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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10시 2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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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저자에 대하여

이름
아호는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다시 바꾸었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백범(白凡)으로 스스로 지었다. 과연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보통사람이 큰 인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출생과 부모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 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자점의 방계 후손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현풍 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 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했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으며 효자였던 아버지가 손을 따 기력을 잃은 어머니를 잠시나마 소생시켰다고 한다. 훗날 김구 역시 아버지 임종시 남몰래 허벅지살을 떼어 아버지께 드린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배우고자 하는 아들에게 서당을 차려 선생님을 모시고 올 정도로 열성적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 곽 여사는 추후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할 때까지 평생을 옥바라지, 뒷바라지 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강인한 어머니상이다.

결혼과 가족
그의 결혼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가 존경한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어린시절 혼담이 오갔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했다. 1902년에는 일가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지만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해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염하고 묻었다.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도 약혼했으나 그녀의 정혼자가 멀리서 청혼해와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파혼하였다 한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으며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옥바라지를 하면서 키우던 큰딸과 화경, 은경 등은 어려서 죽고, 두 아들 인과 신을 상해 망명 시절을 거쳐 키우게 된다. 장남 김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등을 거쳤으나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둘째아들 김신(1922~)씨는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현 백범기념관 관장으로 있다. 그의 딸 김미와 결혼한 사위는 빙그레 김호연 회장으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는 사돈 간이 된다.

어린시절 일화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실은 양반의 후손임에도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했다. 한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소년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좌절과 분노
난생 처음 과거시험을 보면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관상 공부를 했다. 하지만 자신의 관상을 보면서 좋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본인의 얼굴에 매우 실망했다. 그러나 타고난 복이 없다면 마음을 갈고 닦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동학에 입교하고 훈장 노릇도 하게 된다.

동학지도자로서의 김구
1893년 1월 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암(昌巖)에서 김창수(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연비(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린 나이에 수많은 사람들을 포교한 것으로 보아 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가면서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으며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했다.

철혈남아 김창수 -국모보수 사건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사형집행이 예정되어 있던 날 기적적으로 고종에 의해 판결이 보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숨을 건졌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그는 죄수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죄수들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이때 그는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해에 도착했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警務局長) 직을 맡고 이후 내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김구는 청년단원을 모집했는데, 1931년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이 찾아왔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황제 부의(傅義)와 함께 동경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동경에 파견해 천황 부자에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크게 상심한다. 이후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사라카와 등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중국 활동 기간은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 생활에서도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이승만과의 결별 등 수많은 일이 있었으나, 한국 근현대사를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한 뒤 중립적으로 서술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말년의 그는
1949년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했다. 같은 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3월 서울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배후가 이승만이나 미국이라는 추측이 많이 나왔으나 1996년 처음으로 생겨난 진상조사단이 내놓은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 <도왜실기> 등이 있다. 2007년 11월 5일, 여러 국민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거쳐 한국은행에 의해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 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으나, 아쉽게도 현재 10만원 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이유는 10만원 권 뒷면에 들어갈 예정인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효창동 백범기념관과 남산 백범 김구선생 동상은 대학 시절 내가 늘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이 <백범일지>는 MBC의 ‘책을 읽읍시다’ 캠페인 중에서도 상당히 많이 읽힌 책이다. 겨우 <나의 소원> 정도를 읽고 감동했던 나로서는 이제서야 백범일지를 독파한 것이 창피할 뿐이다. 젊은 혈기에 살인을 한 일, 그 죄목이 밝혀질까 전전긍긍했던 그의 모습에서는 그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고, 자식을 여럿 잃고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들과 떨어져 사는 생활에서는 그의 쓸쓸한 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특히 옥중에서도 이어지는 부모의 열성적인 뒷바라지가 가슴 뭉클했다. 옥중 생활에 대한 묘사에서는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본 것보다 더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원칙과 사상이 다듬어져가는 부분도 부러웠다. <나의 소원>이라는 감동적인 글이 이런 시행착오를 거친 바탕에서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http://www.kimkoo.or.kr)와 백범기념관(www.kimkoomuseum.org) 등의 웹페이지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장학재단(www.kimkoo.org)도 운영되고 있다.



주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한국현대사 전공의 소장학자로서, 백범 관련 글과 논문이 10여 편이 넘는 이 분야의 권위자이며 김구 선생의 암살배후세력 분석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1959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1981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계명대, 가톨릭대, 한신대, 조선대, 덕성여대, 한양대, 한국외대에서 강의했으며 1993년부터 창원대에 자리를 잡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산하 ‘백범김구선생시해규명위원회’,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시민단체연대 운영위원과 한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는 「1945∼48년 우익의 동향과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1993,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45∼1946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우익의 분화」(1992,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7호, 역사비평사), 「1948년 남북연석회의와 남한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동향」(1994,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54), 「해방 직후 김구·김규식의 국가건설론과 정치적 의미」(1995, 한국사연구회 편), 「근대 국민국가와 민족문제」(1995, 지식산업사), 「백범일지의 원본·필사본·출간본 비교 연구」(1996,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92), 「백범 김구 시해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1996, 『성곡논총』 27집 4권), 「1948년 통일독립촉진회와 남북관계」(1997,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 출판부), 「김구의 마지막 노선에 대한 시비」(1997, 『우송조동걸교수정년기념논총 한국사학논총』), 「1896∼98년 백범 김구의 연중 의병과 치하포 사건」(1997, 학술진흥재단 수탁과제 제출논문) 등이 있다.

월간지·단행본으로는 『백범 암살의 배후는 미국 CIA인가』(1992, 『월간 말』 5월호), 『휘호로 본 백범 김구, 그 삶의 궤적과 진수』(1994, 『월간 말』 7월호), 『휘호에 스며든 백범의 내면세계』(1995, 『백범 김구의 나라사랑), 문화일보사) 등이 있다.

일간신문으로는 「백범 김구(7): 의병 시도」(1995, 『문화일보) 8. 23), 「백범 김구(8): 치하포 사건」(1995, 『문화일보) 8. 26), 「백범 김구(45): 남북연석회의(1)」(1996, 『문화일보) 1. 24), 「백범 김구(46): 남북연석회의(2)」(1996, 『문화일보) 1. 27), 「백범 김구: 휘호에 스며든 의미」(1996, 『문화일보) 2. 27), 「진실 규명과 유지 계승을」(1996, 『중앙일보) 10. 25) 등이 있다.



<백범일지>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보물 1245호로 1997년 6월 12일 지정되었으며 둘째아들 김신 씨가 관장으로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으로,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 발행되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 본이 중간(重刊)되었다.

백범이 상해 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 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 사료로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잘 묘사하고 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고려공산당의 총격 사건만 언급하는 등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백범일지> 상권은 백범이 53세 되던 해인 1929년에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지난 독립운동 사실을 회고하며 집필하였다.

백범 선생은 상권을 당시 어린 나이였던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기술하였다고 한다. 탈고를 마친 뒤 인, 신 두 아들에게 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그간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였으면 부자간에 서로 따뜻한 사랑의 대화로 족할 것이나,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아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따름이다. 또한 나는 이미 왜구(倭仇)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死線)에 선 몸이 아니냐.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하권은 백범이 67세 되던 해인 1942~1943년 경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필하였다고 하권 책머리의 서문에서 적고 있다. 상권은 만년필에 국한문 혼용이며, 하권은 모필(毛筆)로 역시 국한문을 혼용하여 적었다.

하권을 쓰고난 뒤 백범 김구 선생의 글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상해 법조계(法租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弱冠]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耳順]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중략)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鐵血男兒)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그후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홍구의거 등이 진행되어 천만다행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쓸모 없는 이 몸도 최후를 고할까 하여, 본국에 있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반드시 전해 달라는 부탁으로, 상권을 등사하여 미국·하와이에 있는 몇몇 동지에게 보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지금에는 불행히도 비천한 목숨이 잠시 보존되고 자식들도 이미 성장하였으니 상권을 등사하여 부탁한 것은 문제가 없게 되었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4)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9)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1~62)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분명히 살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그르쳐 허다한 실패를 경험한바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다면 사랑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저의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62)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62)

고선생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피발좌임한 오랑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115~11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라 아니리 (126)

아버님은 내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짐작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165)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3)

“지금 약혼을 한다 하여도 내가 탈상한 후 결혼할 것이니, 그 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한문 공부를 정성껏 한다는 조건입니다.” (184)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희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192)

“작은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202)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203)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더라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214)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1)

우리도 어느날이고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없이는 성공하지 못할 터이니 도적의 결사와 훈련을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하여, 몇 달을 두고 각 교사가 연구하다가 끝내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257)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4)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267)

내가 김존위의 아들로 일국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추락케 하는 것이니 감당할 수 없다 하였으나, 혁명 시기에는 관계 없다고 강권하므로 부득이 승낙했다. (288)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288~289)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290)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본 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임시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중략)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중략)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7)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만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비록 노동자였지만 애국심 하나만은 강렬하였다. (319)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

심리학 박사가 각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시험하여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파괴술을, 지적 능력이 강한 자는 적정 정탐으로, 눈 밝고 손재주 있는 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분과 과목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심리학자가 시험 성적의 개요를 보고하였는데, 특히 한국 청년은 앞으로 촉망된다고 말하였다. (397)

<나의 소원>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일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423)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426)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426)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429)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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