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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23시 46분 등록

저자에 대해서

 

오쇼는 1931년 12월 11 인도의 마드야 프라데쉬주, 쿠츠와다에서 태어났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쇼의 부모들은 어린 삼촌들을 대신해 가업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오쇼는 외조부모에게로 보내져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가 자라난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그는 9년동안 교육받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역으로 9년동안의 기간동안 길들여지지 않는 독자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그는 무척 외로웠고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축복으로 여겼으며 자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면서 외조부모들의 영향을 받아 왔다. 그는 스스로의 자아를 스스로 찾고자 하였고 어떤 외부적 영향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인 자기세계에 대한 탐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타고난 기질의 영향도 크지만, 외조부모들의 교육 방침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할머니는 7년동안 만큼은 아이 스스로 타고난 자아가 되어야 하며 그것에 끼어들어선 안된다고 할 정도로 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다르와다로 이사한 오쇼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선생님들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하는 둥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녔던 강직한 소년이었다. 1945년 그의 나의 14세때 죽음을 기다리는 7일간의 실험을 수행하면서 자기내면의 탐구에 대한 명상을 시작하였다.

요쇼는 이 명상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면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멀리 사라져 가고 죽지 않는 뭔가 즉 자아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이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여러 토론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에 산스크리트 대학을 거쳐 자발푸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강의는 전통과 관례를 무시한 교수방법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논쟁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보편타당한 기존의 관념을 새롭게 바라보는 질문에서 시작되곤 하여 저명한 교수들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그가 로이교수의 수업에서 절대라는 개념의 완전성에 대한 질문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신이라는 통념을 깨고 신 자체에 대한 완전성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결과가 어떻든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념에 저항하고 싸우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점차 과학,종교,예술에 대한 새로운 통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댛나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창조하려 한다.

그는 신을 부정하고 인간 개개인이 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명상을 통해서 개인들이 신성을 깨닫기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신이 존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소통은 사회와의 괴리감을 드러냈고 종교인들의 거부감을 샀다. 그로인해 그는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더 쉽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10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다양한 무리들에게 강연을 해왔는데 기독교,흰두교,이슬람교도에 관계없이 종교색이 없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통합된 개념에서의 자신의 깨달음을 설파하였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를 창조해 낸다.

그는 스스로를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라고 칭하였는데 이 이름의 뜻은 동서양과 음양이 섞일 수 있는 또한 유동성과 유연함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전체성을 통해 신성함을 깨닫고자 하는 의미이다.

 

내가 저자라면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은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명상입문서의 성격이 도드라지게 보여진다.

그도 그럴것이 그 역시 이 자서전이 사실과 진실에서 구부되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역사서처럼 사실에 대한 기록보단 경험을 통해 진실을 찾아내는 저자 자신의 기억속에서의 깨달음의 순간들을 담아내었다. 그 순간순간들의 역사는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한 순례자의 삶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례자의 삶의 순간순간들이 바로 명상에 입문하는 수행자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정규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속에서 외조부모들이 자유롭게 자기탐구를 할 수 있도록 해준 환경속에서 자라났다. 그가 어렸을 때 외로움을 이겨내었던 것들과 침묵의 시간들 그리고 고정관념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통념에 저항했던 그 경험의 역사를 통해 그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방법으로 어떤 특질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서 독자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기를 바라는 오쇼의 의지를 읽게 한다. 그렇다면 이 자서전의 목적은 무엇일 수 있는가? 바로 그가 깨달은 바 즉 모든 인류가 조르바 붓다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의지일 것이다.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그 신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의 삶은 사회적 관념에 대한 부딪침에서 시작된다.

그에겐 어떠한 사회적 관념 더 나아가 종교적 관념도 스스로의 이해 없이는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길들여 지지 않았으며, 그의 발걸음은 저항이나 반항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독특한 특질은 세상이 아닌 내면의 자아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향했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명상의 방법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독특한 개성을 갖춘 그였고, 그가 선택한 스스로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에 대해 여러 비평적인 시각들이 많으나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 이유는 그의 특질이 사회적 비평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경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란 바로 우리들의 고정관념과 관습 같은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부딪치며 스스로를 찾아내었다.

 

만약 그가 스스로를 자기 내면속에서 찾고 내면에 침잠해 있었다면 그도 세상을 모르고 나도 그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깨달음을 설파하여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라는 그의 일깨움을 좀 더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온 몸으로 경험하며 실천하며 저항하며 살 수 있는 힘은 내면의 힘이며 그것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명상으로는 키우기 힘들 것이다. 부딪치면서 명상하는 삶이 나에게 맞을 듯 하다. 왜 나는 아직 가지지 못했다. 부유하지 못하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사실지향적인 마음은 그들이 누구인지보다는 그들이 죽을 때 어떤 해를 지니고 있었느냐보다는 그들이 삶에서 어떤 소유물을 얻었느냐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오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행위소유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이다.[12]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과 진실의 차이이다. 보통의 역사학은 사실들에 대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새 다룬다.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14]

 

이 이야기는 내적인 사건들의 기록이다.;[15]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왜냐하면 군중은 결코 어떤 지리도 발견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홀로 있음 ㅅ혹에서만 발견되어 왔다.[19]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그대는 어떤 특질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단지 이야기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회상들 속에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어떤 본질적인 특질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그리고 그 가느다란 실은 영적이다.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20]

 

나는 거의 9년동안 교육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이후에는, 설사 그대가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대는 교육되어 질 수 없다.[21]

 

그 어린시절동안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26]

 

호수는 연꽃으로 가득했고 나는 너무나 만족한 채 온 세상이 어찌되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몇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연꽃들, 하얀 왜가리들, 그리고 침묵[26]

 

방해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지금 나무나 만족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나의 침묵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27]

이 아이는 우리에게 영향 받지 않도록 해요. 우리가 이 아이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기껏해야 우리처럼 만들 수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아이에게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28]

 

7년 뒤에는 아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7년 동안 만큼은, 아이는 단자 자신의 타고난 자아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우리는 끼여들지 않을 거에요.[30]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를 벌한다고?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를 벌할 수는 있지만 너를 벌할 수는 없다,”[33]

 

나의 할아버지가 사원의 승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요! 내가 그 샹들이에들을 기부했소. 또 기부할 수도 있소. 그 아이는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것은 자기 나나의 재산이오. 내 사원을 지었소그 스려는 불평을 멈췄다.[34]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35]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36]

 

존경은 말이 아닌 침묵에 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봉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순수환 자아의 성취에 대한 것이다.[38]

 

만트라는 말한다. ‘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밑에 절합니다.’ 내가 아는 이것은 절대적으로 비종파적인 유일한 만트라이다.[41]

 

안다고요? 뭘 알지요? 앎의 대상이 무엇이죠?”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 만트라는 나의 할머니가 내게 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가 내게 준 유일한 종교적인 것이다.[41]

 

아이들에게 그대의 이른바 지식을 물려주지 말라. 그대 자신이 먼저 순진무구해져야 하고, 거짓 없이 진실해져야 한다.[43]

 

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죠? 그것은 자이나교에서는 매우 간단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이나교란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한 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이나교는 윤회를 막기 위한 하나의 완전한 과학이다.[45]

 

적게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하나의 과학적인 사실이다.[46]

 

예의바른 사회에서는 아무도 진정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살에 대한 질문은 모든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진정한 질문이다.[46]

 

할머니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저의 스승이 아니니까 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게다가 당신이 타고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씨앗이에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나는 이제 거기서 무엇이 나왔는지 안다. 타고난 말썽꾸러지가 아니고서는 붓다가 될 수 없다.[53]

 

나는 조르바 붓다이다.나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다. 사실 나는 도양과 서양, 높은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 몇번을 물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모든 것을 다시 합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54]

 

그 날은 나의 일생 동안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씨앗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무와 그 꽃의 피어남, 그리고 어쩌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달까지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54]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 학대에 대해서 알레르기가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54]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아미 충분히 늙었어요.[56]

 

헤어짐은 그 나름이 시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이다. 그리고 한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한다,[59]

 

그녀는 말했다. “ 네 질문은 틀렸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62]

 

그녀(할머니)는 계속해서 나에게 돈을 보냈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죽던 나지막 달에도 언제나처럼 내개 돈을 보냈다. 그녀가 죽던 날 아침에 그녀는 수표에 사인을 했다. 그것이 그녀가 은행에 남겨 둔 마지막 돈이라는 것을 알면 그대는 또한 놀랄 것이다.[65]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67]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68]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69]

 

나에게 날개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날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따. 그 모든 하늘 전체가 나의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72]

 

그것은 바로 제 스스로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단지 제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방해하지 마세요. 7년 동안 나는 정말로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72]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76]

 

나는 나의 지성을 예민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기회를 나의 지성과 개성을 가다듬는데 이용했다. 이 모든 사건들을 보면서 그대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편들만 보았떤 사람들은 물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미치광이쯤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었다.[85]

 

저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어떤 것도 참지 않을 거에요.[95]

 

샴부 두베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나는 언제나 반역적인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네 나나의 어린아이가 반역자가 될 수 있다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축하한다.[97]

 

나는 말했다. “ 나는 틀림없이 관심이 있어요. 당신보다는 더 관심이 많아요. 왜냐하면 당신은 돈을 받는 설교자일 뿐이기 때문이에요. 만약 당신이 세 달 동안 보수를 받지 못한다면 당신은 가버릴 것이고 당신의 가르침도 모두 사라져 버릴 거에요.그리고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다.[103]

 

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드낟. 이 열만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몇가지 특질이 빠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모감각이다.[108]

 

몇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116]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영한다.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느 모든 것을 보여준다.[129]

 

즉 죽는다고 느끼면 차분해지고 고요해진다.[139]

 

뱀은 나를 타고 넘어서 버렸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140]

 

내가 파리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순간, 짜증은 사라졌다. 파리들은 여전히 몸 위에 있었지만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140]

 

삶은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 죽지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140]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사원을 구르드와르’ , 스승의 문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스승이 의미하는 바이다.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길이요,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155]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외부에 그 대상이 있었고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자세, 접근태도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대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는 똑 같은 사람이다.[160]

 

2년 동안 나는 그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은 내가 새벽 세시에 일어나야 약 4마일 내지 5마일을 걷거나 뛰어간뒤, 강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판에 박은 듯이 변함이 없었다. 몸에 열이 있거나 아파도 예외는 없었다. 그저 똑 같은 길을 걷곤 했다.[162]

 

수많은 생을 거치며 나는 노력해 왔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몸부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 이었다. 구하지 안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 버려야하는 때가 온ㅌ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164]

 

구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느 바로 옆에 잇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항상 먼곳을 향한 것이다.[165]

 

강과 함께 흘러가라, 강물을 거스르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나는 이완되어 있었다. 나는 내 맡김속에 있었다. 나는 거기 없었다.[178]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꽃이나 이슬방울처럼그들의 힘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다. 그들이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니니 생명의 힘이다. 그들이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창조하는 힘이다.그들이 힘은 촉력과 공격성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180]

그대는 그대 주위에 자신의 꿈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이다. 세상은 비실재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는 세상은 그대 꿈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꿈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날 때, 그때 진짜 세상이 드러난다.[183]

 

만약 한 방에 50명의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모두 함께 잠이 든다면 그때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꿈을 꿀 것이다. 그대는 공동의 꿈을 꿀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공동의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187]

 

깨달음은 다름 아닌 깨어남이다.깨달은 사람에게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은 단지 꿈들이다.[187]

 

모든 종교가 이런식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개인들의 유일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이 전 인류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190]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깨달은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둘 중 한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당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192]

 

그에게는 어떤 질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질문들이 사라졌다. 그가 모든 대답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모든 질문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침묵, 무심의 상태에서 그는 어떤 질문에도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준비가 필요없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저절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그 자신도 놀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기 안에 대답들을, 준비된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전혀 대답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전혀 질문들을 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어떤 질문에도 초첨 맞춰질 수 잇는 하나의 명료함, 하나의 빛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질문이 내포한 모든 의미들과 그것이 대답되어질 수 잇는 모든 가능성들이 단번해 분명해진다.[193]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대답들을, 경전들을, 따옴표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열려 있다. 하나의 거울처럼 그는 감응한다. 그리고 그는강렬함과 전체성을 가지고 감응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바로 자격요건이 아닌, 액체와 같은 특질들이다. 작은 것들을 보지 말라. 그가 무엇을 먹는지, 그가 무엇을 입는지, 그가 어디에 사는지그러한 것들은 모두 관계없는 것들이다. 단지 그의 사랑을, 그의 연민을, 그의 신뢰를 보라, 심지어 그대가 그의 신뢰를 이용한다고해도 그의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194]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에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

 

어린 시절부터 나는 실제 이야기든, 가공의 이야기든,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이 이야기 들려주기가 나에게 표현력을 더해주고 그것이 깨달음 후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196]

 

학자들은 그들의 주석과 해석, 그들의 이른바 지식으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하는데 너무나 익숙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무겁게 만들어버려서 시 조차도 시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197]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나는 그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 나오세요!” 그는 말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니!” 나는 말했다 이때가 바로 산책을 나가기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에요. 왜냐하면 길이 완전히 텅 비어 있거든요. 그리고 비가 오는 동안 우산을 쓰지 않고 산책을 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너무나 시적이에요!”[199]

 

그의 이름은 하리싱 가우르 박사였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학의 권위자였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거지나 어느학회, 어느 자선잔체에도 결코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다. 그는 인도 전체에서 가장 인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그 대학을 설립했고 그가 일생 동안 번 돈을 기증했다. 그것은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내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구두쇠였던 이유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고 만약 내가 자선을 행하고 병원에, 거지에게, 고아들에게 적선을 했다면 이 대학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오직 한가지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 세계 최고의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는 최고의 대학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의 생전에 그는 전 세계로부터 교수들을 불러왔다. 그는 두배, 세베,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봉급을 주었다. 그리고 업무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학생이 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옥스퍼드 같은 대학에나 둘 수 있는 모든 학과들을 개설했다. 수십 개의 학과가 있었다. 학과장,조교수,교수,강사……학생은 없지만 교직원은 충분했다. 그는 말하곤 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먼저 대학을 만듭시다. 그리고 그 대학을 최고로 만들면 학생들은 올 겁니다. 올 수 밖에 없을 겁니다.”[202]

 

아마 너는 평범한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관점들은 모두 버리고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관점만을 선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4년 동안 너는 트로피를 차지해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너의 주장이 너무나 특이하고 그 주장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202]

 

내가 그의 수업에 들어간 첫날,S.S 로이 교수는 절대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브래들리와 샹까라의 권위자였다. 두 사람 모두 절대를 믿는다. 그것이 그들이 신을 부르는 이름이다.[205]

 

나는 그에게 한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와 나를 매우 가까워지게 했고, 그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나에게 그의 모든 가슴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단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절대는 완전합니까? 그것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오직 그때에만 성장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더 이상의 무언가가 가능하다면 더 많은 가지 더 많은 꽃들이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완전히 완성되었다면…..그것이 바로 절대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때 성장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확실히 해주십시오. 왜냐하면 브랜들리와 샹까라에게 있어서 절대는 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신을 부르는 철학적인 아름입니다. 당신의 신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대답하셔야 합니다.”[205]

 

그는 말했다.”그때까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뭔가가 완벽하다면 분명 그것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불완전해야만 한다. 이 생각이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시간을 다오.”[206]

 

왜 나무 샌달을 신지?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구나. 나는 말했다 단지 저의 의식을 깨어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말했다. “의식을? 너는 의식을 깨어 있게 유지하기 위해 또 무슨 노력을 하니?” 나는 말했다.”하루 24시간 저는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요. 걷고,앉고,먹고,심지어 잠을 자면서도요. 그리고 믿으실지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바로 최근에 저는 잠 속에서도 각성하고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209]

 

모국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모든 언어가 모국어라느 말을 사용하겠습니까? 어머니는 말을 하고 아버지는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은 언어를 배웁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210]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가지 측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이런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두 번째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213]

 

그래서 나의 수업들은 완전히 달랐다. 가능한 가장 깊이 있는 방법으로, 모든 각도,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것이 토론되어져야 했고, 모든 것이 검토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지적으로 만족했을 때에만 답으로 받아들였다.[219]

 

그리고 나는 어떤 것에 대해 토론하고 스스로 논리적인 모형을 발견했을 때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대 자신의 발견이기에 그것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219]

 

나는 작은 명상학교를 개설했다.나의 친구중 한명이 그의 아름다운 방갈로와 정원을 제공했고, 또 그는 나와 명상을 위해 대리석 사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적어도 50명의 사람들이 그 사원에 앉아서 명상할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많은 교수들,심지어 부총장까지 명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찾아왔다.[221]

 

나는 말했다. “당신이 들어올 때조차 아무도 교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나 입는 이 보잘 것 없는 룽기가 그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이 룽기를 입고 올 것입니다.” 그는 말했다.”장난은 괜찮소. 하루쯤은 괜찮소.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 마시오.” 나는 말했다 저는 뭔가를 시작하면 끝장을 봅니다.”[223]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이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느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일단 그대가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226]

 

지금은 밖으로 나가서 사랑을 할 때다. 철학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 나이에 하는 것이다. 그때는 너희들도 철학을 공부할 수 있다.[228]

 

철학은 다음 문제다. 철학은 별 것 아니다. 우리는 2년 과정을 6개월 안에 끝낼 것이다.나머지 일년 반은 즈릭고 춤추고 노래하라. 걱정하지 마라.[228]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선생이 존경을 요구한다면 그 선생은 단순히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233]

 

선생들은 시인들 만큼이나 타고난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이다. 누구나 선생이 될 수는 없다.[233]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이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239]

 

나는 그 모든 독서를 통해 배울것이 없었다.그 독서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완전히 성공했다는 것이 기쁘다.[240]

 

단순히 나 자신을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집이 있었던, 모든 조건화에 반대했던,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았던, 어떤 정치 집단에도 속하지 않았던,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던, 어떤 나라, 어떤 인종에도 속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241]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것은 추하다.[244]

 

무신론자,반종교가,반도덕주의자와 같은 이런 단어들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데 있어 꿰뚫을 수 없는 벽처럼 작용했다. 나는 변함없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나로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는 나의 경험을 퍼뜨리고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246]

 

나는 진리를 찾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비종교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가까이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아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247]

 

뭔가 나의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그들은 다른 진영에 있다. 아무도 나의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혼자였다. 나와 교제하거나 나와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는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역시 돌았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다.[255]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르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젱이다. 그것은 언어학이나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언어 속에서 어떤 비범한 음악을 발견하는, 평범한 산문에서 위대한 시의 질을 창조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갖고 노는 법을 안다.[273]

 

깨달음 전에 그들은 위대한 선생이었고 이제 깨달음 때문에 그들은 스승이 된다. 이제 그들은 선생에서 스승으로 바뀐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273]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 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따라서 나는 그 어떤 강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힌다.[275]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실 하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

 

존재는 도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279]

 

그리고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283]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285]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다.그리고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 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285]

 

나의 노력은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전통과 정설, 미신, 믿음들을 제거하여 그대가 무심의 상태, 궁극적인 침묵의 상태, 단 하나의 생각조차 움직이지 않는, 그대 의식의 호수에 단 하나의 잔물결조차 없는 침묵의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306]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속에 모든 나무속에, 모든 돌속에 신성이라도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315]

 

나는 찾고 탐구했다.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이다.[315]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318]

 

사람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이야 할 뿐이다.[320]

 

이제 나는 나이 역할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다른 층, 다른 차원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준다.[321]

 

그리고 서서히 그대는 주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주인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 주인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핵으로부터 온다.[324]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위의 주시자가 될 수 있는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총족될 것이다.[324]

 

부유한 사람들이 나에게 올 때, 그는 돈이 있고, 직업이 있고,집이 있고, 건강이 있다. 그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신에 대한 추구가 시작된다.[329]

 

사람이 육체적으로 행복할 때, 먹을 것이 충분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집이 있을 때, 그는 음악, , 문학, 그림,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새로운 배고픔이 시작된다.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이제 심리적 욕구가 일어난다. 욕구에는 단계가 있다. 첫번째는 육체이다. 그것은 기본이다. 그것은 그대 존재의 일층이다. 일층이 없이는 이층이 존재할 수 없다.[332]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느 ㄴ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333]

 

붓다는 엄청나게 부유하였기 때문에 종교적이 되었다. 크리슈나와 람과 마하비라는 엄청나게 부유했기 때문에 종교적이 되었다.[333]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337]

 

롤스로이즈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충분히 명상적이었다. 사실 소달구지에 앉아 있을 때는 명상적이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롤스로이스는 영적 성장에 최고로 좋은 차이다.[355]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

 

깨달음 이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어남이 멈춘다. 사라진다. 그는 단순히 존재한다.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밤이 별들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꽃들이 더 이상 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대 안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남아 있다. 깨달음 후에는 더 이상 일대기가 없다.[377]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독단적이지 않았다.[384]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탐구이다.[386]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이 신을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떠 ㄴ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명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도 없고 종교도 없다.[393]

 

처음으로 나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신이 있는 종교든, 없는 종교든, 모든 조직화된 종교들은 인류를 잘 못 인도해왔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유일한 원인은 조직화였다.[393]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408]

 

그대는 그대가 서 있는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지점은 좋다. 왜냐하면 모든 지점은 원주위에 있으며 원주 위의 어느 지점에서도 중심으로 가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409]

 

내적인 도박은 정반대이다. 패배조차도 다가오는 승리의 시작이다. 명상자는 결코 마지막에 지지 않는다. 그는 여러 번 진다. 하지만 마침내는 이긴다. 마하비라나 붓다가 맨 첫째 날부터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라. 마호메트나 예수가 처 번째 날부터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아무도 첫날부터 이기지는 못한다. 그들은 형편없이 지고 만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기고 만다.[418]

 

그대의 마음을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433]

 

서양사람들은 사회로 달아난다. 동양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달아난다.[443]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아라. 세상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으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444]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미온적이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니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이것을 해야하고 저것이 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의욕은 전혀 없다. 그들은 에너지로 넘치지 않는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살기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다. 그들은 모험적이지 않다. 그리고 모험적이지 않고서는 사람은 건강하지 않다. 모험이 기준이다. 미지에 대한 탐구가 기준이다.[458]

 

뇌를 씻는 것은 표면적이다. 뇌는 마음이 이용하는 기계장치이다.[459]

 

그러나 마음은 그대를 속일 수 없다. 마음은 그 안에 바치는 것이 실재라는 관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치워지지 않는다면..그리고 바로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을 가져간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치 srmeo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460]

 

동양이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부에 반대하지 않으며 가난함에 어떤 영적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464]

 

동양이 부유했을 때 서양은 가난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이슬람교인도의 종교가 아닌 이 세종교는 모두 가난속에서 탄생했따. 그 종교들은 명상 기법들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종교들은 가난한 자들의 종교로 남았다.[469]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음악,조각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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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14:10:35 *.12.130.72
아직 그대의 무한한 잠재력을 세상에 다 내놓지 못했음을
그것을 더 풀어내고 싶은 에너지가 느껴져.

나 역시 아직 세상을 향한 애정이 많이 있는데
그조차 또다시 가두려 했음을 이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어..

그래. 우리 멋지게 세상 안에서 살아보자.
그대는 꼭 할 수 있으리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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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23 09:25:25 *.12.21.21
'조르바 붓다' 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철이가 아닐까 싶어. 세속의 기쁨을 누릴 줄 알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 이것의 균형를 아주 잘 맞출 사람은 바로 그대. 철이야.
조르바 붓다가 되어 새로운 시대, 디자인 식스의 시대를 열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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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06.23 15:14:57 *.216.130.188
오우 누님
깜짝 놀랬어요. 저에게 조로바 붓다와 어울린다는 말씀
그래서 저는 착각을 하는거죠.
조르바 붓다처럼 함 살아봐라고...
그래서 삶이 힘들어져요.
항상 깨어나면 역할이 주어지니...
잠에서 깨어나기도 무섭습니다. 최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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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3] 혁산 2009.06.21 2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