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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16시 37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백범 출간사>

ü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13).

ü  그리고 하편은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13).

ü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4).

ü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나,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14).

ü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 주셔서, 저 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14).

ü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14).

ü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15).

ü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15).

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5).

 

백범일지: 상권

<, 신 두 아들에게>

ü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19).

 

1장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ü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25).

ü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7).

ü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이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 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9).

ü  어느 날 갑자기 아버님이 전신 불수가 되셨다. … 워낙 가난한 살림에 의사와 약을 대야 하니 가산은 곧 탕진되었다나무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동네 서당에서 밤낮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32).

ü  나는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해 아버님은 무척 고민하셨다. …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4).

 

2장 시련의 사회 진출

ü  과거장에는 노소귀천이 없이 무질서한 것이 내려오는 풍습이라 한다 (36).

n  원래 과거장에는 수험생 이외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문란해지면서 수험생을 따라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는 수종의 폐가 생겼다.

ü  본접에 와서 보니 선생과 접장들이 글을 짓는 자는 짓기만 하고 글씨를 쓰는 자는 쓰기만 하였다. … 이것은 응시자가 직접 짓고 쓰는 것이 아니라 대작, 대필하는 과거 부정을 묘사한 것이다 (36).

ü  과거에 응시자가 증가하면서 앞부분의 답안지만 채점하는 폐단이 있어 다투어 답안지를 먼저 내고자 하였다. 이것을 조정의 폐라고 한다 (37).

ü  과거의 대표적인 폐단이 시관과 수험생 측이 결탁하는 것이다 (37).

ü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37).

ü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38).

ü  나는 이처럼 과거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 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38).”

ü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첩경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38~9).

ü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39).

n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ü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9).

ü   어른이 되어도 당신께 공대를 듣지 못하련만 하물며 저는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그이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동학 도인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들어 빈부 귀천에 차별 대우가 없습니다. 조금도 미안해 마시고 찾아 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나는 이 말만 들어도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41).

ü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 되었다 (42).

ü  수운은 동학의 창시자 즉 교조인 최제우의 호 (42).

ü  해월 최시형. 동학의 2대 교주 (42).

ü  나는 곧바로 예물을 가지고 가서 입도하여 동학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버님도 동학에 입도하셨다 (43).

ü  동학에서는 도를 전한 사람을 연원이라 하고, 도를 받은 사람을 연비라고 한다. 즉 백범의 연원은 오응선이고, 연비는 백범이 포교한 사람들이다 (43).

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천리를 멀다 않고 보은에 간 것은 선생 (최시형)이 무슨 조화주머니나 주지 않나 하는 기대와 선생이 도골도풍은 어떠한가 살펴보려는 생각이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44).

ü  갑오년 (1894) 9월경,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황해도에도 양반과 관리의 압박이 있는데다 삼남에서 향응하라는 경통이 잇따라 도착하여, 우리 15인 접주를 위시하여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 나는 팔봉산 아래 산다고 해서 팔봉이란 접명을 짓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서넉 자를 크게 쓰고, 표어로는 척왜척양넉 자를 높이 걸었다 (47).

ü  나는 일단 병사들을 정돈시키고 난 뒤, 이번 실패에 분개하여 군대 훈련에 주력하기로 하여, 동학교도 여부를 가리지 않고 각 지방에 장교의 경력이 있는 자를 정중하게 모셔와 병사들에게 총술, 행군, 체조 등을 교련시켰다 (48~9).

ü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면회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문화 구월산 아래 사는 정덕현과 우종서라 했다. … 내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그들은 태연하게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만한 것이 없는데, 그대가 좀 낫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고 싶어 왔노라하고 대답하였다 (49).

ü  먼저 가르쳐 주신 후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신 다음에,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라고 제안하였다 (49).

ü  그러던 어느 날 밤 신천의 안진사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로부터 밀사가 왔다 (50).

ü  나는 즉시 참모회의를 열고 논의한 결과,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앞 부분은 불가침 협정이라 할 수 있고, 뒷 부분은 공동 원조 계획이다. 동학과 토벌군이 이러한 공수동맹을 맺은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51).

ü  신천군 월정동의 송종호를 스승으로 삼고 사람과 말을 보내어 산사에 모셔와 자문을 받았다. … 또한 풍천군에서는 허곤이란 명사가 찾아와 합류하였다. … 패엽사에는 도승으로 명성이 자자한 하은당이란 스님이 주지였는데나는 때때로 하은대사에게 도학을 들었다 (51).

ü  패엽사에서 우리는 간간이 최고 회의를 열어 장래 방침을 의논하였다 (52).

ü  그런데 구월산 주변에는 이동엽이란 접주가 이끄는 동학군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나의 부하 가운데 촌락으로 내려가 재물과 보물을 약탈하다 발각되어 엄한 형벌을 받으면 도망가서 이동엽의 부하가 되거나, 아예 도적질을 하고 싶어서 야간에 도주하여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들이 증가하여 나의 세력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52).

ü  이동엽이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박해하면 후일 큰 화를 입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해월 선생이 임명한 접주이니 동학의 정통인 반면, 이 동엽은 임시 방편으로 임종현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제2세 접주이기 때문이다 (53).

ü  이제 두 부대의 싸움 소식을 듣고서 경군과 왜병은 즉각 이 동엽 부대를 섬멸하고 즉시 패엽사를 점령할 것이니 복수를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동엽은 벌서 잡혀가 사옇을 당하고 각 군의 동학군은 거의 소탕되었다 한다 (54).

ü  이리하여 그날 바로 청계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때 내 나이 스무 살 을미년 (1895) 2월이었다 (56).

ü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 동학 접주로서 피신 중인 백범을 청계동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대우했다 (57).

ü  진사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57).

ü  안중근이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여 글공부를 뒷전으로 미루자, 부모와 선생은 꾸중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초패왕처럼 장부로써 살기로 결심하고 글공부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안중근에게 글공부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58).

ü  고선생 (후조 고능선 선생)은 대화 중에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자네가 매일 안진사 사랑에 다니며 놀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절실히 유익한 정신수양에는 별 도움이 없을 듯하니, 매일 내 사랑에 와서 나와 같이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떻겠나? (61).

ü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61).

ü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밝아가도록 하게. …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62).”

ü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였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63).

ü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63).

n  구전심수: 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절실히 필요한 바를 파악하여 말과 마음으로 전수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ü  종전에는 토지와 백성은 가만두고 군주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흥망을 논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강제로 집어삼키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은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소위 조정대관들은 전부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영국이나 미국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일본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견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라네 (65).

ü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었네 (65).

ü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66).

ü  자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실행하여 보는 것 뿐이지 (66).

 

3장 질풍노도의 청년기

ü  김형진: 김구와 의기투합하여 중국으로 구국의 여행을 하게 되는데, 김형진은 그 자세한 행적을 <노정약기>란 여행기로 남기고 있다 (68).

ü  동북 3: 중국 동부에 위치해 있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만주라 부르던 곳이다 (69).

ü  함경도의 교육제도는 양서지방 (평안, 황해도)보다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 (70).

ü  함흥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71).

ü  산중 큰 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했던 것은 그 지역내의 관사를 제외한 모든 집들의 지붕에 한결같이 푸른 풀이 무성해 있다는 점이었다. … 그렇게 해 놓으면 아무리 큰비가 와서 퍼부어도 흙이 씻겨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72).

ü  솔대는 솟대로 긴 나무 장대에 여러 가지 모양을 해서 숭배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북청의 솟대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자기 과시와 가문의 행운을 빌기 위해 집 앞이나 조상의 산소에 세우는 것으로, 꼭대기에 용을 새겨서 붉은 칠을 한다 (72).

ü  자작나무를 이 지역에서는 봇나무라고 한다. 질이 좋고 썩지 않으며 벌레가 먹지 않아서 함경도와 평안도 산골에서는 영궤를 만들기도 한다 (72).

ü  이런 곳들을 두루 다니는 중에 가장 밉게 보이는 것은 호통사 (통역관) 들이었다 (74).

ü  단 한 가지 소금이 제일 귀한 물건이었다 (74).

ü  백범의 선조인 김자점은 임경업이 후원자였으나, 마지막에는 자신이 연루될까 봐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75).

ü  이 지방을 두루 돌면서 수소문하여 들어보니, 벽동 사람 김이언이 힘과 용기가 남달리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하다 하였다 (76).

ü  백범과 김형진이 삼도구 김이언 부대에 합류하여 11월 초 거사하는 것은 2차 중국 원정에서 돌아올 즈음일 것이다 (77).

ü  1894년 청일전쟁 때 평양에서는 청일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 (79).

ü  두령인 김이언은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 만큼, 자신감이 지나쳐 다른 사람의 도모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도량이 부족해 보였다 (80).

ü  그러나 나의 관찰로는 진정한 마음의 용기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이언보다는 그의 동지로서 초산 이방을 지냈다는 김 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계책도 잘 세우는 것 같아 보였다 (80).

ü  의병을 일으킨 대의명분은 국모가 왜구에게 피살된 것은 국민 전체의 치욕이니 가만히 앉아서 참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글을 잘 쓰는 김규현으로 하여금 격문을 지어 뿌리게 했다. 의병을 일으키는 모의에는 우리 두 사람도 참가했다 (80).

ü  거사한 때는 을미년 11월 초였다 (81).

ü  김규현과 경성사람 백진사 등은 다 내 의견에 찬동하였다. … 우리 두 사람은 김이언이 고집하고 나가는 데 대해 끝까지 반대하고 갈라서지는 말기로 하고 어찌되었든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82).

ü  나는 김형진과 몇 걸음 후퇴하면서 상의하였다. “김이언의 금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라 다시 사람들을 모으지 못할 거요. 그러니 저들과 같이 퇴각할 아무 필요가 없소. 이렇게 낯선 행색으로는 잡히기 쉬울 것이니, 잠시 강계성 부근에서 몸을 피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83).”

ü  청계동을 향하여 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선생 집에 콜레라가 들어 맏아들, 맏며느리인 원명 부부가 일시에 함께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85).

ü  을미년 (1895) 5월에 전국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수천 명이 사망하였다 (85).

ü  네가 떠난 뒤에 고선생 손녀 (원명의 맏딸)와 너와 약혼이 되었다 (85).”

ü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 것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86).

ü  규수의 자품이 뛰어난 점이나, 상당한 가정 교훈을 받은 점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만족한 마음도 들었다 (87).

ü  고선생에게 청나라 돌아다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보고하였다 (87).

ü  마침 그 때는 단발령이 내린 때였다. … 나는 이 문제를 고선생과 상의하고 안진사와 더불어 의병 일으킬 문제를 회의하였다. 그러나 안진사는 아무 승산 없이 일어났다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그럴 생각이 없고, 천주교를 믿다가 후일 기회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깎기까지라도 할 의향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고 선생은 두말 않고 절교를 표시하였다. “진사, 오늘부터 끊네 (87).”

ü  이 일이 안진사의 인격으로 된 것이었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을 한다는 말이 매우 괴이하였다 (87~8).

ü  김치경이 나와 고선생 댁과의 혼약 소문을 듣고서, 이 혼사를 방해하면 돈푼깨나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짐짓 방해를 놓은 것이었다 (90).

ü  나는 시급히 청나라 금주에 있는 서옥생의 집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90).

ü  이야기를 들어보니, 장차 나라 안 사정이 많이 변할 낌새라 굳이 출국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산남 방면에서 의병이 봉기한다고도 하니, 다시 돌아가서 시세를 관찰하리라 결심하고 회정하였다 (91).

ü  을미사변의 참극이 있은 지 3개월 만인 1895 11월 김홍집 내각이 국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선포하자, 전국 갖지에서 몸으 f지키자는 보형의병이 일어났다. 이어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고 (아관파천), 김홍집, 어윤중 등은 살해되고 갑오내각이 붕괴하였다. 뒤이어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내각이 등장하여 단발령을 철회하였다. 백범은 안주에서 아관파천, 내각 교체, 단발 정지령 등의 소식을 듣고 청나라로 가려던 거사 계획을 바꾸었다 (91).

ü  미우라: 육군 중장 출신으로 을미사변을 주도한 조선주재 일본 공사 (93).

ü  이후 재판에서도 돈 문제는 강도 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98).

ü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100).

ü  옥에 갇힌 후 한 달여에 신문이 시작되었다: 규장각 자료에 의하면 신문일은 1896 6 27일이다 (101).

ü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 말이 아니었다 (106).

ü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모월 모일에 일본인을 살해한 일이 있느냐?” “본인이 그날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소 (107).”

ü  몽백은 국상을 당하여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는 것. 당시는 명성왕후 시해 사건으로 국상 중이었다 (108).

ü  그러던 차에 제 2차 신문일을 맞게 되었다. 심문자료에 의하면 그날은 1896 9 5일이다 (111).

ü  3차 신문은 감리서에서 했는데… : 심문자료에 의하면 그날은 1896 9 10일이다 (112).

ü  이때부터의 옥중생활을 대략 들어 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독서. (114).

n  아버님이 오셔서 <대학> 한 질을 사 넣어 주셨으므로

n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 문화, 경제, 도덕, 교육, 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를 아는 여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이같이 말하며, <세계역사.지지>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115).

n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u  영력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 청나라를 만주족으로 멸시하는 존명론에서는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마지막 연호를 계속 사용하여 영력이백 몇 년씩이나 계속되었다 (115).

n  고선생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피발좌임한 오랑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테 <태서신사>한 책만 보아도, 그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은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규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선풍도롤의 우리 탐관오리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오랑캐의 칭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16).

u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이므로 우리나라만 유교의 정통이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소중화 의식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중화 의식은 명나라 멸망 후 중국의 다른 변방, 예컨대 월남 (베트남) 등에도 있었다 (115).

ü  두 번째 교육 (116).

n  백범의 치하포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1896 9 22일자 독립신문 (117).

ü  세 번째, 대서 (117).

ü  네 번째 성악 (117).

ü  국모보수넉 자가 눈에 띄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꺼내 임금께 보여드렸다. 그 내용을 보신 대군주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아직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하였다 한다. …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121).

ü  고종이 전화로 사형을 중단시켰다는 유명한 이야기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다. 즉 전화가 아니라 전보이며, 고종이 아니라 법부이고, 사형을 중지시킨 것이 아니라 고종의 재가를 명분으로 판결을 지연시킨 것이다 (121).

ü  당시 강화에 두 사람의 인물이 있었는데, 양반 중에서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서는 김경득이라 했다 (124).

ü  소송에 전력하기를 7,8 개월 동안 김경득의 돈은 바닥이 났다. … 마침내 김경득이 소송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내용은 보통 위문 편지였고, 단율 한 수가 있었다 (125).

ü  한 때 구차스럽게 사는 것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으니 과히 우려치 말라는 내용으로 회답을 보냈다. 그대로 옥중생활을 계속하며 구서적보다 신학문을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126).

ü  그 때부터는 부지불식간에 내 마음이 요동을 쳤다.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 지금 대군주가 나를 죽일 놈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것은 윤 8 26일 전칙한 사형 정지의 일로 족히 증명할 수 있다. …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 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128).

 

4장 방랑과 모색

ü  드디어 무전 여행을 떠났다 (142).

ü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148).

ü  백범이 한 때 머리를 깎고 머물렀던 충남 공주의 마곡사 (153).

ü  세월은 흘러 어느덧 반년 광음이 지나고 기해년 (1899 24) 정월을 맞이하였다. …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156).

ü  3 13일에 부모님 두 분 다 인천옥에 갇히게 되셨는데, 거기서 갖은 형벌을 다 당하셨다. … 1898 3월 말 백범이 탈옥하자 법부에서 백범 대신 아버지를 구곳하였고, 어머니는 남편의 석방을 소장으로 두 번 탄원하였다. 백범의 아버지는 1년 정도 징역살이를 하였으며 1899 3월에 석방되었다 (158).

ü  근처 양반들과 친척들은 이제 김창수가 돌아왔으니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였다 (165).

ü  경자년 (1900 25) 2월이 되었다 (165).

ü  이름을 고쳐 김두래라 하고 낯선 지방으로 길을 떠났다 (166).

ü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174).

ü  나는 그 사이에 깨달은 세계 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또 선생님께서 평소에 교훈하시던 존중화양이적주의가 정당한 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178).

ü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178).

ü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도부수들입니다 (179).

ü  그들은 자기 백성의 고혈을 빨아 왜놈과 양놈에세 바치고 아첨하면서 자기가 누구보다 뛰어난 도부수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필경 우리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로 양성해야 합니다 (179).

ü  박영효, 서광범과 같은 역저들이 주장하던 것을 자네가 말하고 있네 그려. … 나라를 구한다면서 왜놈과 양인에게 배우다가는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절의까지 배반하고 죽어 지하에 가게 되면 선왕, 선현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나 (180)?”

ü  이야기하는 동안 자연히 신구의 충돌이 생겼다. 그러나 고선생 가정에서 외국 물건이라고는 당성냥 한 가치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일견 고상하게도 보였다 (180).

ü  아버님은 열나흘 동안 내 무픞을 베고 계시다가 경자년 (1900. 25) 12 9, 애서 내 손을 잡으시던 힘이 풀리더니 먼 나라로 떠나셨다 (181).

ü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3).”

ü  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184).

ü  나는 곧 <여자독본>과 같은 책자를 대강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하여 미혼의 처를 가르쳤다 (184).

ü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185).

ü  박영효는 1884 12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 8월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김홍집 내각이 무너진 후 그는 다시 정치적 위기에 처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5).

ü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 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85).

ü  우종서는 그 때 전도조사였다. 나와 여러 해 친교한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껏 권하였다. 나도 탈상 후에는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86).

ü  낭자의 병세가 위중하니 김상주에게 통지하라는 기별이었다 (186).

ü  병은 만성감기인데 약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산중이라 2,3일 후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내 손으로 직접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묘 앞에서 영별하였다 (186).

ü  나는 해주 고향에서 사촌형 태수 부부를 데려다가 가사를 주관케 하고, 오진사 집 큰 사랑에다 학교를 열었다 (186).

ü  1년도 채 안되어 교세도 크게 일어나고 학교도 점차 발전하였다 (187).

ü  평양에서 예수교 주최로 이른바 선생 공부’, 즉 사범강습이란 것이 있었다. 여름철에 가지 교회와 학교의 직원과 교원들이 모여 강습할 때 선생 공부에 갔다 (187).

ü  최군은 안신호 양과 약혼할 것을 권고하였다. 신호는 안창호의 누이동생으로 그 때 나이 20여 세였는데, 사람됨이 매우 활발하고 처녀 중에 명성이라고 한다. 직접 대면하여 보고 피차에 뜻이 맞으면 혼인하기로 하였다 (188).

ü  안도산이 미국에 건너갈 때 상해를 거쳐갔는데, 그때 상해 모 중학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 군에게 자기 여동생과 혼인하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188).

ü  신호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의상 양주삼이나 김구 중에 누구를 고르고 누구를 버릴 수 없으니 양쪽을 다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88).

ü  안신호는 해방 후 진남포 기독교 여맹위원장을 하였는데 1948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백범을 만나 평양의 여러 곳을 수행하였다 (189).

ü  그때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영수 양성칙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와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거주하는 의사 신창희의 처제였다 (191).

ü  제중원 (처음 이름은 광혜원) 1885년 미국 선교사인 알렌이 조선 정부의 후원을 얻어 서울 재동 이윤용의 집 (현 헌법재판소 자리)에 세운 최초의 근대식 병원 (191).

ü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192).

ü  나는 최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192).

ü  1904년 결혼 당시 백범은 29, 최준례는 16 (192).

 

5장 식민의 시련

ü  을사년 (1905. 30)에 이른바 신조약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사방에서 지사들이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산림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193).

ü  군사지식이 없고 다만 충천하는 의분심만 가지고 일어났으니 여러 곳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193).

ü  나는 진남포 에버트 청년회 총부의 직임을 이어받아 그 회 대표로 뽑혀 경성에 파견되어 경성 상동교회에 가서 에버트 청년회의 대표 위임장을 제출했다. 그 때 각 도에서 청년회 대표가 모여 토의하는 것은 겉으로는 교회사업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순전히 애국운동이었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은 구 사상이라 하면, 예수교인들은 신 사상이라 하겠다 (193).

ü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어난 전국적인 의병운동을 을사의병또는 2차 의병전쟁이라고 한다 (193).

ü  당시 상동교회는 전덕기가 전도사를 맡고 있었고, 교육, 민족 운동의 중요한 요람이었다 (193).

ü  회의 결과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이준이 상소문을 지었다 (194).

ü  이준: 이준은 1904년 공진회 회장으로 국권수호운동을 하다 6개월간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그는 1905년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고, 1907년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가서 순국하였다 (195).

ü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196).

ü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 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196).

ü  민영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효과가 없자 1905 11 30일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ㅎ ㅗ는 충정 (196).

ü  장련을 떠나 내 나이 33세인 무신년 (1908) 9 9, 문화 초리면 종산에 거주하면서 그 동네 사립 서명의숙의 교사가 되어 농촌 아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정월 18일 안악읍으로 옮겨 읍에 신설한 사립 양산학교의 교사가 되어 근무하였다 (197).

ü  안창호가 “13개 도마다 안악군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있으면, 이 나라는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당시 안악군은 신교육의 선구지대였다 (198).

ü  안악으로 이주한 뒤에도 교육사업에 열중하다 휴가에 성묘차 고향에 갔다. … 성장한 청년 중에 쓸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03).

ü  여하튼 양반의 세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203).

ü  자제를 교육하라고 권하니 머리 깍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교육은 단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는 것이라 하였다 (204).

ü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고 절규하였다 (204).

ü  안악에서 사범강습을 마치고 양산학교를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었다. 김홍량이 교주겸 교장이 되어 교무를 맡았고, 나는 최광옥 등 교육자와 힘을 합쳐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을 맡아 전 도내에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책임을 지고 각 군을 순행하였다 (205).

ü  과거 러일전쟁, 중일전쟁 때만 해도 한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히 우호적이었으나 그 후에 강압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쁜 감정이 점점 격증하였다 (207).

ü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에 하얼빈 전조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 은치안에게 피살되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인지를 몰라 매우 궁금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안응칠, 곧 안중근으로 명백하게 신문에 기재되었다 (208).

ü  당시 안악 양산학교에는 중, 소학부 2부를 두고 있었는데,… 나는 소학부에서 유년의 교육을 담임하면서 재령 북율면 무상동의 보강학교 교장을 겸하여 그 학교에도 종종 왕래하였다 (209).

ü  보강학교는 처음 노종자들이 주동이 되어 설립하였는데 부근 동네 유지들이 운영하면서 학교 진흥책으로 나를 교장으로 뽑은 것이었다 (209).

ü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213).

ü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214).

ü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한 당시의 인심은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외 관리들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사상이 극도에 달했다.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자도 많았다 (215).

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214).

ü  이에 앞서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였다 (215).

ü  왜놈이 한국을 강점한 후 첫 번째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한 것이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먼저 안명근을 잡아 가두고는, 계속하여 전 도내의 지식계급과 부호를 일일이 압송하였다 (219).

ü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220).

ü  이동휘 (1872~1935):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맡았는데, 1920년 공산주의 그룹 상해파의 영수가 된다. 이러한 성향으로 이동휘는 백범과 대립하였다 (220).

ü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 (선생이 왜놈을 죽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정탐까지도 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회에서 나를 이같이 동정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한 숨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225).

ü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그 밖에 한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내가 신체 고문에는 한두 번 참아보았고, 저놈이 발악을 하면 나도 감정이 발하여 자연 저항력이 생기므로 인내하였지만, 둘째와 셋째를 당하여 참아내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227).

ü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228).

ü  이제 왜놈들이 양산학교를 해산하고 교구 전부를 강탈하니, 교육사업도 단 꿈이 되고 말았다. 목자를 잃은 양떼 같은 학생들이 원수의 채찍 아래 신음하게 되었으니 원통스러울 뿐이다 (234).

ü  오월동주란 중국 병법서 <손자>에 나오는 말로… ‘처지가 같으면 마음도 같아진다는 의미이다 (238).

ü  김좌진은 침착하고 굳세며 용감한 청년으로 국사를 위하여 무슨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친애의 정을 서로 표하였다 (245).

ü  내가 서대문옥에 갇힌 지 며칠 후 또 중대사건이 발생하니, 왜놈의 이른바 제 2차 뭉우리돌 줍는 사건이다. 1차는 황해도 안악을 중심으로 하여 40여명 인사를 타살, 징역, 유배의 세 종류로 처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안도 선천을 중심으로 애국인사를 일망타진하여 105명을 검거, 취조했다 (246).

ü  근 일고여덜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질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dnjst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246).

ü  우리 동지들은 인격과 재능에서 뛰어나고, 50~60명이 정신적으로 단결되어 누구도 멸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건이라도 똑똑한 분자는 모두 우리와 정의를 통하고 지내는 터였으니, 엄연히 수인의 영도적 기관이 되어 갔다. 수인의 표면 감독은 왜놈이 하고, 정신상 지도는 우리 동지들이 하게 되었다 (249).

ü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같이 투옥되었을 때,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간 긴 세월 옥수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하였던 그것이다 (254).

ü  고려말 이성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쳐서 나라를 얻은 후, 당시에 두문동 72인 같은 사람들 외에도 고려 왕조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자 많았을 것이오. 그러한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 혹은 집단하여 가지고빈한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나라에서 도적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500여 년 동안 압박, 도살하여 온 것이외다. 그런데 강원도에 근거를 둔 자들의 기관 명의는 목단설이요, 삼남에 있는 기관은 추설이라 하여 왔습니다 (258~9).

ü  조선 건국을 반대하는 고려 유신 고천상 등 72인의 충신, 열사들이 망국의 비애를 품고 두문동에 들어가 신왕조에 협력하지 않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놓아 몰살시켰다고 한다 (258).

ü  우리 법에 4대 사형죄가 있습니다 (263).

n  1: 동지의 처첩을 간통한 자.

n  2: 체포, 신문 때에 자기 동료를 실토한 자.

n  3: 도적질할 때 장물을 은닉한 자.

n  4: 동료의 재물을 강탈한 자입니다.

ü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4).

ü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 (267).

 

6장 망명의 길

ü  나는 날마다 일찍 일어나서 소작인의 집을 찾아, 나태해서 늦도록 잠을 자가 있으면 깨워서 집안 일을 하도록 하며, 가정이 더러운 자는 청결하게 하며, 땔감을 마련케 하고, 짚신삼기와 자리짜기를 장려하였다 (281).

ü  나는 이륙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284).

ü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테러리스트 죠지 쇼우 (L.S.George)가 운영하는 선박회사. 그는 외국인이란 신분을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통신연락과 인원 및 물자 수송을 적극 도와주었다 (284).

ü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들을 찾아가 만나 악수하였다. 그때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 나는 내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안창호 동지는 미주로부터 상해로 건너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정부제도는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285).

ü  경무국에서 접수한 본국 보도에 의하면 왜놈이 나의 국모보수 사건을 24년 만에 비로서 알았다 한다. 이 비밀이 이같이 장구한 세월, 하물며 양서지방에는 사람마다 모두 알던 그 일이 그같이 오랫동안 감추어져 온 것은 참으로 드물고 기이하다 하겠다 (286).

ü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각 지방 보고를 수집하여 <김구>라는 책에 나의 일언일동을 상세히 기재하였을 것이지만, 어떤 정탐이라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286~7).

ü  민국 1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1919년이다. 백범은 이후 줄곧 민국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286).

ü  그간 아내는 신이를 해산한 후민국 6(1924, 49) 1 1일 홍구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났다 (287).

ü  정정화의 <녹두꽃>에 의하면 최준례 여사는 형편이 어려워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구 폐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일본 조계지이므로 백범은 부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곽낙원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 갔을 때, 최준례 여사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287).

ü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 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288).

ü  그 해 11월 나는 국무령으로 피선되었다. 나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에게, 지금 정부가 위축된 추형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김존위의 아들로 일국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추락케 하는 것이니 감당할 수 없다 하였으나, 혁명 시기에는 관계 없다고 강권하므로 부득이 승낙했다 (288).

ü  임시정부는 여러 번 개헌을 하였는데, 김구 주도의 1927년 제3차 개헌은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채택하였다 (288).

ü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 역경을 견디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결의를 우화적으로 다짐하는 글이다>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 궁함을 떨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벗하며 살겠다는 뜻>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

ü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290).

ü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290).

ü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 (1929, 54) 5 3일에 종료하였다 (291).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ü  <하권>은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67 (1942)때 집필 (295).

ü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295).

ü  1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1919)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295).

ü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6).

ü  전후 정세를 논하면, 상권을 기술할 때 임시정부는 외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국무위원들과 10여 명의 의정원 의원 이외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일반의 평판과 같이 임시정부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하권을 쓸 무렵에는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들의 얼굴에서 수심에 찬 기색도 싹 가시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등 4부 행정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다 (296).

n  내정으로 말하자면, 중국 관내의 한인 각 당 각 파가 모두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하고, ,미주, 멕시코, 쿠바 각국의 한인 교포 만여 명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자금을 임시정부로 상납하였다.

n  외교로 말하면 임시정부 원년 (1919) 이후 국제 외교에 꾸준히 노력하였으나, ,,미 등 정부 당국자들의 비공식적인 찬조가 가끔 있었을 뿐 공식적인 응원은 없었다.

n  군정으로는 한국 광복군이 정식 성립되어 이청천으로 총사령을 임명하고, 서안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병사 모집과 함께 훈련 작적ㄴ을 계획, 실시 중이다.

n  재정으로 말하면, … 경제적 곤란이었다.

ü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홍구 사건 이후 내, 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가 호전되어… (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ü   본국 13도 각 대도시는 물론이고, 궁벽한 항구나 시골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물끓듯했고, 해외 우리 한인들도 어디에 거주하든지 정신으로나 행동으로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300).

n  첫째, 소위 한일합병의 참된 의미를 그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베트남, 인도에서의 영국, 불란서 식민정치를 절충하려는 왜놈의 독계르 ㄹ꿰뚫어 보는 인사는 100분의 2,3에 불과하였다.

n  둘째,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300).

ü  한편, 정부의 사무가 실마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한성에서 비밀리에 각 도 대표가 모여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별도의 정부를 조직하였다. … 이에 두 정부를 개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하고, 4 11일 헌법을 반포하였다 (301).

ü  나는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보고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301).

ü  그런데 다음날 아침, 도산은 뜻밖에도 나에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며 취임하여 근무할 것을 권하였다. … 경무국 사무는 현재 세계 각국의 보통 경찰 행정과는 달랐다. 그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302).

ü  홍구의 왜영사관과 우리 경무국은 대립, 암투하였다. 그런데 당시 불란서 조계 당국은 우리 독립운동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었다 (302).

ü  왜는 불란서 사람과 나의 관계를 알고 난 후부터는 체포를 요구하지 않고 정탐꾼으로 하여금 불란서 조계 밖에 있는 영국 조계나 중국 지역으로 나를 유인하게 하여, , 영 당국에 통보하고 잡아갈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안 후 나는 불란서 조계지를 한 걸음도 넘어서지 않았다 (304).

ü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307).

ü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 (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 사조가 점차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에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309).

ü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씨 (이동휘)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불가능하오나는 강경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310).

ü  이동휘의 주장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자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 초기에는 민주혁명사회혁명을 동시에 수행하는 좌경적 혁명론이 풍미하였다 (310).

ü  3국제당은 코민테른. 코민테른은 1919 3월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사회 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공산당의 국제적 통일조직. 일제시기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310).

ü  마침내 한 (한형권)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러시아 최고지도자인 레닌 씨가 친히 맞이하며 독립자금은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311).

ü  한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를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을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 (311).

n  이것이 바로 이론적 사회주의와 현실과의 가장 큰 괴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본능으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보다는 자본주의 체제로 자꾸 끌려 들어가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자본주의 체제 지도자들 못지 않게 향락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 인간은 누구라도 그 어떤 주의를 떠나 권력의 쟁점에 다다르며, 그 권력을 누리고 싶은 욕구를 제어하기 무척이나 어렵다는 말이다.

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죄를 물으니, 이씨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러시아로 도주하였다 (311).

ü  김립: 1922 1 13일 상해 갑북에서 코민테른 자금을 임정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던 오면직, 노종균에게 암살당하였다 (311).

n  이 부분도 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레닌에게 받은 자금이 어째서 임정에게 귀속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임정이 공산주의 노선을 걸으려던 것은 아니었지 않나?

ü  당시 한인 공산당은 세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312).

n  첫째는 상해에서 설립된 상해파로 그 우두머리는 이동휘이고

n  둘째는 이르쿠츠크파로 그 우두머리는 안병찬, 여운형 등이었다.

n  셋째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로서 일본에서 조직된 엠엘파로 일본인 후쿠모토 가즈오와 김준연 등을 우두머리로 한 것인데, 비록 상해에서는 세력이 미약하나 만주에서는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ü  이것저것 있을 것은 다 있어서, 이을규, 이정규 형제와 유자명 등은 무정부주의를 신봉하여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이 맹렬하였다 (312).

n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한반도판 춘추전국시대이다. 우리는 역사상 이처럼 다양한 사상을 놓고 논해본 적이 없었다. 늘 중국에서 유행하던 한 가지 사상만 받아들여 계승, 발전 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사상들이 충분히 성숙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방 이후 우리는 또다시 밥벌이에 급급하여, 사상 연구는 뒤로 미룬 채 밥벌이에 연연하여 70~80년대를 거쳐왔으니 말이다. 그 여파로 아직까지도 민주주의의 후퇴니 좌파니 하는 용어들이 충분히 성숙된 입장에서 토론되어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사상에는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사상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 흐름이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만약 21세기 이 땅위의 국민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면, 설혹 그것이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어도 이 사회는 그렇게 흐를 것이다.

ü  1923 1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에는 60여개 그룹의 대표 113명이 참석하였다. 의장으로는 간도에서 온 김동삼이, 부의장으로는 안창호가 선출되어 3개월 이상에 걸쳐 92차 회합을 가졌지만, 민족운동의 통일에 실패하였다. 당시 국밎ㄴ대표대회는 임정에 대한 입장에 따라 1) 노령, 만주계의 창조파 2) 국내, 미주계의 개조파, 3) 김구, 이동녕 등의 임정고수파로 나룰 수 있다 (312).

ü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을 러시아 대표직에서 파면하고 안공근을 러시아 주재 대표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 없이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끝내 단절되었다 (313).

ü  국민대회가 실패한 후 상해에서는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공산당 운동이 끊어지지 않고 민족 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 (313).

ü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313).

ü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 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그 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었다. … 이로부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조직을 따로 가지게 되었다 (314).

ü  정세로 말하면 동북 3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이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신흥학교 시절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김일성 등 무장부대가 이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여 엄존하고 있다. 이들이 압록, 두만을 넘나들며 왜병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 작전을 하고 러시아의 후원도 받았기 때문이다 (315).

n  민족 Vs 사상의 대립이나고나 할까…?

ü  상해 정세도 대략, 서로 패하여 함께 망한 꼴이 되었으나,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으로 민족 진영의 잔해만은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인재도 극히 귀하고 경제도 매우 어려웠다. 정부제도는 대통령 이승만이 교체되고 박은식이 취임하였고, 대통령 제도를 변경하여 국무령제로 고쳤다 (316).

ü  임시정부는 마침내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의정원에서 일대 문제가 되었다 (316).

ü  당시 나의 중요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언급하기 위해, 그때의 환경이 어떠하였는지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원년 (1919)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열렬하던 독립운동자 가운데 하나 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자들은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독립신문사 주필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을 위시하여 점차 그 수가 늘어났다 (318).

ü  이로 인하여 한때 상해 우리 독립운동자의 수가 천여 명이었던 것이, 차차 줄어들어 겨우 수 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최고기관인 임시정부의 현상을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18).

ü  엄항섭: 그는 백범의 핵심 측근이었다. … 김구 명의의 발표문이나 성명서 대부분을 기초하였다 (318).

ü  연통제는 상해 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설치했던 비밀 연락망이다. 일본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경상남북도, 충청남도 및 제주도에는 조직되지 못하였다 (318).

ü  이 무렵 내가 연구, 실행했던 사무가 하나 있으니, 곧 편지정책이다. …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19).

n  당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는 동북 3성에 가장 많았는데, 거기에는 250여 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으나 사정이 본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n  두번째로는 러시아령에 150여 만 명이 살고 있었지만, 공산국가라 민족운동을 금지하여 그 곳 동포들에게 의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n  세번째로 일본에 40~50만 명이 거주하나 역시 의뢰할 형편이 못 되었다.

n  네번째로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만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비록 노동자였지만 애국심 하나만은 강렬하였다. 그와 같이 된 까닭은 그곳에 살고 있는 서재필 박사, 이승만 박사, 안창호, 박용만 등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319~320).

ü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동포들이 이 같은 애국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그 동안 정부 성금에 소홀하였던가? 이와 같이 된 데는 다름이 아니라 1년에도 몇 차례씩 정부 각료들이 변경되고, 헌법도 자주 변경됨에 따라 정부의 위신이 추락한 데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다 정부 사정을 자주 알려 주지도 않아서 동포들이 정부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통신이 진실성이 있는 데서 첨자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320).

 

2장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ü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즉,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 (326).

ü  또한 만주에서는 1931년 왜가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이 굴욕적으로 왜와 강화하였다 (327).

ü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을 실행하게 되었다. … 1착으로 이봉창의 동경 사건을 주관하였다 (327).

ü  (1932) 1 8일 신문에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 그들은 일황이 즉사한 것만은 못하나, 정신적으로는 우리 한인이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이것은 한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을 세계 만방에 확실히 보여주는 증명이니 족히 성공으로 칠 수 있다고 하였다 (327).

ü  동경의 이봉창 의거가 세계에 전파되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우리 동포들 중 나를 동정하던 동지들은 크게 흥분되어,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을 건너서 눈송이같이 날아들었다 (329).

ü  윤봉길: 백범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상해 흥구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331).

ü  상해 병공창에서 이같이 친절하게 20여개의 폭탄을 무료로 제조하여 주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봉창 의사의 은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창장은 자기네가 빌려주었던 폭탄의 능력이 미약하여 일본 황제를 폭살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333).

ü  피치 부인의 회고에 의하면 1932 4 29일 네 명의 한국인이 찾아와 숨겨 달라고 했고, 다음날 백범은 자신이 이번 사건 (윤봉길 의사 사건)의 주모자라고 말했다 한다 (338).

ü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하였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세계 각국에서는 동경 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 계획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39).

ü  1932 5 10일 백범은 한인 애국단 영수 명의로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머리말에서 홍구공원 의거로 한인들이 체포되는 상황을 묵과할 수 없는 인간적 도리와, 일제 타도를 위해 세계에 진상을 공포한다고 밝히고… (339).

ü  4.29 사건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한인들에 대한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340).

ü  이 거사로 인하여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의 임시 정부에 대한 성원이 대단하였다 (340).

 

3장 피신과 유랑의 나날

ü  4.29 사건 발생 이후 왜는 나의 목에 제 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을 붙였고,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해주둔군 사령부 3부 합작으로 현상금 60만원을 내걸었다 (342).

ü  당시 일반 노동자의 급여가 일당 1, 한달 30원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342).

ü  세상에 기괴한 일도 다 있다. 4.29 이후에 상해 일본인의 삐라에 김구 만세라는 내용이 배포되었다는데, 실물을 얻어 보지는 못하였다. 일본인으로서 우리 금전을 먹고 밀탐하는 자도 여러 명 있었다. 위혜림 군의 알선으로도 여러 명 알게 되었는데, 이들은 매우 신용이 있었다 (346).

ü  저씨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 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씨 부인의 친정 여자 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 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하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활동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호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마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348).

ü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 , , 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을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351~352).

n  명심, 또 명심할 구절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역시 우리 또한 미국의 저급 문화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반성하고 통찰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ü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2).

ü  슬프도다. 오늘날도 청년들은 늙은이들을 노후니 봉건잔재니 하며 비판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지만 그들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 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 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352).

ü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

ü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 초기에 민족혁명사회혁명의 연관성에 대해 혼란이 많았다. 초기에는 사회혁명으로 민족문제도 동시에 해결한다는 좌경적 입장이었으나, 점차 민족문제의 선차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백범은 이러한 변화, 즉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1단계 혁명론에서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2단계 혁명론으로의 전환이 레닌의 지적에 무조건 따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353).

ü  사회주의 청년들이 노인들의 교조적인 성리학 신봉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신봉한다는 비판이다 (353).

 

4장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ü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장소는 낙양분교로 하고, 학교 발전에 따라 자금을 지원한다는 약속하에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 100명을 제1차로 학교에 진학케 하고, 이청천과 이범석은 교관, 영관으로 근무케 하였다 (356~7).

ü  이범석: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해방 이후 귀국하여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으먀, 정부 수립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357).

ü  이 무렵 나는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라는 조완구 형의 친서를 받고 심히 분노하여 급히 항주로 달려갔다 (358).

ü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359).

ü  1935 11월 항주에서 김구, 이동녕, 조완구, 엄항섭, 박찬익 등이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은 1940한국독립당에 합류하였다 (359).

ü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360).

ü  남경이 시시각각 위험하니 중국 정부는 중경을 전시 수도로 정하고, 각 기관을 분분히 옮기기 시작하였다 (361).

ü  <동아일보> 1925 11 6일자 보도에서 곽낙원 여사가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며, 여사가 조선에 오더라도 갈 곳이 없어 암담하다고 보도하였다 (364).

ü  그 후 남경으로 모셔다가 1년을 경과한 후 남경 함락이 가까워져 장사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 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67).

ü  그날 남목청에서 연회가 시작될 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남경에서부터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 하여 내가 금전 보조도 해준 적이 있는 이운환이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369).

ü  혁명난류는 불평, 불만으로 혁명의 본진에서 떨어져 나와 함부로 행동하는 부류를 지칭한다 (369).

ü  이운환은 필시 강, 박 양인의 악선전에 이용된 나머지 정치적 감정에 충동되어 남목청 사건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370).

ü  당시 한구에서 중일전쟁을 주관하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문을 보냈으며, 한 달 뒤 퇴원한 후에는 장씨 대표로 나하천씨가 치료비 3천원을 가지고 장사에 위문해 주었다 (371).

ü  내가 뵈올 때에도 어머님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371).”

 

5장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ü  어머님은 50여 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 (1939) 4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379).

ü  나는 각 당이 자기 본체를 그대로 두고 연합조직을 만든다면, 통일기구 안에서 각기 자기 단체의 발전을 도모할 터이니, 도리어 마찰이 더욱 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 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운동을 반대하였으나, 사회 운동은 독립 완성 후 본국에 가서 하고 지금 해외운동은 순전히 민족적으로 국권의 완전 회복에만 전력하자고 극력 주장하니, 나는 단일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379).

ü  그리하여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은 광복 진선 소속의 원동지역 3당이며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단체는 민족전선연맹 소속이다. 개회 후 대다수 쟁점이 단일화되는 것을 간파한 해방, 전위 양동맹은 자기 단체가 해소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해 버렸다. 양동맹은 공산주의자 단체이므로 민족운동을 위하여 자기 단체를 희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전부터 주장하던 터이니, 크게 놀라거나 괴이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380).

ü  기당 7당 회의는 1939 8 27일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7당의 대표 2명씩 총 14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380).

ü  이에 곧장 5당 통일의 순서를 밟아 순전한 민족주의적 신당을 조직하여 각 당 수석 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친필 서명하고 며칠 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380).

ü  .. 결국 통일회의는 파열되었다. 나는 3당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각 단체를 향하여 사과하고, 원동지역 3당 통일회의를 계속 열어 한국독립당이 새로 탄생되었다. 7, 5당 통일은 실패하였으나 3당 통일이 완성될 때,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자기 단체를 취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로 성립… (381).

ü  나는 국무회의 주석으로 피임되었고, 미국 수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취임케 하였다 (381).

ü  임정은 1940 4차 개헌을 단행하여 종래 집단지도체제를 개편하고 국무위원회 주석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제 임정의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최고 직책일 뿐만 아니라 군사권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되었다 (381).

ü  계획서를 작성하여, 광복군 (즉 한국 국군) 결성을 허락해 주는 것이 3천만 한족의 총동원적 요소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즉시로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382).

 

6장 해방 전후의 대륙

ü  중국 중앙정부가 군사후원회 (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의 소위 <9개 행동준승>을 발표하였는데, 조항 중에는 우의적인 것도 있고 모욕적인 것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임시정부와 광복군 간부들은 준승의 접수 여부에 의논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교정하려면 시일만 연기될 뿐이므로, 우선 접수하고 불합리한 조건을 시정하기로 하였다 (393~4).

ü  몇 개월 동안은 광복군이 유명무실하여 연합군의 인기를 끌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명 청년들인데,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을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었다. 이것이 중경에는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394~5).

ü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출신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 것은 1945 1 31일 하오였다 (395).

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이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395).

ü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로 중한문화협회 비서도 겸임하고 있었던 안병무의 회고에 의하면, 미국 윔쓰 대위가 백범에게 선생님 호박이 넝쿨째 뚝 떨어졌습니다고 할 정도로 학병들의 중경 도착은 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5).

ü  OSS Office of Strategic Serive로 미국 전략사무국의 약자. 미국은 2차 대전 중 해외 전략 기구로서 정보활동과 유격활동을 병행하며 적 후방지역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1942 OSS를 창건하였다 (395).

ü  2지대는 OSS 주관자 싸전트 박사와 이범석 지대장이 합작하여 서안에서 비밀훈련을 실시하고, 본시 개성 출신으로 우리 언어가 능숙한 윔쓰 중위는 부양에서 감학규 대장과 합작하여 비밀훈련을 실시하였다 (395~6).

ü  미국 작전부장 도노반 장군과 항적공작을 협의하기 위해 미국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가서 정중한 회담을 하였다… “금일 금시로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되었다 (396).

ü  윔쓰는 해방 전 OSS 소속으로 광복군 교관을 역임하였고 해방 전후에는 미군정 장관 하지의 요청으로 임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임정의 역할과 활용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여, 해방 초기 미군정이 임정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96).

ü  장준하의 회고에 의하면 백범이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함께 두곡을 방문한 것은 1945 8 7일이었다 (396).

ü  미국 군대의 평상시 전투식량이 간단한 서양요리였으나 누구든 부족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대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 (397).

ü  이어서 우리 청년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미국 장교들이 각자 맡은 과목을 실습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 박사가 각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시험하여… (397).

ü  청년 7명을 인솔하고 종남산 봉우리로 올라가 수백 길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적정을 탐지하고 올라오는 것이 목표인데, 소지품은 단지 수백 길 되는 숙마 밧줄 하나뿐이었다. … 그 줄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입에 물고 오라오니 이로써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를 지켜본 미국 교관은 내가 앞서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서 시험하였을 때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 청년 7명에게서 찾아냈소. 참으로 앞날이 촉망되는 국민이오라며 크게 칭찬하였다 (398).

ü  이 소식은 (왜적의 항복)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399).

ü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망 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며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399).

ü  나는 개회 벽두에 출석하여, “임시정부 해산 운운은 천만부당하고 총사직도 불가하다. 우리가 장래에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에게 정부를 도로 바치고 난 뒤 국무위원이 총사직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였다 (400).

ü  결국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400).

ü  미국무성에서는 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이 미군에 의해 군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군정이 끝날 때까지 정부로서 행사하지 않으며 군정 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할 것에 동의한다라는 서약서를 김구, 임정 측에 받아들일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김구와 임정은 이 서약을 받아들인 후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400).

ü  중경을 떠날 당시에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 동필무 등이 우리 임시정부 국무원 전체를 초청한 송별연이 있었다. 국민당 정부에서도 송별연을 열었는데, 장개석 선생을 위시하여 중앙정부와 중앙당부 각계… (401).

ü  1945 11 1일 임시정부는 귀국 후 교민들의 위무와 중국 국민당과의 외교적 교섭을 위하여 중경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을 설치하였다. 대표단은 그 후 변화를 거듭하여 1948 8 10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401).

ü  전시 중의 중경은 과연 중국의 전시 수도였다 (402).

ü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나 않을까 (403~4).’

ü  증경의 기후는 9월초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힘들며, 저기압의 분지라 지면에서 솟아나는 악취가 흩어지지 못해 공기는 극히 불결하며, 인가와 공장에서 분출되는 석탄연기로 인하여 눈을 뜨기조차 곤란하였다. … 중경에 거주하는 외국의 영사관이나 상업자들이 3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는 곳에서, 우리가 6~7견씩이나 거주하다 큰아들 인이도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406).

ü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수가 13년 전보다 몇십 배가 증가되었으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의 고통으로 인하여 각종 공장과 사업 방면에서 부정한 업자가 속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불과 10여 인에 불과하였다 (408).

 

7장 조국에 돌아와서

ü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409).

ü  도착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경득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하였다 (410).

ü  비단 서울뿐이랴. 인천, 개성 등 지방 각지에서도 임시정부 환영회를 일제히 거행하였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는 이와 반대로 환영회 대신 무쌍한 욕설을 반포한다 하니 참으로 탄식과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410).

ü  그럭저럭 민국 28 (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하였다 (410).

ü  삼남 일대 시찰을 대강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38선 이남 서부조선 일대를 시찰하기로 하였다 (420).

 

<나의 소원: 1947>

민족국가

ü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4).

ü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424).

ü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4).

ü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424).

ü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425).

ü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425).

ü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425).

ü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425).

n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n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ü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425~6).

ü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426).

ü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426).

 

정치이념

ü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427).

ü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드리기 어려운 것이다 (427).

ü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 백 년 계속하였다. 수 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가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즉 사문난적이라고 규정되면)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427~8).

ü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428).

ü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428).

ü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8~9).

ü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429).

ü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 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429).

ü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 때 그 때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 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ü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ü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430~1).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431).

ü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431).

ü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다. …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432).

ü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432).

ü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 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 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433).

ü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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