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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5일 12시 07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파블로 네루다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그의 아버지가 시를 쓰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했기에,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필명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그가 네루다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중)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1904년 칠레 중부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말아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며 자란다. 아버지를 따라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초등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열 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여성을 12세의 나이에 스승과 제자로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 데 칠레로 갔다.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 목표였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의 검은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 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즉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몇 개의 키워드이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이어간다.

예술가, 특히 시인이 외교관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랑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랑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허울만 좋은 명예영사로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들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루다가 랑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 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 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네루다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하고 얼마 안 된 1945년 칠레 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이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순수한 추구 쪽에 무게를 두는 평론가들이 많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뜻과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때문에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 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네루다는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 저곳을 여행했다.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대선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으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며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이는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부인 마틸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되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던 네루다는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 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 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 집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저자라면

한국의 청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쿠바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가 마지막까지 끼고 다녔던 책을 쓴 작가로 더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그의 자서전은 다소 주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제3자처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행동하는 시인으로서의 삶

그의 인생 역정은 참으로 다채롭고 일견 화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에 빠져 살았던 어린 시절, 대학생 때 시로 이름을 날린 덕에 주어진 외교관이라는 자리, 아시아와 유럽 각국에서 영사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접한 경험,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가장 가난한 마을의 상원의원이 되고 공산당에 입당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약점을 가진다 할지라도 그는 여성들을 사랑하듯 진심으로 민중을 사랑했고, 고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서술 방식과 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풀어내는 데 있어 개인적인 신상보다는 시대의 급박한 흐름을 좇아간다. 그런 점에서는 날씨부터 개인적 소소한 일까지 꼼꼼히 기록한 난중일기의 이순신 장군과 대조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감정과 어떤 사건에서 느낀 점을 시를 통해 써올 수 있었기에 자서전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네루다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회고록을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며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준다’며 보통 회고록을 쓰는 사람들과 시인인 자신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그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꾼 사람이다. 그의 시 낭송을 듣고 눈물짓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건달까지도 자기 앞에 와 시를 낭송할 때의 그 벅찬 감동이 이 책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388~389) 고 강조한다. 나의 지금 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장에 잠시 얼어붙었다.

번역자의 힘
옮긴이 박병규는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립 멕시코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고 한다. 꽤 상세한 주석을 읽으며 감사한 마음이 생겼는데, 라틴아메리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애정을 갖고 한 번역 덕분이라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중략) 나는 어쩌면 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중략) 내 인생은 시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13)

도서실은 항상 잠겨 있었다. 개척지 아이들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23)

난생처음 바다 앞에 섰을 대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30)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33)

그 여자들은 내가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41)

지난 30년 동안 이 외딴집에 들른 사람은 모두 스물일곱 명이었다. 사업 때문에 온 사람도 있고 호기심으로 들른 사람도 있고 또 나처럼 우연히 지나가다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 카드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카드에는 방문한 날짜와 제공한 메뉴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메뉴를 보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똑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에요.” (43)

삶,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52)

사실 청소년기에는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살았다. (중략)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56)

옷차림은 우아하고 단정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그는 경멸적인 태도, 신속한 상황 파악 능력, 세상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또는 지식욕)과 같은 신 댄디즘의 모든 속성을 다 갖추고 있었다. (62)

나는 화가인 친구 이사이아스 카베손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성당 산타 마리아 델 마르를 찾았다. (중략) 바다 사람들을 위한 성당이어서 분위기가 조금 낯설었다. 이 성당은 아주 옛날 어부들과 선원들이 돌을 쌓아 세운 것이었는데 완공 후에는 수천 가지 봉헌물로 치장했다. (65)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66)

나는 동료 문인들과 함께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파시즘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방법이란 책을 통해 임박한 위험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70)

나라는 사람은 너무나 단순하다. 이것이 내 장점이자 약점이다. (72)

눈빛이 매서웠고 말도 아꼈다. 그리고 지나치게 솔직해서 무례하다 싶을 정도였다. (75)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8)

영감을 믿지 말아야 했다. 이성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길로 나아가야 했다. 겸손을 배워야 했다. 찢어 버린 원고도 많았고 다시 써야 하는 원고도 많았다. (80)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3)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1~142)

도무지 작업 속도가 붙지 않았다. 내 세계 칠레는 소식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변의 낯선 세계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도 없었으므로. (149)

칠레 인민전선 정부는 나를 프랑스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임무를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을 칠레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215)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255)

나는 칠레인이자 페루인이고 아메리카인이라고 느꼈다. (256)

이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이 1945년 3월4일 나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구리와 초석을 생산하는 대규모 광산 지역, 칠레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의 수많은 주민들로부터 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257)

여기저기 수백 번도 넘게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 내 시를 낭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261)

내 시는 개척지 땅에 뿌리 내렸고 한 번도 그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항상 돌고 돌아 칠레 남부의 숲으로, 무성한 밀림으로 되돌아왔다. (290~291)

“그때 이 사람들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어. 그런 영하의 날씨에서, 그것도 전쟁의 공포가 휘몰아치고 있는 와중에 태연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다니는 것을 보고 짐작했지.” (299)

“사실, 양 진영 모두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307)

중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잘 웃는 사람들이다. 혹독한 식민 시대와 혁명, 기아와 학살을 겪었으나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잘 웃는다. (314)

이곳저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던 중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나라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이제는 열렬히 사랑하게 된 이 나라는 바로 이탈리아다. 나는 보는 것마다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올리브유, 빵, 포도주에서 이탈리아인의 질박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318)

“파블로! 파블로!”
열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경찰이 우아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내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남녀 작가들, 신문 기자들, 국회의원들, 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찰의 손아귀에서 나를 빼앗았다. 그러자 경찰이 다시 달려들어 나를 탈취해 갔다. (중략)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네루다는 로마에 머물라! 네루다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마라! 저 시인에게 체류를 허락하라! 칠레인은 남고, 오스트리아인은 쫓아내라!” (321)

이러한 카프리 섬의 진짜 비경은 오랫동안 이 섬을 돌아다녀 보고, 관광객이라는 딱지가 떨어진 후에나 눈앞에 나타난다. (323)

나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전 내내 시를 쓰고, 마틸데는 오후에 타자기로 옮겼다. 우리가 한 집에서 기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에서 우리 사랑은 점점 깊어 갔다. (324)

소년을 불쌍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가 보라고 일러 줬다.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칠레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사물만 보면 나에게 무작정 떠맡기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나에게 책임을 둘러씌우고 싶은 모양이다. 참 이상한 풍조다. (335)

쿤밍 시 수목원의 나무는 모두 성형수술을 받은 것 같았다. 자연 그대로의 형태로 자란 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347)

처음으로 시집을 펴냈을 때만 해도 나중에 광장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강의실에서, 극장에서 그리고 정원에서 시를 낭송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375)

이처럼 냉대와 열광을 한꺼번에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을 것이다. (378)

내 이름과 시의 제목을 듣자마자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중략) 나는 시를 낭독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과 해방을 강조했다. (381)

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당겨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 또한 예상 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7)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388~389)


행동하는 시인으로서 나는 자기도취와 싸웠다. 따라서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갈등은 나라는 존재 내부에서 해결되었다. (392)

한 가지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 때문에 적어도 우리 조국에서는 시를 쓰는 일, 즉 시인이라는 직업을 얼마간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92~393)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393)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394)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396)

훌륭한 가정 교육을 받은 아이들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못 믿겠다는 눈초리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 가운데 장차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여, 친구가 되고 아주 훌륭한 내 전기를 쓰게 될 사람이 있을 줄이야! (399)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인들 사이의 갈등은 지구 어느 곳에서나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427)

40년 동안 나를 쫓아다니면서 문학적인 시비를 걸었으니, 기상천외한 일이다. 그 사람의 외로운 싸움을 돌이켜보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나는 그 싸움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 사람은 자기 그림자와 고독한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429)


나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436)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내 책은 항상 똑 같은 것을 다룬다. 언제나 똑 같은 책을 쓴다. 친구들이여,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이 순간, 새 날로 가득한 새해에 나는 그대들에게 시, 언제나 동일한 시밖에 줄 것이 없다. (441)

아무튼 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받고 파리에 갓 도착했을 때였는데, 내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여 마틸데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450)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확고한 스탈린주의자라고 믿었다. 파시스트와 반동분자들은 스탈린에 대한 서정적 주석가로 묘사해 왔다. 특별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혼돈의 시대에는 평가도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니까. (472)

왜 카스트로는 사진기자를 그렇게 매몰차게 내쫓았을까? 무슨 정치적 비밀이라도 감추고 싶었을까? (477)

체 게바라와의 첫 만남은 전혀 달랐다. 아바나에서 만났다. (중략)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체가 죽는 순간까지도 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478)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많다. 예를 들어, 불굴의 혁명 투사라는 나의 자부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485)

나는 매일같이 글을 쓰려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로 들어가 한동안 머물러 있기가 어렵다. (494)

사람들이 항상 묻는 말이 있다. 특히 기자들이 그러는데, 지금 무슨 작품을 쓰느냐 또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왜 사람들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항상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495)

나는 지금 이 회고록의 몇 줄을 위대한 동지 아옌데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후에 서둘러 쓰고 있다. 저들은 살해 행위를 은폐하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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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산
2009.06.16 20:26:35 *.17.70.5
'행동하는 시인'.....귀에 쏙 들어오는 단어네. 우리 모두 '행동하는 somebody'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1차적으로는 행동하는 작가가 되어야 하겠지.

지난 주말 오프수업 때 좋은 시간 보내서 좋았어. 나 이제부터 아인이라고 부르고 반말할꺼야.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도록....ㅎㅎㅎ

남은 시간이 엄청 많으니까 길게 보고 조금씩 다가가면 될 듯해.  우리 모두가 아인이를 아껴두었다는 점만은 꼭 잊지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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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1:11:08 *.40.227.17
화려해 보이는 삶 뒤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고통스런 시간이 존재했겠지?
참.. 열정적인 사람이더라.. 뜨겁고.. ^^

아인~, 부끄러움을 가려주리라~ 했던 그 안경이.. 아인의 얼굴에 씌어지니..
얼매나 참하던지.. 우찌 그리 이쁘던지..
새색시는 역시~ 몬속이나봐^^

근데.. 아인.. 너 은근히.. 구엽더랑?(내가.. 뭘 봐서? 기럴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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