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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6일 02시 51분 등록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Pablo Neruda /: 박병규 옮김, 민음사

저자 소개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후에 그는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남미 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이며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으로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앙드레 말로 처럼,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이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네루다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고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으며,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 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열열히 지원했던 비델라가 미국의 의지를 거부하지 못하고 공약과 다른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가 공산당을 탄압하자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지만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하였으며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에도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죽었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착취 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글귀

p14 우리는 듬성 등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준다.

=> 회고록은 사실을, 시는 사실을 통해서 일어나는 개인의 환상을 …

p17 마치 케이프 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 네루다의 글 속에서 그의 시가 어떨지를 나는 눈 뜨고 있다.

p18 다시 말해서 우리 동포인 원주민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한 것이다. 그동안 원주민을 무찌르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아낌없이 동원했다. 기관총을 난사하고 마을을 불 지르고 나중에는 조금 온건한 방법을 사용하여 법률과 술을 동원했다. 변호사는 원주민의 땅을 사취하고 판사는 항의하는 원주민을 감방으로 보내고 신부는 지옥 불
에 떨어질 거라고 위협했다.

=> 정복자와 기억하는 자…

p18-19 예전 아라우카 족의 용기 혁혁한 전과, 아름다운 삶은 에르시아의 서사시 아라우카나에 주옥 같은 시구로만 남아 있다.

p20 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뱀 어미’라고 부르는 딱정벌레였다. ‘뱀 어미’란 칠레에서 가장 큰 곤충으로 껍질이 딱딱하고 검은 색 윤기가 흐르는 대형 딱정벌레인데 너무 터무니 없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마키 나무나 야생 사과나무나 코피우에 나무에 붙어 있는 이 곤충과 마주치면 단단하기 때문에 발로 밟아도 끄떡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훌륭한 방패를 지닌 ‘뱀 어미’에게 독은 필요한 무기다.

=> 후일에 쓰고 있어서… 무의식적이지만 상당히 전투적인 생존력에 관한 기록이 스며있다.

p 21 우리 집은 임시 숙소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탐험 회사 같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서면 술통, 연장, 마구 등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항상 공사 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 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의 대학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p22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신부 이름은 트리니다드 칸디아 마르베르데. 내 계모이다. 유년기 내 수호천사였는데 이제 와서 마뜩찮다. 아무튼 새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시골 사람 특유의 유머 감각도 있었고 또 언제 봐도 상냥했다. 아버지가 귀가하면 당시 그 지역 여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조용한 그림자로 변했다.

=> 우리 나라만 여자가 집에서 남자에게 복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p25 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 과거는 현재적 관점에서 재구성된다. 현재 그가 무엇을 주제로 잡고 있는가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은 재구성 되어진다.

p27 가난한 집 식구들이 한 달 동안 휴가를 떠나려니 살림살이를 전부 챙겨 가야 했다. 심지어 습한 기후 탓에 잘 마르지 않는 빨래를 화로 위에 널어놓는 버드나무 건조대까지도 딱지를 붙이고 화물칸에 쑤셔 넣었다.

p29 우리가 묵을 집에서, 아니 그 전부터, 그러니까 낡은 부두에 정박한 작은 증기선에서 내렸을 때부터 묵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바다였다. 파도가 몸 안으로 밀려왔다.

=> 그가 쓰는 수식어가 나에게는 참 마음에 든다.

p30  난생 처음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바다는 커다란 일케 언덕과 마울레 언덕 사이에서 한참 격노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수미터 상공으로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고 우주가 박동하는 듯 울부짖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에 식탁을 차렸다. 입안에 모래가 씹혔으나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수영을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던 것이다.

=> 꼿꼿이 서서 달려들어 오는 것만 같은 높은 파도… 아직도 기억한다.

p37  그 사람은 내 독서열에 깜짝 놀랐다.”그걸 벌서 다 읽었니?”하고 되물으며

나는 타조처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어 삼켰다.

p44 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있다. 죽음의 망각. 어쩌면 밀림이 세 자매의 생명과 그날 밤 나를 반겨 준 그 집을 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치 꿈이라는 투명한 호수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듯 하다. 고독하고 거친 삶 속에서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도 없이 옛날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던 우수에 찬 세 자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여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접근하기도 힘든 산중에서 조상이 일군 우아한 문화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 문화가 있는 삶이라는 … 먹고 사는 것 이상의 가치와 의미… 존재의 당위성을 확실하게 해 준다.

p46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크고 거칠었지만 분명 여자의 손이었다. 그 여자는 내 이마와 눈과 얼굴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탐욕스런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여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를 짓눌렀다.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꽃처험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 그의 경험과 기억의 언어적 기술 속에서 과거의 수준과 행적이 보여진다.
 
p 49 내가 ‘겉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머릿속이 온통 책과 꿈 그리고 벌 떼처럼 윙윙거리는 시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p50 당시 자취생들은 태반이 굶었다. 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시를 썼지만 먹는 것은 전에 비해 형편없었다..

p52 이번 모험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취 집 주인 여자는 몇 다리를 건너면 고향과 연줄이 닿았기 때문에 동정심에서 가끔식 감자나 양파를 갖다 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삶,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p54 그 무렵 우연히 어떤 과부와 친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은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푸른 눈에 애잔한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젊은 소설가 였는데 체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환상적인 부부였다. 여자는 밀밭 같은 금발머리, 흠잡을 데 없는 몸매, 짙푸른 눈동자를 자랑하는 미인이었고, 남자는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분마성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야 금발의 아내 또한 분마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 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p64 몇 년 뒤 칠레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겨울, 로하스 히메네스는 죽었다. 평상시처럼 양복 상의는 산티아고 시내 어느 술집에 벗어 두고 그 추운 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킨타 노르말에 있는 여동생 로시타 집까지 걸어갔다. 이틀 뒤, 기관지 폐렴으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만나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종이학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로 날아갔다.
=> 당시의 그들, 시인들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p77 이 첫 시집이 바로 1923년에 출판된 ‘황혼일기’이다. 시집 발행 비용을 마련하느라 매일같이 단맛 쓴맛을 경험했다. 얼마 되지 않은 가구를 팔고 아버지가 엄숙한 표정으로 건네주신 시계, 손수 두 개의 작은 깃발을 엇갈리게 새겨 넣은 시계도 전당포에 맡겨야만 했다. 나중에는 검정색 시인 복장까지 전당포로 갔다. 인쇄소 사장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드디어 인쇄가 완료되고 표지 비용까지 지불했는데도 악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 돼. 대금을 전부 결재하기 전에는 한 부도 가져갈 수 없어.” 결국 비평가 알로네가 보태 준 돈까지 집어삼킨 다음에야 나는 책을 짊어지고 인쇄소를 나올 수가 있었다.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뛸듯이 기뻤다.

=> 그 당시에, 시집이 잘 안 팔렸던 것이 아닌가?  그 출판사 사장은 동네 장삮꾼 박에 되지
않는다. ‘

p79 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 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 나는 검을 보고 취했다. 신이 내가 깨닫기 전에 이미 정해 놓은 운명이기에…  언제나 나는 손에 들려 있는 동안에 아무런 잡념도 고통도, 그리고 혓 생각도 없었다.  운명처럼 그렇게 신들려 있었다.

p87 한참 앞뒤 없이 살던 그 시절, 우리는 항상 갑자기, 항상 새벽에, 항상 밤을 꼬박 새웠을 때, 항상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을 때, 삼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스무 살 남짓한 시인이자 화가인 우리들은 어떻게든 발산시키고 폭발시켜야 할 객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모두가 한 성질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 밤을 세우고,, 새벽에 노래를 하고,,, 정신없이 잠이 들고,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묶고… 밤을 새우고… 유치하게 만들고…

p94 나는 발파라이소 괴짜들이 삶에서 힘겨운 항구 생활과 아울러 어떤 통일성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망각이 안개처럼 밀려오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고유한 무기로 이 세계를 수호하고 있었다.

p111 열차는 마치 이국적인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처럼 농촌 아낙네와 선원 등 각양각생의 사람들을 싣고 달렸다.
p 118 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 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 어디를 가든 힘과 능력이 부족하면 뿌리 내릴 수 없다.  살기 좋은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과 능력을 갖추게 되면  어디든,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p123  인도 전역에서 만난 이 젊은 시인들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방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다른 날 다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비참한 현실과 억압적인 신을 뒤엎으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실상이다. 이 시대는 보편성을 지닌 시의 황금기다.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

p127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p129 이 피로 물든 땅에 누운 와불은 누구에게 저렇게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도망치는 시골 여자들, 전호에 휩싸인 남자들, 복면을 두른 게릴라들, 가짜 승려들, 탐욕스러운 관광객들이었다. 지금도 거대한 불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밀림에 사는 검은 새의 울음소리와 붉은 새의 날갯짓 아래에서 물결치는 가사 주름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시선으로, 완전히 비인간적인 어떤 형태로든 인간적이고, 신이면서도 신이 아니고, 돌이면서 돌이 아닌 모순된 형상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

=> 한 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샘이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식욕이 없으면… 아무 생각없이 어슬렁거린다.

p131 실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야수와 같은 물질적 욕구에 시달리고, 식민 지배는 철저한 굴종을 강요하고 매일같이 수천명이 콜레라, 청연두, 열병, 기아로 죽어 나가고, 거대한 인구와 빈약한 산업으로 혼란에 빠진 봉건적인 제도가 잔혹하게 삶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적인 명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이것이 사실이라면     

명상 센터는 미국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구 출신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싸구려 형이상학으로 포장한 이국적이 부적과 주물을 도매금으로 팔아 넘김으로써 값싼 시장을 착취했다. 이런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다르마와 요가를 들먹였으며,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종교 수련에 열을 올렸다.

=> 이것은 미국이 각색하여 상업주의로 분장시킨 화장한 열굴이다. 미국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무엇이든지 정신과 가치는 사라지고 돈과 욕구충족으로 도구로 전락한다.

p137 어떻게든 이 메스꺼움을 이겨 내야만 했다. 아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편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 속에 텅 비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 모르겠다. 안 해봐서…

p137 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 서양들은 항상 세상의 모든 악행은 그들이 저질러 놓고, 나중에는 정의수호자로 등장한다.
아편전쟁, 이라크전쟁, .. 이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나…?

p 138 그 이후 다시는 아편굴을 찾지 않았다. 이제 아편이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연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손에 쥘 수 없는 그 무엇을 만져 보았다.

=> 정래미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순하게 신경전달 물질의 오류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 분야와 방법을 달리해 봐야 하지 않을까

p142 이런 고독은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독이 아니라 감옥의 벽처럼 단단한 고독이었다. 아무리 벽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아무리 울어도 달려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 생각 밖에도, 이런 면에서 그는 건전하다..

p143 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과 방대한 아시아 세계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결코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

=> 같은 것을 하면서 (보면서) 다른 것을 얻는다.

p152 콜롬보에서 보낸 쓸쓸한 생활은 힘겨웠을 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던 거리에는 친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양한 피부색의 여자들이 내 야전 침대에 들렀으나 육체적 번갯불 이외는 아무런 사연도 남기지 않았다. 내 몸은 열대 해변에서 밤낮으로 타오르는 외로운 모닥불이었다. 친구 팻시가 여자들을 데리고 종종 찾아왔다. 보어인, 영국인, 드라비다 족의 거무튀티한 여자와 황금빛 여자들이었다. 이런 여자들은 스포츠를 즐기듯 거리낌 없이 나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p 244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 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뒤 체코 슬로바키아에 갔을 때, 구렛나룻을 기른 네루다 동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쳤다.

p262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 재능은 무엇을 겪고 어떻게 단련되어지는가에 따라 그 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인모습으로 나타낸다.

p 290 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항상 돌고 돌아 칠레 남부의 숲으로 무성한 밀림으로 되돌아왔다.

=>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깨우쳐서 돌아와 보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있는 그래로였다.

p296 주지하듯이,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 생명은 법과 구속에 의해서 통제 될지는 모르지만 없앨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누적되면 법은 피를 부르고 전복되며 … 무덤을 파게 된다… 자신의 무덤…

p349  지난 5년 동안 중국의 섬유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여성들은 온갖 색상의 꽃무늬, 줄무늬, 물방울 무늬와 갖가지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남자들도 다양한 색상이의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제 길거리는 중국인의 세련된 취향 덕분에 화려한 무지개로 변했다. 원래 중국인은 무엇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단순한 짚신 하나만 보더라도 마치 짚으로 만든 꽃송이 같다.

p362 맥을 보았을 때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예레반 동물원을 포함하여 극소수의 동물원만이 맥을 사육하고 있었다. 맥은 몸집은 황소 같고 코는 길고 눈은 조그마한 아마존 원산의 기이한 동물로, 솔직하게 말해서 나와 무척이나 닮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므로 숨길 이유도 없다.

=> 맷돼지 뿔없는 맷돼지 같은데… 희안한 …

p383  건달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훌쩍거렸다.
“저는 건달에 불과하지만 아까 나하고 싸운 사람을 코카인 밀수업자입니다. 우리들은 쓰레기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내게도 순수한 면은 있습니다. 그건 내 애인, 애인에 대한 사람입니다. 자, 보세요. 애인 사진입니다. 당신이 이 사진을 만져 봤다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너무 좋아할 거예요.”
건달은 웃고 있는 여자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나는 좋아하게 된 건 다 당신 때문입니다. 우리 당신 시를 함께 외웠거든요.”
그리고 곧바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처럼 생긴 슬픈 소년이 그대 안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바라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내 친구들이 단단히 무장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문 안을 들어오던 친구들은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건달은 좀 전의 그 자세로 여전히 시를 외우고 있었다. “그 아이의 핏속에서 불타오를 생명으로 우리 삶을 묶어야만 할 것이다.” 건달은 시에 패배한 것이다.

=>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러나 항상 무엇가 한 가지 탁월함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시간을 요구한다.

p386 시는 이미 독자와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 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임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시는 언어로 태어난 혼이다. 순수하고, 본질적이고, 감성적이고. 그리고 …. 
   누구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을 지나 그것들이 하나로 될 때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글자가 주는 의미가 아니다.  글자가 주는 의미들이 불러오는 의미들의 환상이다.

   영혼이 노래하고 춤추게 하는 그래서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시다…

p387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 아무리 비슷하게 …   아니 정확하게 똑같이 가르쳐도…   하는 짓을 보면 ,,,
배운 것을 표현 할 때 보면 다르다.   그것은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가에 있다.
시만 .. 글만 .. 그럴까? 인간의 행동은 더욱 그렇다. …

p388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

=> 연구실 책상에 앉아서 사람들이 왜 야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야구공의 속도나 시간이나 타율이 야구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 둘 것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p391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 대부분의 시인이 그렇다. 지성이 불안하지만 감성은 예민하고 통찰력은 깊다.
이제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p392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준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 그래서 단 하나가 된다.  시 라는 …

p393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비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시를 존중하게 되었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도 존경하게 되었다. 모든 시와 모든 시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 감정이입이 되어 가는 과정

p395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 개성은 실체가 있고 그 실체가 보편적인 것들을 개별적인 관점에서 취하여 개인화되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그것들을 보편적인 명사로 이름 지은 개념에 불과하다.

p406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 전쟁이 있는 한 사랑도 있다.

p410 그는 지혜가 거주할 자리와 함께 슬픔이 거주할 자리도 항시 마련해 두고 있었다.

=> 잠재된 무의식의 능력, 그 영혼의 발현이 지혜라면, 당연히 멈추어야만 하는 자아 –현실속의 자아는- 멈추어야 한다. 생각을 그치는 것, 그것은 자아가 잠시 소멸된 것이다.
왜 그럴까? … 

p411 엘뤼아르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동방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 아무도 사귀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다.

p420 나는 겨드랑이 밑에 이론을 끼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 위에 쏟아 부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이 월요일은 무엇이나 밝게 보이고, 화요일은 무엇이나 어둡게 보이는 사람이다. 올해는 명암이 엇갈리는 해다. 내년부터는 푸른색이 될 것이다.

다이나믹한 사고체계 삶은 원리나 법칙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통해서 완성되어 진다.

p441 세월이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병이 좀 더 잦아지고 친구들이 수감되었다가 출감하기도 하고 유럽을 다녀오기도 하며 그냥 죽기도 한다.
 
=> 삶의 무상함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

p458 날이 저물 때라 웅장한 황혼이 나를 반겼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이 구름을 헤집어 놓고 있었고,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하늘이 대지와 하늘 사이에 걸린 커다란 구름 덩어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목초지는 거센 남극 바람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저만큼 세로 카스티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날카로운 봉우리는 고딕식 첨탑 같고, 자연이 만든 화강암 성가퀴 같았다. 아이센 지방의 산맥은 제멋대로였다. 공처럼 둥그스름하거나 탁자처럼 평평하게 솟구친 모습은 마치 눈으로 만든 삼각형과 사각형을 늘어놓는 듯했다.
하늘은 고운 비단과 금속을 석양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노란색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순순한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새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 고래 입이 되었다가 사나운 표범이 되었다가 끝내는 추상화가 되었다.

=> 구름과 하늘 그리고 상상의 바다

p474 나는 우리 당, 칠레 공산당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만났다. 개인적이 허영심이라든가 폭압적인 권력이라든가 물질적이 욕망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나는 이처럼 공공의 선, 즉,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어 행복했다.
우리 당과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다. 칠레 공산당은 빈약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을 위해 큰 승리를 일궈 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나도 동지들만큼 순박하고, 동지들만큼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소원한다. 겸손에서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안주하여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만심에서는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다.

=> 공공의 선, 그것이 정의다. 

p 478 체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전쟁……우리는 항상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전쟁 없이는 못살아. 날마다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지.”
혼잣말인데 나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말에 경악했다. 전쟁은 위협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날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체는 볼리비아 산악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체를 생각한다. 영웅적인 전투를 벌이면서도 무기 곁에 시집 놓을 자리를 마련해 둔 명상의 사나이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 프로페셔널의 의미는?
날에

p495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던가 기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 자유로울 수 있는가?

p501 그 침실은 기사가 말과 함께 묵으면 안성맞춤이었다. 말이 여물을 먹고 지사가잠을 자고도 남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 천장은 매우 높았고, 은은하게 치장해 놓았다. 가구는 털이 보송보송한 천으로 덧씌워 놓아 엷은 낙엽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촌스러운 술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부의 흔적과 타락의 흔적이 동시에 묻어나는 양식이었다. 양탄자는 60년 전에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화려한 색깔은 발길에 짓뭉개지고, 의례적이고 활기 없는 대화가 스며든 탓인지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p506 조국 당에서 멀리 떨어져 살 때는 칠레의 겨울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눈앞에 안 보이기 때문에 겨울철의 고단한 삶, 방치된 시골 마음, 맨발로 추위를 견디는 어린애들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초록색 시골 풍경, 노란색과 빨간색 꽃, 국가에 등장하는 푸른 하늘만 기억했다. 이번에는 먼 이국 땅에서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계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534 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 죽기 바로 전날 네루가를 찾아간 변호사 피게로아의 증언에 따르면, 네루나는 책 한 권 들 힘조차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서 오메로 아르세가 병실 한 구석에서 정서해 준 초고의 교정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p 535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네루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p536 그리고 엘뤼아르와 마찬가지로 네루다에게도 공산주의는 권력이 아니었다.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p 537 그렇지만 우리가 회고록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식적인 견해 보다는 저자의 숨결과 맥박이 스며든 견해를 알고 싶고, 또 그런 견해와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온몸으로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려고 했던 한 인간의 진정성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통로이다.

=> 그러나 오늘 날 시는 죽었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 왜냐면 신이 시이기 때문에…
   구수하게 읊던 시조… 니나노 가락이 나이트 클럽의 요란하고 현란한 괴성과 고음보다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줄겁지 않는가?


내가 저자라면

역자가 써 놓은 네루다의 글귀가  마음에 닿는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경험 없이 사실이 아닌 환상을 쓰는 것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경험한 것들을 늘어 놓는 것은 더 바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어려서 모옴, 모파상, 에드가 알란 포우의 낭만주의 단편소설을 무척이나 좋아 했었다.
특히 모옴의 인물 묘사는 나에게 긴 편지를 친구에게 쓸 수 있게 해 주었고 누구라고 밝히지않아도 누가 보낸 편지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했었다.

네루다의 말대로 회고록은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글은 그렇게 그가 겪은 사실들을 미사여구가 아닌 평범한 단어로서 적나라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읽으면서  햐… 참… 을 연발하는 그의  단어들의 집합과 묘사의 적절함에 생생한 느낌과 마치 냄새라도 나는 듯한 …  나는 항상, 이렇게 많은 단어들을 단순한 문법으로 복잡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싶어했다.
미영이의 ‘혼자놀기’나  요한의 ‘그로잉’의 문장들…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하나는 완전히 객관적인 …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가 분명해지지만,  나는 논리와 형식에 갇혀서 문장은 어렵고 복잡해지고 … 장황하다.

나는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가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것들을값지게 기록해 낼 수 있다는 것… 공감이 가게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다.
나도 그처럼 어지간히 역마살이 있는지라…  그의 삶을 공감하지만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것같다. 자유란 좋은 것이지만 대신에 안전함이 결여된 무방비한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많다.

그가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기록하며 스승을 얻게 되고 사람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불행한사람들의 죽음으로부터  투쟁을 배우며 민중을 사랑하여 최후에는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의 빛’이 되는 시인이 되었다.
담백한 표현들이 주변의 세세한 묘사와 함께 잘 어우러져 독특한 문장과 스토리를 이루고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밑 줄 치기가 어렵다. 

‘식물원의 장엄한 초록 물결,온갖 모양의 나뭇잎, 서로 뒤엉킨 덩굴, 나뭇가지에서 불가사리처럼 반짝이는 난초, 심해와 같은 산림, 앵무새의 울음소리, 원승이들이 떠드는 소리, 어쩌면 이 모두가 꺼져 가는 촛불 같던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들이 책 속에 수없이 놓여있다. 작은 문장 하나 속에도 그의 스케일과 관심이 범위를 잘 알아 낼 수 있다고 본다.  삼림 속에서 바다를 보고, 난초들 속에서  희망을 보고 소리들 속에서 신의 계시를 듣는 듯한 느낌…  나는 그렇게 그를 좋아 한다. 

나도 죽게 될 때, 사랑하며 노래하고 투쟁해 왔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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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6:00:29 *.204.150.167
오빠가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건 그와 유사한 삶을, 그와 유사한 감정 상태에 놓여있어서라고 말한다면 놀랄래나?

오빠. 인용문 중간중간에 끼어넣은 오빠의 생각들이, 그 어느 저자하고 보다 동일선상에서 춤추고 있음을 느꼈어?
다만 그것이 네루다에겐 시였고, 오빠에겐 검이었을 뿐이야...

오빠야.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된다는 오빠 말, 나도 이젠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었던 그들처럼
비록 다른 과거를 지녔어도 늘 지금처럼 서로 위해주고 힘이 되어주면서 살아가자....

오빠야, 따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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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6 18:39:18 *.12.21.21
백산오라버니 자서전에도 꼭 쓰세요. '사랑하며 노래하고 투쟁했다' 고.  완전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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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0:51:24 *.40.227.17
백산 오라버니~
수희향 언니야 헌테도 야그했지만..

처음엔.. 오라버니의 말과 글.. 마음으로만 느꼈거든요?
근데여.. 지금은.. 아니.. 이미 언젠가부터는..
오라버니의 마음과 ..그 마음을 담은 말과 글이 동시에 저에게 전해져 옴을 느껴여~~~^^

사실은.. 백산 오라버니 안계실 때.. 모두가.. 인정한 건데여..
지난 오프 수업때 오라버니의 날카로운 멘트.. 모두가.. 멋졌데여~~~^^

저도 오라버니의 위대한 도약이 깨달았을 때?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깊~~~은 감동 으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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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9.06.17 13:36:54 *.94.31.27

정현,춘희,신애 //
사람의 몸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크고
사람의 기능은 반복을 먹고 자란다.
사람의 정신은...
사람의 정신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생각이 아니라 논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지식... 사랑...
나는 그렇게 이곳에서
매일  매일 자라고 있다.
emoticon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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