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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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9] 난중일기-이순신
<난중일기> 이순신저. 노승석 옮김. 동아일보사. 2005.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새벽에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6세기 중반의 조선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훈구세력에게 신진 사림파가 내몰렸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고 살아남은 신진 사류들은 세상을 등졌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소윤과 대윤의 피 비린내 나는 정쟁으로 신진 사림들이 다시 화를 당한 비극의 해였다.
이순신의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의 사대부 집안이 향리의 처가 혹은 외가를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곧, 주류 사회에서의 이탈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기까지 아산에서 자랐다. 시골 사람이었다. 이미 사화에 연루된 집안이어서 문관으로 입신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무관이 그가 바라는 바가 되었다. 28세때 처음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낙마하는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부러진 다라를 버드나무 껍데기로 싸매고 태연했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일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고 4년 후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맨 처음 그의 받은 벼슬은 함경도 동구비보 (堡), 머나먼 국경수비대의 초급장교였다. 보는 성도 아니고 진도 아닌 야전초소와 같은 곳이었다. 국경을 지키기 위해 4년 동안 추위와 싸우면서 끊임없이 여진족의 도발에 맞서야했다.
두 번째는 종8품의 미관말직인 훈련원 봉사, 그 후에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로 발령이 났다. 수군과 맺은 최초의 인연이었으나 2년 후에 파직을 당한다. 전날 상관의 인사 청탁을 거절한 보복성 인사였으나 4달후에 다시 복직이 된다.
42세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전근, 그 다음해에는 두만강어귀의 녹둔도 둔전관에 임명되었다. 빈약한 병력에 여진이 침범은 끝없이 이어져 양민들의 피해가 많아지자 절도사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이순신은 해임되었고 결국 첫 번째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45세가 되던 1589년 정읍현감이 되었다. 종6품이었다. 8개월 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종6품에서 종3품으로의 진급이 너무 빠르다고 사간원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정계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거나 당파에 소속되어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진도 군수로 발령이 났다. 곧이어 가리포 첨사로 전직되었고 부임도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 인사의 난맥상이 보이고 개인적으로 마음을 붙이고 공무를 돌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수시로 바뀌는 교지를 들고 변방의 임지로 떠돌아야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는 비주류의 설움을 안고 살았다.
송백(松柏)은 서리를 당한 연후에 그 푸르름을 안다고, 이순신의 진가는 전쟁이라는 국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전라좌수사로 지역의 수군책임자가 된 그는 바다건너 소식에 민감해졌고, 조정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보았으나 각 당파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으며 서둘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기를 엄정하게 세워 나갔으며, 판옥선의 건조와 수리에도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전쟁이 터졌고 그는 7년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역사에 그 이름을 깊이 새겼다.
그는 일기 속에서 자주 앓고 있었고 ‘온백원’이라는 약을 자주 복용했는데, 이는 소화기 계통의 약으로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서 오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데도 전쟁을 치러야했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야 했고 백성의 생활까지 보살펴야 했다. 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중압감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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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대첩을 앞두고 몇 번이나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던 그였지만 모든 고통을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이겨냈다.
그는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하였으며, 전쟁 중에 어머니와 막내아들 ‘면’을 잃었다. 그는 외로웠다. 그러나 새벽 두시에는 일어나서 병서를 보며 연구를 하였고 거북선같은 혁신 제품을 개발했다. 각 전투마다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피나는 연구와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산대첩의 학익진은 육전의 전술이었다. 장군은 병서와 역사서 읽기로 이러한 전술을 활용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배움과 연구에 철저했던 노력파였다.
그는 자주 울었다. 그는 또한 매우 인간적이기도 해서 군기를 엄정히 하기위해 도망병을 참하기도 했고, 소를 훔친 어부를 베기도 했다. 딱한 병사의 사정을 듣고 옷을 벗어주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인간에 닿아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간정신이 어떻게 길러졌을까? 아마 오랜 세월 소외되고 어려운 길을 살아낸 그가 경험으로 체득한 인정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고난을 겪었기에 누구보다도 상대의 심경을 잘 읽고 남의 불행을 먼저 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 끝까지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 시대의 영웅으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2시부터 정오까지 조-명 연합함대가 퇴로를 차단당한 순천의 고니시 군을 구출하러왔던 일본의 구원군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7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며 이날 새벽에 동이 틀 무렵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해전에서의 큰 승리는 전쟁의 참상에 망연자실해 있던 백성을 구해냈고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조선은 수군이 막강한 나라” 라는 인식을 주변국가에 심어주었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적국의 명장이었던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 숭앙하고 있다.
그의 진중일기는 11월 17일에 끝이나 있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충실하게 일기를 썼다.
일기에서 간추린 연보:
47세 ( 선조 24년 1591년)-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
48세 (선조 25년 1592년)-4월;임진왜란이 일어나다.
5월;옥포,함포,적진포 해전에서 승리
6월;사천 당포 당항포및 율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왼편어깨에 적의 총탄을 맞았으나 치유되다.
7월;한산도 앞바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다.
9월;부산해전에서 승리하다.
49세 (선조 26년 1593년)-7월;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다.
8월;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50세 (선조 27년 1594년)-10월;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하다.
53세 (선조 30년 1597년)-3월;원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서울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다.
4월;도원수 권율밑에서 백의종군하다.
8월;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다.
9월;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다.
54세 (선조 31년 1598년)-2월;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다.
11월 19일 (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널리 알려진 그의 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위에 높이 나누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빛이 칼과 활을 비추는구나.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분을 다했건마는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
그대들의 혼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을 받기 바라노라. -죽은 군졸들의 제사를 지내며 지은 글
칼에 새긴 글:
서해어룡동-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느끼고
맹산초목지-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역자 노승석: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한학자 청명 임창순 선생과 관선정에서 동문수학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를 연구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대천문화원 향토문화조사위원으로 일했으며 2000년부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성균관대학 한문학과 석사, 동대학원에서 금석학을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초서전문가로서 정조 19년에 간행된 충무공전서 본 <난중일기>와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에 상당한 누락과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8500여자를 새롭게 번역했으며, 100여곳, 150여자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잘못 알려진 지명이나 인명 또한 고증을 철저히 해서 새롭게 밝혔다. 이 책은 뛰어난 <난중일기>완역본으로 손꼽힌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면서
4. 그가 강인한 정신과 기개로 무장한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가 자연에 대한 낭만도 느낄 줄 알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의 유묵(遺墨)에 “어느 날 신선의 별장에 이르렀을 때 매번 서호 월악산의 구름과 수죽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마음이 이에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사실에서 그런 감성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5.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한 자세로 임전하였으니, 이른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특히 전략과 전술에도 뛰어나서 지리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등 국가 방어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란 중에 늘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개인의 가정사는 돌볼 겨를도 없었고 그에게는 오직 진중 생활이 곧 일상적인 생활 무대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곧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생각난다.
7.이제 충무공이 쓴 초서체 <난중일기>를 재검토하여 번역까지 완료하였다. 오직 바램이라면 충무공의 위업이 작은 부분이라도 왜곡됨이 없이 세상에 바르게 전해져서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2005년 10월 31일 아미산 서옥에서 역자 노승석 씀
임진년 1592년
13.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동헌에 나가 별방군<별조방군>을 점검하고 각 관아 포구에 공문을 보냈다.
15.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17.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함께 새 봄의 경치를 즐겼다.
18.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북봉 봉화대 쌓은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전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 2월 12일 침렵치(무사의 놀이의 하나인듯)를 구경했는데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이 시 절구를 읊었다.
21. 2월 29일 비가 온 뒤라서 산꽃이 활짝 피었는데 그 경치의 빼어남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20일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22일 곧장 새로 쌓은 봉두 문루에 올라 가보니 경치의 빼어남이 이 경내에서 제일이었다.
만호 정운의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23.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25.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26. 아침 식사 뒤 나가 앉아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 감고 등의 죄를 따졌다.
31. 식사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졌다. 온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33. "부산의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34. 이날 입대하러 온 군사 700명이 점검을 받고 일을 하였다.
39.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앗고 나도 왼쪽 어깨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40.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41. 왜장 7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내려가 달아났지만,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43. 서풍이 차겁게 부니 나그네 심사가 화평하지 않았다. 이날 밤 꿈자리도 몹시 어지러웠다.
계사년 1593년
55.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57.유지를 받들고 보니 “적이 돌아가는 길목에 급히 나아가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는 내용이었다. 삼가 유지를 받들엇다는 답서를 바로 써주었는데, 밤은 벌써 2시쯤 되었다.
59. 얼마 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60.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흉악하고 음험함이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61. 종일 비가 내렷다. 배의 뜸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뜸: 짚, 띠,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것으로 비, 바람, 햇빛을 막는데 쓴다.)
84. 글을 적기로 생각하면서도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계속한다
88. 영남 우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엇다. 그의 허튼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89.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점심 때 윤봉사에게서 “서울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어찌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더 애통하다.
93. 예물을 주자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받고는 매우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감사하다고 하였다.
97. 가소롭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심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123. 그러나 원수사와 그의 군관은 평소에 헛소문을 잘 내니 믿을 수가 없다.
지 오래였다.
102.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3.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45. 수사 원균,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좋아하던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149. “호익장 김덕령이 가까운 시일내에 들어올 것이다” 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갑오년 1594년
156.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
164. 몸이 불편했던 이순신. 갑오년 3월에 거의 한 달 동안을 꼬박 앓았다. 이는 4월에도 마찬가지다.
초7일_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초8일_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초10일_병세가 차츰 덜해졌지만 열기가 치올라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165. 13일-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력이 매우 약해졌다.
14일_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불쾌했다.
16일_몸이 매우 불편하다.
17일_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18일_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166. 19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25일-다만 선산이 모두 들불에 타버려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하니 몹시 애통하다.
27일_몸이 좀 나은 것 같다.
170. 술이 세순배 돌자 원수사가 짐짓 술에 취한 척하고 미친듯이 날뛰며 억지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원수사가 하는 짓이 매우 흉악하였다.
173. 갑오년_4월 25일_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밤새도록 앓았다.
176.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85.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밥을 두끼나 먹지 않았다.
190.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95. 우수사가 군량 20섬을 빌려갔다.
을미년 (1595년)
198.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사는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 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200. 달빛이 비딘결처럼 고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205.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207.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긁게 했다.
217. 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귀가리개)를 좌도에 15개, 우도에 10개, 경상도에 10개, 충청도에 5개를 나누어 보냈다.
239. 정월 초1일_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61. 5월 15일_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몹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16일_어머님은 평안하시다고 하지만, 아내는 불이 난 뒤로 심신이 많이 상하여 천식이 더해졌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 된다.
262. 종 옥이,무재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과 밴댕이 젓갈, 어란등을 어머니께 보냈다.
269. 음탕한 계집 12명을 잡아다가 그 대장과 함께 처벌했다. 늦게 침을 맞아 활을 쏘지 못했다.
271. 초1일_혼자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87. 우수사와 경상우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선수사(거이)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 밤 달빛 아래 한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290. 투항해온 왜놈들로 하여금 물건 나르는 일을 시켰다.
292. 이 날밤 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리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병신년 1596년
304.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몹시 심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307. 새벽 2시쯤 꿈을 꾸었는데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엇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놓았다.
318. 이 날 어두울 무렵에 서풍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하였다.
319. 아들 면이 잘 갔는지 몰라서 밤새도록 무척 걱정했다.
이날 새벽에 경상도 진에 남아있는 항복한 왜인들을 이곳에 있는 왜인 난여문 등에게 시켜 묶어 와서 목을 베게 했다.
323. 몸이 노곤하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병이 날 원인이다.
327. 그편에 들으니 원흉(원균)은 곤장 40대를 , 장흥부사는 20대를 맞았다고 한다.
339.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생각에서였다.
340.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어두워질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런 재난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363. 오랫동안 어머님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다.
365.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매우 다행이다.
368.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369. 어머니를 곁에 모시고 아침 식사를 드시게 하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375.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했다.
14일-하루를 더 묵었다. 여진과 함께 잤다.
15일-여진과 함께 잤다.
377. 일찍 출발하여 어머니를 뵈러 갔다.
379. 하루 내내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몹시 서운해하시는 빛이셨다.
정유년 1597년
382. <한산도 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찰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3. 옥문을 나왔다.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고 2월 26일 함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4월 1일에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되어 이날부터 다시 일기를 쓴 것이다.
387.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388.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나갔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에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389.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94.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5.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이라 마음 아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죽지 않는지.
396. 원(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을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401. “음흉한 자의 무고하는 소행이 극심하건만 임금이 살피지 못하니 나라일을 어찌할고” 하는 것이었다.
406.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주었다.
422.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하리오. 비통하고도 비통하다.
427.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을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428. <선조실록>30년(1597년)7월 22일 기록을 보면 선전관 김식이 한반도의 진행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내용에 원균에 대한 언급이 있다. “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과 옥포와 안골의 만호등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많은 배들이 불에 타고 무수한 왜선들은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430.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440.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441.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기에 안위의 격군 7, 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소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다. 우리를 에워쌓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444.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千鈞, 서른근 균, 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신하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을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 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445. 쇠한 몸을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가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속 정유년
448. 이순신 장군의 글씨 “必死則生, 必生則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450.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쓰러져 가득하며 남녀가 서로 부축하여 갔다. 그 개탄스러운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 하였다.
458.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나 적합할까 대장감이 못되는 사람인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낸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460.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전국시대 吳起의 오자, 치병3에서 인용)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9.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루 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10시 경에 비가 내렸다.
471.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은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토록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477. 이날 밤 자정경에 면이 죽는 꿈을 꾸고 울부짖으며 곡했다.
479. 양경리(양호)의 차관이 초유문과 면사첩을 가지고 왔다.
-초유문; 적 또는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포고문.
-면사첩; 사형을 면하게 해주는 증명서
483. 예법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經은 상常의 뜻이니 절대 불변하는 법도나 원칙을 말하고, 권權은 변變의 뜻이니 스단은 상도에 위배되나 목적은 도에 맞는 임기응편의 방편을 말한다.
무술년 (1598년)
493. 나로도에 머물면서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술을 마셨다.
- 진린. 명나라 광동 사람. 선조 30년(1597년)에 수병제독이 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1598년에 수로의 왜적을 정벌하는데, 처음에는 위세를 부리며 우리 군사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감복하여 수군의 협공작전에 적극 응하였다.
500.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부록 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 기록
502. 이항복의 백사집 4권 <고통제사이공유사>
503. 11월 19일 사경(새벽 2시경)에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남민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할 적에는 남중(영남)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와서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계상(고을 경계위)에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505. <충무공 전서 12권> 이 장군을 조문함-이이명 찬-
세인이 혹 하괴성(장수를 상징하는 별)이 큰바다 나루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나 끝내는 김충용(김덕령)과 함께 돌아가셨네. 또한 장군(이순신)이 기미에 밝은지를 의심하였거늘 결국 투구 벗고 결사적으로 나아가셨네. 나는 진실로 장군의 마음을 아나니 어찌 화를 두려워해서 삶을 가벼이 한 것이랴. 진실로 적을 섬멸하여 임금에게 보답하였으니 비록 만번 죽을지라도 그 또한 영광된 것이네.
난중일기 부록 8책 서간첩
역자후기 -난중일기 판독과 번역을 마치고
***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2539일 동안 있었던 전쟁의 상황을 기록해놓은 글이다.
모두 7권의 책과 1권의 부록으로 남아있다.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충무공의 친필 초고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충무공은 여기에 다만 <日記 >라고 썼을 뿐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정조19년, 1795년 완성된 <이 충무공 전서> 중 5-8권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이때부터 편의상 그 내용이 <난중일기>라고 불리운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 (1592) 임진년 4월 14일(양력 5월 23일), 일본이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을 침공해옴으로서 시작되었다.
침공군은 제1군부터 16군까지, 총병력 28만 6천명이었다. 그중에 일본 수군 병력은 9천명이었지만 수송역할 때문에 구분되었을 뿐 전군이 수륙 양 방향으로 전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이 침공군의 총 지휘관은 제8군 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 로서 당시 나이 21세였다. 이들 침공군의 제 1진에는 140명의 조선어 통역과 안내원이 부대별로 배치되었고 조선 지도가 배부되었다. 4월 13일 아침 8시쯤 부산을 향해 출항한 일본군은 그날 저녁 6시 무렵에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 이르렀고 이튿날 대대적인 상륙전을 벌임으로서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동안 아무 저항도 없었고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허약한 방어선을 뚫고 북상을 거듭하였다.
정발은 부산진성에서 적을 맞아 4시간에 걸쳐 악전고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40이었다. 흑의장군의 최후였고 ,일본군은 성안을 돌아다니며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태워 도륙당항 사람이 3000명에 달했다.
이튿날은 동래성이 포위당했고 길을 비키라는 일본군에게 저항하여 2시간 만에 함락당하고 송상현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조선인 3000명이 참살 당했고 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렇게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하는 일본군을 우왕좌왕하며 조정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당대의 명장 이일과 신립은 참패를 당해 문경새재와 탄금대마저 적에게 넘겨주어 일본군은 보름도 안되어 경상도 전역을 정복했다.
다시 조령을 넘어 북상했고 선조와 대신들은 서울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과 평양을 거쳐 국경인 의주까지 피난길을 재촉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함락한 것이 6월 2일이고 다시 그달 13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다.
당시의 전황이 그러했다. 이순신은 4월 15일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낸 첩보를 받았다. “부산,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이런 밑그림 위에 그의 일기를 읽어나가야 한다.
그는 죽기 이틀 전까지의 일기를 남겼다. 구국 성웅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차마 그를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살설로, 혹은 위장설로 그의 뒷 이야기를 연결시키고 어떤 경우에는 사실에 가까울 만큼 자료를 보충하여 그의 생존설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런 노력은 지금도 도서관에 꽂혀있는 수많은 이순신 관련 서적들을 선택할 때 다소 난감한 입장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아직도 모든 다른 이론을 배격하고 생존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또 스스로 갑옷을 벗어 죽음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이론도 만만치 않게 강력하다.
나는 두가지 관점에서 이 책을 보았다.
하나는 순수한 일기책으로서의 난중일기이다.
여기에는 그의 성실한 기록과 인간적인 솔직함, 가족애와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평가가 모두 다 씌여져 있어서 그 어떤 역사서술서보다 바로 그의 시대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의 일기를 한참 읽다가 마치 나도 전장의 포화속에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머니를 떠나 보낸 장면에서 맘껏 통곡할 수가 없어서..정말 안타까웠다. 장수를 위한 ‘통곡의 장’이 어딘가에는 있었을텐데...그를 다시 이 시대로 불러와서 맘껏 울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아들을 앞세우고, 자기의 잘못 때문에 막내 ‘면’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는 자괴감에 젖어드는 아버지, 아들의 죽음 후에도 계속 꿈에서 다시 ‘면’이 죽는 꿈을 보는 아비의 마음이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소로우가 월든 숲속의 생활을 남긴 일기와 벤자민 프랭크린의 일기를 고전으로 삼으며 우리의 생각들을 키워왔다. 누구든 소통을 위해 기록을 남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쉽게 우리에게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영웅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위정자와 어용 역사학자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한 어긋난 열정이 역풍을 만난 결과가 아닐까?
어쨌든 다시 드라마를 통해서든, 진정성을 가진 교육자에 의해서든 이순신은 우리에게 친근한 인물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비록 가까이 다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소통의 장은 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업적은, 그의 구국 충정은 , 그의 여민동락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다만 살과 피가 흐르는 우리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마음속에 불꽃이 피어나는 그런 소통에 이르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저널을 읽으며,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꺼지지 않은 불처럼 민중의 가슴에서 불타는 사랑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느낀 것이 고맙다.
두 번째 관점은 이순신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과, 그의 리더쉽, 그리고 그의 장수로서의 전략들과 같은 보다 전문적인 그의 업적에 대한 관심이다.
아마 지금까지 이순신에 관한 이런 책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해군사관학교 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서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박제된 영웅에 대한 해설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의 동상아래서 시국 집회를 할때 답답한 마음으로 호소하며 소주잔을 기울일 때 훨씬 친근감이 도는 그를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비록 독재자가 세운 기념물일지도, 어쩐지 그는 깨어 있을 것 같았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요즈음에는 풀어쓴 전문서적들이 많다. 그리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 프로그램도 많다. 일기 속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항상 읽고 쓰는 것은 그의 기본자세이다. 그렇게 쌓인 공부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것은 우리에게는 엄청난 낭비이다. 이순신이 살던 시대나, 이 시대나 답답하고 한숨이 나오는 세상인 것은 다를 바 없지만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와 사람들을 생각한 그의 노력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면 나 또한 원균과 다를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이 그토록 미워한 원균은 성실하지 못하고 자기의 관할구역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모함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아마 대조적인 생활양식과 가치관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고 일부에서는 재평가가 시도되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눈에 비친 원균의 모습이 가상의 현실은 아닐 것이니,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것도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이순신의 사회적 역할과 그의 전문성에 초점을 맞춘 책을 몇권 찾아두고 읽어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언제 따로 시간을 내서 북리뷰를 해보고 싶다.
추천: 지용희.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디자인하우스. 2003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이코비지니스. 2005.
제장명 <이순신 파워인맥> 행복한 나무. 2008.
성낙수,조현숙,김은정 엮음 <중학생이 보는 난중일기> 신원 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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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 난중일기; 이순신 [5] | 백산 | 2009.06.01 | 3080 |
1881 | 난중일기 [1] | 김홍영 | 2009.06.01 | 2691 |
1880 | 난중일기 [2] | 혜향 | 2009.06.01 | 2871 |
1879 |
난중일기 ![]() | 예원 | 2009.06.01 | 2983 |
1878 | 난중일기 - 송찬섭 역 [1] | 숙인 | 2009.06.01 | 2917 |
1877 | [9] <난중일기>- 인용문 | 수희향 | 2009.05.31 | 3994 |
1876 | [9] <난중일기>-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2] | 수희향 | 2009.05.31 | 2900 |
1875 | 난중일기 [1] | 혁산 | 2009.05.31 | 4866 |
1874 | 난중일기 [1] | 書元 이승호 | 2009.05.31 | 2768 |
1873 |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 [1] | 숙인 | 2009.05.25 | 27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