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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0일 02시 16분 등록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 휴머니스트 출판사

저자 소개
저자 구본형은 1954년 1월 15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학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동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IBM에서 근무하면서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했다. 경영혁신의 성과를 증명하는 탁월한 그의 실무능력은 많은 수상경력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한 그가 결론지은 것은 어떤 경영혁신 프로그램도 결국엔 ‘사람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혁신을 위해서는 사람이 변화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경영비전을 제시했으며 그의 1인 기업 ‘변화경영 연구소’의 모토도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 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비전과 실천적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글을 쓰는 리더가 부재하는 이 시대의 올바른 리더이며 작가이다. 
그의 경영모델은 동양적인 사고와 한국의 문화적 DNA를 바탕으로 인간중심의 경영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소수가 아닌 보편적 다수의 평범한 삶의 특별한 가치를 위해 글과 행함을 통해 설득한다. 그의 모든 저서는 서구적인 메커니즘에 의한 분석적 사고가 아닌 개인의 성찰과 자발성에 의한 인간중심의 철학적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그의 삶은 그의 경력만큼 화려하지 않다. 그는 그의 연구원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 100명의 변화 경영 연구원들을 양성하고, 500명의 꿈벗 커뮤니티를 구성하여 더불어 '시처럼 산다‘ Life as a Poem 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삶에 있어서 사회적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진실함과 충실함을 위한 치열한 자기 성찰과 일관된 생활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중요한 기업의 자산이 된 지식사회에서 인문학과 경영학의 다양한 만남을 모색하는 그는 현대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꿰뚫어 변화경영이라는 일인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소시민적 수동성을 넘어서서 변화의 주체로서 수많은 개별적 중심을 지닌 다면적 물결로서 미래의 창조에 참여하는 적극적 과정을 중요시한다.
 수상 경력 : 한국능률협회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선,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 동아일보가 뽑은 2001년 전반기 읽어야 할 책 10선,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2004년 리드앤리더 자문위원단이 뽑은 국내외 비즈니스 명저 40선 등 다수..
실무경력 : IBM 경영혁신 기획실무 총괄,  IBM 말콤 볼드리지 국제 심사관   
저서 :  익숙한 결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 월드클래스를 향하여, 떠남과 만남,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사자같이 젊은 놈들,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 일상의 황홀, 코리아니티 경영, 공익을 경영하라, 사람에게서 구하라, 아름다운 혁명 공익비즈니스, 세월이 젊음에게,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글귀

p 10 첫째,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내 생각치고 오리지널 내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까?  문화는 처음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내 속에는 나를 키워온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는 셈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속에는 나의 생각, 나의 느낌이 편재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무엇이 그들의 생각이고 무엇이 나의 생각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 역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해서 그가 정말 오리지널인지 불분명하다. 내용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에 인용한 것인데, 저자와 원전이 덜렁덜렁 따라와 군더더기가 된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전형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내 것과 남의 것 사이의 경계가 너무 모호하면 도둑질이 될까 봐 최소한 따옴표를 써서 형식적으로 구별했다.

=> 창조란 항상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한국적인 펜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더 잘 사용하는 펜싱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의 문화나 구성원들의 성향이고 유형이지만  개인의 것은 아니다.
명명하게 되면 개성은 사라지고 동질성만 강조된다.

규칙과 표준이 창의성과 예술성을 말살한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이끄는 정신적 물결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잃으면 배를 띄울 수도 춤을 출 수도 없다.

=>  예술에 있어서 형식이 없는 창조란 어렵다. 그러나 형식에 갖힌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겁법도 그렇다. 기본과 기초가 없는 검술이란 그야말로 짐승의 본능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형식과 기술에 갇힌 검술은 춤이다.  실전적인 생명력이 없는 안전한 무대 공연에 다름아니다.

p12 나는 모든 것을 털어내되 그 이야기에 책임지지 않는 방법, 즉 화자와 이야기를 분리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의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거짓과 농담을 가장한 진실과 진담임을 알게 되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가상이 어울리고 미래와 과거가 전도되고, 욕망과 성취가 혼동되는 그래서 더욱 나다운 그림을 그려보려 했다.

=>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합리적이지만 창조적이지 못하다. 실전으로 가르치는 것은 자유롭지만 체계적이지 못하여 산만할 수 있다.

p12-13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

=>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자아란 의식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무의식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존재다. 전체는 항상 부분들의 관계와 질서에 의해서 결정되어 진다. 훈련은 단지 부분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수양은 전체성을 위한 질서의 훈련이다.

p18 육체는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힘줄처럼 질기다. 그러나 육체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안으로부터 비대해지고 느슨해진다.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
=> 제국의 멸망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붕괴로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훈련과 약속을 게을리하면서 시작된다.

p20 어쨌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은 싸움이 아니다.  두려움은 극복하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다면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된다.

p22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지식을 자신에게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 
=>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처럼 지식 없는 체험은 무의미하다.

p23 중년의 금지된 사랑은 평범한 사람들조차 황홀하게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이다. ‘장미여관’은 만만한 것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도 별 노력 없이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드라마의 현장이다. 성이 사랑을 대신하는 침대만큼 쉽게 흥분하고 값싼 투자가 어디 있겠는가?

p26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모파상은 ‘진실한 사랑은 영혼이 육체를 감싸 안는다’ 라고 표현했다.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죽어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 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 해서 잘못되어 하는 후회가 해보지 않아서 하는 후회보다 백배 낫다. 하나는 성공 아니면 실패지만 다른 하나는 실패는 없지만 성공도 없다.

p27 공자에게는 불혹의 나이였던 것이 2,500년이 지나 유혹의 나이가 되었다.
  
=> 일본의 방송작가의 말에 의하면 활동연령은 자기나이 곱하기 0.7 이니까  40대란 28에서 34까지다. 요즈음의 나이를 2500년 전의 나이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p31 아름다움이란 여러 가지 깊이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긴 인생이 빛깔이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문제에 끌려 다니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

최선의 해결책에 도달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던져주는 여러 상징을 해석하고 가능한 여러 해결 방법 가운데서 내게 적합한 방법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니까. 물론 모든 문제들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안고 살면 되는 거지

=.> 다인일과
문제가 던져주는 여러 상징들을 해석하고 가능한 여러 방법 가운데에서 내게 적합한 방법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해야만 되는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속에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행동 할 수 없는 일은 행동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것은 먼저 할 수 없는 일을(생각) 행동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시작이 사고의 틀을 깨 부수는 것이다.
 
p33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 같기도 하고 비애 같기도 하고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 30년 세월을 묻어야 했다. 이유는 … 다르다는 것이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목적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을 틀리다고 말하고 목적에 이르지만 수단과 방식이 다르면 다르다고 말한다.

p38 지나간 과거에서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할 때 마흔 살 남자는 낙엽처럼 부서지는 허망함 속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을 너희처럼 새파란 것들은 알 수가 없는거야

일밖에 없는 일꾼은 성공한 실패자가 되고 부유한 노예가 되고 가족에게 미안한 가장이 되고 늘 바쁜 아비가 되어 무자비한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

p41 나는 정신연령이 좀 낮다. 난 아직 우리의 세상에 마법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가끔 책들을 보면서 영리한 마법사들이 감춰놓은 결정적인 주술을 찾아내려고 한다.

p42 마음 살은 연령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된 나이다. 그리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마흔이 되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사회적 윤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좀 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려고 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용한다. 따라서 개념의 깊이를 희생하는 대신 명료하고  구체적인 일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 때문에 놀이를 포기하고 책임 때문에 순수한 자유를 반환하게 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마흔 살은 개인을 군중과 대중 속의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넘어, 자유와 전통적 권위 사이의 힘 겨루기를 넘어, 진정한 사회화를 겪게 되면서 보수화된다.
이상과 비전으로 상징되는 젊음의 마법이 사라진 후에 다가오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일만이 생산적인 것이고, 지루한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탈출구다. 이리하여 일은 일상과 실제의 삶이 된다.

p44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른아이(adultlescent)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듯이 자신의 나이를 못 견뎌하는 어린 어른들도 있긴하다.

p45 어쩌면 마흔 살은 여성적인 특성의 수용이기도 하다. 그 동안 자신을 움직였던 힘과 지위와 성취에 대한 경쟁심리를 옆으로 치워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신 좀 더 감성적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여성적인 특성을 받아들인다.

마흔이 넘으면 사람들은 외부를 변화시키는 것에 무력해진다. 그들은 자신을 믿는 대신 더 힘이 센 다른 사람과 제도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p46 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정신적 에너지를 자기 안의 대상을 공격하는 데 쓰게 됨에 따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마흔이 넘으면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실패와 무능력과 비겁함을 비난 받아야 할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한계와 비극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강한 자에 대한 비난은 탄식과 슬픔이 된다. 겸손과 동정과 베풂은 이런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 변환이다.  이러한 자기수용은 자아통합(ego-integrity)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

p48 마흔 살 너머의 창조는 학습과 훈련과 가벼운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

p49 마흔이 되면 단순한 이분법과 전통은 더 이상 등불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해석한 세상을 가지게 된다.

중년의 개인들은 삶을 통해 인간에 대해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금기와 확신의 딱딱한 껍질을 버리고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기회를 갖게 된다.

싸울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을 때, 유머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다.

p50 유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깝게 있으면 유머를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을 약간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불 수 있을 때 자신을 소재로 농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가 있으면 안 된다. 무관심은 유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유머는 중연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엔도르핀이다. 그것은 스트레스와 비극을 완화시켜준다.

치료란 역경과 비극을 극복한 것이다.

p50-51 마흔이 되면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운명이 희망과 기대를 가리게 한다. 쉽게 절망하고 냉소적이 되기도 한다. 젊었을 때 사람들이 너무 희망적이었다면, 마흔 살이 되어서는 모든 믿음을 쉽게 버리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저 두 개의 시선, 자신을 바깥에서 보는 시선과 안에서 보는 시선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쓰임을 받으면 애써 일하고 버림을 받으면 스스로 즐기면 된다. 부름을 받으면 신명을 다하는 것이고 그들이 잊으면 일상을 즐기며 스스로 벌어 궁색하지 않게 먹고살면 되는 것이다. 

p55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


P62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P64 에게 해에는 꽃과 바위만 있는 섬이 있다 한다. 다른 곳에서는 잠깐 피었다. 지고 말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꽃들이 그곳에서는 한 해에 두 번이나 크고 화려하게 만발한다고 한다. 옹색한 땅과 준엄한 바위가 오히려 개화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결핍이 꽃을 아름다운 꿈 안으로 몰아 넣어 준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P65 1990년 대 10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IBM이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 전환의 몸부림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경영혁신의 현장에서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생사를 건 변환의 투쟁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배는 방향을 틀어 좌초와 침몰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정착하고 위기를 지나게 되자 변화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동안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정신적 작업은 사라졌다.

P66 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줄고 있었다. 그 대신 새로운 일자리는 프로젝트와 테스크, 그리고 전문분야로 대체되고 있었다. 이미 미국인은 대학을 나와 40년 정도 직장생활을 할 때 최소한 11차례 이상 직장을 바꾸고 최소한 3차례 정도는 바탕기술 자체를 바꾸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평생직장은 사망했고 평생직업은 끝없는 학습으로만 가능한 움직이는 타깃이 되고 말았다.

P67 우리는 조급한 자본이 (impatient capital) 지배하는 시대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다가오고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다시 다른 그림이 닥쳐드는 홀로그램의 세계가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장기적 관점이 사라져가는 경제 시스템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P68 그들은 부가 가치가 낮은 지금의 일을 싫어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싫은 일조차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지만,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P68 자발적 퇴직 제도는 오히려 인재 유출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p69 거품이 가진 속성, 화려함과 불안정성이 공존했다. 

최상의 경영진들은 늘 개탄했다. 남아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나가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늘 남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사가 양로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젊고 경력있는 사람들을 채용하고, 군중 속에서 마흔이 안 된 유능한 젊은 인재를 찾아내 고속승진을 시키고, 아우소싱을 통해 체중을 줄이는 작업을 계속했다.

‘짧은 체류 여러 번의 전직’ 이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P70-71 어느 조직도 필요한 사람은 떠나 보내지 않는다. 어려운 때일수록 잡아두고 싶은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것이 ‘필요의 원칙’이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자신의 특별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고  일을 처리하는 자신만의 좋은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적절한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말은 떼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적절한 관계라는 것은 본인의 성격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다. 그러나 적절함의 특징은 하나다. 폐쇄회로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 폐쇄성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잇는 사람’이라는 열린 관계가 유지되도록 적과 동지 사이의 제 3의 꼭지점을 찾아내어 그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누구의 사람’이라는 폐쇄적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한때 화려하게 권력에 줄을 대 급부상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처럼 빼내기 어려운 자리에 있다.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내향적인 사람도 잘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람이 장점을 읽어 낼 수 잇는 사람들은 이러한 휴먼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익숙하다.

셋째 그들은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전문성이 자격증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식은 변하고 경험은 늘 다르게 적용된다. 자신의 소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계발한다. 이들은 대체로 겸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애정 없이는 자신을 불태울 수 없다. 어떤 분야든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대략을 알고 잇다. 그들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단추를 끼울 수 잇다. 이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잇는 사람들, 그들이 떠남으로써 남겨진 조직의 힘이 격감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니체는 가장 위험한 조직원은  그의 이탈로 조직 자체가 파괴되는 조직원’이라 불렀다.

P75 나는 세일즈 대신 나를 마케팅할 방법을 모색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찾아내는 방법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수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잇다. 나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설득했다.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잇는 특성은 수동성이다. 나는 능동성이라는 유전자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수동성을 강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말하자면 수동성을 적극적 수동성으로 전환할 수 잇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은 꽤 재미있었다. 적극적 수동성, 즉 유혹은 늘 설득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경영학은 ‘유혹’ 이라는 싱싱한 단어를 죽은 단어, 즉 마케팅이라고 불어왔다.

P75-76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고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고 덫이다.  사냥은 창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짐승에게 덤벼드는 것만이 아니다. 온몸에 쥐가 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다 덮치는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덫과 올가미를 놓고 편안한 집에서 술 한잔하고 푹 쉬고 나서, 그 다음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덫과 올가미에 걸려 잇는 짐승을 향해 다가가는 것도 사냥의 한 방법이다.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 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 두는 것이다.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 당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 1의 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모든 위대한 리더는 유혹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자신을 포장하든지, 크고 부드러운 젖가슴으로 지그시 눌러 이성을 질식시키든지, 위대한 사상을 통해 혼을 빼앗거나 달콤한 꿈속으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매력이 없는 리더란 없다. 리더는 반드시 자신의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유혹은 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매력은 가장 자기다운 것에서 발산되는 페로몬이다.

p79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
경영 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위와 자격증은 과거의 영광의 흔적일 뿐이다.

p79-80 미래를 평가의 잣대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확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물로 된 항아리 속에 물을 담으려는 발상이다. 반대로 미래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바닷물 속에서 식수를 찾는 것과 같다. 온통 가능성의 물로 채워져 있지만, 아직 한 컵의 마실 물도 되지 못한다.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만이 전문가로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p87 내가 일상의 여울 속에서, 그 작고 미세한 감정의 파도들이 쌓아놓은 퇴적물로 화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p88 생각은 매우 진부하거나 느닷없는 새로움으로 정신을 죽이거나 일깨운다. 생각은 머리를 통해 눈에 나타난다.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p90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머리용 가발이다.

p99 고착의 패악은 정신을 경직시킨다는 점이다.

미셀 푸코의 말들이 생각났다. 인간은 권력에 오염되어 있다. 물질적 권력이 아니라 지식을 통한 훈육권력에 매여 있다.  건강한 개인과 부강한 국가라는 거부하기 어려운 모토를 앞세워 개인의 삶을 규격화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이 우리를 묶어 두고 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만들어지고 조작되고 인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p99-100 문학이 우리에게 숨쉴 곳을 제공하는 이유는 김수영의 표현대로 ‘기본적으로 불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조금 미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밖으로, 사회 속으로 자신의 밀실을 확장해 가려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자유의 공간을 넓히려고 한다.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 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

p101-102 수필이 매력적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고 진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늘 째째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저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애쓰다 아파트 한 채를 남기고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라고 기록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p102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자유를 천만금에도 팔지 않는다. 돈에 묶이지 않고 가볍기 때문에 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인형은 홀로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다. 생명은 내면에 있다.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다. 신은 복잡한 곳에 있지 않다. 바다 위에 머무는 햇빛, 푸른 하늘을 흐르는 구름, 미풍 속의 나뭇잎, 그리고 그 바람, 시냇물이 흰 바위를 스치며 내는 소리, 계류가 흐르다 모여 이룬 소 속의 가을 물빛, 나뭇잎 하나와 거미줄 한 가닥에 매달린 작은 거미, 비 온 뒤 흙 길 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지렁이 한 마리는 신이 가장 머물기 좋아하는 장소들이다.

p103 우리는 사회적 기대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다. 세속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종교를 선택한 경우에도, 종교적 도그마에 갇히면 인형이 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다른 종교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종교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그리하여 온갖 비본질적 배타성과 진리를 가장한 광신이 뿌리내리게 된다.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104 책임이 더 이상 구속이 되지 않도록 일이 더 이상 밥벌이가 되지 않도록 자유가 더 이상 방황이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다시 인형으로 돌아가 수없이 많은 끈으로 조정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남의 얼굴들을 그리워하다 여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가고 규범을 배우고 문화 속에 던져지면서 의도적 왜곡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되어갔다.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 놓은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p108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李卓吾-

아비 역시 스승과 친구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부모로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 너머 함께 즐기고 어울리고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p 109 나는 갈등에 대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들이라 부른다. 갈등 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시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

p116 나는 그들을 통해 나를 투영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늘 지나가는 길에 어떤 상점을 보면 ‘저런 게 저기 있었나?’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을 보고 과거의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지나간 사건들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게 무엇이었나를 물어보고 즐기는 사람이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

p117 작은 딸과 나는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둘 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체세술과는 거리가 먼 족속이다. 우린 사상을 바꾸려는 축이고 아내와 큰딸은 세상을 즐기고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다원적 적자’들이고 우리는 ‘돌연한 변종’들이다.

p118 적어도 무심코 던진 말이나 행동으로 곡해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p122 그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주어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만 존재할 뿐, 그 사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은 비어 있었고,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생명이 없었다. 책임과 의무만이 무서한 잡초처럼 내 마음의 벌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살아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과 같다.’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p128-129  친구들 사이에는 이해가 끼면 안 된다. 친구와 비즈니스를 같이 하는 것은 안 좋다. 비즈니스는 그저 전문성을 나눌 수 있는 신뢰할 수 잇는 사람들과 하면 된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다. 

p129 또한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잘난 척해서도 안 된다. 친구의 성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순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성공 속에는 늘 ‘그 동안 나는 뭘 했나’ 하는 자시에 대한 문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두움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 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평생 가고 싶으면 늘 반갑고 그리운 관계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

p130 따질 것도 없고 계산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함께 가는 것이 친구들이다. 친구란 함께 어울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 어울림이 빛날 수 없다.

p133 오래 살아 인생의 지혜를 가지게 된 사람,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 자연의 마음을 가지게 된, 자연을 닮게 된 사람, 그리고 머지않아 자연 속으로 돌아갈 사람, 그것이 할머니였다.

p134
‘자연과 신, 그 어느 쪽도
나는 알지 못했으나
그 둘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본성의 집행관이었다.
   -에밀리 디킨슨 -

p138 햇빛의 작은 입자들이 내 몸에 내려와 앉는다. 닿는 순간 밝은 파동으로 변하고 이내 혈관 속에 녹아 들어 세포 하나하나에 골고루 태양의 힘을 전해 준다. 우주의 에너지는 이렇게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힘을 얻는다. 나는 새로워진다. 충전되고 성장하고 상쾌해진다.
p140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p141 사랑의 개념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천변만화의 격정이다.

p142 사랑 자체가 온갖 변화를 다 껴안고 있는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삶이다.

왜 변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p142-143  밀란다왕문경 ..
   나가세나 :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켭니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왕이시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은 같은 것입니까?
 밀린다 왕 :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그러면 초저녁의 불꽃과 한밤중의 불꽃은 다른 불꽃입니까?
밀린다 왕 :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꽃은 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나가세나  : 왕이시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도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은 별개로 보이지만 지속되는 것입니다.

p143 곽박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 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 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다.

p144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

G. K 체스터턴의 말대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기쁨은 도처에 있고 “늘 활동 중”이다.
 
p152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을 가장한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리진이 어디에 있든지, 분명한 진실은
나의 것이 된 생각들, 즉 이미 ‘내가 귀화한 생각’들이라는 점이다.

p153 인간의 진보는 ‘사고의 혁명(thought revolution)’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에 대한 생각들’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려보내는 일이다.

“ 스스로 정정한 나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그 나무를 부러워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나무의 열매를 가져다 심고 싶어할 것이다.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좋은 씨앗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하루를 보내도록 해야 한다. 남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고,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삶을 즐겨라, 삶 자체가 유혹이 되게 하라.
로댕의 말을 잊지 마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사람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

p 154 자연은 아주 많은 낭비를 즐긴다. 이것이 자연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이유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내라.

p159 큰 아이가 운전을 하면 작은 아이는 앞자리에 탄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뒷자리로 옮겨 앉는다. 우린 점잖게 뒷자리에 앉아 젊은 아이의 운전솜씨에 몸을 맡긴다. 아슬아슬한 자동차의 물결 속을 신이 나서 달려간다. 아이 엄마는 간혹 비명을 지르기도 하지만 나는 속으로만 지른다. 자동차의 뒷자리에 앉으면 나는 몇 살을 더 먹곤 한다. 점잖게 앉아 젊은이들이 세상을 이끄는 것을 가슴 졸이며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 늘 앞자리를 선호한다.

p160 세상의 모든 일을 가능한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던 청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거울 속에서 나이든 남자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젊었을 때의 상상의 대부분은 흔적 없이 날아가고 겨우 몇 개만 우연한 현실이 되어 있다.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뒤물이 앞물을 뛰어 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p162 1980년대 말  호비츠(Robert H, Horvitz) 는 세포의 죽음은 성장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끝내도록 내장된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삶을 해체시킬 프로그램 즉 자살 프로그램 말이다. 그것은 세포가 손쓸 수 없이 많아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좋은 브레이크는 좋은 엑셀러레이터 만큼 중요한 것이다.”
p163 1990년대에 들어와 인체의 노화를 관장하는 시계가 염색체의 맨 끝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텔로미어(telomere)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는 염기쌍을 잃어버리면서 조금씩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일종의 시계라면 텔로머리아제(telomerase)는 일종의 태엽이다. 이 효소가 텔로미어에 염기를 첨가함으로써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리는 것이 밝혀졌다.

p164 죽음은 무분별하고 과다한 욕망을 제거해줌으로써 생명체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와준다. 
죽음에 대한 통찰이 의사나 과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학자나 문학자 혹은 역사학자, 그리고 치열한 삶을 살아본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훨씬 더 잘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은 이런 동질성 때문인 것 같다. 쳘학은 의학을 선도한다. 생각이 늘 기술을 선도한다.

p166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이 개인의 역사도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 속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자연과 문명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갈등은 그러므로 인간의 숙명이다. ‘멋대로 하지 말라’고 하는 인간의 재갈, 즉 문명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는 최초로 만나는 문명이다. 거역하면 패륜이 된다. 학교와 종교는 그 다음에 만나는 문명이다. 사회적 가치관을 만들어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여론, 그리고 법은 문명이 정한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제약하는 통제선이다. 이 선은 대체로 굵고 선명하기도 하지만 군데군데 모호한 구멍이 뚫려 잇기도 하고 간혹 희미한 곳도 있다. 인생은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한쪽에 치우치고 때때로 반전하고 이윽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한 융합과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 문명은 욕망이 과도한 탐욕과 결합을 지닌 불완전한 복제를 시도할 때 제동을 걸어준다. 부모의 이름으로 학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법과 여론의 이름으로 말이다.

p167 공자가 조자에게 예에 대하여 묻자 노자가 대답한다.
“ 그대가 사모하는 그 어진 옛날 사람들은 뼈까지 삭아 홁이 되고 말았다. 오직 그 말만 전해져 내려온다. …. 그대의 교만과 끊임없는 욕망을 버려라, 자부심과 야망을 버려라.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

쓰임을 받으면 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숨는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p176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아니다.

아름다운 봄날은 빨리 지나간다. 모두 그리워하고 섭섭해한다. 그러나 가을 또한 곱게 온다.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

p185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종종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지금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이 것이 오히려 강박관념으로 다가오는 두려움이다.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를 떠나 미래(꿈)로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p188
‘내 속에 들어앉은 그들
그들 속에 섞인 나를 증오하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그러다가 아예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살고 싶은 땅일 것이다.’
                           -신경림-

길을 잃어버림이 구도의 포기일까? 혹은 다른 차원의 길일까?

p191 과거 역시 그 잔해 속에서 새로 복원되어야 비로소 원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미래처럼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걸어온 것에도 길은 없고
걸어야 할 것에도 길은 없다.
그렇지만
걸어온 것과 걸어야 할 것 없이는
길 또한 없다.
      -니가르주나(대승불교의 스님)

p192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 산다는 것 자체가 인생이다.

p193 삶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잠시 즐기고 다시 깨끗하게 복원하여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다.
손님이 돌아간 만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p194 50년 가까이 살다 보면 때 타고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깨달음이 없지 않은 나이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깨달음-인생에는 깨달음이 중요하다.- 같은 유치한 깨달음 말이다.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

p197 누구에게나 맞는 객관적인 삶의 의미는 없다. 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 이 유일무이한 구체성이 바로 내 사람이고, 따라서 그 의미 역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다.

p198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 안에서 죽고,
오늘의 나는 내이의 나 속에서 죽는다.’
 -플루타르크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p205 내게 독서와 꿈과 쓰기는 책 속의 경험을 배워 원래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던 근본을 이해하는 학습이다.

p207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은 집은 다시 지을 수 잇지만 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터를 잘 잡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p212 (해가 뜨는 것을 관찰…) 이 간단한 관찰은 나를 놀라게 했다. 지식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시한 내용일지는, 나는 비로소 경이로운 세상 속에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일상 속에서 스스로 찾아 내게 되었다. 지구의 공전, 자전, 기울어짐, 같은 것은 책 속의 단어일 뿐이다.  스스로 체득한다는 것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아무 이용가치도 없는 순순한 배움의 즐거움,이런 즐거움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p213 어느 날 잡초를 뽑다가 문득 잡초 역시 생명인데, 내가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에 움찔한 저기 있다. 생명을 죽임으로써 나는 자연에 반하고 있다. 갑자기 문명의 어원에 ‘재배하다. 양육하다.’ 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은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다. 잡초 역시 번성하고 스스로를 퍼뜨릴 권리가 있다. 인간은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아 잔디를 보호해준다. 재배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이것을 문명이란 한다. 잡초 뽑기는 그러니까 문명인 셈이다.

잔디밭의 잡초를 뽑다 보면 잔디와 비슷한 잡초를 만나게 된다. 다 자라면 잔디와 다르지만 어렸을 때, 잔디밭에 섞여 있으면 초보자의 눈에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사이비라 부른다. 벼 속에 섞여 있는 피 같은 것이다. 자연 속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이런 사이비들이 있게 마련인데 생존의 목적은 똑같다. 비슷하게 보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p214 위선은 ‘악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숨기는 악덕’이다.

유사한 욕망들로 점령된 밭을 묵정밭이라고 하고 그 밭의 소유자를 게으른 농부라고 말한다. 키우려고 한 것 외에는 모두 잡초다. 이것이 기준이다. 나는 왜 하나의 욕망이 그렇게 중요한지, 동시에 왜 다른 욕망들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지, 뜨거운 날 잡초를 뽑으면서 생각해보았다. 

p219 나는 조용한 사람이고 무거운 사람이고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민감하며 진지한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세상을 밝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p221 노동 자체가 참선이고 수련이다. 다만 전혀 수련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는 정신적 수련이다.  나는 빠져들었고 몰두했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동처럼 그 성과가 눈에 잘 나타나는 것도 없다.
 우리는 증거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일을 하면 한 티가 나야 그 기쁨은 배가 된다. 정원 일을 하는 것은 즐거운 노동이다.

p224 다른 수 놈과의 결투, 암놈과의 사랑을 통해 개는 의젓해지고 무게 있어졌다. 그전의 천방지축 1살 반짜리 아이가 아니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앉아 잇는 모습이 제법 의젓해졌다. 개 역시 사랑과 싸움을 통해 자라난다.

p225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울타리 안이 우리의 세계다. 이제 물리적 거리는 소멸되었다. 아침에 런던의 일을 보고 점심에 뉴욕의 일을 보고 다시 오후에 잔재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루를 지내는 일상의 작은 공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유목의 세계 속의 고향이고 내가 뿌리 내린 비옥한 공간이다.

p226 명상은 나를 즐기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 갇힌 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분에서 평화를 건져내는 것이다.

p228 고통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것은 내 일상으로 쳐들어와 점령하고 기승을 부렸다. 나는 때때로 싸우고, 욕하고, 화해하고 다시 싸웠다. 그리고 읽고 생각하고 썼다.

p229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짓눌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부디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니체+&

p232 성공은 채찍이다. 쉬지 못하게 날카롭게 살을 파고 들어 찢어 놓는 주마가편의 바로 그 채찍이다. 채찍을 잊은 성공은 반복과 진부함 속에서 퇴락하게 된다.

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내 성공을 의존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잇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기란 사라지게 마련이다. 사라지는 것 위에 성공을 쌓아 올려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다.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 준다. 나는 학습이 의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책을 읽고 슨느 것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의무다. 이 점을 견디지 못하면 더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점을 견딘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무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이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고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p234-235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고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한없이 움직이게 한다. 경제라는 본능에 따라 프로그램이 된 것처럼 낮도 밤도 없이 움직이기만 ks다.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 ‘일한다’라고 부른다. 니체는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열망을 줄이고, 독립의 욕망을 피하는 현명한 자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회는 노동을 통해 안전해지곤 했다.

p239 책을 쓰는 일은 내가 가장 장 배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재능이 있겠지만, 이 방법이 내 스타일이다.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의 지식은 나라는 특별한 여과기를 거쳐 새로운 표현법을 얻게 된다. 그대로 인용될 때도 있지만, 글의 흐름을 얻기 위해 따옴표로 들어 올려지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그들이 표현하기 이전에 이미 나의 표현이기 때문에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들은 독립적 사유가 되어 내 책 속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체험과 한계 속에서만 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권의 책이 읽힐 때마다 다시 한 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쓰여’진다. 책은 독자의 수만큼 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모든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또 다른 저자이기도 하다.

내 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고 있다. 책과 학습은 우리를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로 만든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세상 속의 사람들과 만나게 하기도 한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돌연 자신이 속했던 사유의 세계를 떠나 전혀 이질적인 사유의 쾌감에 빠져 들기도 한다.

p240 경제적으로 학습은 자신을 ‘자본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교육과 훈련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만 포인트가 누적되는 자본이 바로 ‘인적 자본’이다.

학습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란’ 어떻게 배우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다. 학습이란 지식의 습득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의 허위기능일 뿐이다.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답은 이 탐험의 끝에 나타나는 보물이다.

p241 나는 책방에서 아무 책이나 고른다. 분류를 따르지 않고 모든 장르의 책을 두루두루훑어 본다는 뜻이다.  주제나 제목, 디자인, 저자 등 무엇이든 눈길을 끄는 놈을 고른다. 싸움은 아무나 하고 붙어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아주 짧게 눈빛만 먼저 교환해본다. 별로 싸우고 싶지 않은 놈들도 있다. 책을 들쳐보는 순간 천박한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놈들과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 싸움은 지저분해지고, 이겨도 얻을 것이 없다. 내 시간을 훔치는 놈들이며, 나를 화나게 하여 내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놈들이다. 이럴 때는 번개처럼 얼른 손을 놓은 것이 좋다. 더러운 것을 만진 것보다 더 빨리, 길에서 정치가를 만난 것보다 더 빨리 그 더러움을 외면해야 한다. 그래야 냄새가 덜 난다.

p242 명성이 자자한 책이라도 명성 때문에 보지는 않는다. 흘러간 시대의 흘러간 흔적이 지금 나를 깨우지 못한다면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자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배움이란, 이해와 인식으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차이가 경이로움을 만들어 내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냥 그렇게 된다. 물의 리듬을 타지 못하면 물과 함께 흐를 수 없고 노래의 리듬을 타지 못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없다. 배우고 또한 익히다가 결국 자신을 그 바람결에 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

p243 철학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혹은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안는 것이다.

나는 모든 배움을 삶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삶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고 철학이 아니고 경영도 아니고 이윽고 삶도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 즐거움이 되려면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보기 싫은 책은 보지 않는다.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한 독서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읽는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자유롭다.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한 형식을 준수해야 한다. 지적 훈련의 어느 과정은 그래야 한다고 강변할 수 있고 옳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필요성과 자격의 취득이 목적인 경우는 그들의 위엄과 전통을 따라야 할 것이다. 힘은 그들에게서부터 오니까.
p244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

p245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시의 마음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자기 처형 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기변화로부터 스스로에게 반대하고 자시의 적이 되려는 데서 그의 기쁨이 생겨났다.

p246 ‘둘이면서 하나인 동시에 그 이상인’ 저자들이 그저 관습에 따라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들뢰즈)  철학이란 ‘개념을 만 들어내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아마 새로운 ‘배치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기 위한 모색과 실험이 될 것이다.

p247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았다. 그러다가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펜하우어가 되었고,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의 개념을 창조해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잇는 ‘니체 씨’를 떠나갔다.

p248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니체라는 이름은 어떤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 불지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워지려고 한 사람이었다.

배움은 결국 삶의 실천에 의해 가장 잘 얻어진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혹은 자기경영은 가능할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 철학은 가능할까? 언젠가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구절이 보인다. 두 개의 다른 구절이 이상하게 딱부러지게 맞아떨어진다.

20년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길 위에 있다네
내가 허비한 20년
그렇게 애를 썼건만
내 노력은 매번 전혀 새로운 시작이 되고
매번 전혀 다른 실패였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기 위하여
황홀함이 없는 곳을 지나야 한다.
-T.S 엘리엇

학습이란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혁명은 늘 하루를 바꿔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을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길 위에 있다. 한 곳에 짐을 풀고 편히 쉬더라도 그것은 길 위에서의 숙박이다.

p253 학습의 문화 속으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좋은 전문가의 필수적인 수련과정이다. 학습은 종종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잇다. 냉정하고 감정이 배제될 때 잘 배우는 영역이 있다. 목욕탕의 냉탕과 같다. 그러나 학습의 또 하나의 얼굴은 뜨겁다. 혼이라든가, 열정, 몰입, 감성, 직관 같은 단어들이 중요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학습은 뜨거운 무엇이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며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목욕탕의 온탕이나 열탕과 같다.

나는 경영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서 훌륭한 휴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욕탕을 만들고 싶다. 냉정하고 가혹한 경영 속으로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인문학적 유산을 배치시킴으로써 돈으로 피폐한 영혼과 벌거벗은 몸을 돌아볼 수 잇는 정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관심사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으로 꿈을 침투’시키는 작업이었다.

p254 선비처럼 섬세함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책을 읽다 그 오묘한 뜻을 깨닫게 되어 기뻐하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잉크를 다시 넣고 아끼는 노트를 펴서 정성스럽게 옮겨 적을 수 있다면 섬세하다 할 수 있다.

p255 무사처럼 선이 굵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음속에 이는 두려움에 지지 않으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달랑 칼 한 자루를 메고 인제라도 떠날 수 있다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면 바위 같아진다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이 여기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때때로 무리 속에 있지만 그들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물방울이 이내 바다 속으로 합쳐지듯 자연 속에서 그대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가히 선이 굵다 할 수 잇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그가 묵묵하면 더욱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생겨나는 열정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 커다란 파도 같은 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p256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아경영 철학 이것이 바로 내 학습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 ‘변화의 기술’이다. 나는 이 테마 속에 조직의 진단부터 조직의 변화 모델로 이어지는 기술을 담으려고 한다. 변화의 철학과 기술, 이 두 개의 축을 나에게 적용해봄으로써 변화경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보려 한다.

나는 내가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햇다.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도정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p261 나는 물결에게서 이 방식을 배웠다. 물결은 무수한 반복이 아니라 무수한 변화다.


p263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일이 품삯이어서도 안 되고, 삶의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

변화경영이라는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먼저 스스로의 변화에 성공해야 한다.

먼저 나에게 적용할 것 반드시 성공할 것

 그 다음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실험할 것,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나누어주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
이것이 내가 요구하는 품질 기준이다. 지식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내 원칙이다.

p265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두루두루 알아보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업가들은 그것을 정보를 얻는다고 표현하고 글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책읽기라고 부를 뿐이다.

모방할 때의 요령이 두 가지라는 점에서도 사업과 글쓰기는 일치한다. 얼마나 많이 모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p266 열정과 가슴의 힘 없이는 현장의 바람에 대항할 수 없다.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다’라는 뇌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쓰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 창조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창의적 발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고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

p267  사업가들 역시 1백명 중 한 명 정도 번성하는 사업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별로 다를 바도 없다.

인간이 하는 일들은 바로 그 인간이라는 주체 때문에 종류와 관계없이 서로 닮았다.

p169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강력한 핵심개념들을 연결함으로써 미래를 현실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상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일상의 이야기가 되어야 실천할 수 있다.

p270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강점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기질이다,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재능의 배합을 가지고 있듯이 기질 역시 다르다.

p271 천성적으로 사물의 여러 관련성을 모두 타진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현실적이거나 실리적이지 못하다.

p272 자신의 특성을 강점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약점이나 장애라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든지 강점처럼 활용될 수 잇다.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빛이다, 반딧불이든 커다란 등불이든, 그들은 우리에게 늘 빛을 던져준다.

p273 인간을 서로 적대적인 불화와 파멸의 전쟁 속으로 끌어들이는 여신은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증오와 원망, 질투와 시기의 여신이라도 인간으로 하여금 파괴적 행동이 아니라 경쟁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여신은 선하다고 여겼다.

p274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비결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 비밀은 니체가 ‘아곤(agon) 적 행동 이라고 말한 경쟁의 행동에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그리스인들은 이 경쟁의 힘을 ‘덕(virtus)’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기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금지의 미덕’이 아니라 ‘남성다움, 혹은 정력적 힘’을 상징했다.

p275 성공에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 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

p276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유일한 자만이 최고로서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은 늘 한 길로 간 사람들의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한 길을 가기에도 숨이 차다. 다른 것들을 넘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내일만 해도 저녁에 이미 탈진한다.

p277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p278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p280 나는 그들을 읽는다기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유를 기초로 내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좋았다. 나는 옷을 사서 치장하는 대신 조금 묵직한 정신적 허영을 즐겼다.

우리는 유일함을 통해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비범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내할 수 있다.

p281 유일한 자 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숙달해야 한다. 손과 머리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감과 조화가 이루어지면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고는 늘 기계적 익숙함에 다시 한 번 저항한다. 일단 숙달하면 일탈한다. ‘불온한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다른 방식을 찾아보고 새로운 방식을 다시 익힌다. 다시 배우는 불편과 새로 배우는 흥미를 반죽하면 일상은 다시 깨어나고, 일은 같은 일이지만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다. 애인이 아내가 되고 아내가 다시 애인이 된다.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가슴이 뛰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일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다른 여자를 향해 달아나는 애인처럼 한 때 사랑했던 그 일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지루함이 되고 만다. 늘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p282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주는 터무니없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신이 희망적 현실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잇는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가능한 꿈을 꾸는 현실주의자 나는 이것을 희망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끔으로 가는 길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내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p283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수 잇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저 하나의 일만 하면 된다. 오래도록 해온 일이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고, 이 세상에서 그 일만이 내가 살아 있는 목적이 된, 그리하여 내 일상의 하루가 되어버린 그 일 외에 나는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생각하고 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또 모든 생각을 한다.

p284 지식은 늘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체계로 진화한다. 새로운 연합을 모색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자신의 목에 감긴 밧줄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당기는 행위가 바로 쓷아냄이 들어옴을 초과하는 지식 유출을 방관하는 행위다. 1년이 못되서 그 지식은 낡은 것이 된다.

p285 좋은 말은 강연장이라는 무균실에서만 살아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것에 불과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부서지며 다시 어제의 관성으로 합류되는 사람들을 보며 자괴감이 많았다.

모든 숨겨진 욕망은 개인적이다. 따라서 개인적 관심사와 맞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좋은 내용이라도 진심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p286 잘해야 말만 나무하고 정신은 결여된 ‘좋은 이야기’에 불과해진다.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강연은 죽은 것이다.

p287 그들이 듣는 것은 연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사가 한 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다.  스스로를 듣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러나 껍질만 성실한 사람들도 있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필기도 하지만 그저 습관일 뿐이다.

좋은 청중과 무늬만 좋은 청중은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눈빛이 교환되면 금방 알 수 있다.

p289 인기라는 것은 덧없는 것이며 언젠가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것에 의지한 자는 불안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늘 변하고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기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기를 추구하는 자는 인기를 잃음으로 결국 불행해지거나, 스스로의 왜곡에 빠지기 쉽다. 지지자로 둘러 싸인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모든 화려한 자들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근신할 줄 알아야 한다.

강연을 통해 잠을 깨우거나 다양한 관점의 논리적 반격이나 감정적 적대감의 방탄벽을 뚫고 상대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p290 자기 것이 아닌 것은 탐이 나더라도 마음을 접는 것이 좋다.

p292 모든 예술가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예술가다 –영국 삽화가 에릭 길 -
“아티스트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아요, 내 음악으로 관객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 그런 허영 없이는 무엇으로 움직이겠어요? ….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리고 흥분돼요 연애하는 것과 비슷해요, 관객과의 데이트 말이에요.  …. 무대에서 나는 살아 있어요 무대에서 나는 가장 아름답고 당당해요. 나는 노래를 위해 태어났고 노래로만 나를 증명할 수 있어요.”  - 성악가 조수미 - 

p295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하루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p296 살짝 덮고 있는 행복의 껍질을 뜯어내는 것이 매우 적대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불행은 행복이라는 초콜릿으로 살짝 덮여 있었다.

p297 적절한 적대감을 결국 본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공격하지 않고는 과거를 떠날 수 없다. 자기의 창조의 생성은 어쨌든 스스로를 공격해야 한다. 씨앗은 쪼개야 싹이 나올 수 있다.

불행한 사람들만이 변화에 관심을 갖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이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별 의미와 보람도 없는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라고 엄살을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려니 하는 사람들이다.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과 당위성을 찾아냄으로써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p298 불행한 사람들을 나를 찾는 대여섯 명, 혹은 열댓 명의 눈동자를 찾아내야 한다. 그들은 오늘 강연의 표적이다. 그들을 데리고 일상의 변화를 획책한다.

어디에고 하루를 바꾸고 일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p299 불행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발견하는 법과 동일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잇는 것도 아니고, 잘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런 모든 인생의 재미를 희생한 대가로 받은 보상이라는 것이 시시할 정도로 쪼들리는 월급이라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불행해진다.

변화는 달콤한 과정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화속에는 늘 피의 냄새가 난다.

p300 혁명은 언제나 기존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당황스럽고 길을 잃게 하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늘 과거와의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 사랑만큼 우리를 달라지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랑에 빠지면 눈조차 멀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많은 흥분과 미움과 증오와 눈물로 짜여진 옷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

나는 힘겹게 행복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적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나는 변화의 대상이 되면 필연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 상황의 먹이가 되어 쫓기기 전에,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는 주인이 된다는 것이 변화의 요결임을 강조한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은 껍데기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붙잡고 일어서야만 하는 자기존중과 애정이 필요한 대장정이다.

p301 그 강연은 우연한 만남, 우연히 듣게 된 소리에 불과하지만, 마음의 문고리를 벗기는 운명적 순간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p302 나는 내 강연의 품질에 책임이 있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또 다른 거래를 만들어 낸다.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은 나를 홍보해주지만 내면적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p303  사장가격에 영향을 많이 줄 수는 있지만 강의의 내용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홍보의 효과를 내 강연료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홍보는 매출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단위시간당 강연료를 올려주는 원인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정신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늘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정신을 새롭게 닦아놓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인간은 모두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밀리면 정신적 타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  그러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늘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정신은 죽은 것이다.

p304 우리가 가는 여행은 우리 속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직 자신을 태우는 등불로 길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강열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p310 모든 하루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상징이다. 이 속절없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물결은 부침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바다로 남는다. 질서와 변화는 바다와 물결처럼 공존한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존재방식이다. 또한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p314 내 자신이야말로 재가 활용할 수 잇는 유일한 유산이며, 유일한 미래였다.

나는 인생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늘 긴 여행을 선망했다.

p319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끝을 예견하는 참담한 현실주의를 증오한다. 현실이란 결국 ‘주어진 상황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의견을 말하라, 나의 의견,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p321 무질서 속에 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빛은 동방으로 옮겨갔다. 이것이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이었다.   -- D. H 로렌스의  역사 위대한 떨림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몰락하는 로마 대신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p322 결과와 목적을 늘 혼동하는 사람들이 잇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그러나 정말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성과 준비의 제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하루답게 사는 것이다. 어떤 하루도 목적-그런 것이 있다면-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슨ㄴ 것이 아니라,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목적이다. 내겐 좋은 하루 그 자체가 목적이다.

홀연 이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으면 입이 벌어진다.

p 324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내 일을 가지고 내 일의 특성으로, 다른 사람이 스스로 삶을 불지를 수 있도록 잠시 ‘쏘시게 불꽃’ 역할을 할 수 있다.
 1인기업이든 대 기업이든 기업은 반드시 먼저 본업으로 고객을 도와야 한다. 돈만 추구하는 기업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의 일부를 사회기금으로 내 놓았다고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큰 범죄를 위한 사소한 속죄의 형식일 뿐이다. 돈이 면죄부 역할을 하는 것을 타락이라 부른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

내가 저자라면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현실적으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읽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무엇을 생각했었고 얼마나 실천에 옮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었다. 그 만큼 그 당시의 나의 생활과 삶은 참담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밑줄이 쳐져 있고 짤막짤막 연필로 적어놓은 연관된 글귀들을 읽으면서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바뀐 제목은 내게 더욱 공감이 가게 한다.
내게는 묘하게도 스승님이 그 동안에 쓰셨던 책들이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의 궤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어린 나이에 운동에 입문하여 30여 년을 살아온 지난 날, 그리고 그냥 가르치는 대로 혹은 배운대로 운동하고 가르치며 성적을 거두며 적당히 어울리며 살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돌며 유목민적인 삶을 살았던 나의 과거의 행적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서 나는 스승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과거를 기억해 내고 행함의 과실을 생각해보게 되곤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을 읽었고 꿈벗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스승님의 사유와 관념들은 나를 이끄는 이정표였으며 자애로운 보살핌이었다.
아마도 책을 써야겠다는 확실한 결정이 있었던 것은 그 때 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온 날을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내 세계 속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  (p247)

이보다 더한 심정으로 나는 그저 방향만 가진 채 명확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폭풍이 이는 바다로 나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이 즐거움이 되려면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보기 싫은 책은 보지 않는다.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한 독서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읽는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자유롭다.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한 형식을 준수해야 한다. 지적 훈련의 어느 과정은 그래야 한다고 강변할 수 있고 옳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필요성과 자격의 취득이 목적인 경우는 그들의 위엄과 전통을 따라야 할 것이다. 힘은 그들에게서부터 오니까.’ (p243)

나의 변화의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지나쳐야 할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자격이 그러했고 훈련이 그러했다. 내가 원하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자격이(박사학위) 필요하였고 그래서 그러한 과정 속에서 형식과 의례를 치루었다.  

유일한 자 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숙달해야 한다. 손과 머리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감과 조화가 이루어지면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고는 늘 기계적 익숙함에 다시 한 번 저항한다. 일단 숙달하면 일탈한다. ‘불온한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다른 방식을 찾아보고 새로운 방식을 다시 익힌다. 다시 배우는 불편과 새로 배우는 흥미를 반죽하면 일상은 다시 깨어나고, 일은 같은 일이지만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다.(p281)

결코 지루해 하지 않고 그리고 앞 서 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끝없는 훈련과 성찰을 통해서 준비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하려는 나에게 스승님은 수단과 방법의 안내자였으며 감독과 평가를 겸한 점검자였다.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짓눌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부디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니체+& (p229)
행동을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현장을 살았던 나는 사유하는 법을 배워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가설을 통해 가정과 전제를 근거로 실험에 접근하는 일반적인 연구자들과는 정반대로 진행되는 방식, 먼저 경험하고 그 후에 근거와 원리들을 정리하는 방식이 되었다.
실천을 강조하고 살고 있는 하루를 강조하는 스승님의 글들은 적절하게 나의 태도와 행동들에 뒷받침이 되는 근거들이었다. ,

왜 변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나가세나 :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켭니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왕이시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은 같은 것입니까?
밀린다 왕 :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그러면 초저녁의 불꽃과 한밤중의 불꽃은 다른 불꽃입니까?
밀린다 왕 :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꽃은 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나가세나  : 왕이시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도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과 생나는 것은 별개로 보이지만 지속되는 것입니다. (p142-143)

 왜 그렇게 이기고 싶어했는지, 죽을 것만 같은 고통들을 감수하면서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었는지… 이제야 겨우 알 것만 같다. 그것은 삶이고, 삶은 변화이며, 일념에 찬 변화는  곧 나의 본질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p104)

아마 난 쉰세살이 될지 예순세살이 될지 ,,, 아니면 미완성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적과 결과를 혼동하지 않고, 또 성실하게 살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은?

‘문학이 우리에게 숨쉴 곳을 제공하는 이유는 김수영의 표현대로 ‘기본적으로 불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조금 미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밖으로, 사회 속으로 자신의 밀실을 확장해 가려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자유의 공간을 넓히려고 한다.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 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 (p99-100)’

누군가 내게 “ 당신은 제도권을 싫어하시는 군요”  라고 말했었다. 나는 답하기를 나는 ”제도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에 있으면서도 제도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싫어할 뿐입니다. “ 라고 말했다.
 
나는 불온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고 그러한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스승님의 글들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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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9.07.28 20:20:46 *.145.231.93
형, 난 이 책을 다섯 번 읽었어요. 마흔 한살에...
울고 또 울고 그러다 지치면 다시 읽고 그랬지요.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언제나 읽고 싶은 책 맨 앞자리에 날 기다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쓰신 책 중에 최고의 책 2권을 뽑으라면 그 한 권은 이 책일 겁니다.
그만큼 저는 이 책으로 마흔의 성장통을 벗어났고, 인생 마라톤 반환점을 무사히 돌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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