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혜향
  • 조회 수 2503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09년 6월 16일 07시 1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 - 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평화주의자


출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7월 12일 칠레 남부의 국경 지방에 있는 한 작은 읍, 파랄에서 철도 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그를 출산하고 나서 두 달이 지나 사망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의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리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그의 원래 이름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였고, 파블로 네루다는 어렸을 때 어떤 잡지에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여 체코인에게 존경받는 체코 작가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그의 서재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 탐독하며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청소년기

그는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보헤미안처럼 살았으며,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쓰며 지냈고,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간하여 칠레 문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듬해에는 장엄한 표현을 포기하고 소박한 표현과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추구한 연애시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perada〉(1924)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대와 30대 어른이 되어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1927년 네루다는 유럽을 꿈꾸며 외교관이 되었는데, 미얀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안토니타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네루다는 그녀를 마루까라는 스페인식 이름으로 불렀고, “예술과 문학의 세계에는 완전 문외한인, 키가 크고 온화한 여자”로 묘사했다. 아시아에서 네루다는 실존적 고뇌와 우수를 담은 <지상의 거처>를 썼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시인이자 친구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고, 네루다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회의식으로 충정된 개성적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멕시코 주재 칠레 영사를 지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 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자신보다 스무 살 연상의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하였으며 지적이었으면서도 다정했던 그녀는, 네루다에게 연인이면서 엄마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투적인 공산주의자였던 그녀는 네루다의 정치적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년 이후

1945년 노동자들의 폭넓은 지지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곧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1947년, 칠레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 강자 곤잘레스 비델라가 들어서면서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곤잘레스 비델라의 탄압으로 도피와 망명길에 오르지만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때 위대한 서사시 <모두의 노래>를 탈고했다. 네루다에게 시는 민중과 ‘소통의 통로’였고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민중시인이라는 별칭은 네루다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 되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1953년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하고, 다음 해에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다 .


그는 1953년 이후 계속 산티아고 인근 해안에 있는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고, 그 후 발파라이소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 차스꼬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 세바스띠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1970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네루다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 선거 운동에 열을 올렸고,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1971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프랑스 대사직을 사임, 귀국하여 산티아고 국립 운동장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73년 네루다가 지지했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10여일 후인 9월 23일 그는 산티아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시골 소년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17)


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20)


나이가 들면서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버팔로 빌의 무용담이나 살가리의 모험담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꿈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24)


학교 친구들은 내게 시인의 기질이 있다는 걸 몰랐고, 또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24)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25)


테무코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해안 지방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성장했고 책을 읽었고 사랑에 빠졌고 또 글을 썼다. (32)


해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 영혼, 바꿔 말해서 내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도 내 삶 속에 남아 있다. (33)


나는 삶과 책을 통해 조금씩 흥미진진한 신비의 세계로 나아갔다. 전날 저녁에 읽은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 (35)


언제 처음으로 시를 썼는가? 난생처음 시심에 사로잡힌 때는 언제인가?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겠다. 아주 오래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레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36)


어쨌거나 나는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독한 항해사처럼 서적이라는 강줄기를 따라 좌충우돌하며너 전진했다. 내 독서열은 밤이나 낮이나 식을 줄을 몰랐다. (37)


그 여자들에게 식탁이란 신성한 문화유산의 보존이었다. 세월이 가로막고 거대한 바다가 가로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프랑스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43)


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있다. 죽음과 망각 (44)


2. 도시의 방랑자

삶,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52)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56)


주변을 밝게 만들고 마치 숨겨둔 나비를 날려 보내듯이 가는 곳마다 아름다움을 날려 보내던 로하스 히메네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 (63)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하며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66)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파시즘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방법이란 책을 통해 임박한 위험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70)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내 시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더니만 이제는 나를 공격하고, 내 눈을 빼먹으려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내 침묵을 받을 만한 가치는 있다. 나는 적들과 다니면서 내 자신이 오염될까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오직 민중의 적만이 내 적이기 때문이다. (72)


잔혹한 수줍음에 시달리던 나는 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76)


첫 시집! “작가와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깍은 목각품이다.” 그러나 어떤 장인도 시인처럼 자신의 손으로 처음 창조한 대상에서 이러한 도취의 감정이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운 책이 되고, 시인의 언어는 향기를 품고 노래하는 포도주처럼 다른 언어라는 술잔에 옮겨져 지구 곳곳을 누비겠지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77/78)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8)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3)


나는 말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나는 말을 사랑하고 말에 집착하고 말을 추적하고 말을 물어뜯고 말을 용해시킵니다. 그토록 말을 사랑합니다. 예기치 못한 말을 사랑합니다. 풀썩 쓰러질 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말을 사랑합니다. (84)


3. 세계의 길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 있는 공포의 꽃잎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웅이다.. 항구의 기억 속에 천재지변, 흔들리는 땅의 전율,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표효소리가, 마치 바다 밑 도시나 땅 밑 도시가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리며 인간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알려 주는 듯한 소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94)


계단!

어떤 도시도 발파라이소처럼 계단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는다. 어떤 도시도 자기 얼굴에 이처럼 고랑을 파 놓지 않는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내려가는 듯이 삶이 오가는 계단! 중간에 자주색 엉겅퀴 꽃이 피어 있는 계단! 아시아에서 돌아온 선원이 텅 빈 집이나 화목한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 술 취한 사람이 검은 유성처럼 떨어지는 계단! 태양이 언덕과 정사를 나누기 위해서 오르는 계단!

발파라이소의 계단을 전부 돌아다니면 세계를 한 바퀴 돈 셈이 된다. (96)


나는 다만 종소리와 굽이치는 기복과 이름을 따라갈 뿐이다. 특히 이름을 따라간다. 이름에는 큰 뿌리와 잔뿌리가 있고, 공기와 기름기가 있고, 역사와 오페라가 있으며, 그 음절에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100)


4. 빛나는 고독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7)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속이 텅 비고 온 몸이 나른해졌다.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이를테면, 팔꿈치나 목을 움직인다든지 멀리서 들려오는 마차 소리, 경적 소리, 길거리 사람들의 목소리라든지) 한데 어우러져 느긋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137)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2)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는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149)


5. 가슴속의 스페인

시란 정태적인 물건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시를 창작한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시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로 형성됩니다. …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188)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비밀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데도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193)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 (210)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210)


알베르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장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린 붉은 장미처럼 공고라의 눈송이, 호르헤 만리케의 뿌리,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꽃잎, 구스타보 아돌표 베케르의 서러운 향기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 시의 정수가 알베르티의 시라는 크리스털 잔에 녹아 있는 것이다. (211)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 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4)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215)


마침내 우리는 위니펙 호에 승선했다. 모두 배에 승선했다. 그들은 어부, 농부, 노동자, 지식인들로서 힘과 영웅심과 노동의 표본이었다. 나의 시는 투쟁을 통해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주는  데 성공했다. 한 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226)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 했다. (228)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 (229)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멕시코, 백년초와 뱀의 땅, 꽃과 가시의 땅이자 가뭄과 폭풍우의 땅이며, 강렬한 그림과 색채의 땅이자 격렬한 분출과 창조의 땅인 멕시코는 마술적인 분위기와 눈부신 햇살로 나를 감싸 안았다. (231)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문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뒤 체코슬로바키아에 갔을 때, 구레나루을 기른 네루다 동상 앞에 꽃 한송이를 바쳤다. (245)


역사는 정복자들이나 정복을 향유하는 자들이 쓴다. (251)


멕시코는 지금도 내 몸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독수리처럼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환한다. 이 독수리는 내가 죽은 다음에야 심장 위에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 (254)


8. 암담한 조국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255)

나는 돌로 만든 세계의 배꼽,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도 속해 있는 세계의 배꼽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나 자신이 초라한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득한 옛날 내가 여기에 살면서 밭이랑을 갈고 돌을 다듬은 것만 같았다. (256)


시 덕분에 고단한 삶을 사는 동포들과 한데 어울릴 수 있었고, 그들은 나를 둘도 없는 형제처럼 받아 주었다. (257)


강가에 펼쳐진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 풍경이 말을 걸어 온다. 그러나 사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나는 사막의 언어, 다시 말해서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259)


내 시와 삶은 아메리카 대륙의 강처럼 흘러 갔다. 남반구의 깊은 산속에서 발원하여 쉼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칠레의 거친 물살처럼, 내 시는 그 물살에 떠낼가는 어느 것 하나도 배척하지 않았다.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었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 많은 상(償)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263)


"기자 양반. 이렇게 쓰세요. 나는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다른 칠레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쓰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이름 또한 파블로 네루다라고요." (286)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 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 주며, 식물 왕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 (291)


9. 망명의 시작과 끝

"나는 시의 미래를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나짐 히크메트- (297)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시 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300)


내 삶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한쪽에서는 몽둥이로 패고, 다른 쪽에서는 진정하라며 꽃다발을 건네준다. (303)


10. 여행과 귀환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341)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바위 꼭대기에는 신선의 도포 자락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동양화의 거장들이 즐겨 그린 그림이고 날아가는 새였다. 심오한 시는 이런 장엄한 자연에서 흘러나온다. 새의 날갯짓 같고, 고여 있는 듯이 흐르는 시냇물의 반짝거림 같은 간결하고 투명한 시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349)


11. 시는 직업이다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독했다. (377)


시는 이미 독자와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6)


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 당겨 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 또한 예상 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7)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데, 이것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1)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2)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삐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393)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을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394)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성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서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 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는 자신의 시를 방어하기 위해 일반 대중이 부여한 자격을 등에 업었다.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해야 한다. (395)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395)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휙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 그리고 감정이라는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396)


신비한 영감이라든가 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은 불손한 의도를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순간에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압력이나 이전의 독서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얼마간은 타인의 것이다. (396)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399)


시의 분자란, 꽃가루처럼 가볍든 납덩이처럼 무겁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다가 밭고랑이나 사람 머리 위에 떨어진다. 이러한 씨앗들이 봄기운을 만나면 꽃이 되고, 천장에서는 탄환이 된다. (435)


시의 영예란 거리에 나가서 이런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파괴 분자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았다. 생명은 모든 구조를 초월하며, 영혼은 새로운 규범을 찾는다. 씨앗은 도처에서 싹을 틔우며, 모든 생각은 이국적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며, 인간 질서의 변혁을 열렬하게 고대한다. 봄은 반역이다. (436)


나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436)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495)


나는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으나,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작품으로 풀어 놓을 것이다. (496)


단 1분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다. (496)



3. 내가 저자라면


자서전은 자신의 생애를 기술한 것으로, 저자가 자기 자신보다도 그가 살아 온 환경이나 시대에 보다 중점을 두었을 때에는 회고록이 된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이 책은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태어날 때부터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그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인물을 회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그의 인생을, 그의 삶을 기술한 기록이다.


평온한 유년기로부터 시작해서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청년 시절과 동남아시아에서 보낸 영사 시절을 거쳐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이념적 갈등, 칠레의 1970년대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를 감동하게 하고 그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사건의 기록이면서 이와 더불어 시의 창작과 비평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가르시아 로르카, 피카소, 에렌부르크, 네루, 엘뤼아르, 카스트로, 체 게바라, 아옌데 등 여러 인물에 대한 단상을 풍부한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로 엮어 내고 있다.


네루다. 그의 자연 이야기

네루다를 끊임없이 노래하게 만든 영감의 원천은 바로 대자연이었다. 산과 숲, 벌판과 꽃, 식물과 동물, 하늘과 땅, 비와 바람이었다. 그는 훗날 초기 유년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등장인물은 바로 ‘비‘라고 말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17P)


"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껍질이 딱딱하고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대형 딱정벌레,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20P)


그는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25P)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시에서는 물론이고, 끈끈한 고독이 문어나는 시, 분노와 함성이 메아리치는 시,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의 소박한 정취를 노래한, 네루다의 시의 행로는 그가 유년기를 보낸 테무코와 그곳이 상징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그는 테무코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해안 지방의 임페리알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성장했고, 책을 읽었으며, 영혼의 교류, 즉 자신의 시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땅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시작된 교류, 그때 얻은 깨달음, 그때 땅과 맺은 약속이 그의 삶 속에 남아 순결한 자연과 대지에 대한 사랑을 역사와 인류 보편에 대한 광대한 전망으로 확대시켰다.


네루다. 그의 사람 이야기

네루다는 타고난 보헤미안으로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쉼없이 세상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기질은 하룻밤의 풋사랑으로 시작해서 두 번째 부인에 대한 영육의 사랑을 거쳐, 세 번째 부인에 대한 만년의 정신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여인의 향기를 쫓아다닌 이성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자신의 삶을 ‘모든 삶들로 이루어진 삶’으로 이해하고 <모두의 노래>를 불렀던 그 답게 가르시아 로르카, 사르트르, 미스트랄, 보르헤스, 바예호, 엘뤼아르, 아라공, 에렌부르크, 아스뚜리아스,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등 20세기를 풍미했던 작가, 예술가들은 물론 체게바라, 마오저뚱, 카스트로, 스탈린, 히틀러, 프랑코, 트로츠키, 아옌데 등 수많은 정치적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네루다라는 창을 통해 당대 20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인물을 회고하는 역사의 지형도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루다가 특별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민중‘,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족으로 방향을 전환한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 것 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우리 시인들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단, 우리가 민중과 강고한 유대를 맺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단서가 붙을 때만.” (391P)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비참한 공장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사회와 인간에 눈을 뜬 네루다는 한평생 사회적 약자들, 버려진 영혼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노래하고 투쟁했다.


네루다. 그의 시 이야기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내 인생은 시인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라고 했다.

네루다에게 시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고 한다.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서사시로 불리는 <모두의 노래>는 그가 반역죄인으로 몰려 지하에 숨어 살고 경찰에 쫓기는 14년 동안 쓰여졌다. 340편의 시가 담겨 있는 이 시집은 하나의 남미 지리, 생물, 정치사로 ‘모두의 노래’라는 제목은 어떤 특별한 주제에 한정된 시나 별난 종류의 시에 한정되기를 거부하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시는 그것이 노래하는 사물의 핵심에 이르지 않는 법이 없었으며 그 상상력의 풍부함도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지상의 거처>가 서구의 언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초현실주의 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그 표현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자연 환경, 열광하고 감동 잘 하는 그의 타고난 체질이 평생 그의 시를 관류하면서 세계의 상실과 파괴에 대한 꿈을 유감없이 실현했기 때문이다.


시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관철시키고 불의에 맞서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여긴 네루다의 혁명정신과 순결한 자연과 대지에 대한 사랑을 역사와 인류 보편에 대한 광대한 전망으로 확대시킬 줄 알았던 네루다는 시와 풍토, 혁명의 융합을 이루어낸 탁월한 시인이었다.  


네루다. 그의 인생 이야기

그의 삶의 이야기는 경이롭다. 네루다는 단지 한 사람의 시인, 외교관,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포도주(칠레산), 여자, 그리고 노래를 뜨겁게 사랑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마드리드에서는 용기있게 공화파를 지지하다 외교관직을 박탈당했고, 2000명의 공화파 난민들을 낡은 어선 위니펙 호에 실어 수송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조국의 압제자를 피해 은신하던 세월과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죽음을 무릅쓰고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권의 책으로 엮기에 충분하다.  


칠레의 숲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16P)


이 책은 칠레 남부 테무코의 자연 속에서 시인의 꿈을 키웠던 유년기부터 보헤미안적 삶에 탐닉했던 산티아고 학창시절, 외교관으로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을 유목하던 시절, 그리고 안데스를 넘어 망명길에 올랐던 시절을 거쳐 이슬라 네그라에서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파란만장한 네루다의 삶의 행로를 쫓는다. 또 열정과 고뇌에 물든 에로티시즘, 세계의 상실과 파괴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직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노래하는 시인의 창작 여정을 따라간다. 시인의 다채로운 면모를 오롯이 되살려내려는 미덕과 네루다의 삶에 대한 열정이 그의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그야말로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한 네루다, 한 사람의 인생, 삶의 모든 여정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네루다의 이야기는 나(우리)와 그가 살았던 세상을 연결해주는 끈이고,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 그의 존재를, 그의 진정성을 알리는 기념비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IP *.40.227.17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9.06.16 12:57:10 *.160.33.149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면 너의 몫은 무엇이냐, 불확아 ?
프로필 이미지
2009.06.16 21:51:30 *.40.227.17
욕심이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버려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기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뜨거운 무언가가  화~악 (헤헤) ..
이건  저도 어쩔 수 없어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욕심이 남은 것인지.. 인연의 끈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부님~ 이제는 조금 부드럽게 살고 시퍼여~ 
나와 싸우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며.. 가끔씩 몬허는 노래도 부르고.. ㅋㅋ
열씨미 일하며.. 음..음.. 뭐라 하시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잠자는? 불을 피우게 하고.. 또 잘 다스리도록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시퍼여~ ^^
프로필 이미지
정야
2009.06.16 18:36:05 *.12.21.21
라틴 아메리카에 태어나 아시아와 유럽에 기거하기도 하고 여행하기도 하며 산 그의 유랑적인 삶을
사랑하는 여자를 바꾸는 것과 대비시킨 내용이 재밌네.ㅋㅋ 남자는 나비인거야. 그래서 그런걸 거야.^^
프로필 이미지
2009.06.16 20:02:01 *.204.150.167
혜향아 니 리뷰 구성 정~~~말 좋아졌다.
인쟈 사부님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될 것 같당.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12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1] 예원 2009.06.21 3017
1911 [11] <파블로 네루다>- 인용문 [2] 수희향 2009.06.16 3000
1910 [11] <파블로 네루다>-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6] 수희향 2009.06.16 2672
1909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2] 김홍영 2009.06.16 3061
1908 [10]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5] 정야 2009.06.16 2689
1907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3] 숙인 2009.06.16 3202
1906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6] 혁산 2009.06.16 2753
1905 [1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박병규역. 민음사 [2] 범해 좌경숙 2009.06.16 37584
1904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5] 희산 2009.06.16 2319
»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4] 혜향 2009.06.16 2503
1902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4] 백산 2009.06.16 2705
190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書元 이승호 2009.06.15 2898
1900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면 [3] 書元 이승호 2009.06.15 2672
1899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2] 예원 2009.06.15 2452
1898 [10] <백범일지>- 인용문 수희향 2009.06.08 3109
1897 [10] <백범일지>-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3] 수희향 2009.06.08 2599
1896 백범일지 [2] 백산 2009.06.08 2463
1895 백범일지 [1] 혜향 2009.06.08 2406
1894 백범일지 숙인 2009.06.08 2365
1893 [10] 백범일지. 백범저. 도진순 주해. [3] 범해 좌경숙 2009.06.08 2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