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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00시 45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위대한 힌두교 학자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너댓 시간 동안 꼬박 찬송을 하곤 하였다. 그는 새벽 3시부터 찬송과 기도를 하였다. 그는 수십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해왔다. 그는 위대한 학자였다. 어느 날 크리슈나 신이 마침내 그를 동정하여 그에게 다가갔다. 크리슈나는 그 위대한 학자의 뒤에 가 서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를 하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게 보이질 않소? 지금 꼭 나를 방해해야겠소?'

  크리슈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거두어 그곳을 떠났다.---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우화적으로 풀이한 ‘배꼽’. 내가 오쇼 라즈니쉬를 처음 만난건 오래전 이와같은 내용들을 담은 ‘배꼽’이라는 책자에서였다. 금번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과 같이 깊이있는 내용과는 달리 어려운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로 풀이 했었던 그였었기에, 책을 읽고난후 조금은 사뭇 그의 이미지가 달라보였다. 인도의 신비가, 구루 및 철학자이자 예수 이후 가장 주목받은 인물로 꼽혀 사상적인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오쇼 라즈니쉬. 그를 더욱 알기위해 관련된 싸이트를 뒤적이며 생전의 동영상 및 명상 음악을 들어 보았다. 기존에 알고있던 동양의 정적인 명상과는 달리 파격적인 춤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치장된 다이내믹 명상 하나를 보아도 그의 사고는 일반인들의 관념들을 뛰어 넘는것 같다. 사람들이 말하듯 그는 정말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중의 하나일까? 아니면 다른 시각에서 언급하듯 사기꾼이며 사이비 교주인가? 그의 생애를 함께 더듬어 보자.


  오쇼 라즈니쉬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자이나교도인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7살이 될 때까지 그의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가 마음껏 행동할 수 있도록 절대적 자유를 허락해 주고, 삶의 진리에 대한 그의 조숙하고 강렬한 탐구를 전면적으로 지원해 준다. 그는 이시절을 'Golden Childhood'라 칭하면서 완벽한 자유를 선사한 할머니를 그리워하곤 하였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였다.

  14살 때 오쇼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 실험은 깊어만 갔으며,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육체적 건강을 손상시킬 정도여서 부모나 친구들은 그가 오래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사가르 대학교에서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에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는다. 그는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로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고 그후 S.S. 로이 교수의 인연으로 자발푸르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가 된다. 독특한 그의 수업방식으로 인해 강의장의 수강생들은 항상 만원으로 넘쳐 났지만, 그를 바라보는 동료 교수들의 시선들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하여 현대인의 신념 체계와 철학에 대해 폭넓게 이해했으며, 1966년 현대인에게 명상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아차리야(교사) 라즈니쉬’로서 인도 전역을 다녔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사상과 이론들을 대중들에게 전파 하였는데 그의 이같은 사상은 기성 체제 측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 하였다.

  그후 다이내믹 명상법 등 다양한 기법들을  도입해 사람들을 자기탐구와 내면의 길로 더욱 들어서게 했는데. 그의 이같은 강의와 명상법들을 통해 대중들은 더욱 그를 각인시키게 된다. 그러던중 1980년 강의 중 어느 힌두교파에 의한 암살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전통적 교과 - 동양과 서양의 공적인 종교, 교회 등 - 들은 더욱 그를 비난하지만, 그때까지 오쇼는 전세계에 25만 명이 넘는 제자를 갖고 있었다.

  1981년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 제자들과 함께 오레곤의 불모지에서 64,000에이크에 달하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5,000명이 살수있는 녹색의 오아시스의 자급자족의 농업 공동체를 만든다. 오레곤 공동체의 급성장과 함께 주요 서방 국가들과 일본에서도 대규모 공동체가 형성되어 독자적 사업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1985년. 오쇼의 개인 비서와 공동체 관리를 담당하던 쉴라와 그녀의 지지자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에 의해 저질러진 비합법적인 행위가 밝혀진다. 그후 그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12일동안 감금 및 결박 당하는 수난을 겪는 동안, 탈륨 이라는 특정 독약을 주입 당하게 된후 생명의 위독함까지 갔으나 그는 명상 등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 낸다.

  1985-1986년. 세계여행이라는 명목으로 그는 각 지역의 제자들 및 사람들에게 철학을 전파하러 다니고자 하였으나 현실의 반응은 냉담 하였다. 네팔, 그리스, 스위스, 스웨덴, 영국, 아일랜드 등 21개 국가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입국을 거절당했다.

  1987년. 오쇼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뿌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90년 1월 19일 오후 5시에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었다던 오쇼는 이 행성, 지구의 방문을 마지막으로 마치게 된다.

  오늘날 푸나에 있는 그의 공동체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해마다 수천명이 방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전 세계에서 온 제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은 30개가 넘는 언어를 통해 600권이 넘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는 말한다.

 "나의 메시지는 종교도,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인간 변화를 위한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 용기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다. 나의 메시지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그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그대가 외투처럼 걸치고 자랑할 수 있는 철학도 아니고 그대를 괴롭히는 질문을 잠재우기 위한 교리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언어적 대화가 아니다. 나의메시지는 훨씬 위험하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부활이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편집자 서문

-.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그는 자신의 일대기는 자기가 행한 모든 작업들, 즉 수백권에 달하는 강의집과 자신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p9)

-.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사실지향적인 마음은 ‘그들이 누구인지’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를 가지고서 그들을 정의하려 한다.(12)

-. 오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 ‘행위’나 ‘소유’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이다.(12)

-.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3)

-.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지점까지만 그것이 의미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13)


■ 서문

-.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14)

-. 사실들은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적 이기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진실들은 비물질적이기는 하지만 중요.(15)


1부 평범한 인간 : 전설 뒤의 숨은 역사

1. 황금빛 어린시절의 일별들

-.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진리는 오직 홀로있음 속에서만 발견되어 왔다.(19)

-.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대는 어떤 본질적인 특질을 찾도록 노력해야함. 그리고 그 가느다란 실은 영적이다.

-.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20)

1931~1939 : 인도, 마드야 프랃시주, 쿠츠와다

-.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의 첫 부분 동안 내가 교육받고 있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것(21)

-. 친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침. 평생 동안 나는 그 누구도 친구로 알지 못함. 물론 아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 어린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남.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함.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25~26)

-. 그 세노인들(하인과 나의 조부모)들은 모두 계속해서 서로 신호를 보내곤 했다. ‘방해하지 말아요. 이 아이는 지금 너무나 만족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나의 침묵을 사랑하기 시작.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27)

-. 그녀(할머니)는 주장했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영향 받지 않도록 해요. 우리가 이 아이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기껏해야 우리처럼 만들 수 있을 뿐이예요.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이 아이에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28)

-. 나나는 매일 아침마다 사원에 가곤 했다. 하지만 결코 ‘나랑 같이 가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나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은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 그대가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대는 가르치기 시작한다.(35)

-. 종교가 없는 명상? 그렇다.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36)

-. 에고(ego):자아 인간이 ‘나’라고 믿는 허상, 소아, 에고의 허상을 부수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실체인 진아 즉, 아트만을 회복하는 것이 곧 깨달음(38)

-. 그는 말문이 막혔다. 어린아이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교육받지 않았고, 어떤 지식도 없었기 때문일것.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나는 교육받지 않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했을뿐.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 아마도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해방은 어린이의 해방이 될것(51)

-.할머니는 말했다. ‘ 당신이 타고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씨앗이예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나는 이제 거기서 무엇이 나왔는지 안다. 타고난 말썽꾸러기가 아니고서는 붓다가 될 수 없다. 나는 조르바(그리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자각인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열정과 춤과 축하의 삶을 사는 사람의 상징으로서 오쇼가 자주 인용함)붓다이다. 나는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모든 것을 다시 합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53~54)

-.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54)

-. 그녀(할머니)가 너무나 깊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결코 나의 진짜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나니를 나의 진짜 어머니로 생각했다.(57)

-.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57)

-.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詩)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이다. 그리고 한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한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난다. 나는 나나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헤어짐이었다.(59)

-.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 너에게 줄 것은 이것 밖에 없구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이 나에게서 사라졌듯이 결국 너에게서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뿐이다.’

  비록 그의 반지를 간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바람은 성취되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알았다.(60)

-. 나의 비전 속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가 그녀를 통해서 온다.(63)

-. 나는 여러 점에서 운이 좋다. 그러나 가장 운이 좋은 것은 나에게 외조부모가 있었고 그 유년의 황금빛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66)


2. 반역적인 영혼

-. 내가 기억할 수 잇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나는 오직 한 가지 놀이만을 사랑. 그것은 논쟁(67)

-. 나는 학교에 가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는 최악의 장소였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내가 관심있는 것들에 관심 없는 아이들만 있었고, 그들이 모두 관심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 그래서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67)

1931~1951 “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 가다와라

-.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있어 죽음과의 첫 조우. 나는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 만남은 나의 삶 전체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것은 나에게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의 방향을, 아니 하나의 차원을 주었다.(68)

-.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때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67~68)

-. 첫 7년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 7년은 그대의 70년을 결정한다. 그 7년 동안에 모든 주춧돌들이 놓인다.(71~72)

-.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예요.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76)

-. 어릴 때부터 내가 독립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81)

-.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 나는 넓은 벽은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작은 것, 극히 미세한 것은 놓치지 않는다.(92)

-.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첫 번째이자 유일한 것은 우리 마을의 한쪽 편을 흐르는 작은 강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내게 강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가르쳐줬다. 그것이 그가 내게 가르쳐준 전부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삶에 너무나 많은 변화들을 가져왔기 때문.

  싯다르타와 똑같이 나도 강과 사랑에 빠졌다.(98)

-.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현대인은 아스팔트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들과 함께 산다. 이러한 것들은 명사들이다. 기억하라. 이러한 것들은 동사들이 아니다.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100)

-. 비록 예수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람은 빵없이도 역시 살 수 없다. 사람은 빵을 필요로 한다. 첫 번째는 빵이다. 사람은 틀림없이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그다지 사람답게 산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예수도 빵 없이는 살 수 없다.(104)

-.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이상(理想)에, 그들의 이상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단지 하나의 복사품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신은 나에게 아무런 본래의 얼굴도 주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빌어 온 얼굴로, 가면을 쓰고서, 나에게는 아무런 얼굴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삶이 하나의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얼굴조차 그대의 것이 아니라면......‘(104)

-. 그들은 ‘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디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

-.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결과가 어찌되든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옳든 그르든 나는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105)

-.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

-. 나는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박수치고 웃고 즐기는 것을 보았어요? 당신은 몇 년 동안 그 배역을 연기해왔지만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고 아무도 웃지 않았어요. 이번 일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함. 그러나 몇 가지 특질이 빠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유머감각이다.(108)

-. 그러니 저를 혼자 내버려두세요. 넘어지게 놔두세요. 저는 일어서려고 노력할 거예요. 할아버지는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는 그냥 기다리세요.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곤 했다. ‘설사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저에게 아무 조언도 해주지 마세요. 그것을 분명히 해두셔야 해요. 단지 ’너 자신의 길을 찾아라‘라고 말해주셔야 해요. 저에게 조언을 해주지 마세요.’ 왜냐하면 값싼 조언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15~116)


3. 불멸을 찾아서

-. 동양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왔다.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영한다. (129)

-.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것이다.(131)

-.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그대가 어떠했든지......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132)

-. 누가 죽었는지는 문제가 아니예요.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예요. 언젠가 저도 죽을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산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가 배울 수 있겠어요?‘(133)

-. 7일동안 나는 기다렸다.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 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근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것. 왜 걱정을 하는가?(139)

-. 점성술가의 이 예언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일찍부터 내가 죽음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상할 수 있었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141)


4. 깨달음 : 과거와의 단절

-.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침묵을 사랑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146)

-.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147)

-. 내가 스물한 살이었던 그때는 내가 신경의 붕괴를 경험하고 그 돌파구를 찾은 시기(149)

-. 나는 먹는다거나 단식을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나 자신 속으로 깊이, 더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150)

-. 나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자연히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그 한 해 동안 나는 미친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 광기는 명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광기의 절정에서 문이 열렸다.(152)

-. 모든 종교들은 그대가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 왜냐하면 그 스승이 그대를 돕고 그대에게 힘을 줄 것이기 때문. 그대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기 서서 그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것. 그가 거기 서서 그 새로운 것들을 그대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의미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탈출은 불가능하다.(154~155)

-.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空)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158)

-. 모두가 우스운 일.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159)

-. 나는 여러 생을 통해서 깨달음을 위해 몸부림쳐왔다. 깨달음만이 그 여러 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얻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야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159)

-.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神聖)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160)

-. 나에게 있어 그것은 완전한 이완의 상태에서 일어났다. 깨달음은 언제나 그러한 상태에서 일어난다.(161)

-. 수많은 생을 거치며 나는 노력해왔다. 나 자신을 시험하고 몸부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 버려야하는 때가 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에서 나와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배를 남겨두고 떠나야하는 순간이 온다.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953년 3월 21일이 되기 바로 7일전, 나는 스스로에 대한 노력을 그만 두었다.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밖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그대는 모든 탐구를 버린다. 그리고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164)

-.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뿐.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기억하라. 누구도 욕망을 멈출 수는 없으며 실재는 오직 욕망이 멎었을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166)

-. 그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생을 거치며 노력해왔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 그대의 희망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168)

-. 존재는 영원이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간, 그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전 존재가 그대를 향해 들이닥친다.(168)

-. 그것이 바로 내가 끊임없이 ‘강과 함께 흘러가라, 강물을 거스르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나는 이완되어 있었다. 나는 내맡김 속에 있었다. 나는 거기 없었다.(177~178)

-. 나는 엄청나게 강해졌고 동시에 매우 연약해졌다. 나는 매우 강해졌지만 그 힘은 무하마드 알리의 힘이 아니다. 그 힘은 바위의 힘이 아니다. 그 힘은 장미꽃의 힘이다. 강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민감하고, 너무나 섬세하다.

  바위는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꽃은 어느 순간에라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바위보다 강하다. 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179~180)

-. 나는 연약하고 섬세하고 민감하다. 그것이 나의 힘이다. 만약 그대가 바위를 집어서 꽃에게 던진다면 바위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꽃은 죽을 것이다. 그래도 그대는 바위가 꽃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꽃이 죽는 것은 꽃이 살아 있기 때문. 그러나 바위는...... 바위는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 (182)

-. 세상은 비실재. 왜냐하면 그대가 아는 세상은 그대 꿈의 세상이기 때문. 꿈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날 때, 그때 진짜 세상이 드러남(183)

-. 걸어가면서 그대가 길을 만든다. 그대의 걸음 자체가 길을 만든다.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상황은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깨닫게 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뒤에 어떤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에게 ‘이리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만약 한 방에 50명의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모두 함께 잠이 든다면 그때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꿈을 꿀 것이다. 그대는 공동의 꿈을 꿀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공동의 꿈을 만들어낼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대의 꿈은 그대의 것이고, 나의 꿈은 나의 것일 것이다.(186~187)

-. 그가 무엇을 먹는지, 그가 무엇을 입는지, 그가 어디에 사는지...... 그러한 것들은 모두 관계없는 것들이다. 단지 그의 사랑을, 그의 연민을, 그의 신뢰를 보라. 심지어 그대가 그의 신뢰를 이용한다해도 그의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그대가 그의 연민을 오용하고, 그의 사랑을 훔친다 해도 그것은 아무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의 문제이다. 그의신뢰, 그의 연민, 그의 사랑은 똑같이 남는다.(194~195)


5. 칼날을 세우며

-.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실제 이야기든, 가공의 이야기든,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이 ‘이야기 들려주기’가 나에게 표현력을 더해주고 그것이 깨달음 후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만 그들이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96)

1953~1956 : 대학시절

-. 나의 전 생애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 가지 측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접촉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이런 태도로 대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213)

1957~1966 : 대학교수시절

-. 나는 어떤 것에 대해 토론하고 스스로 논리적인 모형을 발견했을 때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대 자신의 발견이기에 그것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219)


6. 길 위에서

-. 나는 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그들은 나에게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하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작용은 총이 아니라 총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253)

-. 서서히, 내가 나의 사람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여행도 그만두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의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오고 싶다면 그들이 나에게 올 수 있었다.(260)

-. 사람들이 고요하고 주의깊에 앉아서 모든 단어 하나 하나를 깊이 들여마시며 집중적이고, 명상적으로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훨씬 더 높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267)


7.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즐겼다. 이것은 나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나의 노래였다. 이것은 나의 시였다.(268)

-.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273)

-.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강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한다.(274~275)

-.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침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시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명상의 맛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가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276)

-.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279)

-.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그리고 깨달음은 그대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그대의 기도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신을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바로 약간의 경험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그것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281)

-. 나 자신의 경험으로는, 만약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더 의식적이 되면 그대의 행동은 변할 것이다.(283)

-.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285)


2부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Q:당신은 누구입니까?

A:당신이 생각하는 누구든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대 자신의 얼굴이 비춰질 것이다.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292~293)

1. 섹스 구루

-. 마음을 넘어가는, 시간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마음이 이해할 가능성은 섹스를 제외하고서는 달리 없었다. 명상의 첫 일별을 주는 것은 틀림없이 섹스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비난받고 있다.(296)

-. ‘성으로부터 초의식으로’는 성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초의식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을 넘어선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오르가슴이다. 비록 그것이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 순간은 영원이다. 모든 것이 멈춘다. 그대는 모든 걱정들, 모든 긴장들을 잊어버린다.(298~299)

-. 섹스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끝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시작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일은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랑을 나눈 후에 적어도 한 시간 동안 앉아서 좌선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그대는 섹스의 주인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노예였는가?(299)

2. 컬트 교주

-. 나의 노력은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전통과 정설, 미신, 믿음들을 제거하여 그대가 무심의 상태, 궁극적인 침묵의 상태, 단 하나의 생각조차 움직이지 않는, 그대 의식의 호수에 단 하나의 잔물결조차 없는 침묵의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306)

-. 진정한 독립은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성장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독립적이 되고 점점 더 그들 자신이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

3. ‘자칭 바그완(Bhagwan)'

-. '바그완‘이란 경험의 한 상태. 그것은 전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하고 신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바그와타, 즉 신성의 경험이다.(314)

-. 그들은 그들 스스로 나를 ‘아차리야’라고 부르기 시작. 아차리야란 ‘스승’을 의미. 실제로 그것은 오직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그의 행동과 생각이 절대적인 조화 속에 있는 사람을 의미(318)

-. 사람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320)

-.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323)

-.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 위의 주시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될 것이다.(324)

4. 부자들의 스승

-. 오직 부유한 자만이 종교적이 될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은 종교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드물다. 예외적이다.(329)

-. 사람이 육체적으로 행복할 때, 먹을 것이 충분하고 살 수 있는 좋은 집이 있을 때, 그는 음악, 시, 문학, 그림,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이제 새로운 배고픔이 시작.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이제 심리적 욕구가 일어남. 심리적 욕구 또한 충족될 때 그대의 영적 욕구가 일어남(332)

-. 붓다는 엄청나게 부유했기 때문에 종교적이 되었다.(333)

5. 농담꾼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343)

6. 롤스로이스 구루

1978년 인도, 푸나

-.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집착에 사로잡혀 있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352)

-. 영적인 사람은 차를 운전할 때조차도 그 차가 사람이 되게 하는 사람(353)

1981-1985, 오레곤

-. 롤스로이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충분히 명상적. 소달구지에 앉아 있을 때는 명상적이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롤스로이스는 영적 성장에 최고로 좋은 차(355)

7. 스승

-. 그들은(스승들)은 진리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일깨울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극할 수 있다.(358)

-.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게 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358~359)

-. 신약성경에는 나자로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사실 이것은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한 방법일 뿐이다.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359~361)

-. 오든(Auden)은 말한다.

 춤을 추어라.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질 대까지!

  춤을 추고, 춤을 추고, 춤을 추어라. 그대가 떨어질 때까지!(363)

-. 배추벌레는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배추벌레들이다.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추벌레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나비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나비들이 바람 속을, 햇살 속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비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나비들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며, 그들의 아름다움, 그들의 색깔을 보며 ‘나도 저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하는 깊은 갈망이, 열망이 배추벌레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그 순간, 배출벌레는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다.(364~365)

-.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371)

-. 세상을 포기하고 운둔할 필요는 없다. 오직 겁쟁이들만이 세상을 포기한다. 세상 속에 살라. 세상을 경험하라. 세상은 하나의 학교이다. 그대는 히말라야 속에서 성장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각각의 발걸음은 시험이다. 그대가 지나쳐 가는 각각의 발걸음은 시험이다. 삶은 하나의 기회이다.(374)

-.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는 각각의 개인 그 자신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376)


3부 유산

1. 종교 아닌 종교

-. 기독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런것들은 단지 이데올로기며 교리이며 교의이다. 그것은 단지 예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384)

-. 나의 모든 노력은 존재적.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존재적. 그 진정한 종교는 언제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남(385)

-. 그대는 어떤 종교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종교성 속으로 입문하는것(385)

-.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386)

-.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이 과학의 근본이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은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 그것은 그대를 완전히 압도하는 너무나 분명한 확실성이기에 그것을 의심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7)

-. 나의 모든 노력은 종교 아닌 종교를 창조해내는 것. 우리는 붓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그것은 신 없는 조직화된 종교였다.(393)

-. 모든 조직화된 종교들은 인류를 잘못 인도. 그 유일한 원인은 조직화. 왜냐하면 조직화에는 그 나름의 방향이 있기 때문. 그리고 그 방향은 명상과 반대됨. 조직화는 정말로 하나의 정치적인 현상(393~394)

-. 나의 노력은 성직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이제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과 종교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가능성도 없게 하는것. 그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394)

-.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문을 열어줌.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찾기 시작.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상.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395)

-. 나의 노력은 그대와 존재 사이에 어떤 명상가도 없이, 그대를 명상과 함께 홀로 남겨두려는 것이다. 그대가 명상 속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존재로부터 분리.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고통(397)

-. 명상은 생각, 감정, 감상과 같은, 그대와 존재 사이에 별을 만들어내는 모든 장벽들을 치우는 것에 불과. 이슬방울이 연잎에서 미끄러져 대양 속으로 떨어졌을 때, 이슬방울은 자신이 대양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대양 자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그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397)

-.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침묵하고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뿐. 어떤 종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신도 필요치 않다. 어떤 성직자도 필요치 않다. 어떤 조직도 필요치 않다.(399)

-. 명상이라는 말은 무거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순수한 침묵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그러면 존재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열어줄 것이다.

  그것이 성장해감에 따라 그대도 성장.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그대의 가능성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399)


2. 21세기를 위한 명상

-. 이제 나는 명상을 위한 새로운 수단들을 고안해야 했다. 그것은 먼저 긴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더 큰 긴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들은 너무나 큰 긴장을 만들어내서 그대는 거의 미쳐버린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멈출 때, 그대는 산봉우리에서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심연이 종착지이다. 그 노력없음이 종착지이다. 그러나 그대는 수단으로 그 긴장을 이용할 수 있다.(400~401)

-. 걱정하지 마십시오. 침묵은 당신의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 쉬도록 도와줄 뿐입니다.(402)

-. 마음은 단지 하나의 기계장치일 뿐이다.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407)

-.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407)

-. 믿는 사람은 생각에 집착.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 믿음은 마음의 부분. 따라서 만약 그대가 신을 너무 믿게 되면 마음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버린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대의 믿음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이 더 나은 상황이다.(408)

-.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으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412)

-. 처음에는 혼돈명상들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고요한 명상법들을 강조. 먼저 동적(動的)인 명상법들, 그 다음에 정적(靜的)인 명상법들이다. 쓰레기처럼 버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내던져 졌을 때에만 그대는 비활동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414)

1972년 : 인도, 라자스탄, 마운트 아부 명상캠프

-. 사람은 개성이 있고 개인성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각각의 개인은 각자의 온도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또는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100도 지점을 판단할 수 있다. 그 기준은,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을 조금도 붙잡고 있지 않다면, 그때 그대는 그대의 100도 지점에 있는 것이다.(416)

-. 명상은 도박이다. 다른 모든 도박에서는 어떤 물건을 내건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내건다. (417)

-. 오직 이 모든 쓰레기를 밖으로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내던져지면 그대 안의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두 번째 단계는 내면에 깨끗함이 자리 잡도록 모든 것을 밖으로 내던지는 카타르시스의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후’라는 소리를 내는 단계이다.(421)

3. 제3의 심리학 : 붓다의 심리학

-.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해낼 수 있을 때, 그때 그대는 붓다의 심리학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429)

-. 떠나는 아난다에게 붓다는 말했다. ‘물이 아직 더럽더라도 돌아오지 말아라. 물이 더러우면 그저 조용히 시냇가에 앉아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냇물 속으로 들어가지 마라. 조용히 시냇가에 앉아 바라봐라. 머지앉아 물은 다시 깨끗해질 것이다. 그때 그릇을 채워 돌아와라.’(431)

-.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432)

-. 명상, 각성, 주시...... 그것이 바로 제3의 심리학만이 가진 뛰어난 점이다.(433)

-. 문제는 분석이나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각하게 되느냐의 문제이다.(434)

-.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444)


4. 조르바 붓다 : 완전한 인간

-.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대는 케익을 먹기도 하고 동시에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다. 이세상과 저 세상, 소리와 침묵, 사랑과 명상, 사람들과 관계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461)

-. 이 모순을 생각해보라.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에만 그대는 그 대비를 통해 그대의 내적 가난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외적으로 가난할 때, 대비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그대의 내적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다.(463)

-.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 불현듯 ‘나는 내적으로는 가난하다. 나는 거지이다.’라는 커다란 자각이 일어난다.(464)

-.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부에 반대하지 않으며 가난함에 어떤 영적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464)

-. 가난은 영성이 아니다. 가난은 영성이 사라지는 원인이다.

  나는 전 세상이 가능한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그들은 더 영적이 될 것이다.(468)

-. 서양은 명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서양인들의 마음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가는 이유이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명상의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469)

-. 이제 서양은 부유해졌고 불균형이 생겨났다. 서양의 종교들은 가난 속에 탄생했다. 그 종교들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동양의 종교들은 부유함 속에서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마음이 점점 더 동양의 종교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469)

-. 동양은 명상을 할 수 없다. 동양은 명상을 하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하다. 동양의 유일한 관심은 의식주뿐이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와서 병원이나 학교를 열자 인도인들은 무척 감명을 받았다.(472)

-. 하나의 세계에서 서양은 동양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고 동양은 서양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473)

-. 동양은 보물들을, 종교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양은 과학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바로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다.(474)

-. 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兩極)이다.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474)

-.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메시지는 신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이다.(479)

-.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481)

-. 나의 작업은 신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하나의 붓다장 에너지장을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신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을 세상 속으로 신인간이 탄생하도록 돕는 산파일 뿐이다.(484)

-. 종교는 내세만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대는 이 세상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대 자신의 뿌리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과학은 내세를, 내면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486)

-. 인간은 나무이다. 종교는 오직 꽃들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꽃들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남게 된다.(487)

-.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 왔다.(487)

-.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487)


4부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490)

-. 1964년 6월 : 라나크푸르 명상캠프

-->세가지 지침을 제시.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것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것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것 

-.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502)

-.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것.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505)

-. 그대는 그대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것(518~519)

-. 성장그룹이 필요한 것은 그대에게 관계와 사랑과 의사소통에 대한 커다란 필요성이 있기 때문. 서양에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의사소통할지, 어떻게 관찰할지 하는 것이다. 많은 서양인들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다르산에 올 때 그들의 문제들은 100퍼센트 관계의 문제들이다.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이다.(524~525)

-. 이 모든 요법과정 중에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목격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530)

-. 기억하라. 이 그룹들은 끝이 아니다. 이 그룹들은 단지 그대가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일단 그대가 지금껏 억압해온 모든 것들을 그대의 시스템 밖으로 내던지고 나면 나는 그대를 각성 속으로 이끌어간다. 이제 주시를 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룹에 중독 되어서는 안 된다.(531)

-. 엔카운터. 프라이멀 요법, 게슈탈트 그룹, 그 모두가 사람들이 짐을 더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붓다가 되도록 도울 수는 없다. 그 그룹들은 그들이 깨어나도록 도울 수 없다.(532)

-. 그들의 명상은 세상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들의 명상은 현실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534)

-. 선가(禪家)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러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하지 않고, 물도 기러기들의 상(像)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像)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을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지려는 갈망이 없다.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전체적으로 살아라. 야망 없이, 욕망 없이 살아라.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543~544)

-.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565)

-. 그들은 죽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존재의 결정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있다.(574)

-. 실패조차 그대를 성공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왜냐하면 각각의 실패는 그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가지 실험 모두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었다.(582)

-.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586)

-. 그리고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기억하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그대는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588)

-.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589~590)

-. 그대의 성장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그대를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590)

-.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593)

-. 그 궁극적인 혁명은 하나의 세계정부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전쟁을 멈출수 없기 때문이다.(597)

-. 채워져야 할 엄청난 공백이 존재한다. 나는 그 공백을 삶과 사랑과 웃음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세계 아카데미를 세움으로써 채우기를 원한다.(599~600)

-.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삶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600)

-. ‘명상적 요법’

-->하루 세 시간, 3주간의 과정. 즉 일주일 동안의 웃음, 일주일 동안의 울음, 그리고 일주일 동안의 침묵 주시로 가다듬어진다. (601)

-. 진리가 조직화 되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조직화된 종교는 다름 아닌 숨은 정치이며, 성직자에 의한 깊은 착취에 불과하다.(608)

-. 오쇼는 동의하고 윌리엄 제임스가 사용한 ‘오셔닉(oceanic, 대양의)’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덧붙인다. (612)

-.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미사티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614)


▶ 에필로그 : 1990~ 현재

-.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620)

-.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622)


 

Ⅲ. ‘내가 저자라면’


  하워드 가드너는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그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 하였다. 오쇼 라즈니쉬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을 통해 그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존재’의 차원을 알아보고 그에따른 개인의 시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1.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한 사상의 형성

  해박한 지식과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통찰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문명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했던 오쇼 라즈니쉬. 그의 강의는 60~70년대 서구 기성사회에 실망한 젊은이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는데, 주로 인도의 우파니샤드, 요가, 불교, 중국의 선(禪), 노자, 장자, 이슬람의 수피즘, 기독교의 복음서, 유대교의 하시디즘, 그리스의 철학 등 전세계의 다양한 정신적 전통을 망라하고 있다. 이같이 다양한 그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그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 하였던 첫 7년간의 어린 시절의 외조부모와의 생활이 결정적인 요인으로써 작용을 한다. 그는 7세까지 일반 교육을 받지 않았고, 어떤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만의 절대 침묵속에서 사고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어린시절 동안 그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그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오히려 배우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축복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즉, 그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


2. 영성에 대한 인식

  오쇼 라즈니쉬는 사상가이자 영성가이다. 그의 영성의 특징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주창하는 명상법에서도 나타난다. 옆사람과의 친교보다는 자기만의 홀로있음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 영성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하며. 누구도 본인을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명상과 깨달음에 대한 인식

  깨달음에 있어 라즈니쉬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명상이다. 그는 이부분에서 특히 파격적인 부분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교에서 명상을 강조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종교가 없는 명상을 이야기한다.

 ‘종교가 없는 명상? 그렇다.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 라고 이야기 했듯 이부분은 나에게 있어 조금의 혼란을 가지게 한다. 종교가 없는 명상이라?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톨릭의 종교를 예를 들어보자. 가톨릭은 2,000여년의 역사답게 독특한 체계와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가톨릭만의 명상법이다. 베네딕토 성인 등을 비롯해 많은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이어져온 호흡법, 관상법 등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명상이 없는 영성이란 것은 가톨릭 하나의 종교에 국한해서 보아도 이해하기가 힘이든다. 여기에는 기존 기독교가 신을 외부에서 찾음에 비해, 라즈니쉬 본인은 내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을 일깨운다는 근본적인 관념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부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것은 깨달음의 인식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반어적인 화법이다. 어찌보면 노자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는 이 반어법은 책의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만의 이런 화법으로 많은 이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급기야는 사상적인 위험인물로써 등극을 하게되는 계기가 되고있다. 관련된 하나의 장절을 살펴보자.

  ‘걸어가면서 그대가 길을 만든다. 그대의 걸음 자체가 길을 만든다.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가 계속 날아감에 따라 그 발자국들은 즉시 사라진다. 상황은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라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단지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예수, 모세, 마호메트,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깨닫게 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뒤에 어떤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에게 ‘이리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4. 터닝 포인트

  외조부모와의 7년간의 생활을 통해 그의 사상의 기조를 형성 하였던 라즈니쉬. 그에게 터닝포인트의 내역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볼수 있다.

  첫째,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라즈니쉬에게 있어 죽음과의 첫 조우이며 그는 이를통해 인간의 죽음과 그 실체를 직접적으로 느끼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안에서 또한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 만남은 그의 삶 전체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것은 그에게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의 방향을, 아니 하나의 차원을 주었다. 즉, 이를통해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해주었으며 이는 그의 사상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계기가 되게한다.

  둘째, 아버지의 수영의 가르침

  아버지의 강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의 가르침을 통해 라즈니쉬는 ‘동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를통해 그는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사람들은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장차 그가 강조하는 명상법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을 한다. 즉, 동양의 정적인 명상에서 탈피하여 다이내믹한 춤과 음악 등을 가미한 동적인 명상법으로의 출현을 가지게 한다. 이같은 강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사상이 형성되어 있다.

 ‘현대인은 아스팔트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들과 함께 산다. 이러한 것들은 명사들이다. 기억하라. 이러한 것들은 동사들이 아니다.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5. 종교관

  1985-1986년. 라즈니쉬가 전세계를 다니며 여행을 할시 그는 네팔, 그리스, 스위스, 스웨덴, 영국, 아일랜드 등 21개 국가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입국을 거절 당했었다. 이같은 요인에는 서방 기독교 유럽국가들의 관점에서 라즈니쉬의 종교관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사상적인 폐혜성을 낳을 위험인자로 인식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라즈니쉬의 요체의 근본은 본인 자신에서 비롯된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고 옳든 그르든 본인 자신으로 남아 있겠다는 단단한 의식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그로인해 외부에서 정체성을 찾는 기존의 기독교적인 사관에 비해, 당연히 그는 자신 안에서 종교의 신성을 추구하고 나아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강력히 피력을 해나갔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기존 서구의 종교들에 조금은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중들에게 환영을 받게되고, 그에따른 추종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서구의 국가들의 입장에서 사상적 오류성의 선동자로 인식이 되었으리라.

  또한 그는 부유한 자만이 종교적이 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종교적이 되기가 힘들다고 한다. 예를들어 붓다는 엄청나게 부유했기 때문에 종교적이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붓다가 왕궁이 아닌 가난한 서민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을시 종교적이 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럼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수 있을지? 그리고 티벳과 같은 나라에서 탄생한 달라이 라마같은 정신적인 지도자는 또 어떻게 해석을 할 수가 있을지?

  나아가 라즈니쉬 본인은 그의 말대로 더욱 종교적인 인간(?)이 되기를 갈망해, 롤스로이스 구루라고 불리울 정도로 더욱 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를통해 과연 그는 더욱 종교적이 될 수가 있었을까? 그가 강조한 바라는 명상의 경지에 더욱 다다를수 있었을까?


6. 침묵과 의식

  라즈니쉬가 명상의 제반적인 요건으로 강조한 것이 침묵과 깨어있는 의식의 모습이다. 그는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중요할 뿐이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를통해 행동의 변화가 시작되기에 라즈니쉬 본인은 언제 어디서든 침묵을 실천 하였고 그속에서 그의 의식은 성장을 할수 있었다. 이같은 그의 모습은 많은 추종자들을 낳게 하였고 그의 명상에서도 이것은 중요한 한부분을 차지한다.

7. 이상과 한계

  라즈니쉬 본인은 스스로를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로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전쟁을 멈추기 위한 하나의 이상적인 세계정부를 주창한다. 이것은 얼핏보면 미래학자중 한사람인 자크 아달리의 ‘미래의 물결’에서 언급한 현재의 국가의 해체상태인 하이퍼 제국을 연상 시킨다. 그리고 그는 채워져야 할 상호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세계 아카데미를 세우기를 또한 희망 하였다. 하지만 이상적인 전쟁이 없는 사랑이 넘치는 세계를 꿈꿨던 또한 세우기를 원했던 그의 바램과는 달리, 일각의 시각에서 보듯 그는 위험한 사상적인 테러리스트로써 인식이 되곤 하였다. 마지막 그의 말대로 존재계에 대한 제안의 사명자로써 하나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꿈꾸어 왔던 오쇼 라즈니쉬. 예수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선포했듯 오히려 이런 모습이 그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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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14:34:29 *.12.130.72
그가 주장했던 부자가 되어야 명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어.
스스로도 밝히듯이 부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가 물질적 풍요로움이고 또 하나는 지성의 풍요로움이라고.
달라이 라마나 예수님의 경우는 지성이 풍요로운 그래서 오히려 물질적 풍요로움은 초월한 의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

어쩌면 곳간이 차지 않으면 예를 차릴 수 없다는 관중의 말과도 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
우리가 세상에 아직 미련이 많으면 갈망이 많으면 그 상태로는 영적 성장, 즉 명상에 몰입하기 어렵다는 것을
오쇼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풀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가브리엘 그대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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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6.23 12:07:21 *.165.8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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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살아야한다 나는 살아야한다 file 예원 2009.06.29 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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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마르틴 그레이 [1] [1] 희산 2009.06.29 2368
1926 살아야한다 나는 살아야한다; For Those I Loved. 백산 2009.06.29 2763
1925 [13]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인용문 수희향 2009.06.28 2027
1924 [13]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2] 수희향 2009.06.28 2449
1923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2] 書元 이승호 2009.06.28 2347
1922 살아야 한다. 나는살아야 한다 - 마르틴 그레이 [3] 혁산 2009.06.28 2610
1921 [11]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안에 있다 [1] 정야 2009.06.22 2867
1920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1] 희산 2009.06.22 2768
1919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 길은 내 안에 있다 [1] [2] 혜향 2009.06.22 2956
1918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 안에 있다. [1] 백산 2009.06.22 2448
1917 [12] <오쇼 라즈니쉬>- 인용문 수희향 2009.06.22 2535
1916 [12] <오쇼 라즈니쉬>-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4] 수희향 2009.06.22 3685
1915 [12]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태일출판사 [2] 범해 좌경숙 2009.06.22 2915
»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 [2] 書元 이승호 2009.06.22 3285
1913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3] 혁산 2009.06.21 2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