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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6일 11시 09분 등록

저자에 대해서

 

시를 벗겨보면 현실만 남을 것이요, 현실을 벗겨보면 시만 남을 것이다. – 정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과 시는 서로 닮아 있고 땔 수 없는 관계인 듯 하다.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시인은 현실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04년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의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는다. 그의 아버지는 재혼을 하였는데, 그이 계모는 친어머니 이상으로 네루다를 사랑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1910년 그는 테무고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0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나이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산티아고르에서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불문학 학위보단 시를 쓰는데 집착하였다. 그의 첫 시집 <황혼의 일기>는 사랑과 자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24년에 발표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로 칠레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평생 동안 그의 삶을 관통할 일관된 주제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랑이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 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로 하여금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5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랭군,실론,자바,싱카포르등으로 옮겨다니며 다양한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랭군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과정을 거쳐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아고 발령받으며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오게 되는데 이 곳을 방문중이던 페데리코 로르카라는 스페인 시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역사적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에 빠져 있었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인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게 처형된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은 네루다로 하여금 낭만적이고 나르시즘적인 정성에서 벗어나 냉전과 비극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었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의 허울을 벗어 던져 버리고 과감하게 현실세계에 들어섰다.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로 칠레로 돌아 왔으나 정부는 그를 맥시코로 보냈다. 그는 이 곳에서 왕성한 민중시인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며 1943년 다시 칠레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귀국 즉시 칠레공산단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공산당입당은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꿈때문이었다. 모두가 다 잘 사는 유토피아의 꿈은 그가 민중시인으로서의 자세를 말해준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게 된다. 이 때 칠레정부는 공산당을 탄합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잠입하게 되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총가요집>을 발표하며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

 

그는 1948년 칠레를 떠나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시를 써왔다.

1969 12월에 칠레의 진보세력들은 인민연합의 기치아래 하나로 뭉쳐 선거에 의해 선출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된 새로운 정권은 칠레군부의 쿠테타로 전복되게 된다.

어렵게 수립된 정권이 쿠테타에 무너지는 소식을 접한 네루다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고 만다. 그는 가택을 급습한 쿠테타 군인들의 위협에 맞서 이런 말을 한다.

이 방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에,”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시라네

그리고 그는 삶을 마감하였다.

 

 

 

내가 저자라면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사랑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 이었다.-본문

 

이 책의 저자 파블로 네루다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벗어던지고 절박한 현실세계에 뛰어든 시인이다. 그 현실세계의 경험을 토대로 기억나는 부분들을 회고하며 기록한 자서전이기에 잘 짜여진 전기와는 다른 스토리를 읽어볼 수 있다. 그 생생한 현실속에서의 투쟁의 역사는 시간속에서 또렷한 기억의 회상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현실세계에서 민중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은밀하게 타오르는 저 불길에 타 죽고 싶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우물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불이든 물이든 간에 나 자신을 그녀에게 던질 용기는 없었다.”고 할만큼 낭만적이면서 지독한 수줍음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었다”라고 하며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발표하였는데 전세계의 연인들을 매혹시킨 낭만시인으로서 존재하였으나 스페인 내전과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은 그의 시에게 새로운 시대적 역할을 부여하였다. 바로 그의 시가 향한 곳은 민중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외교관으로서 때론 망명자로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들속에서 그런 이데올로기를 겪였고, 평화주의자로서 민중의 평화를 위해 힘써오기도 했던 복잡한 지성과 고뇌의 시대를 살아왔다. 이 시대에서 그는 민중을 향했고, 양심을 따랐다.

 

친구 로르카의 죽음 그리고 그가 노래한 평화적인 투쟁의 행위는 네루다를 훨씬 강하게 성숙시켰다. 초기의 수즙음과 우수에 찬 주관주의적인 그이 시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유와 가치있는 삶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을 통해 역사적이면서 지리적인 또한 그안의 민중의 갈등을 대변하는 민중시인으로서 변모하게 되었다.

 

그가 본 광부들의 얼굴은 사막을 닮았다. 그는 사막에서 산악지대로 올라가고, 가난한 집을 방문하고, 등골이 휘어지게 일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 그것을 알려야 한다는 자성을 깨우치며 시로 그들의 삶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우리들은 정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꺽을 수 없다”라고 한 것처럼 전 인류의 평화를 시를 통해 외친다.

 

이런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상이라는 것은 무의미한것일지 몰라도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상의 의미는 이렇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그들은 광부에게 노동자에게 패배자에게 아픔과 함께 하였다. “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고독을 나누고, 고독을 알렸던 것이다.

 

네루다는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노벨 문학상에 더해 노벨 평화상을 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문학보단 현실이었고, 문학에게 리얼리티는 이런것이다! 라고 화두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빨보단 글의 내용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의 자서전은 그래서 아직도 살아있나 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이 책에 수록된 회고랄까 추억은 듬성등섬하다. 간혹 잊어버린 일도 있다. 바로 그런 게 인생이다. 우리는 듬성 등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14]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 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

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17]

 

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뱀 어미’라고 부르는 딱정벌레였다. ‘뱀 어미’란 칠레에서 가장 큰 곤충으로 껍질이 딱딱하고 검은 색 윤기가 흐르는 대형 딱정벌레인데 너무 터무니 없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마키 나무나 야생 사과나무나 코피우에 나무에 붙어 있는 이 곤충과 마주치면 단단하기 때문에 발로 밟아도 끄떡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훌륭한 방패를 지닌 ‘뱀어미’에게 독은 필요한 무기다.[20]

 

우리 집은 임시 숙소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탐험 회사 같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서면 술통, 연장, 마구 등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항상 공사 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 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의 대학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21]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신부 이름은 트리니다드 칸디아 마르베르데. 내 계모이다. 유년기 내 수호천사였는데 이제 와서 마뜩찮다. 아무튼 새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시골 사람 특유의 유머 감각도 있었고 또 언제 봐도 상냥했다. 아버지가 귀가하면 당시 그 지역 여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조용한 그림자로 변했다.[22]

 

나이가 들면서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버팔로 빌의 무용담이나 살가리의 모험담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꿈의 세계로 확장되었다.[24]

 

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25]

 

어디선가 애절하게 들리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신비로운 바다를 향해 산자락을

끼고 미지의 넓은 강을 항해하는 것보다 더 열다섯 살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

었다. [29]

 

난생 처음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바다는 커다란 일케 언덕과 마울레 언덕 사이에서 한참 격노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수미터 상공으로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고 우주가 박동하는 듯 울부짖고 있었다.[30]

 

어느 날 백조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었다. 내 근처를 떠나지 않는 백조에게 물고기를 잡아 보라고 별짓을 다했건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 조용하게 있었다. 나는 집으로 데려가려고 백조를 안았다. 그 순간 리본이 풀어지는 느낌, 검은색 팔이 내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백조의 긴 목이 축 처진 것이다. 그때 백조는 죽을 때 노래하지는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4]

 

미스트랄은 세계문학에서 러시아 소설만큼 뛰어난 작품도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러시아 소설가들의 암울하고 섬뜩한 비전을 접하게 되었고 톨스토이, 도스프예프스키, 체호프의 작품을 애독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작가들을 좋아한다.[37]

 

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있다. 죽음의 망각. 어쩌면 밀림이 세 자매의 생명과 그날 밤 나를 반겨 준 그 집을 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치 꿈이라는 투명한 호수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듯 하다. 고독하고 거친 삶 속에서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도 없이 옛날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던 우수에 찬 세 자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여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접근하기도 힘든 산중에서 조상이 일군 우아한 문화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었다.[44]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꽃처험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46]

 

이번 모험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취 집 주인 여자는 몇 다리를 건너면 고향과 연줄이 닿았기 때문에 동정심에서 가끔식 감자나 양파를 갖다 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52]

 

그 무렵 우연히 어떤 과부와 친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은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푸른 눈에 애잔한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젊은 소설가 였는데 체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환상적인 부부였다. 여자는 밀밭 같은 금발머리, 흠잡을 데 없는 몸매, 짙푸른 눈동자를 자랑하는 미인이었고, 남자는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분마성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야 금발의 아내 또한 분마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 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54]

 

그녀의 부르짖음은 갈수록 다급해졌으며 화톳불처럼 타오르는 가슴은 점점 내 기력을 쇠진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과도한 분량의 사랑은 배를 곯는 사람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영양실조현상이 나날이 극심해지고 있었다.[55]

 

수즙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사람이 두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56]

 

테무코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역 근처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곤살레스 베라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열여섯 살 시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창백한 사람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깡마른 얼굴은 뼈나 상아로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 끝이나 바지 자락 끝이 다 헤진 옷이었다. 그런데도 멋쟁이로 보였다. 그의 말은 첫마디부터 아이러니와 날카로움이 묻어 났다.[62]

 

몇 년 뒤 칠레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겨울, 로하스 히메네스는 죽었다. 평상시처럼 양복 상의는 산티아고 시내 어느 술집에 벗어 두고 그 추운 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킨타 노르말에 있는 여동생 로시타 집까지 걸어갔다. 이틀 뒤, 기관지 폐렴으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만나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종이학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로 날아갔다.[64].

 

로하스 히메네스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것인데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66]

 

게바라는 어느 안개 낀 추운 겨울날 밤 자기 집에서 체포되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팔에 문신을 새기고 포로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지옥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을 때는 해골 같았다.[71]

 

나라는 사람은 너무나 단순하다. 이것이 내 장점이자 약점이다. 친구들의 장난기에 덩달아 합세했고, 또 화려한 옷차림, 못된 짓, 종이학, 소까지 부러워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도 문학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72]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말했다. “ 비현실의 경계를 탐험하는 우리들에게 자비를 내리소서내가 지금 이 말을 인용하는 까닭은 앞에서 이야기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인이라고 해서 사랑을 덜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72]

 

우리 시인들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사업 수완도 뛰어난데 다만 이런 찬재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73]

 

잔혹한 수줍음에 시달리던 나는 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76]

 

첫 시집!”작가의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

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깍은 목감품이다. 77]

 

한참 앞뒤 없이 살던 그 시절, 우리는 항상 갑자기, 항상 새벽에, 항상 밤을 꼬박 새웠을 때, 항상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을 때, 삼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스무 살 남짓한 시인이자 화가인 우리들은 어떻게든 발산시키고 폭발시켜야 할 객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87]

 

이 도시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웅이다. 항구의 기억 속에 천재지변, 흔들리는 땅의 전율,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포효 소리가, 마치 바다 밑 도시나 땅 밑 도시가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리며 인간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알려 주는 듯한 소리가 각인되었기 때문이다.[94]

 

나는 다만 종소리와 굽이치는 기복과 이름을 따라갈 뿐이다. 특히 이름을 따라간다. 이름에는 큰 뿌리와 잔뿌리가 있고, 공기와 기름기가 있고, 역사와 오페라가 있으며, 그 음절에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100]

 

인도 전역에서 만난 이 젊은 시인들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방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다른 날 다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비참한 현실과 억압적인 신을 뒤엎으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실상이다. 이 시대는 보편성을 지닌 시의 황금기다.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123]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127]

 

이 피로 물든 땅에 누운 와불은 누구에게 저렇게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도망치는 시골 여자들, 전호에 휩싸인 남자들, 복면을 두른 게릴라들, 가짜 승려들, 탐욕스러운 관광객들이었다. 지금도 거대한 불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밀림에 사는 검은 새의 울음소리와 붉은 새의 날갯짓 아래에서 물결치는 가사 주름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시선으로, 완전히 비인간적인 어떤 형태로든 인간적이고, 신이면서도 신이 아니고, 돌이면서 돌이 아닌 모순된 형상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129]

 

실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야수와 같은 물질적 욕구에 시달리고, 식민 지배는 철저한 굴종을 강요하고 매일같이 수천명이 콜레라, 청연두, 열병, 기아로 죽어 나가고, 거대한 인구와 빈약한 산업으로 혼란에 빠진 봉건적인 제도가 잔혹하게 삶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적인 명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131]

 

그녀의 눈만 봐도 아픈 사람 같았다. 이 아가씨는 파워스를 신, 즉 생불이라고 믿었다. 종교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132]

 

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137]

 

그 이후 다시는 아편굴을 찾지 않았다. 이제 아편이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연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손에 쥘 수 없는 그 무엇을 만져 보았다.[138]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전에,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다.[142]

 

이런 고독은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고독이 아니라 감옥의 벽처럼 단단한 고독이었다. 아무리 벽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아무리 울어도 달려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142]

 

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과 방대한 아시아 세계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결코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143]

 

이처럼 허공에 뜬 내 삶의 이야기가 이 시집에선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표현되었다. 잉크보다는 피를 가까이하라라는 말이 바로 이런게 아니겠는가.[149]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떄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149]

 

내 몸은 열대 해변에서 밤낮으로 타오르는 외로운 모닥불이었다. 친구 팻시가 여자들을 데리고 종종 찾아왔다. 보어인, 영국인, 드라비다 족의 거무튀티한 여자와 황금빛 여자들이었다. 이런 여자들은 스포츠를 즐기듯 거리낌 없이 나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152]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 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뒤 체코 슬로바키아에 갔을 때, 구렛나룻을 기른 네루다 동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쳤다.[244]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262]

 

주지하듯이,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296]

 

지난 5년 동안 중국의 섬유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여성들은 온갖 색상의 꽃무늬, 줄무늬, 물방울 무늬와 갖가지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남자들도 다양한 색상이의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다.[349]

 

맥을 보았을 때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예레반 동물원을 포함하여 극소수의 동물원만이 맥을 사육하고 있었다. 맥은 몸집은 황소 같고 코는 길고 눈은 조그마한 아마존 원산의 기이한 동물로, 솔직하게 말해서 나와 무척이나 닮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므로 숨길 이유도 없다.[362]

 

시는 이미 독자와 관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 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임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386]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387]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388]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391]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준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392]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비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393]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395]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406]

 

나는 겨드랑이 밑에 이론을 끼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 위에 쏟아 부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이 월요일은 무엇이나 밝게 보이고, 화요일은 무엇이나 어둡게 보이는 사람이다. 올해는 명암이 엇갈리는 해다. 내년부터는 푸른색이 될 것이다.[420]

 

세월이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병이 좀 더 잦아지고 친구들이 수감되었다가 출감하기도 하고 유럽을 다녀오기도 하며 그냥 죽기도 한다.[441]

 

날이 저물 때라 웅장한 황혼이 나를 반겼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이 구름을 헤집어 놓고 있었고,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하늘이 대지와 하늘 사이에 걸린 커다란 구름 덩어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목초지는 거센 남극 바람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저만큼 세로 카스티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날카로운 봉우리는 고딕식 첨탑 같고, 자연이 만든 화강암 성가퀴 같았다. 아이센 지방의 산맥은 제멋대로였다. 공처럼 둥그스름하거나 탁자처럼 평평하게 솟구친 모습은 마치 눈으로 만든 삼각형과 사각형을 늘어놓는 듯했다. 하늘은 고운 비단과 금속을 석양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노란색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순순한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새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 고래 입이 되었다가 사나운 표범이 되었다가 끝내는 추상화가 되었다.[458]

 

나도 동지들만큼 순박하고, 동지들만큼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기를 소원한다. 겸손에서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안주하여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만심에서는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다.[474]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던가 기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495]

 

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 죽기 바로 전날 네루가를 찾아간 변호사 피게로아의 증언에 따르면, 네루나는 책 한 권 들 힘조차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서 오메로 아르세가 병실 한 구석에서 정서해 준 초고의 교정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534]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네루다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535]

 

그렇지만 우리가 회고록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식적인 견해 보다는 저자의 숨결과 맥박이 스며든 견해를 알고 싶고, 또 그런 견해와 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온몸으로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려고 했던 한 인간의 진정성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통로이다.[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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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6:13:51 *.204.150.167
그대가 느낀 것이 이 책의 주제이자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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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06.16 22:38:14 *.41.197.214
아 내가 느낀것이 뭐지? ^^  5기와 시처럼 살기!
5기 북리뷰를 읽어봐야 하는데 손도 못대고 있어요.
이거이 걱정이네.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에 내가 찐쩡 싸랑하는 써울 씨스터즈가 다 모였네요.
ㅎㅎ 위문공연인가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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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6 18:10:20 *.12.21.21
'시를 벗겨보면 현실만 남을 것이요, 현실을 벗겨 보면 시만 남을 것이다.' 라는 명제를 되씹어 보게 되네.
시를 덧씌울 생각만 했던 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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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06.16 22:40:38 *.41.197.214
네루다는 민중의 아픔을 위해 시를 썼다면
누나는 민중의 아름다움을 위해 시를 쓰면 되죠.
그리고 전 누나를 위해 동영상을 만들고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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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0:17:08 *.40.227.17

ㅋㅋㅋ 글빨? 보다? .. 그려그려.. 과연 레오나르 정? 답다~^^

글구.. 철아~ 네가 네루다에게 주고 싶다는 노벨 평화상..
이왕이믄.. 던져주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살포시 앵겨 주믄.. 안되는감?ㅎㅎ
기래도 세계 평화를 위한 아주 좋은 상인거 같은데.. 문학상도 아니고.. 더구나.. 평화상?인데..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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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06.16 22:43:18 *.41.197.214
ㅎㅎ 글 보고 바로 수정했습니다.
던져주다 > 주다
워낙 급하게 올린 글이라 모든 글들이 던져지듯이 써져서
노벨상까정 던져버린거죠. ㅎㅎ
그라고 누님 나중에 동영상 살포시 안겨드릴께요. ^^

이번주 급한 업무 하고 천천히 댓글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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