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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03시 02분 등록

 

1부 저자에 대하여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자:

사실 그가 이번 생 몇 살에 깨달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그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이미 여러 생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을 테니까. 그를 바탕으로 이번 생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특별한 스승없이 스스로 끝없이 명상에 빠져든다. 여하간 그는 이번 행성 방문을 끝으로 더 이상 육체에는 깃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현생 21세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를 끓는 것 같다.

 

20년간 침묵의 세월:

깨달음을 얻고도 이후 약 20년에 걸쳐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까지 준비기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청중이 입장에서 종교가로 위장하다:

처음 그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밝히지 못한다. 현존하는 존재로서의 그와 비존재들간의 괴리감이 너무 커서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이 대중들이 사용하는 단어에 자신의 뜻을 담아 그들에게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대중들의 영적 수준이 전개됨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수단이요 방법이지만, 그에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그를 비난하는 수단을 제공하기도 한다.

 

아차리야:

스승이라는 뜻이다. 대중은 스승에 익숙하다. 이제 그 역시 스승의 단계에 오른다.

 

바그완:

도달한 자.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인정한다.

 

조르바 붓다:

그는 스스로를 조르바 붓다라고 표현한다. 깨달았으나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는 붓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부터 현대인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일들이 파생되며 그는 미국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몇 가지 일들은 나로서도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 일들이다 (논의 가능한 부분은 내가 저자라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오쇼 라즈니쉬:

대양의 라는 뜻이다. 세상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는 치유음이라고 한다.

 

저자는 1990 1 19일 오후 5, 주치의의 특별 조치 제안을 물리치고 존재계의 뜻에 따라 지구라는 행성 방문을 마감한다. 태어난 적도 없기에 죽은 적도 없는 그 자신의 말처럼 그가 일으킨 물결만 뒤로 한 체로 자신 안의 존재계와 하나 되었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주제:

이 책의 주제는 모든 독자에게 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철저한 개인성. 그렇게 깨달음은 우리에게 각자 고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종교 Vs 종교성:

이 책을 관통하는 몇 가지 핵심 사항 중의 하나이다.

 

인류역사는 원시 주술시대를 거쳐 종교로 그리고 과학의 시대로 발전을 거듭해 21세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오쇼의 말대로라면 붓다 이후 25세기 동안 인류는 인류 본성을 억압하는 제도와 장치만 발전시켜 왔을 뿐 결코 영성의 발전은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발전의 핵을 주도해왔던 서구사회는 마침내 물질 앞에 영혼이 지쳐 현대 사회에서는 동양보다 내면의 여행에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112가지의 명상 비법까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진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오쇼에 따르면 철저히 개개인이 자신들 안에 내재해 있는 종교성, 즉 개인 안의 신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를 이룰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명상이라 한다.

 

진리라는 그 무엇인가가 종교라는 이름에 갇히는 그 순간부터 진리는 조직화에 의해 그 본질이 왜곡되어 몇몇 성직자들의 권력 놀음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에, 고타마 붓다가 그러했듯이 오쇼 역시도 종교와 종교성을 철저히 구별하여 오직 자신 안의 불성을 일깨우는 일에만 전념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신인류 시대의 새로운 종교성이요, 바로 인류 역사상 세 번째 양자역학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라는 이름아래 저질러진 추악한 만행을 떠올릴 때, 종교 역시 정치나 기타 인간의 제도적 장치와 다름아닌 과거와 현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지식적으로 일단 동의하고 싶은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온 우주가 창조주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과학이 어느 정도 접근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신은 죽었다라는 주장을 펼칠 때, 나 역시 외부의 신이 아닌 내면의 신성에 집중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라는 감옥:

인간은 스스로 만든 세 가지 허상의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다름 아닌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다.

 

인간 스스로 지은 감옥 안에서 문도 없고 열쇠도 없는 감옥 안에서 그 안에 갇힌 자들만이 그것을 알지 못한 체 삶을 지속하고 있다.

 

역사는 과연 진실할까?

요즘 계속해서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물려 받은 정보는 과연 얼마나 진실에 근접해 있는 걸까? 한 가지 사실을 놓고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또 얼마나 달라지는 것이 역사인지.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 단 한가지 사료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은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진실에 근접한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오쇼는 아예 미래의 역사는 새로운 관점에서 씌여질 것이라고 한다 (15). 미래 역사학자들은 고타마 붓다가 깨달았을 때 그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심을 둘 것이라 하는데, 과학의 시대 다음에 어떠한 시대가 도래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너는 왜 고행의 길을 가려 하느냐?

오프 수업 때 사부님께서 내게 던지신 질문이었고 그 순간부터 내게 박혀있었다. ? 그에 대한 답을 159쪽에서 찾았다 (칼럼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외부에 그 대상이 있었고,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자세, 접근 태도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대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는 똑 같은 사람이다 (159~160).”

 

인류는 어째서 과거 동시대에 여러 명의 현자를 지니게 되었을까?

고타마 붓다, 중국의 노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서 그들은 모두 동시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다 (236).

 

여기에 공자까지 합세해야 하겠다. 나는 늘 이것이 궁금했었다. 어째서 인류는 수 천 년 전에 전 인류 사상을 뒤흔들고 이끌어갈 그토록 뛰어난 현자들을 한꺼번에 맞이했던 것일까? 그 후로는 어째서 그들만한 현자들의 출현이 없는 걸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쇼의 말에 의존해 떠듬떠듬 이해를 해보자면, 그건 인류 역사가 그 시대 이후 영성의 발전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 시대 이후 서구에서는 로마를 거쳐 중세 기독교 시대가 전개되면서 내적 깨달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역사가 펼쳐진다. 도저히 고타마 붓다 같은 깨달은 자를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반면 동양의 경우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또한 붓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할 역사가 전개되지 못한다.

 

또 한가지. 어째서 그 시대만 유독 다수의 현자가 출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그때는 각 지역마다 영성이 성숙한 시기이지만 지역간 교류는 현대처럼 원할한 시대가 아니어서 벌어진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동서양이 지역적 제한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통합될 수 있기에 오쇼 같은 단 한 사람의 신비가 혹은 명상가가 동서양의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섹스 구루:

성이 억압되어 왔다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더 강요된 면이 없지 않기에 말이다.

 

하지만 성적인 억압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점은 약간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다름 아닌 한국의 수많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내노라 하는 큰 스님들께서는 어떻게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깨달음의 길에 이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물론 성의 억압을 포함한 분노, 고통 등의 내 안의 쓰레기를 정화한 뒤에야 비로소 고요히 침묵하며 명상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역시나 음

 

춤이 갖는 영적인 상징성: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춤을 춘다면 생각은 멈춘다 (343).

 

그대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대를 추게 허락한다면, 춤이 그대를 가지도록 허락한다면, 만약 그대가 춤에 사로잡힌다면 그때 생각은 멈춘다 (344).

 

원시시대 제례 의식에도 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쩌면 춤이라는 인간의 행위에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생각을 멈추게 하여 마음과 의식이 분리하는 그 어떤 영성인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행위인 춤. 거기에 인간들의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상징성이 있는 듯하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3단계 욕구: 육적인 욕구- 심리적 욕구- 영적인 욕구

배가 고프면 시와 예술을 논할 수 없다고 한다. 사부님께서 인용하신 관중의 말과 통함이다. 시와 예술을 논해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다고 한다. 영적인 욕구이다.

 

때문에 기독교는 가난한 나라에서 전파되기 쉬운 종교이고, 불교는 혹은 명상은 앞의 두 단계 욕구가 비교적 채워진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 혹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이라 한다.

 

꽤 흥미로운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영적인 욕구에 이르는 3단계는 나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단계인 것 같다.

 

보고, 버리고 그리고 명상하라:

우선 내 안의 쓰레기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무언가를 비워야 하는데 무엇을 비울지를 알지 못한다면 시작부터가 가능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다 버려야 한다. 그렇게 내면의 정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만 고요히 침묵의 명사에 빠져들 수 있다.

 

그룹을 추구하는 서양 Vs 개인을 추구하는 동양:

에고가 강한 서양은 그룹을 갈망하고 사회 관계성이 강한 동양에서는 히말라야로 수행을 떠난다고 한다. 이 역시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본질 파악을 하지 못했던 부분인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 사회는 과연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나는 경쟁, 체면 그리고 고독 이 세 단어를 키워드로 뽑고 싶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펼쳐지는 과다한 경쟁 속에서도 여전히 뿌리 깊은 사회적 체면은 내 영육이 모두 지칠만큼 나를 옭아매고 있다. 그 가운데 개개인은 뼈저린 고독에 허덕이는 것이 2009년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영적으로 나는 기도와 경전 공부를 주로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명상 혹은 참선을 시도해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3단계 욕구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강렬히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단계와 2단계의 혼용 정도가 아닐까 싶다.

 

끝으로 명상의 3단계에 비추어 보면, 내 안을 이제 겨우 보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함께 아주 조금씩 버리는 작업에 들어선 것 같다. 물론 변경영이 명상 단체는 아니지만,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 명상의 준비 단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음이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나는 이제 겨우 보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함께 버리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나는:

이 책을 머리로 읽어야 할까? 이 책에서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으로 끝낸다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오쇼 라즈니쉬의 모든 방법에 동의하고 안 하고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깨달은 자임에 거의 틀림없다. 나의 영격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뭐라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말하는 본질은 진리를 논하고 있음이다. 실행 방법이 고타마 붓다처럼 점잖지 못하다고 해서 본질이 그릇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는 시대를 앞서 우리에게 온 현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계속해서 끄집어 내어 생각해 보았다.

 

이번 주는 칼럼이 진정한 북리뷰의 완결편이 될 것 같다.  

IP *.204.15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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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6.23 10:17:36 *.12.21.21
책에서 알아지는 것에 대한 견해에서 마지막에는  우리의 사회와 자신을 비춰보는 구조가 좋네.
언제나 책을 내것으로 만들어 보이는 모습이.....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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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1:16:05 *.204.150.130
노우~노우~ 부러운 일이 아니고 습관의 차이일 뿐이야.
그냥 "나는??"이라고 한 번만 떠올리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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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6:45:02 *.118.47.142
언니~
언니의 내공과 공력!

내는 두꺼니들을 한번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어쩌다 다시 한번 읽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예전에 쓴 리뷰가 얼마나 모자란지..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도 많고..

근데.. 언니가 있어 참..다행이라는 생각이어여..
보고.. 배우고.. 이해하고..감동하고.. 느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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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7:49:14 *.12.130.120
먼소리! 요즘은 내가 니 리뷰 배우고 끄덕끄덕거리는디!
내가 고맙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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