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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0일 10시 55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구본형

모두가 그를 ‘사부’라고 불렀다. 이건 동류집단의 엄청난 압박이었다. 낯 간지러운 얘기를 죽어도 못하는 나는 아직도 그를 부를 때 ‘사부’라는 호칭을 쓰는 비율이 50%가 채 안 된다. 그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그 누구의 계보에도, 학파에도 속하지 않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내가 누군가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색한 일이었다. 연구원에 지원하면서 마지막까지 나를 고민하게 한 것도 아마 내가 이제 평생을 ‘구본형’이라는 이름과 떨어져 불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고는 있었지만 전화와 이메일로 원고를 부탁하고 받은 것 이외에 그와는 일면식도 없었는데, 실제로는 책과 달리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의 실망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이름이 혹시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사람은 언제든, 쉽게 변할 수 있다는 불신에 사로잡힌 내가 그를 믿고, 그의 이름 아래 모인 집단에 속하기를 선택한 것은 올해 나의 가장 큰 선택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얼굴을 처음 보고 인사를 나눈 지 겨우 4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적어도 그가 자신에 대해 과장하거나 꾸며 글을 쓰는 사람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듯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되기를 조심스레 꿈꾸지만,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나는 그에 의해 몇 번 정곡을 찔렸다. 움찔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혹은 내 글에 질문을 달아놓을 때마다 그 과제를 해결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며칠 동안 골머리를 싸매게 만들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고 남의 지적과 비판을 못 견디는 성격임에도, 그의 코멘트에는 늘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많이 생각한 사람만이 해 줄 수 있는 말임을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그의 경력과 약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가 겪어낸 그만이 나에게는 진짜다. 나는 여전히 그의 비판적 감시자로 함께할 것이다. 그가 책에 써 놓은 말을 정말 100%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지, 세월이 가면서 수정되는 부분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배울 것이다. 그리고 매년 책을 낼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그에 대한 조사를 다시 풀어놓을 수 있기를. 이전에 오해했던 점이 있다면 사과까지 하면서 말이다.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한 마디로,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쓰지 못했을 테다.
우리 말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익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나의 부끄러운 부분까지 낱낱이 밝히는 글을 쓸 용기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나의 시행착오가 후대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소수가 아닌 대중에 밝히는 것은 어렵다.
그는 이 역시 해 냈다.


그가 언급했듯, 이 책은 특별하다.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로 특별한 사람들이나 쓰는 ‘자서전 시장’에 뛰어들었기에 그는 자신이 그 특별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에 대한 치장과 거들먹거림으로 일관된 자서전을 낸 사람들은 그가 주는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에 '불편해져' 이 책을 더 넘기지 못할 것이다.

용기를 불어넣고, 나도 나의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부추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의 나의 역사는 소멸될 것이라는 무서운 진실을 일깨워준다.

그를 대단하다 하는 것은 그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기보다 스스로 반드시 체험해본 것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은 이런 방법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시행착오를 거친 뒤 후배 세대에게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는 이런 사람을 나는 신뢰한다.

나는 아직 서른 한 해 밖에 살지 못했다. 지금 무찔러 드는 것도 A4지 24장이다. 마흔이 되어 다시 읽어보면, 그 때의 느낌은 또 어떨까. 나는 마흔의 무게를 느낄 때까지 이 책에 대해 평할 자격이 없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 서문

지난 10년 동안 14권의 책을 썼다. 그 중에서 나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

과거를 기록하면서 미래를 얻었다는 점이 이 책을 쓰면서 얻어낸 최고의 수확이다. 마흔 살 10년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앞으로 10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냈다.

충분히 썩어 비옥해진 과거가 미래의 수확량을 결정한다는 것은 농사를 한 번이라도 지어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과거를 충분히 썩혀 소화해내지 못하면 과거가 살아서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즉 과거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관성, 과거의 습관, 과거의 자취와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의 온갖 흔적, 그 영욕을 묻어 깊이 썩혀두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것이 앞길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책을 펴내며

그러니까 유명한 인물들이나 쓰는 자서전 시장에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끼어든 것이다. 그들에게는 불쾌한 일이고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만일 20대나 30대부터 기록할 수 있었다면 훨씬 젊은 시절에 나의 세계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 10년 후의 세계를 예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한 개인의 역사라고 인식했으면 한다. 평범함 개인의 미시사는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유실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기록의 형태는 일기여도 좋고, 메모여도 좋고, 홈페이지여도 좋고, 사진첩이어도 좋고, 이 책 같은 자서전이어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Me-story Project)’가 절실한 이유이다.


일러두기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내 생각치고 오리지널 내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까?

내 속에는 나를 키워온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는 셈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속에는 나의 생각, 나의 느낌이 편재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무엇이 그들의 생각이고 무엇이 나의 생각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사람 역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해서 그가 정말 오리지널인지 불분명하다. 내용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에 인용한 것인데, 저자와 원전이 덜렁덜렁 따라와 군더더기가 된다.

규칙이 생기면 즐거움은 줄어든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멋대로 하는 재미와 기쁨을 줄이고 싶지 않았다.

 

프롤로그

나는 10년을 단위로, 10년마다 한 권씩의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기록은 곧 나를 있게 한 날들의 기억이며 사유이기 때문이다. (15)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이다. 그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이며, 읽었던 책들의 주석이다.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16)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중략)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 (17)


1장 지난 10년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21)

마흔이 되어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왜 그런지 잘 몰랐다. (22)

사실 불면증이 오래전부터 이 책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23)

나는 오히려 불면을 즐겼다. 불면 역시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4)

방송이 나를 괴롭히면 출연에 응하지 않는다. 모임이 나를 괴롭히면 나가지 않는다. 원고를 써야 하는 강박감을 느낄 때는 언제고 거절한다. 어쨌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24~25)

불면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모르던 다른 세계를 접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중략) 음악은 괜찮은 치료제 역할을 했다.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다. (25)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그리고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 (26)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가축’이다. 그러나 반밖에 길들여지지 않아 늘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한다. (30)

사랑은 늘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증식되는 능력이다. (30~31)

훌륭한 작품은 그것이 어떤 표현 방식을 가졌든 인생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현실보다 극적이고, 현실보다 교훈적이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31)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31)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자제와 절제를 현명함으로 불렀던 그 어리석음은 또 어떻게 하랴. (31)

마흔은 바로 그런 답답함의 시작이다. (33~34)

과거와의 연결, 심지어 미래와의 연결도 가끔 끊어버리고, 이 돌연한 시간적 격리를 휴가로 즐길 수 없다면 바보이다. (35)

나는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곧잘 낙관적인 정신적 전환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 같기도 하고, 비애 같기도 하며,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 (38)


2장 마흔 살

나는 그런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혐오하는 그가 나와 동질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든가, 동질성을 인정학 적어도 그를 혐오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44)

마흔이 되었을 때, 내게는 나의 세계가 없었다. 내 삶은 줄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46)

마흔 살이 되면 문제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빼도 박도 못 하는 시기다. (48)

그래서 인간은 타고난 첫 30년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산다. 희망이라는 뽀얀 피부와 젊은 속에서 고뇌조차 달콤한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49)

마흔이 넘으면 사람들은 외부를 변화시키는 것에 무력해진다. 그들은 자신을 믿는 대신 더 힘이 센 다른 사람과 제도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중략)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여성들은 이때 깨어난다. 여성의 마흔 살은 남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자는 마치 지는 해처럼 시들지만 여자들은 뜨는 보름달처럼 절정을 향해 달린다. (52)

중년이 되어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성들은 숨어 있는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일어선다. (53)

모든 여성이 사회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정신적 에너지를 자기 안의 대상을 공격하는 데 쓰게 됨에 따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53)

서른 살 이전에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54)

마흔이 되면 악에 대해서조차 관용적이 된다. (중략)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쉽게 도덕적 모호함에 관대해진다. 선과 악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더 관용적이 되는 반면 덜 도덕적이 된다. 그리하여 도덕적 상대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젊은 시절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용했던 이분법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삶의 전체 모습을 해석할 유연하고 더욱 복잡한 새로운 지혜를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5~56)

그러나 마흔이 되면 단순한 이분법과 전통은 더 이상 등불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해석한 세상을 가지게 된다. (56)

젊은이들이 호전적인 도덕성을 들어 공격하면 그들은 비껴간다. 고귀하고 능숙하게 비껴가는 방법 가운데 최고의 것은 유머이다. 유머는 일종의 여유와 휴식이다. 40대의 중년도 사회에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표시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무능하고 부패한 권위 체계의 일부이며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싸울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을 때 유머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다. (56~57)

나는 삶을 연극에 비유하는 것을 싫어한다. (중략) 우리는 극장 안의 배우도 관객도 아니다. (중략) 극본과 연출, 그리고 배역까지 맡아야 비로소 삶으로 비유될 수 있다. (중략) 삶을 연극에 비유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삶을 극장 안으로 몰아넣고 짜여진 연극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를 원한다. (60)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 (62)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63)

나는 마흔이 넘어서 바쳐야 할 목숨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며,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푼돈 서푼짜리 인생이었다. (중략)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63)


3장 직장생활

20년의 세월은 내게 꽤 많은 유산을 남겨주었다. 나는 미국의 기업들이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변화의 방법과 모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개인적인 것이었고 지루한 일상을 메워주는 탈출구였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내 일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68)

퇴직금은 적었지만 변화경영에 경도된 지난 20년 자체가 내게 남은 막대한 유산이었다. (69)

변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과제였을 뿐이다. 변화는 바쁘지 않은 사람들의 일이었다. 변화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진 불행한 자들, 또는 불행을 인식하는 자들의 과제였다.

나는 이 인기 없는, 그러나 모두를 괴롭히는 과제에 집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할 이야기가 많은데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너무 적었다. 나는 실망했다. (69)

나는 IBM의 주류이고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며 승진이 빠른 영업부로 옮기지 않았다. (중략) 비싼 컴퓨터를 판 대가는 인센티브로 보상되었고, 그것은 월급과 비교되지 않는 목돈이었다. 야망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선택한 그 일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70)

나는 혁명사를 전공하고 싶은 역사학도였다. 왜 혁명사를 전공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단어는 내게 감동과 전율을 주었다. 그 말처럼 매력적인 단어는 없었다. 왜 그렇게 그 단어가 연인처럼 다가왔을까? 아마 가난 때문이 아니었을까. (71)

개선과 혁신, 그것은 혁명이라는 단어의 현실적 대체 용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IBM에서 가장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 그 일이라는 것을 나는 뼛속부터 알고 있었다. (73)

첫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둘째, 그들은 적절한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대략을 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80)

나는 사람의 관계는 가능하면 순수한 것이 좋다고 신봉하는 축에 속하는 숙맥이다. 나는 이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84)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85)

대학원에서도 역사학을 공부하다 1980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은사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나게 되었을 때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했다. (88)

한때는 공부를 더 해볼까도 고려했지만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놓은 것들을 읽고 분석하며 해석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것을 가지고 싶었다. 박사라는 사회적 인증의 과정과 틀은 내게 아무런 흥분도 주지 못했다.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88~89)

경영 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위와 자격증은 과거의 영완의 흔적일 뿐이다. (89)

나는 사는 듯싶게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한 것을 찾고 싶었다. (90~91)

‘그때 문득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갑작스런 계시 같은 것이었다. 이유도 설명할 방법도 없다.’ (91)

조직에게 양도했던 힘과 권리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평범함과 군중의 품을 떠나면서 외로워졌다.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91)


4장 얼굴-페르소나

생각은 머리를 통해 눈에 나타난다.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100)

이마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학식이 많은지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졌다. (104)

1980년부터 20년 동안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컴퓨터의 화면을 보고 살았으니, 퇴근할 때쯤 되면 눈에서 빛이 빠져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09)

어리숭해 보이는 것이 훨씬 큰 장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10)

내 의식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싶었다. 문학이 우리에게 숨쉴 곳을 제공하는 이유는 김수영의 표현대로 ‘기본적으로 불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조금 미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113)

모든 속박은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왔다. (114)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늘 쩨쩨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115)

그저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애쓰다 아파트 한 채를 남기고 일흔 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라고 기록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115)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 홀연 범상치 않은 결심을 한다. (115)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하고 매달렸다. 나체가 말한 ‘거리에 대한 파토스(pathos of distance)’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117)


5장 가족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 하나를 만드는 것, 이것이 몇 년 전부터 내 삶의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되었다. (123)

사람들이 어울려 밤낮을 함께 하니 갈등도 없고 싸움도 없이 지낼 수는 없다. 나는 갈등에 대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고 부른다. (125)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 (126)

그것은 이 아이가 여전히 나긋나긋하고 부드럽다는 점이었다. (127)

지식에 대한 허영이 있는 것도 그렇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민감한 점도 그렇고, 소심하여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 점도 그렇다. 이 아이는 늘 가슴에 정을 담고 있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128)

함께 먹는다는 것은 –아마 그래서 식구라는 단어가 생겼겠지만-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130)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130)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면 잘 되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제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다. 감정이 격해지고 더듬거리며 장황하게 된다. (131)

어쩌면 10년쯤 후에는 지금의 ‘1인 기업’이 부녀가 함께 경영하는 ‘2인 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134)

우리는 법도를 지키는 남편과 아내라기보다는 허물없는 친구같이 되어갔다. (136)

나는 마음껏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올 때 자신과 한 약속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일하는 시간은 얼마든지 뒤로 배정한다. 일은 언제고 하면 된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남은 시간에 하면 된다. 이것이 내가 1인 기업을 만들 때의 기본적인 구상이었다. (137~138)

나는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나 일할 수 있다. 내가 이는 곳은 어디고 이내 훌륭한 사무실이 될 수 있다. 온통 일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일에 주력한다. 노는 것은 내게 힘을 주었다. (138)

나는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정도 글 쓰는 일에 몰두하는데, 이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대를 선택했다.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마치 모두가 버린 시간의 밭을 일궈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138)

하루 시간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두 시간이 거의 변하지 않는 내 작업시간이다. 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늘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선적으로 열려 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팔자가 좋은 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이 행운에 늘 감사한다. (138)

그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주어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39)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은 비어 있었고,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생명이 없었다. (139)

그러나 먼저 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되자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략) 그리고 아주 다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길이 있다. (140)

나는 먼 거리를 오느라 파김치가 된 강사가 아니라 삶을 즐기기 위해 떠나온 여행자처럼 싱싱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142)

책과 강연은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었고, 그녀 역시 조금 쉬고 싶어했다. (143)

여행은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서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143)

아내는 어디서든 아주 많은 이야기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딱 한 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정치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모처럼의 기분을 망치게 되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렇다. (144)

친구들 사이에는 이해가 끼면 안 된다. 친구와 비즈니스를 같이하는 것은 안 좋다. 비즈니스는 그저 전문성을 나눌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하면 된다. (146~147)

또한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잘난 척해서도 안 된다. 친구의 성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순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성공 속에는 늘 ‘그동안 나는 뭘 했나.’ 하는 자신에 대한 문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둠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147)


6장 자연

그래도 추운 것은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익숙한 것들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154)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 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한 수 신의 음성을 불어넣는다. 이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너의 초라함이 보이느냐? 네 마음 속에 서식하는 그 벌레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느냐?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느냐? 이 어리석은 것아. 우매한 미망의 어둠에서 나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157)

얼마 전 작고한 이오덕 선생이 늘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160)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중략)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중략)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160)

사랑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드라마틱하며 가장 빠져들기 쉽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161)

부모와 자식은 틀림없이 전생에 빚쟁이였거나 원수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내 자랑이었다가 금세 속 터지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위안이었다가 불행으로 변하고, 커다란 웃음이었다가 하염없는 눈물이 되고 만다. (161)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161)

자연은 내게 내가 그 일부라는 것을 늘 일깨워준다. (163)

어떤 조화로움이 나를 밀고 여울처럼 가슴으로 퍼져오는데, 그때 평화를 느끼게 된다.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  (164)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오래된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하는 것도 수없이 보아왔다. 나는 자연의 방식을 추구했다. 자연 속으로 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장식을 나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데려왔다. (166)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169)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중략) 내 책도 내 일 년의 삶의 기록이다. (170)

나무가 다음 해에도 똑 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 해의 그 나무가 아니다. (170)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좋지만, 그 생각이 한 곳에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만들어낸다. (170)

고추나 마늘 같은 갖은 양념들의 특별한 맛은 식물이 동물을 상대로 개발해낸 생화학무기다. (171)

인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덕분에 이것들은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하게 되고 번영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여 번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172)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하나의 씨앗처럼 날려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을 가장한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리진이 어디에 있든지, 분명한 진실은 나의 것이 된 생각들, 즉 이미 ‘내게 귀화한 생각’들이라는 점이다. (173)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에 대한 생각들’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려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아주 특별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탄생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173~174)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며,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즐겨라. 삶 자체가 유혹이 되게 하라. (174)

일 년에 적어도 책 한 권은 써라. 이것이 열심히 일을 한 기준이다. 세상을 향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 (175)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 (175)


7장 건강

나는 속으로만 지른다. 자동차의 뒷자리에 앉으면 나는 몇 살을 더 먹곤 한다. (181)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는 늘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다. 스승인 플라톤과 결별하고, 제자인 알렉산드로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처세술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군계일학이어서 자꾸 머리통 하나만큼씩 돋보였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빛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183)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 (186~187)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이라는 사회적 특질을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188)

“그대의 교만과 끊임없는 욕망을 버려라. 자부심과 야망을 버려라. 이런 것들을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묻자 노자가 한 대답. 사마천 <사기? 열전 중, 190)

나는 아직 독수리타법으로 원고를 쓴다. 눈이 안 보이면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답답할 것이다. 그래서 타자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193)

나는 보르헤스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그의 책은 대체로 잘 읽히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매우 재미있다. 보르헤스 역시 만년에 실명했다. 어쩌면 그것이 보르헤스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던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너무 많은 책을 보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194)

그래서 심장은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는데, 우리 신체 가운데 가장 걸작품이기 때문에 이 힘든 일을 견딜 수 있다. (196)

적당치 않은 식생활, 예를 들어 흡연, 육류, 버터 등을 과다 섭취하면 관상동맥의 안쪽에 아테로마(atheroma)라는 작은 돌기가 생기게 된다. (197)

생명을 잃으며 사라져가는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미 죽어버린 것들은 그 허망함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198)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199)


8장 길에서

열심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성공학자들의 말을 나는 조롱한다. 그들은 대부분 신통치 않은 예언가들이다. 근거 없는 이야기, 뿌리를 알 수 없는 낙관, 유치한 전개, 더덕더덕 기운 미덕과 잠언의 누더기로 치유가 아닌 잠시의 진통 효과를 과장하는 시시한 돌팔이들의 이야기를 싫어한다. 내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 (207)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이다. (208~209)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209)

가끔 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그 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종종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지금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강박관념으로 다가오는 두려움이다.
이런 생각들이 내게 지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21)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쓴다. 말하자면 나의 이야기를 하며 산다.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이다. (211~212)

‘내 앞에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 대신 내 뒤에서 수많은 길이 닫히는 것을 보았네. 이 역시 삶이 나를 미리 준비된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네.’ –파커 파머, <루스의 이야기> (213)

그러나 나는 그곳에 도착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정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끝나는 여행도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10년 동안 내 길을 가려는 노력의 결과로 알게 된 평범한 깨달음이었다. (215)

나는 책을 쓰는 것이 좋다. 글쓰기가 무엇보다 즐거운 취미인 셈이다. 그해 발간된 책은 일 년 동안의 내 관심사였다. 책 한 권이 나오면 일 년 동안의 정신적 여정이 정리된 것이다. (217)

그러나 정말 내 인생은 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에서 표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내 하루하루였다. 나의 하루들은 책으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물처럼 흘러갔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생각하고 낭비되면서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그 초라한 순간들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 (217)

삶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잠시 즐기고 다시 깨끗하게 복원하여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살 수도 있지만, 정갈하고 아름답게 먹고살 수도 있다. (218)

손님이 돌아간 만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218)

나는 정확한 성격이 아니다. 이야기를 시간별로 차곡차곡 정리하고 쌓아두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218)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멀쩡한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해서 불행하고, 약간의 손해를 보아 불행하고,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행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 불행하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지 못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원망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보해지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0)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듯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221)

과일과 채소, 그리고 여러 곡물이 섞인 밥을 먹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고 한 시간씩 햇빛을 쪼일 수 있다면 행복하다.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 순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하다. (221)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221)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222)

바람이 조금 있는 아름다운 날에는 밝은 햇빛 속을 반바지 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산책하고, 우울한 날에는 집 안에서 그 기분에 어울리는 좋은 책 한 권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은 이미 행복하다. 이때 돈이란 밥 먹고 난 후 아이스크림 한 개, 또는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실 만큼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인생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 아닐까? (222)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223)


9장 집, 공간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주인을 닮는다. 칭기즈칸 (227)

그 집에는 작은 뜰이 있었으면 좋겠다. 뜰에는 단아한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밑에 작고 예쁜 평상 하나를 놓아두었으면 한다. 더운 여름날 재미있는 책 한 권 들고 자다 깨다 하며 읽을 수 있는 그런 평상 말이다. (227)

집은 채광이 잘 되는 동남향 집이면 좋겠다. 유리를 많이 써서 햇빛이 듬뿍 들어오게 하고 싶다. (229)

몽골족의 나라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아름다운 누각의 궁궐을 지었다. 궁궐의 이름은 재너두(Xanadu)이며,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조형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230)

서재는 꿈을 꾸기에 좋은 곳이다. 그 속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다. 이야기 속에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크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차분한 서재 하나를 가지고 싶다. 조금 읽다가 생각하고 조금 더 이해하고 다시 아무런 상황의 규제도 없는 꿈 속으로 가서 더 많이 이해하길 바란다. 이렇게 알게 된 것을 글로 쓰면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 (231)

이 집을 사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북한산 남쪽 주변을 거의 5년 동안이나 돌아다녔다. (232)

이 집 저 집 보면서 집을 보는 안목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5년을 보내다 보니 집을 고르는 약간의 식견이 생겼다.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은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터를 잘 잡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233)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언덕을 싫어하는 것 같다. 아마 산이 많아 산에 지쳤나 보다. 하지만 언덕은 아름다운 조망을 위해 필수적이다. (234)

이곳은 눈 오는 날 아침에 동네 사람들을 다 만난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 나와 함께 집 앞 눈을 치운다. (236)

문명은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재배하는 품종만 밭에 키운다. (241)

늦게 시작한 것이 늦게까지 볼거리로 남는다. 어떤 경우든 식물은 한 번은 전성기에 이르는 것 같다. 일찍 시작한 놈은 봄, 여름에 빛을 내고, 조금 늦게 시작한 놈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남아 멋을 부린다. 다 제 때가 있다. (243)

특히 나처럼 홀로 1인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집은 작업장이고, 직장이며, 사무실이고, 일상이 이루어지는 훌륭한 세계이기도 하다. (254)


10장 학습

모든 것은 내 주머니에서 지출되었다. 돈은 얼마나 빨리 소리 없이 사라지는 초조함이었던가! (259)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하면서 완전히 내 손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외로움과 불안과 대면해야 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로움을 선택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60)

책을 읽다가 “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발견했다. (260)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계속 책을 쓰도록 했고, 계속 읽게 했으며,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 (261)

그러기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는 공부하고 생각하고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창조적이어야 했고, 더 열심히 학습해야 했다. 나 이외의 다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를 보호해줄 아무런 울타리도 없었다. (262)

나는 학습이 의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의무이다. 이 짐을 견디지 못하면 더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짐을 견딘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263)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263)

나는 한 가지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을 자제했다.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다행히 아주 즐거운 놀이였다.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264)

심심하면 그저 심심함과 함께 놀았다. (264)

문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작품이다. (265)

개는 본능적으로 약한 자를 식별해낼 줄 안다. (266)

어떤 때는 며칠 사이에 책을 한 권 쓸 수 있으리라 느끼기도 한다. 그저 미친 듯이 쓰면 며칠이란 아주 긴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꽤 두꺼운 책을 한 권 쓰기에 충분하다고 믿을 때도 있다. 아직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내 힘이 아니라 신명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268)

경제적으로 학습은 자신을 ‘자본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교육과 훈련,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만 포인트가 누적되는 자본이 바로 ‘인적 자본’이다. 자신을 자본화할 때는 전략적 배려를 해야 한다. 인생은 길지만 또한 짧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271)

나는 나의 눈으로 책을 본다. 이미 마흔이 넘은 사람이다. 이미 삶의 웬만한 구석들은 혀로 핥아본 사람이다. 저자의 권위에 눌려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73)

단칼에 내 심장을 찌르지 못하는 자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다. (273)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또는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안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 (274)

좋아하는 일이 즐거움이 되려면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보기 싫은 책은 보지 않는다. 독후가 숙제를 하기 위한 독서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읽는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자유롭다.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275)

사회적 필요성과 자격의 취득이 목적인 경우는 그들의 위엄과 전통을 따라야 할 것이다. 힘은 그들에게서 오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싶다. 이때 지적 작업은 즐거운 산책이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이 된다. (275)

임종에 이르러 저술을 계속하라는 비서에게 고백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연결시킨다. “여보게, 레지날드.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지금까지 저술한 것들이 죄다 휴지같이 느껴진다네.” (276)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미친놈이었다. 스물 네 살에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서른 살에 경력 쌓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과의 최초의 결별이었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추락이었다. 그는 모든 가치를 열정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중략)
그에게 있어 완성에 이르는 길은 살인적인 자기파괴와 가지고 있던 믿음의 상실, 자기해체로부터 생겨났다. ‘자기처형’ 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277)

들뢰즈는 철학사를 연구한 철학자였는데, 자신은 철학사를 뒤적이다가 마음에 드는 철학자를 만나면 뒤에서 덮쳐 ‘계간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들뢰즈가 철학을 사유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나의 것을 접속하여 사생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들뢰즈의 취미였다는 것이다. (278)

들뢰즈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니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니체의 뒤를 덮쳐 사생아를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더라.”고 했다. 그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278~279)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279)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았다. 그러다가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펜하우어가 되었고,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의 개념을 창조해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있는 ‘니체 씨’를 떠나갔다. (279~280)

니체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피 끓는 방랑의 유혹이지만, 그를 알기는 어렵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허물만 남기고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니체가 아니었다. (280)

내게 배움이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또는 자기경영은 가능할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 철학은 가능할까? (281~282)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283)

나는 늘 새벽에 일어난다. 그리고 새벽에 쓴다. 두 시간쯤 쓰면 지친다. 이 피곤이 나를 살게 해준다. (284)

어제 읽던 책을 끝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게 되면 보는 것이고, 오늘 못 보면 언젠가 보면 되는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방식이다. (중략) 나이가 들면 잊는 게 더 많다. (284)

청중을 통과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을 얻지 못한 것들은 새로운 언어로 고쳐지거나 버려진다. (285)

하루는 실험장이다. 실험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실험장. 실험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실험 …… 내겐 이것이 하루이다. (285)

학습은 종종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냉정하고 감정이 배제될 때 잘 배우는 영역이 있다. 목욕탕의 냉탕과 같다. 그러나 학습의 또 하나의 얼굴은 뜨겁다. 혼이라든가 열정, 몰입, 감성, 직관 같은 단어들이 중요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학습은 뜨거운 무엇이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며,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목욕탕의 온탕이나 열탕과 같다.
나는 경영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써 훌륭한 휴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욕탕을 만들고 싶다. 냉정하고 가혹한 경영 속으로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인문학적 유산을 배치시킴으로써 돈으로 피폐한 영혼과 벌거벗은 몸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관심사이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으로 꿈을 침투’시키는 작업이었다.
나는 나에 대한 꿈을 꾸었다.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 (286)

나는 내가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288)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289)


11장 일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소명은 나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깨워 스스로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94)

하루가 내 연구의 기본 단위다. (294)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 (297)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298)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것부터 시작한다. (299)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것들과 원리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299)

창조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창의적 발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죽어 있는 정신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g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며 삶이 살아난다. (300~301)

세상을 살며 그것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 사회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그 안에 키워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훌륭한 사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배움과 학습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301~302)

내가 배우는 방법으로 가장 그럴듯한 것이 배운 것을 나의 언어로 정리하여 책을 쓰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 나는 책을 읽고 감동적인 곳을 골라내어 내 방식으로 걸러 재편하는 데 꽤 능숙하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분야에 그것들을 재결합하여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작업 역시 즐긴다. (302)

나의 전문 분야는 변화경영이다.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변화라는 주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중략)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303)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강력한 핵심 개념들을 연결함으로써 미래를 현실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304)

자신의 강점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기질이다. (304)

이런 사람들은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겨한다. 특히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에 몰입할 때 최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사람에게 적합한 직업은 저술가, 대학교수, 예술인, 카운슬링 또는 컨설팅 들이다.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바로 지금의 나처럼 사는 것이다. (305~306)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처음에는 규제하고 강압하며 표준을 바라는 세상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원칙이 통용되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침범하려는 ‘일반의 세계, 군중의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전제로 했다. 자신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307)

나를 키워준 것은 오히려 약한 마음이 늘 얻어오는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은 치유력이었다. 갈등이 나를 키워주었다. (307)

성공에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 (310~311)

성공 뒤에는 성공을 향한 탐욕이 있었다. 경쟁에 대한 에너지, 시기와 질투와 원망이 있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모방하게 하고 배우게 하며 연습하게 하고 익히게 했다. (311)

나는 이미 성공의 비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배우고 익히는 것은 모두 당사자의 몫이다. (311)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유일한 자만이 최고로서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이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311)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며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 (312)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313)

나는 마음이 여리고 소심하다. 늘 쉽게 상처 입는 편이다. 예민하기 때문에 대상을 잘 골라야 했다. 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대신 책으로부터 배우는 방식을 구했다. 책은 훌륭한 스승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가르쳐주었다. 심한 말을 하지도 않았고, 무의식적인 실수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도 않았다. 시험을 보자고 달려들지도 않았고, 게으름을 탓하지도 않았다. 나는 말보다는 문자가 지니는 조용한 설득력을 더 좋아했다. 그들이 남겨놓은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재미를 즐기곤 했다. (중략) 나는 옷을 사서 치장하는 대신 조금 묵직한 정신적 허영을 즐겼다. (315)

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했던 소심한 자아는, 밖으로 나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사람의 작은 영웅이 되고 싶어했다. (316)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치 않은 위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유일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숙달해야 한다. 손과 머리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감과 조화가 이루어지면 익숙해진 것이다. (316)

“내가 쓰는 글은 짧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중략) 그것은 적대감이라는 위액과 소화액에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해야 한다. 피와 영혼과 정신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환상과 내면의 열정 속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317)

“나는 글을 통해 사람들이 지루한 일상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무료와 절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인생의 재료로 삼는 것을 도와야 한다. (중략)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318)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생각하고 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또 모든 생각을 한다. (319)

쏟아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많으면 이내 밑천이 딸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지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너무 바쁘면 안 된다. (319)

책을 쓰는 것의 장점은 그 내용의 핵심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꺼내 쓸 수 있을 만큼 정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321)

강연은 하나의 지적 퍼포먼스이다. 내가 먼저 그 내용에 만족해야 하고, 청중의 개인적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322)

강연은 결국 전달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장 나다운 방법으로 이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22)

연사가 한 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다. 스스로를 듣는 사람들인 셈이다. (323)

좋은 청중과 무늬만 좋은 청중은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눈빛이 교환되면 금방 알 수 있다. (323)

나는 빳빳한 게 좋다. 이들이 내 타깃이다. (324)

지지자들로 둘러싸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325)

그러나 이 속에는 늘 불안이 있다. 인기라는 것은 덧없는 것이며 언젠가 떠나는 것이다. (325)

레스터 서로나 앨빈 토플러, 폴 로머 같은 사람들은 차분한 강연가들이다. 그러나 톰 피터스는 뚱뚱한 체구에서 뿜어지는 웅변적 씩씩거림과 곰 같은 어슬렁거림으로 유명하다. (중략)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내게 톰 피터스 스타일의 강연법을 익혀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326)

자기 것이 아닌 것은 탐이 나더라도 마음을 접는 것이 좋다. 나는 쇼 비즈니스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그 대신 나에게 적합한 강연 스타일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민감한 감수성을 건드리는 타입니다. (중략)
가끔 나도 그런 카리스마가 있는 강연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건 내 타입이 아니다. (327)

그 순간 내 일이 매우 위험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짝 덮고 있는 행복의 껍질을 뜯어내는 것이 매우 적대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불행은 행복이라는 초콜릿으로 살짝 덮여 있었다. 그들은 그 초콜릿 덮개가 벗겨지는 것에 분개한다. 그리고 적대적이 된다. 솔직한 것이 위험한 이유이다.
내 일은 예민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의무를 주며 할 일을 주고 숙제를 내줌으로써 그들을 못 견디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333)

불행한 사람들만이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때때로 변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334)

나는 먼저 그들이 그럭저럭 봉합시켜놓은 일상에 대한 만족을 헤집어놓는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안한 불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펴놓는다. (335)

이 일은 매우 주제넘은 짓이기도 해서, 나는 힘겹게 행복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적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337)

그들이 시작하도록 돕는 것, 이것이 내 비즈니스의 또 다른 목적이다. (339)

정신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늘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중략)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밀리면 정신적 타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중략) 그러나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실수하거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매우 불쾌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이때 자신의 분야가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된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340)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 ‘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 (342)

막막할 때, 주저앉아 있을 때, 우연히,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중략) 나는 그저 그 속에 불씨 하나를 던져넣는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즐긴다. (342)

모든 씨앗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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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07.21 13:39:46 *.12.20.193
아인, 멋지다!! 그 냉철함, 그 단호함, 그리고 그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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