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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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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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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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과 호는 무엇인가? ( 본관 :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
▷ 가족 사항은?(아버지 이정,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4남중 3남으로 태어남)
▷ 태어난 곳과 생년월일은? ( 서울의 건천동(지금의 인현동 1가)에서 태어났으며 생년월일은
▷ 태몽은? (할아버지가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아이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의 뜻은? (순(舜)나라 임금의 신하)
▷ 어릴 때 자란 곳은? ( 서울의 건천동과 16세에 이사 간 외가가 있는 아산고을 백암리)
▷ 어릴 때의 모습은? (겁이 없고 용감해서 골목대장을 도맡아 함. 항상 활을 가지고 다녔고 불의를 보면 어른이라도 활을 당김. 또래 보다 키도 크고 나이답지 않게 눈빛이 강했음)
▷ 어릴 때 좋아한 놀이는? (전쟁놀이를 가장 좋아했으며 대장이 되어 지휘함)
▷ 청년기에 공부한 것들은? (형들과 유학을 배웠고, 무예에 뜻을 두어 22세 되던 해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병서를 탐독하고 궁술, 기마술 등을 익힘)
▷ 과거 급제는 언제 하였는가? (32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함)
▷ 맨 처음 받은 공직은? (함경도 동구비보의 군관(종9품, 작은 고을의 파견 소격대장격)이 됨)
▷ 이순신의 결혼과 아내는? (21세대는 해 8월 보성군수로 있었던 방진의 딸과 결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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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의 어록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가장 힘을 주고 후원해 준 사람은? (등용시킨 영의정
▷ 가장 싫어한 사람은? (원균)
▷ 그가 가장 걱정하고 좋아한 사람은? (어머니)
▷ 혼자 있으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눈물짓기, 꿈으로 점치기)
▷ 이순신의 취미는? (일기쓰기, 활 쏘기, 외로워 하기)
▷
▷ 명나라 제독의 진 린이
▷ 임진왜란 당시 이긴 주요 해전은? (옥포해전, 사천해전,당포해전,당항포1차 해전, 한산해전, 인고로해전, 부산포해전, 장문포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
▷ 사망시기는? (
▷ 묘의 위치는?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됨.
▷ 그의 저서는? 난중일기와 시조, 한시
▷ 죽은 뒤 그에 대한 칭송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됨.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음.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됨)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난중일기>와
그렇지만 적과 대치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바쁜 가운데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이다. 밑바악이 편평한 평저선으로 물 속에 덜 잠기므로 항해시 배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그리고 아래층에 비전투원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46]
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했다. 배에 있는 관원과 군사들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동서로 에워싼 채 바람과 우레같이 대포를 쏘고 활을 쏘아 대었다.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떨어지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신없이 바다에 내던졌다. 화살을 맞은 자가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물에 떨어져서 헤엄치는 놈도 몇 명인지 몰랐다. 한꺼번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며 서로 뒤쳐질까 겁을 내는 꼴들이었다.[49]
원균은 싸움에 패한 뒤로는 군사 없는 장수로서 지휘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싸우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맞는 왜인들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것을 맡아 하였다.[54]
왜인의 깃발에 물들인 빛이 각기 달랐다. 전날 옥포는 붉은 기, 오늘 사천은 흰 기, 당포는 누런 기, 당항포는 검은 기였는데 그 까닭을 생각하면 반드시 각 부대를 분간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이런 데가다 피를 바르고 맹세한 글이 또 이와 같으니 일찍부터 우리를 침범할 마음을 품고 준비하였던 상황을 더욱 짐작할 수 있었다.[60]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의 배끼리 부딪치기 쉬우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적이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생각되기에 한산도 한 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 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혹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 죽기 십상일 것이다.[62]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이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63]
찬 서풍이 불어 나그네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다. 밤에는 꿈자리도 몹시 어수선했다. 맑다.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나쁜 꿈인 듯 했으나 곰곰 생각하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 [70]
그 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75]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r걸려 적들에게 공격 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87]
원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87]
맑다.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피난 중에 계신 왕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로다![97]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97]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우습다. 밤에 바로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98]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98]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옥과현의 향소(유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107]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108]
밤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갈래나 되었다. 선전관이 내려왔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초저녁의 왕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114]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짜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성에 관한 소문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주의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벌써 닭이 울었다.[117]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20]
명나라 장수의 보고서가 왔다. 그 보고서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 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 쫓겨 도망갔다고 하니 그 거짓됨을 말할 수가 없다. 큰 나라 장수가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따질 것인가? 한탄스럽다.[121]
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123]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124]
[p124]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
또 원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124]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마구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낙안 군수가 풍신수길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초안과 명나라 사람이 군에 도착하여 기록한 글을 보내왔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129]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129]
하루 내내 마음이 평안하지 않아 혼자 앉아 있었다. 저녁에 탐색선이 오기를 몹시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저물 무렵에는 가슴속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깥 바람을 쐰 탓에 머리가 몹시 아팠다. 걱정스럽다.[131]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어머니를 뵈러 들어갔더니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 [140]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되돌아오니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40]
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원 수사와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이 에이는 듯 추웠다. 각 배에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신음하니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웅천 현감, 진해 현감이 왔다. 진해 현감은 명령을 어기고 빨리 오지 않아서 문책할 작정이었으므로 만나 보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 약해지는 듯했지만, 순천 부사가 들어올 일이 매우 걱정 되었다. 군량 또한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 되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을 거두어 장사 지내는 일을 맡길 사람으로 녹도 만호를 정하여 보냈다.[142]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안자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146]
원수(
아침에 호양 현감과 순천 부사가 왔다.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일과 장정 넷 가운데서 장정 둘을 전장에 내 보내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151]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 이상 심하다. [152]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 하였다. [167]
검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 우수사에 속한 포작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하다가 붙들렸는데, 포작들은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복들을 보내어 붙잡으려 하였더니 원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복들을 결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윤발을 보내어 풀어주게 하였다.[168]
날씨가 흐리더니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 큰 비가 와서 밤새 지붕이 새러 마르지 않았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169]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172]
아침에 울이 본영으로 갔다. 헤어질 대 마음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었다. 오후 늦게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대니 걱정이 앞서 마음이 더욱 무겁기만 하였다. 충청 수사가 왔기에 활 쏘기를 하다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달 빛 아래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옥피리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헤어졌다. [174]
밤에 소나기가 흡족하게 오는 것을 보니,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잘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의 편지에는 면이 더위를 심하게 앓는다고 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175]
궂은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하루 내내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 길이 힘들지 않을까 매우 걱정스러웠다. 또 면의 병이 어떤 상태인지도 궁금하였다. [180]
변사에게 유 정승(
비가 계속 내렸다.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193]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를 점을 쳤더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것도 오늘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이다. [194]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195]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고 비도 잠시 왔다 개었다. 혼자 앉아서 간방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 높이 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198]
날씨가 따사롭기가 봄날 같았다. 춥고 따뜻한 것이 순서를 읽었으니 재난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슬픈 마음을 이루 다 할 말할 수 없었다. [208]”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서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 게 육전이나 쓸 군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하였다. 순변사는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210]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213]
장흥 부사가 찾아 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 것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216]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적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내용은 풍신수길이 침략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끌어 모아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고 한다.[221]
해남 현감과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 두 번이나 약속한 날짜를 어긴 하동 현감은 곤장 90대를 때리고, 해남 현감은 곤장 20대를 때렸다.[228]
맑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직접 잔을 올리지 못하고 먼 바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늦은 활을 15순 쏘았다.[229]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33]
새벽에 울이 들어왔는데 구순 어머니의 병환이 좀 나아지셨다고 한다. 그러나 구순 노인이 이렇게 위독한 증세를 얻으셨으니, 근심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235]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로비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슬픔에 젖어 생각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239]
이를 보니 놀랍고 황송함을 이길 수가 없다. 김응서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만야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241]
하루 내내 여러 장수와 같이 술에 취하였다. 밤에 희미한 달이 수루를 비추어서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를 읊조리며 기나긴 밤을 지냈다. 궂은비가 그치지 않았다. 하루 내내 비가 부스부슬 내려서 가슴속의 행각이 매우 어지러웠다. [246]
체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있는 것 같다. 호남 순찰사가 헐뜯으려 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나는 김응서와 같이 늦게 촉석루에 올라가서 장사들이 싸우다가 죽은 곳을 둘러보았다. 참담하고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247]
우산과 울, 유헌이 돌아갔다.
같이 이별주를 마시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 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251]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맑았으나 서풍이 거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니 임금을 뵙는 것 같단 괘가 나왔다. 좋은 괘라고 모두 기뻐하였다. [268]
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269]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높은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277]
늦게 나갔더니 장흥 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같이 왔다. 장흥 부사는 체찰사의 종사관이 군령을 가지고 자기를 체포해 가려고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281]
보성 군수가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가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릴 수 없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병의 근원이다.[282]
저녁 때 방답 첨사가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내면서 지휘선에서 물 긷는 일을 하는 군사에게 곤장을 때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방답의 군관과 이방을 붙잡아 들여 군관은 20대, 이방은 50대의 곤장을 때렸다.[285]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296]
아침 김해 부사 백사림이 급히 보고를 올렸는데 역시 허내은만의 고목과 같았다. 그래서 순천 부사에게 알려서 이를 차례로 다른 고을과 진포에 두루 알리도록 지시하였다.[298]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상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307]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308]
수루에 앉아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바람에 몸이 상하는 중도 몰랐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황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312]
하루 내내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체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319]
새벽에 배를 돌려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하루 내내 즐겁게 모시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326]
맑고 따스하였다. 아침 일찍 어머니를 위한 수연을 베풀면서 하루 내낸 매우 즐겁게 보냈다. 매우 다행스러웠다.[327]
1597 백의 종군에 나서다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영의정(
2월 6일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좀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337]
맑다. 늦게 어머니의 시신을 관 속에 모셨다. 친한 오종수가 맡아서 정성껏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못 마땅한 점이 없으니 이는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상여를 준비하였다.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338]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은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났다.[338]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이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야? 통곡을 하더라고 어떻게 할 것인가?”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 데 대해서도 걱정 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은근히 걱정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한결 더했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기 않는가? [342]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344]
박천 군수 유해가 말하기를 중한 죄수
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간밤에 내내 신음하여 걱정으로 속이 다 탔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는 닭이 울어서야 차도가 조금 있어 잠이 들었다. [354]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359]
꿈에 원균과 한자리에 있는데 내가 원균 위에 앉아서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363]
새벽에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374]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위로하며 달랬다. [374]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여러 장수들에게 왕이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배설은 교서와 유서에서도 예를 올리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그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들을 붙들어다가 곤장을 때렸다.[379]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하고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고 끝마쳤다. 과연 밤 10시쯤 적이 쳐들어와서 어둠을 이용하여 탄환을 계속 쏘면서 공격해 왔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았더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들도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쯤 들어왔다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381]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383]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 하였다.[385]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386]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맹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소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386]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387]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393]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단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들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운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4]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405]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 17일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둑 진린이 5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
7월 18일 적선 1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했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명령했다.[412]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 내가 저자라면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의 시기의 역사적 사건을 그 사건의 영웅이 된 인물의 일기로 알게 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을 세우고 하루를 정리하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소상하고 세심한 내용에 빠져들고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음은 그의 글속에 인간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영웅
<난중일기>이 책은 충무공
이 책이 갖은 의미는 매운 크다. 국난을 극복해낸 수군사령관으로서 충무공의 엄격하고도 지적인 진중생활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란(戰亂) 전반을 살피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와 나라의 위급을 구해낸 영웅(英雄)의 인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자신이 맞은 진영을 둘러보는 유비무환의 자세, 인간 이순신의 기쁨과 걱정, 슬픔뿐만 아니라 부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과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아끼는 마음, 부하에 대한 사심 없는 상벌과 신분보다 능력을 인정한 등용,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가족,친지, 부하장졸, 내외 요인들의 내왕 관계,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그런 자세는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아니 인간적이다 못해 유약해 보인다. 그의 글에서는 적의 목을 벨 거 같은 강직함은 보이지 않는다. 아들 면의 전사소식을 듣고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한 없이 자상하다.
우리가 그의 우리나라를 지킨 일등공신으로, 최고의 장수로 기리는 것은 단지 이 일기를 남겼다는 사실과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한발 앞선 준비와 자신의 발로, 눈으로 챙기는 부지런함, 적을 교란시키는 심리전과 병법을 행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가짐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창의적이고 전략적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조카들을 데리고 통영에서 배를 타고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에 간 적이 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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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백범일지 ![]() | 예원 | 2009.06.08 | 4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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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백범일지 – 도진순 주해, 돌베개 ![]() | 정야 | 2009.06.08 | 2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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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백범일지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書元 이승호 | 2009.06.07 | 3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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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 난중일기; 이순신 [5] | 백산 | 2009.06.01 | 3080 |
1881 | 난중일기 [1] | 김홍영 | 2009.06.01 | 2691 |
1880 | 난중일기 [2] | 혜향 | 2009.06.01 | 2871 |
1879 |
난중일기 ![]() | 예원 | 2009.06.01 | 2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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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 [9] <난중일기>- 인용문 | 수희향 | 2009.05.31 | 3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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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난중일기 [1] | 혁산 | 2009.05.31 | 4866 |
1874 | 난중일기 [1] | 書元 이승호 | 2009.05.31 | 2768 |
1873 |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1] | 숙인 | 2009.05.25 | 27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