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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1일 23시 42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임진년>

정월

ü  16 (정축): 자기 한 몸 살 찌울 일만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토병 석공 박 몽세가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집의 개에게 피해를 끼쳤기에 곤장 80대를 때렸다 (16).

ü  장계: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 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 (17).

 

2

ü  5 (병신): .. 18순을 쏘았다 (18).

ü  : 화살 다섯 발을 쏘는 것을 말함. 10순은 50발을 쏜 것을 말한다 (19).

ü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병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게 우리가 일본과 함께 딴 뜻을 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했다. 그 흉측함은 참으로 이를 데가 없었다. 통사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19).

ü  23 (갑인): 비가 많이 쏟아져 일행 모두가 꽃비에 젖었다 (22).

ü  27 (무오): …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22).

ü  유성룡 (1542~1607): 호 서애. 25년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뒤 1590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가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했다.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25).

ü  증손전수방략: 유성룡이 직접 구해서 보내준 병서. 수륙전과 화공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잇다 (25).

 

4

ü  늦게 여필이 떠나고 홀로 창가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28).

ü  4 13: 임진 왜란이 발발한 날이다. 이순신은 이틀 후 경상 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을 보고 나서야 왜군의 침략을 알게 된다 (31).

ü  삼도: 임진왜란 초기의 삼도 수군의 삼도란 전라, 경상,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 좌/우도 및 경상 우도를 말한다. 충청 수군의 체제는 1594년에 갖추어졌다 (31).

ü  4 28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자, 30일 선조는 평양으로 피한다 (31).

 

5

ü  거북선의 구조: 거북선은 순수한 우리 고유의 조선 방식에 의해 건조된 국산 전함이다. ..이 같은 장점 때문에 거북선은 전술선으로 선단의 맨 앞에서 좌충우돌하며 적의 전함에 충돌해 마침내 침몰시키는 돌격함으로 사용되었다. … 지붕에는 적군이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판재 위에 철갑을 덮고 수백 개의 철침을 박아 놓았으며 구자가 씌어진 기를 꽂았다. … 앞의 용머리에서는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막을 터뜨려 적을 혼란시키도록 했다. 선체의 좌, 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돛대를 세우고 높이기를 자유자재로 하여 역풍이든 퇴조 때이든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 전함 거북선은 그 과학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워싱턴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중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32).

ü  판옥선: 판옥선은 임진 왜란 때 동원된 우리나라의 주요 군선이다. 보통 군선들은 무기를 다루는 전투 군사들과 노를 젓거나 키를 잡는 비전투 군사들이 거의 같은 위치에 배치된다. 따라서 군사들의 동선이 자주 겹치고, 노를 젓는 격군들의 손실도 컸고 배의 움직임도 현격히 둔화되었다. 바로 이런 단점을 극복한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만들어서 가장 아래쪽에 방을 만들고 노를 젓고 배를 움직이는 비전투원들을 배치해 전투에서 비전투원의 희생을 최소화했다. … 판옥선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력과 견고함이다 (34).

ü  이날, 여도의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효시했다 (36).

ü  옥포 해전: 1592 (선조 25) 5 7일에 옥포 앞바다에서 전개된 전투. 우리 군이 해전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37).

ü  사천해전: 1592 5 29일 노량, 사천에서 벌어진 전투. 이 순신은 적선을 바다로 유인해 내기 위하여 함대의 뱃머리를 돌려 먼 바다 쪽으로 후퇴하였다. ..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일본군들을 끌어낸 이순신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거북선을 앞세우고 총통 등 각종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자, 일본 함선들은 사천 포구 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런 사이에 만조가 되자 이 순신은 전 함대를 독려하여 사천 선창 안으로 왜선을 바짝 밀어 붙였다. 왜군은 육지에 있던 병력의 지원을 받으며 내륙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격침되는 함선과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왜적들이 쓴 탄환에 나대용이 맞고 싸움을 지휘하던 이 순신 또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37).

 

6

ü  5 29일 사천해전은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해전이다.

ü  6 11일부터 8 23일까지는 빠졌다. 이 기간 동안 일기가 빠진 것은 당포해전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후 함대의 정비와 3차 출동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순신은 7 8일에 한산도 해전을, 7 10일에 안골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39).

ü  당항포 해전: 15926 5. 이 순신은 왜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였다. 조선 수군 선단이 철수하는 척하자,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 선단의 대다수는 당항포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이 포구 안으로 도피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하여 모든 격침되고 말았다 (40).

ü  율포해전: 1592 6 7.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확인한 왜장 내도통지는 육지로 도망쳐 자셜하였다. 뒤이어 여도 권관 김인영과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위험한 적중에 뛰어들어 남은 왜병의 목을 베었다. 이 해전은 합포, 적진포 해전처럼 소수의 왜선을 상대한 싸움으로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40).

ü  한산도해전: 1592 7월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등이 왜 수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를 해전. 1592 4월 조선을 침범한 왜군이 남해, 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는 정예 병력을 늘여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 장수였던 구키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의 활동의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선 5,6척이 왜 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군은 그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에 학익진 (학날개진형: 거북선이 선두에서 공격하고 판옥선이 뒤를 따라오다가 적군의 배가 있는 곳에 이르면 따라오던 판옥선이 학의 날개 모양으로 양쪽으로 넓게 퍼지며 진형을 갖추어 공격하는 방법)을 짜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 이 해첩은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이 승리로 왜 수군의 주력이 대부분 격파되어 수륙병진계획이 좌절되었다. 이후 육지에서의 잇단 패전으로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큰 위협을 주었다.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세계의 많은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세계 4대 해전으로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한산도 해전을 꼽는다 (41).

 

8

ü  27: 서풍이 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산란했으며, 이날 밤에는 꿈자리도 어지러웠다 (43).

ü  28: 새벽녘에 앉아서 꿈을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43).

ü  부산포 해전: 1592 9 1일 조선 수군이 왜선 100여 척을 무찌른 해전. … 양 함대의 전선 수를 비교하면 약 3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왜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매우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 척의 조선 수군이 장사진 (긴 뱀과 같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선 군대의 진)으로 공격을 개시, … 100여 척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43).

 

<계사년: 1593>

ü  달빛은 / 배 위에 가득 차고/ 혼자 앉아 있으려니/ 이 생각 저 생각에 / 온갖 근심이 / 가슴을 치밀었다 (계사년 5 13).

 

2

ü  1593 1 9일 왜군에 빼앗겼던 평양을 수복했다 (47).

ü  8: 아침에 영남 우수사 원균이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약속 시간에 늦은 잘못을 크게 말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다고 했다. 내가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안으로는 도착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나부끼면서 들어왔다. 이에 진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7~8).

ü  10: 오전 6시쯤에 배를 띄워 바로 웅천 웅포에 이르니 적의 배들이 줄 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바다로 끌어내려고 하였으나, 이미 우리 수군을 두려워한 터라 나올 듯하다가는 도로 들어가 버려 끝내 무찌르지 못하였다. 정말로 억울하다 (48).

ü  12: 3도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떠나 곧바로 웅천 웅포에 도착했으나 적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왔다 물러가다 하였다. 아무리 꾀어 보아도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이나 뒤쫓아 갔으나 두 번 모두 섬멸하지 못했다 (48).

ü  14: 큰 적을 무찌르는 일로 논의하는 자리에 이렇게까지 술을 함부로 마시니, 그들의 사람됨에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49).

ü  20: 새벽에 배를 띄우자 동풍이 약간 불었으나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배끼리 부딪쳐 깨질 지경이었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호령하여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전쟁을 중지시켰다 (51).

ü  초요기: 전진에서 행군할 때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는 데에 쓰던 신호용 군기. 깃발에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으며 대장의 직품에 따라 크기나 색깔이 달랐다 (51).

ü  22: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마음이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냈다.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은 못 본 체하며 끝내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 통분했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에게 질문도 했는데 실로 한심한 일이었다. 오늘의 억울함을 무슨 말로 다 하랴. 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때문이다 (53).

ü  임진왜란과 명나라: 임진강을 끼고 조선, 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과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 겐소 사이에 강화 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 단계에 들어갔다. 조선 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53).

ü  원균 (1540~1597): 본관 원주. 이순신보다 5살 많다.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였으며 원균은 경상우수사였다. 그러므로 원균과 이순신은 관할 구역이 서로 접해 있었다. 왜적이 처음 들이닥친 곳은 부산이었는데, 부산은 경상좌수사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개전과 함께 경상좌수사 휘하의 수군은 곧 궤멸되었다. 당시의 모든 사료를 뒤져도 원균 휘하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이 적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은 없다. 원균의 함대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모두 없어진 것이다. 이는 원균이 왜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왜란이 터졌을 때도 적극적으로 왜적과 결전을 치를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왜란의 발생과 함께 경상 좌,우도의 수군은 모두 없어진 셈이다. 개전 초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 요인은, 경상좌수군이 자멸한 후 거제 해역을 지키던 경상우수군은 소규모의 전과를 올리면서 전라좌수영에 원군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정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점, 경상도의 해로에 밝지 못한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점을 들어 원군 요청에 조속히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휘권의 장악과 관련하여 둘 사이의 관계는 어긋났고, 결국은 원균의 계략에 의해 이순신이 하옥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난중일기>에 표현된 원균에 대한 감정은 매우 좋지 않다. 원균과의 문제는 이순신에게 매우 고민스럽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를 가리켜 원흉’, ‘흉악한 자라고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에 원균이 문상을 보낸 일조차 권율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왜군과의 전쟁만큼이나 아군끼리의 인간적인 번뇌가 그를 더욱 어렵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난중일기>에 원균에 대해 언급된 것이 모두 84번이다. 연도별로 보면 1593년에 28, 1594년에 30번 등 두 해에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여 하옥되었을 때 집중되어 있다. 1593년 원균과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에 이순신은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했다는 등의 표현을 쓰면서 심신이 고단했음을 여러 차례 토로하고 있다. 특히 원균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때를 잘못 만난 일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54).

 

3

ü  2: 뜸 아래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 이영남과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 영공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마음의 한탄이 되었다 (56).

ü  : , ,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 바람, 볕을 막는 데 쓴다 (57).

ü  행재소: 임금이 궁을 떠나 머무르던 곳. 이 때 선조는 파천하여 의주에 있었다 (57).

ü  1593 3월부터 명나라는 심유경을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에 보내 화의를 시작했다 (57).

ü  10: “명나라 군사들이 진작 송경 (개성)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어 행군하기가 어려우므로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들어가기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57).

ü  17: 우수사와 활을 쏘았다. 아주 형편이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58).

ü  18: 우수사와 장기를 두어 이겼다 (58).

 

5:

ü  3 23일부터 4월 그믐까지 빠졌다. 5월에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글로 기록해 두려고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의 일은 바쁘고, 쉴 겨를도 없어서 잊어버린 지 오래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고 써 놓았다 (59).

ü  1593 5월부터 명나라는 심유경을 왜군 본영으로 보내 풍신수길과 화의를 시작했다 (59).

ü  3: 우수사 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많이 뒤떨어져서 탄식할 만하다 (59).

ü  4: 오늘은 어머님 생신이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 (오래 살기를 기원함)의 술잔을 바치지 못하였다. 평생의 한이다 (59).

ü  5: 명나라에서 나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의 직품을 주었다고 하는데, 아마 잘못 들은 소문일 것이다 (60).

ü  8: 만호 이여념이 나오기에 우수사 있는 곳을 물었다. 창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방문해서 수사 원균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60).

ü  12: 선전관 성문개가 방문해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61).

ü  피란 중의 임금의 사정: 1592 4 30.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란하였다. … 피란 행렬이 시작되면서 많은 관리들과 군사들은 달아나고 벽제를 지날 때는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항복 등 100여명만이 왕을 호위했다. 전쟁 시작 20일이 못 되어 서울을 함락한 왜군은 그 기세를 몰아 계속 북상하였고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61).

ü  13: 이날 밤, 달빛은 배 위에 가득 차고, 혼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에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잠이 오지 않다가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62).

ü  14: 그들에게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장수들의 하는 짓을 들었다.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영남 수사원 평중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62).

ü  16: 점심 때 윤 봉사에게서 관동 (서울) 아주머니가 양주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울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찌 세상 일이 이렇게도 차가운고, 장례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더 가슴 아프다 (63).

ü  17: 종일토록 큰 바람이 불어 마음이 산란했다. 고성 수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약술과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는데, 복중 (상복을 입는 기간)이라 받기가 미안했다. 정으로 보낸 것이라 돌려보낼 수도 없어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해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63).

ü  18: 이른 아침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4알을 먹었다. 이윽고 설사를 하고 나니 조금 편안해진 듯하다.

ü  온백원: 위장약. 10여 종의 약재를 분말로 만들어 만든 환약으로 만성위염, 소화불량, 황달, 신장염, 풍증 등에 효능이 있었다. 이른 아침 식사 전에 4알을 먹었다는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위염이 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65).

ü  21: 원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부대를 크게 동요시켰다. 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밤에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또 비가 내렸다 (65).

ü  27: 경상도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다. 내용을 보면 원수사는 송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습다 (67).

ü  30: … 명나라 고관이 보낸 불로 적을 치는 무기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다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녁 때 조붕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 그러하니 어찌하랴 (68).

 

6

ü  3: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마른 곳을 골라서 앉을 수 없으니 한심스러웠다 (70).

ü  5: 날이 저물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매우 사나워 배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 경상도 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들어가 공격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70).

ü  7: 본도 우수사 우후 이정충이 저녁에 와서 서울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그 사정이) 가증스럽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71).

ü  8: 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100 여 명이다. 그나마 매번 거짓말을 꾸며 왔기 때문에, 이날 목을 베어서 일반에게 보였다. 거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마음 속도 산란하다 (71).

ü  9: 지루하던 비가 처음으로 맑게 갰다. 군중의 모든 장병들이 기뻐했다. .. 심기가 불편하여 하루 종일 배에 누워 있었다 (71).

ü  10: 새벽 2시 경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적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의 흉계와 시기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72).

ü  12: 아침에 흰 머리카락 몇 가락을 뽑았다. 흰 머리가 난 것이 큰 일은 아니지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구스럽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 옮겨진 궁궐의 소식을 들으인 동궁 (광해군)께서 편찮으시다고 하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참으로 가엾다 (72).

ü  13: 명나라 사람 왕경과 이요가 와서 수군의 형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고 갔다. 그들의 말을 통해서 이 제독 (이여송)이 진격해서 토벌치 않아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문책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감격스러운 점이 많았다 (73).

ü  1차 진주성 싸움: … 왜군은 159210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이 싸움의 승리로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73).

ü  16: 늦게 낙안 수령을 통하여 진해 공문서를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도의 대장들이 왜적들이 황산동에 나가 진을 쳤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후퇴하여, 진양 (진주시)과 의령을 지키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적의 전략은 참으로 헤아릴 길이 없었다 (73).

ü  17: 함안에 있던 각도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 조붕이 창원으로부터 와서 적의 형세가 대단하다고 전했다 (74).

ü  18: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닷새만이었다. 매우 잘못되었기에 곤장을 때려 보냈다 (74).

ü  22: 처음으로 전선을 만들기 위해 자귀질 (자귀로 나무를 다듬는 일)을 시작햇다. 목수 214명이 일을 했다. … 방답에서는 처음에는 15명밖에 보내지 않아 담당한 군관과 담당 관리 (아전)을 처벌했는데, 그 정황이 아주 간사하고 교활했다 (75).

ü  2차 진주성 싸움: 싸움은 6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75).

ü  23: 이른 아침에 목수를 점검했는데, 1명의 결근도 없었다 (75).

ü  25: 듣자니, 진주가 포위당했는데, 아무도 진격하지 못한다고 했다. 연일 비가 내려 적들이 물에 막혀 행패를 부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을 돕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76).

ü  26: 그런데 이미 양식이 떨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편안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맞게 된 셈이었다. 그 형세가 백전 백승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 우리를 도우니, 수로의 적이 비록 5,6백 척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76).

 

7

ü  1: 밤 기온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 뜸 밑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생각이 일어난다 (78).

ü  저녁 늦게 부하 김득룡이 와서 진양 (진주)이 위태하다고 전했다.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나간 사람이 한 헛소리 일 것이다. 초 저녁에 원연과 원식이 와서, 여러 가지 군중의 일들을 이야기 했는데 우스웠다 (78).

ü  3: 적선 여러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한편으로는 육지로 나오니 통분하다 (78).

ü  4: 흉악한 적 수만여 명이 죽 늘어서 기세를 올리니 분하고 원통하다 (78).

ü  6: 아울러 승정원의 저보도 왔는데 이를 보니 탄식할 만한 일이 많았다 (79).

ü  저보: 서울에 둔 각 지방의 출장소에서 중앙 (서울)의 여러가지 사항을 본군에 보고, 통지하는 문서. 관보의 일종.

ü  7: “진양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전라도까지 넘어갈 것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이다 (79).

ü  8: 남해로 왕래하는 조붕에게서 적이 광양을 친다는 말에 광양 사람들이 벌써 관청과 창고에 불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순천 권준과 광양 어영담을 보내려다가 전해들은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중지하고, 사도 군관 김붕만을 보내어 알아보게 했다 (79).

ü  9: 남해가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과 순천이 이미 노략질 당했다고 하였다. 광양 어영담, 순천 권준과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 등을 내보냈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이야말로 뼛속까지 저려서 말을 할 수 없다. .. 이날 밤, 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어나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뱃전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 닭이 벌써 울었다 (80).

ü  12: 연락 공문서가 왔는데, 광양 일은 헛소문이라 했다 (81).

ü  14: 진지를 한산도 두을포로 옮겼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순천 권준이 들어오더니, 장흥 부사가 본부의 일을 망령되이 퍼뜨린 것은 형언할 수가 없다고 했다 (82).

ü  15: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생각이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아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 (82).

ü  16: 아침에 맑다가 늦게 흐리더니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할 듯 싶다. 몸이 몹시 불편했다 (82).

ü  17: .. 몸이 몹시 불편했다 (82).

ü  18: 몸이 몹시 불편하여 자리에 앉았다 누웠다 했다 (82).

ü  20: 탐후선이 본영으로부터 들어왔다. 병사의 편지와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는데, 통첩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몰려 도망갔다고 했다. 그 거짓말을 형언할 수 없다. 상국 사람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일까. 통탄할 일이다 (82).

ü  21: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 걸이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도 거짓스러워 말할 수 없다. 이러고서도 일을 같이 한다면 어찌 뒷걱정이 없을까? (83).

ü  이순신이 여수에서 한산도 세포로 진지를 옮긴 것은 4일 전인 7 10일이었다. 이후 그는 3년 반이 넘도록 한산도를 본거지로 하여 수군의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 왜군의 서진북상 (서쪽으로 진격하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감)을 차단하고, 민생문제의 해결과 전란의 장기화에 대비하였다. 이곳에서 한산도가의 시조를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3).

ü  28: 사도 첨사 김완이 복병했을 때 잡은 포작 10명이 왜복을 바꿔 입는 등 하는 짓이 이상해서 추궁했다. 어떤 근거가 있는 듯하더니, 경상 수사 원균이 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족장을 10여대씩 때린 후 놓아 주었다 (84).  

ü  포작: 임진왜란 전 일정한 거처 없이 해상을 떠돌면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영위하던 천민 신분의 어부. .. 이렇게 떠돌던 포작들을 전시에 적절하게 투입하여 활용한 것은 육군 훈련을 받았던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85).

ü  29: 새벽 꿈에 아들을 얻었다. 포로를 얻을 징조다 (84).

 

8

ü  1593 8 1일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된다. 삼도는 전라좌, 우도 및 경상우도를 말한다. 충청 수군 체제는 1594년에 갖추어졌다. 또한 8월부터는 왜군과의 화친이 성립되어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85).

ü  2: 원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며 내게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더라고 전했다. 모두 망령된 짓이라 상관할 필요가 없다 (85).

ü  6: 원수사의 말에 번번이 모순이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86).

ü  7: 저녁에 경상 수사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고 전했지만, 원 수사와 그 군관은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86).

ü  9: 경상 수사는 복병을 일제히 보내기로 약속해 놓고 혼자서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87).

ü  12: 몸이 몹시 불편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허약한 탓에 땀으로 옷이 흠뻑 적기에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88).

ü  13: 몸이 몹시 불편해 홀로 배 뜸아래 앉았노라니 회포가 천만 갈래다 (88).

ü  17: 이날 밤은 달은 낮같고, 물결은 마치 비단결 같아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새로 만든 배를 진수했다 (88).

ü  26: 낙안 신호에게서 일본의 풍신수길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문서 초본과 명나라 사람이 그 고을에 와서 기록한 것을 보내 왔는데 받아보니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90).

ü  30: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기를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겨우 7,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 그의 마음 쓰고 행사함이 이 따위다 (90).

ü  풍신수길 (토요토미 히데요시: 1536~1598):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하고 근세 봉건사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천민 출생으로 7세 때 부친이 병사하고 모친이 재가함에 따라 양부 슬하에서 보냈다. 무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1554 18세 때 오와리 키요스의 성주인 오다 노부나가의 종복이 되었다. 몇 년 후 전공을 세워 무사가 되고 영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부장으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던 중 1582년 혼노사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하자 후계자로 부상하여 1587년 규슈를 정벌하고, 1590년 오다와라, 오우슈를 평정하여 전일본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그는 오랫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통일 이후 각 제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안전을 도모하며 신흥 상업세력 억제를 위하여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 종의주에게 명하여 조선과 통신사를 통한 수호 교섭을 하게 했으며, 조선 통신사로 간 황윤길, 김성일 등에게 정명가도 즉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내달라는 답신을 보냄으로써 침략의 의도를 드러냈다.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1596년 재차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8년 전쟁과 후계자 문제 등 혼란 속에서 병사하였다 (91).

 

9

ü  2: 저물녁에 이영남이 와서, 병사 선거이가 곤양에서 공을 세운 이야기와 남해 기효근이 도체찰사에 불공한다는 죄목으로 책망 받은 이야기를 전했다. 참 가소롭다. 기효근의 형편없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90).

ü  3: 순찰사 이정임의 공문이 왔는데 무릇 군사의 일가족들에 대해서는 일체 징발하지 말라고 했다.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90).

ü  7: 하루 종일 홀로 앉아 있노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녁 때 참후선을 기다렸으나 들어오지 않았다. 해 진 뒤에 가슴 속이 답답해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외풍에 머리가 몹시 아프다. 걱정스럽다 (92).

ü  14: 종일 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 홀로 뜸 아래 앉아 있으니 생각이 천만 갈래였다. …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냈는데, 왜군의 총보다 더 성능이 좋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으로 쏘아보고는,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묘법 (제작법)을 알았으니, 도내에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냈다 (93).

 

<갑오년>

ü  여러 장수들과 / 함께 죽기를 / 맹세하고/ 원수 갚을 뜻으로 /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갑오년 9 3)

 

정월

ü  12: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 (97).

ü  143 :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받아보니, 설날 아산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무려 200여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달라고 덤벼들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98).

ü  18: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으로 붙들어 왔다고 하며, 원수 (권율)가 방해하려 한다고 하니, 가소롭다. 예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 같으니, 무엇을 한탄하랴. 그대로 눌러 묵었다 (98).

ü  19: 소비포 이영남이 영남 여러 배의 사부 (활 쏘는 이)와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너무 참혹해서 차마 듣기가 거북했다. 원 수사가 공연수와 이극함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모두 관계했다고 한다 (99).

ü  20: 맑으나 큰 바람이 불어 살을 에듯 추웠다. 여러 배에 헐벗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떠는 소리를 냈다. 차마 듣기 어려웠다 (99).

ü  숙배례: 왕이나 왕족에게 하는 절. 왕이 내린 문서인 교서에도 왕게게 하는 것과 같은 예를 갖추어 절 (숙배례)을 올렸다 (101).

ü  29: . . 종일토록 내리고 또 밤새도록 내렸다. .. 몸이 불편해 저녁 내내 누워서 신음하는데, 큰 바람과 파도로 배들이 안정치 못해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102).

 

2

ü  2: 아침에 도망가는 군인들을 실어 나르던 자들의 죄를 다스렸다 (103).

ü  3: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한쪽 눈이 멀어버린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우조방장 어영담이 왔는데, 그에게서 역적들의 소식을 들었다. 걱정되면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했다 (104).

ü  5: 새벽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많은 큰 산마루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다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혼자 앉아서 손짓을 한는데,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꿈이 아닐 수 없다. … 도원수 권율의 회답이 왔는데, 심유격이 이미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이전에도 놈들의 술책에 빠졌는데,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104).

ü  6: 날이 저물어 흥양 (배홍립)과 김방제가 유자 30개를 가져왔는데, 싱싱한 것이 마치 금방 딴 것 같았다 (105).

ü  7: 봉과 분이 나갔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은 온양으로 갔다. 섭섭한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다 (105).

ü  8: 맑았으나 동풍이 크게 불고 날씨도 차가웠다. 봉과 분이 배로 떠난 것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깊이 잠을 자지 못했다 (106).

ü  9: 고성이 돼지를 가지고 왔다.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드는 것을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다고 하니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었다 (106).

ü  12: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애쓰는 일을 들으니, 그 강직한 마음과 그리움이 끝이 없었다 (108).

ü  16: 임금을 속이는 것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나라 일이 이러고서 싸움이 마무리될 리 만무하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110).

 

3

ü  2차 당항포 해전: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 해전은 이순신의 치밀한 작전 계획에 의한 결과였다 (113).

ü  7: 몸이 몹시 불편해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에게 패문에 대한 해답을 만들게 했건만 문장이 말이 아니었다. .. 내가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을 시켜 써 보내게 했다 (114).

ü  8: 병세의 차도가 없었다. 기운은 더욱 빠져서 종일 괴로웠다 (114).

ü  10: 병세가 차차 덜해졌지만, 열이 치받쳐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114).

ü  13: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고백하므로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사진과 이응원 등이 왜군 복장을 한 자를 목잘라 바친 일은 고쳐 보냈다 (전과를 높이기 위 해 조선인의 시신에 왜군의 옷을 입히고 목을 잘라 거짓으로 보고한 것을 말한다 115).

 

4

ü  9: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118).

ü  소서행장: 일본명 고니시 유키나가. 화평 공작에 실패하여 귀국하였다. 정유재란 재침하였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여 돌아갔다.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반대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고니시는 신앙심이 깊은 장군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고니시와 그의 아버지는 일본의 예수회 보고서에 가장 뛰어나고 열성적인 신자로 언급된다 (119).

ü  26: 병세가 아주 심해서 사람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120).

 

5

ü  5: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지붕이 세 겹이나 걷혀 조각조각 높이 날아가고, 삼대 같은 빗발에 몸을 가리지 못했다. 어이없었다 (122).

ü  7: 기운이 편안한 것 같았다. 16군데를 맞았다 (122).

ü  9: . .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심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고 취한 듯, 꿈속 인 듯, 정신이 몽롱한 게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ü  10: . .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수많은 배가 온 바다에 깔려 있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능히 섬멸할 만 했다 (122).

ü  16: 집에 물이 새서 마른 데가 없었다. 배 사람들의 거처가 편치 않을 것이 무척 염려스러웠다 (123).

ü  20: 온종일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호남 방백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124).

ü  25: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싸움하는 군사들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125).

 

6

ü  4: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 여러 장수들 및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복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송구하고도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균이 술 취해서 망발을 부린 때문이었다 (126).

ü  5: 10시쯤 관청 노비 급창, 금산과 처자 3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 두고 믿고 부리던 자들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가니 참혹하다 (126).

ü  9: 밤늦게 해 (바다)의 젓대 소리와 영수의 거문고를 들으면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127).

ü  11: 맑았지만 무덥기가 쇠라도 녹일 것 같았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이별하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홀로 빈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늦게 바람이 사나워지자 걱정이 더욱 커졌다. 늦게 충청 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달빛 아래서 함께 이야기할 때, 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래도록 앉았다가 헤어졌다 (127).

ü  12: 바람은 크게 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가뭄이 심해서 농사가 염려스럽다 (127).

ü  14: 더위와 가뭄이 아주 심해서 섬 속이 찌는 듯했다. 농사가 매우 걱정되었다. 충청 영공 이순신과 사도, 여도, 녹도와 함께 활 20순을 연습했는데 충청이 아주 잘 맞혔다. 이날 경상 수사 원균이 활을 잘 쏘는 부하를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의 처소에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 (128).

ü  15: 신경황이 들어오는 편에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 분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히 내렸다.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128).

ü  18: 원수 (권율)이 그의 서처남 조대항의 말을 듣고 이렇게 사사로운 정을 쓴 것이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128).

ü  22: 괴로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웠으며, 저녁에는 몸이 불편해서 두 끼니나 식사를 못했다 (129).

 

7

ü  1: 배응록이 원수로부터 왔는데, 원수가 지난번 말한 것을 뉘우친 뒤에 보냈다는 것이다. 가소롭기 그지없다 (130).

ü  3: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 차례 양식을 훔쳐간 자를 처형했다 (131).

ü  12: 정승 유성룡이 돌아갔다는 부고가 순변사에게 왔다고 하나, 이는 반드시 질투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리라.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이날 밤 마음이 심란해서 홀로 마루에 앉아 있는데, 스스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쌓여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일 유정승이 어찌 되었다면 장차 나라 일을 어찌할 것인가 (133).

ü  13: .. 홀로 앉아 면의 병세가 어떤가를 생각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으니 두 괘가 모두 좋은 것이었다. 또 유정승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고, 다시 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저녁 내내 비가 오는데 홀로 앉아 있는 느낌을 이길 수 없다. … 비가 올지 갤지 점쳐 보니 뱀이 독을 뱉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장차 큰 비가 내릴 것 같은데 농사 일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밤에 장대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134).

ü  14: . .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장대 같았다. …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 절묘하다. 충청 수사와 순천을 불러다가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심이 마음 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할 것인가 (134).

ü  19: 아침에 (명나라 사람들에게) 환영례를 표시하는 단자를 드리자,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며 주는 물건도 상당히 풍성하다고 했다. … 점심 식사 후에 원 수사 혼자서 술을 대접하는데, 상은 그득했지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136).

ü  20: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되, “명나라 장수 장홍유가 총병 유정이 있는 남원에 가지 않고 곧바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되, “처음에 파총이 남원으로 온다는 간절한 소식이 이미 유 총병에게 전해졌는데, 이제 중지하고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반드시 남의 말들이 있을 터이니 가서 유 총병을 만나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파총이 듣고 과연 그 말이 옳다. 말을 타고 나 혼자 남원으로 가서 서로 만나 본 뒤에 곧바로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고 말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 파총이 내 배로 와서 조용히 이야기한 뒤에, 작별의 술잔을 권했다. 7잔을 마신 뒤에 뱃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 번 세 번 석별의 정을 나누고 송별했다 (137).

ü  27: 밤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를 풀고 크게 울었다. 이것이 좋은 징조라고 한다 (138).

ü  28: 늦게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것을 감독했다. 의능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저물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138).

 

8

ü  13: 오전 10시쯤에 배로 내려가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갔다. 따로 날쌘 장수를 뽑아서 춘원 등지로 보내어 적을 기다린 뒤에 치게 했다. 그곳에서 머물러 잤다. 달빛은 마치 비단결 같이 잔잔한데 해를 시켜 젓대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두었다 (140).

ü  17: 원수 권율이 정오에 사천으로 와서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해서 곤양 말을 빌려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수령의 처소로 갔다. …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다. 가소로웠다 (141).

ü  25: 사도가 휴가를 얻어 가기에 9월 초일에는 돌아오라고 일렀다 (142).

ü  26: 흥양 보자기 막동이란 자가 장흥 군사 30명을 배에 싣고 도망간 죄를 지어 사형에 처한 뒤 효시했다 (143).

ü  30: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다. 벌써 생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른 일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 … 곤양이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내서 더욱 유감스러웠다. 밤이 들면서 마음이 심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144).

 

9

ü  3: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률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해상에 있으면서 절대로 그런 적이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원수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적이 험한 곳에 숨어 있는 관계로 용이하지 않다. 험한 소굴에 진지를 구축한 적이라 경솔히 나아가 칠 수 없음은 물론,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이렇듯 어지럽건만 안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할꼬. 10시쯤 홍양이 내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145).

ü  7: 아침에 순천 부사 권준의 편지가 왔다. “순찰사 홍세공이 초 10일경 본부에 도착하고, 좌의정 윤두수가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146).

ü  15: 새벽 일찍이 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예를 드렸다. 우수사는 미리 약속을 하고도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으니 탄식스럽다 (147).

ü  20: 새벽에 바람은 그치지 않았으나 비는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에 꾼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바다 속에 있는 외로운 섬이 달려가다가 내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았다. 사방에서는 모두 놀라서 달아났는데, 나만 혼자서 끝까지 그것을 구경했었다. 참으로 장쾌했따. 이것은 왜놈들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148).

ü  21: 저물어서 장수들에게 뛰어넘기를 시키고, 또 군사들에게는 씨름으로 겨루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 (148).

 

10

ü  2: 선봉선 30척에 명령하여 장문포에 주둔한 적의 형세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151).

ü  4: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약속한 뒤 군사 수백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선봉은 장문포로 먼저 보내어 싸움을 걸도록 했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진격하자, 왜적들을 정신을 못차리고 갈팡질팡 하였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151).

ü  14: 새벽 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빌면서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인 뒤에 깨었다 (153).

ü  17: 늦게 우수사와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던 중에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짓이 많이 논의되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나중에 원 수사도 왔다. 그 흉패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54).

 

11

ü  15: 따듯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모양이니 그야말로 재변이다. 아버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고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슬픔과 마음의 회환을 어찌 다 말하랴 (158).

ü  17: 서리가 눈같이 쌓였는데,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58).

ü  26: 소한인데 맑고 따듯했다. … 이날 메주 10섬을 쑤었다 (159~160).

 

<을미년: 1595>

ü  나라의 정세가/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같은 /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 (을미년 7월 초).

 

정월

ü  1: 촛불을 밝히고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162).

ü  7: 남해의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와서 인사를 드렸다 (162).

ü  야여문: 항복한 왜인들의 이름을 우리말 발음에 의거한 한자로 적었다 (163).

ü  15: 우우후 이정충을 불렀는데, 정충이 실족하여 물에 빠져 한참 동안 헤엄치는 것을 간신히 건져 내었다고 한다. 불러서 위로했다 (163).

ü  21: 장흥이 방문했다. 그에게서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가소롭다 (164).

ü  이 일 (1538~1601): 1592년 임진왜란 때 순변사로 상주, 충주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이순신과는 1587년 조산보 (두만강 입구의 섬) 만호로 있었을 때 인연이 있다. 여진족이 우리 백성을 납치해 가자 이순신이 이를 추격하여 일부 백성을 되찾아 왔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적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했다. 이 일은 이를 트집 잡아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려 했던 지휘관이었다. 이 문제로 이순신은 첫 번째 백의종군을 명 받기도 하였다 (35).

 

2

ü  3: 흥양 배에 불을 냈다는 신덕수를 신문했지만, 물증을 잡지 못하여 가두었다 (165).

ü  19: 군관 송한련이 와서 말하되,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167).

ü  27: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서 배설과 교대하려고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게 했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두세 번 거듭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 너무도 무식한 것이 가소로웠다.

ü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원균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데 반발하다 1594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후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169).

 

3

ü  17: “수사 이계훈이 배에 불을 내고 물에 빠져 죽었으며, 군관과 격군 140 여 명이 타 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170).

ü  23: 과녁 세울 자리를 닦고 앉아서 종일토록 즐기다가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171).

ü  26: 10시 경에 동쪽이 어둡다가 밝았다. 무슨 상서로움인지 모르겠다 (171).

 

4

ü  16: 종일 큰 비가 왔다. 비가 흡족하니 금년 농사는 풍년이 들 것 같다 (174).

ü  20: 이영남이 장계의 회답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남해를 효시하라는 내용이다 (174).

ü  24: 정오 때 강천석이 와서, “도망친 왜놈 망기시로는 무성한 풀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을 잡고, 왜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기에 곧 압송해 오게 했다. 삼도에 분담시킨 왜놈 포로들의 머리를 베라고 명령했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174).

ü  29: 노윤발이 미역 99동을 따 가지고 왔다 (175).

 

5

ü  4: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몸소 나가서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먼 바다에 앉았으니 마음이 답답하다  .. 아들의 편지를 보니 요동 왕작덕이 왕씨 (고려)의 후손으로서 군사를 일으킨다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176).

ü  5: 몸이 춥고 불편해서 많이 토하고 잤다 (176).

ü  13: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종일 그치지 않았다. 혼자 대청 가운데에 앉았는데, 온갖 생각이 끝이 없었다.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177).

ü  17: 소금 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 (178).

ü  21: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고하되, “저희 동료 왜인으로 산소란 자가 흉측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인을 시켜 그의 목을 베게 했다 (178).

ü  28: 밤새도록 큰 바람이 불었다. 전선을 안정시킬 수 없었는데, 간신히 구호했다 (179).

ü  29: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을 뿐인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치는 바가 있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음을 어찌하랴 (180).

 

6

ü  12: 새벽에 아들 울이 들어오는 편에 들으니 어머님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구십 노인이 이런 위태한 병 (이질)에 걸렸으니 자못 걱정스럽다 (182).

ü  13: 남해 기효근은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182).

ü  20: 하루 종일 다락에 앉았다가 충청 수사 선거이의 발음이 분명치 못하다는 말을 듣고 저녁에 친히 가서 보았다. 중한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바람과 습기에 많이 악화되어 더욱 걱정스러웠다 (183).

ü  선거이 (1550~1596): 이순신보다 5살 연하로 선조 3년 무과에 급제했다. 1587년 녹둔도에서 당시 만호였던 이순신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시켰다. 생일에 음식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183).

ü  24: 음탕한 여인 12명을 잡아내고, 아울러 그 대장까지 처벌했다. 늦게 침을 맞아 활을 쏘지 못했다 (184).

ü  26: 오늘은 언경 (권준의 자) 영공의 생신이라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취하고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 헤어졌다 (184).

 

7

ü  2: 이날은 선친의 생신이다. 슬픈 생각에 눈물지었다 (185).

ü  10: 몸이 몹시 불편했다. 늦게 우수사와 서로 이야기했다. 양식이 떨어져도 아무런 계책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 밤이 깊어 다락 위에 누워 있으니 초승달 빛은 다락에 가득 차고 심란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187).

 

8

ü  15: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웠다 (192).

ü  16: 궂은비가 개지 않더니 하루 종일 안개비가 내렸다.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192).

ü  21: 저녁 때 사천 땅 침도 (삼천포) 앞에 배를 대고 잤다. 밤 기운이 몹시 차고 마음이 불편했다 (192).

ü  23: 체찰사에게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말 가운데,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야 겠다는 뜻이 많았다. 호남 순찰사는 남을 비방하는 의도가 많았다. 탄식스러웠다. 늦게 김응서와 함께 촉석루 (진주)에 이르러 장사들이 패전한 뒤에 죽은 곳을 보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193).

ü  진주성: 1592 10, 임진왜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 목사 김시민 (1554~1592) 3,800명의 군사로서 3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의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해인 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왜군 10만 여명이 다시 침략하여 끝내 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194).

ü  논개: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꾀어 강물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194).

 

9

ü  2: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이고 일을 시켰다 (196).

ü  14: 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며 준 시 절구 한 절은 다음과 같다 (197).

n  북쪽 (녹둔도)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 (전라 좌수영)에 와 죽고 삶을 같이 하더니/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나누면/ 내일은 우리 서로 떠나겠구려

ü  25: 오후 2시에 녹도 하인의 실화로 대청과 다락방이 모두 타 버렸다 (198).

ü  26: 홀로 배 위에서 앉아서 종일토록 앉았다 누웠다 하였는데,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거북선의 장수 이언량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198).

 

10

ü  5: 이른 아침에 다락에 올라가서 일하는 것을 감독했다. .. 항복해 온 왜인들을 시켜 흙을 운반케 했다 (199).

ü  9: 대청 역사를 모두 마쳤다 (200).

ü  13: 일찍 새로 지은 다락에 올라가 대청에 흙 바르는 일을 항복한 왜인들에게 필역 (일을 모두 끝마침)케 했다 (200).

ü  21: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공태원을 불러 왜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201).

 

11

ü  1: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을 먹였다 (202).

ü  선조 (1552~1608):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는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당되었고, 동인도 남북으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려 국력은 쇠약해졌다. …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고 부산에만 군사가 집결하는 것을 염려하여 호남지역과 육지에도 군대를 배치하게 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공신을 녹훈하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 서인의 당쟁이 격심해져서 큰 시련을 겪었다. 조선에서 후궁의 소생으로 왕이 된 첫 번 째 왕이었다 (203).

ü  13: 도양장에서 추수한 벼와 콩이 820석이었다 (204).

ü  16: 항복한 왜인 여문연기, 야시로 등이 와서 고하되, “왜들이 도망하려 한다고 하였다. 우우후 이정충을 시켜 잡아다가 주모자 준시 등 2명의 머리를 베었다 (204).

ü  21: 이날 청어 132,040 두름을 곡식과 바꾸어 사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 (204).

ü  아버님 제삿날: 이순신의 아버지는 1583 11 15일에 죽었으나, 당시 함경도 경흥 견원보의 권관으로 있던 이순신은 이듬해 1월에야 소식을 들었다. 부고를 접한 이순신은 곧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렀다 (205).

 

<병신년: 1596>

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을 것이다 (209)

 

정월

ü  2: 일찍 나가 군기를 일일이 검열했다 (210).

ü  7: 이른 아침 이영남과 좋아 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덤벼들기 때문에 피해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겠노라고 말했다 (212).

ü  8: 일찍이 항복한 왜인 5명이 들어왔다. 그 사연을 물으니 저희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도 너무 고되기 때문에 도망쳐 나와 항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212).

ü  12: 날이 샐 무렵, 꿈을 꾸었는데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둘이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근심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앞서 듣건대, 영의정 유성룡이 천식증으로 몹시 편찮다고 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213).

ü  13: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 경에 잠들었다 (214).

ü  18: 아침부터 종일 군복을 다름질했다 (214).

ü  20: 종일 비.. 기운이 피곤하여 낮잠 반 시간을 잤다. 오후 1시쯤에 메주 만드는 일을 끝내고 온돌에 넣었다 (215).

ü  23: 자정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눈이 2 (60센티미터) 정도 내렸다. 근년에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날 밤 몸이 몹시 불편했다 (216).

ü  28: 정오에 순찰사가 와서 활을 쏘고 같이 이야기도 했다. 순찰사가 나와 함께 활쏘기를 겨루다가 7푼을 지고 섭섭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우스웠다. 군관 3명도 모두 졌다 (216).

 

2

ü  3: 저물 무렵에 어란 만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으로부터 와서 부산 왜놈 3명이 성주에서 항복한 사람을 거느리고 복병한 곳에 와서 장사를 하겠다고 한다고 하므로, 곧 장흥 부사 배홍립에게 명령하여 내일 새벽에 가서 보고 타일러 쫓으라고 했다. 이놈들이 어찌 감히 물건을 사려고 온 것이랴. 아마 우리의 허실을 염탐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218).

ü  5: 식사 후에 권숙이 와서 돌아간다고 하므로 종이와 먹 2, 그리고 패도 (차는 칼)을 주어 보냈다. 늦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도 쏘고 풍악도 울렸다 (218).

ü  14: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여 물 긷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220).

ü  15: 해질녘에 들으니 우도 (전라 우도)에 항복한 왜인이 경상도의 왜인과 짜고서 도망칠 계획을 꾸민다고 하므로 전령을 놓아 막았다 (221).

ü  16: 이날 밤에 너무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밤을 밝혔다. 봄철의 피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 (221).

ü  28: 전라도 수군 중 우도 수군만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하라는 명령이 있다고 한다. 참 어이없다. 조정의 지도가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의미할 수 있는가. 국가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224).

 

3

ü  2: 몸이 몹시 불편해서 업무를 보지 않았다. 기운을 차릴 수도 없었고, 땀도 많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병의 시초인 것 같다 (226).

ü  5: 식사 후에 우수사를 만나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 이억기는 모드 것을 사과했다 (226).

ü  도배: 도배 및 구대는 한 쌍의 술잔으로 장군께서 친히 쓰시던 유물이다. 모양이 복숭아와 같아서 도배라고 이름한 것으로 표면에 복숭아 잎 세 잎이 받치고 있어 한층 아름답게 보인다 (227).

ü  14: 아침 나절 군량에 대한 회계를 맞추어 보았다 (228).

ü  16: 오전 7시경에 동남풍이 몹시 불어 지붕이 걷힌 데가 많았고, 창문 종이가 떨어져 비가 방안으로 들이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229).

ü  19: 맑았으나 동풍이 크게 불고 날씨가 매우 차가웠다.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다 (230).

ü  21: 종일 큰 비가 쏟아졌다. 초저녁에는 곽란과 구토가 나서 한 시간이나 고통스러워하다가 자정에 조금 가라앉았다. 일어났다 앉았다 몸을 뒤척거리면서 공연한 고생을 하는 듯 생각하니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날 너무 무료해서 군관 송희립, 김대복, 오철 등을 불러서 종정도를 놀았다. .. 자정에야 비가 그치고, 오전 2시경에 이지러진 달이 비치었다. 방 밖에 나가서 거니는데 몸이 몹시 피곤했다 9230).

ü  23: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 돌아갔다. 이날 처음으로 미역을 땄다 (230).

ü  26: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전일 우도의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를 잘못 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소로웠다 (231).

 

4

ü  3: “왜놈 4명이 부산으로부터 장사하러 나왔다가 바람에 불려 표류되었다고 하므로, … 그 흔적을 탐사해 본 즉 정탐하러 왔던 것이 명확하므로 목을 베어 죽였다 (232).

ü  16: 아침 식사 후에 나가서 난여문 등을 불러다가 불 지른 왜놈 3명이 누구인지를 물어 본 뒤 붙들어다 처형시켰다 (234).

ü  19: 습기와 열 때문에 침을 20여 군데나 맞았더니 속에서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여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 이날 아침 남녀문을 통해 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한량없으나 믿을 말이 못 된다. 이 소문이 벌써부터 퍼졌었는데, 아직 확실한 기별은 안 왔다 (235).

ü  25: 일찍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있었다 (236).

ü  29: 아침 저녁에 목욕을 한 차례씩 했다. 남녀문으로 하여금 투항한 왜인 사고여음의 목을 베게 했다 (236).

 

5

ü  3: 가뭄이 너무 심했다. 자못 걱정스러운 말을 어찌 다하랴 (237).

ü  5: 밤이 깊도록 즐겁게 뛰놀게 했다. 그것은 스스로 즐겁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와 병사들의 노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238).

ü  6: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큰 비가 내렸다. 농민의 소망을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 날이 막 어둘 무렵에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것은 감관 무리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으면서 묵은 불을 살피지 못해 일어난 재변인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238).

ü  7: .. 늦게 갰다. 밤에도 걱정하고 앉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열고 물어 보니 이영남이 도착한 것이었다. 불러들여 조용히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238).

ü  가등청정 (가토 기요사마 1562~1611):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6촌간으로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지내며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방면으로 출범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울산 싸움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갈등을 빚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섭정을 맡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인 이에야스 측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구마모토 대영지의 세습 영주가 되어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였으며, 정치가로도 능력을 발휘하다가 1611 8 2일 사망하였다 (239).

ü  15: 들으니 한산도 뒷산 상봉에서 다섯 섬과 대마도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기에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가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239).

ü  16: 이날 밤에 비 올 징조가 많더니 자정에 비로소 비가 죽죽 내렸다. 이날 밤, 정화수를 마시고 싶었다 (240).

ü  17: 다락에 기대어 혼자 시를 읊조렸다 (240).

ü  24: 허내은만에게 쌀 10말과 소금 1곡을 보내주고 힘껏 정보를 수집해서 보내라고 일렀다 (241).

ü  25: 종일 비가 내렸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끝이 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하는 느낌이 많았다 (241).

ü  28: 청정이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못 믿을 말이다 (241).

 

6

ü  남도포 만호의 소실인 본포 사람이 허가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억지를 부리고 싸움을 했다고 한다 (243).

ü  수군의 해상훈련도: 조선 후기 첨자진을 형성하여 훈련하는 모습. 조선 수군은 부단한 해상 훈련을 했다 (244).

ü  24: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동료인 신시로를 죽이자고 청하기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246).

 

7

ü  7: 경상 수사와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와서 세 가지 화살로 활 연습을 했다 (248).

ü  9: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통신사가 탈 배의 돛자리 준비가 완전치 못하다고 누누이 말했다. 우리 것을 빌려 썼으면 하는 뜻이 그 말 속에 나타났다.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중국 가는 사신들이 요구하는 부채를 만들 대나무를 얻어 오기 위해서 박자방을 남해로 보냈다 (248).

ü  12: 새벽녘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곧 그치고 무지개가 서더니 한참 그대로 있었다 (249).

ü  13: 해진 뒤에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 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는 그대로 둘 것이 못되지만, 항복한 왜인들이 놀음 한 번 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금하지 않았다 (250).

ü  16: 북쪽으로 툇마루 3칸을 만들었다. 이날 충청도 홍주의 격군으로서 신평사는 사삿집 종 엇복이 도망치다가 붙잡혔으므로 목을 잘라 효시했다 (250).

ü  17: 충청도 홍산에서 도둑 무리가 일어나 홍산 수령 윤영형이 붙잡히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끌려갔다고 한다. 외구도 아직 멸하지 못한 이때 도둑마저 이러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250).

ü  18: 저녁때 들으니 항복한 왜적 연은기, 사이여문 등이 흉악한 음모를 꾸며서 남여문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250).

ü  19: 남녀문이 연은기와 사이여문들의 목을 베었다 (250).

ü  20: 그 편에 들으니 충청도 토구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 떼) 이몽학이 포수 이시발의 총에 맞아서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ü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 중 (1596)에 이몽학이 민중을 선동하여 충청도에서 일으킨 난. 이몽학은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부친에게 쫓겨나 충청도, 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모속관 한현의 부하로 들어갔다. … 이몽학이 부하 김경창 등에게 살해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이순신이 들은 이시발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은 잘못 전해진 풍문이다 (251).

ü  24: 이날 우물을 고쳐 파는 곳에 가 보았다 (252).

ü  25: 아침에 사냥한 짐승 가죽의 수효를 세어 녹피 (사슴가죽) 10장은 창고에 넣고, 표범의 가죽과 화문석은 통신사에게 보냈다 (252).

ü  29: 내가 쏘던 활은 고재 (활의 양 끝에 휘어진 부분)가 들떠서 곧 수리하라고 했다. 체찰사로부터 초시를 보게 한다는 공문이 도착했다. 저녁 때 들으니 점쟁이 집의 집 보던 아이가 그 집의 세간을 훔쳐 가지도 도망쳤다고 했다 (252~3).

ü  이시발: 임진왜란 발발로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 군사와 행정 실무에 밝았고 정치색은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253).

 

8

ü  2: 늦게 광풍이 일어나고 빗발이 장대 같아서 대청 마루에 걸어 놓은 바람막이가 방마루 바람막이에 부딪혀 두 바람막이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아까웠다 (254).

ü  3: 조방장과 충청 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아들들은 육냥궁 (무게가 6냥쭝인 것)을 쏘았다 (254).

ü  4: 늦도록 다락에 앉아서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보다가 바람에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활 2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해서 활을 중지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 밤에는 낮보다 곱절이나 앓아 신음하면서 밤을 꼬박 세웠다 (254).

ü  종이: 종이는 크기에 따라서 장지, 백지 등으로, 염색에 따라서 황염초주지, 옥새저주지 등으로 용도에 따라서 간지, 주지 등으로 구분된다 (255).

ü  10: 아침에 한련에게 그물을 만들라고 생마 40근을 주어 보냈다. .. 늦게 두 조방장과 충청 우후를 불러 상화떡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 어둘 무렵에 달빛은 마치 비단결 같고 생각은 말 갈래라,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255).

ü  21: 식사 후에 활터에 나가서 아들들에게 활 쏘기를 익히고, 또 말을 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257).

 

8

ü  10: 새벽에 초시를 보았다 (259).

ü  12: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스스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서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둥켜 앉아, 밤이 새도록 어머니를 위안하면서 기쁘게 해 드렸다 (260).

ü  13: 어머님 모시고 곁에 앉아 아침 진지상을 드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셨다. 늦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본영 (여수)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경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했다 (260).

ü  15: 저녁에 들으니 아들들이 초시에 뽑혔다고 한다 (260).

ü  아들들이 초시에… : 이순신의 가문에서 걸출한 문신과 무신이 많이 배출되었다. 무관은 이순신의 후손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 이순신이 최초로 임명된 통제사는 고종대까지 208명이 역임하였는데, 이순신의 후손 중에 12명이 임명되었다 (261).

ü  24: 나는 부사와 함께 가리포 (완도군 완도읍)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었다. 함께 남쪽 망대에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가의 여러 섬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이다. 그렇지만 형세가 외롭기 때문에 부득이 이진으로 옮겨 합친 것이다. … 원공의 흉악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261).

 

9

ü  4: 이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공자의 사당에 가서 참배했다 (262).

ü  8: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있었으나, 세조의 제삿날이라 먹지 않고 내놓았다. ..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263).

ü  13: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 주었다 (264).

 

10

ü  7: 일찍이 어머님을 위한 수연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을 베풀고 하루 종일 즐기니 다행이다 (267).

ü  9: 종일토록 어머님을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머님이 몹시 서운해 하시는 기색이었다 (267).

ü  1596 10 12일부터 12 30일까지와 이듬해 1 1일부터 3 30일까지의 일기가 누락되었다. 이 기간 동안 원균의 모함으로 하옥되고 4월에 사면되기까지 이순신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옥중에서는 일기를 쓸 수 없다. 따라서 이 시기는 모함과 투옥, 사면과 복직 등의 복잡한 일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기가 누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267).

ü  10: 자정에 뒷방으로 갔다가 새벽 2시에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정오에 어머님께 하직하고 오후 2시경에 행선했다. 바람따라 돛을 달고 밤새도록 노를 재촉해왔다 (268).

 

<정유년 1 (1597)>

ü  아직도 신에게는 /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69).

 

4

ü  옥문 밖으로 나왔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방문했다. 울적한 마음을 이기기가 더욱 어려웠다. … 정으로 술잔을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치 못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 영공 이순신이 술을 가지고 와서 취하며 이야기했다. 영의정 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관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해 땀이 몸에 흠씬 베었다 (270).

ü  3: 아침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서 편안히 쉬다가 저물어 수원에 들어가 경기 관찰사 홍이상 밑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가지고 위로했다 (271).

ü  정월 초1일부터 3 30일까지 빠졌다. 이 기간 동인 이 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하옥되었다 (271).

ü  정유재란의 발발: 임진왜란 발발 이후 5년간 계속된 명, 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 9월 일본 오사카 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 이에 화가 난 도요토미는 이듬해인 정유년에 재차 침입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 공산,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 5천명도 재출동했다 (271).

ü  4: 일찍 길을 떠나 독성 아래 이르니 판관 조발이 술을 갖추어 막을 치고 기다렸다. .. 황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수탄을 거쳐 평택 고을의 이내은손의 집에 이르니, 주인의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271).

ü  5: 해가 뜨자 길을 떠나서 바로 선영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 이르렀다. 두 번이나 산불이 나서 수목이 타 죽어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산소에 나아가 움려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 때가 지나서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선대의 사당에 울면서 절했다 (271).

ü  이순신의 누명과 백의 종군: 이순신은 1597 2월 한산도에서 체포되었고, 3 4일 서울에 도착 즉시 의금부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 이순신에게 이런 죄명이 씌여진 것은 임진왜란 초부터 시작된 원균과의 갈등과,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인 이 순신을 제거하고자 했던 왜장 소서행장의 간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 조정은 수군이 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를 바랐으나 이순신은 왜적이 먼저 움직인 연후에 공격하는 자신의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다. 이는 군사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이 전략을 바꾸어 공격할 경우 엄청난 패배를 자초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나, 자신들의 명을 따르지 않는 이순신에 대한 선조와 조정의 불신을 더욱 키우는 빌미가 되었다. 이렇게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오해가 깊어가던 중에 왜장 소서행장이 조선 조정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가등청정이 본국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을 알려줄 테니 조선 수군이 매복해 있다가 그를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이 두 적장의 갈등을 알고 있었던 선조는 소서행장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정보가 조선 수군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이라고 의심한 이순신은 출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명을 따르지 않은 것을 빌미로 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불신을 받아온 이 순신에 대한 문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순신의 문책에 관련한 어전회의는 7차에 걸쳐 열렸으며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하였으나, 전란 중에 장수를 죽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 휘하의 백의종군을 명받았다 (272).

ü  9: 홍군우는 노래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노래를 들어도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는데, 실수하지는 않았다 (273).

ü  윤간의 종 집: 직위가 박탈되고 백의종군을 명받아 그 신분이 종과 같이 낮아졌음으로 도원수 권율의 진에 도착하기까지 이순신은 관노나 종 등의 집에서 주로 묵었다 (273).

ü  영공: 직위가 없으므로 자신의 부하였던 이순신을 높여 부른 것이다 (273).

ü  11: 새벽에 꿈이 몹시 심란하여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으니, 이게 무슨 징조일까.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73).

ü  13: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274).

ü  14: 홍 찰방, 이 별좌 등이 들어와 곡하고 관을 짰는데, 관은 본영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 것으로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한다 (274).

ü  15: 늦게 입관했다. 친한 벗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을 정성껏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수령이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하고, 전경복이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을 돌봐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274).

ü  16: 궂은 비.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겨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274).

ü  17: 금부도사의 서기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서 빨리 떠나기를 재촉했다 (274).

ü  18: .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해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그저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275).

ü  19: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275).

ü  21: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아있으려니 슬픈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276).

ü  22: 판관 박근이 방문했고, 부윤도 후히 접대했다. 판관이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 등을 보내주었다 (276).

ü  26: 손인필의 집에 사적이 처소를 잡았는데, 이 고을 현감 이원춘이 급히 나와 극진히 대접하고 금부 도사도 방문했다. … 밤에 홀로 앉아 있으니 비통함이 컸다 (276).

ü  원수 권율이 벌써 순천으로 갔다고 하므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명받았기 때문에 권율의 진이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277).

ü  28: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승경을 보내어 문안하며 전하되,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고 했다 (277).

ü  이순신의 백의종군과 수군통제사 복귀 경로 (278):

n  옥문을 나섬 (4 1)

n  서울 출발 (4 3)

n  합천 (6 4~7 17): 원수 권율의 진에서 백의종군하며 머물렀고, 수군을 수습하기 위해 자청하여 삼가로 출발

n  운곡 (7 23~8 2):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 교서를 받음

n  회령포 (8 18~19)

 

5

ü  2: 진흥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일을 이야기했다 (278).

ü  3: 아침에 둘째 아들 의 이름을 로 고쳤다. 싹이 처음 튼다거나 초목이 기운차게 자란다는 데 쓰는 글자라, 그 글자 뜻이 매우 좋다 (279).

ü  4: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라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279).

ü  5: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으로부터 와서 원공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배반하므로 장차 일이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날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종군하여 어머님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모시니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고.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다시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280).

ü  6: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울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처리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하신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 연일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워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하여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빨리 죽지 않는지. … 우수사 이억기가 편지를 보내어 조상했다 (280).

ü  7: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가 짚신 한 켤레를 바치기에 거절하고 받지 않았는데, 두 세 번 간절히 청하므로 값을 주었고, 짚신은 원명에게 주었다.

ü  8: 이날 새벽 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 껍질을 벗겨 휘둘렀는데,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상하니, 이것은 원수의 명령이었다. …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드니, 이 또한 운수로다 (281).

ü  10: 궂은 비가 내렸다. 이날은 태종의 제삿날이다. 이날은 옛날부터 비가 온다고 하는데 (자고우), 늦게 큰 비가 왔다 (281~2).

ü  자고우: 가뭄이 극심하여 기우제를 지내면서 죽은 태종은 죽으면서 어떻게든지 비가 오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태종이 죽은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이를 태종우라고도 한다 (283).

ü  12: 선홍수가 와서 원공 ()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 둔인데, 천풍 구로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 (282).

ü  이원익 (1547~1634): 159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을 변호하다 사직하였다. … 훈련도감 도제조를 마지막으로 낙향하였다 (283).

ü  19: 체찰사가 들어온다고 하므로 성 안에 머무르고 있기가 미안해서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나갔다 (284).

ü  20: 체찰사는 내가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공생 (향교에 다니는 생도)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사람을 보내어 진작 상제된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이제야 듣고 놀라서 애도한다하고 군관을 다시 보내어 조상하였다. 저녁에 만나 볼 수 있겠는가를 물으므로, 나는 저녁에 당연히 가서 뵙겠다고 대답하고 어둘 무렵에 가서 뵈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기다렸다.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일찍이 임금 (선조)의 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미안스런 말이 많았는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 (원균)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라 일을 어찌할고하는 것이었다 (284).

ü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이원익은 이순신의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7차례의 어전회의 중 3,4,5차의 회의에 참석해 소신껏 이순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선조는 원균의 주장에 마음을 두고 원균에게 유리한 질문을 했으며, 참석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따르도록 유도했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해임과 하옥이 결정된 6,7차 회의에는 임지의 공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그 소식을 듣고는 즉시 왜적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 한 사람뿐이라는 상소를 올리고, 나라의 앞날을 한탄했다 (285).

ü  21: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이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285).

ü  23: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기에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했는데, 시국의 그릇된 것을 무척 분히 여기며,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286).

ü  25: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비 때문에 정지하고 혼자 촌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온갖 회포가 그지없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하랴 (286).

ü  29: 몸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길을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며 몸조리를 했다 (287).

 

6

ü  4: 강을 건너지 않고 곧바로 10리 남짓 가니 원수 (권율)의 진이 보였다. … 개벼루 또느 sroqu, 율곡면 문림리와 율곡면 영전리 사이에 있는 영전교 부근의 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 절벽은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굽이 깊으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같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1만 명이라도 지나가기가 어렵겠다. 여기가 모여곡이다  (288).

ü  잠 잘 방을 도배하고: 권율의 진이 있는 곳에 이르렀으므로 그 곳에서 백의종군하며 머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받기 전까지 44일간을 머물렀다 (289).

ü  10: 저녁에 원수 종사관 황여일이 방문해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에 대해 크게 칭찬해 마지 않았다 (290).

ü  11: 홍백이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돌아갔다고 하니 참말로 섭섭하다. 이날 아침에 편지를 써서 홍백에게 보냈다. … 이날 아침, 한산도 여러 곳에 가는 편지 14장을 썼다  (290).

ü  15: 이날은 보름인데, 몸이 군중에 있어서 영위 (상가에서 모시는 혼백이나 신위)를 베풀고 고하지 못하니 그리운 정회가 어떠하랴. 초계 수령이 떡을 갖추어 보냈다 (292).

ü  16: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292).

ü  17: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해서 밤이 한결 쓸쓸하다. 새벽에 일어나 앉으니 아픔과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 식사 후에 원수에게로 갔더니, 원 ㄱ hd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고… (292).

ü  18: 저물어 원수가 사천 갈 일을 통지해 왔기에 곧 사복 정상명을 보내어 물었더니, 원수가 수군일 때문에 사천에 간다고 했다 (293).

ü  19: 새벽 닭이 세 번 홰를 쳐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 진 중에 이르니 날이 훤히 밝았다. …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되, “통제사의 일은 말할 수가 없소” (293).

ü  통제사의 일은 말할 수가 없소: 원균이 전투 자체를 회피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왜군의 전선이 우리보다 훨씬 많으니 정면 승부를 피하고 수륙양면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싸움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한 권율은 출전을 하지 않은 원균에게 명령불복종으로 곤장형 (5)을 내렸고, 다시 출전을 명했다. 이순신을 밀어내고 어렵게 수군의 지휘권을 잡기 했지만, 도원수 권율과 체찰사 이원익, 그리고 휘하의 장수들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고립된 원균으로서는 마음에 부담이 심했고, 권율의 명령에 따라 총공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295).

ü  20: 늦은 아침에 어릴 때 친구 서철이 방문했다. … 오후에 종과 말의 급료를 받아 왔다 (294).

ü  22: 아침에 초계 수령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았다. 그의 처사가 체모 없음을 말해 무엇하랴 (294).

ü  연포: 얇게 썬 두부를 꼬치에 꽂아 기름에 지진 후 닭국에 넣고 끓인 음식 (295).

ü  23: 늦게 우병사가 편지와 크고 작은 환도를 보냈다. 그런데 가지고 오는 사람이 도중에 물에 떨어뜨려 칼집과 장식을 부수었으니 아깝다 (295).

ü  24: 이날은 입추다. 새벽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여 골짜기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침에 수사 권언경의 종 세공과 감손이 와서 무밭에 대한 일을 아뢰었다 (295).

ü  25: 다시 명령하여 무씨를 뿌리게 했다. … 저녁에 종 경이 한산에서 돌아왔는데, 보성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놀라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다니 통탄함을 어찌 말하랴 (296).

ü  무밭을 갈고 심는 일: 이순신과 백의종군지에 함께 있었던 식솔들은 13명이었다. 이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먹이기도 어려웠고 군인으로서 받는 급료도 아주 적었다. 따라서 품계를 가진 관료에게 지급되는 노비 (이순신에게는 4)와 말 (2)의 식대로 지급되었던 돈이 이때의 주요 생활비가 되었다. 일기에 보면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긴 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이들은 최대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무밭을 갈거나 왕골을 쪄서 말리는 것 등은 자급자족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297).

ü  심유격의 체포: 왜의 풍신수실이 요구한 사항을 거짓으로 전달해 화의가 이뤄진 것처럼 꾸몄던 심유경은 왜군이 다시 침략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본국으로 소환되어 국가를 기만하였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297).

 

7

ü  1: 가을 밤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다 (298).

ü  3: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에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결 더해졌다. 제사에 쓸 유밀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298).

ü  유밀과: 밀가루나 쌀가루 반죽을 적당한 모양으로 빚어 바싹 말린 후에 기름에 튀겨 꿀이나 조청을 바르고 튀밥, 깨 따위를 입힌 과자 (299).

ü  6: 이날 제사에 쓸 중배끼 5말을 꿀에다 만들어 봉해서 시렁 위에 얹었다 (299).

ü  증배끼: 유밀과의 하나. 밀가루를 꿀과 기름으로 반죽하여 네모지게 잘라 기름에 지져 만든다 (299).

ü  7: 오늘은 칠석,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공과 한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원공 위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공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299).

ü  9: 달빛이 대낮 같아 어머님 그리는 슬픔과 울음으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300).

ü  10: 일찍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고 통곡하며 보냇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아 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끓어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300).

ü  11: 홀로 빈 방에 앉아 있으니, 그리운 마음이 더욱 컸다. 비통하고 비통하다 (300).

ü  12: 종 평세가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잘 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슬프고 한탄스러움이야 어찌 다 말하랴 (300).

ü  15: 그 편에 들으니,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저 통분하고 통분할 뿐이다. 막을 방책이 없음에 한스럽다 (302).

ü  16: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 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대강대강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탄스런 일이다. … 이날 낮에 이희남을 시켜서 칼을 갈게 했는데, 아주 잘 들어 적장의 맨 머리를 벨 만했다 (302).

ü  칠천량해전: 정유재란 때인 1597 7 1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왜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 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한 해전이다. … 도원수 권율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 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 배설이 저투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곤장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을 명하였다. … 이 때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였다. 원균은 선전관 김식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으나, 왜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 일원의 재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다. … 조정에서는 7 21일 패전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303).

ü  16: 우리나라가 믿을 힘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거듭거듭 생각할수록 분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이 적에게 포박되었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고 탄식할 뿐이다 (304).

ü  18: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밤 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곡이 터짐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곧 원수는 그 이상 더 좋아할 수 없었다 9304).

ü  이 순신의 백의종군 후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의 거처로 찾아온 것은 7 18일이 처음이다. 이틀 전인 7 16일 칠천도에서 원균이 패한 뒤의 일이다 (305).

ü  21: 점심 식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수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후 이의득이 방문했기에 패하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와 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차마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했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수령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305).

ü  22: 아침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방문해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305).

ü  29: 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과 화실이 없으니 소용없었다. 탄식할 일이다 (307).

 

8

ü  2: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 징조가 있었다 (307).

ü  3: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는데 내용인즉 겸삼도통제사의 명령이었다 (307).

ü  4: 오후에 곡성에 이르니 관청과 민가가 온통 비었다 (308).

ü  5: 아침 식사 뒤에 옥과 지경에 이르니 피란 가는 사람들로 길이 찼다. 놀라운 일이다.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308).

ü  6: 오후 8시경 송대립 등이 적정을 탐지해 가지고 왔다 (308).

ü  7: 병사 (병마절도사)의 군대가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것이 줄을 이었으므로 말 3, 활과 화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308).

ü  8: 새벽에 길을 떠나 조반을 부유창에서 먹었는데, 병사 이복남이 이미 명령하여 불을 질러 놓았다. 다만 재만 남아, 보기에도 처참했다. … 곧 길을 재촉해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이 인적 하나 없이 쓸쓸했다. 관사와 창고의 곡식이며 무기 등이 그대로 있으니, 병사가 처치하지도 않고 달아난 것이다. 탄식할 일이다. 중 혜희가 와서 인사하기에 의병장의 직첩을 만들어 주고, 총통 등은 옮겨 묻었다 (309).

ü  9: 일찍 길을 떠나 낙안에 이르니 5리 밖까지 많은 사람들이 보기 위해 나왔다 (309).

ü  17: 수사 배설은 탈 배도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 감관과 색리는 군량을 모조리 도둑질하여 나눠 가져가던 참인데, 때마침 그때 이르러 잡아다 호되게 곤장을 때렸다 (311).

ü  18: 회령포에 갔는데, 수사 배설이 배 멀미를 핑계대기에 만나 보지 않았다 (311).

ü  장계의 초안을 잡앗다.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겨우 12척의 배만 남은 수군의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바다를 포기하고 상륙하여 육전에 협력하기를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답한 그의 장계가 다음과 같았다.

n  임진년 이래 5~6년이 지나는 사이에 왜적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를 바로 점령하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수군이 바닷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은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311).”

ü  21: 날이 채 새기도 전에 곽란이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셨더니, 이윽고 인사 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밤을 새웠다 (311).

ü  23: 통증이 더욱 심해져서 배에 머무르는 것이 불편하여 육지에서 머물렀다 (312).

ü  24: 일찍 도괘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고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이미 텅텅 비었다. 바다에서 잤다 (312).

ü  25: 아침 식사를 하는데,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 먹이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되,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헛소문을 퍼뜨린 2명을 잡아 곧바로 목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312).

ü  28: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 수사 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다가오자 호각과 깃발을 흔들어 뒤쫓으니 적선이 물러갔다 (312).

 

9

ü  2: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313).

ü  3: 비가 뿌렸다. 뜸 아래 머리를 웅크리고 앉아 이으니 마음이 복잡하다 (313).

ü  4: 북풍이 크게 불었는데, 배를 겨우 보전했다. 천행이다 (313).

ü  7: 탐망 군관 임중형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 55처 중에서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그 목적이 수군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 내가 탄 배를 먼저 적에게 향해 달려들면서 포를 쏘니, 적군은 당해 내지 못하고 자정께 달아났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314).

ü  16: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을 거처 곧바로 진 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했다 (315).

ü  명량: 물살 부딪치는 소리가 10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한다. 명량해협의 폭은 500미터이지만, 배가 다닐 수 잇는 정도는 400미터 정도이고, 울돌목은 120미터로 가장 좁다. 조류가 가장 세며 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200여척의 왜군을 물리쳤다 (315).

ü  명량해전: 1597 9 16일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교두보인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 어란포 등지를 거쳐 8 29일 벽파진으로 이동하였다. 왜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 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9 15일 수군을 우수영으로 옮겼다. …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 수군에 비해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재적으로 불리하였다.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해 서로의 진형과 대오가 붕괴되고 있었다. …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란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으며, 철쇠를 협수로에 깔아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316).

 

10

ü  2: 아들 회가 집안 족속들의 생사를 알아보러 올라갔다. 홀로 배 위에 앉으니 심기가 천만 갈래였다 (318).

 

<정유년 2: 1597>

ü  1597 8 5일부터 10 8일까지는 중복 기록되어 있다 (321).

 

8

ü  6: 그들은 울면서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했다 (320).

ü  9: 점심 식사 후에 길을 떠나 10리쯤 오니 노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을 가져다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제로 권하였다 (322).

ü  23: 병세가 몹시 위중해서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했다. 전쟁 상황도 아닌지라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324).

 

9

ü  8: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나 맞을까 대장 재목은 못 되는 인물인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해 보냈다. 이러하고서 어찌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326).

ü  9: 이날은 중양절이다. 1년 중 명절이므로 비록 상제 몸이지만 여러 장병들이야 먹이지 않을 수 없어 제주에서 온 소 5마리를 녹도 송여종, 안골포 우수 등 두 만호에게 주아, 장병들에게 먹이도록 지시했다 (326).

ü  13: 맑았지만 북풍이 크게 불어서 배가 안정할 수 없었다. 꿈이 이상했다. 임진년 승전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이 무슨 징조일까 (327).

ü  15: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여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을 하면 곧 살고 살려고 하면 곧 죽는다하였고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말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했다 (328).

ü  16: … 내가 무상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하고 말하였다. 곧 명령하여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 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우 당사도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331).

ü  17: 우리 수군이 크게 승첩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양식들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332).

ü  25: 이날 밤은 몸이 몹시 불편하고, 원기 부실로 땀이 흘러 온 몸에 배었다 (332).

 

10

ü  1: 아들 회를 아산으로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했다. 마음이 극히 심란해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산 집이 적들에게 노략질 당해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ü  아산의 집이 적들에게 노략질 당해: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들은 그 분풀이로 아산 이순신의 본가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막내 아들 면이 죽임을 당했다 (333).

ü  2: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갈지 모르겠다. 내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333).

ü  10: 우우후 이정충이 배에 왔으나 보지 않은 것은 도망쳐서 외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334).

ü  11: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하니 아마도 적의 무리가 달아나면서 불을 질렀을 것이리라. 낮에 안편도에 이르렀는데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했다. … 날이 저물어 산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는데, 조계종이 와서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또 왜적들이 수군을 몹시 겁낸다고 했다. 이희급의 부친이 와서 적에게 잡혔던 경위를 이야기하는데, 마음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뜸집에 앉았으니 회포가 만 갈래였다. 10시경에 마른 땀이 몸을 적셨다 (334).

ü  12: 정찰선이 4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걱정스럽지만, 아마 생각컨대 흉측한 적도들이 멀리 도망치는 것을 보고 그 뒤를 쫓아가느라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335).

ü  13: 이윽고 정찰선이 임준영을 싣고 왔다. … 이날 새벽 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 이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혼자 뱃전에 앉아 있으려니 심회를 달랠 길이 없었다. 뒤척이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었다 (335).

ü  14: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내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감싸 아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 저녁때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편지를 전하는데, 미처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 9시경에 비가 내렸다 (336).

ü  15: 종일 바람과 비.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뒹굴었다. 여러 장수들이 위문하러 오니 내 어찌 얼굴을 들고 대하랴 (337).

ü  16: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꼭 4일째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으므로 수영에 있는 염한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337).

ü  17: 새벽에 흰 띠를 띠고 향을 피우고 곡을 했다. 이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337).

ü  19: 새벽에 고향집의 종 진이 내려왔기에 죽은 아들을 생각해 통곡하는 꿈을 꾼 듯하다. … 어두울 무렵에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고 눈물 짓고 했다. 어찌 다 말하랴. 이제는 영령이라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 누를 수가 없다 (338).

ü  21: 새벽 2시께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서 뱃사람들이 떨 것을 염려해 마음을 안정할 수 없었다 (338).

ü  24: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322섬을 실어 왔다 (339).

ü  29: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에 옮겨 댔는데, 서북풍을 능히 막음직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두루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으므로, 진에 머무르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340).

ü  30: 늦게 적에게 붙었던 해남의 정은부와 김신웅의 계집 등, 왜놈에게 지시하여 사람을 죽인 2명과 선비의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모두 목 베어 효시했다 (341).

 

11

ü  1: 오후 2시께 비는 갰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 뱃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나도 웅크리고 배 밑 방에 앉아 있으려니 심기가 편치 않더니 하루가 1년 같았다.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저녁에 북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 안정할 수 없었다 (341).

ü  2: 일찍 들으니 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떠내려 가다가 바위에 걸려 깨졌다고 한다. 분한 일이었다. … 선창에 내려 앉아 다리 놓는 것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 배로 내려왔다 (341).

ü  5: 이날 보성과 홍양을 시켜 군량 창고 짓는 것을 살피게 했다 (342).

ü  6: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서 종일 거닐며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새 집 지붕을 이고 군량 창고도 세웠다 (342).

ü  7: 저녁에 새 집의 마루를 놓았다. … 이날 자정께 면이 죽는 꿈을 꾸고 슬피 울었다 (342).

ü  8: 새벽 2시경 꿈에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다. 이날은 날씨가 따듯하고 바람도 없었따. 새 방 벽에 흙을 발랐다 (342).

ü  16: 명나라 장수 경리 향호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다 쾌홍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서 가지 못한다고 했다 (344).

ü  17: . . 양 경리의 차관이 소유문 (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문서)와 면사첩 (사형을 면해 주는 문서)를 가지고 왔다 (344).

ü  23: 바람이 크게 불고 눈도 많이 내렸다. 이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다. 아산 집에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345).

 

12

ü  5: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전쟁에 나가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 (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약한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라. <예기>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따르는 권이 있어서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경은 내 뜻을 생각해 소찬 먹는 것을 치우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밀지와 아울러 고기 반찬을 하사하셨으니 한층 감개무량했다 (346).

ü  24: 이날 밤에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오래 있음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니 한심하다 (348).

ü  30: 해가 다 끝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그러했다 (348).

 

<무술년>

ü  적이 물러가는 날 /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이다 (349).

 

9

ü  15: 도독 진린과 함께 일제히 행군하여 나로도에 이르러 잤다 (350).

ü  16: 나로도에 머무르면서 도독과 술을 마셨다 (351).

ü  17: 나로도에 머물려 진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 (351).

ü  도독 진린: 명나라 수군 총지휘관. 159 7 16일에 고금도 통제영에서 조선 수군과 합류함으로써 조, 명 연합 수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명의 도독 진린은 독선적이고 오만한 자였다. … 놀란 선조는 이순신에게 선전관을 급파하여 진린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고 넌지시 일렀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했을 때 성찬을 마련하고 절도 있는 의장 행사를 하는 등, 성대하게 그를 맞이해 명 장수들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진린은 이후에도 이순신이 독자적인 작전을 가로막아 운신의 폭을 좁혔고, 이순신의 전공 역시 가로채곤 했다 (351).

ü  19: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참담했다 (351).

ü  20: 오전 8시경에 유도에 이르니 명나라 제독 유정은 벌써 진격했다.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모양이 많았으므로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351).

ü  21: … 그래서 그 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빼앗아서 도독에게 바쳤다 (351).

ü  22: … 아침에 진격하여 나갔다.. 명나라 군인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351).

ü  순천 왜성 공격도: 지상군의 공격에서 몇 차례 패배한 명군은 전군을 4개의 부대로 나누어 왜군 총공세작전을 세웠다. 서로군 대장 유정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진린의 수로군 (,명 수군연합)등과 연합하여 왜군 소서행장이 주둔해 있는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수륙합동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동로군과 중로군 패배 소식에 영향을 받아 왜교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생각이 없었떤 유정은 공격을 회피했고 수로군만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과정에서 수군의 희생자들이 많이 생겼다 (352).

ü  27: 아침에 군문 형개 (명군 총 사령관)가 글을 보내어 수병이 신속히 진군한 것을 칭찬했다. 식사 후에 진 도독을 보고 조용히 의논했다 (353).

 

10

ü  2: 오전 6시에 진격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나가서 정오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353).

ü  3: 도독이 유제독의 비밀 서신에 의하여 초저녁에 나가 싸워 자정에 이르도록 쳐부수어 명나라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불타 도독이 안절부절하였는데, 그 모습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354).

ü  이순신의 요대 (보물 326): 관복 위에 두르던 허리띠. 이 허리띠는 명나라 장수인 왕원주가 이순신 장군의 용맹과 숭고한 인격을 높이 여겨 선물한 것이라 전한다 (354).

ü  6: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되, ‘유 제독이 달아나려 한다고 했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나라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고 (354).

ü  유 제독이 달아나려 한다: 10 1일부터 4일까지 이순신과 진린의 조, 명 수군 연합은 왜교성 총공격에 나섰지만, 유정의 서로군이 호응하지 않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항의하였고, 출병 초부터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유정은 곧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로써 서로군과 수로군의 수륙합동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355).

ü  9: 육군이 이미 철수하였으므로 도독과 함께 배를 거느리고 나가 바닷가 정자에 이르렀다 (354).

 

11

ü  8: 도독부를 방문해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다가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므로 곧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도망해 철퇴하라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통문이 왔으니, 급히 진격해 들어가는 길을 끊자고 했다 (355).

ü  9: 도독과 함께 일제히 행군하여 백서량에 이르러 진을 쳤다 (355).

ü  15: 왜선 2척이 강화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도독의 진중을 드나들었다 (356).

ü  17: 왜적은 모두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357).

ü  이순신 일기는 17일로 절필되었고, 이틀 뒤인 11 19일 새벽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57).

ü  노량해전 (356).

n  정유재란 때인 1598 11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 명 연합연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

n  진린은 통신선이 빠져나간 사실을 이순신에게 알렸고 왜군의 전략을 간파한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 논의해 왜군을 격멸하기로 결정한다. 위기를 느낀 진린 역시 해전에 나선다.

n  11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 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늘에 빌고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n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이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 척이 불에 타거나 부서지고 패잔선 50여 척이 겨우 달아났다.

n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n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소서행장의 왜군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왜군과이 7년 전쟁은 막을 내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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