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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6일 11시 1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Pablo Neruda
본명은 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 수상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ña en el corazó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참고 자료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2. 내가 저자라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어떤 문장이 나올까?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한 바 있는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그는 온 생애는 사랑과 노래(시)와 투쟁의 역사였다
남미에서 태어나 아시아로 유럽으로 방랑자와 같이 젊은 시절을 떠돌아다닌 네루다는 그 과정에서 사랑을 배웠고 시를 노래했으며 옳은 가치, 믿는 정의를 위해 투쟁했다

노래하는 투사, 투쟁하는 시인 이 반의적인 단어의 조합은 네루다의 모습 그 자체이다
나의 삶을 하나의 문장으로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르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었다

네루다의 자서전은 기존에 읽던 자서전과 그 느낌이 매우 달랐다
그의 글은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범인의 일기도 아니었고 역사의 흐름에 온 몸을 내던진 영웅의 포효도 아니었다

일기보다 한없이 개인적이고, 시보다 한없이 아름다우며, 위인전보다 한없이 뜨거운 그 무엇이었다
그의 글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겪은 한 시인의 아름다운 서사시였다
'시인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친 삶은 이렇게 표현이 되는구나'라는 느낌은 내게는 꽤 신선했다

체 게바라의 너무나 잘 알려진 다음의 명언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의 다음의 명언은 글을 쓰려는 많은 이들의 생각의 틀을 새로이 해준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현실과의 연결이 없는 글은 나와 연결이 안되는 세상 만큼이나 공허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네루다는 그의 삶을 통해 내게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3. 내 마음의 글귀

[14]우리는 듬성등성 꿈을 꾸기 때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21]우리 집은 임시 숙소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탐험 회사 같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서면 술통, 연장, 마구 등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항상 공사 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 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의 대학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2]아버지는 재혼하셨다. 신부 이름은 트리니다드 칸디아 마르베르데. 내 계모이다. 유년기 내 수호천사였는데 이제 와서 마뜩찮다. 아무튼 새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시골 사람 특유의 유머 감각도 있었고 또 언제 봐도 상냥했다. 아버지가 귀가하면 당시 그 지역 여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조용한 그림자로 변했다.

[25]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29]우리가 묵을 집에서, 아니 그 전부터, 그러니까 낡은 부두에 정박한 작은 증기선에서 내렸을 때부터 묵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바다였다. 파도가 몸 안으로 밀려왔다.

[30]난생처음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바다는 커다란 일케 언덕과 마울레 언덕 사이에서 한참 격노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수미터 상공으로 치솟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고 우주가 박동하는 듯 울부짖고 있었다.

[31] 내 관심사는 오로지 석양 무렵 대문을 박차고 나와 마을을 빠져나가는 커다란 말이었다.

[35] 광활하고 무서운 개척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소년 시인은 무척이나 고독했다

[37] 그 사람은 내 독서열에 깜짝 놀랐다. 나는 타조처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어 삼켰다.

[40] 나는 고뇌하는 영혼처럼 좁은 길을 따라 갔다. 방금 깎은 손톱 같은 하얀 초승달이 떠올랐다.

[44]가장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있다. 죽음의 망각. 어쩌면 밀림이 세 자매의 생명과 그날 밤 나를 반겨 준 그 집을 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치 꿈이라는 투명한 호수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듯 하다.

[49]내가 ‘겉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머릿속이 온통 책과 꿈 그리고 벌 떼처럼 윙윙거리는 시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52]이번 모험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 사랑, 명성, 자유가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54]그 무렵 우연히 어떤 과부와 친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은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푸른 눈에 애잔한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젊은 소설가 였는데 체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환상적인 부부였다.

[56] 여자들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고 얼굴이 빨개졌기 때문에 못 본 척. 관심 없는 척 그냥 지나쳤다. 그렇다고 정말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여자는 아주 신비한 존재였다. 은밀하게 타오르는 저 불길에 타 죽고 싶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우물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불이든 물이든 간에 나 자신을 던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등을 떠밀 사람이 없던 탓에 웃음은커녕 쳐다보지도 못하고 매혹의 언저리를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64]몇 년 뒤 칠레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겨울, 로하스 히메네스는 죽었다. 평상시처럼 양복 상의는 산티아고 시내 어느 술집에 벗어 두고 그 추운 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킨타 노르말에 있는 여동생 로시타 집까지 걸어갔다. 이틀 뒤, 기관지 폐렴으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만나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종이학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로 날아갔다.

[66] 아무도 없는 성당 저 위에서 환하게 타고 있는 촛불은 고인의 두 눈 같았다. 비록 심장은 영원히 꺼져 버렸으나, 봉헌물에 둘러싸인 고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76] 잔혹한 수줍음에 시달리던 나는 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산티아고에서는 새로운 문학 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첫 시집은 마루리 거리 513번지에서 탈고했다. 매일 시를 두 편 이상 썼다

[77]이 첫 시집이 바로 1923년에 출판된 ‘황혼일기’이다. 시집 발행 비용을 마련하느라 매일같이 단맛 쓴맛을 경험했다. 인쇄소 사장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드디어 인쇄가 완료되고 표지 비용까지 지불했는데도 악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 돼. 대금을 전부 결재하기 전에는 한 부도 가져갈 수 없어.” 결국 비평가 알로네가 보태 준 돈까지 집어삼킨 다음에야 나는 책을 짊어지고 인쇄소를 나올 수가 있었다.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뛸듯이 기뻤다.

[79]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 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80]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특히 그날 밤의 열광도 불모의 꿈이었다는사실을 좀처럼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밤하늘의 별에 푹 빠져 버린 것도 저 남극 하늘의 폭풍을 내 감각으로 포착한 것도 다 공염불이 되어 버렸다. 실수를 한 것이다. 영감을 믿지 말아야 했다. 이성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길로 나아가야 했다. 겸손을 배워야 했다. 찢어 버린 원고도 많았고 다시 써야 하는 원고도 많았다. 이 원고는 10년 후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판되었다.

[83]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94]이곳 사람들은 모두 지진을 기억하고 있다. 지진은 도시의 심장에 붙어 잇는 공포의 꽃잎이다.

[96] 어떤 도시도 발파라이소처럼 계단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는다. 어떤 도시도 자기 얼굴에 이처럼 고랑을 파 놓지 않는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내려가는 듯이 삶이 오가는 계단! 중간에 자주색 엉겅퀴 꽃이 피어 있는 계단! 아시아에서 돌아온 선원이 텅 빈 집이나 화목한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 술 취한 사람이 검은 유성처럼 떨어지는 계단! 태양이 언덕과 정사를 나누기 위해서 오르는 계단!
발파라이소의 계단을 전부 돌아다니면 세계를 한 바퀴 돈 셈이 된다.

[112]칠레라는 지구 변방 출신으로 돈은 없고 쓸데없는 호기심만 많은 삼등칸 여행객인 우리는 상하이의 밤거리로 빨려 들어갔다.

[118]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 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123]인도 전역에서 만난 이 젊은 시인들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방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다른 날 다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비참한 현실과 억압적인 신을 뒤엎으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실상이다.

[127]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8] 간디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여우처럼 영리한 사람으로 실천적인 인물이다.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크리오요 지도자들과 유사한 정치인이며 쉴 새 없이 각종 위원회를 진두지휘하는 탁월한 전술가이다.

[129]이 피로 물든 땅에 누운 와불은 누구에게 저렇게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도망치는 시골 여자들, 전호에 휩싸인 남자들, 복면을 두른 게릴라들, 가짜 승려들, 탐욕스러운 관광객들이었다. 지금도 거대한 불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밀림에 사는 검은 새의 울음소리와 붉은 새의 날갯짓 아래에서 물결치는 가사 주름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시선으로, 완전히 비인간적인 어떤 형태로든 인간적이고, 신이면서도 신이 아니고, 돌이면서 돌이 아닌 모순된 형상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

[131]실제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한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명상 센터는 미국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구 출신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싸구려 형이상학으로 포장한 이국적이 부적과 주물을 도매금으로 팔아 넘김으로써 값싼 시장을 착취했다. 이런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다르마와 요가를 들먹였으며,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종교 수련에 열을 올렸다.

[135] 잠을 자다가 가끔 불빛 때문에 눈을 떠 보면 모기장 바깥에서 유령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였다. 하얀 옷을 걸친 채 날이 선 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차마 나를 죽이지 못하고 밤새 침대 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이다. 그녀는 “당신이 죽으면 내 공포도 끝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날이면 그녀는 내 변심을 막아 줄 신비한 의식을 올렸다.

[137]어떻게든 이 메스꺼움을 이겨 내야만 했다. 아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아편을 경험하고 그 맛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수없이 아편을 피워 댔고, 마침내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아편은 몽환도 환영도 발작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근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끝없이 부드러운 음이 허공에 지속되는 듯했다. 몸 속에 텅 비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137]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143]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과 방대한 아시아 세계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결코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

[152]콜롬보에서 보낸 쓸쓸한 생활은 힘겨웠을 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까지 혼미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던 거리에는 친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양한 피부색의 여자들이 내 야전 침대에 들렀으나 육체적 번갯불 이외는 아무런 사연도 남기지 않았다.

[209]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10]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

[228] 한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 그동안의 긴 여행이 헛고생이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새로 발견한 땅 위에 홀로 남게 되었다. 탄생의 순간처럼, 초기 시의 원천이었던 형이상학적 공포에 경악했을 때처럼, 내 작품에서 창조한 새로운 황혼을 어디로 들아갈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를 향해 침묵하며 또 어디를 향해 소리칠 것인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제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229]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고 있다. 대기가 어두워진다. 가끔씩 인광과 공포로 충전된 번갯불이 환하게 빛난다. 명확한 언어, 진부한 언어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구조물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244]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 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255]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262]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278] 이제 우리는 강을 건너야 했다.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에서 쏟아지는 작은 물줄기들은 아래쪽으로 흐르면서 급류가 되어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다가, 아득한 높이에서 거세게 떨어지는 폭포수로 변하여 땅과 바위를 부셔 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에 만난 물은 거울처럼 잔잔한 여울이었다

[290]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항상 돌고 돌아 칠레 남부의 숲으로 무성한 밀림으로 되돌아왔다.

[291]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 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 주며, 식물 와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

[296]주지하듯이, 생명은 계율보다 강인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347] 내가 보기에 중국은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아니었다. 현재 강력한 혁명적 추동력을 얻고 있기는 하나, 이미 수천 년 동안 건설되었고, 항상 건설 중인 나라로 보였다. 인간과 신화, 즉 전사와 농민과 신들이 들락거리는 거대한 탑 같았다. 즉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웃음마저도 그랬다. 어떤 이는 작고 조야한 민화, 비록 원근법에 따른 모사는 부정확하더라도 거장의 경지에 근접한 민화를 찾아 사방을 뒤졌으나 헛수고였다. 중국 인형, 도자기, 석물, 목각품은 수천 년 된 모형을 재현하고 있다. 한결같이 완벽한 작품의 재현이라는 표시가 난다

[349]지난 5년 동안 중국의 섬유 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여성들은 온갖 색상의 꽃무늬, 줄무늬, 물방울 무늬와 갖가기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남자들도 다양한 색상이의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제 길거리는 중국인의 세련된 취향 덕분에 화려한 무지개로 변했다. 원래 중국인은 무엇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단순한 짚신 하나만 보더라도 마치 짚으로 만든 꽃송이 같다.

[360] 이제 우리 일행은 전설의 땅이자 힘겨운 노동자의 땅을 향해 날아갔다. 도착한 곳은 아르메니아였다. 멀리 남쪽으로 눈 덮은 아라라트 산이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바로 이 산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 그리하여 지상에 다시 만물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용암대지이기 때문이다.

[381] 내 이름과 시의 제목을 듣자마자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정치인들의 뻔한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내 시, 아니 시를 낭독하겠다니까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높은 연단 위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모자들을 보았다. 잔잔한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난 듯 1만여 개의 모자가 일제히 파도를 일으키더니, 무언의 존경을 담은 검은색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사라졌다.

[386]시는 이미 독자와 간계가 끊어졌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문득 찾아든 시는 우리 시인들이 그동안 읽고 배우느라 투여한 갖은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임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7]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 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당겨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 또한 예상 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욱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388]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

[391]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2]나는 앞으로도 내 수준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3]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비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시를 존중하게 되었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도 존경하게 되었다. 모든 시와 모든 시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394]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395]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탁월한 시인이 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자연, 문화, 사회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406]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 또한 사람들이 고통을 딛고 일어나, 피와 부서진 유리를 딛고 일어나 서로를 이해하리라고 확신한다.

[411]엘뤼아르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동방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413]그가 저세상으로 가 버린 지금, 그의 고귀하고 당당한 침묵보다 더 강력한 침묵에 휩싸인 지금, 우리는 그가 여기에 없다는 그리움, 그 특이한 빛이 땅과 하늘에 묻혀 버렸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420]나는 겨드랑이 밑에 이론을 끼고 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 위에 쏟아 부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이 월요일은 무엇이나 밝게 보이고, 화요일은 무엇이나 어둡게 보이는 사람이다. 올해는 명암이 엇갈리는 해다. 내년부터는 푸른색이 될 것이다.

[434] 나를 초현실주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리얼리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시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들 반쯤은 옳고 반쯤은 틀렸다

[435]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나에게는 리얼리즘이 맞지 않으며, 적어도 시를 노할 경우에는 리얼리즘을 혐오한다. 그리고 시가 리얼리즘 이상이거나 리얼리즘 이하일 필요도 없으나 반리얼리즘이 될 수는 있다. 내가 말하는 반리얼리즘이란 모든 합리성과 비합리성, 다시 말해서 모든 시를 내포한다.

[441]세월이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병이 좀 더 잦아지고 친구들이 수감되었다가 출감하기도 하고 유럽을 다녀오기도 하며 그냥 죽기도 한다.

[473] 지금까지 내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 눈에 비친 스탈린은 어둠 위에 떠 있는 스탈린, 내가 전혀 알지 못한 암담한 폭정 위에 떠 있는 스탈린이었다. 이런 스탈린은 선량하고 원칙을 지키는 인물, 수도사처럼 소박한 사람, 러시아 혁명의 굳건한 수호자로 보였다. 게다가 커다란 콧수염을 기른 이 작은 사람은 전쟁을 치르면서 거인이 되었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의 이름을 외치며 히틀러라는 악마의 소굴을 분쇄했다.

[478]체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전쟁 우리는 항상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전쟁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전쟁 없이는 못살아. 날마다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지.”
혼잣말인데 나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말에 경악했다. 전쟁은 위협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495]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던가 기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월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496]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 시인이 타고난 수줍음으로, 수줍은 사람의 두려움으로 군중에게 다가가지만,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본질적인 다수의 한 부분으로, 거대한 인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변모한다.

[534]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노래했고, 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를 구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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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16:15:31 *.204.150.167
쎄이의 삶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면 어찌될지 이 언냐도 궁금하다.
즐겁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지켜볼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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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16 18:01:30 *.12.21.21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지 않았는데 그 말은 많이 들어보았었다. 파블로 네루다가 보는 체 게바라에 대한 시선은 관조적인 것 같던데 체는 네루다를 어찌 보았을지 궁금하네.
우리 체 게바라 자서전도 읽고 라틴 아메리카를 좀더 공부해서 거기로 뜨자.
정열의 땅. 신비의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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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20:04:06 *.40.227.17
쎄이~
내도 .. 네루다를 읽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결국..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이거 하나 였는데..

이 중에서도 투쟁.. 투쟁.. ㅌㅈ.. 이 가슴에 남으니..
왜일까? .. 내는 싸움을 무쟈~게 싫어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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