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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12시 03분 등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동아일보사
저자소개
이순신

1. 1545년 3월 8일 이순신 출생
2. 1556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으며 같은 마을에 사는 유성룡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무렵 집안이 더욱 어려워져서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
3.1576년 무과에 급제: 서른두 살의 나이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이듬해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4. 1580년 훈련원 봉사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육군에 있다가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발령을 받아 수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경차관으로 내려온 서익의 모함으로 만호에서 파면되고 다시훈련원 봉사를 거쳐 조산보의 만호가 되었다.
5.1587년 조산보 만호와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며 일하던 중 여진족이 침입을 하자 적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상관인 북병사 이일의 모략으로 백의종군 하게 되었다
6.1591년 어릴 적 친구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올랐다. 이무렵부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7. 1592년 3월 27일, 거북선 완성. 그동안 만들어온 거북선을 완성하자마자 임진왜란이 일어나 거북선을 앞세워 큰 활약을 하였다. 옥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어 당항포와 한산도 에서도 계속 승리를 하여 그 공으로 정헌대부가 되었다.
8.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원로대신 정탁의 상소로 다시 한 번 백의 종군하며 권율 장군 밑으로 들어갔다. 이 틈을 이용한 왜군의 재 침범으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고, 바다를 지키고 있던 원균이 참해하자 다시 3도 수군통제사에 재임명 되어 여러 전투에서 승리 하였다.
9.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마지막 해전.
10. 1598년 11월 19일,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왜선을 쫓아가 노량 해전에서 싸우다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난중일기를 보는 나도 무인? 이라는 같은 입장에서 장군의 사고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신격화되지 않은 영웅을 존중한다. 그런 인간적인 면이 사람들에게 더 존중과 신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로서는 그의 전술이나 전략적인 면에 좀 더 관심이 많았지만 난중일기에 기록된 내용은 훨씬 미흡했다. 아마도 전술이나 전략에 대해 일기 말고 따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그가 자신의 태도와 행동에 엄격하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 나아가 군사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은 참으로 공경할 만 하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글 귀

난중일기는 일기를 정리한 글이어서 활용할 만한 인용문이 많지 않다. 더욱이 시대적으로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정신과 문화를 제외한다면 유용한 부분이 많지 않다.

p74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기를 옮겨 싸우러 깊이 들어가면 되돌아 올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
p75 군대를 움직일 기한을 넉넉히 잡고  서서히 의리로써 깨우치어 취합해야 할 것입니다.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p134 나라 일이 다급한 때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 그래도 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이는 임금이 지은 ‘누가 곽자의나 이광필처럼 되겠는가 하는 시이다.
p226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p382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p440-441 16일_갑진_맑음.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군령내리는 기]와 초요기[싸움터에서 대장이 부하 장수를 부르고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도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p444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p448 必死則生,必生則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p483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전쟁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진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502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p503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내가 저자라면

나의 큰형이 해군에 복무하였으며 월남전에도 참전하였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이순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형은 항상 일본의 야마모토 함대를 이끌 던 일본 제독이 가장 존경했던 장군이 바로 이순신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전투시 전함들의 대형과 작전들에 대해서 그 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형의 이야기를 기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큰 형이 실감나는 표현과 이야기 진행으로 환상처럼, 그렇게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후일에 병서나 전술에 관한 서적으로부터 얻었던 지식보다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내게 들려 준 형의 이야기로 인해서 나는 창조적인 상상력과 과감하고 공격적인 전략을 구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으나 협회 내에서 나는 위험스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코치가 운동만 잘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코치는 ‘후원지하, 선수지상 (後援之下  選手至上’)이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인 태도를 배웠다..
나는 그런 면에서 참 운이 좋은 편이다.
항상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기회가 주어졌고, 결과는 선수들의 믿음 때문에 항상 성공적이었다. 
즐거운 주말에…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과 해전을 하면서 물길과 육지의 지형을 잘 활용하여 수와 양적인 열세를 만회하고 집중력있게 전투를 치루던 장군을 보면서,  길이 없고 방법이 없고 대안이 없는 상황에 놓인 외롭고 지친 장군을 보면서 나는 나의 기억속에 아스라히 남아 있는 비장했던 경기들을 생각해 보았다.
전쟁이란 원래 살아 남은 자에게는 정말 신나고 대단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싸움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던가?  지면 비참하지만 이기면 참 환상적이다.  어려서 운동에 소질이 없던 내가 펜싱에 빠져들었던 것도 바로 승리에 대한 성취경험 때문이었다.
난중일기는 영웅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업적과 관련하여 상상하고 이미지화하게 된다. 어려서 선생님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 빨갱이는 얼굴이 씨뻘건 색이고 간첩들은 모두 다 색안경을 쓰고 있는 줄 아는 것 처럼 말이다.
그 시절의 장수로서의 생활양식이 조금씩 엿보인다. 훈련, 접대, 지시,감독,확인  가족들과의 관계가 그런 것이다.  7년여의 기록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아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 시대의 가족관계와 역할이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사고방식들도 그렇다. 그의 성경적 특성으로 보아 A쯤 되지 않을까 싶다. 
대 낮,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아주 자연스럽다. 아마도 그 시대의 장군들의 권한과 사교관계에 관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자주 만난 오래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대목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전술이나 전략 혹은 병사들의 훈련이나 관리들에 대한 문제였을 가능성이다.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들은 의사교환을 했을까?  전통적인 병서나 전략서들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응용한 것으로 보이는 한산 대첩의 학익진은 원래 지상전 진법이 아니던가?  그의 창조적인 상상력과 응용력이 여러 전쟁에서 덧보인다. 기본적인 전략적인 틀 안에서 전술적인 변화를 통해 응용의 묘를 살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전반적인 전쟁은 모두 최소의 기본 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실한 훈련과 시설과 물자의 관리 지형과 지세를 이용한 창조적인 전술, 전투무기의 개발과 실용화 그리고 최전방에서 직접 진두 지휘하는 심리적 위압감등은 수 적 열세를 충분히 극복하고 남음이 있다.  훈련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실들을(훈련내용) 왜 했는지, 연관성과 재구성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
아주 최근에 우리는 이순신 같은 사람 하나를 먼 길 떠나 보냈다. 그가 영웅이라 하더라도 만능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눈물 단지에 눈물 몇 방울 받아서 담아 놓았을까? 
탁월함이 일상으로부터 면책 특권이 되지는 않는다. 

IP *.94.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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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2:13:32 *.204.150.153
나도 이것저것 조사하면서 일본인들이 장군에 대해서 남긴 얘기들이 와 닿드라고.
특히 이순신 장군이 가장 좋고도 싫었다는 왜장의 말이..
그러고보면 인간은 참 다양하면서도 동일한 존재들인 것 같아.

오빠의 내가 저자라면, 오빠만의 색깔이 나타나서 좋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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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9.06.01 16:17:28 *.218.12.47
충무공 이순신 : 최전선에 전쟁을 수행하고
서애 유성룡:후방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선조가 요동으로 갈려는 것을 몸으로 막고 전쟁이 끝난 뒤 쓸쓸한 노년을
보내신 분
선조: 담력이 좀 크면 안되나 자기가 임금인데....
원균: 능력이 안되면 빠지지 칠전량에 왜 무리수를 두어 함대를 전멸시키는지..............

............... 정치세력 : 떨거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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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9.06.02 11:46:53 *.94.31.27

삶이 아름다운 것은
모순으로 가득찬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것이 삶을 사랑해야 하는 ... 이유죠... 
 사랑도 ... 그렇잖아요.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 끌려들어가는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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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6.04 11:05:47 *.248.91.49
백산의 투쟁기도 만만치 않네 ....
그중에 7년간의 이야기만이라도 좀 들려줘요.

난 독재자는 싫어도, 그가 숭앙한 이순신 장군은 참 좋았어.
우선 부산 용두산 공원에 서있던 장군을 자주 만났었거든...
그리고 서울와서는...광화문 네거리에서, ...요즈음엔 아주 가까이에서 더 자주 만났어요.
옛날에 이런 노래 부르며 고무줄 뛰기 했었어.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찔르시어...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우리도 나라위해 싸우렵니다......   저절도 외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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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영
2009.07.03 19:50:28 *.74.1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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