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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20시 05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

출생과 성장환경

오쇼 라즈니쉬는 1931년 12월 11일 중앙 인도의 마디아 쁘라데쉬(Madhya Pradesh) 주, 쿠츠와다에서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어린 부모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너무 많은 나머지 오쇼를 외조부모에게 보내 키우도록 하는데, 그들은 어떠한 교육도 시키지 않고 어린아이의 침묵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해주며 길러낸다. 이후 다시 오쇼를 데려온 부모는 외조부모가 오쇼를 망쳐놓았다고 늘 불평하지만, 걸핏하면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해 대는 아이를 체념해버리고 마는 것 또한 대단해 보였다. (비록 미쳤다고, 어디가 아플 거라고 이 의사 저 의사에게 떠돌기는 했다지만.) 인도에서 원한다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었고, 아들 한 명쯤 철학을 공부해서 생계를 책임져주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력이 되었던 듯하다.

젊은 교수 시절

먼저 든 생각은 ‘보수적인 학계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교수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그 시대에.’ 였다. 자신이 인정하는 좋은 스승들을 만나고, 자신의 논리적 언변과 뛰어난 머리로 기이한 언행을 하더라도 교수로 자리잡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당시의 그 학계가 부럽다. 그는 도서관에 처박혀 각종 학문이 어떻게 생겨나고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시각을 연구하고, 너른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세계의 각종 종교와 그들에 대한 반박, 성자들에게서 배울 점 등을 깊이 연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세계에 8~9명의 자신과 같은 수준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었으며, 동시대에는 자신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름의 변천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쇼라는 이름은 그가 죽기 불과 몇 해 전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스스로 수많은 이름을 선택해 왔다.

그는 1971년 5월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며 이름을 ‘아차리야 슈리 라즈니쉬(Acharya Shree Rajneesh)’에서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로 바꾼다. 스스로 붓다를 가리키는 ‘바그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그는 붓다가 자신의 몸에 7일간 머물다 조화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 때 이름을 ‘스리 라즈니쉬 조르바 붓다(Shree Rajneesh Zorba the Buddha)’로 선언한다. 자신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제안한 새로운 인간형 ‘조르바 붓다’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모든 이름을 버린다.

그를 따르는 ‘산야신’들이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선화 속에서 존경, 경의를 표하는 말로 사용되는 오쇼(osho)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 오쇼는 거기에 동의한다. 오쇼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에 윌리엄 제임스라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가 사용한 오셔닉(oceanic, 대양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덧붙여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오쇼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그의 본명을 감추기 위해 처음 쓰여졌다는 의견도 있다.


사후에도 이어지는 사이비(?) 논란

오쇼의 운전기사와 보디가드 역할을 담당했던 휴 밀른(Hugh Milne)이라는 사람이 1987년 오쇼와 그의 커뮤니티에 대한 폭로에 가까운 내용을 담은 <타락한 신(Bhagwan: The God that failed)>이라는 책이 나와 그를 반박하는 자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요지는 성적인 문란(?)이 자서전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욱 심각했으며 부의 추구가 극심한, 성자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내용인 것 같다.

이미 논란이 된 지는 꽤 오래여서, 미국 정보기관에서 고의로 유출한 책, 또는 미국에서 허위사실 유포죄로 절판된 책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오쇼를 내쫓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미국에서 그에 대한 비판서를 출판금지 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오쇼의 가르침에 깊이 빠졌다가 <타락한 신>을 보고 충격을 받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던 그의 모습에 주로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하라면서 실상 그는 이분법적인 분류를 한다거나, 이 세상에 진정한 스승이 없다고 했음에도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원한다든지 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내가 책을 읽다가도, 종교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조직화는 필연적으로 정치를 부르게 되어 있다며 따끔한 비판을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후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신의 조직을 잘 꾸려갈 21명의 ‘이너 서클(이 이름 또한 재미있다. 정치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 아닌가)’을 뽑아 교육시켰다는 점이 의아했다.


최고의 성공을 이룬 뒤 방랑자가 되겠다던 꿈을 이루다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듯, 그는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사람이다.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선언할 때, ‘최고의 성공을 거둔 뒤 방랑자가 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교수로서 지성의 최고를 구가하고 새로운 운동에 대한 기반을 다진 뒤, 그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정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의 방식은 분명 혁신적이었다. 특히 미국에 건너가면서는 반전과 기독교에 대한 회의, 프리섹스, 히피의 시대를 잘 읽고 그들을 겨냥한 방법을 내놓기도 했다. 그가 대학에서 ‘절대’라는 개념이 진보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했던 논리 그대로, 그의 어떤 방법이 ‘최선’이었다면 그의 요법들 역시 이처럼 다양하고 끊임없이 수정, 진화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몇몇 이들이 추측하듯, 미국에 오면서 그는 변했고, 진정성을 잃었고, 인도에서의 그의 명성을 잃을 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는 결국 말년에, 세계 어느 나라, 심지어 중립지대라는 스위스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아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된다. 그를 받아주었던 우루과이나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마저 미국이나 국제 사회의 압력 아래 그를 추방한다. 그가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서전에 나와있지 않아 아쉽다.


책을 읽는 내내 변함없는 나의 평가는, 그가 정말 탁월하게 똑똑한 개인이었다는 점이다. 역사와 사람의 마음과 세계 각국의 종교와 성자들에 대해 무척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만의 통합된 세계관을 확립했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개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그의 노력 역시 정말 훌륭했다.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도 송곳처럼 날카롭고 때로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식이 시대를 앞서간 너무나 변혁적이고 혁신적인 무엇이었다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아직은 그 때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저자라면

그가 직접 자서전을 구술하지 않았고, 구술을 중심으로 그의 추종자들이 추후 정리한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꽤 논리정연한 구성이라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연대별로 잘 설명해나가서 초반에 집중도가 높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와 몰입이 금세 된다.

2부에서는 그가 주로 받고 있는 공격에 대한 방어를 해 놓았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방어를 한 것이 꽤나 놀랍고 수용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 내용을 얼마나 자세하게 다루었는가는 의문이 남는다.

이 부분에서부터 그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고, 이후 그가 직접 서술한 방식으로 쓰기도 했는데, 중간중간 그가 서술하는 것인지, 정리자가 설명하는 것인지 혼란을 주기 쉬운 부분이 꽤 많았다. 읽다 보면 한 줄 떼고 시작하는 부분이 오쇼의 서술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이 부분은 4장에서도 또 반복된다.

3부에 유산이라고 하여 그가 주장한 사상적 통합과 새로운 제안이 나와 있는데, 이 부분이 차라리 2부가 되고 그의 인간적인 이면을 그 뒤에 놓았으면 더 연결의 흐름이 좋고 집중이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부 오쇼의 일생과 주요 사건 기록에서는 급격히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가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대중 강연가로 나서면서 수많은 관중을 동원하며 인도에서 미국으로,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만 있을 뿐, 왜 미국에서 극심한 반대에 맞닥뜨렸는지 등에 대한 객관적 정황 설명이 없는 것이 무척 아쉽다. 독극물 주입 또한 그들의 주장인 듯한데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는 이 독극물 부분에서는 소설 냄새가 나서 조금 웃었다. 앞서 그의 비서였던 ‘쉬라’가 저질렀던 수많은 비리와 경악할 만한 상황을 전혀 몰랐던 것 역시 ‘교훈을 주기 위해서’ ‘조직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그랬다.


번역과 문체

‘왜냐하면~’, ‘~때문이다’. 너무 많아서 거슬린다. 출판된 지 6년 되었는데도 몇몇 군데 오자가 발견되어 아쉽다.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해야 하는 그의 강연 언어 사용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비슷한 뜻의 문장의 중복 나열이 많다. 때문에 비슷한 말을 반 페이지, 한 페이지 이상 끌고 있는 부분에서는 지루하다. 과감한 정리를 통한다면 책이 훨씬 가벼워졌을 텐데.

1992~1993년쯤 우리나라에서도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과 관련한 책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그의 유머감각이 담긴 <배꼽>이라는 책은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꽤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것이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종국에는 그가 선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선의 황금시대>를 다시 펼쳐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ART ONE 평범한 인간 –전설 뒤의 숨은 역사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 (20)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이 가지는 어떤 자유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는 결코 젊은이가 되어 보지 못했다. 젊은이가 되기 전에 그는 이미 늙고 말았다. 그는 어린 남동생들과, 여동생들, 그리고 가게를 돌봐야 했다. (24)

그 어린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25)

나는 말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의 홀로있음을 즐기고 있다는 것과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이었다. (26~27)

나나는 매일 아침마다 사원에 가곤 했다. 하지만 결코 ‘나랑 같이 가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나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은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혹당하지 않았다. (34~35)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36)

자이나교도들은 자신을 성취한 뒤 그의 깨달음의 아름다움에 너무나 깊이 빠지고 너무나 취해서 온 세상을 잊은 사람을 일컬어 아리한따라고 부른다. 아리한따라는 단어의 말 그대로의 의미는 ‘적을 죽인 자’이다. 그리고 그 적은 에고이다. 만트라의 첫 구절은 ‘나는 자신을 성취한 자의 발밑에 절합니다.’라는 의미이다. (38~39)

산스크리트라는 그 말 자체가 바로 ‘정제된’이라는 의미이다. (39)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밑에 절합니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절대적으로 비종파적인 유일한 만트라이다. (41)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들은 무엇이든 믿으려 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착취당해왔다. (43)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단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43)

샨띠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침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기본적인 의미이다. (49)

사실 나는 동양과 서양, 높은 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 몇 번을 물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모든 것을 다시 합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54)

나는 고행적인 것은 무엇이나 반대해 왔다. 그 시절에는 고행이라는 단어조차도 몰랐지만 나는 뭔가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다시피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 학대에 대해서 알레르기가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54)

“걱정 마라, 얘야, 대학에 가거라. 가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라. 내가 멀쩡히 살아 있으니 너 자신이 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팔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는 묻지 않겠다.” (64)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나는 오직 한 가지 놀이만을 사랑했다. 그것은 논쟁이었다. (67)

그대가 정말 사랑하던 어떤 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그대는 정말로 죽음을 만날 수 없다. (68)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 (중략) 저는 먼저 완전히 성공하고 나서 그 모든 성공을 차버리고 방랑자가 되고 싶어요.” (76)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예를 들면 옷에 대해서도 그랬다. 나의 마을에서 나는 이슬람교도처럼 옷을 입은 유일한 비이슬람교도였다. (81)

그대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하다. (105)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 (106)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질이 빠져 있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유머감각이다. (108)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116)

나의 할아버지가 무신론자였고 아마도 그 때문에 나의 아버지는 유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120)

그는 음식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중략) 할아버지가 요리를 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무척 호의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구경하는 것만은 허락했다. (중략) 그가 일하는 방식, 그것은 거의 조각가나 연주가, 화가와 같았다. 요리는 단지 요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예술이었다. (120~121)

“그 애들이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살고 있다. 그리고 삶을 통해서 아는 것이 좋다.” (123)

“하지만 조심해라. 책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마라.” (123)

“나는 네 질문이 뭔지 안다. 왜 신을 밎지 않느냐고? 나는 내가 죽을 때 네가 이 질문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완전하게 살았다.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내일 할 일이 달리 뭐가 있겠니? 나는 그것을 다 했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내 맥박이 느려지고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평화롭고,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이기 때문이야. 내가 완전히 죽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사는 건지,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라. 나는 두렵지 않다.” (124)

“그것은 어떤 직업이 더 유리할지 저울질해볼 문제가 아니에요. 거지가 될지라도 저는 철학을 공부할 거에요.” (125)

“이 아이와 얘기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 아이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해요. 선택없음…… 책무……, 이런 것들이 생활과 무슨 상관이죠?” (126)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나누었듯이 자신의 죽음마저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그대는 그 얼굴에 모든 것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의식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때 그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몸 둘레에는 오라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대는 침묵을 느낄 것이다. (중략) 심지어 어떤 사람이 지복 속에 죽었을 때 그대는 갑자기 그대 곁에 깃드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129)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132)

틀림없이 저는 죽음과 관계가 있어요. 그것만은 부정하실 수 없을 거에요. 누가 죽었는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에요. 언젠가 저도 죽을 거에요. 저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가 배울 수 있겠어요? (133)

내가 관찰한 첫 번째 사실은,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조차도 말이다. (134)

그렇게 해서 불타고 있는 몸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34-135)

그들은 와야 했기 때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135)

유치했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흉내냈다. 나는 3일 동안 먹지도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먹는 것은 하나의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137)

“만약 그 점성술가가 말한 대로 죽음이 일어날 것이라면 준비하는 편이 나아요. 그리고 왜 죽음을 기다려고? 왜 내가 직접 가서 미리 죽음을 만나면 안 돼요? 만약 내가 죽을 것이라면 의식적으로 죽는 게 나아요.” (138)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따.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들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즉,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 (139)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140)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삶은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죽었다. (140)

그는 공과 결혼한 것이며 무와 결혼한 것이다. 이는 모든 위대한 성인들이 찾아왔던 결혼이다. (!45)

나의 가족들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옳았다. 틀림없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업는 사람임을 입증했다. (146)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 (147)

그것은 엄청난 한 해였다. 나는 무에, 공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잃었따. (150)

나의 모든 관심은 나 자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너무나 자력이 넘쳤고, 그 당기는 힘은 너무나 광대했다. (150-151)

구멍은 한 쪽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터널이다. 나는 나 스스로 그것을 경험했다. (151)

그 노인은 지금 죽었지만 그는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보았따.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는 아프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153)

그대가 처음으로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광기처럼 보인다.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미친 밤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그대가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53)

단순히 신성으로 가는 하나의 문과 같은 사람, 그대가 저지당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문과 같은, 신성으로 가는 열린 문과 같은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것은 매우 어렵다. (중략)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155)

내가 다시 초점을 되잧는 데는, 다시 시각을 찾게 되는 데는 일년이 걸렸다. (157)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따.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158)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159~160)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160)

노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161)

그날 나는 그것을 얻으려 했던 그 모든 나의 어리석고 바보 같은 노력들 때문에 웃었다. 그날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웃었고 온 인류를 향해 웃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성취하고, 도달하고, 나아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완전한 이완의 상태에서 일어났다. 깨달음은 언제나 그러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161)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버려야 하는 때가 온다. (164)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중략)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자리보다 앞으로 도약하는 것, 미래로 도약하는 것, 내일로 도약하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에고의 현상이다. (165~166)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166)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167)

그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생을 거치며 노력해왔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
존재는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존재는 간섭하지 않는다. (중략) 그대가 그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가, 그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가,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전 존재가 그대를 향해 들이닥친다. 그대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68~169)

그 7일 간은 엄청난 변형의, 완전한 변형의 날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전적으로 새로운 에너지의 현존, 새로운 빛, 새로운 기뿜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내가 폭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그 경험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거세게 밀려오는 지복의 물결과 같았다. 하루 종일 이상하고 어리둥절했다. 또 그것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체험이었다. (170)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죽음과 같은 어떤 것, 매우 강렬한 어떤 것, 죽음도 아니고 새로운 탄생도 아니며, 십자가의 못 박힘도 부활도 아닌, 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어떤 것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기가 불가능했다. 나는 취해 있었다. (172)

나는 거의 허리케인과 같은, 거대한 빛과 기쁨과 환희의 폭풍처럼 사방으로 나를 둘러싼 고동치는 생명, 거대한 진동을 느꼈다. 나는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73)

나는 거기 없었다. 그것이 거기 있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이 거기 있었다. (178)

그리고 그날 밤 이래로 나는 결코 육체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나는 육체의 주위를 떠돌고 있다. (179)

그날 이래로 나는 결코 정말로 육체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단지 섬세한 한 가닥의 줄이 나와 육체를 연결해 주고 있다. (182)

신과 세상, 그것은 둘이 아니다. 그대에게 눈이 있다면, 어떤 꿈의 먼지도, 어떤 잠의 안개도 없는 깨끗한 눈이 있다면, 그때 신은 세상이다. 만약 그대가 깨끗한 눈, 명료함, 지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오직 신만이 있을 뿐이다. (183)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 (184)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과정이다. 그 개인성 때문에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 먼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정해진 단계들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을 통과한다. (185)

걸어가면서 그대가 길을 만든다. 그대의 걸음 자체가 길을 만든다. (186)

먼저 도달한 자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만들어왔다. (중략) 모든 종교가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개인들의 유일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이 전 인류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189~190)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깨달은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둘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당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192)

깨달은 사람은 대답들을, 경전들을, 따옴표들을 가지고 있지 안다. 그는 단순히 열려 있다. (194)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새어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

나는 이 ‘이야기 들려주기’가 나에게 표현력을 더해주고 그것이 깨달음 후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만 그들이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을 전할 수 없다. (196)

그러나 그들은 그대에게 깊이 사는 법, 전체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199)

“당신의 ‘절대’는 완전합니까? 그것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닙니다.” (205)

“나는 너에게 배울 게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모든 학위들을 취소시켜 버렸다.” (207)

“저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만을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대답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208)

“너는 그 책을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펼쳐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그 안에 빠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나는 말했다. “당신을 보면 압니다. 당신이 저를 보고 제가 그것을 번역ㅎ기에 알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듯이, 저는 박사님이 그것을 쓰시기에 알맞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있습니다.” (211)

그리하여 나의 전 생에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따.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 가지 측면이었다. (중략)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께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213)

“당신은 고타마 붓다도 방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물을 닦으십시오, 그것은 악어의 눈물입니다.” (215)

20년 동안 옥스퍼드에서 교수를 지내고, 세계 여러 대학의 초빙교수를 지내면서 나는 무척 교만해졌다. 그러나 너는 단칼에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나는 평생 너에게 감사할 것이다. (217)

그대는 밎지 못할 것이다. 그 노인은 앉아서 나의 말을, 내가 그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었다. 그렇게 큰 용기와 그렇게 큰 수용성을 지닌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217)

모든 선생들은 봉급에만,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경쟁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미래에, 그리고 특히 그들의 영적인 성장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221)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따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 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서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그래서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 (226)

그대는 공자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느 크리슈나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는 버트란드 러셀을 생각해야 한다. 그대가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각기 다른 천재들의 그 모든 기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현대인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그 다리를 놓을 유일한 방법은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의 앎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알게 된 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언어들을 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일은 광대하다. 그러나 그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천재들에 대한 탐험……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이해의 빛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 어려움도 없이 하나의 통합을 창조해낼 수 있다. (237)


교수들은 끊임없이 말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뭘 하니? 도서관 사서가 늘 불만이다. (중략)”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 것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 (239)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중략)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나는 아직도 종교라는 단어와 연관되는 것을 불편하게 느낀다. (244)

나는 진리를 찾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략)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아는데 관심이 있느느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미지의 공간을 여행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따.,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어떤 종교에, 어떤 종파에, 어떤 철학에 연관되어 있었다. (247)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나 힌두교도들, 이슬람교도들, 자이나교도들, 불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어떤 사상이나 종교를 따르고 있었다. 이제 내가 종교적이 되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248)

사람들은 오직 단어들만을 듣는다. 그들은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그대가 말하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들은 말없이 전달되는 것을 이해하짐 ㅗㅅ한다. 따라서 나는 그들 자신의 무기를 그들을 향해 사용했다. 나는 종교적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안에 전적인 나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249)

나는 단지 처음에 그들의 단어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만 주의하면 되었다. 그 후에는 말들 사이, 단어들 사이에 내가 정말로 관심 있어 하는 진짜 요소들을 내놓았다. 나는 낚시꾼에게서 그 기술을 배웠다. (254)

나는 미끼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255)

나는 15년 동안 그 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에 싫증이 났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ABC에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ABC, ABC, ABC였다. 그리고 내가 결코 XYZ를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분명해졌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267)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중략)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안다. (273)

나는 그대를 억지로 침묵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자연히 침묵하게 되는 장치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나는말을 한다. 그리고 문장 한가운데서, 그대가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재하고 있을 때…… 그때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고 단지 침묵의 간격만이 있다. (276~277)

나의 성공은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278)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281)

일단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이제 그대의 모든 초점이 바뀔 것이다. (283)

그리고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83)

그대의 의식이 그대에게 너무나 큰 지복을 주었다. 탐욕이 그대에게 고뇌 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야심이 그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284)

먼저 그대의 삶 속에 빛을 가져오라.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랴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285)

일단 그대에게 위대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그대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축복을 느낄 것이다. 존재가 그대를 위해 의식의 봉우리들 중의 하나를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그대는 느낄 것이다. (286)


PART TWO 빈 그림에 비친 그림자들

사람들은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섹스는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그것은 치유되어야 한다. (296)

왜냐하면 그것만이 삶 속에 더 큰 무언가가, 더 높은 무언가가, 더 훌륭한 무언가가, 훨씬 더 행복하고, 훨씬 더 큰 오르가슴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99)

세계 어디에서도 성적인 에너지를 영적인 에너지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선정성에만 관심이 있다. (301)

나는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305)

나에게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독립적이 되고 점점 더 그들 자신이 되어간다. (306)

나는 두 가지 수준에서 작업해야 한다. 하나는 그대가 살고 있는, 그대가 위치해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위치하고 있는 수준이며 그대 또한 도달하게 하고 싶은 수준이다. (307)

나는 찾고 탐구했다.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이다. (315)

붓다를 지칭할 때 불교도들은 바그완을 사용한다. (317)

그대들은 모두 바그완이다. (320)

이미 그대는 신이다. (321)

이제 나는 나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다른 층, 다른 차원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세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준다. (321)

나는 존재를 나누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를 깨우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에게 지식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앎’을 준다. (322)

언젠가 그대도 신이 될 것이다. 나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은 깊은 곳에서 그대 또한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324)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324)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적으로 매우 가난한 자이다.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 (329)

부유함에 대해 좌절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중략) 부유한 사람이 나에게 올 때, 그는 돈이 있고, 직업이 있고, 집이 있고, 건강이 있다. 그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신에 대한 추구가 시작된다. (329)

그대는 그대의 돈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대는 그대의 성공에 좌절했끼 때문에 여기 있따. 그대는 그대의 삶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중략)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330)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는 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 (333)

나는 농담들을 들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안하지만 그대들은 모두 종교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쉽게 심각해진다. (342)

선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 (343)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346)

그녀가 차를 구입한 그날, 우리에게 돈이 있는 것을 안 은행들이 그녀의 사무실로 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쓰라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350)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52)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353)

영적인 사람은 차를 운전할 때조차도 그 차가 사람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353)

그들은 그대에게 신, 진리, 니르바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대는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358)

그대들은 모두 죽어 있다. 그대들은 모두 나자로와 같은 상황 속에 있다, 그대들은 모두 그대들의 어두운 동굴 속에 살고 있따. 그개들은 모두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다. (중략) 그대가 태어난 그 날 이래로 그대는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긴 과정이다. (중략)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361)

갑자기 그대가 깨끗해질 때, 그대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환희가 일어나고 그대의 전 존재가, 그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춘다. (362)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중략) 그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정수를, 그대 자신의 신성을 깨닫게 한다. (365)

나는 그대를 분열시키는 어떤 종류의 사싱이나 신학과도 싸워야 한다. 두번째로 나는 그대의 내적인 존재의 성장을 위해 작업해야 한다. (367)

현자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대는 통찰력을 원치 않는다. 그대는 명확한 지침을 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 (268)

왜냐하면 그대가 책임을 맡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대를 올바르게 인도할 사람이 없다. (368)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368)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370)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71)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372)

왜냐하면 나의 모든 가르침은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포기하고 은둔할 필요는 없다. (중략)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374)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는 각각의 개인 그 자신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376)


PART THREE 유산

나는 그대에게 종교 아닌 종교를 가르친다. 나는 그대에게 그 맛을 가르친다. (384)

그대는 단지 종교성 속으로 입문하는 것이다. (385)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387)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원한다면 신이 제거되어야 한다. (390)

나의 모든 노력은 종교 아닌 종교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중략)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중략) 처음으로 나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393)

조직화는 정말로 하나의 정치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종교적이지 않다. 그것은 권력의, 권력에의의지의 또다른 방법이다. (394)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명상은 존재가 평화롭고 지복스럽게 꽃피어나는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그대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395)

당신은 평생 너무나 마음을 괴롭혀왔소.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요. (403)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407)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407)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408)

신 때문에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단지 이 한 단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사람은 신을 증명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410)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중략)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412)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 여러 생에 걸쳐 쌓여온 분노…… 그곳은 온통 난장판이다. (중략)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당연히 그는 매우 의아해진다. (413)

분노가 내던져지고 탐욕이 내던져지고…… 층층이 이런 것들이 거기에 쌓여 있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러한 것들을 내던지고 나면 그대는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414)

내적인 도박은 그 정반대이다. 패배조차도 다가오는 승리의 시작이다. 명상자는 결코 마지막에 지지 않는다. (418)

그대가 무슨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지, 미쳐버리라는 말은 “이제 나는 모든 두려움을 놓아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우리는 하루하루 광기를 쌓아간다. 그것은 마치 집안에 쓰레기가 있는데 계속해서 그 쓰레기를 구석에 숨기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중략) 오직 이 모든 쓰레기를 밖으로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내던져지면 그대 안의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419~420)

붓다의 시대에는 그처럼 동적인 방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단순했고 더 진실했다. 그들은 더 진짜 삶을 살았다. 지금 사람들은 매우 억압된 삶, 매우 가짜의 삶을 산다. 웃고 싶지 않을 때 그들은 웃는다. 화내고 싶을 때 그들은 동정하는 체 한다. 사람들은 거짓스럽다. 삶의 모든 양식 자체가 거짓스럽다. (중략) 사람들은 삶을 살지 않는다. 단지 연기를 한다. (424)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략)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425)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해낼 수 있을 때, 그때 그대는 붓다의 심리학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428~429)

정신분석은 여러 해가 걸리는 작업이지만 여전히 그 사람은 똑같다. 그것은 오래된 집을 수리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손을 보고 회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똑 같은 집이다. 아무것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429)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430)

“이제 저는 시냇가에 앉아 있듯이 저의 마음 옆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앉아서 그 모든 더러움과 골칫덩이, 오래된 나뭇잎들, 상처와 고통, 기억, 욕망들을 함께 볼 것입니다. 무심하게 강둑에 앉아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저절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432)

명상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그들은 명상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433)

문제는 분석이나 봉합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각하게 되느냐의 무제이다. (중략) 우리는 심리치료용법으로는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요법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치유할 수는 없다.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434)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를 치유한다. 마음은 단지 그대의 주변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의 중심이 아니다. (435)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지루해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흡수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서양에서 파시즘, 나치즘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집단 광기들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440)

미국에서는 평균 3년마다 사람들이 이사를 한다. 이것은 역사상 존재했던 최고의 유목문명이며 방랑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마을도 없고, 가정도 없는 셈이다. (441)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공간 속에 있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들은 히말라야로 가고 싶어 한다. 사회가 너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싫증이 나 있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나 있다. (442)

수명은 광대하고 엄청나다. 급할 것이 없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가?> 만약 그것이 이번 생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언젠가 다른 생에 일어날 것이다. (448)

그대는 그대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그 모든 쓰레기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대가 그 짐을 벗지 않는 한 그대는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방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나 똑같다. (449~450)

그들은 동양의 지식계급을 거의 이류의 서양 지식계급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서두름, 조급함, 성급함, 끊임없는 고뇌와 근심이라는 그들의 병을 동양에 심어주었다. (452)

내가 성을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받아들임 없이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완전히 깨끗해지기를,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457)

보물은 마음 뒤에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이다. (460)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461)

서양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있다. (463)

커다란 불균형이 일어났다. 부는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부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가난함을, 커다란 빈곤함을 느끼고 있다. (463)

명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명상은 다시 한 번 그대의 내면 세계 속으로, 그대의 내면성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464)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464)

불만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유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부유함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내적인 불만을 자각하지 못한다. (465)

왜 붓다가 불만을 느끼게 되었는가? 왜 그가 명상을 찾기 시작했는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복하게 살았다. 그는 모든 편의품들과 모든 물질적인 장치들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자각했다. (중략) 그가 내면에 어두움 구멍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겨우 스물 아홉 살이었다. (중략) 사실 붓다는 처음으로 거지를 보고서, 그리고 늙은이와 시체와 산야신을 보고서 세상을 버렸다고 전해진다. (465~466)

서양의 종교들은 가난 속에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 종교들은 유치해 보인다. 그것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469)

이것이 동양이 처한 상황이다. “하느님, 이건 해도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동양은 계속해서 신에게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더 이상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동양은 너무나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있다. 감사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중략) 동양은 명상을 하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하다. 동양의 유일한 관심은 의식주뿐이다. (472)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473)

국가의 시대는 갔다. 분열의 시대는 갔다. 정치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중략) 그리고 그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나올 것이다. (473~474)

동양은 보물들을, 종교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양은 과학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바로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다. (474)

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 (474)

나는 양쪽 편으로부터 모두 진리를 맛보았다. 나는 전체적으로 사랑했고 전체적으로 명상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사람은 양쪽을 알았을 때에만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477)

이제 인류는 전체적인 시야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절반의 시야만으로 살아왔다. (478)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 모든 양극들은 용해되고 하나가 될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이것은 궁극적인 양극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양극들을 포함한다. 이 만남은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이 신 인간을 부르는 나의 이름이다. (479)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메시지는 신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이다. (479)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은 악마와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부도덕성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립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분열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인간과 함께 하나의 신세계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간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는 동시에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일 것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택 없이 자신일 것이다. (481)

나는 자유를 가르친다. 이제 인간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더 이상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개인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반역적이 되어야 한다. (482)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긋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이, 엄청난 주시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에 에피쿠로스일 것이다. (483)

나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그것은 더 해볼만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실패했고 과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중략) 뭔가 더 높은 통합체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고, 종교와 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합체가 필요하다. (486)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 (487)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라나크푸르 명상캠프는 오쇼의 일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495)

세 가지 지침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495)

그대가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대는 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대는 더 성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497)

옛 방식에 계속 얽매여 있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501)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 (501)

나는 내가 전국을 여행하는 것을 중단하기 시작할 때까지 절대 그것을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해당했을 것이다. (510)

나는, 이제 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사람들을 모았다고 판단될 때에 그것을 선언했다. (510)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처럼 혼돈명상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라. (511)

일단 그대가 목표에, 목적에, 운명에, 의미에 못박하게 되면, 일단 그대가 어딘가에 도달하겠다는 그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때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다. (514)

나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 본질적인 종교를 선언한다. 그것은 이슬람에서는 수피즘으로 알려져 있고, 불교에서는 선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태교에서는 하시디즘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본질적인 핵심이다. (중략) 이 20세기는 모든 종류의 미신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완전히 벌거벗은 나체의 종교를 필요로 한다. (519)

그대는 서서히 독자적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점점 더 그대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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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13:34:00 *.12.130.72
아인이 리뷰 보면서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면 프리섹스로 대변되는 성, 그리고 롤스로이스로 대변되는 물질.
이 두가지는 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 필요했던
즉 미국이 가장 억압되었던 두 가지 상처를 그가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가 절대 범부가 아님은 잘 알 것 같은데 나도 이 부분이 약간 고개가 갸우뚱했었거든.
그가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쩌면 또 다른 방법을 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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