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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11시 23분 등록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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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죠 라즈니쉬 지음, 김현국 옮김, 태일출판사

▣ 저자에 대하여

오쇼 라즈니쉬(Osho Laznishi, 19311990)

그는 60년간 지구를 다녀갔다. 그가 말하듯이 그는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깨달음의 문을 찾고 있었고 한순간도 깨달음을 찾고 있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그것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침묵을 사랑했으며 명상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똑 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하지 않았다.

 

그는 195322살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전 생애에 두 가지에 관점을 두고 살아갔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을 것,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하나는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연륜이 쌓일수록 깊이가 더해 갔다.

 

그의 가르침은 인간의 삶 전체를 다루고 있다. 어떤 틀로도 규정하기 힘들고 개인적인 심성 수련문제에서부터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문제, 철학, 이데올로기 등 모든 주제를 다룬다.

그의 책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들을 대상으로 행한 강연을 녹음하여 만든 것이다. 런던 <선데이 타임즈>에서 ‘20세기을 빛낸 위인 1000>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미국작가 톰 로빈스는 오쇼를 가르켜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 평하기도 했다.

 

오쇼는 신인간의 탄생을 강조한다. 완전한 인간 조르바 붓다이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 남자와 여자, 물질과 의식, 이 세상과 저 세상, 삶과 죽음, 도덕이냐 부도덕이냐 등 이러한 양극들이 만나 용해되어 하나되는 것이다. 그의 신인간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붓다도 될수 있는 사람이다. 감각적이면서 영적인 사람을 말하다. 오쇼는 자신의 이름을 스리 라즈니쉬 조르바 붓다로 선언했으며 그런 삶을 살다 갔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기를 바랬다.

 

그의 사상, 정신 세계는 너무나 깊고 난해하다. ‘내가 이미 신이다라는 개념으로 보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며 현재의 종교적 관념과 이념으로 보면 그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부처의 말처럼 매우 우주적이며 통찰이 깊다. 그는 신도 아니었으며 종교도 아니었다.

그는 한 영적 인간이었다.

 

1990년 오쇼 사망 이후에도 오쇼 명상리조트는 발전하고 있다. 오쇼 코뮨 이터네셔널의 명상리조트는 인도 푸나에 위치해 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시간 속의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9]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오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 행위소유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이다.[12]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3]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은 시간 너머에서, 공간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른 말로 하면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그만큼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다.[14]

 

육체와는 관계없는 일이며 그것은 의속 속의 현상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적인 사건들의 기록이다.[15]

PART ONE 평범한 인간 전설 속의 숨은 역사

황금빛 어린 시절의 일별들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19]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20]

 

거의 9년 동안 교육받지 않았다. 그 시기는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이후로는, 설사 그대가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대는 교육되어질 수 없다.[21]

 

어린 시절 동안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로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천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드러났다.[25]

 

호수는 연꽃으로 가득했고 나는 너무나 만족한 채 온 세상이 어찌되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몇 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연꽃들, 하얀 왜가리들, 그리고 침묵.[26]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27]


얼마든지 아이들을 망쳐 놓으세요. 하지만 저는 거칠어요. 그리고 계속 거친 아이로 남아 있을 거예요.[31]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도, 지옥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 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36]


자이나교도들은 자신을 성취한 뒤 그의 깨달음의 아름다움에 너무나 깊이 빠지고 너무나 취해서 온 세상을 잊은 사람을 일컬어 아리한따라고 부른다. 아리한따라는 단어의 말 그대로의 의미는 '적을 죽인 자'이다. 그리고 그 적은 에고이다.[38]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세상에 전해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40]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41]

아이들은 단지 순진무구할 뿐이다. 그 아이들에게 그대의 이른바 지식을 물려주지 말라. 그대 자신이 먼저 순진무구해져야 하고, 거짓 없이 진실해져야 한다.[43]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교육은 인간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다. 아마도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해방은 어린이의 해방이 될 것이다.[51]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 확대에 대해서 알레르기가 있다. 나는 모든 인간이 한껏 살기를 바란다. 최소한은 나의 길이 아니다. 초대한도로 살아라. 만약 최대한도 마저 넘어갈 수 있다면 더 환상적이다. 가라! 기다리지 마라!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54]

만약 누군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러나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55]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56]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57]

 

헤어짐은 그 나름의 시()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단지 그 헤어짐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이다. 그리고 힘껏  그 깊이를 체험해야 한다.[59]

"
네 질문은 틀렸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가 없다. 나는 그거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62]

반역적인 영혼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하지 않을 것이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67]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때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69]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69]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충분히 살았단다. 더 이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또 내게 말했다. “잊지 마라. 지금의 순간들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다. 결코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마라. 주어지는 만큼으로 충분하다.”[71]

7년은 그대의 70년을 결정한다. 7년 동안에 모든 주춧돌이 놓인다.
7년 동안 나는 정말로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72]

저는 교육 받은 방랑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방랑자라고 해도 존경 받을 만해요.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76]

저는 그런 바보같은 일들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요. 하지만 아주 교양 있고, 영리하고, 교육받은 방랑자는 무척 필요해요.[76]

중요한 것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81]

 

"저를 막으려는 것을 멈추신다면, 그때는 제가 그 옷을 그만 입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계속 막으려 하시면 저는 끝까지 그 옷을 버리지 않아요."[84]

 

나는 나의 지성이 예민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85]

 

참 이상하다. 인도에서는 감옥과 학교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모두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그 건물이 감옥인지 학교인지를 구별하기는 어렵다.[86]

그 학교는 정말로 추했다. 모든 학교들이 추하다 사실 어린이들이 배울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교육은 추하기 마련이다.[88]

 

나는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 나는 넓은 벽은 보지 못하지만, 작은 것, 극히 미세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92]

 

"교육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저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요. 아무도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힐 수 없어요. 저에게 교육법전을 보여주세요. 저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모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데요 창 밖을 내다보는 게 법에 어긋나는지 알려주세요."[93]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첫 번째이자 유일한 것은 우리 마을의 한쪽 편을 흐르는 작은 강에 대한 사랑이었다.[98]

 

새벽 세 시부터 나는 강과 함께 하곤 했다. 하늘은 별들이 가득하고 별들은 반사된다. 아름다운 강이다. 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 별들과 함께 강을 보며 대양을 향해 흐르는 강물과 함께 춤을 추었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강을 보았다.[99]

 

그대가 흐르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대는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100]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100]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이 나의 소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교회의 소유도 아니고 어떤 사원의 소유도 아니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원이나 교회는 나의 소유이다.[101]

 

다른 여러 가지는 나중 문제일 뿐이다. 첫번째는 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도 살수 있다. 그다지 사람답게 산다고는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예수도 빵 없이는 살 수 없다.[104]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이상(理想), 그들의 이상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단지 하나의 복사품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신은 나에게 아무런 본래의 얼굴도 주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빌어 온 얼굴로, 가면을 쓰고서, 나에게는 아무런 얼굴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삶이 하나의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얼굴조차 그대의 것이 아니라면….[104]

만약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전 존재계가 지복에 차 있는 바위가 바위이고 나무가 나무이고, 강이 강이고, 대양이 대양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돌아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다.[105]


그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하다. 그들은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 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


나는 사람들이 웃기를 바래요. 오래된 이야기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졸고 있지요. 모두 그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모든 대사를 다 알아요.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예요.” 그러나 늙은 전통주의자들, 진부한 사람들로서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대는 교회 안에서 웃을 수 없다.[112]

 

나는 그 노인을 사랑했다. 그가 그의 유년시절을 잃어 버리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112]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116]

저는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저의 권리에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에요.[117]

 

"제발 선생님의 갈 길만 가주세요. 선생님의 과목이 아니면 어떠한 조언도 제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저의 삶을 탐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리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119]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123]

"
저는 결코 생각하지 않아요. 잘 아시잖아요. 저는 단지 볼 뿐이에요. 그리고 선택의 문제는 없어요. 저는 제가 뭘 공부하게 될지 알아요. 그것은 어떤 직업이 더 유리할지 저울질해볼 문제가 아니에요. 거지가 될지라도 해도 저는 철학을 공부할 거예요."[125]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 모든 조언들을 결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저는 결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었든지, 저는 누가 뭐래도 그것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 죄의식을 느끼지 마세요. 저는 결코 여러분들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어요. 그 말들을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저는 제 속에 하나의 결정을,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127]

불멸을 찾아서
그대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그대의 전 생애를, 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영한다.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구두쇠는 주먹을 꽉 쥐고 죽을 것이다. 이직도 붙잡고 집착하면서, 아직도 죽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직도 이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나누었듯이 자신의 죽음마저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129]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그대가 어떠했든지…… 슬펐든지, 행복했든지, 사랑이 넘쳤든지, 분노했든지, 열정적이었든지, 인정이 많았든지…… 그대가 어떠했든지 그 에너지는 그대 일생의 진동을 담고 있다. 성자가 죽을 때 단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선물이다. 단지 쏟아지는 그의 에너지에 젖어드는 것은 커다란 영감을 준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의 에너지에 취할 것이다. 그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132]


그들은 와야 했기 때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단지 사회적인 관습을 충족시키기 위해, 단지 그들이 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오는 것조차도, 그들이 죽었을 때 청소차가 그들을 실어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135]

7
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 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139]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140]

내가 파리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순간, 짜증은 사라졌다. 파리들은 여전히 몸 위에 있었지만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파리들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몸 위를 움직이고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즉시 하나의 거리가 생겼다.[140]

 

만역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삶은 모든 걱정가 초조함, 그 모든 것과 함게 저 멀리 사라져 간다. 어떤 점에서는 나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 죽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다 그대가 완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는 죽음을 알게 된다.[140]

깨달음: 과거와의 단절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는 침묵을 사랑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온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구나. 시장에 가서 야채를 좀 사올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어머니 바로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누군가를 보게 되면 이야기할게요."[146]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147]

 

내가 기억하는 한 가정 어린시절부터 나는 깨달음의 문을 찾고 있었다. 틀림없이 나는 그생각을 전생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생의 어린시절 중에서 깨달음을 찾고 있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149]

 

나의 모든 관심은 나 자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너무나 자력이 넘쳤고, 그 당기는 힘은 너무나 광대했다. 지금은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151]

 

그가 거기 서서 그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 것이다. 그가 거기 서서 그 새로운 것들을 그대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의미이다. 해석 될 수 없는 것을 해석해주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는 거기 있을 것이다.[154]

 

그대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뒤는 더 이상 거기 없기 때문이다.[154]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58]

그대는 내게 묻는다. 당신이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는 웃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나는 정말 정신없이 웃었다. 모두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대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지니고 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159]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신은 어떤 것도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는다. 설사 그대가 불구인 사람을 발견한다 해도, 그대는 그 사람이 완벽한 불구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결코 불완전한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160]

내가깨달음을 얻는 날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단어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성취, 달성, 목표, 발전, 성장, 진화와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언어는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살은 깨달은 사람들은 원한다 해도 언어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160]

노자(老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161]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었고, 바위와 하늘과 태양과 공기 속에도 있었다.[164]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 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만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춘다.[165]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자리보다 앞으로 도약하는 것, 미래로 도약하는 것, 내일로 도약하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에고의 현상이다. [165]

 

에고는 현재에 있지 못한다. 에고는 미래에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미래에 존재한다면 에고는 매우 실제적으로 보인다. 현재에 존재 할 때 에고는 하나의 신기루이다. 이고는 사라지기 시작한다.[166]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의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167]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희망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168]

 

그대의 희망 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 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168]

 

하나의 깨어남이 있을 때, 그 깨어남이라는 실재와 비교되어 이 모든 실재는 비실재가 된다.[175]

 

나는 육체의 주위를 떠돌고 있다. 나는 엄청나게 강해졌고 동시에 매우 연약해졌다. 그 힘은 바위의 힘이 아리다. 그 힘은 장미꽃의 힘이다. 강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민감하고 너무나 섬세하다.[179]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꽃이나 이슬방울처럼…… 그들의 힘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다. 그들의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닌 생명의 힘이다. 그들의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창조하는 힘이다. 그들의 힘은 폭력과 공격성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180]

신과 세상, 그것도 두둘이 아니다. 그대에게 눈이 있다면 어떤 꿈의 먼지도, 어떤 잠의 안개도 없는 깨끗한 눈이 있다면 그때 신은 세상이다. 그때 신은 때로는 푸른 나무로, 때로는 빛나는 별로, 또 때로는 뻐꾸기로, 꽃으로, 어린아이로, 강으로 존재한다. 그때에는 오직 신만이 있다.[183]

 

깨달음의 길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이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도 새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다. 모든 새는 스스로 자기 발자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186]


깨달음은 다름 아닌 깨어남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은 단지 꿈들이다.[187]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192]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

칼날을 세우며
그들은 그대에게 깊이 사는 법, 전체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그리고 그대가 일별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이 있고 전체적인 삶 속에서이다.[199]

 

아마 너는 평범한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관점들은 모두 버리고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관점만을 선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202]

저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을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208]

 

나의 전 생애에 맨 처음부터 두 가지에 관점을 두고 있었다. 어떤 우둔한 일도 나에게 강요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 결과가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 대항해서 싸우고 끝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남아 있을 것, 이것이 한 측면이었다.

두번째 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깨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단지 지적인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213]

 

똑 같은 일이 교수님에게도 일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교수님은 그만큼 지적이지 않고, 그만큼 예민하지 않고, 그만큼 이해가 깊지 않아요. 그 노인은 정말 드문 인물이에요.[218]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220]

 

나는 나의 일생을 통해서 만약 조금만 체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자신의 길을 갈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는 그대와 게임을 해 왔다.[226]

 

선생은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존경해야 한다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존경은 이미 살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존경이 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때 존경은 거기 없습니다. 존경심은 단순히 생겨나야 합니다.[233]

존경은 선생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제자나 학생들에게 요구되지 않았다. 존경심은 그저 일어났다.[234]

길 위에서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238]


"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에요."[239]

 

이미 마음 밖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는 미쳐버렸을 것이다.[240]


나는 모든 독서를 통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독서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240]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241]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244]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을 방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단지 나를 피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이 전혀 없었다.[246]

 

나는 진리를 찾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두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47]


"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작용은 총이 아니라 총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253]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즐겼다. 이것은 나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나의 노래였다. 이것은 나의 시였다.[268]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언어학이나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언어 속에서 어떤 비범한 음악을 발견하는, 평범한 산문에서 위대한 시의 질()을 창조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안다.[273]


나의 강의는 정말로 명상의 위해 내가 고안한 장치의 하나이다.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274]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한다.[275]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나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관계 없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간격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부차적이다. 그 말들 사이의 침묵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일별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의 존재를 향해 많이 온 것이다.[276]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

존재는 도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 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279]

 

나는 나의 이해와 나의 통찰에 따라 나의 삶을 산다.[280]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281]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그대의 가슴에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대가 확신을 가질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281]

 

오직 그대의 이식만이 중요할 뿐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대가 침묵하게 되고, 의식적이 되고, 더 깨어 있게 됨에 따라 그대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283]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완전히 바꾸었다.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285]

 

그대의 능력을 알게 되면…….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그것을 경험했을 때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286]

PART TWO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293]

사람이 생각을 넘어선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문,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오르가슴이다.[298]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300]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303]

'
깨끗함은 신()에 다음 가는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제 신은 없으니 깨끗함만 남았다. 깨끗함이 신이다. 그리고 나는 세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바퀴벌레들을 넣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알게 되면 그대는 결코 누구에게도 그대의 마음 속에 쓰레기와 똥을 던져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범죄자들이다.[304]

 

나의 노력은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전통과 정설, 미신 믿음들을 제거하여 그대가 무심한 상태, 궁극적 침묵의 상태, 단 하나의 생각조차 움직이지 않는 그대 의식의 호수에 단 하나의 잔물결조차 없는 침묵의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306]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 갈 수는 있다.[308]

 

나는 벌거벗고 나무 밑에서 있을 수도 있고 황제처럼 궁전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나의 보물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312]

'
바그완'이란 경험의 한 상태이다. 임명이나 선거, 직함, 학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전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하고 신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바그와타(bhagwata), 즉 신성(神性)의 경험이다.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314]


그 이름은 완벽하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축복받은 자이다. 그러나 나에게 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9]

 

'바그완'은 비() 비교급 단어이다. 그대는 신보다 더 신적(神的)일 수 없다. 신보다 더 신일 수 없다. 그것은 비 비교급 단어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어떠한 성취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본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320]


그대들 은 모두 바그완이다. 그 단어는 성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보편성을, 그대의 본성 자체를 나타낸다. 이미 그대는 신이다.[320]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시적인 접근이고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그것은 로맨스이고 상상이 가득한 세계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가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323]


그리고 서서히 그대는 주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주인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 주인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핵()으로부터 온다.[324]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 위의 주지사가 될 수 있는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 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될 것이다.[324]


그대는 묻는다. "당신은 부유한 자의 스승입니까?" 그렇다. 왜냐하면 오직 부유한 자만이 나에게 올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적으로 매우 가난한 자이다.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329]

부유한 자가 종교적이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가난한 자가 종교적이라면 그는 엄청나게 총명한 것이다.[330]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330]


그대의 육체적 욕구가 충족될 때 심리적 욕구가 일어난다. 심리적 욕구 또한 충족될 때 그대의 영적 욕구가 일어난다.[332]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을 재미이다. 그에겐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337]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그대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온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라온다. 그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343]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생각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둘은 정반대이다.[343]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무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이다.[343]

웃음은 사념 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운 전주곡이 될 수 있다.[344]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 진리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나는 더 심한 농담을 고른다. 내가 가장 높은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면, 나는 가장 저질 농담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뿌리, 그대의 깊은 곳에 까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345]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346]

인류 역사상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한 사람이 실망하거나, 무의미함과 비참을 느끼거나, 자살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명상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과학이 그런 것이다.[347]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52]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물질주의자는, 여자를 사랑할 때조차도 그녀를 물건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영혼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영혼주의자는 물건을 만질 때조차도 그것을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353]
그들은 그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들은 그대를 흔들 수 있고 깨울 수 있다.[358]


진리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불러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일깨워 질 수 있다. 그대 안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안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러한 상황, 그러한 공간이 창조될 수 있다.[359]

스승의 역할은 그대를 부르는 것이다. "나자로야, 동굴에서 나오너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에서 나오너라!"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는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361]


갑자기 그대가 깨끗해질 때, 그대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환희가 일어나고 그대의 전 존재가, 그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춘다.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 이것! 알렐루야!" 그대의 존재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외침이 일어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불현듯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진다. 그대는 존재의 영원한 춤의 일부가 된다.[362]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365]
그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대를 올바르게 인도할 사람은 없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만약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즉시 징벌이 따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보상이 따라 올 것이다.[370]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좋고 나쁘고 즐겁고 슬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한 그대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준다.[371]


내가 꼭두각시 부리는 사람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성자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모두 쓰레기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그대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려 하고 있다.[372]

 

이 자유를 즐겨라.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372]

 

세상 속에 살라. 세상을 경험하라, 세상은 하나의 학교이다. 그대는 오직 세상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374]

 

나는 내가 나의 지복, 나의 사랑, 나의 환희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준데 대해 그대에게 감사한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종교성이며 바로 그 정수이다. 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향기이다. 그대는 그것을 잡을 수 있다.[375]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376]

 

PART THREE 유산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384]


나는 그대에게 종교 아닌 종교를 가르친다. 나는 그대에게 그 맛을 가르친다. 나는 신성에 대해 수용적이 되는 방법을 그대에게 준다.[384]

 

나의 모든 노력은 존재적이다.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존재적이다.[385]

 

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나무에, 산에, 강에, 별에, 그대 안에, 그대를 둘러싼 사람들 안에도 있다.[386]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386]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386]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387]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7]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391]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393]

나의 노력은 성직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성직은 신과 함께 남아 있었고 신이 없는 종교에도 남아 있었다. 이제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과 종교 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가능성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394]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문을 열어준다.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그대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명상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따라서 그대는 이것을 세 번의 양자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395]

마음은 단지 하나의 기계장치일 뿐이다.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407]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407]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들을 넘어 움직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생각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마음의 부분이다[407]

드야나란 무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의 모든 내용물을 버리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드야나가 의미하는 명상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만족도 없는 의식(意識)의 상태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버린다. 네티, 네티(neti, 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좋건 나쁘건 모든 생각들을 거부한다.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神性)이다.[408]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억압했다. [412]

그대는 알고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무엇을 만나는가? 그대는 붓다가 이야기하는 극락정토를 만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413]

명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내건다. 명상은 분명히 도박꾼의 행위이지 사업가의 행위는 아니다. [417]

 

만약 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들이 이 명상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평생 정신병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423]

 

명상은 다름아닌 절대적인 휴식이다.[423]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425]

 

심리학은 사람들이 불행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심리학은 이것이 삶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어찌 보면 그것은 사람들의 내적인 성장에 있어 위험하다. 왜냐하면 내적인 성장은 오직 신성에 대한 불만족이 있을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427]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그것은 마음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마음 밖으로 데려가는 작업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의 무아경(ecstasy)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이다.[428]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429]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이나 종합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라봄이 곧 변형이다. [430]

만약 제가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저는 다시 그 강을 더럽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뛰어든다면 더 많은 소음이 일어나고 더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가에 앉아 있는 동안 저는 그 기술을 배웠습니다.[432]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432]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433]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심리치료요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심리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를 치유한다. 마음은 단지 그대의 주변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의 중심이 아니다.[434]


서양 사람들은 사회로 달아난다. 동양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이 바로 동양에 개인적인 방편들이 존재해왔던 이유이다. 그룹 방편들은 서양에 존재한다.[443]

 

머지않아 동양도 서양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있을 것이다.[443]

사회에서 시작해서 그대 자신에 도달하라.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444]


그대의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 그 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해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448]

 

밖에 나가서 집 둘레를 열 바퀴만 뛰어라. 그 다음에 들어와서 구석에 않아 있어라.”[450]

 

벌거벗은 사람의 그림이나 조각은 그것이 그대의 성욕을 자극할 때 포르노가 된다.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다.[454]

 

사람들은 절반의 가슴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미온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강렬하게 살지 않는다. 건강한 향기를 지나고 살지 않는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을 해약하고 저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산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의욕은 전혀 없다.[457]

나의 노력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 지구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459]

마음은 그대를 속일 수 있다. 마음은 그 안에 비치는 것이 실재라는 관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치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을 가져간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친 그대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460]

이 세상과 저 세상, 소리와 침묵, 사랑과 명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461]

 

그대가 외적으로 부유할 때, 그때에만 그대는 그 대비를 통해 그대의 내적 가난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외적으로 가난할 때, 대비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는 결코 그대의 내적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다. [463]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외적으로 가난해질 때마다 그 나라는 내적인 가난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464]


그대가 내면의 부유함을 창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다시 하나의 조화로움이 일어날 때, 즉 외면의 부와 내면의 부가 만날 때, 그때 거기 진정한 만족이 있다.[468]

 

동양은 아직 명상을 할 수 없다. 먼저 물질적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과학기술을 필요로 한다.[473]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474]


명상은 홀로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475]

 

나는 전체적으로 사랑했고 전체적으로 명상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사람은 양쪽을 알았을 때에만 완전해진다는 것이다.[477]

 

신인간은 양자택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양쪽 모두일 것이다. 신인간은 현실적이면서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초세속적일 것이다. 신인간은 자신의 전체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내적인 분열도 없이 온몸으로 살아갈 것이다.[481]

 

나는 자유를 가르친다. 이제 인간은 모든 종류의 구속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감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더 이상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개인이 되어야 한다.[482]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작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意識), 엄청난 주시(注視)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 에피쿠로스일 것이다.[483]



나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그것은 더 해볼만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실패했고 과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때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동양이 실패했고 서양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뭔가 더 높은 통합체가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이 만날 수 있고, 종교와 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합체가 필요하다.[486]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487]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나는 태풍의 중심이다. 따라서 나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490]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 날은 성공하고, 어느 날은 실패한다. 어느 날은 정상에 있고, 또 어느 날은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490]

캠프의 앞부분에서 그는 캠프에 참여하기 위한 세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495]

만약 그대가 사랑에 관한 원초적인 진실을 알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그대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린 가슴으로 성()의 신성함을, 성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대는 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대는 더 성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497]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되는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것이 '스와미'의 의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502]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505]

우리의 명상은 다름 아닌 비합리적인 존재 속으로의 뛰어듦이다. 그리고 존재는 비합리적이다. 존재는 신비롭다. 존재는 신비이다. 따라서 부디 내가 그대에게 말해왔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행하도록 설득했던 것들에 집착하라. 그것을 하라. 그러면 언젠가 그대는 내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508]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다르시스를 경험하라. [511]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512]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들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이념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의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이것이 되라, 저것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514]

일단 그대가 나의 부재 속에서 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나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여기 이 몸 속에 있지 않더라도 그 접촉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517]

 

나의 의자는 비어 있을 서 있다. 그대는 나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라. 오직 그대가 나의 부재를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그대는 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나의 육체라는 탈것이 거기 없을 때에는 나를 볼 수 없다면 그대는 나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517]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518]
나는 그대를 들여다보고, 그대를 느끼고, 그대가 볼 수 없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가슴이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기껏해야 그대의 가슴을 그대 자신에게 해석해 주는 것뿐이다. 나는 산파이다.[520]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523]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524]

 

나의 요법가들은 세계 최고이다. 나의 요법가들은 명상가이기도 하다.[526]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그대의 섹스, 그대의 화, 그대의 탐욕,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그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 커다란 평온함이 일어난다. 그것은 폭풍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다.[528]


세상 속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 살도록 허락하지 말라. 그것이 나의 메시지이다.

선가(禪家)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러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 하지 않고, 물도 기러기들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은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지려는 갈망이 없다. [543]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543]

자각하라. 깨어 있어라. 그래서 이 모든 도둑들이 들어와 그대를 더럽힐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라. 명상적이 되라. 그러나 세상 속에 있어라.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세상은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대를 명상적으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

 

세상은 그대가 빗나갈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때 각각의 성공들은 엄청난 기쁨이 된다. 그대는 중심에 남는다. 그대는 태풍의 중심이 된다. 태풍은 그대 주위를 요동치지만 그대의 중심은 영향 받지 않는 채 남아 있다.
그것이 진정한 산야신의 길이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영향 받지 않고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544]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들만이 정치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551]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565]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시간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정지할 때의 느낌, 완전한 정지의 느낌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경험과 같다.[586]

나는 그대와 함께 갈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대에게 달을 보여줄 수 없다. 머지 않아 그대는 나의 손가락을 잊고 그대 스스로 달을 보아야 한다. 그대는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589]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589]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593]


그 궁극적인 혁명은 하나의 세계정부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모든 나라는 각자의 군대와 각자의 방어시설, 각자의 무기를 가져야 하며 누가 더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지를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정부가 있게 되면 어떠한 육군도, 공군도, 해군도 필요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 헌신하기 위한, 전 인류에 헌신하기 위한 봉사단체로 변형될 수 있다.[597]

단지 이 침묵과 산들바람 속에서 춤을 즐기는 나무들만이 존재할 때, 그대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자라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전으로부터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603]

나는 선()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없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어있음을 즐기며 무()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그것은 세속과 신성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604]

이완하라. 그대가 단지 주시자일 뿐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 육체는 그대가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대가 거울과 같은 주시 속으로 침잠함에 따라 전 존재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605]

진리가 조직화되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조직화된 종교는 다름 아닌 숨은 정치이며, 성직자에 의한 깊은 착취에 불과하다.[608]

고타마 붓다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았다."나의 조상(彫像)을 만들지 말라. 나의 말들을 모으지 말라. 나는 숭배되어야 하는 상징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깊은 열망은 그대들이 모방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불교도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잠재력은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08]

 


이 순간 그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붓다인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며, 그것은 그대의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sammasati)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614]


사람이 아홉 달을 자궁 속에서 보내면서 세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과 똑같이, 죽기 아홉 달 전에 에너지가 다시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로 들어간다고 설명한다.[616]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에필로그 : 1990현재

존재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내가 하는 말에 어던 진리라도 담겨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나의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단지 그 횃불을 들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나의 산야신들이 느끼게 될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사랑과 같은 특질, 그 주위에는 어떤 교회도 생겨날 수 없다. 깨어있음과 같은 특질, 그것은 그 누구의 독점물도 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축하, 기쁨, 그리고 신선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을 키워가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622]

 

 

▣ 내가 저자라면

그의 삶보다 그의 깨달음에서 뿜어 나오는 말이,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시각의 공명이 너무나 크다. 마음이 멍멍해 지는 듯하다. 그는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하는 세계를 의식하며 살다간 것이다. 오쇼의 정신 세계는 너무나 탁월하여 경이롭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그의 종교를 부정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현재 사회에 껄끄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가 많은 영감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23살의 나이에 오쇼 라즈니쉬의 강의 선집을 한꺼번에 다섯 권을 읽었었다. 오쇼를 알게 된 것은 칼리 지브란의 시집과 책에 매료 되어 있었는데 칼리지브란의 시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난 그때 오쇼의 죽음, 지혜, 영혼의 철학, 세속과 초월에 대해 푹 빠져 들었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읽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처럼 읽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가 깨달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왠지 모르는 마음의 평안함은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깨달은 자는 우리 인간이 아닌 듯하다. 어디에 견주어 빗댈 사람이 없다. 그의 말에 그의 대학시절 교수들이 듣기만 하고 질문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 또한 무슨 말이든 무의미 한 듯하여 조심스럽다.

 

그는 명상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면 지복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말하는 천복지복이 같은 맥락인 듯 하여 캠벨을 다시 찾아 보기로 했다. 그는 오쇼 만큼은 깨달은 자가 아니지만 학문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가려 했던 사람이다. 초월적 삶을 살다간 오쇼보다는 덜 부담스러워 캠벨을 끌어 들여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부질 없다는 걸 깨달았다.

 

캠벨의 천복은 오쇼의 지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맞다. 캠벨 또한 명상을 통해 불명의 생각에, 언어 밖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하느님은 넘어야 함을 말하다. 또한 명상을 통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다르게 보지 않게 되며 그러한 심오한 체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이 모든 말은 깨닫지 못한 자의 추측이라는 것이다. 오쇼의 확신의 찬 언어와 차이가 느껴짐 이다.

 

<하나의 깨어남이 있을 때, 그 깨어남이라는 실재와 비교되어 이 모든 실재는 비실재가 된다.>고 오쇼가 말한 것처럼 깨달은 자의 실재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가지 깨달은 것은 이제 다시 <신화의 힘>을 읽어봐야겠다는 것이다. 영적인 부분에 대한 약간의 견해가 생겨서인지 그렇게 난해하던 문장들이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느낌이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오쇼가 30년 정도 늦게 태어나지만 오쇼와 캠벨은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다. 그들은 만난 적이 있을까? 약간의 영향이라도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아무튼 이렇듯 깨어있어야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깊은 침묵과 명상을 하여야만 천복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깨달음의 세계는 어떨까? 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나는 궁금하기 만하다.

세상에 속해서 세속의 기쁨도 누리면서 명상의 깨달음을 가질 수 있는 신인간 조르바 붓다의 세상은 과연 가능 할 것인가. 그가 말한 대로 신이라는 개념 없이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믿고 살 수 있을까? 좋을지 나쁠지조차도 생각이 판단하기 힘들다.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존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시가 너머에서, 공간너머에서, 마음 너머에서,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하지 못했고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진화 되어 깨닫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깨달은 자로 태어나는 사람이 마구 마구 늘어 났으면 좋겠다.

 

아주 인간적이게도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음 어찌할 수 없다. 오쇼도 항상 의식이 더 더욱 깨어있도록 노력하며 살았다. 그랬던 만큼 진정 깨달은 자가 아니라면 인간의 마음은 금새 달라져 불가능할 것 같다. 참으로 인간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가 맞긴 한데 말이다.

 

이 책은 자서전이지만 내적인 사건들의 기록이다로 시작한다. 오쇼의 삶 자체가 깨달음과 함께 시작했고 깨달음을 실천하고 전달하는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탄생과 어린 시절, 그리고 대학을 다닌 성장기까지는 연대기로 기록하고 나머지는 그의 철학이 담긴 명상록 같은 형식으로 쓰여 졌으며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서술했다. 마지막 부분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에서 자세한 사건과 그의 생각을 적어두어 오히려 그이 삶을 되짚어 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공적인 오쇼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오쇼에 대한 것이 부족한 것 같다. 그에게 육체로의 삶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깨달음이 너무나 크기에 이런 형식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고 이해하는 바이다.

또한 그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IP *.1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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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08:46:40 *.204.150.130
깨달음의 길을 걷기 위해 가장 필요한 순수함이 이미 네 안에는 크게 자리잡고 있으니
사실 너야말로 고민하지 않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춘희야. 아무것도 고민하지 말고 그냥 지금 그대로만 하면 돼.
넌 아주 잘하고 있어...
이 언냐 믿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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