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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12시 18분 등록

백범일지 

백범 김구 /주해, 도진순  돌베개 출판사 (2009)

 저자소개

 백범 김구 (1876 ~ 1849)

저자 백범 김구는 구한말의 조선 황해도 해주의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 본명은 창수였으나, 후에 본인 스스로 구(九)로 호는 백범으로 개명한다.
 항일 독립투사, 정치가, 사상가, 평생을 조국과 백성들을 위해 살다 갔다.  그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 시대, 그리고 해방과 함께 변화하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의 파란만장한 한국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파란만장한 조국의 역사,  시시각각 변하는 조국의 정세와 격변이 세계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자신의 길 즉,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길에 온몸과 마음으로 살았다.

어릴 적에는 한학을 배웠고 청년기에는 동학에 가담을 하여서 접주(接主: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로 활동을 하였으며,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을미년에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나자 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을 형량을 받고 복역을 하기도 한다. 복역 중 탈옥을 하여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고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한다.   1909년부터는 안악의 양상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화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복역 중에 감형을 받아 1914년 출옥을 하고 농촌 계몽 활동에 참가 한다.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지냈고 1926년 6월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임시정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 이 시영, 이 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 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 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 해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란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 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다. 백범은 이에 유격 전술을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워 한다.
해방된 조국에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무장군대가 있었음에도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진주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민족 분단이 고착화 되려고 했다. 이 때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통일조국의 의지를 강력히 보여 주었다.

그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946년 6월 26일 백범은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당한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 14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P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22]강∙이씨들은 대대로 방장을 하지만 우리 김가는 존위 외에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취직의 정치적 압제이다. 강∙이씨들은 양반의 권세로 우리 집안의 토지를 강점하고 금전을 강탈한 후 농노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경제적 압박이다.

p24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이 태몽이라고 늘 말씀 하셨다.

p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으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며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p 31일전에 매달 보는 시험을 앞두고 선생님은 나에게 은밀하게 “네가 늘 우등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못 외는 것처럼 모른다고 대답하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선생님 부탁대로 하였더니, 그날은 신존위 아들이 일등했다고 닭 잡고 술상 차려 잘 먹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선생을 해고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소위 ‘상놈의 짓’이다.
어느날 내가 아침도 먹기 전에 그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전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 예나 지금이나 형편없는 인간은 있고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다.

p37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 심리물리동형론 처럼, 사회적 현상과 자연현상 또한 동일하게 진행된다.

p39  ’상서’중 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먼저 두상에 면상을 보고 관상을 보고 그리고 심상을 보고 그 사람을 헤아린다.


p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지만, 참으로 내게 저토록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내가 선생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해도 종전에 과거니 관상이니 동학이니 하던 것과 같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한다면, 내 자신이 타락됨은 둘째요, 고선생과 같이 순결한 양반에게까지 누를 기치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 사람의 운명은 그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고 배우느냐에 달려있다.

p61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가르침의 도리는 하나다.  다만 가르치는 내용이 바뀌었을 뿐이다.

 p94 심신이 자못 혼란한 상태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가닥 광성이 가슴 속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것은 바로 후조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 주신 교훈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 살기를 바라는 자는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 것이다.
   죽으면 살리라,  
항상 정신의 한계는 생리적인 한계보다 낮은 곳에 있다.
스스로 생각에 갇혀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

p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그렇다”
문, “네가 어릴 대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자기 논리를 세우는 과정,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세워야만 미래에 닥쳐오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 
 
p 96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 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피를 바르는 것과 같은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자기방어의 기초적 대응행동이다.
어렸을 때는 코피 흘리면 싸움에 진 것이었다. ^^

p 97  밥 한그릇을 먹은 지 10분 정도밖에 안되었으나, 과격한 행동을 한 뒤라서 한 두 그릇쯤은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곱 그릇까지 먹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애당초 일곱 그릇을 더 요구한 것이 거짓말로 알려져서는 재미없는 일이라 큰 양푼 한 개를 청하여 밥과 반찬을 한 군데에다 붓고 숟가락을 한 개 더 청하였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 들고서 밥 한 덩이가 사발통 만큼씩 되게 밥을 떠먹였다. 곁에서 보는 사람 생각으로는 몇 번만 더 뜨면 그 밥을 다 먹겠구나 하도록 보기 좋게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

=> 어떻게 이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해 낼 수 있을까?  문제 해결방법은 전략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의도적이지는 않다. 그 세부적인 행동인 전술적인 임의행동 즉 임기응변은 어디서 오는 가?  = 간절함, 절박함, 그리고 절대적인 확신…

p 106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을 지나도록 은헤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었다.
감옥 안이 극히 불결한데다가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에 “고향이 눈앞에 늘 아른거리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이 먼저 가 있도다”라 하였는데, 실로 헛말이 아니었다.
=> 파노라마는 임사체험의 결정적인 증거다. 왜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가?

p108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는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배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p109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 항상 느끼지만 옛날에는 잔인함이나 가혹함 속에서도 낭만이 있고 느낄 수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전쟁을 해도 낭만이 있고,,,

p114 감리서 직원 중에서도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이같이 말하며,’세계 역사•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 깨달음을 얻고 성장 발달할 수 있는 기회는 도처에 있다. 단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못 보던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9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 친구, 내가 떨고 있니? 

p121 동료 죄수들은 나를 보고 참말 이인이라며 경탄하였다. 사형을 당할 날인데도 평소와 똑같이 말하고 밥 먹고 행동하였으니, 이는 필시 선견지명이 있어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관리들 중에서도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님은 그날 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알게 되셨는데, 감리가 대군주의 친전을 받고서 어머님께 알려드렸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이인이라 생각하게 되셨다. 배를 타고 강화 갑곶 (각구지목)을 지나오면서 강물에 같이 빠져 죽자고 하셨을 때 내가 결코 죽지 않을 거라 했던 일을 기억하시고, “내 아들은 미리 자기가 죽지 않을 줄을 알았다.”고 확신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님뿐 아니라 내외분이 다 그런 신념을 갖게 되셨다.


p154 전날밤 나를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예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 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호법선신께 의뢰하여 물리 쳐내야 하는 것이었다.

=>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오늘의 당연한 생각과 의식들이 자신만의 생각이며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세계 밖으로 벗어나므로서 자신의 영토가 더욱 분명해진다.

p165 그러나 아버님은 내게 원대한 뜻이 있음을 짐작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계속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 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 결과론적인 회한은 늘 부정적이다.  잘되면 절대로 이런 생각을 안한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어야 할  중견 사회학자들은 결론은 언제나  ‘옛날이 좋았어,’ 라고 말한다.

P 174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p184  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처녀의 말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그 모친은 처녀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면,  돼지처럼 더 욕심을 내지만, 관심과 진정성이 있는 앞선 생각이 타인의 마음을 부른다.

p 185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다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종서는 그때 전도조사였다. 나와 여러 해 친교한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 안주하지 않고 앞서가고자 하는 사람들,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애국자이고 올바른 리더였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어느 순간에 순수한 열정이 탐욕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대다수이지만…
정의를 위해 힘을 갖으려고 노력하지만  힘을 갖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정의를 만든다.
 
p192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 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회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체하였다.
=> 항상 모든 일들은 처음에는 거센 반발과 조롱을 받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치 당연히 그랬던 것처럼 된다.  문제는 그 시련의 세월을 견디고 꿋꿋하게 버티어 설 수 있는가이다.

220 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고통을 느꼈으나, 마지막에는 눈 내리는 밤 달빛 적막한 신문실 한 모퉁이에 가로 누워있게 되었다. 얼굴과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느낌만 날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여정은 묘한 상대성이 있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모두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p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 어떤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항상… 세계는 열려 있고 깨달음의 기회는 존재한다.

p228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말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 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 인간의 정신을 붕괴하는 것은 사상이나 논리가 아니다.  정서와 본능적 충동들을 이용한 정상적인 의식의 마비에 있다.

p229  같은 방에 있는 이종록은 나이가 적은 청년이었다. 친척 가운데 따라온 사람이 없으므로 사식을 가져다 줄 사람도 없었다. 방안에서 먹으면 나누어 먹게 하겠으나, 사식은 반드시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침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 상상할 수 있을까? 배고픔이라는 거이… 얼마나 강력한 위협인지…
며칠을 굶고 나면 모든 고뇌는 사라지고 오로지 물 한 모금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p246 어느날 간수가 와서 나를 면회소로 데려갔다. 누가 왔는가 하고 기다리노라니, 판자벽에서 딸깍 하고 주먹이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렸다. 그리로 내다보니 어머님이 서 계셨고, 곁에 왜놈 간수가 지키고 섰다.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자약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은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증하기 바란다. 만인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다른 동지들의 면회 정황을 들어보면, 부모 처자가 와서 서로 대면하면 울기만 하다가 간수의 제지로 말 한마디도 못하였다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된다. 나는 17년 징역 선고를 받고 돌아와서 잠은 전과 같이 갔어도 밥은 한 끼를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머님은 어찌 저렇게 강인하신가 탄복하였다.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거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 부모자식도 상호작용한다.
 P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 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치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환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 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p270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갈 때,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쇠사슬을 마주 맨 자는 인천항에서 남의 구두 켤레나 담뱃갑을 도적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수인이었다. 그 자까지 내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생각다 못해 노역에 잔꾀를 부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였다. 여러 달 후 소위 상표를 주었다. 도인권 같이 거절할 용기도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가 문제다.

 p275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것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을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이런 말씀을 하시기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 어머님은 또 분부하셨다.

=> 고난을 극복하면 힘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중에 포기한다.

p288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른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 의심하는 순간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변한다. 고난과 시련 속의 현실이란 눈꼽 만큼의 의심이나 회의도 자칫하면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수 있다.

p295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여 년 동안 임시 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 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에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 뚜렷하고 분명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인 것 같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 솟아날 구멍을 찾아낸다.  

p298상해 불란서 조계지 보경리 4호의 2층에서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본 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임시 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 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도아보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이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 자신의 의지가 필요한 시대에서 자신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시대로 바꾸어 가야 한다. 전자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이지만 후자는 시대적인 환경으로 타자와 관계의 문제이다.

p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 은근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사실 나도  그런 거 같아…

p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 疑人不用 用人不疑 
의심하는 자는 쓰지 않고 쓴자는  의심하지 않는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p326 (이봉창)그리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인,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마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  사나이들의 기개,,, 죽음을 넘어 선 농담,,,  그 깊은 꿈을 꾸던 날들이 그립다.

p 352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회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가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인,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마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형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 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차릴 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 그러면 선구자가 되는 길이 유일한데, 우리나라는 앞 선 간 자들에 대해 홀대와 편견으로 일관되어 왔다.  원인이야,, 집단주의와 유교적 경노사상들의 상대적인 해악이다.

p365  어머님은 본래 다른 여성들이 미칠 수가 없을 만큼 용감하셔서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을 제출하였다. 이유는 나이 늙어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생전에 손자 둘을 제 아비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 어머니의 강력함은 우리 모두 … 알고 있다. 사랑이 힘으로 변하는 과정도…

p367 그후 남경으로 모셔다가 1년을 경과한 후 남경 함락이 가까워져 장사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채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 자식만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다. 똑똑한 아들한테는 부모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부모도 자식에게 배운다. 
아버지는 내가 시위주동이 되어있자. 찾아왔지만, 나의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고 내려가셨다. 왜 안 데리고 왔냐는 어머니의 다그침에 …’그놈이 다 맞는 말만 해서 그냥 왔다.’ 라고 그러셨단다.
사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시고 가셨다.
사람의 행동은 자신 만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미래도 있으며 자신에게 기대하는 주위의 사람들도 고려해야만 한다. 행동이란 그렇게 너 개인만의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나다.  생각해 보거라…

p371 -한인 정탐꾼에게 총을 맞은 후-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 뵈었다. 어머니께서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지내다가 거의 퇴원할 무렵이 되어서야 신이가 사실을 알려드렸던 것이다.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뿐이었다. 그리고는 당신이 손수 만드신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다.

p402 다음 가족생활에 대한 관계를 말하자면,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 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딥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일상적인 삶이란 일상적인 운명을 만들뿐이다.

p423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이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p426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그러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 파란만장한 그의 삶과 역사의 기록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의 저서 ‘백범일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저자가 1929년에서 1947년에 걸쳐 20년 동안, 그의 아들 인(仁)•신(信) 두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이다. 상•하 두 편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상편은 저자의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고 하편은 해방 후 통일 국가를 위한 자신의 활동과 그 이념에 대해서 적어 두었다.

나의 생각으로 그가 자서전 형식으로 쓰고 있는 이 책은 복잡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책을 쓰던 1928-1929년 당시에 임시정부 활동은 침체되어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은  임정을 떠나가던 암울한 시기에 쓰여졌다.  그는 자식에게 글을 쓰는 형식을 빌어서 미주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고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 편은 자신 스스로를 격려하고 북돋우며 관심있는 동지들을 얻고 규합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에 강호의 무림에 나타나는 풍운의 협객을 생각하기도 했고,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의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글쟁이들의 글이 아니라 현장감이 넘치고 사실적인 묘사가 상당부분 존재하기 때문에 흐려진 윤곽은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다.

항상 진리란 평범한 것이며, 또 진리란 실천과 체험의 증거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백범의 소원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한 없이 슬펐다.
왜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없는가?  왜 우리는 불행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가?
우리가 자신과 자손과 우리의 땅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과 기대 그리고 책임을 인식한다면
백범 김구선생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 그 철학과 사상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견해로 그의 사상과 견해는 21세기인 오늘에도 결코 손색이 없다.

P423
나의 소원

“네 소우너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P 423-424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P424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P425 일찍이 어느 민족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져  피로서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와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잇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P425-426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P427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말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독재 중에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조으이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게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P428 마르크스 학설의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P429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황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 어떠한 생황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P431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고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 (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역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P432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 이란 것이다.

나라를 잃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세태가 아쉽다.

IP *.94.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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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10:07:59 *.204.150.138
오빠, 인간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고 하지만
우린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고 나를 찾기 위해 무지 노력하고 있잖아...
그래서 삶은 또 살만하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 걸꺼야. 홧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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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9.06.16 03:04:13 *.131.127.100

과거로 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성찰할 수 잇었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현자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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