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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11시 3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김구 (金九, 1876 - 1949)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기동(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려서의 이름은 창암이었으며, 원래 본명도 김구가 아니라 창수였는데, 나중에 김구로 개명을 했다. 백범은 그의 호이다.


백범의 선대는 안동 김씨로 서울에 살던 명문이었으나 조상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면서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가장하여 군역전을 경작하며 천민처럼 살았다. 어려서부터 양반과 다른 자신의 신분을 깨달은 백범은 소년기에 과거로 입신출세할 꿈을 세워 <통감通鑑> <사략史略> <대학大學> <당시唐詩>등의 고전과 시문, 과문을 익혔으나 정의감이 투철했던 그는 당시의 과거 시험이 매관매직임을 목격하고는 그 뜻을 버리고, 관상과 풍수의 길로 들어섰다. 실용적인 <마의상서麻衣相書>로 관상공부를 하고, <지가서地家書>와 <손자孫子>, <오기자吳기子> <삼략三略> <육도六도> 등의 병서를 읽으며 젊음의 꿈을 키웠다.   


동학

백범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불선의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인내천 사상, 즉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동학의 지상천국의 이념과 만민평등주의에 감화를 받아, 그의 나이 18세(1893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接主, 동학 하부구조의 책임자로 군, 면 단위의 책임자급)가 되고 이런 시점에서 그는 창암이라는 이름을 창수라 바꾸고 동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황해도 도유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했고, 그 후 동학에 더욱 깊이 참여하여,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라는 첩지를 받고 동학을 전파하는 활동을 했다.


1894년은 갑오농민 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일본과 눈이 맞은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연합세력은 동학교도 전체를 도적으로 몰아 탄압했다. 백범은 이 와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참혹한 농민전쟁을 목격한다. 이에 분개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알려온 명령에 따라 해주 죽산장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라고 쓴 깃발을 들고 동학군을 이끄는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게다가 우군이었다가 그를 배신한 이동엽 부대의 습격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패배하고 만다. 전투에서 패한 그는 일단 몸을 피해 동학란 때 동학군 토벌에 나섰던 신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의 집으로 피신해 그의 비호 아래 지내게 된다.


유학

그 후 성리학자 고능선으로부터 위정척사 노선을 전수받고, 그의 문하생이 되어 그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백범은 고능선에게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을 가슴 깊이 받아 들였다.


하지만 온 나라가 친일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참다못한 그는 1895년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가 속한 부대는 일본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또 그 해에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백범은 1896년 2월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도중 안악으로 오다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와 마주치게 된 그는 쓰치다를 죽이고 만다. 은신처에 숨어 있다 체포된 그는 결국 일본군 중위를 죽인 죄로 1897년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사형집행 직전에 고종의 특사로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불교

그는 해주,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에도 <대학>을 비롯, <태서신사泰西新史><세계역사世界歷史・지지地誌> 등을 읽고 새로운 사상에 눈뜨게 된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된다. 기회를 노리다 1898년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일대를 떠돌다 하동에 있는 쌍계사에서 피신생활을 했으며 그 해 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후 새절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가 승려로 속세를 떠나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승려가 된 지 1년만인 1899년 승려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다. 25세(1900)년에는 이름을 구라 고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 하여 짧은 인연임에도 불제자의 길에 매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한 때 승려이기도 했지만 1903년(28세)에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그의 애국 계몽 운동은 더욱 적극적이 된다. 교회활동, 선교학교 교원, 에버트 청년회, 상동 청년회, 신민회 등에 관여하며 기독교 선교운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1905년, 이를 반대했던 그는 진남포 에버트 청년회의 총무 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조약 반대 전국대회에 참석,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했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 연설을 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지만 효과를 얻지 못한다. 문제는 국민들 자체가 나라의 소중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그는 무엇보다도 국민들을 계도하려면 교육을 시켜서 지식을 얻게 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절실히 깨닫게 된다. 독서의 힘, 교육의 힘만이 미래의 내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힘이 되어준다는 믿음을 가진 그는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육에의 참여

이듬해인 1906년, 그는 서명의숙의 교원을 시작으로, 1907년에는 양산학교의 교원을 지냈고,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교장을 겸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서교육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과 관련이 없던 그도 사건 관련자로 혐의를 받고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지만 다행히 풀려나고 이를 계기로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 회원이 된다.


그러던 1911년 안중근의 동생뻘 되는 안명근이 안악의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한 사건이 터지고, 백범도 이 사건의 관련자로 또다시 체포, 결국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17년형을 선고받는다. 감형되어 1914년, 출옥한 그는 그후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꾸준히 지속했다. 그러나 1919년, 3. 1운동이 발발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로 망명하게 된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다

상하이에 머무르게 된 백범은 안창호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된다. 이어서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국무령, 마침내 1926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주석을 맡은 이후, 이동녕, 이시영, 조소안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한편, 1932년에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인애국단도 조직하여 일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 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를 후난 성의 창사로 옮긴 그는 임시정부에도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반일 단체를 집결, 한국 광복전선을 결성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인 한국독립당이 탄생하게 되었고, 백범은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된 후 그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던 한인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켰고, 국내 침투를 위한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 본토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일본이 전격적인 항복을 함으로써 전쟁도 치러보지 못한 채 8. 15해방을 맞게 된다.


38선을 베고 쓰러지겠다

해방은 되었지만 한국의 문제는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이긴 했지만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귀국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단독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1948년 2월 13일, 그 유명한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1948년 그는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 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일정부 구성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북한에서도 9월 9일 북한 단독의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되면서 통일은 점점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조국의 단일정부로서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애국 충정을 가졌던 이들의 애도 속에 1949년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리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4)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5)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19)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4)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7)


내 나이 열두 살 (1887)이었다. 나는 개학하던 첫날 '마상봉한식'이란 다섯 글자를 배웠다. 뜻은 알던 모르든 관계 없이 너무 기뻐서 밤에 어머님의 밀 매갈이를 도와드리면서도 외우고 또 외웠다.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선생님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밥구럭을 메고 멀리서 오는 동무들을 내가 가르쳐 주었다. (31)


어머님이 품팔아 김매고 길쌈하여 먹과 붓을 사 주시면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2)


2. 시련의 사회 진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39)


태산이 앞에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지지않는다. (40)


“동학은 용담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며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어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42)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 (43)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렇게 무례한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것이다.” (49)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58)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어 나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2)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께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63)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65)


자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실행하여 보는 것뿐이지. (66)


3. 질풍노도의 청년기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 더 알는지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니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86)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94)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 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100)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6)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107)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115)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118)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26)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 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128)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131)


4. 방랑과 모색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 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 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155)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156)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162)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1)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3)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79)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 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180)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를 다리 살을 배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181)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183)


5. 식민의 시련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 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203)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1)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225)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22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38)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244)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246)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247)


옥중의 고통은 여람,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울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252)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4)


"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걸어감에 누가 나를 따르랴." (265)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67)


6. 망명의 길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288)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290)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6)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정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301)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307)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25)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 하리오. (352)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한수 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하셔서 그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 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67)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 (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8)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79)


6. 해방 전후의 대륙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395)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 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 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402)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406)


7. 조국에 돌아와서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도 변치 않고 나를 맞아준다.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라고 되어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412)


그 옛날 나를 따라 오시던 어머니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하시던 어머니 최후의 말씀을 생각하니, 그것이 이날 이 자리에 모자가 같이 옛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예측하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 지금, 사람과 땅이 생소한 서촉 화상산 남쪽 자락에 손자와 같이 누어 계신 것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이 몸과 같이 환영을 받으신다면 다소 위안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421)


나의 소원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때문이다. (423)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4)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은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425)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을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을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


나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 (426)


자유 있는 나라의 힘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독재라고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427)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살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이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8)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429)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430)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들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431)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거이 이 때문이다.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을 낙을 삼는 사람이다. (432)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433)



3.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친 ‘백범 김구’라는 한 애국자의 자서전이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불리우는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면서 국민의 역사 교과서로 불리우는 가장 값진 책 중의 하나이다.


백범은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어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살아서는 환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8년부터 중국 상해에서 당시 12세와 8세 된 인과 신 두 아들에게 유서 대신 남겨주려고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1929년 5월 3일 마무리하였다. 이것이 <백범일지>의 상권이다.


하권은 백범이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를 일으키고 더 이상 상해에 있을 수가 없어서 중국 각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9년 중경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임시정부가 자리잡기 시작한 1941년 이후의 기록이다. 상권이 백범의 가문과 성장과정, 항일 구국운동 등을 기록한 것이라면 하권은 3. 1운동 직후 중국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일하게 된 것부터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또 책의 끝에 ‘나의 소원’을 실어 백범이 품은, 백범이 믿는 민족철학의 강령을 전하고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여 우리의 민족철학을 세우라는 당부를 전하고 있다.


백범은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절박한 항일 구국 전선에서 자식들과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독립운동의 과정과 자신의 소회를 전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이다. 


백범의 애국심

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마음과 전력을 쏟았다. 백범의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모두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백범의 성품 - 정의감과 용기

인물로서의 백범은 매우 정의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비단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변 사회 생활 문제에까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백범이 일찍이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고 평생 이를 지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백범의 성품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그의 담대성과 용감성이다. 그의 담대한 성품은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백범일지>의 소년기 회상록 속에 보인다. 백범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담대하게 용감히 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의 투신,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의 처단,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용기있는 성품과 관련된 일들의 임무였다고 할 수 있다.


백범의 실질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맡은 일을 열성껏 성실하게 집중해서 해내기 때문이었다.
백범의 품성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실질'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범은 공리공론을 가장 싫어했으며, 실질적 논의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하였다. 백범이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 내용의 실제를 취하였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백범의 포용성

백범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협상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백범이 임시 정부의 국무령(1927년)이 되었을 때에 민주적인 국무 위원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임시 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 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일제 패망후의 좌우분열을 사전 방지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그의 인품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백범은 임시 정부 말기에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공포한 후 좌파 민족 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포용하여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해서 광복군을 통일군대로 만들었으며,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 대표들을 야당 의원으로 영입하여 의정원을 통일 의회로 개편하였고, 임시 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주석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대표로서 백범이 취임했지만 부주석에는 좌파 단체들을 대표하여 민족 혁명당 위윈장 김규식을 선임하였다. 백범이 광복 후에 남북 협상을 추진하여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백범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범의 완전독립 사상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나의 소원- (423P)


백범의 자유독립 사상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의 소원- (426/430P)


백범의 교육 사상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의 소원- (430P)


백범의 문화국가 건설 사상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싸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 (431P)


높은 문화의 힘을 국가의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 백범의 문화철학은 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부강을 실현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선진 부강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면 족하고,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문화 국가를 건설해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는 남을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화 국가가 되어 세계 평화가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을 소원한 것이었다.


백범의 통일조국 국가 사상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용한다면 당장에라도 내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백범은 처음부터 통일 조국을 건설하지 않고 38선의 남북에 각각 두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를 매우 염려하였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 민주의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외적과 싸우느라 생애의 대부분을 바친 백범은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해방 정국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며  반탁운동, 미국과의 갈등, 이승만과의 대결 등 벅찬 도전 앞에서도 민족의 미래상을 제시하는데 결코 태만하지 않았다. 


성현의 말과 글이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먼 앞날까지 내다보는 안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문화의 힘’을 국가의 최고 가치로 설정한 백범의 문화철학은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의 문화국가 건설론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국가적인 과제일 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궁극적인 바람이자 이상이 되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역사에서나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개인적 삶의 가장 모범이 되는 인물로 경외하며 우러러보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그 국민과 그 민족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백범과 같은 정의로운 성품과 애국심, 넓고 깊은 해안을 가진 이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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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10:05:29 *.204.150.138
그거 알아? 어느 순간부터 그대의 리뷰가 굉장히 야무져졌다는거?
물론 그대가 원래 야무진 사람이어서이겠지만 그게 이제는 리뷰에도 많이 나타나기 시작해.
그대의 리뷰를 읽는 기쁨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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