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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5일 10시 51분 등록
 

북 리뷰 [8] 열정과 기질


    책: <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지음. 임재서 옮김. 북스넛. 2004.

   원제: <Creating Minds>  Howard Gardner . 1993.



*** 저자에 대하여



하워드 가드너는 하버드 대학의 교육심리학과 교수이면서 보스턴 의과대학의 신경학 교수이다.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 이론의 창시자이기도 한 저자는 ‘마음의 틀’이라는 저서를 통해 다중지능 이론을 처음 제기했다. 다중지능 이론은 교육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바꾸어 놓았으며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나라에서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을 받아들여 교육체계를 바꾸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EBS를 통해 방영되었고 이미 상식수준의 지식이 되어 이해, 공감되고 있다. 다중지능 이론에 관한 많은 연구소와 단체가 전 세계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그는 1943년 7월 11일 미국 펜실바니아의 탄광도시인 스크랜턴(Scranton)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부모는 유태인이었고 독일에서 살았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는 어린 시절 꽤 유망한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남다른 학생이었는지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형식적인 음악 공부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음악 공부를 선언한다.

그는 고향 스크랜턴에서 줄곧 공부를 했으며, 1961년 하버드에 입학한다. 이는 그의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탄광촌의 학생이 하버드까지 가는 데에는, 적지 않은 스토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뒤 다시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와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했다.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가드너는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스턴 대학에서 박사 후(Post Doctor) 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이 가드너로 하여금 두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 문제들을 연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드너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피아제 이론이 인간의 인지 발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너무 좁게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다. 가드너가 주장한 내용은 인간의 사고 전체를 이끄는 한 가지 형태의 인지는 없으며, 적어도 일곱 가지의 지능이 있고 이들은 마치 파이 조각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가드너의 연구 대상은 두 부류이다. 하나는 일반 아동들과 영재아들, 또 하나는 두뇌손상을 입은 어른들이다. 가드너는 이 두 부류의 특성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중지능 이론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수백편의 논문과 저술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저서는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가드너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의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 연구소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이기도 하다. 프로젝트 제로는 인간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의 발달 과정을 근본적으로  추적 연구하는  인간개발에 관한 연구기관이다. 가드너는 줄곧 정신능력 발달과 교육에 관한 일관된 목표를 향하여 연구를 진행해 왔다. 25년이 넘게 이 연구소를 이끌어 온 가드너는 지능과 창조성, 교육방법론, 두뇌개발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들을 통해 인간의 창조적 기질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가드너가 다중지능 이론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83년 <마음의 틀- Frames of Mind: 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라는 저서를 통해서이다. 그가 소개한 다중지능은 아홉 가지 (언어 지능, 논리수학 지능. 음악 지능, 신체 지능, 공간 지능, 대인관계 지능, 자아 지능, 자연친화 지능, 실존지능)이다. 대부분의 인지 학자들이 인간의 지능을 언어 능력과 논리 분석 능력만으로 평가해 온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드너의 가설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존 듀이(John Dewey)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학 이론가로 평가 받고 있는 하워드 가드너는 지능이나 천재성, 창조성에 대한 기존에 사고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현대 교육학 이론의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


총 18권의 책과 수백 편의 학술 보고서를 발표한 가드너는

1981년에 맥아더 펠로우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1990년에는 미 교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그라베마이어상(Louisville's Grawemeyer Award)을,

2000년에는 구겐하임 펠로우십(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다.



-국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책


<마음을 틀 Frames of Mind> 이경희, 문음사

<20세기를 움직인 11인의 휴먼 파워> 이종인, 살림출판사

<비범성의 발견> 문용린, 해냄출판사 1999. 원서는 1997년

<다중지능: 인간지능이 새로운 이해 Intelligence Reframed> 문용린, 김영사

< Good Work> 문용린, 생각의 나무

<더 오래된 과학, 마음> 조원희, 여시아문

<열정과 기질 Creating Minds> 임재서, 북스넛 2004. 원서는 1993년

<체인징 마인드 Changing Minds> 이현우, 재인 2006. 원서는 2004년

<통찰과 포용 Leading Minds> 송기동, 북스넛








***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감역자의 글


5.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7. 이 책의 목표는 두가지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가드너는 개인(Indivisual)-일(The work)-타인(Other person) 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내부에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휘하는 성인으로 성장해 가지 못하고, 우선 그러한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 등)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며,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들어가는 글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지배한 실험정신


13. 이 책은 내 연구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 창조성이라는 현상과 역사적 실례(개별 사례)에 대한 평생 동안의 관심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는 정점이며, 인간의 창조적 기질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연구했다는 출발점이다.


제 1 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인가?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36. 일곱명의 현대적 거장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세가지 중요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다. 첫째, 나는 대체로 1885-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싶다. 이를 통해 그들 나름의 특별하고 종종 기묘하게도 보이는 지적 능력과 성품,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 그들이 제기한 창조적인 의제, 힘겨운 노력, 그리고 그들이 성취한 업적의 특성을 밝힐 생각이다.


43. 특히 엘리엇은 다른 누구보다도 현대의 창조적인 인물이 지니는 경계성(marginality)을 고려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이한 문화권에 끼어 있었고 다양한 시대에 걸쳐 살았던 셈인데, 정신 장애에 가까운 불안과 혼란을 겪었다. 게다가 엘리엇은 분명히 미국의 주류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인물이 스스로 경계인이 되는 사례의 시금석과도 같다.


 48. 물론 이들 각자는 지능의 전 영역을 골고루 지녔고, 자신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지능을 두루 활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저마다 우수한 지능이 서로 달랐고, 각자의 창조적인 도약 역시 특정 지능의 우수함을 요구하는 해당분야의 상징과 이미지 및 조작 방식을 정교하게 활용한 성과물이다.


49. 나는 이와 같은 시대정신, 즉 특정한 개인들이 우연히 그것을 일깨우고 결과적으로(어쩌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시대정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역사를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미리 앞서서 미래에 생길 일을 규정하는 정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가장 극적인 역사적 변동을 일으키는 요인은 빗나간 총탄이라는 화산 폭발과 같은 우연적인 사건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55. 일단 전통과 관습이 특정한 예술 및 과학 분야에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면,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전통과 관습이 도전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회화가 존재할 수 있다면 새로운 무용이나 시 혹은 정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 순식간에 전세계에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 창조성의 연구 방법


65. 버클리 성격 연구소에 따르면, 창조적인 건축가들은 그들보다 창조성이 부족한 동료들에 비해 독립심과 자신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기민함, 기꺼이 무의식에 내맡기는 성향, 야망, 일에 대한 집중력등의 성격적 특색이 훨씬 풍부하다.


66. 일반적으로 인간 행동의 성적 동기를 강조한 프로이트는 창조적인 삶을 뒷받침하는 성적 요인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적인 인물은 리비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승화시켜서 글쓰기나 그림, 작곡, 혹은 과학탐구와 같은 2차적인 목적을 추구한다. 아마도 그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일곱 명의 인물들에게서도 흥미로운 자료를 많이 발견했을 것이다.


68. 정신분석학 전통과 미국의 행동과학 학파는 공유점이 거의 없지만, 두 학파는 모두 개인이 창조 활동을 하는 것이 주로 물질적인 보상 때문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술가는 권력과 부를 갈구하지만 이것을 직접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창조행위에서 안식처를 구한다는 것이다. 혹은 예술가는 그들이 갈구하는 리비도적 쾌락과 오이디푸스적 쾌락을 창조 활동에서 간접적으로 얻는 다는 것이다.


69.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서 몰입상태 혹은 몰입 경험이라는 감정 상태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어떤 활동 분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렇듯 몰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78.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탐구하면서 주변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면,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창조성 자본을 많이 축적하게 된다. 반면에 이러한 발견행위가 억압당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떠밀리거나, 혹은 세상에는 정답이 하나밖에 없고 권위자들만 그 정답을 알고 있다는 고정 관념에 짓눌린 아이들은 자기만의 해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79.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분야에서 통용되는 지식에 통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0년 정도의 꾸준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의미있는 도약을 이룰 수가 없다. 


80. 창조적인 도약을 이룬 인물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탐구자이며 혁신가이고 사색가인 경우가 많다.


82. 창조자는 자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고, 아무 보상도 없는 반복적인 실패에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

이제 일곱가지 사례 분석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발달상의 특징을 요약하겠다.


1)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와 특별한 문제에 대한 유년 시절의 관심

2) 처음 흥미를 느낀 문제를 탐구하다가 이 흥미를 이어받아 특정 분야를 마스터하겠다고      결심

3) 선택한 분야에 정통한 후에 모순적인 요소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요소를 창조

4) 창조자가 신기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탐구해가는 방식

5) 고립의 시기에 주변 사람들이 행하는 격려와 지지역할 혹은 방해 역할

6) 서서히 새로운 상징체계와 언어 혹은 표현 방식을 만들어가는 모습

7) 관련 비평가들의 첫 반응과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반응이 변화하는 모습

8) 보통은 중년의 시기에 이뤄내는 좀더 포괄적인 성격의 두번째 혁신(및 이와 관련된 사건     들)

하지만 좀 더 높은 수준에서 보면, 창조성은 새로운 유형의 제품을 제작하는 것, 혹은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주제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된다.
 

84. 창조적인 행위는 특정한 문화에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인식된다.

85. 하지만 내가 말하는 핵심적 요지는 그 자체로 창조적인 것은 없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평가가 내려지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은 창조적인 잠재력을 지녔다는 지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소속 공동체나 문화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려야 마땅하다. 다른 판관의 말은 쓸모가 없다.


 88. 재능 있는 개인, 그 개인이 활약하는 특정분야나 학문영역, 인물과 성과물의 질적 수준을 판단하는 장


90. 창조성은 예술가의 머리나 손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분야나 심판관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성이라는 현상은 오직 이 세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에만 좀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 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드-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108. 프로이트는 법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다가, 괴테의 『자연론』에 관한 강의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 자연을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묘사한 세상 만물에 대한 이 위대한 송가(頌歌)는 프로이트가 의학을 공부하고 자연과학도가 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111. 나의 용어로 말하면, 프로이트는 언어 지능과 인성(personal) 지능이 우수했다. 즉, 언어와 인간을 다루는 분야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학업을 마쳤을 때는 마치 세상이 그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야흐로 현대의 문이 열리는 시대에 문명 세계의 중심지에 살면서 영향력 있는 스승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프로이트에게 선택의 자유는 실제로 무한했으리라 보인다.


119. 이 치료법은 말(言語)을 통해 억압된 감정을 발산하게 함으로써, 처음에는 소산되지 못했던 관념들의 작용력을 제거한다. 또한 그런 관념을 (가벼운 최면 상태에서) 정상 의식으로 끌어들이거나 치료자의 암시를 통해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연상 효과에 의해 교정 (associative correction)하는 것이다.


129. 어떤 지적 혁명에서도 핵심적인 개념이나 주제를 하나만 집어내는 일은 위험하다. 이 위험은 특히 프로이트의 혁명적 사고와 같은 경우에서 두드러지는 법인데,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프로이트의 이론 체계에 힘과 매력을 부여한 것은 여러 맹아적인 관념들이 독특하게 결합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바로 이 개념을 중심축으로 해서 여러 주요 개념들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 것이다. 그 핵심 개념은 억압(repression)이다.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Vorstellung) 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 개념의 중요성을 확언한 바 있다. “억압이라는 교의는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가 서 있는 주춧돌이다.”


130.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psychic life)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을 밝히는 것은 ‘한사람의 생애에 평생 한 번 허용될까 말까 한 통찰’이라고 말했다.


137. 프로이트는 모든 꿈에는 모종의 소원이나 환상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되었다. 꿈은 억압된 소원이 위장 실현하는 과정이며, 예전의 결심이나 근심 혹은 욕망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다.


138. 대체로 꿈은 예전에 품었던 생각에서 자극을 받는데, 꿈 꾼 당사자도 전혀 알지 못했던 생각인 경우가 많다. 이런 꿈 사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꿈의 ‘외현적 내용(manifest content)'을 꿰뚫어 보고 그 이면의 ’잠재적 내용(latent content)'을 밝혀내야 한다. 꿈의 잠재 내용을 해독하려면 꿈 상징에 관한 완전한 어휘 목록이 필요한데, 물론 배경 지식 없이는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어휘들이다. 꿈을 형성하는 방어 기제로는 응축(condensation)과 전위, 다양한 종류의 방어막(screen)이 있는데, 꿈의 의미를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각각의 방어 기제를 끈기 있게 해소해야 한다.


 140. 프로이트는 자기 내부의 깊은 곳에서 부모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발견했다. 이 감정은 아주 어린 유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유아들은 어머니에게는 강한 애정과 사랑과 욕망을 느끼는 반면 아버지에게는 질투와 두려움, 심지어 증오심까지 품는다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은 어머니와 결혼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전화한다.


처음 이런 감정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느꼈을 때, 프로이트는 광범위한 문학적 소양과 다른 환자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런 감정이 인간의 정서를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와 중세 햄릿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바로 성인 신경증의 뿌리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여성의 경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 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144.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지적 재능이 지닌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문학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뛰어난 저서이다. 파노라마처럼 인용되는 다양한 전거들은 프로이트가 과학 저서와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당대와 다른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사건들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145. “나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에는 아무 재능이 없다. 양적인 것에는 아무 소질이 없다.”


148. 프로이트 스스로 걸작이라고 여긴 『꿈의 해석』이 출간되었을 때, 세상은 과연 그의 발견이 지닌 잠재력을 인식할 수 있었던가? 얼핏 보기에 그처럼 폭넓은 시야를 가진 저서라면, 프로이트가 그 책의 내용을 전달하고 싶은 주된 대상 독자인 심리학자들의 장(場, field)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꿈의 해석』 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이며, 곧 절판되었다. 몇몇 공감 어린 서평도 받긴 했으나, 가령 다윈의 『종의 기원』과는 달리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이 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55. 프로이트는 모든 젊은이의 삶에 아버지의 역할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에 주목했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 분석학 운동 내부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띄었고, 프로이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결과를 빚어냈다.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웠던 고립’에 관해 심정을 토로한 후에 이렇게 썼다.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자네라네.” 프로이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조그만 모임에서 융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1910년 새로 탄생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156. 하지만 결국 프로이트는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충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불만을 품은 추종자들은 정신분석학 운동에서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159. 프로이트와 맺은 인연으로 인해 불운을 겪은 이들도 있었다. 특히 그와 절교하게 된 사람들이 그러했는데 가령 젊은 제자였던 빅토르 타우스크는 용서할 줄 모르는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낙심한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초기 추종자들 중에 적어도 여섯명은 같은 선택을 했다. 이는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우리의 첫 번째 사례이다.


165. 내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결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들어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알버트 아인슈타인- 영원한 아이


168. 아마도 미래의 아인슈타인을 가장 잘 드러낸 물음일 터인데, 열여섯 살에 그는 사람이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조금 나중에는 엘리베이터가 아주 높은 곳에서 자유 낙하할 때,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지닌 물건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 했다. 그러니까, 물건이 주머니에서 빠지면 바닥에 떨어질지, 아니면 공중에 그대로 떠 있을지가 문제였다.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놓고 그 해답에 대해 골몰하는 이런 성향은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169.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통 어른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길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문제는 아이 적에 골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지능 발달이 더뎌서 어른이 된 뒤에나 겨우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보통 능력을 가진 아이보다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


170. 마음과 창조적인 어른의 마음 사이에 깊은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71. 또 한명의 존경스러운 물리학자 라바이(Rabi)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191.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팔았으며, ‘나’와 ‘우리’의 세계에서 ‘그것(사물)’의 세계로 날아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고, 말년의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193. 하지만 자기 생각의 핵심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지지를 구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의존하려는 마음은 전혀 다르다. 어느 경우든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했다는 이유로 최종 결과물의 요체가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둘 다 자신들이 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고하게 알고 있었고, 누구라도 그들이 가는 방향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4. 아인슈타인은 남다른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몇 시간, 심지어 몇 일 동안이나 중단 없이 같은 문제를 숙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 중에서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것도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음악을 듣거나 요트를 타곤 했지만, 이런 순간에도 사색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공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공책에다 적곤 했다. 그는 상대론을 발표한 후에 동료인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에는 빛의 본성에 관해 탐구하고 싶다네” 라고 말했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내보이는 시각적 행동이 빛에 눈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는 사실이 전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고 느꼈으며, 이 분야에서는 일부러 강의를 맡지 않았고 연구도 계속하지 않았다.


197. 아인슈타인은 자기 생각을 다양한 표상방법을 통해 나타내는 일을 즐겼던 것이다.


202. 아인슈타인이 어떤 업적을 이룰지 알 도리가 없던 당대인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여겼다. 김나지움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고, 처음에는 취리히 공대 입학에 실패했으며, 영향력 있는 스승이나 후원자도 없었다. 교수직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박사 논문을 완성하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특허국의 이름 없는 관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 것이다.


208. 물리학의 표준 절차는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후에, 이로부터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정반대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높은 추상 수준에서 기본적인 물리 법칙, 가령 광속 일정의 원리를 우선 제기한 후에 이에 근거하여 경험적 현상을 추측하고 그 기본 원리를 다른 법칙과 연결시켰다.


212. 3년쯤 시간이 흐르자 학계의 반응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다룬 진지한 해설서가 나온 것은 6년 뒤였다.


216. 실험 결과에 의지한 이론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신의 이론이 올바를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확고했던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과학자 생애의 전반기 동안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220. 아인슈타인의 외모와 몸가짐,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어른’의 기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에는 아이다운 천진성이 담겨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걱정없이 살아가는 낙천적인 아이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221. 제 1차 세계대전 기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의한 적색이동과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1.7초 가량 휘어지는 현상을 예견했다.


222. 제 대답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그저 농담 한 마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제 이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역시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지요.


229.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구상한 아인슈타인은 분야를 막론하고 창조적 행위를 특징짓는 일정한 패턴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10년 동안 전문지식을 익힌 아인슈타인은 아직 젊은 나이에 결정적인 도약을 이루어 물리학의 연구 방향을 쇄신했다. 많은 창조적인 인물들이 처음의 근본적인 도약이 함의하는 내용을 탐구하는 다음 10년 동안의 연구를 거쳐,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결정적인 도약을 감행했다. 


232. 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사고 방식에 너무 오랫동안 물들어 있으면, 새로운 혁신에 적응하지 못한다. 푸앵카레와 로렌츠도 자신들의 사고 습관에 너무 묶여 있던 나머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접근법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234.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나 그의 마음속에는 과학이 있었다. 그는 차를 저으면서 차 찌꺼기가 컵 바닥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를 전혀 뜻밖의 사실, 즉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과 연결시켜 생각했다. 모래 위를 걸을 때도 그는 우리가 보통 아무 생각 없이 알고 있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즉 마른 모래나 물에 잠긴 모래는 그렇지 않은데, 젖은 모래는 딱딱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과학적 설명을 찾아냈다.


236.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철학적 색채가 가미된 아인슈타인의 발언은 어는 것도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인상적인 태도로 그런 주장을 했고, 덕분에 그의 주장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 될 수 있다.


237. “우리들 각자는 무궁무진한 자연이 그저 놀이 삼아 우리 내부에 심어 놓은 비합리성과 비일관성, 우스꽝스러움, 광기 등을 품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간과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호된 시련을 겪을 때면 언제든 이런 요소가 불거진다.”


240.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일 만큼 관심이 많은데 비해, 이와는 이상하리 만치 대조적으로 주변사람들과 직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고립은 때로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런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245.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내 논의에 배어 있는 몇가지 주제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프로이트는 한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소규모의 친구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처음의 좌절을 극복하고 끈기있게 노력했는데, 어쩌면 자신들을 둘러싼 논란에 다소 즐거움을 느낀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5. 파블로 피카소-신동과 천재


250. 신동이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 난 아이를 가리킨다.


252. 신동의 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한 어떤 문화권의 관심과 지원 이외에도, 언제나 여러 요인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 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259.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함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학생이면 마땅히 잘 해내야 하는 일을 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강점을 보이는 분야를 맹렬하게 파고들어서 개인적인 좌절감을 극복하고 가족들에게 자기의 진면목을 보이고자 하는 법이다.


261. 이와 같은 ‘신과의 거래’는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277. 피카소를 비롯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한 대표작들은 개인적 의미가 깊이 담긴 사건과 정서를 보편적인 주제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279.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all-put-together)'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structure)' 형의 예술가이다. 모차르트가 전자의 전형이라면, 베토벤은 후자의 전형이다. 신동 피카소는 첫 번째 유형을 대표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아폴리네르는 주장한다.


287. 훗날 칸바일러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선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피카소는 믿기 힘들 정도로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동료 화가들 누구도 그를 뒤따르지 않았으니, 당시 그가 느낀 정신적 고독이란 참으로 공포스러울 정도였겠지요. 다들 괴상하고 기형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카소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이러한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피카소는 대개는 적대적이었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길을 잃지는 않았어도 쓰라린 상처를 받았는지 어디론가 그림을 조용히 치워버리고 몇 년 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288. 키가 작고 몸집이 다부진 피카소는 열정에 넘치고 반항적인 기질을 타고 났으며, 스스로 신동임을 알고 있었다. 음악에는 아무 흥미가 없어서 오로지 그림에 살고 그림으로 호흡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9. 한마디로 말해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동작업을 하면서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양식을 창안하고 탐구했다.


302. 아무리 친밀하고 좋은 관계를 맺은 사이라도 , 서로 떨어져서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낡은 주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는 법이다.


고독의 시간은 친밀한 어울림의 시간 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306. 우선 피카소는 부유한 주택가로 이사를 했고 상류층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311. 1937년 4월 26일 프랑코 군에 가담한 독일 폭격기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해서 게르니카를 폭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든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321. 고전적인 구도와 어린아이같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 작품으로서 천진한 아이의 눈에 비친 혼돈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323. 파카소가 게르니카를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쉰다섯 살 때의 일이다.


326. 그는 한시대를 대표하는 시각 예술의 마법사였다. 끊임없이 창조에 몰두하여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고, 찰리 채플린이나 아인슈타인 처럼 대중앞에 나서 연기 할 줄 알았다.


328. 첫 번째 부인 올가는 정신이상이 되어 1935년에 죽었고, 가장 낙천적이던 마리 테레즈 발터는 1977년 스스로 목을 맸다. 지성적인 연인 도라 마르는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 참석이 불허되자 농축 표백제를 마시고 자살했다.


피카소는 “나의 죽음은 배가 침몰하는 일과 같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질거다.” 라고 말한 바 있다.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음악가이자 정치가


335. 스트라빈스키는 작곡과 연주에 기울인 노력에 못지않게 자신의 음악 인생을 관리하는 면에서도 상당한 정력을 쏟아부었다는 점이다.


339.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음악 신동은 아니었다. 실상 그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였다.


340.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꽤나 고독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났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스트라빈스키는 훌륭한 학생은 아니어서 학급에서 평균 혹은 평균 이하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하지만 학습 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던 피카소와도 달라서 그저 정규 교육에 흥미가 없었을 뿐이고 평생 동안 스스로 배워 익히는 방식을 선호했을 뿐이다.


342. 스트라빈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비슷한 교육 철학을 견지했고 엄격한 훈련방식을 선호했다. 훗날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 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344. 법률가에서 발레 흥행주로 직업을 바꾼 젊은 러시아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1908년 에 <불꽃>이 연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연주회에 참석했다.


345. 디아길레프는 아주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위엄있고 화려한 인상을 풍기는 귀족으로서 도박꾼과 지식인, 책략가, 예술가, 몽상가 기질이 조금씩 뒤섞인 인물이었다.


347. 꾸준히 그의 사단과 함께 일할 작곡가였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곡을 들어보고 자기가 찾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348. 그는 배움에는 열심이어서 무엇이든 빨리 익혔고 활발하게 반응했다.

디아겔레프에게 배운 것, 하나는 마감시한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상은 각기 다르면서 고집은 무척이나 센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방법이었다.


355.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있는 법이며,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 


새롭게 움트고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표현하기 힘든 예술적 이상을 서툴지만 진지하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체계로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대중의 평범한 평가 기준에 의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자 자신에게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지, 나아가서 그러한 목표를 미래의 작품 속에 가장 훌륭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359. 스트라빈스키는 늘 피아노를 치면서 곡을 만들었으므로 피아노 연주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작곡할 때 가장 힘들었으리라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378. 스트라빈스키는 「결혼」의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작곡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대체로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착수할 무렵부터 곡의 전모를 분명하게 구상해놓는 편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통해 일찍부터 기본 선율과 리듬을 정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영감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음악적 구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음악적 효과 및 표현 효과를 내려면 악기 파트와 단편적인 악절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그에 가장 알맞은 악기 및 기악 앙상블로 실험해 보고, 또 고전 음악이나 민요의 단편적인 악절을 차용하여 멜로디를 구성했다.


383.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과거와 자극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는 과학자나 수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들이 이런 식으로 과거와 유희하지 않았다면 훨씬 개인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은 창조했겠지만, 이는 기껏해야 창조력을 갉아먹은 곤란한 재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387. 그는 오랜세월에 걸쳐 하루에 적어도 열시간 동안 일했다. 오전에는 피아노로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후 네댓시간동안 작곡에 몰두하고, 오후에는 관현악편곡과 기악편곡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388.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곡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나간다”)


7. T.S. 엘리엇-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404. 훗날 그는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 고 썼다.


409. 그는 당시의 보스턴과 세인트 루이스와 미국을 싫어했다. 배타적인 학생들, 보스턴의 먹물들, 그리고 비침하게 살아가는 도시 하층계급에도 정이 떨어졌다.


410. 신적인 영감을 느낀, 보스톤 거리에서 겪은 ‘결정화 경험’을 통해 그는 시로써 이렇듯 상반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소외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한 시대의 사려 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에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라고 쓴 대로 ’무인지경의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414.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420. 다른 이들에게 대단한 업적으로 비쳤을지 몰라도 엘리엇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한결같은 경계인답게 그에겐 젊은 시절의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 혹은 피카소가 지녔던 대단한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429.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창조적인 걸작품의 탄생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시를 쓸 무렵 엘리엇은 절망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문학계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대단한 성공이 가능한 작품을 난삽하게나마 탈고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줄지가 의문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가까운 두 사람이 작업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430.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피카소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이번에도 역시 창조적인 인물이 자신의 가장 극적인 업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부모 자식 간이나 동기 간에 버금갈 만큼 매우 친밀한 사이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437. "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


438. 엘리엇은 개인적인 불행을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444.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像)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446. 모든 증거로 볼 때 엘리엇은 속내를 알기가 어려운 사람이었고,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 사람도 거의 없었다. 특히 만년의 엘리엇은 다른 사람들과 거리감을 두어야만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448. 당대의 걸출한 대가로 인정한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내가 존경하는 조이스는 외부의 자극에 초연하고 죽을때까지 1급의 작품을 창조할 사람이다.”


그가 동료로 인정한 또 한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였다. 엘리엇은 그녀의 문학적 혁신에 감탄했고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냈다.


449.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아니면 금방 잊혀질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기엔 스텝 지방의 리듬이 자동차 경적과 기계 소음, 기어와 맞물리고 금속과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 지하철의 굉음 등 현대 생활에 미만한 거친 소리로 변형되고, 다시 이 절망적인 소음이 음악으로 변환된 것 같다.


455. 경계인으로 살았던 엘리엇의 생애는 역설적이다.


456. 예술은 인간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기를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에술만을 좇아야한다고 요구한다.


457.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8. 마사 그레이엄-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470. 그레이엄의 아버지는 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내가 모를 줄 아니? 네가 나를 속인다는 걸 항상 네 몸짓이 말해 준단다. 네가 말하는 내용과는 상관 없이 네 모습에 다 써 있어. 주먹을 쥐면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등이 뻣뻣해지고 발을 끌거나 눈을 내리깔고 있잖니. 몸짓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란다.” 딸의 잘못에 대한 이런 통찰력 있는 부모의 대응은 나중에 커다란 의미로 남았다.


472. 1916년 스무 두 살이 된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무용가이자 사업가인 테드 숀이 몇해 전에 설립한 로스엔젤레스 유일의 무용학교인 데니숀에 입학했다.


517. 신체-운동 지능은 자립적인 상징체계를 통한(혹인 자립적인 상징 체계로 표기되는) 사유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실험하고 여러 차례 변형하는 과정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무용 역사가 린 개러폴라(Lynn Carafola)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엄은 그녀의 몸이었다. 그것(몸)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강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단련시킨 덕분에 그녀는 그녀 자신이 된 것이다. 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따라 그녀가 고안할 수 있는 무용의 한계가 규정되며, 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있기에 그녀는 연습을 통해 더욱 더 무용 테크닉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521.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니진스키는 단 한 번의 탁월한 도약을 위해서 수천 번이나 도약연습을 했다.”

그레이엄 무용단의 일원이 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레이엄은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 우해서는 10년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창조적 도약에 관한 10년 규칙에 적합하다.) “엄정하고 힘든 테크닉, 그러니까 무용 동작의 과학에 따라 신체를 단련해야 하고, 다양한 경험으로 정신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학생은 매일같이 ‘고문’과도 같은 훈련을 받았으며, 점차 근육질의 강건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523.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내 무용에 대한 메모는 모두 갖고 있다. 특별한 기호는 쓰지 않는다. 내 생각을 그냥 적어둘 뿐이고, 나는 내가 쓴 글과 동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기 저기에 설명이 있다. 에게나 실패 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한 가지 대죄가 있다면 그건 범용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524. 그레이엄은 거의 평생에 걸쳐 자신을 무용가이자 배우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용가로 태어났다고 느꼈다. “나는 무용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무용가로 선택된 것이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에게 무용가가 되는 일에 관해 은근히 겁을 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러분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기찬 인생을 사는 길이 하나 뿐이라면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 그리고 작품 활동의 필연입니다.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없이 오직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없이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529. 늙은 것처럼 몸을 사리는 것과 실제로 늙었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것은 전혀 다르다.


531. 하지만 그녀는 1973년 그녀는 무용단의 감독으로 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533. 재원 조달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강연과 리사이틀, 실물 강연은 매진되는 때가 많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상당한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539. 결국 그녀가 맺었 파우스트적 계약은 개인적인 행복감이나 친밀한 인간관계의 희생을 수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9. 마히트마 간디-신념을 실천한 정치지도자


544. 소년 간디는 몸집이 왜소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체육을 싫어했다. 특별히 훌륭한 학생도 아니어서 학교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쾌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545.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람들 간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여러모로 역량이나 능력이 부족하고 감정적인 여유도 없고 또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나 세상 경험, 동기 부여에 대한 지식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상회와 정치, 종교, 윤리 분야에서 조숙한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다.


549. 전기작가 루이스 피셔(Louis Fischer)는 “별다른 특징이 없이 평범하고 결점도 많고 허둥대는 변호사로 1891년에 런던을 떠났던 간디와, 수백만의 위대한(마하트마) 지도자” 사이에는 거의 닮은 점이 없다고 말한다.


550. 마침내 남아프리카의 더반으로 떠날 기회가 생겼다. 어느 회사가 더반에서 법률 조문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건 것인데, 그는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가족을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디 성격의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556. 그러나 간디는 전혀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좌절감을 느꼈고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낭패감을 느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몸소 실천한 선례를 따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했고, 이것은 자신이 견지하는 삶의 원칙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힌두교 교리에서는 가장이 어는 시점이 되면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종교적 고행자로서 은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소위 바나프라스타가 그것이다.


558. 인생 행로에 관한 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간디는 인도 민중과 신 그리고 자기자신과 일종의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드높은 행위 규범의 모범이 되기 위해 공개적으로 삶의 쾌락을 포기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고립된 작업을 하는 창조자들 역시 사적으로 이러한 맹세를 할 수 있지만, 대중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실행하면서 아주 공개적인 방식으로 파우스트적 계약을 실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75. 에릭슨은 이 점을 좀더 웅변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천재들은 도대체 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진화론적이고 실존적인 저주를 스스로 짊어질 수가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신적 위대성을 그런 사람에게 기꺼이 부여하려고 하는 것일까?”


577. 간디가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곳은 남아프리카였다. 그는 참과 사랑에서 태어난 힘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 인도인들이 자기에게 가해진 불의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같은 지역내에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보다 인간적이고 동등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실천했던 방법이었다. 사타아그라하는 두 세력이 그 내부에서 불화와 반목 상태에 놓여있는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한다. 사티아그라하의 신봉자는 폭력과 고통 혹은 위협을 통해 서로 대결하는 대신, 몸소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상대방의 양식과 양심을 일깨운다. 이를 통해 진리파지자(satyagrahis)는 상대방을 개심시키고 그들이 자진해서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582. 시대를 막론하고 간디보다 더욱 솔직하게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밝힌 지도자는 거의 없다. 간디는 자신의 모든 글, 특히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진리 실험’에서 정확하고 거짓 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동기를 성찰했다. 이러한 고백적 글쓰기는 두 가지 효과를 자아냈다. 첫째, 이를 통해 간디는 자신의 역사와 현재 처해있는 상황, 자기 및 인도 민중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온전히 자기 내부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글들은 자신의 삶을 주변의 가까운 동료들뿐 아니라 그의 실천 방법에 관심이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606. 물론 간디와 같은 훌륭한 인물도 비난을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고압적으로 대한 일이나 가족을 이상할 정도로 몰인정하게 대한 일, 그리고 일부 정치적 견해의 소박함 등에 덧붙여 새로운 비난이 가해졌다. 만년의 간디가 나체의 젊은 여자를 곁에 두고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간디는 이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젊은 여자들을 성적으로 욕보였다거나 여자들이 억지로 늙은이 옆에서 잠을 자야 했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태는 간디의 괴팍함을 확고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간디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괴벽과 취향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610.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 마하트마 간디


623. 자기 분야에 들어가서 얻는 경험은 개인에 따라 다른데, 여기서 이 점을 상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C.는 다소간의 속도 차이는 있지만 관심이 가는 문제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해당 분야를 전인미답의 경지로 추동하는 계기가 된다. 이 순간이 바로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E.C.는 이제 동료들과 고립되어 홀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자신이 도약의 문턱에 왔음을 감지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기 자신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놀랍게도 이 중대한 순간에 E.C.는 인지적 정서적인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도움이 없다면 좌절하기 십상일 것이다.


629. 창조성의 현저한 특징은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의 결합에 있다. 이런 결합은 성격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아이다운 특성이 수진함고 참신함으로 나타나면 긍정적인 색채를 띠게 되지만, 반대로 이기심과 보복심리로 나타나면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일곱 명의 인물이 지닌 아이의 ‘얼굴’과 어른의 ‘얼굴’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37. 인생패턴: 창조성의 10년 규칙. 정당한 근거 없이 숫자의 마술을 부릴 생각이 없었음에도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창조성의 10년 규칙을 발견했다.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물론 분야마다 약간씩 기간은 달라도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 인지 심리학 계통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사람이 어느 분야를 기본적으로 통달하는데 필요한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이다. 피카소처럼 네 살에 시작하면 10대에 거장이 될 수 있고, 10대 후반에 창조의 노력을 시작한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작곡가와 그레이엄과 같은 무용가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성의 본 궤도에 올라선다.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 ‘프론티어’, 간디의 아메다바드 파업을 결정적인 도약으로 간주한다.


654. 창조적인 인물의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성의 삼각형에서 어떤 부조화, 혹은 부드러운 연결의 결여를 장점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분석적으로 보면, 여섯 가지의 비동시성 영역이 존재한다. 개인 내부, 분야 내부, 장 내부, 그리고 개인과 분야 사이, 개인과 장 사이, 분야와 장 사이에 비동시성 영역이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비동시성에서 면제된 사람들은 신동이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반면 모든 지점에서 비동시성을 경험하는 사람 역시 여기에 압도당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몇몇 지점에서 비동시성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662. 게다가 엄마와 아이 혹은 보모와 유아 간의 대화, 혹은 친한 친구들 간의 대화와 같은 어린 시절의 효과적인 소통을 경험하지 못한 창조자는 어른이 되어서도 근본적인 소통을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년기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지지와 격려는 새로운 업적을 창조한 일과 관련이 있으며, 어린 시절 무엇인가 성취한 일에 보상을 받던 상황이 재연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693. 바쁜 일상과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 속에 자칫 삶을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치이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릴 때 품었던 꿈을 이제는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아스라이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가드너는 창조성이란 바로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힘”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평생 동안 지닐 수 있었기에 이 책에서 다루는 거장들은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게 저자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 같다.




*** 내가 저자라면


10년 주기설: 공감이 많이 가는 부분이다. 저자가 분석한 일곱 인물에서 밝혀낸 것은 10년을 주기로 창조적 업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분야의 기초를 탄탄히 익히고, 다음의 10년은 이를 토대로 창조적 혁신을 만들어내며, 또 다음 10년은 또 다른 분야에서 창조적 성과를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파우스트적 거래: 파우스트적 거래란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몰입하려는 하는 거래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 엘리엇 간디처럼 금욕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하거나, 아인슈타인 그레이엄처럼 고립을 자초하는 일을 일러서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피카소, 주변사람과 심한 마찰을 빚는 스트라빈스키도 이러한 행태를 보였다.


요즈음 교육계의 화두인 창의력과 몰입을 또 하나의 다른  창을 통해 이해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책이 무척 두껍고 인지과학을 전공했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지배한 실험정신이라는 들어가는 말은 4반세기 동안의 그의 창조성에 관한 연구가 -,비록 가드너는 에움길을 돌아왓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다 녹아 있다는걸 설명하고 있다.

가드너는  어린시절 가족사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지만 전기물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를 전공하려고 까지 했었다.

에릭  에릭슨의 퍼스날리티 연구에서 연구의 방향을 재조정했고, 발달심리학으로 분야를 넓혀갔다.

대학원에서 피아노 연주로 닦인 음악적 소양위에 현대예술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예술적 인식과 교육에 특별히 주목한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창조성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하워드 가드너의 연구 주제는 우리도 깊이 개입해 볼 수 있는 영역이어서 보다 깊이 읽기를 해보아도 좋은 책인것 같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할 때 그가 읽고 싶어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겠다고 했다. 전문 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꼭 필요한 시각자료만 제시했다고 들어가는 글에서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읽기에 좀 산만한 감이 있기는 하나 좀 쉽게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전공 책을 대중화할 때에는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연습이 좀 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읽을때 감탄하게 되는 그런 아름다운 풀어쓰기의 글솜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고 다만 ‘깊고 풍부한 정보가 참 유익하구나 ’하는 느낌이 남는다.


연습삼아, 우리의 겸재 정선을 이렇게 한번 분석해보면 어떨까? 여러각도에서 인성을 분석해 나간 것이 훌륭했고  윌 듀란트의 관점과 한번 비교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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