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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0일 05시 15분 등록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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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지음, 휴머니스트

 

저자에 대하여

구본형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다. 이 나이에 멘토나 역할 모델은 넘어 구본형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신 나는 행운아이다. 매우 행복하다. 나는 선생님이 무척 어렵다. 너무나 존경하기 때문에 어렵다. 언젠가는 편하게 다가가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저자소개에도 라고 객관화 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매우 강하게 치밀어 오른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

 

선생님의 글은 따뜻하다. 쉽다. 그리고 깊다. 난 그 중 깊이에 매료되었다. 바로 나도 그렇게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다. 단번에 좋아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잘 생겼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인품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도 매력적이다. 선생님 스스로는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신이 육체를 키우는지, 육체가 정신적 특징을 반영하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코에 자신이 있다.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가운데 이렇게 애착을 가진 부위가 있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입술에는 별로 자신이 없다. 나는 입술이 두껍다.

눈은 바깥쪽 꼬리가 조금 처져 있어서 남자답게 사나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눈은 처져 있어 그런지 종종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얼굴은 가름하여 요새 사람들이 선호하는 계란형이고 광대뼈도 작다. 귀는 작은 편이고 오목하다.’

 

이번 책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에는 각 장 사이에 선생님의 사진이 있다. 감히 자세히 쳐다볼 수 없었던 선생님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선생님처럼 눈, , 입을 하나하나 뜯어 볼 수 있었다. 다 가리고 눈만 보기도 하고 자신 있어하시는 코만 보고도 하고 입술만 보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급기야는 영화평론가들이 영화의 만족도를 표시하다 별 다섯 개를 사진 상단에 그려놓고 색칠도 해 보았다. 글로 보는 선생님, 내가 만나본 선생님, 선생님이 말한 선생님이 어우러져 다가왔다.

 

난 선생님의 입술도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 다섯 개를 받은 사진이 4장 뒤에 있는 입술을 손으로 가린 사진인걸 보면 선생님의 판단이 맞나 보다. 입술이 두꺼워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목구비가 모두 잘 생겼으며 조화 또한 매우 성공적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가장 큰 매력은 눈빛이라는 걸 알아냈다. 살짝 미소 머금은 눈빛,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눈빛, 소의 커다란 눈망울 같은 선량한 눈빛, 사랑 가득한 관심의 눈빛. 우리 선생님의 끊임없는 학습과 자가 혁신과 변화에 대한 깨달음이 눈빛에 발현되어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인상은 저절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우리 선생님은 무엇보다 글과 행함이 같다. 이보다 더 존경할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묵묵히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시니 우러러 따를 수 밖에 없다. 선생님은 변화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다. 경지에 올랐다. 선생님의 글로써 고민하는 우리의 마음에 해답을 주신다.

 

우리 선생님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도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라고 친구처럼 마음을 열어두고 계신다.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대하신다. 그러나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준비 되지 않은 제자는 더 어렵다. 그게 바로 나다. 슬프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펴내며

자서전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살았던 삶이며 도시에 내 속에 있는 그들의 삶이었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믿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범함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본인의 과제이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6P)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기록의 형태는 일기여도 좋고, 메모여도 좋고, 홈페이지여도 좋고, 사진첩이어도 좋고, 이 책 같은 자서전이어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프롤로그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 니체 *

 

한 곳에서 햇빛이 사라질 때, 나는 아침이 시작되는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하며 후회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아쉬움이 있으면 채울 것이며,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볼 것이다.[15]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다. 그 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며, 읽었던 책들의 주석이다.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지나간 삶에 대한 파괴고,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창조다. 나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16]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17]


1
. 지난 10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에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 니체 *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마지막 젊음이 펄펄 끓어 오르고, 온갖 양념과 야채들의 진수가 고기 맛에 배고 어울리는 먹기 딱 좋은 시절이다.[21]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22]

마흔은 가끔 불면증과의 동행과 동침을 의미했다.[24]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25]

 

주로 내면적인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일 텐데, 이것은 그렇게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불면증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싸우는 것보다는 데리고 함께 즐기며 사는 것이 좋다. 불면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모르던 다른 세계를 접하게 하기는 한다.[25]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잇는 것들이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만다.[30]

 

사랑은 늘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증식되는 능력이다. 그것은 영혼의 갈망 같은 것이다. 모파상은 진실한 사랑의 영혼이 육체를 감싸 안는다.”라고 표현했다.[31]

 

과거와의 연결, 심지어 미래와의 연결도 가끔 끊어버리고, 이 돌연한 시간적 격리, 건망증을 휴가로 즐길 수 없다면 바보다. 나와 나의 불일치, 시간적 흐름에 대한 일탈과 소거는 아주 유쾌한 지구 탈출 같은 것이다.[35]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문제에 끌려 다니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나는 문제를 일상에 던져진 예기치 않은 모험과 도전으로 인식하곤 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새로운 단면과 만날 수 있다[36]

2
. 마흔 살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 니체 *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멸들.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 꽂힐 수 있느냐.
내리 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
남준,<나무, 폭포, 그리고 숲>중에서[46]

 

특성을 알면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을 얻으면 주술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47]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54]

 

나이는 이성적 능력과 역행된다. 그러나 삶이 문제에 부닥치면 40대의 중년은 젊은이들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결론에 이른다.[55]


마흔의 나이에는 철학조차도 실용적인 것이 된다. 이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삶의 지혜다. 지혜란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55]

고귀하고 능숙하게 비껴가는 방법 가운데 최고의 것은 유머다. 유머는 일종의 여유와 휴식이다.[56]


유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깝게 있으면 유머를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을 약간 떼어놓고 객관적을 볼 수 있을 때 자신을 소재로 농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가 있으면 안 된다. 무관심은 유머를 만들어낼 수 없다.[57]

 

중년의 과제는 각 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료이며, 재생을 위한 내적인 힘이다. 대체로 이러한 갱생의 힘은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57]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 살에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다.[58]

 

마흔 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지루한 2막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며, 죽어야 살 수 있다.[59]

삶을 연극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만약 삶이 연극이 되면, 삶의 개념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삶을 연극에 비유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삶을 극장 안으로 몰아 넣고 짜여진 연극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를 원한다.[60]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시기다. 어쩌면 반전만이 이 시기를 사는 교훈일지 모른다.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다.[61]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62]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63]

3
, 직장생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

* 니체 *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게 마련이다.[70]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인다.[77]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전문성이 자격증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식은 변하고 경험은 늘 다르게 적용된다. 자신의 소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계발한다. 이들은 대체로 겸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애정 없이는 자신을 불태울 수 없다. 어떤 분야든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80]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84]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의 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85]

 

모든 위대한 리더는 유혹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자신을 포장하든지, 크고 부드러운 젖가슴으로 지그시 눌러 이성을 설득시키든지, 위대한 사상을 통해 혼을 빼앗거나 달콤한 꿈 속으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85]

 

매력이 없는 리더란 없다. 리더는 반드시 자신의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유혹은 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매력은 가장 자기다운 것에서 발산되는 페르몬이다.[86]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88]

경영 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들처럼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89]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삶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사람만이 전문가로 존경 받는 자격이 있다.[89]

 

어제의 나는 꽃처럼 낙엽처럼 죽어 흘러가고 사라졌다. 나무들은 가장 추울 때 그렇게 서 있다.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91]

4. 얼굴 페르소나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방황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메이사턴(May Sarton),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중에서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99]

 

화장품 가운데 으뜸은 역시 세월이다.[99]

 

생각은 매우 진부하거나 느닷없이 새로움으로 정신을 죽이거나 일깨운다. 생각은 머리를 통해 눈에 나타난다.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눈에 표현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100]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길들게 마련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라는 말이다. ‘나에게 길들게하면, 그것이 목적이 되면, 함께 살 수 없다.[103]

정신이 육체를 키우는지, 육체가 정신적 특징을 반영하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코에 자신이 있다.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가운데 이렇게 애착을 가진 부위가 있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107]

 

입술에는 별로 자신이 없다. 나는 입술이 두껍다.

눈은 바깥쪽 꼬리가 조금 처져 있어서 남자답게 사나운 모습과는거리가 멀다. 눈은 처져 있어 그런지 종종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얼굴은 가름하여 요새 사람들이 선호하는 계란형이고 광대뼈도 작다. 귀는 작은 편이고 오목하다.[109]

 

그때 나는 내 얼굴조차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없을 만큼 경직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신을 잘 알지 못했고, 더욱이 자신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얼굴은 다른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그것은 해골에 인피를 씌운 죽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죽음을 상징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았다. 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111]

 

미셜 푸코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권력에 오염되어 있다. 물질적 권력이 아니라 지식을 통한 훈육권력에 매여 있다. 건강한 개인과 부강한 국가라는 거부하기 어려운 모토을 앞세워 개인의 삶을 규격화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이 우리를 묶어두고 있다. 사회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만들어지고 조작되며 인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113]


자유에 대한 욕망은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밖으로, 사회속으로 자신의 밀실을 확장해 가려 한다. 그리허여 사회적 자유의 공간을 넓히려고 한다.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113]

 

욕망을 부숴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직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113]

 

불꽃은 너무 작아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어둠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두려움이 결국 불꽃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하게 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꽃은 더 이상 숨어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113]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115]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생명은 내면에 있다.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이다. 신은 복잡한 곳에 있지 않다.[116]


어떤 행위가 칭찬받게 될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그 무엇이라도 성취해낼 수있을 것이다.[116]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했고 매달렸다. 니체가 말한거리에 대한 파토스(pathos of distance)’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 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17]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118]


5
. 가족

진정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결코 그 사랑을 잊지 않는다.

* 토마스 무어 *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도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124]

 

아비 역시 스승과 친구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것 같았다.

부모로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 너머 함께 즐기고 어울리며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124]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 부른다. 갈등 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125]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126]

함께 먹는 다는 것은--아마 그래서 식구라는 단어가 생겼겠지만--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쉽게 친해지기 위해서는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이다. 먹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고, 먹는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이완을 위한 휴식이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 만난다는 홀가분함이 있다.[130]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130]

어떤 것을 보고 과거의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지나간 사건들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게 무엇이었나를 물어보고 즐기는 사람이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133]

왜 하필 죽음이 생각날까? 그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어주어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만 존재할 뿐, 그 사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은 비어 있었고,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생명이 없었다.[139]

 

현실이란 그저지금의 상황에 대해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141]

삶의 어둠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147]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 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즐거움은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147]

평생 가고 싶으면 늘 반갑고 그리운 관계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148]

따질 것도 없고 계산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함께 가는 것이 친구들이다. 친구란 함께 어울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 어울림이 빛날 수 없다.[148]

6
. 자연

자연과 신, 그 어느 쪽도

나는 알지 못했으나

그 둘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본성의 집행관이었다.

* 에밀리 디킨슨 *

 

봄은 햇빛과 바람이다. 그것처럼 언 땅을 녹이는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땅은 빨래와 같다. 언 것을 해동하여 물이 질펀해지면 바람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그러면 따뜻하고 약간 촉촉하거나 고슬고슬한 봄 땅이 만들어진다. 걸으면 발바닥에 봄 땅의 부드러운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이내 물이 오르고 대지는 온 몸을 열어 속에 있는 것들이 나오게 해준다. 싹은 그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154]

홀로 산에 있으면 아름다움에 취하게 마련이다. 홀로 있음에 취하고, 바로 그 때문에 고독 너머에 있는 연결 끈을 더듬더듬 찾아내게 된다. 언어의 표현방식을 넘어 교류되는 정신적인 교감은 자연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방식이다.[157]

한잠을 자고 일어나면 켜지는 누에처럼, 우리가 젖먹이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한잠을 자고 날 때 마다 조금 더 커지고 조금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느닷없는 통찰력이 번개같이 머리를 후려쳐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늘 같은 살을 사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158]

 

어린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이이들은 우리기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씨앗이 잘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이오덕[159]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160]

사랑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빠져들기 쉽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게 사랑의 매력이다. 사랑의 개념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천변만화의 격정이다.[161]


사랑자체가 온갖 변화를 다 껴안고 있는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삶이다.[161]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161]


왕이시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도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은 별개로 보이지만 지속되는 것입니다.[163]


곽박(郭璞)의 시에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外師造花中得心源)”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다.[163]

때때로 나는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때다. 어떤 조화로움이 나를 밀고 여울처럼 가슴으로 퍼져오는데, 그때 평화를 느끼게 된다.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164]

 

우리는 아름다움에 지치고 그 아름다움에 터져 죽을 때까지 즐기는 그 꽃들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바보들이기도 하다. 모든 꽃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피어난다.[164]

 

G.K.체스터턴의 말대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기쁨은 도처에 있고늘 활동중이다.[164]

빙켄의 성녀 힐데가르트가나는 스며든다. 초록빛 풀밭에, 꽃들에게, 그리고 살아 있는 물살에. 나는 깃든다, 죽지 않는 모든 것에. 나는 곧 생명이므로.”라고 말할 때, 그녀는 바로 나였다.

풀님에게 기도합니다.

당시을 밟고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내가 지나갈 때 당신이 고개를 숙여야 할지라도

내가 죽으면

나 역시 당신의 자매가 될 것입니다.’[165]

 

나무와 나는 어쩌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낸다. 그들이 내게 직접 말을 건넨 적은 없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나무들이 내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신들을 이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167]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지만 가야 할 곳은 하늘이다.

나는 땅에서 하늘로 간다.

몸이 땅에서 나와 영혼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듯, 땅을 움켜쥐고 온몸을 던져 하늘을 향해 자란다.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언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나의 내면은 땅과 같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렵고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가치가 뒤섞여 있고 뜨거운 용암으로 가득하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 무궁무진한 자산은 땅이다.

나는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나는 나를 이용하고 활용한다.

가장 먼저 나의 모든 가능성을 탐사하고 이용해야 한다.

내 내면을 뒤지고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에 깊고 굵고 튼튼한 뿌리를 견실하게 박아두어야 한다. 이 힘들만이 나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이었다.[167]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죽지 못하면 다시 태어남도 없다.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파괴와 생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이것이 나이테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늘 자신의 시체를 내다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그 일을 아주 아름답게 해내고 있다.[169]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1년의 삶이다. 내 책도 내 1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1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내 책을 남긴다. 책 한 권이 쓰여지면 내 1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해에도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 해의 그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170]

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는 날마다 내게 귀화한 생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육에 담아 수천 개씩, 수만 개씩, 수백만 개씩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씨앗을 마음 속에서 키우면서자신의 생각으로 귀화한 생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도처에서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이다.[173]

 

인간의 진보는 사고의 혁명(thought revolution)’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에 대한 생각들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려 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아주 특별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탄생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174]

 

로댕의 말을 잊지 마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174]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이 나고 푸른 잎을 단 아름다운 줄기로 자라나도록 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라.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실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색깔과 맛을 담은 향기로운 과육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175]

7
. 건강

의학기술이란 자연이 질병을 치료해주는 동안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 볼테르 *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 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183]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또한 생명은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생명의 순환이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 마치 변하지 않는 것 없이는 변하는 것도 없고, 어두움 없이는 밝음도 없는 것과 같다. 어두움은 늘 생명이 자신을 준비하는 참으로 비옥한 토양이다.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니고 썩는 것들만이 자신을 땅에 버릴 수 있다. 땅에 버려져야무엇이 될 수 있다.[184]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187]


노자의 도는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형태를 떠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자연과 함께 자연을 따라 떠나는 것이다. 나이와 함게 현명함이 자라, 이윽고 극치에 달해 현명험이라는 언어적 속뱍을 벗어나 용처럼 구름속에서 노니는 것이다.[191]


여전히 욕심스러운나이 듦은 과다한 욕망에 차 여전히두 개가 되고 싶은 세포, 즉 암과 같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191]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199]

'
죽음이 명함을 남겨놓고간 다음 적절한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서, 참을 수 있을 만한 짧은 통증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좋은 일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앞부분, 즉 젊은 시절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200]

 

그것이 싱싱하고 발랄하고 모범적인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짜놓은 인생의 직물은 은은하고 통찰력에 차 있고 완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모두 놓아두고 낡은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200]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합당한 죽음을 주소서.”[201]


8
. 길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기에,
비 내리는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꾸니,
이 오후 시간을 즐겨라.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예술.‘
*
한 개의 시처럼 보이는 이 잠언들의 화자는 여러 명이다.
인용한 소절 별로 패트릭 피어스(아일랜드의 작가), 수잔 어츠(미국의 소설가),
애니 딜라드(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미국의 말썽쟁이)  *

추억과 꿈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다.[206]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일들 역시 과거만큼 분명한 꿈이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207]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207]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다. 나는 나를정신적 여행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날개 같은 것이다.[208]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활공한다. 모든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마지막 날에 느끼는 그 아득한 자유를 지금부터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도 과거에 갇혀 있는 나를 미래의 빛을 따라 아름답고 화려하고 자유로운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209]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꿈꾸지 못한 것들만이 내 인생이 아니다. 꿈꾸지 못한 것 가운데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209]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혹은 지금을 구원해준다. [211]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211]

꿈은 또한 목적지다. ‘지금이란 늘 그곳에 가는 길 위의 어느 지점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를 떠나 미래()로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구도(救道)라는 말이 생각났다. 길을 찾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 길을 찾고 있다. 한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이어지는 길, 지금의 나에서 미래의 나로 가는 길, 추억에서 꿈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시간의 통로다.[212]

내 속에 들어앉은 그들
그들 속에 섞인 나를 증오하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그러다가 아예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살고 싶은 땅일 것이다.‘
-
신경림의 시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여행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끝나는 여행도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215]

 

40대의 10년을 보내며 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고 싶었다. 그 곡선의 변곡점 몇 개를 찾아내었으니 만족스럽다. 나는 갈수록 산다는 것이 꿈처럼 여겨진다. [215]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그것이야 말로 비옥한 정신적 토양이다. 사는 동안 생명을 모두 소모하므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완전히 비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219]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219]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듯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221]


일년에 한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 질 수밖에 없다.[221]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많이 얻으면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만큼 행복하다. 베풂은 씨앗 같은 것이라 주위에 뿌리면 수많은 결실과 함께 되돌아온다. 더 많은 씨앗을 얻게 된다.[222]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223]

9
. , 공간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주인을 닮는다.

* 칭기즈칸 *

 

내게 독서와 꿈과 쓰기는 책 속의 경험을 배워 원래 내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근본을 이해하는 학습이다.([231]

 

끙하고 힘을 줄 때마다 한 놈씩 나와 가지 끝에 다려 있다. 아름다움으로. 꽃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다. 참다 참지 못하고 터지는 것이 바로 꽃이다. 민감한 시인들은 그래서 꽃 터지는 밥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237]

 

스스로 채득한다는 것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아무 이용 가치도 없는 순순한 배움의 즐거움. 이런 즐거움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239]

 

지금까지 나는 도시 생활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며 사는 것을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복귀하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문명의 뿌리로 물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오래전 문명의 시작 상태로 퇴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지나쳐온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다.[240]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사이비들의 특성은 위선을 가장한다는 것이다. 위선은악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숨기는 악덕이다. 꽁꽁 숨길 수 있다면 유능한 것이다.[241]

 

하나의 욕망……가장 나다운 내가 되는 것, 그저 생긴 대로 자라 가장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내가 만일 소나무라면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는 것, 만일 내가 느티나무라면 아주 정정한 느티나무가 되는 것. 이것이 내 욕망이었다.[242]

 

공간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은 맞다. 이곳에서 나는 인간의 마음에 흡착되는 자연의 마음을 익히게 되었다. 북한산 자락에 앉아 있으니 위대한 스승의 품에 안겨 있는 셈이다.[244]

 

멀리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그 자태가 그리우면 가까이 가서 만져본다. 멀리 두고 그리는 마음은 그리움이고 가까이 두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워하고 또 볼 수 있으니 이처럼 다행일 수 없다.[244]

 

생명을 만나고, 생명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생명이 자라는 것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산에 가서 걷는 것도 좋고, 이렇게 작은 정원 하나에 매달려도 좋으며, 댓 평쯤 되는 텃밭에 매여 여름을 보내도 좋다. 즐거운 일이다.[249]

 

우리의 육체가 거리낌없이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아이들은 커서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쳐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 숱한 상처들을 치유하고 고달픈 일에서 벗어나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254]

명상은 나를 즐기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 갇힌 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평화를 건져내는 것이다.[254]

10
. 학습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짓눌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부디

문 박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 니체+& *

 

책을 읽다가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발견했다. ‘시팔.’ 어쩌면 말을 이렇게 잘한단 말인가?[260]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취미가 여전히 취미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면서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를 잃어버린 전문가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경계해야 했다.[264]

 

심심함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었고, 달리 해석하게 해주었고, 속세에 물들지 않게 해주었고, 다시 속세를 그리워하게 해주었고, 사람을 찾아 나서게 해주기도 했고,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해주기도 했다. 심심하면 친구가 그립고, 그래서 그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작품이다.[265]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고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한없이 움직이게 한다. 경제라는 본능에 따라 프로그램이 된 것처럼 낮도 밤도 없이 움직이기만 한다.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일한다라고 부른다.[265]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이세상에 있다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없을 때 그녀에 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267]

 

쓰다 보면 묘한 곳에 이르게 된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으로, 예기치 않았던 모습으로 다가든다. 그러면 신이 난다. 글은 글로 연하여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언어로 파고든다.[268]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그저 내적으로 감응하는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떠난다. 이때는 내 발자국이 곧 지도다. 완성될 수 없는 지도, 때때로 잘못된 지도, 방황과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는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269]


독자는 작가와 같다. 그들 역시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책을 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과 사유의 한계 속에서만 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권의 책이 읽힐 때마다 다시 한 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쓰여진다. 책은 그 독자 수만큼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모든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또 다른 저자이기도 하다.[270]

나 역시 내가 읽은 책이고 그들이 생각한 생각이고 그들이 겪은 경험이다. 내 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다.[270]


학습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란어떻게 배우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다.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내는 것이다.[271]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배움이란, 이해와 인식으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73]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든 음악이든 역사든 혹은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스에 안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

나는 모든 배움을 삶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삶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고 철학이 아니고 경영도 아니고 이윽고 삶도 아니다.[274]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 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276]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는 바로 영원히 스승을 빛나게 하는 자.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미친 놈이었다.[276]

자기처형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277]

 

내 속에 여러 명이 있는 것이고, 그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고 연결되고 내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의 즐거움 아닐까?[279]

니체는 그러므로미래의 아들이었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 곁에 있지만 감지되지 않거나 오해 받고 있는 시간이다. 즉 니체의 미래는 어느 시대이든적절한 때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는 늘너무 일찍 와서이해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시대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시대에 적응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광인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280]

혁명은 늘 하루를 바꿔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282]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283]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283]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286]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아경영 철학.’ 이것이 바로 내 학습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변화의 기술이다. 나는 이 테마 속에 조직의 진단부터 조직의 변화 모델로 이어지는 기술을 담으려고 한다. 변화와 철학과 기술, 이 두 개의 축을 나에게 적용해 봄으로써 변화경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보려 한다. 아마 내 50대는 변화경영의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될 것 같다.[288]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288]

11
.
나는 강연을 하러 간다. 첫 출근을 하던 날의 기분을 상상해보라. 새로운 책을 한 권 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강연을 하러 가는 날마다 나는 그런 기분에 젖곤 한다. 새로운 책, 새로운 대상, 새로운 내용, 새로운 날은 나를 춤추게 한다.[293]


어느 날 악마가 속삭였다.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이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크고 작은 일이 다시금 되풀이될 것이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되돌아온다.
너는 다시 한 번, 수없이 계속 이 삶이 반복되기를 원하느냐?“
*
니체, <즐거운 지식> *

누가 내 일의 첫 번째 고객인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첫 번째 고객은 나다. 내가 내 일의 가장 최우선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내 일은 반드시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294]

하루가 내 연구의 기본단위다. 나는 날마다 무수한 반복보다 무수한 변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내 일은 반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수 없는 반복을 통한 훈련이 아니라 수 없는 변화를 통한 훈련이 내 방식이다.[295]

 

이게 바로 내 삶입니다.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여기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 양파를 파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이 양파를 몽땅 다 팔아버린다면 내 하루도 그걸로 끝나버리고 말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하는 것들을 다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296]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일이 품삯이어서도 안 되고, 삶의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296]

변화는 오직 스스로 시작할 때만 효과적이며 그때에만 비로소 행복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자격 요건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통렬한 아픔이었다.[297]

 

먼저 나에게 적용할 것. 반드시 성공할 것.

그 다음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실험할 것.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나누어주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298]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오늘을 놓치면 삶을 놓치는 것이다. 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훌륭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의 물결로서,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가 나에게 바라는 목적이다.[298]
그것을 정보를 얻는다고 표현하고 글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책 읽기라고 부를 뿐이다.[298]

얼마나 많이 모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업이든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 어렵다.[300]

열정과 가슴의 힘 없이는 현장의 바람에 대응할 수 없다.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믿어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300]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다.’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사업이든 글쓰기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한 근면한 배움의 요결이다.[300]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씨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
죽어 있는 정신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고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300]

강점은 꿈을 이루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304]


나는 개인에게 있어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본래의 자기란 무엇일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기질을 이해하고 그 강점을 계발하여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기다움으로 돌아가는 좋은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306]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빛이다.[306]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처음에는 규제하고 강압하고 표준을 바라는 세상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원칙이 통용되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침범하려는일반의 세계, 군중의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전제로 했다. 자신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307]

성공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310]

유일한 사람이 되는 길은 신의 쪽지,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자신만이 유일함의 원천이다. 자신을 활용하지 않고는 유일함에 도달할 수 없다.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고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312]

 

자기 스스로를 얻을 수 있다면천하에 자신을 표현하기가 어렵지 않다,[313]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313]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가슴이 뛰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일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다른 여자를 향해 달아나는 애인처럼 한대 사랑했던 그 일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지루함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317]

내가 쓰는 글은 짧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감동이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이다. 그것은 적대감이라는 위액과 소화액에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해야 한다. 피와 영혼과 정신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환상과 내면의 열정 속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열정이란 심장과 감정과 창자로부터 생겨난다. 참다운 자신이 되는 자유는자유로운 공기를 들이켠 허파의 외침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감동이며 환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위대한 힘을 감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주는 터무니없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신이 희망적 현실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가능한 꿈을 꾸는 현실주의자, 나는 이것을 희망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꿈으로 가는 길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내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글을 통해 사람들이 지루한 일상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무료와 절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인생의 재료로 삼는 것을 도와야 한다. 자신을 반죽하고 주무르고 떼어내고 빚어낸 후 색칠하여 다시 세상에 내놓게 도와야 한다. 새로 만들어진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감으로 가득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만, 늘 스스로 새롭게 생성되는 사람들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신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불임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내 글은 강렬한 유혹이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삶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나는 내 삶 자체가 매혹적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다.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즐거운 여행, 이것이 내가 그리는 삶이다.” [318]

지식은 늘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체계로 진화한다. 새로운 연합을 모색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320]


강연은 하나의 지적 퍼포먼스다. 내가 먼저 그 내용에 만족해야 하고, 청중의 개인적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관심을 갖는 주제 속에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잘 포진시키는 것이 흡착력 있는 내용을 이루는 기본적 구성이다.[322]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강연은 죽은 것이다.[322]

 

어떤 싸움이든 청중에 대한 애정이 깊어야 한다.[322]

 

강연을 통해 잠을 깨우거나, 다양한 관점의 논리적 반격이나 감정적 적대감의 방탄벽을 뚫고 상대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설레는 일이며 전투이며 놀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흥분되는 일상의 한 장면이다.[326]

 

나는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민감한 감수성을 건드리는 타입이다.[327]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목표여서는 안 된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다.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 그것은 반드시 청중 속의 누군가를 움직여 스스로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적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 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하루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강연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322]

내 일은 예민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의무를 주며 할 일을 주고 숙제를 내줌으로써 그들을 못 견디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333]

 

적절한 적대감은 결국 본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공격하지 않고는 과거를 떠날 수 없다. 자기의 창조와 생성은 어쨌든 스스로를 공격해야 한다. 씨앗을 쪼개야 싹이 나올 수 있다.[334]

 

불행한 사람들이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때때로 변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334]


나는 그들의 시시한 삶, 평범한 일상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부추기고 타오르게 하는 묘한 입김으로 속삭이는 자여야 한다.[336]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든, 혁명은 언제나 기존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당황스럽고 길을 잃게 하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늘 과거와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 사랑만큼 우리를 달라지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랑에 빠지면 눈조차 벌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많은 흥분과 미움과 증오와 눈물로 짜여진 옷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337]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 상황의 먹이가 되어 쫓기기 전에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는 주인이 된다는 것이 변화의 요결임을 강조한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은 껍데기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붙잡고 일어서야만 하는 자기존중과 애정이 필요한 대장정이다.[337]

내 강연의 목적은 그들이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되어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속에서 그들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다.[338]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늘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정신은 죽은 것이다.[340]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342]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갈 때는 내면의 등불을 밝히고 가야 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등불이나 등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가는 여행은 우리 속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직 자신을 태우는 등불로 길을 밝혀야 한다.[342]


내가 하는 일은 또한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자신의 꽃씨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미세하여 대수롭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작고 연약하며 보잘것없는 것이 싹을 띄우면 이내 잘라고 꽃을 피운다. [342]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다. 모든 씨앗들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343]


12.
세 개의 에필로그

네 자신이 등불이 되고 피난처가 되라.

다른 피할 곳을 찾지 말라. 내면의 빛에 최대한 다가서라.

 

하루는 물결처럼 사리지고 물결처럼 다시 생성된다. 모든 하루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상징이다. 이 속절없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물결은 부침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바다로 남는다. 질서와 변화는 바다와 물결처럼 공존하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존재방식이다. 또한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348]

 

나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의 강줄기를 만들어 냈다.

하나는 나를 위해 흐르는 시간의 강이다.

나는 새벽의 생각을 좋아한다. 새벽의 생각은 밤의 이상주의가 꿈으로 빚어낸 생각이고, 앞으로 다가올 낮 동안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다.[350]

또 하나의 시간의 강줄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세 번째 시간의 강줄기는 세상과 내가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트리맨(treeman)’이다. 바람이 불면솨아소리를 내며 온 잎들을 있는 대로 바람에 실어 날리는 나무다. 봄이 되면 꽃을 주렁주렁 피우는 나무다. 여름 소나기 끝에 햇빛이 다시 쨍해질 때 초록색 물방울을 달고 서 있는 싱싱한 이파리로 뒤덮인 나무다. 때가 되면 꽃보다 더 진한 단풍으로 깊어지는 나무다. , 그리고 그 나무, 겨울 그 강풍에 아무 소리 않고 죽은 듯 서 있는 그 나목.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온몸 안을 꽃으로 가득 채운 채 꽃 터지는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351]

나는 삶이 일종의 예술이길 바란다. 나의 일상은 안정과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미래를 정하고 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나는 그 일을 아주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나를 실험할 수 있어야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356]

 

현실이란 결국 주어진 상황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의견을 말하라. 나의 의견,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라.[358]

 

정말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성과 준비의 제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하루답게 사는 것이다. 어떤 하루도 목적--그런 것이 있다면--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목적이다. 내겐 좋은 하루 그 자체가 목적이다.[361]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363]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가난하든 부자든 세상은 즐길 만한 곳이다. 내게 마흔은 세상을 즐길 수 있게 해준 나이였다. 인생의 맛이 스며 일상의 뼛속까지 배어든 나이였다. 약간 뻔뻔해진 아줌마들처럼 인생에 대한 헛된 기대 대신, 직접 살아본 경험의 혓바닥으로 날마다 인생의 삶 맛을 핥아볼 수 있는 나이였다.[364]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364]

 

 

내가 저자라면

나도 이렇게 써보고 싶다. 진솔하게, 잔잔한 감동으로 용기를 주고 가슴속에 어떤 씨앗을 품게 하는 나의 삶 이야기. 이 책은 예사의 자서전이 아니다. 은근한 메아리이고 변화에 대한 불쏘시개이다. 일상의 아주 작은 갈등조차 놓치지 않고 깨우쳐 주고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을 치고 지나간 고민을 섬세하게 일깨우며 명쾌한 해답을 준다.

 

이 책을 읽고 가슴 두근거리지 않은 이가 있을까. 저자의 삶에 비추어 나 자신을 빗대어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대가 40대라면 더욱 아무런 울렁증 없이 책상을 덮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개인의 Me Story이지만 이 책을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문에서 그도 말했듯이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기록이다. 흔히 자서전 하면 살아온 일대기를 되돌아 보는, 과거를 회상하는 회고록에 가까운데 이 책은 미래에 대한 다짐이 담겨 있어 차별적이다. 저자는 40대를 마치는 해에 이 책을 썼다. 그는 10년에 한 권씩 자신의 이야기를 편찬하리라 다짐한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 경영을 위해서이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나도 그를 닮고 싶다. 아니다 따라 하고 싶다. 그러면 이때까지의 삶 속에서 진솔한 나를 발견하고 미래를 향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따라쟁이가 되고 싶다.

 

신화와 나, 영웅 속의 나, 내 삶 속의 나를 들여다 보기라는 몇 번의 연구원 수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알았다. 나는 아직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단단한 돌이 되어 있는지 없는지 모르도록 숨겨진 응어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나는 괴로웠다. 두렵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여러 마음이 일었다. 압도적인 마음은 묻자.

 

그러나 그 뿐이면 제자리다. 그 뿐이면 변화란 있을 수 없음을, 40대에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무시하면 전환에 성공할 수 없음을 잔잔히 알려준다. 그래서 더욱 괴로워졌다.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웅크려진다.

,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을! 내 일이 되니 이리도 힘들다니!

 

그의 40대를 접어들면서 들었던 불면과 단식, 자기성찰은 이보다 더하였으리라. 나는 이렇게 등불을 밝혀 인도해주는 스승이라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오롯이 혼자 고뇌하고 결정하였으리라. 그가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성찰한, 우리들처럼 직장을 다녔던 매우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자기 성찰의 이야기이기에 모두에게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그의 자아 변화경영 프로젝트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니 묘하다. 절대 아무나 할 수 있어 뵈지 않는데 그런 용기를 준다. 삶의 전환이 있었던 40대를 돌아 보며 쓰여졌다. 마흔 살이라는 나이를 자신을 비추어 책들의 이야기를 비추어 정의했다. 모두 내 이야기처럼 절절히 다가온다.

 

자신의 얼굴, 가족, 자연, 건강, 집과 공간, 학습과 일에 대해 써 내려갔다. 놀라운 것은 각 주제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자신만의 언어로 된 정의가 내려져 철학이 있으며 꿈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얼굴에 대해 자세히 뜯어보며 자신을 들여다 본다. 남들이 보는 나는 얼굴에서 시작되기 때문 일까.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얼굴에 대한 마음가짐이 먼저여야 하기 때문일까.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지려 함일까.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얼굴조차에서도 자신답게 살라고 소리친다.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나 자신과 놀고 욕망을 부숴뜨려 땅에 묻으라 한다.

 

내 마음을 후벼 드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안다기 보다 잘 정의 내리고 있다. ‘나는 나무다. 나의 내면은 땅이다.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꽃씨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다. 나의 강연은... 나는어떠하다.’라는 확고한 자기 정의, 자기 확신이 부럽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어떤 것이 즐겁지 않으랴.

 

그이 자연과 가까운 삶도 부럽다. 시골 사람처럼 자연을 즐기고 속속들이 잘 아는 것을 보고 나만큼이나 자연을 숲을 좋아하는구나 싶어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솔직하게 자연과 친근함을,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한 장을 할애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자연 속에 가면 하나가 되는 사람이다. 아니 변신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누가 그걸 알까 두려웠다. 촌스러워 보일까, 철딱서니 없어 보일까, 우습게 보일까, 유치하다 할까 봐 조심했다. 안 그런 척 했다.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니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얼마나 속 빈 아이인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 절은 10장 깨달음의 과정이자 살아있는 등불을 위한 학습과 11장 변화의 주체로서의 일, 쏘시개 역할로서의 일에 대해 비전을 제시해 놓은 장이었다. 책 전체에 무찔러 드는 문장은 끊임없이 등불이 되었고 마음을 쓰라리게 했고 해답을 찾게 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바로 지금 자신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와 같은 유형은 아니지만 그처럼 살고 싶다.

 

그가 말하는 변화의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다.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늘 하루를 바꿔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간단한가. 그는 이것을 그냥 듣기 좋은 말로 쓰지 않았다. 실제로 실천하고 있기에 메시지의 파장이 크다. 그는 또 개인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뜬 구름 잡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변화는 오직 스스로 시작할 때만 효과적이며 그때에만 비로소 행복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자격 요건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통렬한 아픔이었다.’[297]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 상황의 먹이가 되어 쫓기기 전에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는 주인이 된다는 것이 변화의 요결임을 강조한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은 껍데기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붙잡고 일어서야만 하는 자기존중과 애정이 필요한 대장정이다.’[337]

지금 내가 부여잡고 있는 말이다.

40, 이 만큼 멀리 와 버린 나이, 이 때까지의 왜곡되고, 상처받은 자신이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과정은 뼈를 깎는 성찰이 요구된다. 본래의 자신, 잘 알 수 없지만 내면의 자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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