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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9일 10시 0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1922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그레이의 삶은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대담하게도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거주구역)의 담을 넘어다니며 식품을 밀수하는 밀수꾼으로 생활하던 그는 결국 바르샤바 인근의 트레블린카 수용소에 수용됐다.

'절멸 수용소'였던 트레블린카를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었고 사람들은 탈출을 위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레이는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복수를 하고 세상에다 대고 트레블린카가 죽음을 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되뇌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나갔다. 어머니와 두 동생을 잃고 시체와 살인자가 가득한 트레블린카에서 시체들을 무덤구덩이로 나르는 시체처리반으로 일하는 등 끔찍한 생활을 견디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수용소를 탈출했다.

바르샤바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1943년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아버지마저 잃는다. 복수를 위해 파르티잔이 되고 소련의 붉은 군대에 입대한 그는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에 입성해 나치 잔당 제거 작업에 나서지만 결국 "나 자신이 살육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고 네 자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1970년 마을에 일어난 산불로 아내와 네 자녀 모두가 숨지면서 그는 다시 불행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는 그러나 죽음 대신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김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쪽을 선택했다.


2. 내가 저자라면

토요일에 책을 들고 오랜만에 대학 도서관을 찾았다. 배고픔도 잊은 채 몇 시간째 마르틴 그레이의 삶의 여정을 쫓아가다가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이 되서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농구하는 사람들, 잔디밭에 앉아 재미나게 수다 떠는 사람들을 지나 평화로운 교정을 걸어가자니 이 모든 소소한 행복이 만들어지는 공간이 너무나 감사해진다. 수십 년 전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소소한 일상사가 그토록 꿈꾸던 자유이자 행복이었음을 새삼 깨달은 탓이다.
 
글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생존, 복수, 신세계, 행복, 운명 5개의 장이 바로 그것이다.

잡히고, 뇌물을 먹이고, 도망가고, 또 잡히고, 하는 일이 매일 계속됐던 생존의 장
미에테크는 라이다크라는 고양이에게 스스로를 투영시키며 말을 걸고 힘을 얻는다.
밀수꾼 미에테크, 싹둑 잘린 미에테크, 위장취업자 미에테크는 그렇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게토를 넘나들며 곡식을 몰래 실어나른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 지옥의 중심 움슐라크플라츠(이주의 광장)와 트레블린카!
인간스러움이 없어지고 시간이 사라진 잔인함과 무정함만이 있는 그곳.. 노동하는 시체가 된 그는 삶과 죽음이 엉망진창으로 얽힌 그곳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는 어머니를 잃고, 동생들을 잃고, 아버지를 잃을 때마다 더 살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두 눈을 카메라 삼아 그 핍박의 순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가족과 친구의 피와 자신의 눈물을 잉크 삼아 가슴 속 깊이 그날의 기록을 하나하나 새겨둔다.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 퇴각하는 독일군을 쫓아 러시아군에 합류하여 독일로 진격하는 복수의 장
그토록 당당했던 독일군은 사라지고 눈을 내리깔은 패잔병만이 존재할 뿐이다. 살육자를 벌하고 가족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려 했지만 미에테크는 스스로가 또 하나의 살육자가 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복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살육자들을 죽여도 죽은 가족들은 되살아 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에테크는 또 하나의 무덤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다. 진정한 복수는 살육자를 살인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그 죽음을 잊히게 하는 것이다.

유일한 혈욱인 외할머니를 찾아 떠난 미국행,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게토와 파르티잔이 존재했던 신세계의 장
미에테크는 이 곳에서 자신만의 요새를 건설하려고 한다.
이 곳에는 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자기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선구자들도 있다.
게토에서처럼, 파비아크 감옥이나 트레블린카에서처럼 운명에 굴복한 사람들도 있을 테고, 운명을 앞지르고 지배한 사람들도 있다.
미에테크는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가가 되기로 마음 먹고, 매일매일 시장경제 속의 경쟁이라는 게토를 하나씩 하나씩 넘는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가 썩은 나무와 같이 속이 텅빈 껍데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살아남으려고, 증인이 되려고, 내 가족들의 복수를 하려고, 그들의 생명이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요새를 건설하고 아이들을 가지려고 지금껏 발버둥을 쳐왔지만 남은 것은 허무와 외로움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 디나가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든 요새, 그리고 새로운 생명들, 행복의 티켓을 잡았고 마음껏 행복했던 행복의 장
생명과 잉태의 여신 디아나와 같이 그녀, 디나는 생명이었으며 사랑이었다. 그들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 가족을 이룬 미에테크
그의 소박하고 절실했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왜 행복의 순간이란 그렇게 짧은 것일까? 500페이지를 넘는 그의 자서전에 행복의 장은 불과 4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매일매일이 비슷해 보였지만 실상은 모두 달랐던 그 행복감의 소소함을 일일히 적기에는 너무 소소했던 것일까? 난 그에게 다가온 행복에 진심으로 기뻐했고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가족은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도 달콤했기에 짧았던 모양이다. 마치 디나라는 선녀가 내려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모두 하늘로 다시 데리고 가면서 미에테크라는 나뭇꾼을 땅에 홀로 남겨놓은 것과 같이 말이다.

이주의 광장과 트레블린카의 악몽이 다시 찾아왔던 운명의 장
다른 무슨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운명의 장에서는 가슴이 너무 쓰려와 글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광기와 기회의 사슬을 끊어 보고 싶었지만 그의 불행한 운명은 사슬을 더욱 견고히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또 다시 삶이었다. 그는 또다시 마음 속의 트레블린카를 떠나 가족을 위해 또다른 삶을 산다. 살아가고 끝까지 버텨내면 언젠가는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나의 죽음과 내 가족의 죽음을 보상해서,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게 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서 몇 가지의 단어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복종, 인간다움, 행복을 추구할 권리, 가족과 생명의 탄생..
미에테크에게 삶은 지독히도 쫓아가야 겨우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입을 잘못 놀려도, 행동을 굼뜨게 해도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오쇼 라즈니쉬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미에테크는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만났던가.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그리고 자식도 모두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통해 독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처절하고 잔인한 운명이지만 미에테크였기에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이 그는 그 운명을 견딜 수 있다고 믿어 가혹하지만 보석보다 빛나는 운명을 그에게 선물한 것은 아닐까. 그는 온 생애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송두리째 죽음으로 빼앗겼지만 더불어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과 희망을 주었다.

살아야 한다. 미에테크. 너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된다

귓가에서 끊임없이 이 말들이 맴돈다.

3. 내 마음의 글귀

[13] 내가 살면서 남에게 주었던 것들이 몇 배로 커져서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게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란 책이 이루어낸 기적이죠.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다릅니다. 나는 이 책을 나와 내가 사랑한 사람과의 사이를 잇는 고리를 만들기 위해 썼는데, 이 책은 내가 사랑한 줄도 몰랐던 수백만 명과 연결시켜주었지요

[13] 때로는 단어가 그냥 단어가 아니고 음절이 그냥 단순한 음절이 아닐 때가 있지요. 말들이 다른 영역에서 올 때, 깊은 곳, 마음에서, 피에서, 뱃 속 깊은 곳에서 나올 때는 그 말은 예기치 않은 힘을 가집니다. …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깐요 … 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내부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회가 너무나 자주 억누르는 이 에너지를 우리 모두는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랑의 욕구를 나타낼 용기를 찾아내, 충만함과 부유함, 창의력과 용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삶을 살기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14] 왜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는가? 당신은 살았는데 왜 그들은 죽었는가?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 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나 스스로 같은 말들을 1970년 10월 3일부터 끊임없이 독백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비명은 새어나온다. “나는 살아있다!”고

[17] 나의 인생, 우리의 인생이 어땠는지를 들려주고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우리의 삶,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켜야 하므로.

제 1부. 생존
[34] 아버지는 침착하게 아버지로서 꼭 들려주어야 할 중요한 조언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독일군들, 게슈타포 말이야. 그들이 조만간 여길 분명히 찾아올 거다.”
“절대로 잡히지 마라. 하지만 만일 그들에게 잡혔을 때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해라. 탈출하는 것. 네가 옴짝달짝도 못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해도 탈출해라. 그들에게 잡혀 있으면 기회가 없다. 탈출하고 나면 늘 희망이란 게 있는 법이다. 절대로 기다리지 마라. 첫 번째 기회가 언제나 예외 없이 최고의 기회다.”

[35] 나를 따라 해라. 그들을 속여. 그리고 살아남아라

[40]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서 나를 불렀다
“나는 겁이 났단다. 마르틴. 너 때문에 겁이 났어. 그들은 너보다 더 힘이 세.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그 사람들 앞에서 네가 성질을 부려서는 안돼.  나중에. 마르틴. 나중에.”

[42] 살다모면 주먹으로 벽을 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는데 바로 그 때가 그랬다. 왜 우리는 아무 짓도 못했던 걸까? 왜 그들은 그렇게도 강했을까? 왜 그들은 주인처럼 군림하고 우리는 노예처럼 순종해야 했던 걸까? 왜 모두가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였던 걸까?거리에서 그 하시딤에게 원숭이처럼 춤추도록 군인들이 시켰을 때 지나가던 행인들은 왜 웃었을까? 왜 우리는 이렇게 증오 받으며, 왜 아무데서나 살해당해야 하며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 걸까?

[43] 게토(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가 생길거야. 우리 모두가 함께 지내게 될거다. 하지만 그것 역시 끔질할 거다. 그들이 우리를 평화롭게 놔둘 리가 없으니까. 아버지가 말했다.

[46] 빨간 머리와의 소년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돌이었고 물건이었으며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

[47] 목숨이란 그런 것이었다. 목숨이란 게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청어 몇 마리보다 하찮은 게 목숨이었다.우리는 그걸 깨달았다. 목숨에 집착할 이유가 뭔가?

[48] 나는 전쟁이 일어난 뒤 최초로 무서움을 느꼈다.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죽이는 증오심을 만났던 탓이었다. 그 장교는 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싶어했다. 그가 삽으로 그 소년을 때려 죽이면서 보고 있던 건 나였다… 나는 한 남자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힘을 발견했다. 그가 원한다면 그가 승리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아무 불평 없이 죽을 수 있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도 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빨간 머리의 친구에게 감사한다. 그는 우리를 위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죽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50] 하지만 운을 믿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생이란 장애물 경기다. 처음 장애물을 뛰어넘었다라도 그 너머에는 더 높은 장애물이 또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더 가깝고, 더 어려운 장애물이 또 다가온다.

[50] 나는 고양이에게 ‘라이다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말을 걸었따.
“라이다크, 너도 유대인이냐?”
그 고양이 역시 전쟁을 겪으며 살아남았고 나도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53] 문득 고양이 라이다크가 떠올랐다 만약 그 녀석이 잡힌다면 어떻게 할까? 잠자코 있다가 도망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 힘이 났다.

[54] 가족이란 이상하다. 그때까지는 가족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 게슈타포는 나를 고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어머니를 때렸을 때 나는 꼼짝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며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가족은 온전한 하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군들 때문에 그 세계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나는 언젠가 나만의 세계인 새로운 가족을 꾸려갈 방법을 밤마다 생각했다.

[55] 나는 사는 데 애착이 생겼다. 아버지 말을 들으니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말 한마디로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낳아 기를 아이들에게?
[56] 담은 이미 2미터 가까운 높이로 쌓였는데 노동자 한 명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전히 벽돌을 더 쌓고 있었다. 거리 전체가 봉쇄될 판이었다. 우리는 곧 그 안에 동물처럼 가둬질 것이다.

[57] 군인들은 아기를 잡고 서로 주고받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58] 어머니는 나더러 밖에 나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했지만 나는 내 눈으로 현장을 보고 싶었다. 물건을 팔려는 생각보다는 현장을 보고, 모든 걸 빨아들이고, 알아내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은 내게는 독한 술과도 같았다. 나는 알아야 했고 이 잔인한 세계를 내 눈과 내 마음에 기록해서 언젠가는 내가 본 모든 것들, 우리가 받았던 모든 고통들을 말해줘야만 했다.

[59] 나는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싶었고 조끼를 입은 대머리 남자가 군중 속에서 배를 붙잡고 웃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건 학살자와 희생자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군중들 때문이었다.

[65] 전쟁이 일어나서 내가 진정으로 태어나기 전,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우리는 숲속을 자주 거닐었다. 아버지는 숲을 기어다니는 개미떼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개미탑까지 개미들을 따라가서 나뭇가지로 개미들이 들어간 구멍을 찔러 보곤 했다. 개미들로 가득 찬 그 덩어리에서 개미들은 우르르 도망치는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수천 마리나 되는 개미들이 허둥지둥 들락거리면서 순식간에 행렬 저 끝까지 그 혼란이 전달됐다. 아버지는 내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개미들의 작업과 자연의 질서와 함부로 훼방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아버지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저 개미들만 지켜보았다.
10월 초부터 우리는 바로 그 공포에 질린 개미들 같았다.

[68] 우리가 있는 구역은 감옥, 즉 바르샤바 유대인들의 파비아크가 될 터였다. 나는 그 속에 감금되기 싫었기에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싶었다. 나는 라이다크였다. 비슬라 강둑에서 만났던 그 고양이 라이다크는 자기를 가두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71] 전차가 멈추었을 때 한 독일군이 보였지만 나치 친위대는 아니었다. 그도 승강구로 올아오다가 나를 보았다. 그 여위고 나이 든 얼굴, 그 숱 많은 회색 눈썹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가 나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전차가 다시 출발했다. 나는 게토를 벗어났다. 나는 인정 있는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72] 내 목숨이 위태로워진 건 틀림없었지만 나는 그들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 해도 자유로운 나를 죽이게 될 것이다. … 나는 탈출이라는 행위로 게토라는 감옥에 저항한 것이다. … 게토는 나무도 없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만 이루어진 세계였던 탓이다. 우리에게는 공원을 누릴 자유마저 없었다.

[81] 게토에서 불리는 노래 가사 중에 ‘거머리들이 우리 피를 빨아들이네.’ 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를 갈며 끊임없이 혼잣말로 그 가사를 되뇌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와 노동, 그리고 잔인함을 통해 우리를 멸종시키려 했다.

[83] 내가 점점 이기적으로 변했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길을 계속 갔다는 말은 사실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피려고 멈춰 서지 말아야 했다. 이기심은 그들이 내게 심어준 무기였다. 나는 그것을 거머쥐고 이용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서

[88] 그들이 잔에 부어 마시고 있는 건 내 목숨이었고 500미터 정도 떨어진 게토에 있는 다른 굶주린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90] 좀이 쑤셨지만 나는 고양이 라이다크를 떠올리며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라이다크는 내가 고기 덩이를 던져주었을 때 고기를 보고도 몇 분이나 꼼짝 않고 기다리다가 단숨에 먹이를 낚아챘었다.

[98] 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가능했다. 한 시간에 열 살을 먹을 수도 있었다. 한 순간만 방심해도 죽음의 신에게 먹히는 시대. 운명이 자기 앞길에 예비한 나치 친위대원의 변덕에 따라 발에 차여 죽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는 단어는 이제 바르샤바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감옥을 나온 후 별명이 생긴 그 불량배들을 나는 믿어야 했다. 법을 대표하는 경찰에는 반항해야 했다. 세나토르스카 가에 살던 도련님 중 하나였던 내가 밀수꾼이 돼 빨간 머리 루디와 거인 미에데크를 고용했다. 나, 마르틴. 일 년 전만 해도 눈물이나 닦던 내가 싹둑 잘린 미에테크가 돼 있었다

[100] 자루에 든 부드럽고 따뜻한 곡식이나, 밀가루, 설탕의 감촉을 느끼면서 내가 느낀 기쁨과 자부심이 어땠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 자루들은 내 민족, 게토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102] 이 사람들이 나에게 충성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그들에게 충성심을 보여야 했고 그들이 나를 존경하게 해야 했다. 존경이란 내가 그들에게 겁을 준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 일 내가 얻은 것들 때문에 내가 존재했고 내 존재가 의미가 있었다.

[103] 한 자루, 또 한 자루. 인간의 생명이 초 단위로 재어졌다. 몇 초 만에 내 열정, 내 생명, 생사가 걸린 일이 아슬아슬하게 끝났다.

[104]게토의 담을 넘어가고 살육자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 예전보다 더 커져서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 방식대로 싸우는 일을 멈추는 건 존재하기를 멈추는 일일 터이다.

[106] 나는 이제 자유자재로 다른 사람을 가장하는 요술쟁이가 되었다.폴란드 경찰이 근처에 있으면 나는 거리의 악당인척 하는 위장을 벗고 왼쪽 주머니에 있는 작고 납작한 상자에서 스바스티카 완장을 꺼냈다. 나는 슈미트였다. 건방지고 권태로운 표정에 거드름을 피우는 슈미트. 나는 독일어 악센트가 있는 폴란드어로 말했다. 몇 백 미터 걸어간 후에 나는 다시 불량배로 돌아가야 했다. 황급히 완장을 벗고 바르샤바 10대들이 그렇듯 태평하게 으스대며 걸었다. 그리고 정문을 지나 게토로 들어와 전차에서 뛰어내리고 나면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유대인 완장을 다시 차야 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연기하는 나를 보듯 두 개, 심지어 세 개의 인격을 가지는 법을 익혔다.

[108] 규칙들이 아무 경고도 없이 바뀌곤 하는 끝이 없는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경계를 멈추지 앟고, 위조서류를 소지하고, 친구들과 공모자들을 동원하는 일뿐 아니라 행운도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행운이란 변하기 쉽고 다루기 힘든 것이었다. 어떨 때는 찰나의 순간만 운이 허락되기도했다. 바로 그 찰나에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됐다. 두 번째 기회란 결코 없었다. 때로는 운을 믿고 덤벼야 했다. 운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얻어 맞으면서도 조용히 소망하며 운이 오길 기다려야 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됐어. 기다려 다시 숨을 돌리려면 몇 분 더 있어야 해”라고 속살일 시간이 없다. 그러면 너무 늦는다. 기회는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죽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젊고, 빈틈 없었으며, 운을 믿고 덤벼 기회를 잡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운은 더디게, 더디게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120] 그 포스터에는 ‘유대인-이-티푸스’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병균을 옮기는 해충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소독했다.

[121] 조피아를 보자 근육이 풀어진 듯 웃음이 쉽게, 저절로 나왔다. 마치 지친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는 듯한 기분이었다.

[122] 그 당시는 무슨 일이든 기회만 오면 바로 실천해야 하는 때였다. 우리는 열흘 정도 정기적으로 만났다.

[123] 두 사람이 늘 알던 사이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도 몰라

[124] 조피아는 파비아크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맞은 것보다 더 심한 고통에 난도질 당한 채 마음은 파비아크에, 몸은 여기에로 두 동강이 난 채 누워 있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예정돼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예비해 놓은 운명이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내게 한줄기 안식을 주던 조피아를 그들이 빼앗아갔다…. 나는 그들에게 저항하리라 맹세했다. 조피아, 우리가 언제 투쟁의 함성을 질러보겠니? 언제 우리의 원수를 갚게 될까?

[128]’우리의 아이들을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라고 그 포스터는 간청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누가 구제하겠는가? 우리는 이기심, 부패, 냉정함, 무기력에 찌들어 있었다. … 한 여자가 100즐로티 때문에 처형당했건만 그곳에서 좀 떨어진 메릴 카페에서는 우승 상금으로 2000즐로티를 주는 댄스 경연대회가 열렸다.

[139] 그들은 파비아크의 병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게슈타포의 의사 쉐르벨이 진료차 들렸다.
“너는 그리 건강이 나쁘지 않아. 하지만 무덤과 거인은 네가 티푸스에 걸리는 게 제일 낫겠다고 하더군. 나도 그들과 의견이 같아.”
행복감, 햇빛, 생명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140] 나는 갈비뼈 몇 대가 부러졌고 코가 부러졌고 이가 몇 개 부러진 상태였다. 팔을 똑바로 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바깥 마당에는 4월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고 공기는 맑았다.

[142] 4월 17일부터 순찰이 강화돼서 순찰병들이 쫙 깔려 있었다. 프랑켄 슈타인 혼자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살해하던 시기는 지나버린 것이다.

[146] 우리가 죽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탈출하는 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었다.

[147] 그들에게는 6000명이 필요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자 인도가 텅 비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내일이면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될 터였다. 근처에서 한 여자가 속삭였다.
“하느님이 저들을 데려가시네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저들의 고통도 끝났군요.”

[147] 나는 그 모습을 전부 내 눈으로 기록했다. 내일이면 내게도, 내 가족에게도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탈출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두어야 했다. 이곳 움슐라크플라츠, 즉 ‘이주의 광장’에서 말이다. 어제만 해도 그저 커다란 교차로였던 이곳, 어제만 해도 이주의 광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살육자들의 한마디에 그 장소는 지옥의 중심이 돼버린 것이다! 움슐라크플라츠! 모든 이들을 벌벌 떨게 하는 죽음의 단어. 판결과도 같은 그 단어.

[149] 인간다움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23일 금요일, 오전 여덟시 반, 유대인위원회 의장인 체르니아코프가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분노와 저항과 절망의 외침이었다. … 내 목숨을 구하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일은 다반사였다. 인간다움을 유지하기란 정말 힘든 때였다.

[150] 이주의 광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나치친위대는 수를 세고는 가축운반용 화물차의 문을 닫았다. 어머니와 자녀가 헤어진들 무슨 대수랴? 우리들 ‘가축’들은 광장에서 바로 분류되기도 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나치 친위대에 노력봉사를 한다는 식이었다. 왼쪽에 섰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의미였다. … 사람이 어떤 존재로든 변할 수 있다는 걸 배운 게 그때였다.

[151] 잡히고, 뇌물을 먹이고, 도망가고, 또 잡히고, 하는 일이 매일 계속됐다. 그게 내 생활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했다.

[152] 사람들은 굶주림 때문에 은신처에서 기어나왔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7월말 ‘그들’은 담에다 공고문을 붙였다.자발적으로 ‘이주의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빵 3킬로그램과 잼 1킬로그램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동부에 가도 가족들을 분산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정말로 굶주렸기에 빵과 잼을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153] 나는 그들에게 내리라고, 생각을 하라고, 기다리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안녕, 얀클레. 안녕, 하임. 잘 가라, 트리스크.

[154] 의사 코르차크가 아이들을 ‘이주의 광장’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그는 아이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저들의 요구를 수락할 수 있는가? 왜 자신을 희생물로 내놓는가?
“그를 비난하지 마라. 아무도 비난하지 마. 그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거야.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한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154] 우리의 희망,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가 이룩했던 것들, 아이들, 우리의 미래, 그 모든 것을 ‘그들’은 체계적을 파괴하고 있었다. .. 동부는 우리에게 죽음을 뜻한단다. .. 마르틴 살아남아야 한다. 기억해. 오늘은 물론 언제까지나!

[156] 모두가 이곳에 머물도록 허용된 마지막 집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우리가 왜 이런 꼴이 되었는가? 우리가 왜 이런 소름끼치는 비극 속으로 곤두박질쳤는가? 어떤 악마를 위해 우리는 얼굴에 칠을 했는가?

[157] 무슨 일이건 방법을 배우게 되는 법이다. 심지어 죽음을 피하는 방법마저도

[158] 매번 탈출할 때마다 나는 힘을 얻었고 내가 살아남을 것이며, 그 의지가 굳건하다면 운명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159] 마르틴, 네가 선생이로구나

[159] 게토는 우리의 전쟁터였다. 그곳을 버릴 수가 없었다.

[162] 나는 이제 강했다. 나는 매질에 단련돼 있었고 '그들'이 지졌던 손, 그들이 으스러뜨렸던 손가락은 목을 조이는 데 익숙했다. 내 손은 내 증오만큼이나 강했다.

[166] 걱정마라. 이 우크라이나 살인자야. 고양이 미에테크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들이 죽지 않으면 우리가 죽었다. 전쟁에서 죄책감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167] 매일매일이 그 전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지의 시간이 됐다. 그 일들이 바로 전날 일어났다 해도 그건 과거의 일이었으며, 과거란 무의미할 뿐이었다.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서 내일까지 견디는 게 중요했다. 뒤돌아보면 죽는다. 어제를 생각하는 것, 인간이 인간이었을때를 생각하는 것, 조피아를 생각하는 것, 혹은 세나토르스카 가를 드로쉬카를 타고 달리던 일을 생각하는 건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167] 게시아 가에 있는 어느 집 지붕 밑 방에서 나는 리브카를 발견했다

[171] 밤붕에 파벨이 우리집에 와 나를 불러냈다.
"그들이 번호를 팔고 있어. 그들은 3만 5000명을 게토에 머물게 할 거야. 나는 번호를 받아야 해. 마르틴"

[172] 그들은 우리 마음 속에 비겁함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그들은 우리를 파멸시키고 타락시키길 원했다. 안녕, 파벨, 내친구 파벨. 그들이 벌써 너를 죽였구나

[174] 아버지는 내게 힘을 주었다. 내 뜻이 곧 아버지의 뜻이었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반쪽이었으므로 우리 중 하나가 살아 있다면 다른 한쪽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살게 해줘서 고마워요.

[180] 트레블린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이것은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내가 트레블린카에 대해서 알던 것이라고는 그 이름 뿐이었지만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으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181] 나는 식구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내가 식구들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목이 메어왔다. 죽음이 그들을 데려갈 것이다.

[182] 나는 '나아가라, 마르틴. 계속 나아가라. 미에테크, 그곳에 삶이 있다. 나아가라."라고 내 안에서 말하는 어떤 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184] 남자들이 어둠 속에서 울었다. 상자가 뒤집히는 소리에 이어 죽음의 단발마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기도를 시작했다. 자살이었다. 나는 생명을 스스로 끊지 말고, 비겁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말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185] 우리는 하찮은 존재였다. 개만도 못했고, 그들이 우리를 묻는 땅의 흙보다도 값어치가 없었다. 우리는 해충이었고 그는 왕들의 종족이었다.

[185] 나는 '클렙수드라', 즉 얼굴을 얻어맞아 상처가 생긴 사람들을 보았다. 그 매질 자국은 죽음의 낙인이었다. 나는 왜 고개를 숙이며 걸어야 하는지, 왜 항상 뛰어야 하는지, 더 잘하고, 더 빨리 가야 하는지 알았다.

[186] 나는 검은 소나무가 줄지어 있는 그 아름다운 가로수길, '하늘 가는 길'로 향하는 그 길을 내려가 사람들이 흘림 물건을 주어올렸다. 죽음의 신이 우리가 모여선 줄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거둬갔다. 일을 느리게 하면 죽음, 너무 가벼운 짐을 옮겨도 죽음, 음식을 조금 씹어도 죽음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공포에 질려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그들의 힘이 불가사의한 신들에게서 오는 듯 우리를 압도하는 걸 느꼈다. 그들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187] "그들 속에 죽는 것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는 나를 밀쳤다. 나는 제자리로 가서 드러누운 채 또다시 상자가 뒤집히고 몸이 흔들리는 소리, 숨이 끊기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자살은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자의 반항이었다. 미에테크,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항의하고, 사실을 말하고, 복수를 해서 우리 민족이 너를 통해 다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188] 트레블린카에서 살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트레블린카는 다른 종류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시계는 없었지만 화물기차가 도착하는 것, 집합하는 일, 아래쪽 수용소에서 엔진이 진동하는데 따라 시간이 표시됐다.

[188] 나는 그 절망적인 흐름에 맞서 싸웠다. 내가 의지할 건 내게 계속 말을 거는 방법 뿐이었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복수를 하고 세상에다 대고 트레블린카가 죽음을 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190] 힘내, 마르킨. 나아가라. 미에테크. 살아남으라고!

[193] 나는 첫 번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내 생명을 남의 손에 맡겼다. 그래서 나는 졌다.

[195] 이곳이 밑바닥이었다. 인생의 밑바닥이었다. 그 살육자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기에 인간됨의 밑바닥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구덩이에 던져 넣은 그 시체들과도 같았고 나와도 같았다.

[196] 자살하는 사람이 연이어 나왔고 나는 저녁마다 그들을 말리려고 애썼다. 우리는 증인이 되야 했다. 가스에 질식돼 모래땅에 묻힌 탓에 침묵하게 된 그 수천 명의 목소리에서 내 목소리는 힘을 얻을 것이다. .. 죽어간 내 민족을 위해 내 삶은 달라져야 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붙잡고 들것에 실어가 던졌던 그 수천 구의 시체들을 위해

[196] 우리는 모두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외면했으며 굳이 아는 얼굴인지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197] 나는 숨을 골라가며, 이를 갈면서 뛰어다녔다. '살아라, 마르틴, 살아서 그들을 죽여라.' 그 말들이 내 입, 내 머리를 채웠다. 그 말들이 내게는 약이요, 음식이었다. 밤에 누군가가 자살하려는 동료를 도우려고 동료의 발아래 놓인 상자를 치우라는 뜻으로 쓰는 '저쪽으로'라는 소름끼치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여전히 그 일을 막으려고 급히 다가가곤 했다.

[198]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들 가운데서 살아 있는 아이들을 발견할 때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의 시체에 달라붙어 있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어린 아이들. 우리는 구덩이로 던지기 전에 우리 손으로 그 아이들의 목을 졸랐다. 그럼으로써 시간을 낭비했기에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199] 내게 가득한 수치심, 구역질, 아직도 살아 있다는 부끄러움, 그리고 나를 홀리게 했던 살고자 하는 충동, 살앗서 내가 본 것, 그들이 한 짓, 그들이 우리에게 강제로 시킨 일들을 표현하려면 나는 다른 목소리, 다른 단어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야만스러워질 수록 나는 그들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들의 죽음의 왕국이 인간들의 왕국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더 확신했다.

[200] 의심하는 잔인한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는 제일 무거운 시체들을 골라 들것에 실었다. '이건 곡식자루야, 마르틴. 힘내, 마르틴, 계속 움직여. 살아남아.' 달린다는 것은 산다는 의미였다.

[205] 이제 나는 거의 막판에 몰려 있었다. 내가 했던 모든 일들, 내 모든 힘, 분노, 복수심들은 내가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모두 허사가 될 터였다. 살육자들이 승리할 것이다. 파비아크나 게토에서 그들을 이겼던 과거는 헛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무의미함... 수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 나는 트레블린카를 반드시 탈출해야 한다. 그것만이 의미를 가진 유일한 승리였다. 그래야만 나는 증인이 되고 복수하는 자가 되고 나를 통해 우리 가족, 우리 민족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206] 이 계획은 미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어차피 미친 세상에 살고 있는 터였다. 성공하든가, 즉든가, 둘 중 하나였다.

[208] 내 전 생애, 그리고 죽은 내 민족들이 나를 보호했다. 쇳덩이를 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그 금속에 딱 붙인 후 내 모든 의지, 내 모든 생애를 걸고 거기 매달렸다. 그 트럭은 내 피부였으며 방패였고 어머니였다. 나는 거기 두 바퀴 사이, 죽음만이 나를 떼어낼 수 있는 자궁과도 같은 그곳에 매달려 잇었다.

[209] 어느게 짐승인가? 사람인가? 개인가? 사람에게 하듯이 개에게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사람도 없었고 개들도 없었고 저주받은 민족도 없었고, 다만 살육자가 된 인간들, 살육자를 훈련시킨 자들, 그리고 아마 다른 사회보다 더 많은 살육자를 배출한 사회가 있을 뿐이었다.

[210] 살육자들에게는 우리는 이름도, 번호도 얼굴도 없는 존재들이었으므로 상관없을 터엿다. 우리는 노동하는 시체들이었으며 가끔 총알이 박히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피로 얼룩을 만드는 존재였을 뿐이다.

[214] 여기 트레블린카에서 그들이 죽이는 건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살육자들은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기 원했다. 유대인이라고 알려진 민족부터 그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뿐이ㅏ.

[220] 몇 년 동안 내 삶은 대개가 어둠 속에서 뛰어내리는 일로 채워졌었다. 나는 물건들만 친숙할 뿐, 인간들은 잔인하기만 했던 세상에서 막 도망쳐 나온 참이었다. 어둠 속에 뛰어내리는 것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기차의 속도, 어둠, 그리고 돌덩이마저도 그곳에서 만났던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슴들보다는 더 친절할 터였다.

[222]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보는 데 익숙해져야 햇다. 트레블린카의 죽은 자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나는 사람처럼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고 트레블린카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지금은 오히려 잊어야 햇다.

[232] 나는 그들을 외면했다. 분노와 비통함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재앙이 꼭 눈앞에 닥쳐야 안단 말인가? 그곳을 목격한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나간게 다 허사란 말인가? 나는 좌절감에 울며 석양을 향해 걸어갔다.

[233] 이미 죽음, 조소를 퍼붓는 죽음의 신이 그들의 어깨에 올라타고, 그들의 뒤를 밟으며, 그들의 귀와 눈을 손으로 막는 것이 내게는 보였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하리라. 그러나 잡히지는 않으리라. 그들이 내 말을 듣기를 거부한다면, 나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혼자라도 살아남을 얷이다. 그러면 우리의 복수를 해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을 남게 될 터였다.

[235] 가끔 누군가가 시선을 고정한 채 공포에 잠겨 물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해야 하나?"

[236] 그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양손을 비비고는 어슬렁어슬렁 떠났다. 나는 또다시 실패했다. 자기가 옳다는 걸 알고, 확신하면서도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말하는데도 그들이 눈앞에서 귀를 막아버리는 것을 보고 자기의 말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본다는 건 너무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일종의 비극적인 광대였다...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 영위하려면 나는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237] 그녀의 이름은 소니아였고 바싹 마른데다,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현실을 바로 알고 인내하려는 열망을 지닌 걸 보면 용감하기도 했다.
"미에테크, 당신은 가야 해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사람들은 알고 싶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여기 머무른다면 밀고자가 언젠가는 독일군에게 일러바칠 거예요. 미에테크, 죽어서는 안 돼요.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잇어요. 당신은 우리 모두의 기억을 안고 있어요."

[238] 위험을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라는 걸 바르샤바 게토와 트레블린카에서 배운 나였다.

[254] 그는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다. 그 진실이 그를 파멸시킬 터였다. 자기가 직접 알아내도록 내버려 두자.

[256] 너는 젊고 홀몸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가족이 있어. 이 수용소 안에 말이다. 네가 도망치면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한단다

[257] 그들은 살육자들이 정한 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이 내 대신 대가를 치르리라.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엇으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으면, 잠브로프 수용소에서 죽거나 아니면 트레블린카에서 죽게 될 터였다. 안녕, 형제들이여

[258] 네가 이겼다, 미에테크. 등에 그들의 똥이 떨어지고 몸이 온통 똥으로 둘러싸였다 한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견뎌내라, 미에테크. 살아남아라.

[261]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들도 만났지만 자기들이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게 빵르 주고 잠을 재워주고 눈비를 피하게 해준 사람들도 만났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나는 희망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

[271] 이기심, 무관심, 그리고 비굴함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273] 내 아버지는 거기 있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래. 인간은 짐승에게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어.

[278] 여기가 내 잔인한 삶의 심장부였다.

[281]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마르틴, 너는 투쟁해야 한다.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죽을 거야.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라. 마르틴, 우리 모두를 위해 살아남아."

[283] 우리는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웠으며, 우리의 승리는 적과 싸우는 그 자체이지 적을 패배시키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285] 우리는 이제 더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주위에, 우리 마음 속에 있었으며 우리의 투쟁을 통해 생명을 얻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빈곤과 불평등과 같은 악에서 벗어나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이기심이라는 저주에서 자유로워져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쏟을 그런 사회였다. 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인류에서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어떤 대가를 치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명은 신성하단다. 마르틴. 우리가 지금은 사람을 죽여야 하지만 부디 생명을 기억해라, 마르틴, 생명을. 너는 생명을 탄생시켜야 한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네가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쪽으로 선택해라, 살아남아라, 마르틴. 나는 네가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우리쪽 사람들이 이기게 되면, 아이들을 갖기 바란다. 그런 후에 그 아이들에게 네 자신을 통째로 내주어라. 그 생명들은 신성하단다."

[300] 아버지는 게토의 돌 사이에 또 하나의 돌이 되어 누워 있었다. 잘 가세요, 아버지. 내 뺨을 간질이던 아버지의 무성한 외색 턱수염과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던 아버지의 목소리와도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군요. 내 어깨를 잡던 아버지의 손이여, 안녕, 아버지의 이야기도 안녕, 안녕. 아버지는 고통에서 벗어난 인간이나 정의로운 사회를 결코 보지 못하시겠군요. 나를 남자로 만들어주신 아버지,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 아버지

[318] 매복 기습을 시작한 후 한 시간도 못 돼 그 도로는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평화롭게 숲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마치 땅과 숲이 열려 갑자기 트럭을 삼킨 후 다시 닫혀버린 듯 했다.

[320] 이전에는 바르샤바의 게토, 길거리들, 지붕 위, 하수도가 내 터전이었지만 이제는 앞에 펼쳐진 숲이 내 활동 영역이 됐다.

[326] 우리는 결코 원수를 갚을 수 없었다. 살육자들을 죽인다고 죽은 가족들이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복수란 언제나 쓰디썼다.

[329] 산에 다시 나무가 울창하게 만들려면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충분했다.

[330] 거리에서 군인들이 "베를린으로!"를 외치고 다녔고 폴란드인들도 따라서 "베를린으로!"를 외쳤다. 나도 목이 터져라 "베를린으로!"를 외쳤다.

[334] 아버지는 남자란 가족을 거느리려고 마음먹을 때에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고 말했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 사막 같이 황량한 땅에 숲을 이루듯 내 아이들로 가득 채웠다. 그 아이들을 통해 내 가족들은 계속 살아갈 터였다. 나중에 나는 그 아이들에게 내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해, 그리고 스비엔토에르스카 가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터였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그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견뎌낼 만큼 강해졌을 때.
[340] 나는 백 년도 넘게 산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희미해진 꿈들을 너무도 많이 지니고 있는 자였다.

[341]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 사람들은 급류에 떠밀려가는 나무 조각들 같아서 강에 있는 바위밖에는 그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살육자들의 범죄를 알고 복종하기를 거부했던 내 아버지, 율레크 펠트, 야누시 같은 사람들은 저항했다. 우리들이 바로나무 조각들을 잡아주는 바위였다.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했다. 한 살마의 인생은 늘 본보기가 되는 법,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버지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346] "그냥 법대로 하자고. 우리는 짐승이 아니잖아. 우리는 그들과 달라."

[347] 나는 고문 받고 목을 매달렸단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공포를 배워갔다. 나는 그들의 죄를 찾아내려 했지만 복수라는 행위 역시 하나의 광기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349] 우리는 공포에 질린 독일 땅을 더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그 지배자 민족은 자부심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사방에서 "히틀러 타도"를 외쳤다.

[351] 우리는 조심해야 해, 유레크. 이제는 우리가 더 강한 쪽이기 때문이야. 우리는 두 배 더 인간답게 처신해야 한다고

[352] 미에테크, 조심하라! 살육자가 되기란 어려운 게 아니다... 나는 사람들 전체를 쫓는 게 아니라 살육자들만 쫗는 거라고 다짐했다.

[356] 1945년 4월 27일, 금요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열아홉 살 나는 베를린에 입성했다.

[362] 어느 9월의 아침 바르샤바를 들어오던, 패배를 모르는 거만한 살육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보였다. 너무 늙거나 너무 젊었으며 벌써부터 희생자처럼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그럼 승리를 거둘 때만 살육자가 된다는 말인가? 패배자가 되면 그렇게도 빨리 결백해진단 것인가?

[368] 저 멀리 뉴욕에는 내 숲을 일구어 낼 마지막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율레크 펠트의 고모인 외할머니가 유일하게 남은 내 혈육이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 빚을 지기 싫었고, 게다가 나를 베를린으로 데려와 준 나라와 군대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터였다. 빚은 모두 청산해야 했다. 남자란 끝까지 가야하는 법이다.

[371] 내가 양보했다. 나는 얼간이였다. 그들은 환호하면서도 나를 업신여기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집에 왔다. 정정당당한 우리 집이다.' 그들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얼간이가 되는 쪽과 살육자가 되는 쪽에서 양자택을을 해 본 적이 있는가?

[374] 약한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불가능해 보이는 법이다. 민족 전체를 멸종시키려는 계획을 세울 능력도 없고, 게토나 '이주의 광장', 트레블린카를 계획할 능력도 없으며, 트레블린카에서 탈출할 능력도 없고 하수도 안에서 싸울 능력도 없을 터였다. 내 인생은 그런 불가능한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안 다녀본 곳이 없었지만 어디에서나 "불가능하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여기 살아있지만 그들은 죽었다. 나는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발터의 생각대로 그 용의자가 진짜 보르만이 아닐 건 또 뭔가? 왜 안 되는가? 정말 거짓말 같은 시대였다. 하지만 소심하고 자만에 차 있는 대령과 같은 부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일 뿐이었다.

[376] 나는 복수를 하려고 살아왔지만 그들은 그 욕구를 좌절시켰다. 그들은 내가 복수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377] 나는 무덤 속에 있기를 거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무덤에서 서서히 기어 나왔다. 수용소마다 살육자들이 설치고 있다하더라도 나 자신이 살육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햇다. 검은 리무진을 타고 왔던 3거두가 운영하는 시스템이 내게 맞지 않는 다면 나는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 터였다. 나의 조직, 내 가족, 아내와 아이들이 내 주위에서 피와 사랑으로 결합된 요새 안에서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거였다. 나는 그들의 위해 나만의 요새, 나만의 성채를 만들리라

[378] 상상 속의 내 자식들은 남동생들을 닮았고 여자들은 내 어머니, 리브카, 조피아, 소니아를 닮은 모습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푸른 나무들이 서 있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 어머니, 내 동료들이 모두 나무들 사이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

[382] 내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원수를 완전히 갚는 일에 실패했다. 그리고 내가 복수를 했더라도 그대들의 생명을 되살려 놓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죽은 자를 되살리수는 없다. 오로지 새로운 생명만이 그 죽음이 잊히게 할 것이다. 새로운 다른 생명들

[384] 나는 간다. 전우들이여 복수할 시간은 지나갔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고 있다... 우리의 앞길은 서로 다르다. 그대들과 함께 한다면 내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겠는가? 경찰? 군인? 나는 그런 일을 하려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아니다.

제 3부. 신세계

[388] 그들은 나를 과거에 묶어두려 했지만 나는 새로운 세계에서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392] 불행한 시절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언제나 계획을 짰고,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럼으로써 일이 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면서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나는 유레크에게 나의 꿈과 내가 이루어야할 계획을 전부 말해주었다. 나의 이상향을.
"외할머니, 미국, 그리고 일하는 것이 목표야. 그래서 왠만큼 돈을 모으면 아내를 구하고 아이들을 낳고 가족을 이룰꺼야. 그런 후에 우리 모두 어니가에 갈거야."

[392] 죽음 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동생들. 내가 너희들을 다시 태어나게 해줄테다

[392] 내 눈에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가 약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인양, 손으로 쓴 비뚤비뚤한 글자들만 들어왓다. 그 편지는 "와라, 마르틴. 와라."는 말을 여러 가지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393] 유레크가 나를 포옹했다.
"너는 또 다른 담을 넘는구나. 너는 늘 달려야 하지."

[394] 나도 드디어 갑판에 머물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물보라를 맞으면서 이 여행의 종착역인 새로운 세상의 해안선을 살펴보게 됐다.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갑판으로 올라왔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우리의 미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94] 나는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구경을 시작했다. 또 다른 투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내 줏대를 세우고 믿음을 유재해야 했다. 다시 승리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으며 믿음을 유지해야 했다.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는 가족들, 동족들의 신뢰를 얻을 자격을 가지기 위해 나의 요새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잊지 말아야 할 터였다.

[397] 여기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이해해야 했다. 이 곳에도 남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자기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선구자들도 있을 터였다. 게토에서처럼, 파비아크 감옥이나 트레블린카에서처럼 운명에 굴복한 사람들도 있을 테고, 운명을 앞지르고 지배한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399]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외할머니에게서 베푸는 기쁨을 뺏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네 아내에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마. 그러면 나중에도 이 외할머니가 기억날꺼야."

[399] 유일한 기쁨이자 커다란 기쁨이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400] 장차라고? 장차란 건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시간의 차원이었다.

[401] 돈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자유를 준다는 걸 나는 이미 게토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요새를 건설할 작정이었지 구매 대리인의 무뚝뚝한 지시를 들으며 일하려는 건 아니었다... 나는 탐험되고 정복당하기를 원하는 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모험가 미에테크였다. 이곳에 내가 살아 있는 표시를 남길 것이다.

[402]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바깥 공기 속에서 행동하기를 원했다. 다른 사람들 같이 돈 몇 푼을 벌려고 재봉틀 앞에서 일하다가는 내 존재를 알릴 길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 계획을 실행하기위해서는 게토에서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토에서처럼 담을 뛰어넘어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다른 사람들이 할 수없고 하려고 하진 않는 일을 해야 했다.

[402] 이 도시는 숲처럼 광대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곳이어서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행인들과 지하철 승객드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태도나 눈에 지치고 피곤한 기색을 보았다. 그들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남들이 자기들을 이끌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시간표와 장소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그렇게 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만의 법을 만들고 나만의 지도를 만들 작정이었다. 나는 도시의 파르티잔이었으며 있을 법하지 않는 곳에 불쑥 나타나곤 했다. 나는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구속만을 받으며 자유로운 상태로만 살아갈 것이다
절대로 굴복하지 마. 미에테크

[404] 모든 도시의 중심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느 곳에나 인간다운 인간과 살육자를 갈라놓는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

[405] 이곳에서도 나는 지지 않기 위해, 기계에 묶이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다. 자기의 삶을 선택하고 그 음울한 작업장과 먼지 나는 창고에서 벗어나려면 싸워서 이겨야 했다. 운전자가 모자를 벗고 하는 인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생명을 만들고 가족을 보호할 능력을 가지려면 빨리 갈 길을 정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406] "너는 내게 새 생명을 주엇어. 마르틴."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불쑥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와줘서 고맙다."

[412] 가족이 살아 있을 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제 정신이 아닌 일이었다. 죽음이 가족을 앗아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 걸 모르는 것이 바로 미친 짓이었다.

[423] 골드먼은 내게 이미 준비된 요새와 아내를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돌 하나 하나를 쌓으며 직접 요새를 건설해야 했고 내 편이 돼 줄 여자를 찾아야 했다. 오직 내 손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손을 가진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424] 첫 기회를 잡으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다가온 기회는 꼭 잡아야 하는 법이다. 아이디어는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426] '조셉 골드먼이 골동품상 멘들에게 행운을 빌려 보낸다." 골동품상이라는 단어에는 밑줄이 그어져 잇었다.

[429]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버지가 게토에서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433] 나에게 인생은 람블로프 숲에서 공격할 때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넘는 것이며, 끝까지 버티는 것이며, 위험을 감수하고 끊임없이 행동하며, 전부 다 얻거나 전부 다 잃거나 양단간의 선택을 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440] 그는 망설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망설였다.

[441] 빠른 속도가 나의 힘이었고 시간은 곧 돈이었다.

[441] 아마 언젠가는 바삐 달려가는 내 삶을 늦춰줄 여자가 나타나겠지. 언젠가는 휴식을 음미할 수 있겠지. 나는 오직 그런 여자와만 요새를 지으리라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세요. 멘들. 언제나 달려가는군요."

[454] 나는 부자가 되었지만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 외할머니를 등한시 했다. 외할머니 곁에 머물면서 외할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위해 살았어야 했다. 외할머니를 돌보고 껴안아 주었어야 했다.

[455] 차분히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증인이 되려고, 내 가족들의 복수를 하려고, 그들의 생명이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요새를 건설하고 아이들을 가지려고 지금껏 발버둥을 쳐왔다... 이제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영원히 안녕이란 말만 할 것 같았다... 미에테크, 썩은 나무처럼 언제나 서 있구나. 나무껍질은 튼튼해 보이지만 나무 둥치 속은 비어 있는 썩은 나무, 나는 너무 외롭고 너무 슬퍼서 토할 지경이었다. 이런 내 인생에 여자를 묶어 놓을 이유가 뭔가? 모든 것이 위협받는 삶을 살면서 왜 자식을 가지려는가?...나는 누구를 위하여 요새를 짓는가? 나는 내 생명을 스스로 끊을 권리는 없지만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할 권리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길을 따라 끊임없이 기어가는 개미들 같이 그저 하루하루 계속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460] 그녀가 생긋 웃었다. 우리 둘 다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뱃속에서 웃음이 끓어 올라 가슴과 목으로 물결치듯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나는 생명과 대면하는 중이었다.

[461] 나는 디나를 오래 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나이는 물론 종교, 이름 등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런 것들은 죽은 언어였다.

제 4부. 행복
[467] 내 인생은 마치 길게 뻗은 오르막길 같았지만 나는 속도를 더 높여가고 있었고, 그 오르막의 모퉁이들은 점점 더 급하게 꺽이곤 했다.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랐다.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내 삶을 제어하지 못하게 됐다. 내 인생은 나와 함께 질주했고 나는 점점 더 속도를 높여갔다. 모퉁이를 돌면 평평하고 넓은 평지가 나타나리라 생각할 때마다 더 가파른 오르막이 또다시 나타나고 새로운 모퉁이가 나타나는 이 경주를 포기하가너, 길 밖으로 차를 돌려 차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할 때도 많았다. 내가 정말로 더는 나를 억제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려 하던 그때, 디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469] 디나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우리는 조용히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매일매일이 축제였으니깐 따로 거창한 예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470] 그녀와 함께라면 나는 제국이라도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70] 서른 다섯 살에 은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좋은 패를 잔뜩 들고 있으면서 말이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물론 내게는 딴 생각이 있었다. 행복이라는 카드를 잡는 일이었다.

[476] 나는 다시 태어났다. 게토에서 묻은 먼지르 떠어내고, 트레블린카에서의 누런 모래와 땀을 씻어내고, 폴란드 숲에서 묻은 진흙을 떨어내고, 내 손에 배어 있던 피를 닦아냈다. 몸무게가 17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그렇게 팔팔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도 자주 학대받고 비틀렸던 내 뼈와 근육들이 새 것처럼 유연해졌다.

[477] 나는 인류에게 맡겨진 생명이며, 부모인 디나와 나의 보호를 받아야만 자라날 수 있는 연약한 생명인 니콜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순간도 그 방에서 떠나지 못하고 디나와 니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나의 분신이었으며 니콜에게는 어머니, 조피아, 리브카, 외할머니의 생명이 깃들어 있었다.

[481] 날이 갈수록 당신을 더 잘 알게 되요. 그리고 날이 갈수록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요

[482] 우리는 더 이상은 다른 사람들처럼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엇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창안해냈다.

[483] 그럼요. 고기는 죽은 거잖아요. 고기를 먹으려면 짐승을 죽여야 하죠

[484] 매일매일이 비슷한 듯 했지만 실은 전부 다 달랐다. 디나는 집에 페인트칠을 했고 똑같은 채소와 과일로 매번 색다른 요리를 만들었다.

[485]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사랑이 깃든 몸짓이었다. 그녀는 사람과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녀 자체가 사랑이었다.

[488] 샤를이 두 팔로 내 허리를 잡고 내 등에 머리를 기대는 게 느껴졌다. 그래, 내 아들. 너는 나를 믿어도 돼. 그래, 아들아, 아빠가 여기 있어. 우리가 집 앞에서 오토바이를 멈추면 쉬잔느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내 딸이 손가락으로 생명을 창조해내는 소리였다.

제 5부. 운명
[499] 나는 게토에서 어머니와 리브카가 '이주의 광장'으로 가는 모습을 본 미에테크로 되돌아갔다. 다시 트레블린카로 돌아가서 동족들을 무덤 속에 눕히고 있엇다. 내가 지르는 고함 소리가 내 몸을 고문했다. 안 돼, 미에테크!

[502] 누가 생명을 도로 불러올 수 있겠는가? 누가 내게 생기를 되돌려줄 수 있겠는가? 나는 자살하지는 않았다. 나는 말도 하고 음식도 먹고 일도 했다. 죽고 싶은 충동만이 유일한 위안이던 단계를 넘겼다. '왜, 왜 나인가? 왜 내 가족을 뺏어갔는가? 그것도 두 번이나? 내가 인류 혹은 운명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했단 말인가? 이유가 뭔가?라는 질문만 되뇌던 단계도 지나갔다.
나는 이제 말을 한다. 내 인생을 하나하나 상세히 얘기하면서 광기와 기회의 사슬을 이해하고 나를 짓누르는 불행을 이해하려 한다.

[505] 나는 행복함과 잔혹함, 삶과 죽음을 다 경험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살육자들과 인간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완전히 성취되는건 아무 것도 없다. 장벽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게토 한군데를 파괴하고 나면 다른 게토가 생겨난다.

[506]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아버지가 끝까지 버텨내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사람이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평가된다고 말했다. 그게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아이들은 결코 듣지 못하게 됐다. 또다시 나는 마음속의 트레블린카를 떠났다.

[507] 나는 살아가고 일을 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나는 트레블린카를 탈출해서 살아남았으며 나만의 요새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요새란 모두 무너지기 쉽고 오래 가지 못한다... 과거에는 살육자들에 맞서서 내 가족들을 위해 살았다. 현재도 여전히 가족들을 위해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내 가족과 그 이전의 가족들을 위해 살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준 나, 그들이 내게 준 것을 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보답함으로써만 존재 이유를 갖는다.

[507] 살아가고 끝까지 버텨내면 언젠가는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나의 죽음과 내 가족의 죽음을 보상해서,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게 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누군가가 남아서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그 이야기를 전하고 증인이 돼 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에필로그
[510] 나는 비극을 여러 번 겪었던 까닭에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덕분에 나는 사람들이 무한한 힘과 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활력은 사람의 내면에서 만들어지고 내면에 존재한다. 사람은 스스로 그 활력의 존재를 인정해야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내 삶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의 삶도 변화시켰다. 우리의 경험과 운명이 우리 스스로를 인도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를 전진하게 하고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운명 말이다. 내가 쓰는 글이 독자들의 마음에, 전 세계 사람들의 영혼에 연결된다면 그것은 나의 메시지가 나 자신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내 삶의 숱한 경험과 감정을 중개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손을 내밀어 남을 돕지 않는다면 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511] 며칠 전에 로마황제이자 철학가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이 담긴 책을 읽던 중에 이런 말을 발견했다.
"인간 공동체를 받들어야 하고 모든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개인의 이익은 공공의 이익이 돼야 하고,상호 의존을 통해 공공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은 자연이 정한 원칙이다. 태초부터 현재들은 이 인간 공동체가 언제나 희망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도 말한다. "곧 당신은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곧 모든 이들은 당신을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 그가 이 글을 쓴지 2000년 이 지난 후에 나는 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공통체는 엄청난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 죽음은 종말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513] 나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결합을 믿는다.

[514] 죽기는 누가 죽었는가? 그들은 모두 여기 나와 함께 있다

[514] 비록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내 삶에는 활력과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마지막 날에 이 기쁨을 외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카인이 마지막 날에 일어나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기쁨을 믿는다. 기쁨은 세상의 색깔이다.
나는 내 기쁨, 사랑, 인류에 대한 나의 신념을 외칠 것이다. 이 기쁨이 바로 나를 생존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아무도, 그 어떤 힘도, 어떤 정권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파괴해서는 안된다. 나는 파괴를 시도하는 사람에게 대놓고 반항한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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