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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08시 0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 1931 - 1990)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자이나교도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대신 외조부의 손에 자란 7세까지의 생활은 그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이었으며,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경험한 진리에 입각하여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는 독특한 정신으로 자라났다.


1951년 자이나 대학에 입학하여 여러 토론 대회를 수상한 경력으로 S.S 로이 교수로부터 사가르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도록 초청받아 1956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 시기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인간의식의 발전 단계를 규명하고,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파했다. 1957년 철학석사학위를 받아 라이푸르의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그 후에는 자발푸르 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 생활을 했다. 


그후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공개토론을 통해 정통종교와 그 지도자들에게 도전하고, 전통적인 믿음과 삶의 방식에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1968년 봄베이에서 그리고 그후 푸나에서 명상캠프를 열고 사람들을 일깨워 제자가 늘어났다. 그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졌다. 그러나 1980년 강의 중 어느 힌두교파에 의한 암살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전통적 교파로부터는 배척을 받았다.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거기에서 농업 공동체를 만들었으나 그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체포당하고 인도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후 네팔, 그리스, 스위스, 스웨덴, 영국, 아일랜드 등 21개 국가로부터 추방당하거나 입국울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 종교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대 권리, 즉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권리’를 방해하려 한다는 그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강의와 가르침을 통해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오쇼가 전세계에서 온 제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은 30개가 넘는 언어를 통해 600권이 넘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1987년 푸나로 돌아온 후 가르침을 계속하다 1990년 1월 19일 ‘바다와 같이 무한하다’는 의미의 ‘오쇼’ 라즈니쉬 라는 이름을 남기고 그는 영혼의 근원인 우주의 웃음바다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스스로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고 이 지구를 잠깐 다녀간 오쇼’라고 표현했다. ‘선데이 타임즈‘는 ’20기를 빛낸 위인 1000’에 오쇼를 선정했으며, 미국 작가 톰 로빈스는 오쇼를 가리켜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 평하기도 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그대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의 차이이다. 보통의 역사학은 사실들이 대해, 물질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14)


이 이야기는 내적인 사가들의 기록이다. (15)


1부 - 평범한 인간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언제나 홀로 있다. (19)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 (20)


그 어린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해 있지 않았다. (25)


내가 나의 홀로 있음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25)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었다. (27)


“이 아이에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해요.” (28)


“아이는 단지 자신의 타고난 자아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끼어들지 않을 거예요.” (30)


나의 외할아버지, 그는 관대함에 있어서는 부자였다. 나는 그에게서 베품의 미학을 배웠다. (31)


그는 결코 나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은 것, 그것이 대단한 점이다. 무력한 아이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유혹당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가장 큰 유혹이라고 부른다. (35)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 (36)


자이나교도들은 자신을 성취한 뒤 그의 깨달음의 아름다움에 너무나 깊이 빠지고 너무나 취해서 온 세상을 잊은 사람을 일컬어 아리한따라고 부른다. 아리한따라는 단어의 말 그대로의 의미는 ‘적을 죽인 자’이다. 그리고 그 적은 에고이다. 만트라의 첫 구절은 ‘나는 자신을 성취한 자의 발밑에 절합니다.’라는 의미이다. (38)


에고(ego) : 자아 인간이 ‘나’라고 믿는 허상(虛像), 소아(小我), 에고의 허상을 부수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실체인 진아(眞我) 즉, 아트만(Atman)을 회복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38)


산스크리트라는 그 말 자체가 바로 ‘정제된’이라는 의미이다. (39)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들은 무엇이든 믿으려 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착취당해왔다. (43)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단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무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종교적이 될 것이고 아이들을 올바른 종교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43)


샨띠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침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기본적인 의미이다. (49)


“당신이 타고난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씨앗이에요. 거기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53)


나는 조르바 붓다이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다. 사실 나는 동양과 서양, 높은 것과 낮은 것,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신과 악마를 나누지 않는다. 나는 나누지 않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누어졌던 모든 것을 다시 합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54)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최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54)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안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뿐이다.” (60)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62)


나는 여러 점에서 운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나에게 외조부모가 있었고 그 유년의 황금빛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66)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부터 나는 오직 한 가지 놀이만을 사랑했다. 그것은 논쟁이었다. 모든 것들에 대한 논쟁이었다. (67)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67)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 (69)


“저는 교육받은 방랑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싫어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방앙자라고 해도 존경받을 만해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 (76)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81)


나는 모든 기회를 나의 지성과 개성을 가다듬는데 이용했다. (85)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100)


모든 것은 과정이다. (100)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결과가 어찌되든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옳든 그르든 나는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충고와 이상, 수행을 따른다면 설사 내가 천국에 도달한다 해도 적어도 나만의 삶의 길을 따랐다는 만족감만은 가지게 될 것이다. (105)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 (106)


종교는 종교적인 특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질이 빠져 있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유머감각이다. (108)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으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116)


“선생님의 과목이 아니면 어떠한 조언도 저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저의 삶을 탐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119)


“하지만 조심해라. 책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마라.” (123)


“나는 네 질문이 뭔지 안다. 왜 신을 밎지 않느냐고? 나는 내가 죽을 때 네가 이 질문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완전하게 살았다.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내일 할 일이 달리 뭐가 있겠니? 나는 그것을 다 했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내 맥박이 느려지고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평화롭고,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이기 때문이야. 내가 완전히 죽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사는 건지,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라. 나는 두렵지 않다.” (124)


“그것은 어떤 직업이 더 유리할지 저울질해볼 문제가 아니에요. 거지가 될지라도 저는 철학을 공부할 거에요.” (125)


“저는 일생 동안 철학자들과 싸울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해요.” (126)


“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었든지, 저는 누가 뭐래도 그것을 했을 거예요. 저는 제 속에 하나의 결정을,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127)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영한다.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129)


그대는 그 얼굴에 모든 것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의식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때 그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몸 둘레에는 오라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대는 침묵을 느낄 것이다. 슬픔이 아니라 침묵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지복 속에 죽었을 때 그대는 갑자기 그대 곁에 깃드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129)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 (131)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132)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132)


외할아버지, 그는 나의 일부였다. 나는 그와 함께, 그의 사랑과 함께 자라났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먹는 것이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매우 깊은 무언가가 일어났다. (137)


“만약 그 점성술가가 말한 대로 죽음이 일어날 것이라면 준비하는 편이 나아요. 그리고 왜 죽음을 기다려고? 왜 내가 직접 가서 미리 죽음을 만나면 안 돼요? 만약 내가 죽을 것이라면 의식적으로 죽는 게 나아요.” (138)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들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즉,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 (139)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140)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삶은 모든 걱정과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 죽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 (140)


그는 공과 결혼한 것이며 무(無)와 결혼한 것이다. 이는 모든 위대한 성인들이 찾아왔던 결혼이다. (145)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 (147)


그것은 엄청난 한 해였다. 나는 무(無)에, 공(空)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잃었다. (150)


나의 모든 관심은 나 자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너무나 자력이 넘쳤고, 그 당기는 힘은 너무나 광대했다. (150)


구멍은 한 쪽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터널이다. 나는 나 스스로 그것을 경험했다. (151)


그대가 처음으로 무심(無心)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광기처럼 보인다.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미친 밤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종교들은 그대가 무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스승이 그대를 돕고 그대에게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153)


“스승을 발견한 사람은 운이 좋다.” (154)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사원을 ‘구루드와라’, 즉 ‘스승의 문’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스승이 의미하는 바이다. 스승은 문이다. (155)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따.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158)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159)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159)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160)


노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161)


나에게 있어 그것은 완전한 이완의 상태에서 일어났다. 깨달음은 언제나 그러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161)


바로 그 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구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구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함을 놓아버려야 하는 때가 온다. (164)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164)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165)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자리보다 앞으로 도약하는 것, 미래로 도약하는 것, 내일로 도약하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에고의 현상이다. (165)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166)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167)


그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생을 거치며 노력해왔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

존재는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존재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가, 그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가,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전 존재가 그대를 향해 들이닥친다. 그대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68)


그 7일 간은 엄청난 변형의, 완전한 변형의 날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전적으로 새로운 에너지의 현존, 새로운 빛, 새로운 기뿜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내가 폭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경험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거세게 밀려오는 지복의 물결과 같았다. 하루 종일 이상하고 어리둥절했다. 또 그것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체험이었다. (170)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음은 멀리, 더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것을 붙잡아 두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순히 그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대로 좋았다. (171)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죽음과 같은 어떤 것, 매우 강렬한 어떤 것, 죽음도 아니고 새로운 탄생도 아니며, 십자가의 못 박힘도 부활도 아닌, 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어떤 것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있기가 불가능했다. 나는 취해 있었다. (172)


나는 거의 허리케인과 같은, 거대한 빛과 기쁨과 환희의 폭풍처럼 사방으로 나를 둘러싼 고동치는 생명, 거대한 진동을 느꼈다. 나는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73)


나는 거기 없었다. 그것이 거기 있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이 거기 있었다. (178)


신과 세상, 그것은 둘이 아니다. 그대에게 눈이 있다면, 어떤 꿈의 먼지도, 어떤 잠의 안개도 없는 깨끗한 눈이 있다면, 그때 신은 세상이다. 만약 그대가 깨끗한 눈, 명료함, 지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오직 신만이 있을 뿐이다. (183)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태어났다. (184)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과정이다. 그 개인성 때문에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 먼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정해진 단계들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을 통과한다. (185)


걸어가면서 그대가 길을 만든다. 그대의 걸음 자체가 길을 만든다. (186)


먼저 도달한 자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만들어왔다. 모든 종교가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개인들의 유일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이 전 인류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189)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깨달은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둘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당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192)


깨달은 사람은 대답들을, 경전들을, 따옴표들을 가지고 있지 안다. 그는 단순히 열려 있다. 하나의 거울처럼 그는 감응한다. 그리고 그는 강렬함과 전체성을 가지고 감응한다. (194)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


나는 이 ‘이야기 들려주기’가 나에게 표현력을 더해주고 그것이 깨달음 후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만 그들이 모두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을 전할 수 없다. (196)


그러나 그들은 그대에게 깊이 사는 법, 전체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대가 알별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이 있고 전체적인 삶 속에서이다. 그 안에서 궁극을 향한 작은 문들과 창문들이 열린다. (199)


“나는 너에 대해 아무거도 알고 싶지 않다. 내가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204)


“당신의 ‘절대’는 완전합니까? 그것이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닙니다.” (205)


“너는 나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나는 너에게 배울 게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모든 학위들을 취소시켜 버렸다.” (207)


“저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만을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대답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208)


그리하여 나의 전 생에는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따.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것이 그 한 가지 측면이었다. 두 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께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213)


“당신은 고타마 붓다도 방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물을 닦으십시오, 그것은 악어의 눈물입니다.” (215)


그 모든 경험들은 아름다웠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선생이 되었을 때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학생들의 관점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8)


가능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모든 각도,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것이 토론되어져야 했고, 모든 거이 검토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지적으로 만족했을 때에만 답으로 받아들여졌다. (219)


나는 어떤 것에 대해 토론하고 스스로 논리적인 모형을 발견했을 때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대 자신의 발견이기에 그것은 그대와 함께 남는다.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219)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따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 왔다. 사회는 그대의 마음 속 높은 자리에 체면을 놓고, 그 반대편에서는 사회가 그대로 하여금 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을 놓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그것들을 행하면 그대는 체면을 잃는다. 그래서 그대가 :나는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사회는 그대의 의지에 반대되는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강요할 힘이 없다. (226)


선생들은 시인들만큼 타고난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이다. 누구나 선생이 될 수는 없다. (233)


그대는 공자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느 크리슈나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해야 한다. 그대는 버트란드 러셀을 생각해야 한다. 그대가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각기 다른 천재들의 그 모든 기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현대인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다리를 놓을 유일한 방법은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의 앎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알게 된 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언어들을 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일은 광대하다. 그러나 그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천재들에 대한 탐험..... 만약 그대가 그대 안에 이해의 빛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 어려움도 없이 하나의 통합을 창조해낼 수 있다. (237)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 것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 (239)


나는 어떤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241)


나는 종교라는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모든 역사는 악취를 풍길 뿐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나는 아직도 종교라는 단어와 연관되는 것을 불편하게 느낀다. (244)


나는 진리를 찾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비종교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가까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아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미지의 공간을 여행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어떤 종교에, 어떤 종파에, 어떤 철학에 연관되어 있었다. (247)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단어들만을 듣는다. 그들은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그대가 말하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들은 말없이 전달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그들 자신의 무기를 그들을 향해 사용했다. 나는 종교적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안에 전적인 나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249)


나는 단지 처음에 그들의 단어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만 주의하면 되었다. 그 후에는 말들 사이, 단어들 사이에 내가 정말로 관심 있어 하는 진짜 요소들을 내놓았다. 나는 낚시꾼에게서 그 기술을 배웠다. (254)


나는 미끼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255)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안다. (273)


나의 성공은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278)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281)


일단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이제 그대의 모든 초점이 바뀔 것이다. (283)


그리고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83)


그대의 의식이 그대에게 너무나 큰 지복을 주었다. 탐욕이 그대에게 고뇌 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야심이 그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284)


먼저 그대의 삶 속에 빛을 가져오라.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랴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285)


일단 그대에게 위대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그대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축복을 느낄 것이다. 존재가 그대를 위해 의식의 봉우리들 중의 하나를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그대는 느낄 것이다. (286)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와 상관없이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가 독립적이 되기를, 그리고 그대 스스로도 이 고귀한 순간들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288)


2부 - 빈 그림에 비친 그림자들

왜냐하면 그것만이 삶 속에 더 큰 무언가가, 더 높은 무언가가, 더 훌륭한 무언가가, 훨씬 더 행복하고, 훨씬 더 큰 오르가슴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99)


세계 어디에서도 성적인 에너지를 영적인 에너지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선정성에만 관심이 있다. (301)


나는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305)


나에게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독립적이 되고 점점 더 그들 자신이 되어간다. (306)


나는 두 가지 수준에서 작업해야 한다. 하나는 그대가 살고 있는, 그대가 위치해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위치하고 있는 수준이며 그대 또한 도달하게 하고 싶은 수준이다. (307)


나는 찾고 탐구했다. 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바로 신성(神性)이다. (315)


그대들은 모두 바그완이다. 그 단어는 성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보편성을, 그대의 본성 자체를 나타낸다. 이미 그대는 신이다. (320)


이제 나는 나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다른 층, 다른 차원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준다. (321)


나는 존재를 나누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를 깨우기 위해 여기 있다. 나는 그대에게 지식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앎’을 준다. (322)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323)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324)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적으로 매우 가난한 자이다.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 (329)


그대는 그대의 돈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대는 그대의 성공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그대는 그대의 삶에 좌절했기 때문에 여기 있다.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330)


종교는 최후의 사치품이다. 이 사치품에 이르려면 그대는 매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지성적이어야 한다. (333)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337)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그대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온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라온다.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343)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 (343)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346)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52)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353)


스승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일깨울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극할 수 있다. 그들은 그대를 흔들 수 있고 깨울 수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신, 진리, 니르바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대는 이미 그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358)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 있게 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 (359)


갑자기 그대가 깨끗해질 때, 그대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환희가 일어나고 그대의 전 존재가, 그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춘다. (362)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는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던진다. 그는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근원을 깨닫게 한다. 그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정수를, 그대 자신의 신성을 깨닫게 한다. (365)


스승은 그대의 의사이다. 일반적인 병이 아닌 그대의 존재적 갈등을 치유하는 의사이다. (367)


현자는 그대가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그대 자신의 등불을 가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그대는 통찰력을 원치 않는다. 그대는 명확한 지침을 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 (268)


왜냐하면 그대가 책임을 맡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대를 올바르게 인도할 사람이 없다. (368)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368)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370)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71)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372)


왜냐하면 나의 모든 가르침은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374)


세상 속에 살라. 세상을 경험하라. 세상은 하나의 학교이다.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374)


각각의 발걸음은 시험이다. 삶은 하나의 기회이다. (374)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는 각각의 개인 그 자신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376)


3부 - 유산

나는 그대에게 종교 아닌 종교를 가르친다. 나는 그대에게 그 맛을 가르친다. (384)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387)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의미를 원한다면 신이 제거되어야 한다. (390)


나의 모든 노력은 종교 아닌 종교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393)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393)


처음으로 나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393)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명상은 존재가 평화롭고 지복스럽게 꽃피어나는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그대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395)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407)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7)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이다. (408)


그대는 그대가 서 있는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409)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412)


분노가 내던져지고 탐욕이 내던져지고…… 층층이 이런 것들이 거기에 쌓여 있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러한 것들을 내던지고 나면 그대는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414)


내적인 도박은 그 정반대이다. 패배조차도 다가오는 승리의 시작이다. 명상자는 결코 마지막에 지지 않는다. (418)


그대가 무슨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지, 미쳐버리라는 말은 “이제 나는 모든 두려움을 놓아버린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419)


우리는 하루하루 광기를 쌓아간다. 그것은 마치 집안에 쓰레기가 있는데 계속해서 그 쓰레기를 구석에 숨기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419)


오직 이 모든 쓰레기를 밖으로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내던져지면 그대 안의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420)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존재 사이에 거리를 창조해낼 수 있을 때, 그때 그대는 붓다의 심리학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429)


붓다의 심리학은 마음 안에서 작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430)


문제는 분석이나 봉합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각하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심리치료법으로는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요법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치유할 수는 없다.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434)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공간 속에 있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들은 히말라야로 가고 싶어 한다. 사회가 너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싫증이 나 있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나 있다. (442)


수명은 광대하고 엄청나다. 급할 것이 없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가? 만약 그것이 이번 생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언젠가 다른 생에 일어날 것이다. (448)


그대는 그대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그 모든 쓰레기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대가 그 짐을 벗지 않는 한 그대는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 (449)


내가 성을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받아들임 없이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완전히 깨끗해지기를,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457)


보물은 마음 뒤에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이다. (460)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461)


이 세상과 저 세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높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 (461)


서양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있다. (463)


커다란 불균형이 일어났다. 부는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부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가난함을, 커다란 빈곤함을 느끼고 있다. (463)


명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명상은 다시 한 번 그대의 내면 세계 속으로, 그대의 내면성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464)


동양도 부유했을 때는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464)


불만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유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부유함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내적인 불만을 자각하지 못한다. (465)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 (473)


국가의 시대는 갔다. 분열의 시대는 갔다. 정치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473)


동양은 보물들을, 종교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서양은 과학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바로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다. (474)


명상과 사랑, 이것이 삶의 양극이다. 이것은 궁극의 양극성이다. (474)


명상은 홀로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475)


나는 양쪽 편으로부터 모두 진리를 맛보았다. 나는 전체적으로 사랑했고 전체적으로 명상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사람은 양쪽을 알았을 때에만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477)


이제 인류는 전체적인 시야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절반의 시야만으로 살아왔다. (478)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 모든 양극들은 용해되고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양극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양극들을 포함한다. 이 만남은 새로운 인간, 조르바 붓다(Zorba the Buddha)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이 신 인간을 부르는 나의 이름이다. (479)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메시지는 신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이다. (479)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은 악마와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도덕성은 부도덕성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립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중성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분열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인간과 함께 하나의 신세계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신인간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껏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는 동시에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일 것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택 없이 자신일 것이다. (481)


나는 자유를 가르친다. 이제 인간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더 이상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개인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반역적이 되어야 한다. (482)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각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意識)이, 엄청난 주시(注視)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에 에피쿠로스일 것이다. (483)


나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그것은 더 해볼만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실패했고 과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뭔가 더 높은 통합체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고, 종교와 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합체가 필요하다. (486)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다. 시, 음악, 조각…… 일단 우리가 이 신인간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지구는 처음으로 마땅히 되었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땅이 천국이다. (487)


4부 -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라나크푸르 명상캠프는 오쇼의 일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이 캠프에서의 강ㅇㄴ과 명상 과정이 처음으로 녹음되고 <자아실현의 길 Path to Self-Realization>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 때문이다. 오쇼는 이 책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 있으며 그 가르침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완전한 길 The Perfect Way, Rebel Publishing House, India>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캠프에 참여하기 위한 세 가지 지침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495)


옛 방식에 계속 얽매여 있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501)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502)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505)


그대는 그대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18/519)


그들은 세상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명상은 세상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들의 명상은 현실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534)


선가(禪家)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러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하지 않고, 물도 기러기들의 상(像)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像)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을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지려는 갈망이 없다. (543)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전체적으로 살아라. 야망 없이, 욕망 없이 살아라. (543)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565)


실패조차 그대를 성공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왜냐하면 각각의 실패는 그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582)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586)


그리고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기억하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대 자신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그대는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88)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589)


그대의 성장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그대를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590)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593)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 (593)


내가 나의 삶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600)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620)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 (622)



3. 내가 저자라면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이 책에서 오쇼는 직접 실천, 실행하여 자기 혁명으로 창조한 자신의 일대기를 자신의 존재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과 지혜로 하나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오쇼, 그에게도 씨앗이 보였다.

<열정과 기질>의 저자 하워드 가드너에 따르면 호기심 많던 유년 시절에 품었던 수많은 의문점과 문제의식, 그리고 주변을 관찰하는 섬세한 감수성은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어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쇼가 교육받지 않은 상태에서 던지는 질문들은 그 또래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까닭, 오로지 그것을 알고자 할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홀로 있음을 즐겼으며, 그의 유일한 놀이는 그 누구도 대항조차 하지 못하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논쟁‘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스승이라고 해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오쇼의 유년기에서 보이는 씨앗들이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그가 큰 나무로 자라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쇼, 그에게도 조력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오쇼 안에 있는 그것, 그의 씨앗을 알아본 외할아버지 나나와 외할머니 나니가 있었다. 그의 외조부는 가난했지만 관대함에 있어서는 부자였고, 오쇼에게 베품의 미학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결코 그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쇼를 라자, 즉 왕이라 부르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외조모 나니도 기존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그를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특별한 교육을 통해 훗날 그가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그의 믿음이었고, 그가 철학적인 방랑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계속적인 물적・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진정으로 그를 이해했다.


그는 이야기 했다.

“가장 운이 좋은 것은 나에게 외조부모가 있었고, 그 유년의 황금빛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고.


오쇼, 그 스승에 그 제자

오쇼에게는 그를 믿고, 사랑한, 그를 사가르 대학원 과정으로 이끈 S. S 로이 교수가 있었다. 로이 교수는 제자에게도 배울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쇼의 그대로를 인정한 참 스승이었다. 훗날 오쇼도 철학교수로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도전적이고 전통을 무시한 파격적인 교수 방법은 많은 수강생과 청강생을 끌어 모았다.


그의 수업은 가능한 한 깊이 있는 방법으로, 모든 각도,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것이 토론되는, 모든 것이 검토되는, 오직 지적으로 만족했을 때에만 답으로 받아들여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수업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는 선생이었고, 학생들을 존중해 주는 선생이었고, 사랑을 주는 선생이었다.


그는 말했다. 스승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스승은 그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고, 그것을 일깨울 수 있고, 그것을 자극할 수 있으며, 그대를 흔들 수 있고 깨울 수 있다고.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경험에 도달하도록 돕는 존재이며,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던져 그대가 그대의 내적인 근원을 깨닫게 하는 존재라고. 스승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정수를, 그대 자신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일반적인 병이 아닌 그대의 존재적 갈등을 치유하는 의사라고.


오쇼의 메시지 - 침묵

오쇼는 인간의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완전해지는 깨달음의 세계, 즉 궁극의 세계로 들어가면 언어는 불가능해진다고 정의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침묵을 즐기는 과정이 필요하며, 침묵을 포함한 명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잊으면 더 이상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만약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 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의 중요할 뿐이다." (283P)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의식, 그대의 침묵, 그대의 평안함이다. 그것을 통해 그대는 그대가 행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284P)


침묵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의 정신적 세계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오쇼의 메시지 - 명상

오쇼 철학에서 명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명상은 오쇼가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오쇼가 추구하는 것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다. (407P)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한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425P)


오쇼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찾는 것, 즉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명상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했다.


오쇼의 메시지 - 신인간

오쇼에 의하면 그의 일 가운데 하나는 신 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 사람, 사랑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등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평화로울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조화와 조율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쇼는 과거의 인간에 대한 개념, 즉 물질주의자냐 정신주의자냐, 도덕이냐 부도덕이냐, 죄인이냐 성인이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적 개념에서 벗어나 양쪽 중 하나가 아닌 양쪽모두를 추구하는 인간의 개념을 이끌어 냈는데 이러한 인간을 ‘신인간’이라고 칭하고,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인 인간으로 정의했다. 오쇼는 종종 신인간을 ‘조르바 붓다’라고 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세속의 기쁨을 누릴 줄 알며 동시에 붓다처럼 침묵의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책은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그런길이 아니고서도 이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부딪히는 삶의 고통과 고뇌를 초월하여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비법을 들려주고 있다.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듯하다.


오쇼의 가르침은 어떤 틀로 규정하기 힘들고, 개인적인 구도 문제에서부터 정치, 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프로이드, 융, 노자, 장자, 붓다, 그리스도 등을 통한 그의 메시지는 동서고금의 지혜 모두와 인간의식 발달의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있다. 그리고 오쇼의 모든 가르침에 흐르는 정신은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위대한 과학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받고 있는 서양과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온 동양에서는 오직 예술만이 다리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천국이자, 붓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오쇼는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현대 생활에 명상을 도입하여 인간 내면을 변화시키는데도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오쇼는 심신에 쌓인 스트레스를 발산하여 이완 상태를 만들고 결국 사념이 사라진 명상 상태를 체험케 하는 ‘동적 명상’을 개발하기도 했다.


서문에서도 ‘이 이야기는 내적인 사건들의 기록이다.’라고 밝혔듯이 오쇼는 내면의 삶을 살다 갔다. 오롯이 자기 안에서 살다 갔다. 그는 의식 속에서 살면서 우리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갔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다 간 오쇼, 인생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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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08:23:46 *.204.150.130
와... 너의 북리뷰 성장이 예사롭지가 않군...
쪼아. 아~~쭈 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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