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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5일 23시 48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파블로 네루다에 관련된 자료를 찾던중 미구엘 리턴 감독의 ‘칠레의 모든 기록’에 나오는 네루다의 장례식 영상 장면을 우연히 발견할수 있었다. 오열하는 군중들과 그 장례식을 삼엄하게 경계하는 군인들의 모습들. 그광경만 보아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민중들에게 미치는 네루다의 영향력을 일견 엿볼수 있었다.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이태리어로 Postman)’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소개가 되었던 남미의 상징이자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 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준 영화로 사람들에게 각인을 시켰던 그. 이작품은 노벨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세계적 명성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1952년 본국 칠레에서 추방단한 후, 이태리 정부가 나폴리 가까이의 작고 아름다운 섬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준 실화에 근거해 만들어졌었다.

  ‘이 소나무 숲의 광막함, 부서져 내리는 파도의 소문. 빛의 느릿한 장난. 고독의 종소리. 네눈속으로 가라앉는 황혼 인형이여. 대지의 소라고둥이여 네안에서 대지는 노래하나니. 네안에서 강물이 노래하면 내 영혼은 그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러길 네가 바랄 게고 그곳은 네가 좋아하는 곳이기에. 네 희망의 활에 재여진 나의 행로를 가르쳐 다오. 그러면 미친듯이 나의 화살을 무더기로 쏘아 보내리니......’ 네루다를 대중적인 시인으로 등극하게 했던 그의 작품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도 살펴 보았다. 지금과는 다른 그의 시적인 서정성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으로서, 이 시집은 2008년 서강대학교 필독서 100위권내에 등재 되었던 지성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1904년 7월 12일.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가정에서 태어난 네루다는 가난한 자갈 기차 기관사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를 두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 오래전부터 결핵을 앓던 어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러하다.

 ‘어머니 사진도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갸날픈 몸매의 여인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시를 썼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시를 본 적은 없다. 내가 본 것은 오직 저 아름다운 사진뿐이었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신부 이름은 트리니다드 칸디아 마르베르네. 유년기 수호천사였고 그에게 새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온화한 분으로 기억되었다.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가 열네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그는 사용하였다. 네루다라는 필명은 체코의 작가이며 시인인 얀 네루다에서 얻어졌으며, 나중에는 그의 법적인 이름이 되었다.

  12세 때는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산티아고의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많은 시간을 할애 했으며 첫 시집 ‘황혼의 일기’로 칠레 문학계를 뒤집어 놓았다. 또한 두 번째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살의 나이에 칠레 전역에 이름을 떨쳤으며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 영사로 임병 받게된후 5년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이때 랭군을 포함해 콜롬보, 실론, 자카르타, 자바, 싱가포르 등을 오가게 된다. 명예 영사인 탓에 본국 칠레로부터 받는 지원은 거의 없어, 가난하고 힘든 생활 가운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했기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유배를 청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파괴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속박을 풀고 더넓은 시상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 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의 영사가 되었을 때,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그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시인 친구들이 사형당하고 옥사하는 것을 보게 되자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지구위에 떨어지는 피 한방울은 그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존의 낭만적 시풍을 버리고 문학보다 더욱 절박한 현실로 뛰어들어 간다.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5년 귀국 즉시 칠레 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 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게 된것은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탓으로도 해석이 된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망명생활에서 ‘일 포스티노’와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졌고 민중지향적인 시로써 그들에게 꾸준한 환호를 받았다. 즉,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1969년 사회당 공산당이 1970년 선거를 위해 인민연합을 설립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단일후보화 했다. 아옌데와 인연이 있던 네루다는 그의 정책에 빠져 그를 열렬히 응원했으며 그의 노선을 함께 걸었다. 하지만 피노체트의 군부 쿠테타로 인해 아옌데가 사살되자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더욱 병세가 악화된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며칠후 침대에 누워있는 그에게 군인들이 찾아왔다. 한 장교가 그에게 가택을 수색하겠다고 하자 네루다는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라며 말을 걸었다. 장교가 총에 손을대며 ‘그게 뭐냐’라고 묻자 네루다는 힘겹게 ‘시라네’라고 대답한 일화는 후대에 회자가 되고있다. 암으로 입원해 있던 네루다는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피노체트는 좌파시인 네루다의 장례식을 공개거행할 것을 반대했으나, 수천명의 칠레사람들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통행금지를 어기고 공개적으로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 네루다의 장례는 칠레 군사독재정권 최초의 항거였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흔적은 끊임없이 타올라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독재를 막고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이처럼 파블로 네루다는 자신의 시와 정치 사상을 통해 동시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작가이면서, 고국인 칠레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폭 넓은 일반 독자층으로부터 평범한 삶의 찬양자이자 국민적 정체성의 창시자로서 존경받았다.



 

Ⅲ. ‘내가 저자라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읽고난 첫느낌은 책의 내용을 이렇게 펼쳐 나갈수도 있는거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접해왔던 자서전은 기승전결식의 저자의 생애와 일화에 대한 사건 중심의 기술 내용들이었다. 반면 그의 자서전은 네루다 본인이 시인이 직업인 탓도 있었겠지만, 특징적인 일화를 바탕으로 유려한 문체와 상징적인 글귀로써 내용을 펼쳐 나가는 탓에 나는 편안하게 그와 함께 여행할수 있었다. 노벨 문학상과 같은 외부적인 업적보다도 그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일화를 꼽는다면 다큐멘타리 ‘피노첸트 재판’이라는 작품속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수 있다.

  

  피노체트 기소를 처음 생각해낸 카스트레사나 검사는 자신에게 ‘왜 그런 귀찮은 일을 떠맡으려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독재를 피해 50만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무려 50만명의 사람들이. 그때 칠레의 주스페인 영사가 배를 한 척 내주면서 <이 배에 태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습니다. 그는 연대의 표시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파블로 네루다. 그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1. 시인으로써의 그를 형성한 초기 경험

  모든 사람의 일생의 뿌리에는 어릴때의 초기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어떤 경험과 환경을 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독특한 사상이 구성되고, 예술가들은 그의 작품으로 형상화가 되어진다. 네루다 시작품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 부분들 중에는 어머니, 칠레의 자연세계, 여인과의 사랑 등이 포함되며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삶이 시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가. 칠레의 숲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나. 나는 브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 나이가 들면서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버팔로 빌의 무용담이나 살가리의 모험담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꿈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라. 울창한 산림과 끝없는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2. 내적 성장

  사람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웠던 행적을 돌이켜보면 역설적으로 거기서 성장의 원동력과 밝음의 흔적을 엿볼수 있다. 네루다는 이야기를 한다.

 ‘매일 저녁 턱시도를 차려입는 영국인들과 내가 범접할 수도 없는 광대한 세계를 형성한 힌두교도 사이에서 나의 선택지는 고독뿐이었기에 그 시절이 일생에서 가장 외로운 때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를 가장 빛나던 시기로 기억한다. 마치 어마어마하게 밝은 번갯불이 창문 밖에 머물면서 내 운명의 안팎을 속속들이 비춰 주는 것 같았다.’


3. 인생관

  ‘나무에 묶인 코끼리는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코끼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굶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코끼리가 자유롭게 밀림을 돌아다닐 때 즐겨 먹던 식물의 순이나 여린 줄기를 코앞에 들이밀었다. 코끼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음식을 먹었다. 이제 길들여진 것이다. 지금부터는 고된 노동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얘기에서 보듯 네루다는 태생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메이고 싶지않은 그만의 보헤미안적 기질이 있었다. 또한 그의 경우에는 본인 스스로를 너무나 단순한 성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테마로써 대중들에게 인식을 시켰던 그가 역사적인 몇가지 사건을 겪은이후, 민중과 함께하는 시인으로 돌변하게된 요인중에 하나가 그의 이런 기질 탓이리라.

가.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나. 사바트 에르카스티의 편지를 받고 장시를 쓰겠다는 야망을 접었다. 내가 제대로 천착할 수 없는 웅대한 시와는 담을 쌓았다. 의도적으로 문체와 표현을 낮추었다. 한결 소박한 표현과 내 고유의 조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면서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이다.

다. 발파라이소의 작은 세계는 위협적이고 폐쇄적인 각자의 바다이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소리이며,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고독한 몸짓이다.

  나는 발파라이소 괴짜들의 삶에서 힘겨운 항구 생활과 아울러 어떤 통일성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저 위 산동네에서는 빈곤이 만발했다. 역청도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덩달아 기쁨도 부글부글 끓어오른는 동네였다.‘

라. 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마. 아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편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알 필요가 있었다.

바.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 파스칼 같은 신부에게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영세를 주어서는 안 되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당신의 시, 당신의 창작물을 게재할 수 없소.’라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구나 성당에 들어갈 수 있고, 인쇄소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추방하려고 시장을 면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누구나 웃는 얼굴로 시청을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란다. 곤돌라를 타고 도망가던 사람도, 오토바이를 타고 뒤쫓는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또 대다수 사람들이, 아니 모두가 말하고 읽고 듣고 번영하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한 길을 추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이 우리 모두를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 이 위기의 순간에도, 이 전멸의 위협 속에서도 사태를 직시하면 서광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꺽을 수 없다.


4. 처녀작

  작가들은 만들어지는가 그렇지않으면 태생적인 인연으로써의 끈으로 나타나는가? 네루다의 경우에는 후자쪽으로 기울어 지는것 같다. 물론 척작품이 다음과같이 기대만큼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주 오래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렘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 어린 시절 항상 포근하게 나를 감싸 준 천사 같은 새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첫작품이 어떤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들고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식당에 앉아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대화 내용이었다. 나는 시적 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 들고 대충 훏어본 후에 되돌려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의논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문학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5. 시인으로써의 자신의 색깔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네루다의 경우 그 색채가 분명 하였다고 볼수있다. 절대적인 민중시인으로서의 지지자 또는 배척세력 형성이 그것이다. 그의 색깔을 나타내는 시관은 다음 글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시는 이미 독자와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가. 로하스 히메네스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것인데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나.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다.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다.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라.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슬라네그라의 거친 해변과 대양의 사나운 물결 덕분에 나는 이 시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마. 내 시는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시 덕분에 고단한 삶을 사는 동포들과 한데 어울릴 수 있었고, 그들은 나를 둘도 없는 형제처럼 받아 주었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바.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사. 주의하라! 우리는 시인에게 빛과 어둠 속에 있으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거리와 전투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요구한다.

아. 탁월한 시인이 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자연, 문화, 사회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 과거에 흘린 피를 위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운동선수, 외교관, 정치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의 국경에서 자유로운 시인도 나서야 한다.(481)

차. 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고독 속에서 내 삶은 풍부해졌다.


6. 터닝포인트

  네루다 일생에 인상적인 사건을 들수 있다면 1936년 다음과 같은 로르카의 죽음과 스페인 내전의 예를 들수 있을 것이다.

가.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나. 칠레 인민전선 정부는 나를 프랑스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임무를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로가 된 스페인 사람들을 칠레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 시는 빛줄기처럼 아메리카에서 뻗어나가 누구보다도 더 영웅적이고 고초를 겪은 저 사람들 사이로 퍼지게 될 것이다.

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진행해 온 그 일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내민 손은 박해받는 망명자들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었고, 조국 칠레의 포용력과 투쟁 정신을 한눈에 보여 주는 사례였다.

  모두 배에 승선했다. 그들은 어부, 농부, 노동자, 지식인들로서 힘과 영웅심과 노동의 표본이었다. 나의 시는 투쟁을 통해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 주는데 성공했다.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예상은 막을 내렸다. 두 시집을 형성하는 광맥은 지하 암반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온갖 책갈피 속에서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의 노래’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7. 시의 역사적 사명

  민중시인이라는 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답게 그는 시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가. <칠레의 여명>이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일할 때는 문학적 무기(다른 무기는 없었다)를 총동원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는 나치를 겨냥했다.

나.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한정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신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


8. 네루다의 작가관

  작가라면 모름지기 끝없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사물에 대한 분석이 수반이 되어져야 할것이다. 네루다의 글을 읽어 보노라면 그의 투철한 작가관이 나타난다.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시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9. 공산주의관

  예전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이란 것을 배운적이 있다. 태생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나자신도 여기에 속한 작가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네루다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또, 정치적 입문 과정에서도 공산당원으로 활동을 했었었다. 하지만 그에게 공산주의는 책상머리에서 이론으로 다가온 게 아니라, 스페인 내전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으로 다가왔었다. 히틀러와 프랑코로 상징되는, 전 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저항 세력이 공산주의였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선택에 의한 결정이었기에 그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조금은 달랐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주관적인 것, 인간의 본질, 본질의 본질을 걱정하자.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자유란 얼마나 위대한가! 공산주의자는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본질을, 본질의 본질을 걱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옮긴이의 말 표현대로라면 그가 진정 생각했던 공산주의란,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리라.


  파블로 네루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을 하고싶다.

  첫째, 네루다는 본인 스스로 세상속에서의 진정한 리얼리스트를 원하였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 하였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상반되는 그의 주장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A.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을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은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B. 나에게는 리얼리즘이 맞지 않으며, 적어도 시를 논할 경우에는 리얼리즘을 혐오한다. 그리고 시가 리얼리즘 이상이거나 리얼리즘 이하일 필요도 없으나 반리얼리즘이 될 수는 있다. 내가 말하는 반리얼리즘이란 모든 합리성과 모든 비합리성, 다시 말해서 모든 시를 내포한다.

  둘째, 진정한 예술이 추구하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듯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차도 엄연히 존재를 한다. 순수과 탐미에의 열정 對 적극적인 현실에의 참여는 인류가 존재하는한 앞으로도 논쟁의 화두로 남을것이다. 민중시인으로써의 네루다 본인의 생각을 나타내는 다음 글은 그의 사상을 더욱 엿볼수 있게한다.

 ‘남녀 병사들, 마름의 총에 맞고 쓰러진 농민들, 끔찍한 십자형을 당한 사람들을 그린 멕시코의 오로스코의 작품은 우리 아메리카 회화의 불멸의 역작이며, 우리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증거로 남으리라.’

  반면 똑같은 비극속에서도 다른 해석으로써 접근한 이도 있다. 인상주의의 대가 르누아르가 그예로써 그의 작품 전시회가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열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절망같은 삶에서도 행복의 의미를 추구했었고, 그의 이같은 생각은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로 나타난다.  


  ‘파블로 네루다’. 사람들의 여러 이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민중과 함께 뜨겁게 불태웠었고 그가운데에서 행복감을 공유 하였다. 이같은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소명과 역할의식이 항시 함께 하였으리라.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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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5:21:33 *.204.150.167
의문이 생긴 건 아주 좋아. 의문이야말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지.
그러나 죽은 네루다는 대답할 수 없으니, 그대의 질문에 그대가 대답한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그대가 생각하는 현대의 리얼리즘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대는 과연 리얼리스트인가? 아니면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글쟁이인가?

그대, 죽은 네루다를 대신해서 내게 설명해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힘내자. 깡승호,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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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6 18:47:56 *.12.21.21
다시 한번 차분히 네루다의 삶을 정리해 볼수 있네. 
난 네루다 같은 자서전을 쓰고 싶어. 아주 시적으로! 매력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드라마틱한 대서사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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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1:01:01 *.40.227.17
네루다나.. 르누아르나.. 물론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거이겠지요
근데여.. 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있지 않나 시퍼여..

긍께여.. 제가.. 제가.. 제 마음이?.. 문제라니께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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