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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11시 02분 등록
 

북 리뷰 [10] 백범일지



<백범일지> 백범저 .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2 개정판



***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는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서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에서 오는 온갖 수모를 다 견디며,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간 민족의 영웅이다. 그의 고난과 수고를 생각하면 ,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잠자던 영혼이 번쩍 깬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는, 서울은 백범이 겪었던 암흑보다 더한 눈먼자들의 도시인 듯하다.


 그가 역사 속에서 걸어나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의 삶의 사표가 되고 있다. 백범이 못다한 이야기는 계속 김준엽, 장준하의 글에서 이어지고 ,이국에서의 삶은  의암 유인석을 따라 의병활동을 펼친 노촌선생님의 아버지 이주승과 삼촌 이조승의 기록에 남아 내게 가깝게 읽혀지고 있다. 오래전에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끝까지 간직했던 호신용 칼 한자루를 밥 한그릇과 바꾸는 그런 처참한 심정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려고해도 이미 근 현대사는 내게 이렇게 가깝게 닿아있어서 잘 정리해서 후손에게 남겨 주어야 할 책임감을 불러 일으킨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으로 끝난 그의 꿈이다. 필경 그는 이런 일의 결말이 가져올 혼돈과 허망함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에서 노후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반대세력의 사주를 받은 동족의 총에 명예로운 그의 인생을 내려놓은 혁명가 김구 선생은 그래서 더욱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그의 생애이기에 연보를 기록함으로써 백범일지를 다시 읽어본다. 백범의

일지는 날마다의 기록을 의미하는 日誌가 아니라 숨겨진 기록, 곧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逸志이다.


*백범 연보


1876 (1세)

(양 8.29; 음 7.11) 안동 김씨 金自點의 傍系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金淳永과 어머니 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남. 兒名은 昌巖.


1878∼79 (3∼4세)

천연두를 앓음.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벼슬자국이 생김.


1880∼82 (5∼7세)

5세 때 강령 三街里로 이사. 아버지 숟가락 부러뜨려 엿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음. 7세 때 해주 텃골 본향으로 다시 돌아옴.


1883∼86 (8∼11세)

아버지는 尊位에서 都尊位에 천거되었다가 3년이 못되어 면직. 아버지는 불평이 많아 가끔 양반 구타


1887 (12세)

집안 어른으로부터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아버지가 청수리 이 생원을 선생으로 모셔다 글방을 차려줘 공부 시작.


1888∼89 (13∼14세)

(4월) 할아버지 金萬默 별세.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호전되어 반신불수. 부모님은 무전여행으로 문전걸식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님. 백범은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다.


1890∼91 (15∼16세)

(1890.4) 할아버지 대상. 그 직후 부모님과 더불어 다 시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에 다님. 서당 선생의 수준에 회의. 아버지, [토지문권] 등 실용문서를 배울 것을 권함. 이와 아울러 {通鑑}, {史略} 등을 읽음. 鄭文哉에게 면비학생으로 {大學}과 漢 唐詩와 科文 등을 배움.


1892 (17세)

壬辰年 慶科에 응시하여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 폐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麻衣相書}로 관상 공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그외 {地家書}·{孫武子}·{吳起子}·{六韜}·{三略} 등을 탐독.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


1893 (18세)

(정초) 포동 吳膺善을 찾아가 동학 입도, 金昌洙로 개명. 동학 입도 몇 달 후 連臂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음.


1894 (19세)

(가을) 해월 최시형에게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음.

(9월) 황해도 15명의 접주가 회의하여 거사 결정, 백범은 '팔봉 접주'로 선봉에 서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 군대 훈련. 안태훈, 백범측에 밀사를 보내 상부상조하기로 밀약.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같은 동학군 李東燁의 공격으로 대패. 몽금포로 피신. 3개월간 잠적.


1895 (20세)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 유학자 高能善을 만나 衛正斥邪論 전수받음.

(5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 월편 기행, 만주까지 감.

(11월) 돌아오는 길에 김이언 의병의 고산리전투에 참가하나 패함. 귀향 후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


1896 (21세)

(2월) 다시 중국으로 떠났으나, 안주에서 단발령의 정지와 삼남 의병 소식을 듣고 돌아오기로 결심. (3.9) 치하포에서 일본인 육군중위 쓰시다(土田讓亮)를 國母報讐로 살해 응징.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림. 자살을 기도하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

(8∼9월) 세 차례 심문 받음.

(10월) 인천감리서에서 사형 선고 받음.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 고종은 판결 보류.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 감옥에서 {大學}·{世界歷史}·{世界地誌}·{泰西新史} 등으로 서양 근대문물을 접함.


1897 (22세)

강화인 金周卿이 백범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


1898 (23세)

(3월) 탈옥. 대신 부모가 투옥.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늦가을) 麻谷寺에서 중이 됨, 법명은 圓宗.


1899 (24세)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마곡사를 떠남.

(4월) 부모 만남.

(5월) 평양 대보산 靈泉庵 방장으로 장발의 乞詩僧 생활.

(9∼10월경) 還俗하여 해주 본향으로 돌아옴. 작은아버지가 농사일 권유.


1900 (25세)

(2월) 金斗來로 변명하고 강화 김주경을 찾아감. 김주경을 만나지 못하고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 훈장.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남. 유완무의 권유로 이름을 龜로 고치고, 字는 蓮上, 號는 蓮下로 함. (11월) 부모를 연산으로 모시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감. 도중 고능선 선생 찾아뵙고 논쟁, 세대가 다른 것을 느낌. (음 12.9; 양 1901.1.28) 아버지가 돌아가심.


1902 (27세)

(1월) 如玉과 맞선 보고 약혼.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 후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3 (28세)

(1월) 약혼녀 여옥 병사.

(2월)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 장련읍 사직동으로 이사. 吳寅炯의 사랑에 학교 설립.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됨. (여름)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崔光玉을 만남. 그의 권유로 安信浩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 장련군 種桑委員으로 임명됨.


1904 (29세)

(12월) 崔遵禮와 결혼. 최준례, 경성 敬信女學校에 입학. 장련 사직동에서 근 2년 살고, 장련 읍내로 이사.


1905 (30세)

(11월) 진남포 에버트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경성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 참가. 전덕기·이준·이동녕·최재학 등과 함께 을사5조약 파기 청원 상소를 올리고 공개연설 등 구국운동.

(12월)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


1906 (31세)

장련에 光進학교 세움. 장련에서 신천군 문화로 이사. 鍾山의 西明義塾 교사. 일본군의 종산마을 약탈 저지. 첫딸 낳음.


1907 (32세)

(1월) 金庸濟 등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 楊山학교 교사. 첫딸 사망 (여름) 면학회와 양산학교의 '하기 사범강습회' 주최하여 교사 양성에 매진. 최광옥·이광수 등이 강사로 참여.


1908 (33세)

(여름) 제 2 차 하기 사범강습회 성황리에 개최.

(9월) 양산학교 중학부 개설, 중학부는 이인배·김홍량이 담당, 백범은 소학부 담당. (가을) 황해도 교육자들과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學務總監 피선.


1909 (34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 (12월) 양산학교 소학부와 더불어 재령 保强學校 교장 겸임. 당시 羅錫疇, 李在明 등과 만남.


1910 (35세)

둘째딸 化慶 태어남. (11월) 경성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 양기탁·이동녕·안태국·이승훈·주진수·김도희 등과 함께 서울의 都督府 설치, 만주 이민과 무관학교 창설 등을 결의.

(11.20) 안악으로 돌아옴.

(12월) 安明根, 양산학교로 백범을 찾아옴.


1911 (36세)

(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도인권 등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종로구치감으로 이감. 어머니가 옥바라지.

(7월)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 서대문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56호). 감옥에서 의병·신사 등을 만남. 특히 활빈당 간부 김진사에게서 비밀결사의 요령을 들음.


1912 (37세)

(9월) 明治 日王이 죽어 15년형이 7년으로 감형. 다시 명치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이름 龜를 九로, 호 蓮下를 白凡으로 고침.


1914 (39세)

인천감옥 이감(죄수번호 55호). 17년 전의 감방 동료였던 文種七을 만남. 매일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 강제노역. 투신 자살을 결심하나 곧 마음을 고쳐 열심히 일해 상까지 받음.


1915 (40세)

둘째딸 화경 죽음. (8월) 가출옥.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安新學校로 감.


1916 (41세)

문화 궁궁농장 看檢. 셋째딸 恩慶 태어남.


1917 (42세)

(1월) 俊永 숙부 별세. (2월) 東山坪 농장의 농감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움. 셋째딸 恩慶 죽음.


1918 (43세)

(11월) 아들 仁 출생.


1919 (44세) (3월) 3·1 운동으로 안악에서도 만세운동. 어머니, 환갑잔치를 사양

(3.29) 안악에서 출발. 평양·신의주·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警務局長이 됨. 국무총리 이동휘의 공산주의운동 권유 물리침.


1920 (45세).

(8월) 아내 최준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옴.


1922 (47세)

어머니도 상해로 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원으로 선출됨.

(9월) 임시정부 內務總長이 됨. 차남 신(信) 출생.

(10월) 여운형·이유필 등과 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이 됨.


1923 (48세)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내림.

(12월) 상해교민단에서 義警隊 설치, 고문에 추대됨.


1924 (49세)

(1월) 아내 최준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


1925 (50세)

(8.29) 나석주 의사가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줘 가장 영광된 생일을 보내다.

(11월) 어머니 곽낙원, 차남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감.


1926 (51세)

(12월) 국무령에 선출됨.


1927 (52세)

(3월) 임시정부, 3차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 국무위원에 선출됨.

(8월) 임시정부 내무장이 됨.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집행위원이 됨.

(9월) 장남 인, 고국으로 보냄.


1928 (53세)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임시정부의 활동 침체로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나자, 백범은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 보내어 자금 지원을 요청.


1929 (54세)

(5월) 1년 2개월 만에 얻백범일지얽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


1930 (55세)

(1월)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이시영·김두봉·안공근·박찬익·윤기섭·이유필·엄항섭·차이석·김붕준·송병조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1월) 임시정부 재무장이 됨.


1931 (56세)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韓人愛國團을 창단.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교포에게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의열투쟁 계획.


1932 (57세)

(1.8)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裕仁) 저격의거.

(4.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을 즉사시킴. 미국인 피치 씨 집에 피신.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 파견했으나 체포됨. 한인애국단원 유상근·최흥식 등, 관동군 사령관 本庄繁를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했으나 대련에서 체포됨.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 상해에서 탈출. 임시정부, 상해에서 杭州로 옮김. 군무장이 됨.

(6월) 임시정부에서 사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長震球 또는 長震으로 행세함.


1933 (58세)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 필담 결과 洛陽軍官學校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고,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감.


1934 (59세)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 설치. (4월) 9년 만에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인·신 만남. (12월) 남경에서 중앙군관학교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韓國特務隊獨立軍 조직.


1935 (60세)

(5월)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諸公 경고문」 발표. 조소앙 등 임정국무위원 5명 사직. (10월) 임정의정원 의원 16인, 가흥 南湖에서 船上 비상회의.묀이동녕·김구·조완구 등을 국무위원으로 보선. (11월) 이동녕·이시영·조완구·엄항섭·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


1936 (61세)

(8.27)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씀.


1937 (62세)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인애국단 및 미주 5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중일전쟁으로 호남성 長沙로 피난하기로 하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목선으로 남경을 떠남. 백범, 안공근을 상해에 파견하여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함.


1938 (63세)

(5월) 3당 합당 문제가 활발해져 楠木廳에서 회집. 백범,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한 달간 湘雅의원에 입원. 玄益哲은 절명.

(7월) 임시정부, 장사가 위험하여 廣州로 옮김.

(10월) 임시정부, 柳州로 옮김.


1939 (64세)

(4월) 어머니 곽낙원(81세), 중경에서 咽喉炎으로 작고.

(5월) 임시정부, 유주에서 사천성  江으로 옮김. 김원봉과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

(8월) 기강에서 7당통일회의 개최.

(11월) 曺成煥을 단장으로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섬서성 서안으로 파견.


1940 (65세)

(5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중앙집행위원장이 됨.

(9월) 임시정부,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김. 중경 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창설.

(10월)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고 주석이 됨.

(11월) 西安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간부 30여 명을 파견.


1941 (66세)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함을 보냄.

(10월) 임시정부 승인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담. {백범일지} 하권 집필을 시작.

(11월)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 제정 발표. (12월)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2 (67세)

(3월) 임시정부, [3·1절 선언]을 발표하여 중·미·영·소에 대해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5월) 임시정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김원봉의 광복군 부사령관 임명.

(10월) 김원봉 등 좌파, 임시의정원에 참여.


1943 (68세)

(3월) 임시정부, 중경에서 3·1 운동 24주년 기념식 거행.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 전후 한국독립 지원 요청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

(9월) 주석에 복직.


1944 (69세)

(4월) 임시정부, 제 5 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 주석으로 재선됨.

(9월) 장개석을 면담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


1945 (70세)

(2월) 임시정부, 독일에 선전포고.

(3월) 장남 仁(28세), 부인 安美生과 딸 孝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남.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고, 중국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br>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

(8.10) 섬서성 주석 祝紹周로부터 일본 항복 소식 들음. br> (8.18) 중경으로 귀환.

(9월)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을 통해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항 발표.

(11월) 상해를 거쳐 제 1 진으로 환국.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6 (71세)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됨.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됨.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한독당으로 통합.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

(6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모심.

(8월) 연합국 원수 및 정당 대표에게 임시정부 수립의 지원을 요망하는 메시지 발표.

(10월)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발표.


1947 (72세)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 2 차 반탁운동 전개.

(2월) 비상국민회의를 확대하여 국민의회 조직.

(3월)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설. (5월) 한독당원들에게 제 2 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불참할 것을 성명.

(10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남북대표회의 의결.

(11월) 한독당, 정당협의회 참가 보류.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


1948 (73세)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 의견서를 보냄.

(2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냄.

(3월) 김규식·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와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 표명.

(4월) 남북연석회의 참여. [공동성명서] 발표.

(5월)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 (7월) 북한의 단정 수립에도 반대한다는 입장 밝힘. 통일독립촉진회 결성.

(8월)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 맏아들 인의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 천장식,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모심.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 발표.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국.


1949 (74세)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

(6.26)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

(7.5) 국민장 거행. 효창원에 안장.


1962 (서거 13주년)

(3.1)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重章에 추서.


1969 (서거 20주년)

(8.23) 남산에 동상을 세움.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13.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 써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19.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아이니...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2. 우리 조상은 지금까지 텃골 주위에서 살고 있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 등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대대로 받았다.


24. 나는 병자년(1876), 할머니의 기일인 7월 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 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26. 엽전 스무냥을....먹고 싶은 떡도 먹지 못하고...아버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빨랫줄로 꽁꽁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장련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아버님이 매 맞는 것이 퍽 시원하고 고소하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들로 가서 수박과 참외를 실컷 사 먹이고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27.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28. 아버님의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29.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며 주저 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31. 나는 아침이면 밥구럭을 메고 산 고개를 넘어 집에서 서당까지, 서당에서 집까지 오고가며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2. 시련의 사회 진출


37 “돈만 많으면 과거도 벼슬도 다 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 글을 몇백 냥 명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그제도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례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 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 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 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42.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 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43.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44. “지기금지원대강”(至氣今至願大降) - 지극한 기운과 원을 내려주소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하늘님을 모시면 조화의 경지가 이루어지고 영원히 잊      혀지지 않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


58. 안진사도 종종 나를 청하여 스스로 잘된 작품이라 생각하는 것을 많이 들려 주었다.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니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58. 안진사(안중근의 아버지)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60. 고선생(고능선)이 거처하는 사랑은 작은 방인데 방안 가득 서적들이 쌓였고, 사면 벽에는 이름난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들과 선생 자신이 마음 깊이 깨우쳐 얻은 글 등을 붙여 놓았다.


62. (고능선 선생이 이르시길)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3. 질풍노도의 청년기


72. 단천 마운령을 넘어 감산군에 이른 때에…이상했던 것은 그 지역 내의 관사를 제외한 집들이 지붕에 한결같이 푸른 풀이 무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봇껍질”이라 하는 것으로 지붕을 덮고 흙을 씌워놓아 풀씨가 날아와 무성케 해놓았기 때문이다.


100.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4. 방랑과 모색


148.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 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 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165 "형님 내외분은 창수 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원문 : "君子可欺以方": 맹자에 나온다)


173.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180. (고선생의 객사 소식을 듣고)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이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183.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6.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5. 식민의 시련


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198.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 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204.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5.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그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228. 그럴 때(고문을 심하고 받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229.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사식은 방 밖에서 밥을 따로 먹게 했다.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방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41.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244.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254.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을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7.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 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6.망명의 길


275.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280. “어느 날이고 바람 잘부는 날 두고 보자.”


282. 무오년 (1918년 )11월에 인이가 출생했다.


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 (1929. 54세)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295. 하권은 중경 화평 오시야항 1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67세(1942년)때 집필.


296. 지금 내가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한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302.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전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햏하라.” 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307.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312.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잡종회”라 부를 만한 모임이었다.


317.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경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27.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을 실행하게 되었다. 공작에 사용하는 돈과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일체의 전권을 위임받았고 다만 성공과 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받았다. 그래서 제 1착으로 이봉창의 동경 사건을 주관하였다.


328.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청도 <민국일보>는 큰 활자로,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329. 동경의 이봉창의거가 세계에 전파되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우리 동포들 중 나를 동정하던 동지들은 크게 흥분되어,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을 건너서 눈송이같이 날아들었다.


339. “이번 홍구사변의 주모 책임자는 따로 있으면서, 자기가 사건을 감추고서 관계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이유필 등 일부 인사들의 말이었다.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 하였다.


1932년 5월 10일 백범은 한인애국단 영수 명의로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40. 그러나 4.29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4.29 사건 발생이후 왜는 나의 목에 제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을 붙였고, 제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 3부 합작으로 현상금 60만원을 내 걸었다.(당시 일반 노동자의 급여가 일당 1원, 한달 30원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343. 나와 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351.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 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4. 여사공과 선상생활

이후 아주 선중생활을 계속하였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358.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당, 조선혁명단,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이무렵 나는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라는 조완구 형의 친서를 받고 심히 분노하여 급히 항주로 달려갔다.


360.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회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해남도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


363. 어머님은 세 살인 신을 우유로 길렀는데, 밤에 잘 때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려 재웠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했다.

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365. “어머님께서 아이놈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도 이전과 같이 굶지는 않을테니, 나올 수 있으면 오십시오.”


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371. 남목청에서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진단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여, 입원 수속도 필요없이 문간에서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두 시간 내지 세 시간 내 목숨이 연장되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병실에 입원시켜 치료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1938년 5월 6일 남목청에서 이운환이 백범등을 저격한 사건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 뿐이셨다.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378.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9. 어머님은 50여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헤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년(1939) 4월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91. 나는 동지들과 그 권속을 이끌고 한구를 경유하여 장사로 가서 8개월, 광주로 가서 3개월, 유주로 가서 몇 달, 기강으로 가서 근 1년 있다가 토교 동감에 왔다. 이곳에서 새로 지은 가옥 4동에 대부분 가족이 거주하였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394. 몇 개월 동안은 광복군이 유명무실하여 연합국의 인기를 끌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인데,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을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다.


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출신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 것은 1945년 1월 31일 하오였다. 일본군 탈출 학병들에 대한 공식 환영식은 1945년 2월 5일 임정 청사 1층 식당에서 개최되었고, 이날 학병을 대표하여 답사한 인물은 장준하였다.


* “선생님, 호박이 넝쿨째 뚝 떨어졌습니다.” 미군 윔쓰 대위가 백범에게 말했다.


400. 7년간의 중경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여 무슨 말을 써야할지 말의 조리와 일의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교자를 타고 남안 화성산에 있는 모친 묘소와 망자 인의 묘지를 찾아가 미리 준비해간 꽃을 바치고 축문을 낭독한 후 묘지기를 불러 돈을 후하게 주며 분묘관리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401. 입국할 행장을 준비할 때 가죽상자 8개를 사서 정부문서를 수습하였다.


  * 가장 1차 자료인 임시정부 문서 8상자는 한국 전쟁중에 유실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로인해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는 일본 정부의 사찰기록이거나, 대만 국민당 정부 소장자료가 대부분이다.


중경을 떠날 당시에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 동필무 등이 우리 임시정부 국무원 전체를 초청한 송별연이 있었다.


국민당정부에서도 송별연을 열었는데 장개석 선생을 위시하여 중앙정부와 중앙당부 각계 명망가 수 백인이 모였고, 우리 측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이 초청받았다.


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404. 오사야힝에 있을 때 폭격이 가장 심하던 4월 어느날, 새벽부터 9시간을 금탕가의 사설 방공호에서 지냈다.

그날 중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폭사하였다.


405. 내가 옛 서적을 익힐 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것 하나에 2, 3명씩, 어른은 1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7. 조국에 돌아와서


410. 도착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경듣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 하였다.

그럭저럭 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지방 순회를 시작하였다.


412. 다음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포기와 향나무 한그루 심고 떠났다.


나의 소원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427.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430.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431.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432.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히기에 쓰이는 자유이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433.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여러 판본을 거쳐 출간되어 왔다. 오늘 나는 도진순의 주해를 따라 책을 읽었다. 국한문 혼용과 기억에 의존한 연대기는 백범일지를 주해하는 이들의 많은 노력을 요구하였고 마음속 깊이 백범을 존경하는 학자들은 자기 나름의 열정으로 책을 통해 백범의 생애를 알렸고 그의 인품을 우러렀으며 역사적 평가를 조심스럽게 덧붙여 놓았다.


우선 백범일지의 판본과 출간본을 살펴보자.


1.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국사원 1947.

2.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교문사 1979.

3. <백범일지> 우현민역 서문당 1989.

4. <친필을 원색 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집문당. 1993.

5.  윤병석 직해 <직해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빕문당. 1995.

6. 김학민, 이병갑 주해 <정본 백범일지> 학민사. 1997

7. 도진순 주해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돌베개. 1997.

8. 이만열 <백범일지> 역민사. 1997.

9. 백범 학술원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나남. 2002.

10. 도진순 엮어 옮김 <쉽게 읽는 백범일지> 돌베개. 2005


2008년 7월에 나온 배경식의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는한국역사연구회 회원으로서,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원으로서의 그의 노력이 10년만에 결실을 이룬 것이다.  그는 10여년전 능내의 다산 묘 근처에서 동료들 앞에 “역사를 위한 전투”라는 명제를 내 걸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덕분에 백범이 함께했던 사건과 사고들에 대하여 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또 한권 눈에 띄는 책은 역시 도진순이 엮고 보탠 <백범 어록>이었다. ‘평화통일의 첫걸은, 백범의 말과 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자서전 밖에서의 백범의 연설문과 대중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두었다.


한사람의 일생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백범의 일생은 그의 생각을 자라나게 하고 그것이 목표가 되어 행동하게한 수많은 말들을 남겼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범상치 않은 용기와 지혜, 스승 고능선의 책장을 접어가며 적절한 때에 일러주는 줄탁동시의 가르침, 여행길에 깨달은 사물을 보는 감각, 사람들과 부딪치며 절절하게 느낀 인류애등 이 모든 감동의 시간에 <아름다운 말>들이 있었다. 백범은 그 말들을 기록했고 되풀이 하여 암기함으로써 말이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였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한 기록‘을 아이디어 뱅크에 넣어둔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와 병행해서 순간순간 나를 깨우쳐 마치, 가뭄에 뿌리를 적셔주는  단비와  같던 <말들의 사전>을 만들어 보아야하겠다.


내가 만일 저자라면을 어떻게 전개할까...고심하기 시작했을 때 서울사대 도덕심리연구소에서 내놓은 연구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으로 백범의 생애를 분석해놓은 자료였다.


곧 바로 이 책으로 들어갔다.


분석의 틀은 세가지였다.


1. 우선 백범의 생애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이나 변화를 가져왔던 주요 생애사건을 살펴본다.

2. 백범이 발휘한 지적 능력의 종류와 지적 강점을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8가지의 다중지능을 적용해본다.

3.백범의 지적 생애사에 대한 교육학적 이해와 평가를 위하여 전기적 연구에 적용되었던 체제분석모형을 적용한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이 연구를 위하여 자서전이나 신문 잡지 등의 인터뷰에 자주 나오는 사건을 분석한다. 특히 백범이 스스로 회고한 사건에 의미를 높이둔다.

-백범이 면담 자서전 등의 자기보고를 통해 비교적 강력한 정서적 경험을 동반하며 회고한 사건과 그때의 정서적 반응들을 살펴본다.

-생애 궤도를 새루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는 전환점에 위치한 사건을 뽑아낸다.

-백범의 생애 전반을 흐르는 지적 에너지의 방향을 가늠해보고 그 방향성을 연구한다.


*백범의 다중지능적 특성

백범은 지,정,의를 골고루 갖춘 보기 드문 인성과 능력을 갖추었다.

인지적인 측면; 예리한  현실 인식능력과 상황판단 능력

정의적인 측면 ;어진 성품과 대담한 담력

신체적 측면; 뛰어난 체력과 기민한 동작


위의 특성들을 다중지능으로 변환시켜보면 신체운동 지능과 인간친화지능, 그리고 자기 성찰지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분석해 보자.


1. 전사의 능력, 곧 신체운동지능이 높다.

백범은 어릴때부터 상당히 뛰어난 체력과 신체 운동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튼튼한 신체는 또한 자신감과도 연결이 된다. 물론 일을 실행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면밀히 계획하지만  일단 한번 결정하면 아무 망설임 없이 실행하곤 했는데 이처럼 단호한 행동의 기저에는 그의 신체운동능력에서 오는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섯 살때 동네 아이를 혼내주려고 작심한 것.,19세에 동학 접주가 된것. 21세의 백범이 행한  치하포사건.


2. 리더쉽의 핵심인 인간친화지능


3. 자기 인식과 향상의 찬란한 힘, 자기 성찰지능

자기 성찰지능은 한마디로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 장단점을 정확히 인식,통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한번밖에 없는 삶의 완성을 향해 끈임없이 동기화시키는 능력이다.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의 생애사를 다시한번 주-욱 훝어보는 작업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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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10:02:06 *.204.150.138
타이핑이 빠르지 않다시면서 샘의 리뷰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석 틀은 제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백범일지>와 김구 선생님에 대해 생각하다가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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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운
2009.06.09 23:28:23 *.248.91.49
난 지난 주에 목,금,토 꼼짝않고 방에 콕 박혀 있었어요.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자꾸자꾸 창문만 열어놓고,또 열고...하다가
일요일 길상사를 갈때엔 마음을 다 무찌르고 갔거든요.

동료들이 해 놓은 북리뷰를 보면...
다시 되풀이 하지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나서
과감하게 생략해버렸어요.

아직도 내 글이 아니고 베껴놓는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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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6.03 09:52:36 *.67.223.107
백범의 다중지능에 대한 연구는 서울사대 문용린 교수의 연구실에서
시작되었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시대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참고하면 매우 유익할 것 같아요.

언제 한번 이 테마로 "함께 읽고 함께 나누기" 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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