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숙인
  • 조회 수 236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6월 8일 11시 09분 등록

1. 내가 저자라면

- 어떤 사나이의 삶

한 남자가 있었다.

상놈의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하는 것이 마냥 즐겁고 신분의 탈을 벗어보고자 과거에 응시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만다. 얼굴의 상 역시 좋지 않아 아무리 스스로를 들여다 보아도 귀할 상, 부유할 상은 보이지 않고 천한 상, 가난할 상밖에는 없다. 

그는 꽃다운 2~30대에 이미 2차례나 감옥살이를 했으며, 그 햇수는 10여년에 이른다. 감옥 살이 중에 큰 병도 걸려보고 어찌나 고문을 많이 당했는지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종종 있었다. 연애운도 그다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어 성혼이 되려나 싶으면 제 3자가 불쑥 나타나 혼인을 방해했으며, 그만 혼인 전에 병에 걸려 신부가 죽기도 했다. 가까스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어 늦은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자식들의 명이 짧아 10세를 못 넘기고 죽은 자식이 3명이요. 20대에 죽은 자식이 하나이다.

가족은 있으나 평생을 쫓기는 신세로 외로이 숨어 살아 부인이 병이 악화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자식이 죽을 때도 곁에 있어주지 못하였다.
삶을 되돌아 보아도 마음 편히 먹고 잔 적이 까마득하니 평생을 그렇게 고달프고 힘들게 살았다.

백범 김구의 개인의 삶은 대략 이러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로서는 그가 있었던 것은 행운이요. 축복이지만 그의 개인사는 이와 같이 극히 불행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남겨준 가치는 한 사람의 삶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는 범인의 백정이라도 저와 같은 애국심이 있다면 나라의 독립이 가능하리라 여겨 백범이라 호를 지었으며, 스스로를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라고 종종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비록 그가 범부로 삶을 시작하였더라도 ‘마음 좋은 이’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후 유교의 의로움과 기개를 마음 속에 품고 신학문의 유용함을 받아들여 새로운 격동기를 열어나간 영웅으로서 삶을 살았다.
범부는 불리한 상황 탓을 하지만, 영웅은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뜻을 더 굳게 만든다
환경은 같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범부가 되고 영웅이 된다.

개인적인 삶으로서는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도망자의 고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여정 동안 가족과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때때로 그들 조차 위험에 처하게 함에 따라 비록 좋은 남편,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는 못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위중한 병 앞에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 잡수시게 할 정도로 효자였고, 수많은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선생이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조국을 향한 불을 지핀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는 한 가족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민족의 아버지였다.


-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삶


백범 일지를 읽다 보면 종종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백범의 기개가 그리 용맹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을 항상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켜주던 그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구의 친척들 중 종종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이가 있어 그의 어머니가 이를 보고 김구에게 일컫기를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며 자식을 집안의 옳지 못한 습성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아들이 왜놈을 때려죽인 죄로 인천으로 잡혀 들어가는 배 안에서 앞으로의 자식의 심신의 고난과 괴로움이 불 보듯 뻔하니 "얘, 네가 이제 가서는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맑고 맑은 이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 같이 다니자." 며 함께 생을 마감하려 했다. 인천 감옥 주변에서 품삯을 팔아 돈을 모아 사식을 챙겨주며 아들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점차 자식을 큰일을 할 인물로 여기게 되어 누구보다 자식의 뒤를 봐주게 된다.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평생을 옥에 갇히거나 도망 다니며 살 때 어미 없는 손주 둘을 홀로 키웠으며, 그런 어머니에게 미안해 작은 형식이나마 생일 잔치를 해드리려고 하니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말해 돈을 따로 드리니 그 돈에 도리어 본인의 돈을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평탄치 못한 자식의 삶의 뒷바라지를 평생 하며 자신의 삶 역시 고단해졌지만 아들을 ‘너’가 아닌 ‘자네’로 부르며 예우해 주던 여인,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라며 아들의 뜻을 믿고 따르던 여인이 백범 김구의 어머니이다.

그녀라고 태어날 때부터 강인하였을까? 아닐 것이다. 자식의 사랑이 믿음에서 존경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김구의 어머니로서의 자세에 대해 자각을 하며 스스로 모질고 강인한 여인으로 거듭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2. 내가 저자라면


수많은 사회운동가와 정치가들은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김구 선생을 꼽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유일한 저서인 백범일지는 정치가들의 필독서로 꼽힌지 오래이다.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의 자서전으로 상, 하편, 그리고 <나의 소원>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편은 목숨을 담보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을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이 본국에 있던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지난 날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유서 대신으로 쓰여졌다. 또한 하편은 1942년 중경임시정부 당시 해외 동포를 포함, 독자를 어느 정도 고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쓰여졌다. 더불어 마지막에 붙여진 <나의 소원>편은 김구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하고픈 말을 정리하여 자신이 만들고자 한 대한민국의 모습과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을 보여주었다.

참 오랜만이다. 책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고 뒷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함에 아주 빠른 속도록 읽어내린 것이 말이다. 백범일지가 매력적인 이유는 백범이라는 인물의 비범한 인생을 통해 당시 나의 조상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생생히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상편의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시련의 사회진출>, <질풍노도의 청년기>, <방랑과 모색>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당시 조선 사회의 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즉 백범이 켜켜이 쌓은 배움의 역사, ‘유교, 동학, 위정척사, 불교, 기독교,’ 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던 당시의 사상사적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어느 한 조류에 치우치지 않고 거의 모든 구국 사상의 조류를 받아들였다. 그는 과거의 것을 청찬하고 새로운 것만 좇지 아니하고, 과거로부터 긍정적인 면을 계승하여 이를 새로운 사상과 융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애국 계몽운동가, 민족주의자, 통일운동가로 스스로를 재포지셔닝한다.

<식민의 시련>과 <망명의 길>은 안악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옥살이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의 감옥이야기를 들여다보게 되면 하루 3끼 정상적으로 먹고 편히 내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하권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피신가 유랑의 나날>,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등으로 그 시기가 나누어지는 데, 개인적으로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편이 가슴에 크게 와닿았다. <해방 전후의 대륙>과 <조국에 돌아와서> 편을 보고는 만약에 김구의 뜻과 같이 우리의 힘으로 일군 조국 독립이었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 생각을 하였다. 

그는 발간사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하였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그러나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백범이 삶 가운데 지혜로운 이를 만나 뜻을 품고 용기 있는 이를 만나 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보의 주석까지 이르는 삶의 여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다. 이 책은 암울한 시대 상황을 뚫고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는 ‘범인이라 스스로를 일컫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의 영향은 60 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 수백년 동안도 그러하리라 예상된다. 이 책을 ‘범인의 자서전’일 뿐이라고 그는 낮춰 말하지만 나는 ‘범인으로 태어나 영웅으로 진 한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을 담은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라고 불러주고 싶다.



3. 내 마음의 글귀

[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서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1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의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5]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랆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9]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29]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38]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옴몸에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나 상서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야겠다고 결심하였다

[39] 장수가 될 훌륭한 재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슬픔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

등의 구절을 매우 흥미 있게 낭송하였다.

[42]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62] 고능선 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었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63]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했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 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는 구절을 힘차게 설명하셨다.

[65] 고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97] 밥 한 그릇을 먹은지 10분 정도밖에 안되었으나, 과격한 행동을 한 뒤라서 한 두 그릇쯤은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곱 그릇까지 먹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애당초 일곱 그릇을 더 요구한 것이 거짓말로 알려져서는 재미없는 일이라 큰 양푼 한 개를 청하여 밥과 반찬을 한 군데에다 붓고 숟가락 한 개를 더 청하였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 들고서 밥 한 덩이가 사발통만큼씩 되게 밥을 떠먹었다.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103] 강화도를 지날 때쯤, 어머님은 뱃사공도 듣지 못할 입안엣말씀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얘, 네가 이제 가서는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맑고 맑은 이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 같이 다니자."
이 말씀을 하시고는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신다. 나는 황송무지하여 어머님을 위안하였다.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105]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천중만금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6] 감옥 안이 극히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忠'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 그후로 여러 사람의 주의로 자살할 기회가 없었다. 또 나 스스로도 그 뒤로는 병마로 죽는지 원수에게 죽든지 저절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08]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 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114] 왜놈 와타나베가 나에게 직접 물었다.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을진댄 어찌 벼슬을 못하였느냐?"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114] 옥중생활을 대략 들어 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서
감리서 직원중에서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 문화, 경제, 도덕, 교육, 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교육
어느날 신문을 보니 나의 사건을 간략히 게제하고, 김창수가 들어간 후로는 인천 감옥이 아니라 학교라고 쓴 기사를 보았다.

세번재 대서
내가 대서하면 서로 상의해서 인지만 사다가 써 보내면 되니 편하기도 하고, 또 비용 한 푼 없이 성심껏 소장을 지어주는 탓에 김창수가 쓴 소장은 거의 다 승소한다고 와전이 되어, 옥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관리의 대서까지도 한 일이 있다

네번째 성악

[120] 입시하였던 승지 중 한 사람이 각 죄수의 공건을 뒤적이며 보던 중, 국모보수 넉자가 눈에 띄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꺼내 임금께 보여드렸다. 그 내용을 보신 대군주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아직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하셨다 한다.

[124] 당시 강화에 두 사람의 인물이 있었는데, 양반 중에서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는 김경득이라 했다. .. 소송에 전력하기를 7,8 개월 동안 김경득의 돈은 바닥이 났다.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이 번갈아 인천과 경성을 오르락내리락 하시다가, 마침내 김경득이 소송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로운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28]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 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131] 감옥 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나니 문득 딴생각이 들었다.
'조덕근 등을 데려가려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 이 길로 곧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앟을까? 그 자들은 결코 나의 동지가 아니다. 기필코 건져내서 무엇하리.'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결국 두번째 생각이 이기고 말았다. 나오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스럽게 내 자리에 앉아서 눈짓으로 네 명을 하나씩 다 내보내고 다섯번째로 내가 나갔다.

[134] 나는 허술한 것이 오히려 실속 있고 실속 있게 한 것이 도리어 허술한 격으로, 큰길가에 숨으리라 작정하고 솔포기 밑으로 두 다리를 들이밀고 반듯이 누었다.

[148] 삼남지방의 양반이 하는 말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엿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의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165] 작은 아버지는 계속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81]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고명한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 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183]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었야 한다. 셋째 직접 상명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96] 을사늑약 당시..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잇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203] 평소 재사로 자처하며 호기 부리던 강성춘에게 구국의 방도를 물었다. 강군은 나라 망한 책임이 당국자에 있고, 자기와 같은 시골 늙은이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내 집안이 상놈 중의 상놈이지만 그대는 양반 중의 상놈이니,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자제를 교육하라고 권하니 머리 깍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교육은 단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천주학이나 하라는 소린 줄 알고, 자기 가문 중에도 예수교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며 대화를 기피하였다.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 평민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시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있느냐!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 상놈들이여!
오백 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양반 앞에서 담배 한 대, 큰기침 한 번 마음놓고 못하다가, 이제는 재래의 썩은 양반보다 신선한 신식 양반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있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후륭한 양반이냐. 환등기구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모두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라고 절규하였다.

[214] 이재명 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더라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슬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의 애국심을 양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의무를 다했다.

[220]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야 할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품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221]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괴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2] 그러나 이와 같이 위난할 때 꺽이는 것이 어찌 한순직 혼자뿐이랴. 최명식도 밀고는 아니하였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그놈들의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무고한 것이 후회되어 스스로 호를 긍허라 한 것이다.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여 나의 혀끝에 사람의 생사가 달렸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하지만 졸지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하던 최중호를 말하고선 혀를 끊고 싶었다.

[223] 와타나베 놈이 입을 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내 가슴에 X광선을 대고 있어서 너의 일생 행적과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일 터이다.

[225] 거북이는 진흙 속에 빠지리니 기러기는 해외로 날으라.
[226]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셋째 온화한 수단이다. 좋은 음식도 대접하고 훌륭히 장식한 아카시의 방으로 데려가 극진히 공경하며 점잖게 대우하는 바람에 가혹한 고문을 참아낸 자도 그 자리에서 실토한 사람이 더러 있다.

[228]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뺏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29] 방안에서 먹으면 나누어 먹게 하겠으나, 사식은 반드시 방 밖에서 따로 먹게 했는데,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36]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 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망국민이 되었으나, 학생들은 후일 건국 영웅이 될 것을 바라는 마음도 헛된 것으로 돌아갔다.

[238]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나의 변화는 경무총감부에서 신문받을 때 와타나베 놈이, 다시 마주앉은 오늘의 김구가 17년 전 김창수인 것도 모르고, 대담하게 자기 가슴에는 X광선을 붙이고 있어 출생 이후 지금껏 나의 일체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당장 쳐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39]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246]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한다. 나는 17년 징역 선고를 받고 돌아와서 잠은 전과 같이 잤어도 밥은 한끼를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미님은 어찌 저렇게 강인하신가 탄복하였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248]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후부터 나도 매번 식사 때에 '나에게 전능을 베풀어 동양의 대악괴인 왜황을 내 손에 죽게 합소서"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249] 우리 동지들은 인격과 재능에서 뛰어나고, 50~60명이 정신적으로 단결되어 누구도 멸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건이라도 똑똑한 분자는 모두 우리와 정의를 통하고 지내는 터였으니, 엄연히 수인의 영도적 기관이 되어 갔다. 수인의 표면 감독은 왜놈이 하고, 정신상 지도는 우리 동지들이 하게 되었다.

[254]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1]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매년 각 분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라는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264]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90]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296]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납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6]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336]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월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월 짜리 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336]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352]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 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67]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셔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78]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라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424]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5]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로 한 수풀을 이루고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426]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431]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마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433]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IP *.145.58.15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12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1] 예원 2009.06.21 3017
1911 [11] <파블로 네루다>- 인용문 [2] 수희향 2009.06.16 2999
1910 [11] <파블로 네루다>-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6] 수희향 2009.06.16 2672
1909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2] 김홍영 2009.06.16 3059
1908 [10]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5] 정야 2009.06.16 2689
1907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3] 숙인 2009.06.16 3201
1906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6] 혁산 2009.06.16 2750
1905 [1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박병규역. 민음사 [2] 범해 좌경숙 2009.06.16 37582
1904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5] 희산 2009.06.16 2319
1903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4] 혜향 2009.06.16 2502
1902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4] 백산 2009.06.16 2704
190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書元 이승호 2009.06.15 2897
1900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면 [3] 書元 이승호 2009.06.15 2672
1899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2] 예원 2009.06.15 2451
1898 [10] <백범일지>- 인용문 수희향 2009.06.08 3109
1897 [10] <백범일지>-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3] 수희향 2009.06.08 2598
1896 백범일지 [2] 백산 2009.06.08 2462
1895 백범일지 [1] 혜향 2009.06.08 2405
» 백범일지 숙인 2009.06.08 2363
1893 [10] 백범일지. 백범저. 도진순 주해. [3] 범해 좌경숙 2009.06.08 2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