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書元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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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에 대한 나의 추억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중학교 시절 충무(현재 통영의 예전 지명이름)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의 기억이다. 철모르게 충무 김밥을 먹으며 그렇고그런 역사속의 인물의 한명으로 그를 떠올리며,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던 한려수도를 유유히 구경만 하고 돌아 왔었다. 둘째, 직장관계로 서울로 올라왔을 때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갈시 긴칼 옆에차고 나를 무섭게 째려보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다. 셋째, 얼마전 이순신 리더십이 유행할 당시 서점을 들렸을 때 우연찮게 제목 때문에 눈길이 꽃쳐 그 자리에서 책장을 일부 넘겨가며 읽은 책이 윤지강님의 <세계 4대 해전> 이었다. 각국의 여러 해전중 기념비적인 4대 해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살라미스 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르 해전과 함께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을 당당하게 소개한 것이었다. 저자는 한산도 해전을 학익진과 함포술로 해전의 백미를 이룬 최고의 전투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가물가물 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금주 과제물로 선정받아, 덕분에 좋은 계기로써 그를 현시대로 되살려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1. 출생과 어린시절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인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며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아마도 객관적인 다음의 자료가 그의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전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그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가지고 거리에서 놀았는데, 그 마음을 거스르는 사람이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혹은 그를 꺼려 감히 그 군문 앞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였다.’
- 유성룡 <징비록>중에서
2. 대기만성(大器晩成)과 원칙형 인간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을뿐더러,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순신의 생애를 다시금 읽는 순간 어쩌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여서 그를통해 내심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3. 서애 유성룡의 추천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출신이 보잘것없던 관중이 재능을 떨치고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포숙의 추천 덕분 이었다는 구절이 소개가 되고있다.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처세술이 없었던 이순신에게는 포숙과 같은 서애 유성룡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고 있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기사 중에서
이처럼 어릴적부터 그를 지켜 봐왔던 유성룡의 빛나는 예지로 인해, 이순신은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그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3.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과 첨단 무기의 개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황에서의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
1592년 4월 13일(음력) 마침내 그가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의 일본군이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일시에 침략한 것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후, 1592년 5월 4일 첫 출전을 한다. 이 출전에서 그는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이어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진작하였고, 결국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개전 이 후 거침없이 공격해오던 일본군의 전략(수륙병진)에 큰 타격을 주어 전쟁의 방향을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조선 총통과 전선의 우수성, 이순신 특유의 창의적 전술인 ‘학익진’을 사용한 전투로 해군 수장으로써 이순신의 뛰어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투로 기록된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5. 백의종군(白衣從軍)
이순신은 이러한 모든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위기에까지 몰린 이순신은 결국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방면되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1597년 7월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3년 9개월 동안 이순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놓은 조선수군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패전 소식은 곧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장군은 즉시 조선 수군 부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한 달에 걸친 해안지역 정찰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남해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흩어졌던 장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았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교지를 받게 된다.
6. 이순신의 부활(復活)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 있었다. 명량해전은 이러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백 척의 적선과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을 활용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 함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결국 133척의 적선과 맞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전량해전의 승기를 타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을 막아내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해전으로 셋째 아들을 잃게 된다. 패배한 일본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한 것이다.
7. 네버엔딩 스토리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치열한 전장의 선상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애국심과 우수성을 떨친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이 주도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대중매체를 통해 방영이 되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열연을 통해 그의 영웅적인 면모들이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었었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그의 그런 행적과 더불어 참으로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들도 엿보게 된다. 아마도 이같은 우리 자신들과 같은 약점을 가진 그의 모습 덕분에, 오히려 앞으로도 우리 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는 영웅으로 함께하고 있으리라.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글을 시작하기 전에
1. 그간 우리가 이순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구국의 영웅’ 그 자체였다. 이것은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영웅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순신에 대한 책이 발간되고 각종 기념비와 동상,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이순신을 제대로 알리기보다는 정권 강화, 유지를 위한 이용에 치중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받은 교육은 다소 왜곡되어 있었다.
2.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聖雄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 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 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1.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간 나라를 지킨 명장 이순신(1545~1598)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적과 대치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바쁜 가운데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2.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전란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使料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상뿐 아니라 조선 수군 연구와 전략, 전술에 대한 기록이다.
3. 무엇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을 가장 잘 알려 주는 책이다. 그속에 그의 사상, 생애, 활동의 진면모가 있다.
4.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 아아, 지금 세상엔들 어찌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다만 인재를 알아 추천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
- 이수광 ‘지봉유설’
5. 임진왜란 직전,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
6. 이순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
7. 이순신은 병이 끊이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아프거나 구토, 설사, 식은 땀이 온몸을 적시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8. 그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가 영웅으로 불려진 데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9. 이순신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 4월에 임란이 일어났는데, 그 직전인 2월에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기를 만들고 관리함에 있어 잘못이 있으면 책임자를 엄하게 처벌
10. 전쟁에서 화학 무기가 승패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임을 알고, 전쟁 전에도 또 전쟁 중에도 무기 개발에 힘썼다.
11. 거북 모양의 돌격용 전선은, 사실 조선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것은 이순신이다.
12. 이순신은 전술에 밝았고,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알았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여러 지휘관이나 부하들에 대한 평가도 매우 철저
13. 1597년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 그래서 이후 다시 통제사가된 이순신은 전선 13척을 가지고 명량 싸움에 나섰다.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 노량 싸움 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p25)
-. 병졸이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림(25)
-.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38)
-. 밥을 먹은 뒤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하루 내내 아픔이 계속되었고 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기운이 떨어지고 어지러워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렸다.(39)
-. 조선 수군의 전선, 거북선과 판옥선(46)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보이며, 이후 이순신에 의해 철갑선으로 개발, 창제됨. 거북선은 최초의 돌격용 철갑선으로,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그 위력을 떨침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
-.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도망갔으므로 이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내다 걸음(47)
-.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려하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마치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가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초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47)
-. 옥포, 합포, 적진포 싸움(48~49)
가.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나. 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함. 배에 있는 관원과 군사들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동서로 에워싼 채 바람과 우레 같이 대포를 쏘고 활을 쏘아댐
-. 한산도, 안골포 싸움(62~63, 67)
가.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 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나.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함
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 부산 앞바다 싸움(74~75)
가. 말도 없고 지원부대도 없이 경솔하게 상륙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되었다.
나.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됨
■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 전라 우수영의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댐.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84)
-.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87)
-.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87)
-.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98)
-.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들 동요하게함.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101)
-.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기 어찌 하겠는가?(105)
-. 경상 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진군 싸움을 벌이자는것. 그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108)
-.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108)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117)
-. 원 수사의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121)
■ 159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140)
-.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하였다.(150)
-.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암행어사 유몽민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주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151~152)
-. 술이 세 차례 돌아가니 원 수사가 크게 취해 술주정을 하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마구 하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김. (원수사) 하는 짓이 매우 흉악(163)
-.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172)
-.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 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180)
-.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193)
■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213)
-.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251)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옴.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269)
-.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271)
-.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열에 일곱을 지고는 섭섭한 기색을 삭이지 못하니 가소로웠다. 근고나 세 사람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서 돌아갔다. 가소로웠다.(272)
-.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281)
-.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296)
-. 바깥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 안에서도 도적이 일어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309)
-.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319)
■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초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추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척으로 9월 명량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329)
-. 홍군우가 노래를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즐겁지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335)
-.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337)
-.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338)
-.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342)
-.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344)
-.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348)
-.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여 이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351)
-. 서늘한 기운이 들어와서 밤에는 더욱 쓸쓸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노라니 솟아나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침을 먹은뒤 원수에게 갔더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357)
-.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364)
-.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369)
-.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하여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371)
-.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교서에 절을 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374)
-.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 하였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대변도 보지 못했다.(379)
-. 적선 여덟 척이 갑자기 덤벼들어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경상 수사도 달아나려고 하였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을 명령하였다.(380)
-. 나도 그 속마음을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택할 방법이 아니어서 참고 있었다.(380)
-.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382)
-.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385)
-. 명량 싸움
: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자, 현지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385~388)
-.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394~395)
-. 바람이 몹시 차가워 배에 탄 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396)
-. 왕의 분부
: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쫓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405)
■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 이순신, 노량에 지다
: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418)
Ⅲ.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간 나라를 지킨 명장 이순신이 진중에서 쓴 일기로써,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사료(使料)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함께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이상의 가치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동안 성웅(聖雄) 이순신으로 조금은 영웅화되어 회화 되었던 기억이, 이 난중일기를 통해 ‘인간 이순신’의 실체로 다가왔던 점이다. 그래서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솔직히 내용에 대해 조금은 실망한 점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우리가 대중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있던 그의 구국의 영웅다운 행위의 형상들 이었는데, 막상 펼쳐본 주요 내용은 당일의 날씨, 자신의 건강, 공무, 술마시기 등의 어쩌면 지극히 우리가 일상사에서 행하는 소소한 내역들 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사고의 바탕에는 엮은이 송찬섭님의 얘기대로 1960년대 군사정권의 권력 강화 및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이순신의 영웅화 작업탓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반면 그의 정말 인간적인 면모 - 부하에게 옷을 벗어주고,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마음, 아들의 죽음의 오열, 다른 장수에 대한 비난 등 - 를 통해 동질감을 느낄수 있었던 점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지만 그 내면에 감춰져 있는 많은 시련과 고통들을, 인내 및 승화를 통해 영웅으로 나아간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은 세단락으로써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인간 이순신
(1) 효심
(2) 병고의 고통
(3) 원균에 대한 원망
(4) 이순신의 위트
(5) 점
2. 성웅(聖雄) 이순신
(1) 나라 걱정
(2) 병법
(3) 장수의 용맹
3. 영웅의 속내
1. 인간 이순신
(1) 효심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의 면면을 가장 잘나타내는 점을 꼽는다면 어머님에 대한 지극정성한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앞서 하워드 가드너의 <열정과 기질>을 통해 19세기 및 20세기 전반부를 살다간 많은 역사적 영웅들의 공통점 - 가족에 대한 소홀 등 - 과는 달리, 그는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인물로 높이 평가된다.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나타낸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나.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다.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라.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바.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2) 병고의 고통
자신의 건강에 대한 염려 및 병세가 난중일기 곳곳에 나타난다. 아래 구절을 살펴보자. ‘밥을 먹은 뒤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하루 내내 아픔이 계속되었고 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기운이 떨어지고 어지러워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렸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있음에도 그는 개인적인 내면의 일기에서만 이런 내용을 공개했을뿐, 어머님과 자식들 그리고 전장에 나서는 동료요 형제인 이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병고의 고통이 있음에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전장에 우선 임하는 그의 마음을 당시 어느 누가 알았을까?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 하였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대변도 보지 못했다.’
(3) 원균에 대한 원망
이순신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들이 곧잘 일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넘어 비난의 말로 일색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면을 통해 우리는 여기서 같은 사람으로써의 동질감을 가질수 있으며, 역설적이지만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소시민들에게 자그마한 카다르시스를 주고 있음도 사실이다. 조금은 실소가 나오기까지 하는 사람 냄새가 폴폴나는 원균에 대한 그의 시각을 한번 들여다 보자.
가.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나.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다.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라.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들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기 어찌 하겠는가?
바. 경상 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진군 싸움을 벌이자는것이다. 그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사. 원 수사의 하는 말이 매우 흉악스럽고 속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사리 분별이 없으니 일을 같이 한다고 해도 뒷걱정이 없을까?
아. 술이 세 차례 돌아가니 원 수사가 크게 취해 술주정을 하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마구 하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김. (원수사) 하는 짓이 매우 흉악
자.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아.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4) 이순신의 위트
평소 훈련 - 주로 활쏘기- 을 통해 그의 무공의 흔적과 단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과의 경쟁 및 시합을 통한 결과에서 나타나는 그만의 우쭐함을 우리도 함께 느낄수 있다.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열에 일곱을 지고는 섭섭한 기색을 삭이지 못하니 가소로웠다. 근고나 세 사람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서 돌아갔다. 가소로웠다.’
(5) 점
꿈의 해몽이나 점치는 모습을 통해 인간적인 한계를 엿볼수 있는데 이는 물론 개인적인 길흉화복의 바램으로 여길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쟁터에서의 군사들의 안전과 승리를 위한 염원의 일환으로 파악될수 있을 것이다.
가.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 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나.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옴.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2. 성웅(聖雄) 이순신
(1) 나라 걱정
어머님께 향하는 효심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알아볼수 있었다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 그의 구국에 대한 애정을 느낄수 있다. 평소 이같은 조국애가 있었기에 그는 어머님과 아들의 죽음에도 그것을 뒤로하고 전장의 선봉에 나설수 있었으며, 정치의 희생물로 전락 하였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백의종군으로 출정할수 있었으리라. 이런 점이 바로 그를 후대의 사람들이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결코 쉽게 행할수 없는 일을 해낸 몸과 마음을 초개(草芥)와 같이 바치는 그의 의로움. 그가 떠난지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 이시대에서 이육사의 ‘광야(曠野)’의 시에서처럼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그는 하늘에서 알고 있을까?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암행어사 유몽민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주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2) 병법
예전 <나는 탁상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는 독일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에르빈 롬멜에 대한 기록을 전해주는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답게 획기적인 작전으로 끊임없이 연합군을 괴롭혔던 그의 여정의 과정이 소개된 내용 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속에서는 전장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 더욱 부각이 되어지고, 그 리더의 카리스마와 병법이 승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에 롬멜 뿐만 아니라 많은 전쟁의 영웅들에 대한 일화 및 전술이 사람들에게 소개가 되곤 하는데, 전승무패의 수군지도자 이순신의 위대성이 한껏 드러남도 평소의 병사에 대한 관리와 병법에서 나타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로써 나타난다.
가.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 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나.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함
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들어가서 치면,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합니다.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보아 완전히 무찌르도록 서로 작정합시다.’ 하였다.
라.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마. 나도 그 속마음을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택할 방법이 아니어서 참고 있었다.
(3) 장수의 용맹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속에서 병법과 함께 리더가 더욱 빛이 나는 것은 다름아닌 선봉을 리드하며 한치의 두려움과 물러섬 없이 전장을 이끄는 용맹함 일것이다. 왜군과의 싸움에 있어 이같은 그의 면면은 난중일기 곳곳에 나타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급박했던 상황의 정황 및 그의 진두지휘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머릿속으로 그려볼수 있다.
가.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려하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마치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가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초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나.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다. 적선 여덟 척이 갑자기 덤벼들어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경상 수사도 달아나려고 하였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을 명령하였다.
라.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마.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자, 현지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명량 싸움에서)
3. 영웅의 속내
몇 년전 한참 이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화두가 된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같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시켜준 중심에는 김정현님의 <아버지>란 도서가 있었다. 나는 이책을 출장길 기차 안에서 읽게 되었는데,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면서도 그 때문에 가족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한국형 아버지 한정수의 이야기에 옆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눈물을 훌쩍거렸던 기억이 있었다. 이같은 아버지와 같은 속내를 성웅이면서 동시에 인간 이기도한 이순신의 누구에게도 털어놓을수 없는 절절한 마음들을 일기를 통해서 나는 확인할수 있었다.
가.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나.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라.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마. 서늘한 기운이 들어와서 밤에는 더욱 쓸쓸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노라니 솟아나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바. 일찍 아침을 먹은 다음 솟구치는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사.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아.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자.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순신의 모습에서 나는 신(神)인 동시에 인간 이기도 하였던 성서속의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성서속의 그시대 사람들이 바랬던 것은 냐약한 인간의 모습 보다는, 구세주로서의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말그대로 인간을 구원하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었던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또 기대하는 모습의 이순신의 모습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누구보다도 예수와 이순신은 사람에 대한 배신과 그에 대한 감정 그리고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그들만의 고통을 안고 살아 나갔다. 이같은 그들의 모습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점은 무엇이며, 작금에 상황은 다르지만 되풀이되는 역사속에서의 전철에서 조금은 씁씁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이런 점들을 토로 하면서도 그런 한가운데에 나자신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동참을 하고 있음이 참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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