성이었고,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인과 남아프리카인에게 저항한 인도인이었으며,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한 러시아인이었고,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반유대주의 기운이 점차 고조되는 유럽에 살았던 유태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엘리엇처럼 단호하게 경계인으로만 살지는 않았다 (455).
? 경계인으로 살았던 엘리엇의 생애는 역설적이다. … 그는 어쩔 수 없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 (455).
? 분명히 엘리엇은 경계인이 되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경계인의 위치로 나아간 것이었다 (455).
? 비평가 도널드 데이비는 엘리엇이 영국에서도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런던의 소수 지인들과만 교제하면서 아웃사이더로 살았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에리엇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의 아웃사이더로 살았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엘리엇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의 아웃사이더, 타고난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서 스스로를 일컬어 ‘이방인’이라고 자주 불렀다 (456).
? 문학가 엘리엇의 목소리, 혹은 그의 말대로 그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경계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며,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456).
? 경계인이라는 느낌과 인생 전부를 걸고 경계성을 탐구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457).
? 이를 달리 말하면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457).
n 그럴 것 같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 속에 부분이 되어야 하지만, 그 세계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의 세계를 그 세계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이다.
? 엘리엇의 뛰어난 작품은 경계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출현했거니와 그런 빛나는 업적을 계속 쌓기 위해서는 그가 원히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더라도 경계인의 자리를 줄곧 지켰어야 했을 지 모를 일이다 (457).
<간주곡 2>
? 세 명의 예술가는 통상 20세기 예술사에서 함께 묶여서 설명되곤 한다. 모두 1880년대에 태어나서 1900년대 초반에 각기 선택한 분야에서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군림했고 혁신적인 작품을 생산했는가 하면 동시에 전통에도 밀착해 있어 신고전주의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458).
? 세 예술가는 젊은 나이에 예술 중심지로 이주했다. …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예술적 업적은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들과 가까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458).
? 이들이 중년에 들어 부르주아적 삶에 굴복했다는 사실이나… 젊은 사람들이 그들 인생의 측근에서 활기를 되찾아주는 역할을 한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458).
? 마지막으로 그들은 창조력의 원천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일종의 협약, 아주 인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459).
? 예술가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460).
? 그렇다면 이 세 인물의 창조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특정 장르에서 새로운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들의 변화하는 예술적 비전을 반영하는 창조물을 축적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이다 (461).
? 만약 이들이 다른 시대를 살았다면, 혹은 전혀 다른 성격을 타고 났다면, 유서 깊은 전통에 안주하는 평범한 장인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 젊은 나이에 해당 분야의 상징 체계를 습득하고 이전에는 전혀 시도된 바 없지만 일단 탐험이 시작되자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동시대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그 상징 체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했다 (461).
? 좀 더 거리를 두고 살펴보면, 앞선 시대 작품들과의 연속성도 감지할 수 있다. … 이들 혁신가들 사이에는 인상적인 유사점이 있다. 파편적인 요소와 형태 자체에 대한 관심, 일상의 세속적인 삶에서 겪는 긴장, 원시에의 동경, 과거의 무거운 주제, 세속의 사소한 일들과 고상한 전체 주제 사이를 왕복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462).
? 우선 이들은 장인 정신이 투철한 예술가였다. 매일같이 작업실에 들어가 거의 홀로, 완성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씩이나 걸리는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품은 예술 수단과 장르의 실험을 통해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예술 수단과 예술 장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세기 동안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이들 혁신적인 예술가가 새롭고 낯선, 어쩌면 관객들에게 충격을 미칠 수도 잇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462~3).
? 이러한 활동에 의해 예술가들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셈인데, 이 세계에서는 유력한 예술 중개인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정도로 이러한 접촉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과 분야와 장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스트라빈스키의 대규모 작품의 경우에서 아마도 그런 요구가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는 창조자의 삶에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었다 (463).
8장: 마사 그레이엄: 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 아마도 무용은 원초적인 예술 형식, 최초의 인류가 행했던 예술 형식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가장 최근에 근본적인 변화를 맞은 예술이 또한 무용이었다 (466).
세기 전환기의 무용 분야
? 발레는 예술 가운데 가장 정교한 예술 형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세기 초반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 무용단의 혁신적인 안무 덕분에 발레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발레뤼스는 무용의 형식을 새롭게 탐구하면서 고전 발레의 플롯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466).
? 일반적으로 무용을 현대에 진입시킨 최초의 인물은 이사도라 던컨으로 알려져 있다 (467).
? 이사도라가 대서양과 에게해 방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또 다른 무용계의 선구자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주로 동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468).
? 신비주의 성향에 물들어 잇던 세인트 데니스는 이사도라처럼 인간의 격정과 생명력을 몸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순수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468).
? 세인트 데니스는 미국 무용계에 큰 자취를 남겼다. … 무용과 테드 숀과 함께 일하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세대 현대 무용가들 대부분은 세인트 데니스와 숀이 세운 전설적인 무용학교 데니숀에서 훈련받았다 (469).
세기 전환기, 마사 그레이엄의 미국
? 그레이엄은 1911년 4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국적인 춤을 추는 로스 세인트 데니스라는 무용가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힌두교의 주신 크리슈나의 연인 라다로 분한 세인트 데니스의 유명한 모습이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었다 (471).
?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472).
새로운 경력
? 1916년 스물 두 살이 된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무용가이자 사업가인 테드 숀이 몇 해 전에 설립한 로스앤젤레스 유일의 무용학교인 데니숀에 입학했다 (472).
?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세인트 데니스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이 학생을 제자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입생을 숀에게 맡겼다 (472~3).
?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 밤 늦게까지 연습하기 일쑤였고,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지속적인 정진을 요구했다 (473).
? 신속하게 자기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은 거장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473).
? 그레이엄이 각광을 받게 된 첫 작품은 <소치틀>이라는 아즈텍 무용이었다 (473).
? 그레이엄은 대중적인 취향의 공연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접해보고는 이 길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거의 서른 살이 된 이 시점에서 그녀는 마음 속에 번지는 모든 의심을 접어두고 프로이트나 피카소에 비견할 만한 태도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474).”
? 그레이멈은 푸른 색의 바탕에 붉은 물감을 튀기듯 칠한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나는 이 그림처럼 춤을 추겠다” (475).
새로운 무용
? 1926년에서 1935년까지의 시기는 미국과 서양의 무용이 역사상 전대미문의 ㅅ장을 이룬 시기였다 (476).
? 1927년 그레이엄의 <반역>은 인간의 불의를 직접적으로 묘사해서 관객에게 충격을 가했다 (477).
현대 무용의 애매성
? “오늘날의 삶은 신경을 자극하고 날카롭게 후비는, 뒤죽박죽 엉켜 있는 삶이다.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 내 무용에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삶이다 (480).”
? 현대 무용은 호화로운 발레와는 대조적으로 세속에 뿌리 박고 장식적인 요소를 떨궈내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다루었다 (481).
현대 무용을 장려한 장
? 그레이엄과 그녀의 동료들이 무용 분야를 새롭게 다지고 있을 무렵, 일군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새로운 무용 형식을 판단하는 장을 스스로 형성했다 (482).
공동작업 시도
? .. 그녀의 삶에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오랫동안 데니숀 무용단의 반주자이자 작곡가 및 비공식적인 스승이었던 루이스 호스트가 바로 그 사람이다 (487).
? 무엇보다 그는 그레이엄을 위한 곡을 쓰고 싶어했고, 작곡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기꺼이 누그러뜨렸다. 호스트는 그레이엄에게 모든 방면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487).
?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분신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고 동료로서 매우 급진적이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조언을 얻었다.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연인이자 조언자로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걸맞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488).
1930년대 초반의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
? 1930년경 다른 젊은 미국 무용가들과 협력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그레이엄은 현대 무용의 적통을 확립했다 (489).
? 하지만 그레이엄은 창조력이 풍부한 여느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반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489).
? 그녀는 인디언의 대지에 밀착한 삶과 영적인 삶을 중요시하는 성향, 그리고 전통적인 인디언의 세계관이 스페인과 기독교 문화와 혼합된 양상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489).
? 남서부 지방에 머물렀던 경험은 1930년대 초반의 작품, 특히 <원시제의>와 <바쿠스의 사도>, <원시송가>등에 영향을 미쳤다 (490).
? <원시제의>는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인디언과 스페인 문화가 혼합된 기념 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그레이엄은 의식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려고 하는 대신 원시적인 삶의 힘과 에너지를 포착하여 그 정수를 표현하려고 했다 (490).
?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그레이엄 본인에게나 당시의 무용계에서 새로운 경지에 오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493).
? 마사 그레이엄은 다재다능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녀는 비극뿐만 아니라 패러디와 희극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과시했다 (493).
미국적 무용을 창조한 시기
? 미국 문화에 깊이 빠져든 그레이엄은 미국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찬미하고 풍요롭게 했다. 미국적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미 10년 동안 무용 무대에 올랐더 그녀였다 (495).
? 그레이엄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는 <프론티어>는 미국 문화를 아낌없이 수용한 작품이었다 (496).
? 그것은 “순수한 미국, 솔직하고 자유로운 미국, 불굴의 의지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미국인의 정신”이었다 (498).
? 이 무렵 그레이엄은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498).
? 이들 작품에서 그리고 이 시기 (1935~45)의 다른 작품에서 그레이엄은 자기만의 형식을 마스터한 절정의 기량을 보였다. 그녀는 무용의 표현 방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표현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희극과 비극, 동시대와 고전, 허구와 역사, 노골적인 관능성과 성적인 억압을 두루 표현하면서 인상적인 작품을 연이어 내놓았다. 자기를 복제하고 반복하는 진부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면서 참신한 새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가끔은 신랄한 비판에 의욕이 꺽이기는 했어도 다시 도전할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502).
? 호킨스는 발란쉰의 무용 전통에서 훈련 받은 뛰어난 젊은 무용수로서 그레이엄의 연인이 되었고 짧은 기간 그녀의 유일한 남편이 되었다 (503).
? 그레이엄이 세계는 다른 쪽으로도 확대되고 있었따. 그녀는 배우 캐서린 코넬, 시인이자 극작가 아치볼드 맥리쉬와 함께 공동으로 극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504).
? 남자 무용가들, 특히 그레이엄의 연인 호스트가 무용단에 합류한 것은 공연 가능한 작품의 폭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그레이엄에게 성적 열정의 세계를 탐구할 기회를 제공했다 (504).
? 남자들의 합류는 그에 걸맞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네 명의 여자 무용수들이 얼마 후에 무용단을 떠났던 것이다 (504).
? 전기작가 도널드 맥도너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엄이 창작의 방향을 새롭게 취할 때면 언제나 이런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원이 꼭 생겨났다 (504).”
?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이라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아마도 가장 의미폭이 넓은 작품일 것이며 불후의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505).
? 전후기의 작품을 통틀어 그레이엄의 무용 대부분이 중심 인물의 감정과 관념을 표현하는 데 집중돼 있는 반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인생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507).
인생의 굴곡과 부침
? 어떤 분야에서든 미국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여성들의 권리가 얼마나 미약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레이엄이 스물 여섯 살 때인 1920년에 비로소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508).
? 그레이엄은 여성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옹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비치는 자기 모습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비판을 견뎌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조 활동에 전념했다 (508).
? 무용가로 나선 초기에 겪었던 우울증이 1940년대 후반에 재발했다 (509)>
? 1958년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호스트와 호킨스가 실질적으로 떠난 마당이었기에 그레이엄은 세상 천지에 완전히 혼자 남은 것처럼 보였다 (510).
? 엘리엇이나 피카소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위기 체험은 그레이엄 예술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다 (510).
? 그레이엄은 미국적 주제나 작품의 밝은 면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고전 전통, 특히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510).
? 무용가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항상 <이단자>와 <비판>, <황홀경>의 무명의 주인공에서 에밀리 디킨슨과 에밀리 브론테와 같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인상의 여인상을 창조했다. 이제 그녀는 이러한 측면을 종합해서 인상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던 것인데,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무자비한 여주인공들의 혼란스런 감정 및 정신 상태와 갈등을 무대 위에 펼쳐냈다 (510).
? 많은 관객들이 그리스의 전설에 기반한 이들 작품을 마사 그레이엄의 가장 기념지적인 작품으로 여긴다 (512).
? 그리스 문화에 영향 받은 시기의 작품은 여전히 강렬한 인상과 극심한 고통을 전달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특히 디오니소스 기질을 가진 사람들과 인생의 어둡고 비극적인 양상 및 늙은 여주인공의 생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513).
? 그레이엄은 7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 시기의 작품을 공연하는 무대에 올랐는데… (513).
? 그레이엄은 신화적인 주제를 무용에 도입하면서 소위 신고전주의적인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가 20년 전에 이미 통과한 단계였다 (513).
?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에게 신고전주의 시기란 일종의 휴지기이다. 그들은 이 기간 동안 좀 더 가벼운 주제를 다루거나 신중한 태도로 관습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반면 그레이엄의 고전주의 시기는 오히려 다른 어떤 시기보다 모든 것을 통괄하고 자기의 진면목을 발견해가면서 정교하게 작품 활동을 한 상당히 오래 지속된 시기였다 (514).
? 이 시기는 또한 그레이엄이 저작물에 관심을 많이 쏟은 시기였다. 그녀는 그리스 고전 및 고대를 다룬 많은 저작을 풍부하게 읽었을 뿐 아니라, 신화와 제의, 무의식을 다룬 저서, 특히 프로이트와 융 및 이들 학파의 저서를 탐독했다 (514).
무용가의 삶
? “300년 동안 발전되 발레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다. 나는 발레 자체와 싸운 적이 없다. 다만 고전 발레의 경우는 뭔가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 특히 강렬한 극적 상황이나 열정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이런 부족함 때문에 내가 하는 종류의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520).”
? 그레이엄은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520).
?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니진스키는 단 한 번의 탁월한 도약을 위해 수천 번이나 도약 연습을 했다 (521).”
?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오든 역시 야심만만한 젊은 시인에게 비슷한 충고를 한 바 있다. “시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521.
?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현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그레이엄도 다른 사람들의 구상과 이미지를 원용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 (523).”
? “… 우리가 읽고 마음 깊이 흡수한 것이 보석처럼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겁니다 (524).”
? “나는 무용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무용가로 선택된 것이다 (524).”
? “…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 없이 오직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 없이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524).”
? 그레이엄의 무용 대부분은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힘과 열정을 겸비한 저명한 여성, 한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524).
? 다재다능한 배우가 그렇듯이, 그레이엄도 <모든 영혼은 서커스이다>의 우스꽝스럽고 산만한 여성에서 <마음의 동굴>의 사악하고 악독한 메디아에 이르기까지 자기 내부에서 다양한 성격적 특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525).
? 이러한 인물들을 창조하면서 그레이엄은 인간의 의지력에 관해서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참고했고 무의식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저작을 읽었다 (525).
n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역시 모든 예술가들은 인간의 원형인 신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니체를 거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부님을 통해서 이제라도 그 길을 가고 있음이 감사하다.
? 그레이엄은 인생을 모두 작품 활동에 바쳤다. “마사는 자신의 삶에서 모든 감정적 애착, 모든 집착, 모든 위안 그리고 여가 시간까지 배제시키려고 했다. 여기엔 가족과 아이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그녀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아낌 없이 바쳤다. 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525).
? 만약 그녀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특권을 누려야 했다면, 세속적인 즐거움과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희망을 모두 무용의 제단에 바쳐야 했다 (525~6).
? 그레이엄은 헌신과 대담함이 부족한 사람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다. “누구나 실패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 한 가지 대죄가 있다면 그건 범용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526).”
? 코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용단에 소속해 있으면, 마사는 당신을 위해 죽는 시늉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무용단을 떠나는 순간 당신은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된다.” 드 밀은 더욱 잔인하게 말한다. “그레이엄은 어떤 아이디어나 사람과 끝장이 났다고 생각하면 그것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제거한다. 그리고 그레이엄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526).”
n 그녀의 삶은 곧 무용이란 건 잘 알 것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과연 그녀가 행복했을까…하는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 1958년 그녀가 64살이었을 때 또 하나의 빛나는 작품이 탄생했다 (클리템네스트라,라는 무용극) 527.
? 그레이엄은 이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 능력과 여전히 소름이 끼칠 만큼 훌륭한 안무 능력을 결합하여 거장다운 솜씨를 발휘했다 (528).
? 그레이엄의 후기 작품은 대체로 두 범주로 나뉜다. 하나는 영혼이 포박당한 영웅적인 인물을 진중하게 다룬 연극적인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그레이엄 자신의 초기 작품을 희화하는 작품까지 포함하는 다소 가벼운 시적이고 공상적인 작품이었다. 후기 작품의 전반적인 기조는 신고전주의적인 향취를 지녔다 (528).
쇠퇴와 갱생
? 1960년대에 이르러 마사 그레이엄은 사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529).
? 그리고 1970년의 어느 날 <버크셔 이글>과 <뉴욕 타임스>에 그녀의 허락 없이 마사 그레이엄이 은퇴를 선언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531).
? 하지만 1973년 그녀는 무용단의 감독으로 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531).
?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안무의 중심 인물이자 존재의 이유로 여기지 않는 안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532).
? 더 중요한 것은 그레이엄이 마침내 그녀의 뛰어난 작품 일부의 재연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533).
? 무용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그레이엄은 자선가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533).
? 1991년 그레이엄이 사망할 당시에도 재정 적자는 상당히 심각했고 그레이엄 무용단의 운명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채로 남게 되었다 (534).
? 마사 그레이엄의 오랜 생애는 20세기 전체와 거의 겹친다. 20세기는 미국이 농업 위주의 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으로 발전하고 세계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시기이다 (534).
? 미국은 전통적인 예술 (회화와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현대 예술 (영화와 방송 매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점차 영향력이 커졌다 (535).
? 무용보다 더 극적으로 추세가 변한 분야는 없었다. … 20세기의 무용 관련 이야기라면 단연 현대 무용의 발전을 꼽아야 한다 (535).
? 반세기를 넘는 기간 동안 그녀는 무용의 지도자이자 영감이었으며 양심이었다 (535).
?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동료 애그니스 드 밀은 아마도 그레이엄의 업적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한 동시대 논평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100년 동안 현대 예술을 형성한 다섯 예술가를 고른다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벨라 버르토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마사 그레이엄이라고 생각한다 (536).
? 무엇보다도 그녀는 모험을 꺼리지 않았다. 현재의 영예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새로운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시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538).
? 모든 증거를 통해 볼 때 감정과 사생활 면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런 가혹한 희생은 특히 선구적인 여성들에게 더욱 심하게 요구되었다. 그레이엄은 중요한 시기에 호스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가 맺었던 파우스트적 계약은 개인적인 행복감이나 친밀한 인간관계의 희생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