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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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마하트마 간디: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 1600년에 영국의 동인도 무역 회사가 설립되었고, 10년 후에 영국의 왕은 아시아 전역에서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이 회사에 부여했다 (542).
도덕적인 소년 간디
?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한 지 250년 후, 그리고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지 겨우 10년 후인 1869년에 아라비아 해에 면한 포르반다르 지방에서 모한다스 K. 간디가 태어났다 (543).
? 간디가 성장한 사회는 종교와 정치 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543).
선택의 연속
?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하기로 한 것은 금기시된 길을 가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47).
? … 간디 역시 먼 타향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었다. 처음에 그는 새로운 세상의 피상적인 측면에 매혹당했다 (548).
? 멋쟁이의 삶에 매혹된 시기는 비교적 짧게 끝났지만 온갖 부류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좀 더 오래 지녔다. 간디는 힌두교 경전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 서적도 풍부하게 읽었다. 그는 신지학이나 평화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념 운동에 대한 지식도 쌓았다 (548).
?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 3년을 지낸 경험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념과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549).
? 이러한 세계주의적인 성향에서 그는 서유럽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소련의 지도자 레닌과 닮은 면이 있는 반면, 조국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사회에 대한 직접 경험이 부족했던 마오쩌둥이나 스탈린과는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달랐다 (550).
? 라지찬드라라는 정신적 스승과 같은 인물과 함께 시간을 보낸 덕분에 간디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계속 힌두교도로 남고 변호사로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550).
? 마침내 남아프리카의 더반으로 떠날 기회가 생겼다. … 여기서 우리는 간디 성격의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550).
남아프리카에서의 성숙
? 나탈 주의 더반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에 간디는 트란스발 주이ㅡ 프리토리아 행 기차를 탔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 승무원은 간디에게 3등칸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간디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간디는 기차 밖으로 쫓겨났고, 추운 대합실에서 밤새 몸을 떨어야 했다 (551).
? 그는 부당한 대우에 점점 더 화가 났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이 2등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551).
? 만년에 간디는 자신이 남은 인생 동안 매진하게 된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했다 (552).
? 당시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지위는 불투명했다 (552).
? 법리상으로는 인도인은 유럽계 주민과 동등한 시민으로 여겨졌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멸과 착취의 대상인 ‘쿨리’로 취급 받았다 (552).
? 그는 자신이 결성한 모임에서 프리토리아의 인도인들에게 그들이 학대받는 소수자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553).
? 이후 20년 동안 간디는 활발한 정치 활동에 끊임없이 참여하게 되는데, 모든 활동은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553).
? 힌두교 교리에서는 가장이 어느 시점이 되면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종교적 고행자로 은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소위 바나프라스타가 그것이다. 간디는 자기의 인격에서 바로 이러한 측면을 제대로 계발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556).
n 바나프라스타: 힌두교에서 바람직한 삶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인생의 네 단계 중 3기에 해당한다. 1기는 독신 학습기 (brahmacharya)로서 결혼하기 전까지 경전을 공부하는 기간이고, 2기는 결혼 가정기 (grihastha)로서 경전 공부가 끝난 후에 결혼해서 직업과 가정적 의무에 충실하는 기간이다. 3기가 바로 산림 은둔가 (vanaprastha)로서 이 때는 가정적 의무를 모두 완수한 후에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은거하여 종일 명상에 전념한다. 4기에는 유랑 승려기 (sannyasa)로서 모든 업의 끈을 끊어버리고 유랑하는 탁발승이 되어 해탈을 찾아 나선다 (556).
? 1905년경 그는 약간 다른 성향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히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의 사회 이론가 존 러스킨과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저서와 미국의 사회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에 관한 글을 읽어 나갔다. 곧이어 간디는 적극적 실천가답게 자신의 사상과 종교를 직접적으로 실행할 길을 찾아 나섰다 (556).
? 간디는 의식적으로 단순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매일 수행을 하며 음식을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건강과 의학 치료에 관심이 많아져서 막내 아이 출산 때에는 자신이 직접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1910년에 그는 요하네스버그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개간지에 1,100 에이커의 톨스토이 농장을 세웠다 (557).
? 그는 자기 절제, 즉 브라마차리아 서약을 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소유물을 없애고 가난하게 살면서 성욕을 절제해야 한다. “아이를 낳고 돌보는 것은 공적으로 봉사하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 되었다”고 훗날 그는 회고했다 (557).
? 아마도 간디는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서 도덕적 권위를 얻지 않으면, 자신이 인도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인 실천가로 활동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557).
? 고립된 작업을 하는 창조자들 역시 사적으로 이러한 맹세를 할 수 있지만, 대중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실행하면서 아주 공개적인 방식으로 파우스트적 계약을 실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58).
? 가장 중요한 것은 간디가 ‘사티아그라하’ 즉 얼마 후에 인도로 돌아가서 완성하게 될 진정 새로운 저항 방법을 실천한 일이었다 (559).
?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지 수동적인 저항에 그쳐서는 안 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559).
인도의 현지 사정을 알아가기
? 간디는 유년기를 인도에서 보냈고 자주 고국을 찾았지만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돌아온 그는 이방인이나 다름 없었다 (561).
? 당시 간디와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인도 문제에 관한 조언자는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라는 국민회의당의 한 지도자였다 (561).
? “나는 영국 법을 어겨야 했다. 내가 복종하는 것은 그보다 더 높은 법, 내 양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영국에 대한 첫 번째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563).”
? 각각의 진리 실험은 벽돌이 되어 조금씩 틀이 잡혀가는 사티아그라하라는 건축물에 쌓여갔다 (563).
? 요컨대 나는 인도 중서부 지역의 아메다바드에서 1918년에 있었던 사건이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의 탄생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에릭 에릭슨의 지적에 동의한다. 간디는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위대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해서 그를 존경하는 조국의 민중들로부터 점차 ‘마하트마’라 불리게 되었다 (564).
? 이것은 사적인 목적이 아니라 공적인 대의를 위한 간디의 첫 번째 단식이었다. 간디는 이 새로운 무기의 극적인 성격과 잠재력 그리고 그 단순함을 새삼 깨달았다 (566).
?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사상을 형성하는 시기에 새로운 언어, 말하자면 새로운 공리체계로 이루어진 원칙을 창출하고 있었다 (568).
사티아그라하의 원칙
? 그가 후세에 남긴 불후의 유산은 영국의 압제에서 인도를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특수한 업적이며 동시에 비폭력 저항을 통해 아주 곤란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완화시킬 수 있다는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주장이었다 (573).
? 간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편에 독서와 저작과 성찰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몸소 용기 있는 모범을 보이는 지도력이 있는 두 가지 활동의 항구적이고도 생산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573).
? 여러 차례 신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간디는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밝힌 다 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강조되는 진리와 도덕성, 그리고 영적인 갱생에 대한 추구가 자기 존재의 근본이라는 것이었다 (575).
? 에릭슨이 그의 간디 연구에서 강조한 것처럼 종교적인 혁신가란 자신의 개인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해답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넓은 공동체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575).
? 그는 종교적 비전을 갖는다는 것을 인간됨의 표지로 여겼다. 따로 마음 속에 심어둔 신학적인 믿음은 전혀 없었고, 주요 종교를 연구해서 각 종교의 장점과 한계를 식별할 것을 권장했으며 만물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포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576).
? “종교는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576).”
n 간디가 어째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진리란 인간에 의해 ‘종교’라고 이름 지어 지는 그 순간부터 세속화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종교가 정치라는 인간의 근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이루고 싶은 것, 지난 30년 동안이나 내가 애타게 갈망했던 것은 자기 실현, 신과 대면하는 것, 다시 말해 모크샤 (대체로 ‘신과 하나 됨’을 뜻함)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놀랍게도 신의 생각을 알고자 했던 아인슈타인의 교만한 욕구와 일맥상통한다 577).
n 굳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교만하다고 표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은 수행자들에게 명상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죠셉 캠벨이 신화라는 도구를 이용해 진리에 다가섰듯이 이 세상 모든 현자들은 자신만의 고유 방식으로 진리에 가까이 간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인간이 부르는 종교에 한정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신은 어떤 특정 종교 안에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안에 드리우고 계시기 때문이다.
? 사티아그라하의 신봉자는 폭력과 고통 혹은 위협을 통해 서로 대결하는 대신 몸소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상대방의 양식과 양심을 일깨운다. 이를 통해 진리파지자 (satyagrahis)는 상대방을 개심시키고 그들이 자진해서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577).
? 간디가 바로 보았듯이 사티아그라하는 정화의 형식이자 영혼의 일깨움이다 (577).
? 사티아그라하의 근본은 간디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다. 간디의 스승인 톨스토이와 소로뿐만 아니라 예수와 같은 종교 지도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에게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578).
? “사티아그라하의 실천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그가 어떤 제약 조건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복종이다. 처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복종이 공공의 행복에 본질적인 요소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복종하는 것이다 (579).”
? 사티아그라하는 우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한 설득 노력으로부터 시작한다. 초기 단계는 화해와 타협을 허용해야 한다. 아메다바드에서처럼 이 같은 중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단식을 결행하는 식으로 스스로 고통을 떠안음으로써 설득 과정에 돌입한다 (579~580).
? … 간디는 대단히 정밀하고 효과적인 저항 방법을 완성했던 셈이며, 이는 20세기 전반기에 인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거니와 이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고 확신을 갖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계 공동체에는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580~1).
? 사티아그라하의 유별난 점, 그리고 사티아그라하를 인간의 위대한 성취로 만든 요소는 그것이 실천적인 철학을 대표한다는 점에 있다 (581).
간디의 개인적인 측면
?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의심과 파괴적인 행동을 버리도록 고무하는 매개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적인 행동을 하고 글을 썼다 (583).
? 간디의 실험에는 성자와 같은 검소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소유를 물리치고 검소한 식사를 했으며 알몸이나 다름 없을 정도만의 옷을 걸쳐 입으며 되도록 안락한 삶을 멀리 했다. 금욕과 극기에 관한 인도의 신화에 합치되는 성관계 중단 결정은 대부분의 국외자들에게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한 편이었다 (3장에서 언급했듯이 프로이트 역시 성관계를 중단하기로 결심했었다 584).
? 간디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의학이나 건강, 음식, 식이요법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인 것도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특히 물질적 자원이 빈약한 처지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584).
? 가장 극단적인 극기 형식은 단식이었다.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닌 인도의 자기 정화의 수행법이었으며, 그의 어머니가 무수하게 실행했던 방법이었다 (584).
?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는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586).
? 간디의 행동거지나 생활방식은 그의 민중들에게 공명을 일으켰다. 검소한 옷차림과 실 잣기, 염소 젓 마시기, 채식주의, 금욕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588).
?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말했고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정신과 영혼과 몸은 일치했다 (589).
? 가장 친밀한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은 어쩌면 대중을 상대하는 일에 위대한 재능을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부수물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591).
n 그렇다기 보다는 간디는 어느 정도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는데 가족들은 그 수준에 도달해 있지 못해서 오는 갈들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영혼의 수준에 간극이 있었던 것 같다.
? 간디가 나누었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신과의 대화였다 (591).
? 간디를 폄하한 발언으로 가장 유명한 (악명 높은) 것은 아마도 윈스턴 처칠의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영국 왕이자 인도 황제의 대리자들과 협상하기 위해 총독 관저의 계단을 올라가는 선동적인 탁발승”이라는 경멸조의 발언일 것이다 (592).
n 너무나도 세속적인 처칠의 말이다. 말해 무엇하리…
?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폭력의 즉각적인 효용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 하지만 부처의 비폭력 행위의 효과는 오랫동안 유지되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진다 (593).”
민족과 세계의 지도자
? 1930년의 이른바 소금 행진은 인도 독립 운동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593).
? 소금이 글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였던 인도에서 모든 소금에 부과된 세금 때문에 벌어진 이 행진은 보스턴 차 사건을 연상시킨다 (593).
? 소금 행진에 담긴 상징성은 인도인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동조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돼 있었다 (595).
? 4월 6일 아침 간디는 바다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자연산 소금을 약간 집어 올렸다. 이 행동으로 그는 원칙상 범죄자가 된 셈이었다. 정부를 위해 소금을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95).
? 총독 관저의 다과회에 초청된 간디는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몸에 지니고 간 불법 소금을 차에 집어 넣었다 (598).
? 소금 행진은 여러 의미에서 효과적인 사티아그라하의 모델을 상징한다. 우선 간단하고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대의에 따라 조직한 운동이었고 부당한 세금에 대항한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598).
n 결국 대중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대중의 공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598).
? 인도로 돌아가는 와중에 간디는 두 가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나는 영국이 도덕성이나 자비심으로 자발적으로 인도를 포기할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인도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여러 파벌들, 특히 이슬람교 세력과 힌두교 세력이 쉽사리 서로의 차이점을 묻어버릴 거라고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601).
? 20년 동안 인도 정치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후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간디는 주목하는 관심사가 다소 달라졌다 (602).
? 새로운 인도에 대한 계획, 그가 ‘영적인 사회주의 (spiritual socialism)’ 혹은 건설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부른 계획을 상세하게 마련했다 (602).
? 간디는 자신이 물질주의와 폭력성과 같은 것으로 본 산업주의와 서구 사회를 거부하고 인도의 70만 촌락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미래의 인도를 만드는 길을 찾아냈다 (602).
? 간디의 새로운 이상은 공동체의 통합, 불가촉 천민 제도의 제거, 충분한 카디 (손으로 짠 직물) 생산, 기본적인 아동 교육 시설, 성인 교육 활성화 등으로 특징된다 (603).
? 독립을 얻는 과정에서 주된 장애물은 놀랍게도 영국이 아니라 인도 내부에서 생겨났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간의 오랜 갈등이 독립 투쟁의 마지막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불세출의 이슬람 지도자 모하메드 알리 진나는 힌두교 일파가 지배하는 하나의 인도에서 자신과 이슬람 민중들은 살지 않겠다는 의사를 뚜렷이 밝혔다. 탁월한 전술을 구사하고 자신의 입장을 단호하게 지킨 진나는 결국 인도를 두 나라로 가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인도 이슬람교도의 다수파는 파키스탄을 고국으로 갖게 되었다 (604).
? 간디는 축하할 이유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는 “조문을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604).
? 그의 마지막 단식은 대영제국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동포, 자신의 족구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견지하지 못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독립 바로 후에 간디는 옛날의 선지자처럼 이 지방 저 지방을 편력하면서 설교와 호소를 통해 폭력의 물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604~5).
? 때로 간디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도덕적 권위는 여전히 막강했고,그의 적들조차 자신들의 빗나간 외고집이 간디가 단식으로 인해 죽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605).
? 하지만 간디는 끝내 폭력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광신적인 힌두교 신자인 나투람 비나약 고드세가 일흔아홉 살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권총을 쏘았다 (605).
? 사티아그라하의 유산은 오늘날의 인도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607).
? 많은 인도인들이 한결같이 간디를 존경했지만 그의 원칙은 오히려 미국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나 영국의 그린함 공조 행동 그리고 중국의 학생 저항 운동에 더욱 잘 적용되었다 (607).
? 그럼에도 간디는 그의 시대와 상황에서 최선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널리 인정된다. 간디는 인도 사상뿐 아니라 서양의 사상도 받아들여서 그 자체로 효과적인 행동 프로그램이기도 한 독창적인 철학을 창조했다 (607).
? 아마도 간디의 유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인물일 터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간디가 “억압 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건전한 유일한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608).
? 아인슈타인이 추상적인 사고 실험을 통해 자연 질서를 통찰했다면 간디는 적절한 변수를 통해 인간을 통찰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이러한 유사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간디는 일반적인 권모술수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정치 영역에서 더 높은 수준의 인간 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싸운 유일하게 참다운 정치가였다 (609).”
<간주곡 3>
?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 마하트마 간디 (610)
? 그녀는 또한 재능 있는 동료들과 함께 현대 무용을 주재한 작가와 비평가 그룹 그러니가 새로운 장의 형성을 자극했다 (610).
?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일흔 살에 포기해야 했지만 거의 눈을 감을 때까지 안무와 공연을 스스로 맡아 했다 (610).
? 그레이엄에게 공연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었던 반면 간디에게 실행이란 정치와 사회 및 종교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614).
? 간디를 제외한 여섯 명의 창조자들은 문화 분야의 정상에 올라 그 분야를 쇄신한 인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소 억지를 부린다면 간디에게도 한 분야를 지정해 줄 수 있다. 종교 리더십이나 정치 혁명 혹은 철학 저술과 같은 분야 말이다 (614).
? 이들 창조자 가운데 오직 간디만이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 속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력과 재능과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는 그런 이야기와 사상과 존재 방식을 창조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한 분야를 쇄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간디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614).
? 이런 이유로 간디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비록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 그러했듯이, 그의 종교적, 정치적 혁신이 그의 선행자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참으로 다른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615).
<제 3부: 창조성의 조건>
10장: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구성적 틀 ? 재론
? 개인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분석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발휘한 창조성과 연관하여 각 인물의 유년기를 검토한다는 점. (2) 생애 전반에 걸쳐 창조적인 능력이 발달하는 국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 (3)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획기적인 업적을 내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620).
? 비동시성이 이러한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수준에만 이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인물을 키우고 창조 과정을 촉지하고 창조물의 생산을 고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620).
전형적인 창조자의 초상
? 집안에는 종교적인 분위기까지는 아니라도 도덕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서 E.C (Exemplary Creator)는 엄격한 양심의 소유자로 자라나는데, 덕분에 스스로 가책을 받는 일이 많을 뿐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행실이 바르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리고 한 때는 종교를 거부했다가도 훗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623).
? 이제 아이가 자라서 청년기에 이르면 집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E.C는 이미 10년 이상 어느 분야를 완전히 통달하기 위해 노력한 상태이고 그 분야에서 거의 최전선에 와 있다 (623).
? 청년이 된 E.C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한 중심 도시로 과감하게 이주한다. 그는 대도시에서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젊은 동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해당 분야의 이곳저곳을 탐사하고, 모임을 결성하고, 선언문을 발표하고, 서로 간에 자극을 주면서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하낟. E.C는 직접 자신이 선택한 분야로 직행하기도 하고 결정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경력을 다양하게 쌓기도 한다 (623).
? E.C는 다소간의 속도 차이는 있지만 관심이 가는 문제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 이 순간이 바로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E.C는 이제 동료들과 고립되어 홀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 이 중대한 순간에 E.C는 인지적, 정서적인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624).
? E.C는 혁신적인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흐름 (몰입의 경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특별한 계약, 즉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으려 한다 (624).
? E.C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언제나 작업에 몰두하는 편이다 (624).
? 엄청난 에너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있다면 그는 첫 번째 혁신을 이룬 지 10년쯤 후에 두 번째 혁신을 이룰 기회를 맞게 된다. 후속의 혁신적인 작품은 이전보다 근본적이지 않지만 훨씬 포괄적이고 E.C의 이전 작품을 긴밀하게 통합한 작품이기가 쉽다 (624).
?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E.C의 창조력도 한계에 부딪힌다. 이런 경우에는 젊은 동료를 통해 새로 젊음을 되찾기도 한다 (625).
주요 쟁점 ? 재론
? 이들이 보여준 지적인 강점이 서로 다른 것처럼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시기와 양상 역시 상당히 달랐다. 프로이트는 어릴 때부터 학문적인 문제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다운 소명을 발견했다 (627).
?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재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사교 생활이나 취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껏해야 일에 몰두하다가 한숨 돌리는 정도의 주변적인 의미밖에 없다 (628).
? 내가 아는 한, 이들 모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낙담하고 의기소침했으며 거의 모두가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린 적이 있다 (633).
?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들은 도착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내 작품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마치 고행자가 배를 할퀴는 마모직 셔츠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633).”
? 이들은 모두 억압적인 통제에 반발했다 (633).
? 젊은 시절에는 이처럼 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경계인적인 삶이 그들 앞에는 기다렸다. 일부 창조자들은 탄생의 조건에 의해 경계인이 되었다 (634).
? 우리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모두 인구통계상 경계인이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러한 경계인이라는 위치를 창조 활동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의 그런 경계인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작품 활동의 내용이나 방식을 결정했고, ‘기성 체제’에 편입될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 진로를 바꿔서 최소한의 지적인 주변성 (경계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635).
? 인지 심리학 계통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사람이 어느 분야를 기본적으로 통달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 이다 (637).
? 이어서 창조자는 자신의 혁신적인 도약과 타협을 한다. 혁신에의 열정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후속적인 혁신은 보다 폭이 넓고 종합적인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638).
? 두 번째 도약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창조자 개인의 재능과 포부보다는 해당 분야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638).
? 두 번째 10년이 지난 후에는 다른 종류의 기회가 생긴다. 관련 분야를 역사적으로 혹은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할 수도 있다 (639).
비동시성 평가
?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모두 ‘경계’에 존재하는 전율 혹은 몰입 체험을 하기 위해 비동시성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추구했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비동시성의 과실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656).
새로 발견한 주제
? 파우스트 전설이란 창조적인 인물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점에서 특별나지만 그런 재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모종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통념의 가장 유명한 판본일 뿐이다 (663).
? 프로이트와 간디, 엘리엇의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삶 역시 파우스트적 계약의 다른 모습이다 (664).
남은 문제들
? 합당한 인물을 선택했는가? (665).
? 적절한 분야를 선택했는가? (666).
? 지나치게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했는가? (667).
n 나는 인지적인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해석해서 정서나 종교, 영혼의 문제까지 다루려고 했다. ? 그러나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영성에 대해서는 저자가 그다지 통찰력이 없어 보인다.
? 정말로 창조성에 주목했는가? (667)
? 이 연구의 결론은 현대에 한정된 결론인가? (668).
<에필로그: 현대와 현대 이후>
문제
? 현대 (The Modern Era)라는 용어는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계몽주의 혹은 낭만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들 용어가 대략 1500년 이후의 여러 세기를 가리키는 것처럼, 현대라는 용어는 서양의 20세기를 지배했던 인물과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상들을 지칭한다 (670)>
? 대부분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은 현대의 결정적인 국면이 20세기 중반에 절정에 오른 이후로 서서히 퇴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미 포스트 모던 시대 혹은 아직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인류사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상태이다 (670).
? 앞으로도 나는 ‘현대’를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할 것이고, ‘모더니즘’은 예술 운동에만 적용할 것이다. 흔히 모더니즘을 계승한 문화, 예술 운동을 가리키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671).
배경
? 우리의 현대 거장들은 마치 강력한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 젊은 시절에 모두 유럽과 북미의 주요 도시로 이주했다. … 이런 도시들에서 미래의 거장들은 취향이 비슷한 젊은이들을 만나고 공부 모임이나 예술 혹은 과학 회합을 결성하고 인습파괴적인 잡지를 발간하거나 공연을 기획하면서 훗날의 창조적인 도약을 낳게 되는 지적 잉태 기간을 보냈다 (673).
? 버지니아 울프는 “1910년 12월 무렵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으며, 프랑스 작가 샤를 페기는 1913년에 “세상은 지난 30년 동안 예수 탄생 이후보다 더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676).
? 일단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든 암시적인 사태란 실제로 벌어지고 있던 일의 희미한 전조였음이 드러났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 파괴되면서 19세기에 살아 남았던 모든 낙관적인 전망이 산산이 무너졌다 (676).
? 영국의 사회 비평가 레너드 호브하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 우리가 허용했던 것보다 힘이 더 큰 역할을 하는 세상, 기본적인 안정성이 사라진 세상, 문명의 두터운 껍질을 뚫고 갑자기 권력에 대한 야만적인 욕망과 삶에 대한 냉담이라는 배후의 힘이 드러난 세상이 되었다 (676).”
? 역사가 위리엄 파프의 말은 더욱 단호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은 현대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이 분명해졌다. 그 효과는 아직도 소진되지 않았다 (676).”
? 이제 우리는 여러 인물들이 동일한 환경에 반응하게 된 중심 이유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와 미국, 스페인과 러시아와 같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인물들이 하나의 세계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 전달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 전쟁 직전의 점증하는 불안감 등 많은 요인이 현대 거장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677).
n 그렇다. 아마도 이 때부터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공동체, 즉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하나의 존을 형성하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후 냉전 시대를 겪지만, 이는 어느 정도 역사상 과도기적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다양한 분야의 현대성
? 1840년대 이미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예술의 현대적인 특질을 정의했다. 화가 콩스탕탱 기에 관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현대성이란 파편화된 삶이며 시간의 급속한 변화이고 조각난 경험이다.” “현대성이란 덧없고 우연한 것이다. 이게 예술의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파리에 살았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100년 후에 지적하듯이, 현대의 독특한 리듬과 특질 및 시공간이 출현한 곳은 파리의 도시 생활에서였기 때문이다 (678).
n 진리 또한 그러하다. 나는 포스트 모던 시대 인간들은 어쩐지 지금까지 그 어느 시대보다 영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수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도구를 활용하여 신 혹은 우주에 이만큼 접근했던 시대가 없었던 것 같다.
? 예술의 현대적인 요소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우선 과거 예술에 비해 플롯과 멜로디, 선종성 (Linearity), 기교, 규범적 형태, 분명한 도덕적 태도, 충실한 인물과 장면 묘사 등 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기대할 만한 특징을 경원한다는 점이다. 대신 순간적인 인상과 파편화, 강렬한 리듬, 날카로운 어조 등을 통해 일상적 경험의 느낌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러한 예술작품은 평범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 모르지만, 추상화 경향과 경험의 일반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형태적 요소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678).
? 현대 예술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맥락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전통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의 말대로 ‘새로움의 전통’을 창조하려는 단호한 노력이다 (678).
? 이처럼 현대 예술은 한때는 굳건하게 그어져 있던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현대 예술은 또한 대중과 관료제, 익명성과 공허함이라는 특정한 인간 조건을 문제시 한다. 그리고 이런 예술은 전통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혼합 역시 오직 엘리트 예술의 입장에서만 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자칭 니힐리즘과 ‘몽매주의 (ignorabimus)’와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679).
? 내 생각에 모든 창조적인 도약에는 겉보기엔 전혀 이질적인 두 영역의 결합이 있다. 하나는 관련 분야에 대한 철저하고 조숙한 통달이고, 다른 하나는 유년기의 의식과 관련된 이해 방식과 직관이다 (682).
? 예술 영역은 유년기와 관련된 부분이 많다. 현대의 예술 거장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이미 해당 예술 장르에 매료되었다 (684).
?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천재란 유년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685).
현대 이후
?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고양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모더니즘이 아이러니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이러니 이상이라는 것이다 (686).
? 두 번째 관점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전통을 거부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전통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686).
? 포스트 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개인적이고 문화적이며 역사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을 창조물에 재도입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686).
? 하지만 내가 보기에 소위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결정적인 특징은 의도적인 장르 혼흉이다. 역사적 선례와 관습에 대한 과감한 무시이며, 모든 진지함에 대한 도전이고, 스타일과 외양 및 정체성의 변화 무쌍이며, 혼돈스러운 표면 이면에서 어떤 의미나 구조를 찾는 노력의 포기이고, 창조와 해석의 무한한 자유이다. 그리고 도덕적 준거의 사라짐인데, <황무지>에는 이런 결론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은 그것을 미덕은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수용한다 (687).
? 이제 역사와 전통, 기존의 규범적 형식에 대한 도전은 더욱 자유롭게 되었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에 도전하는 대신,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폐기된다. 현대가 전통에 도전하는 대신, 역사라는 의미가 무시된다.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이 도발적으로 혼융되는 대신, 별개의 예술이나 문화, 전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변화나 전위 (아방가르드)에 대한 생각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이 이미 시도되었고, 모든 사람이 충격적인 예술에 싫증이 난 상태이다. 오늘날의 새로움은 내일의 상품 더미에 불과하다. 모든 권위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믿을 만한 준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해체주의’ 비평가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대상이나 텍스트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한다 (688).
n 한마디로 해볼 건 다 해봤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남은 것 뭘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근원을 더욱 파고드는 회귀 혹은 성장이 아닐까?
? 포스트 모더니즘을 좀 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더니스트들은 여전히 전통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 오직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만이 이러한 지적 껍질을 벗어 던지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경험을 숙고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688).
?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해방적인 사조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 편견과 선입견을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특권적인 인물이나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감수성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관점에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는 견해가 풍미하게 되었다. 철학자 스트븐 툴민의 견해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한 감수성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적이고 관용적인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는 위계적, 엘리트적, 권위적이며 이성과 감정 혹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근거 없는 이분법을 받아들인 시대였다 (689).
?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훨씬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다문화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모든 관념과 작품에는 정치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오히려 더 신앙적이고 권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689).
? 그렇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의 유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마치 시대와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처럼, 연령대와 유년기의 여라 단계를 무심하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아 단계로 퇴행하기도 하고, 유년기에 고착되기도 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중년에 들어서 아동기의 완고함이나 청년기의 신중하게 열린 마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전파하는 온갖 매체들 ? MTV, 디자인이 멋진 쇼핑몰, 테마 파크, 컴퓨터 문화- 은 온갖 집단과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689~690).
? 현대의 거장들은 과거의 짐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과거에 깊이 젖어 있었다. 그 과거가 종교든 역사든 전통이든 학문이든 혹은 이런 것들의 혼합이든 그들은 과거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심연 가까이 접근했지만 다시 뒷걸음쳤다. 점차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통의 존재 이유를 다시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즉 그들은 과거에 경의를 표했다 (690).
? 모더니즘은 자유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오직 역사와 선대의 속박을 인정한 상태에서 추구해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과거와 유년기를 부인하고 모든 형태의 속박을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의 뿌리를 모두 근절하려고 한다 9690).
? 하지만 예술 분야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경향에 대한 신랄한 반작용이 일어났다는 징조가 눈에 보이고 있다. 인간이란 어쩌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 장르 혼융의 방향으로 무한정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전통, 모더니즘과 역사주의,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와 인간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정체 혹은 퇴행적인 시기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