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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31일 01시 24분 등록
 

북리뷰17 : 엔트로피-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

제레미 리프킨 저. 김명자.김건 역. 동아출판사. 1992.




***저자에 대하여


제레미 리프킨 [Rifkin, Jeremy. 1945~ ]


 그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쾌락의 독재' 체제에 맞서 싸우는 전사(戰士)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영원히 다 동의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그의 활약이 워낙 눈부셔 우리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린다. 


"혹자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미래를 얻는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연구가 추진되어야 하는지 제어할 수단이 없으며, 어떤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을 것인지 회사 중역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중매체와 광고의 일제 공격에 반대하고 외면하는 다른 어떤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모두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시장이 소비자를 창출하는 것만큼, 소비자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이들 조직적인 세력들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들 각자는 함께 공유해야 할 집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대부분이 우리의 운명과 숙명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수동적 방관자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이다. 


전세계 지도층 인사들과 정부 관료들의 자문역을 맡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변화가 경제, 노동, 기계적 세계관에 근거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 낭비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경고한 저서 《엔트로피 법칙》으로 세계적인 이름을 얻었다.

1995년에는 정보화 사회로 인해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경고한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을 출간하였다. 이 <노동의 종말>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시간 삭감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접속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2002년에는 화석연료의 고갈과 함께 새롭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소 연료 시대를 다룬 《수소경제 The Hydrogen Economy》를 발표하였다.



그밖에도 《생명권 정치학 Biosphere Politics》(1991), 《바이오테크 시대 The Biotech Century》(1998)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는데, 출간하는 저서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실리콘 칼라', '뉴사이언스', '수소경제' 같은 신조어도 리프킨이 만들어낸 용어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등



그의 작품들:


<육식의 종말 >

소에게 줄 곡물사료로 13억 명 먹일 수 있다 

편안한 식탁에 앉아 죽은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담배에 이어, 육식(肉食)이 2002년 벽두 한국 사회에 화두가 되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SBS TV 특집이 방송된 후 백화점 유기농 재배 야채 매장에는 물건이 달려 팔지 못할 정도로 주부들이 몰리고 있다.

‘채식 열풍’이다. 하지만 단지 고기를 끊고 야채를 먹으면 우리는 잘 살 수 있는가.

이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던 세계적 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말한다.

“인간의 식단에서 육류를 제외시키는 것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식 문화를 넘어서야만 인류를 위한 새로운 과제를 정할 수 있다.”

마침 번역된 리프킨의 저서 ‘육식의 종말’의 원제는 ‘Beyond Beef’, ‘쇠고기를 넘어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쇠고기 탐식으로 대표되는 육식 문화가 단지 인간 육체의 건강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문명을 위협하는 환경적, 생태적, 경제적 위기는 물론 사회적 빈부격차와 국가간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리프킨은 자신의 다른 저서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등에서 보여준 독창적이고도 해박한 문제의식의 칼날을 이번에는 우리의 식탁에 들이댄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의 수는 12억 8,000만 마리로 추산된다. 소의 사육 면적은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만성적 기아에 시달리는 13억 명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넉넉히 먹여 살릴 만한 곡식을 먹어치우고 있다.”

수많은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이제는 한국 등 신흥 개발국의 쇠고기 탐식을 위해, 소는 곡물을 사료로 먹어치운다.

리프킨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을 집어삼키는 소’를 비롯한 가축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은 미국 곡물 생산량의 70%, 전체 지구상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우리는 20세기에 곡물로 사육된 쇠고기를 최상위에 올려놓은 인위적인 새로운 ‘단백질 사다리’를 만들었다. 전 세계 곡물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것은 부의 재분배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에 속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리프킨은 아득히 인류 문명의 시원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인간과 소의 관계를 고찰한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15세기 유럽 대륙에서 일어났던 쇠고기 소비의 폭발, 콜럼버스가 쇠고기 맛을 돋구기 위한 향신료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후 그 땅이 유럽인의 쇠고기 포식을 위한 목초지로 변해갔던 상황이 극적으로 서술된다.

유달리 스테이크를 탐했던 영국인이 ‘John Bull’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사정, 미국인이 ‘cowboy’가 된 연유이다.

육식은 이제는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몸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그 영혼마저 황폐화시킨다.

‘붉은 쇠고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탐하는 육식은 남녀의 성적 차별, 빈부격차의 계급적 차별, 배타적 국수주의를 낳는 일종의 광증(狂症)이라고 리프킨은 분석한다.

그가 여러 자료들로 낱낱이 입증해 보여주는 쇠고기 도축 현장, 해체된 소의 몸뚱아리가 꽃등심으로, 스테이크로, 햄버거용 패티로 우리의 입에 들어오기까지 과정의 잔인함과 불결함은 차라리 끔찍하다.

여전히 육식으로 스스로의 몸을 보하고 싶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생을 같은 인간,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지속시키고 싶다면 일독할 만한 역저이다.

리프킨은 “지구상에서 축산단지들을 해체시키고 인류의 음식에서 육류를 제외시키는 것이야말로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며 “육식 문화를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상태로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징표이자 혁명적인 행동”이라고 결론 맺는다.


<엔트로피> 


열역학 제1법칙 - 우주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 -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며 새로 창조되지도 않는다. 우린 컵 속의 물을 마시듯 그 한정되어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에너지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따라 사용가능한 에너지에서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변형될 뿐이다.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엔트로피이며 엔트로피가 사용가능 에너지보다 많아지고 결국 모두 사용불가능 에너지로 대체되면...우리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정된 자원의 기본위에 서있는 지구인들이 오늘날과 같이 (정확히는 뉴턴의 물리학이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장위주의 고엔트로피 사회를 계속 유지 한다면 에너지의 고갈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며 그만큼 파멸은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더군다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저 불변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자는 고엔트로피의 성장위주의 세계관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방법을 쓰던 종국의 파멸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자본. 기술등의 집중화와 생산성만을 강조한 기계화에 매달린 성장위주의 세계관을 버리고 저엔트로피 사회로 옮겨간다면 파멸의 발걸음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에 눈떠야 한다’고 말한다. 읽는 동안도 새로운 세계관이 선뜻 그려지진 않았다. 말하자면 내가 호흡을 한번만 해도 될 것을 두번 하게 되면 누군가는 그 한번을 빼앗겨 호흡곤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잘못든 예인가)

그리고 어쩌면 너무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르는데...하지만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변한 듯은 하다...내가 시원하기 위해 켜는 에어컨의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바람이 거리의 공기를 데워 적어도 길가에 있는 몇 십명의 사람들은 더 더워진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처럼...


이 책이 무려 20년도 훨씬 전에 쓰여진 것이니..그동안 혼란과 무질서는 몇배 가중되었겠지.

저자는 수차례 미국의 예를 든다.

세계 인구의 고작 2~3%인가 하는 나라가 전 지구의 자원의 40%를 소비하고 있단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미국으로 인해 주변부에 인간이하의 삶을 살기를 강요받고 고통당하는 지구인이 그 수십 배에 이르는 것이다.  미국 1이 4/10를 사용하니 나머지 9가 6/10을 쓰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에도 이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폐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엔트로피사회-즉 고에너지 소비사회는 생존을 위해 더욱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그 무질서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며 따라서 파국은 더욱 빨리 다가오는 것이다.

미국이 전세계의 에너지를 장악하기 위해 더러운 전쟁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예측했는데. 그 예측은 지금 정확히 맞아 떨어졌으며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암담하다.

또한 세계의 가난한 국가들이 미국을 모델로 삼아 그와같이 되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미국하나만으로도 지구의 자원이 얼마를 버텨낼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모든 국가가 미국과 같은 에너지 소비국가가 된다면 가히 이 지구의 에너지 고갈 속도와 그로인한 파멸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구인이 두루 잘 살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은 에너지의 소비를 줄여야 하며 그들의 안락함을 포기해야 한다.. 가난한 국가들은 공업국가로의 전진을 중단해야 한다..모두가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세계는 에너지의 형태가 바뀌는 시점에서 대혼란을 겪은 후 새로운 세계관위에 다시 새로운 문명이 건설되었다고 말한다. 8~19세기 석유와 석탄 등의 에너지원을 사용하게 되면서 시작된 기계화의 세계관위에 지금의 세상이 서 있다면 이제는 고갈되어가는 에너지원으로 인해 더 이상 지금의 세계관위에선 인간존립의 방향을 모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록 우리세대에 지구의 자원이 모두 없어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쓰는 에너지는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쓸 에너지를 미리 써버리는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의 쓰레기들만을 남겨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엔트로피의 새로운 세계관 위에서 새롭게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거대도시, 기계화영농, 대량생산과 소비, 무한대의 군비경쟁, 그 밖에도 교육, 의료등 모든 분야에서의 거대한 소비를 버리고 저에너지소비 사회로 전환하고 자연과 더욱 밀착된 삶을 살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저 지금까지의 삶에서 조금 절약하는 차원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가능한 얘기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의 종말>                  .      .


그동안 자본주의가 진화해간 모습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근데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단지 안티-자본주의중 하나인 공산주의, 그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일 뿐이었던 소련이 패망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으로 느끼는 많은 분야가 컴퓨터에 의해 교체되고 있다. 기업들은 수요자를 잃을 것을 우려할 겨를 없이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비용절감을 위해 사람을 쫓아내는 쪽을 택한다. 결국 인간에게 남은 직업은 연구직,  법률계,  정치계, 경영진 등 최고 엘리트만이 갈 수 있는 수요가 얼마 안되는 곳 뿐일까?

  

21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노동'의 종말에 대해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 아마 역사 이래 인간과 가장 오래토록 함께 해온 존재가 아닌가 싶다. 원시시대에 먹이를 직접 잡았던 시절부터,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꽃필 무렵을 거쳐, 문명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나아가 도시, 대도시, 국가, 세계라는 단위로 확산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인간생존과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이 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소멸해가고 있다. 데스크 탑 화면을 보며 손아래의 자판기를 열심히 두드리고,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버튼을 눌러대는 것 또한 노동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라면,

물론 아직까지 노동은 살아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질적인 차원에서 노동은 매우 변모하였다. 이른바 지식 노동이 주를 이루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기저에는 기술 발전이 크나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렇다면, 힘들이지 않고, 앉아서 편안히 쉬며 일을 해도 얼마든지 돈을벌 수 있는 이 상황을 전 세계인들이 반겨야하는게 아닌지? 문제는 지식인들보다는 예전부터 힘들게 일하던 노동자들이다. 노동직이 감소함에 따라 그들의 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그들은 기계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임금이 형편없기에 일단 생계유지가 곤란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며(정말 지겨울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책에서는 미국의 흑인 노동자들이 그 희생의 정점에 있다고 한다. 마치 여성장애우들이 이중으로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처럼, 흑인들은 백인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그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이중으로 고통을 얻고 있음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슬럼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흑인들은 남부에서 북부 도시로 옮겨갔지만, 기술집약적 산업들이 동시에 북부의 교외로 옮겨가는 바람에 북부의 도시들은 슬럼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문제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은 '형평성'에 있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제3부문의 강화를 대안 책으로 내놓고 있다. 제3부문은 다분히 공동체주의를 띠는데, 이는 광적인 전체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인간 情적 요소를 부활시켜,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약간..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어쩔수 없는 귀결인 것 같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수 밖에. 결국 인간성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3부문을 정부나, 시민단체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해 줄 것으로 요구한다. 


<수소 혁명>  


 공룡이 멸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한 먹이의 부족도 하나의 유력한 설이다. 로마제국의 흥망에도 바로 이런 먹이의 부족과 관련이 있다. 거대한 공룡과도 같이 비대해진 로마제국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이 에너지체계의 공급부족은 결국 로마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구는 하나의 유기체다. 지구도 아파할 줄 알고 그 아픔의 한계도 가지고 있다. 우리 인류는 이 지구라는 아름다운 생명체에서 지금껏 공유적 삶을 잘 누려왔다. 이 지구생명체의 살집에 흠을 내고 몸 속 깊숙히 바늘을 꽂아 그 혈액을 체취하여 지탱한 인류역사는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고 화석연료와 함께 시작된 그 산업화는 지금 지구의 여러 곳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며 지구 생명체의 생명마저 위협하고 있다. 비로소 그 잠잠하고 조용하던 지구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현대 문명이 발전하고 지탱된 근본적인 이유를 에너지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 문명을 지탱해왔던 에너지는 석탄에서, 석유, 천연가스 등의 화석연료였다. 그리고 지금 그 화석연료는 허버트의 종형곡선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고 아래로 곤두박칠칠 때쯤이면 건물의 기반이 무너져내리듯 모든 사회구조가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남은 정점까지의 기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2010-2020년 정도면 달할 것이라는 데 많은 연구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싸움할 의지도 없는 초등학생인 이라크를 제도교육을 이미 탈퇴한 불량 고등학생 미국이 자꾸만 시비를 거는 이유 역시 남은 정점에 달할 때까지의 안정적이고 값싼 석유에너지의 확보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 과연 우리 문명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더불어 사멸할 것인가? 허버트의 종형 곡선의 정점을 눈앞에 두고 많은 사람들은 대안에너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 인류문명을 다시 쓸 신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바로 100여년 전 쓰여진 한 프랑스 작가의 소설 속에....보물섬처럼....말이다.


문명을 이어가고 인류를 살리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파괴된 환경으로 질식하고 있는 지구생명체에게도 신선한 공기를 제공할 수 있는 그 대안에너지는 바로 수소다. 수소에너지는 그 사용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거의 없다. 따라서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인한 기후이상과 대재앙을 예방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수소에너지가 가진 또 하나의 선물은 그것이 에너지화되는 방식자체가 분권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의 사용은 그 생산이 집적적이고 집중적이기 때문에 많은 자본이 필요하고 따라서 본질상 중앙집권적인 방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소에너지는 그 생산이 지구의 곳곳에서 소량씩 채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분권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수소에너지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그림에 따라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또 다른 무기로 바뀔 수도 있으나 그 본질상 다수의 시민들에게 그 권한을 돌려주고 있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이미 다국적 기업을 위주로 수소엔진 및 수소에너지 개발에 엄청난 돈이 투여되고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이나 지역시민연합에 의한 에너지화도 동시에 병행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을 다시 쓰게 될 지구 생명체와의 조화로운 지속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수소 에너지가 천사의 얼굴로 다가올 것인지 악마의 얼굴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그것을 만들어나갈 우리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 서문


4. <엔트로피>를 처음 번역해 낸 것이 1983년 6월의 일이었다.


그동안 <엔트로피>는 20판을 넘기게 되었고, 역자는 엔트로피 법칙과 현대문명비판이란 관점으로 여기저기에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좀 미흡하다 생각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겨울방학을 이용해 원서의 첫줄부터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고쳐 쓰게 되었다.


5. 나치의 손에서 먼저 제조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수행된 미국의 원자탄 개발의 ‘맨하탄 계획’. 히틀러 패망 뒤에도 이 계획은 계속되어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되었고, 그 후 연구는 줄기차게 대형 전략 핵무기와 전술 핵무기의 경쟁적 개발로 이어져 왔다. ‘사용할 수 없는 무기’의 생산비로 매 90초마다 백만 불씩 투입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매년 1천 5백만 명이나 굶어 죽는 것이 지구상의 엄연한 현실이고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벌이는 온갖 행태에 회의가 일지 않을 수 없다.


6. 다니엘 벨의 예언대로 이제 우리는 후기 산업 사회로 진입하여 정보화 사회를 맞고 있다.


 <엔트로피>의 저자 리프킨도 그런 관점에서 현대문명 비판의 대열에 서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열역학의 엔트로피 법칙을 도입하여 현존의 기계적 패러다임이 왜 붕괴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해 준다.


역사상 사회 체제의 변환은 자원의 고갈이나 풍요 때문에 일어났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축적된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해서 주위 환경의 에너지원에 변화가 일어날 때 역사는 중대한 분수령에 이르게 된다. 이때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제도와 함께 기술이 생기게 된다.

                                                                   


제1장 세계관


 14. 현재 우리들의 세계관은 약 400년 전에 형성되어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되어 왔다.그러나 그것은 초기의 개념을 다분히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17세기 뉴턴주의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world machine paradigm)'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15.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기 때문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그 형태만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바뀔 수 있음을 천명한다. 즉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얻을 수 있는 형태로부터 얻을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로부터 질서가 없는 상태로만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의 삼라만상은 질서가 있고 가치가 있는 상태로부터 무질서하고 가치가 없는 혼돈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우주의 어느 계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얼마나 변형되었는가에 대한 척도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지구의 어디에선가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그 주위 환경에서 그보다 더한 무질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를 진보라고 보는 관념을 무너뜨릴 것이며, 과학과 기술이 보다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믿음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뉴턴의 세계 기계(world machine)가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대치했을 때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현재의 세계관을 대치하게 될 것이다.

                                                               

16.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으로, 마치 낯선 땅을 헤매는 나그네처럼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될 것이다. 원래 타고난 세계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연스럽지 못하고 일상 생활 속으로 쉽게 침투되지 않는 외국어를 수용하듯이 새로운 엔트로피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의 손자 대에 이르면 엔트로피적 세계관은 제2의 본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세계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세대가 역학에 미쳐왔던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의 다음 세대는 엔트로피 법칙의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거기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17. 엔트로피 법칙 안의 모든 것이 유한하고, 모든 생물이 결국은 그 운명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물리적인 세계에만 적용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 문명이 그 물리적 실체를 조직화하는 방식과 존재의 물질적 차원에 부여된 중요성의 정도는 정신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여건을 결정짓는다. 세계관이 삶의 물리적 측면에 기울수록 정신적 초월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약화된다. 문명이 물리적 세계에 덜 얽매여 있을수록 인간은 총체적으로 물리적 차원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심오한 영적 진수를 누리게 된다.

                                                                    

19. 그리스 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지속적인 붕괴의 과정이었다. 로마인 호레이스(Horace)는 “시간이 세상의 가치를 소멸시킨다.”라고 읊었다. 호레이스는 열역학의 제2법칙이란 것을 몰랐으나, 이 시에서 엔트로피 법칙의 진수를 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 역사는 5단게의 일련의 과정으로 표현되며 각 단계마다 줄곧 앞서의 것에 비해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스의 사학자 헤시오드 (Hesiod)는 이들 시대를 각기 황금시대, 은 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기 시대라 묘사한다. 황금시대는 풍요와 충만의 시절로서 그리스 절정기였다.


20. 일반적인 견해와는 상반되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종족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음식물은 영양가가 높고, 부시맨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이 약을 먹지 않고도 60세를 넘게 살고 있다. 대부분의 수렵 사회는 협동과 공유라는 방식을 잘 꾸려 나가고 있으며, 상호 또는 외부 부족과 싸우지도 않는다.


21. 그리스 사람들은 세계가 신성((神性) ; the Deity)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완전하다고 믿었으나 불멸의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세계는 그 속의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황금 시대의 온전성에서 사물의 원초적 질서를 유지했으나 그로부터 출발하여 차츰 붕괴되는 과정이 이어진다. 결국 우주는 궁극적인 혼돈 상태에 이르게 되며, 이때 신성이 다시 개입하여 원래의 온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면 전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역사는 온전성을 향한 누적적 진전과정이 아니라, 질서로부터 혼돈에 이르는 끊임없는 반복되는 순환 과정으로 간주된다.

                                                     

22. 중세를 통해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오로지 내세를 위한 준비 단계로만 보았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순환이라는 그리스적 개념을 버리고, 붕괴하는 과정이라는 개념만으로 역사를 파악했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역사는 시작, 중간, 종말이 명백하게 창조, 구원, 최후 심판의 형태로 못박혀져 있다. 인류 역사는 순환성이 아니라 선형적인가 하면, 또한 완전한 상태를 향한 지향적인 것도 아니라고 믿어졌다.


23. 또한 중요한 것은 원죄설이 인간이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막아버렸다는 점이다.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결국 중세의 세계관은 유일신이 만사를 주관하는 빈틈없이 짜여진 구조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일생의 만사를 주관하는 인격신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하는 것은 모두 신의 뜻이라 여겨졌다. 즉, 신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목적이나 성취욕, 또는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없었다. 충실히 지켜야 할 신의 계율만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통합적, 포괄적 역사관을 제공했다. 때문에 이 거대한 신학적 체계에서 개인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의 목적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24. 역사에 남을만한 강의-소르본의 역사 교수였던 튀르고(Jacques Turgot)


1750년 그는 파리의 한 강의실에서 세계사에 관한 새로운 개념에 대해 라틴어로 강의를 하였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바울,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고대와 중세의 기라성 같은 모든 지성들에 대해 다루었다. 강의의 마지막 말을 마치고 강의 노트를 가방에 넣는 그 순간 그는 세계사의 전체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 강의를 지켜보았던 마뉴엘(Frank Manuel)은 그 강의가 “태고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으며,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 최초의 중대한 사건을 기록했다.”라고 표현하였다.


튀르고는 역사의 순환성과 지속적인 붕괴의 개념을 모두 거부했다. 그는 역사는 직선적으로 발전하며, 역사의 각 단계는 그 이전의 것에 비해 진보한다고 역설했다. 역사는 누적적이며 진보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정상 상태(the steady-state)를 믿은 그리스 철학자나 로마 교회의 신학자와는 달리, 그는 끊임없는 변화와 변동의 미덕을 찬미했다.


그러한 변화의 성장과 성숙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나와 당신이 물려받은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27. 우리는 기계의 독재 하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외형적 삶에서의 기계의 중요성은 인정하려고 하지만, 기계가 얼마나 깊숙이 우리 존재의 내면에까지 침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사숙고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조차도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기계의 언어가 되어 버렸다. 타인과의 관계는 ‘싱크러나이제이션(syn-chronization:連動)’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서 ‘측정’된다. 우리들의 감정이란 것도 좋고 나쁜 ‘떨림(viration)'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며, 단순한 ’자동시동기‘에 불과하다. 직장에서 일할 때 ’마찰‘을 피하라고 말하며,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 대신에 ’주파수를 맞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람의 일생을 ’잘 굴러간다‘ 혹은 ’고장났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고장난 경우라면, 우리는 재빨리 원상 회복하거나 ’재조정‘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31. 데카르트의 수학적 세계는 무미, 무색, 무취였다. 그것은 솟아나거나 떨어지거나 엎질러지지 않는다. 도대체 대수학과 기하학보다 더 간명하고 더 잘 작동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수학은 총체적 질서를 표현했고, 따라서 천재인 데카르트의 일격에, 너절하고 혼란스럽고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데카르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으며 삼라만상의 모든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계는 혼란이 아니라 정확성이다.

                                                                    

32. 뉴턴은 자연계의 만물을 수학 법칙들에 복종시켰다. 그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어떤 힘들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서, 그 근본 원인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이 힘들에 의하여 두 입자들은 서로 잡아당겨 일정한 형태로 얽혀 있거나 혹은 서로 밀어내어 두 입자가 떨어진다.”라고 주장했다.


기계적 세계관은 자연계의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 운동하는 물질만을 다룬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기계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다. 양(quantity)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질(quality)을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써, 기계적 패러다임의 제작자들은 전부가 죽은 물질로 구성되는 차갑고 무감각한 우주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순수한 물질로서의 세계로부터 곧 머지않아 순수한 유물론의 세계로 이행되었다.

 

33. 역학은 운동하는 시공(時空) 관계만을 다룬다는 것을 주목하여 화이트헤드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시공에서의 정확한 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정해지는 즉시, 여러분은 그것은 바로 저기의 위치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특정한 물체의 시공에 대한 관계를 서술할 수 있다.”

                                                                      

34. 근세 이후 내세를 위하여 헌신해야 했던 중세의 삶의 목적은 사라졌다. 대신에 현세를 온전하게 개혁하려는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었다. 역사는 이로써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로부터 뉴턴의 세계 기계로 상징되는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상태로의 발전 과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우주의 법칙들과 사회의 작용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는 일에 곧바로 착수했다. 그리하여 로크(John Locke)는 정부와 사회의 운용을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과 조화시켰고, 스미스(Adam Smith)는 경제 분야에서 그와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35. 로크는 우리가 아무 소용도 없는 습관과 미신을 벗어 버릴 때 사회는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창조하는 개개인으로 구성되며, 그 사회는 오직 하나만의 목적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목적은 사회 구성원의 재산을 증대하고 보호하는 것으로서, 로크의 생각에서는 순수한 자기 이익이 국가 형성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 로크는 계속해서 이것이 사물의 자연적 질서임을 이성은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사회는 마땅히 물질적으로 되고 개인주의적으로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풍요를 갈구하는 이러한 끊임없는 투쟁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전투구 식의 전투가 야기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 중 일부가 희생되지는 않겠는가? 로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보았는데, 그의 믿음으로는 인간은 원래 사악하거나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심한 물질적 결핍이다.

                                                                      

 36. 그렇다고는 하지만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양에는 아무 제한이 없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의 이상이 되면 재산이 오히려 행복을 거슬리는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었다. 로크의 주장은 그렇지 않았다. 원시 시대에는 자연의 한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의 양이 한정되었던 게 사실이라고 로크도 시인한다. 만약 원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그가 소비할 수 있는 이상으로 물자를 모은다면, 그 물건은 썩을 것이고 아마도 그가 사는 공동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가질 기회를 빼앗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교환의 수단으로 존재하게 된,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에 있어서는 자산을 무한정으로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이 바로 돈의 목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될 터인데, 이러한 현상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은 ‘근면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혜택을 받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장 선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37. “노동에 의하여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인류의 공동 자산을 줄이는 게 아니라 늘리는 것이다.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예로 들면, 잘 개간된 땅 1에이커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자연 상태로 방치된 1에이커의 땅에서 생산되는 양보다 10배나 많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의 땅에서 생산하는 양을 개간한 땅 10에이커에서 수확한 사람은 인류에게 90에이커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점적(點滴) 이론(trickle-down theory ; 개인이 보다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사회에 더 유리하다)’의 초기 논리를 이용하여 로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은 모름지기 가능한 대로 많은 내구재(금, 은 등)를 원하는 만큼 모아야 한다. 개인이 재화의 한계를 초과하는 것은 그의 소유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산이 사용할 수 없게 버려지는 데 있다.” 고 선언했다. 생태계에 큰 관심을 둔 현대적인 시각으로 로크의 논문을 읽으면 지극히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강에 댐이 생길 때까지, 모든 광야가 광고판으로 뒤덮일 때까지, 그리고 혈암유를 생산하여 모든 산이 전부 돌로 변할 때까지 로크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8. 로크에 의해서 현대의 남자와 여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부터 개개인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서 생산과 소비의 쾌락주의적 행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인간의 필요와 포부, 그들의 꿈과 소망, 그 모든 것은 물질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39. 로크가 사회적 관계에 대해 했던 것처럼, 스미스도 경제 분야로부터 도덕성의 개념을 완전하게 제거하였다. 스미스는 경제에 도덕성을 부과하려는 노력은 어느 것이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끝내는 거역하게 되는데,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경제적 과정을 지배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자본 투자, 직장, 자원, 생산 등을 조절하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보았다.


시장을 조절하는 데 ‘자연적인(natural)' 힘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부는 자유롭고 속박 없는 교역과 합리적이고 욕구에 찬 개인들의 경쟁을 통해 최고로 생산될 수 있다. 경제의 목적은 부단히 확장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경제적 이익 추구에 있어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그 이론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40.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 등은 17세기에 기계적 세계관(the mechanical world view)을 일반 대중에게 크게 보급시켰던 천재들이었다.

                                                                   

 41. 다윈(Charles Darwin)이 1859년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발간한 이후로 기계적 세계 패러다임은 전무후무의 성공을 거두었다.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다윈의 이론은 물리학에서의 뉴턴의 발견만큼이나 인상적이었고 과학 이론으로서 사회에 미친 영향 또한 가장 극적이었다. 그것은 기계적 세계관을 무대 중앙에서 밀어 내고, 사회에 대한 새로운 조직 원리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윈의 이론은 뉴턴의 새로운 조직 원리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윈의 발견이 내포하는 모든 의미가 진정으로 파헤쳐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 이론의 표피적인 논의만을 취하여 기계적 세계관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했을 따름이었다.

                                                                    

 42. 기계적 세계관은 수학과 과학과 기술의 세계관이자, 물질주의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계관이다. 또 그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관을 키우고 지탱해 왔던 에너지 환경이 거의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세계관의 생명력도 생기를 잃기 시작하고 있다.


                                                                     

 제2장 엔트로피 법칙(The Entropy Law)


46. 고고학자인 글루크만(Max Gluck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과학은 지금 세대의 바보가 이전 세대의 천재보다 더 우수해질 수 있는 분야이다.”


‘공짜는 없다’ 또는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울어봤자 소용없다‘ 또는 ’독불장군은 없다‘ 등의 말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이 실제 생활의 경험으로 보아 맞는 말이라고 수긍한다면, 이미 당신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셈이 된다.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일정하고,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려고 한다.


47. 에너지는 형태가 변할 수 있을 뿐이지 만들어지거나 없어지거나 할 수는 없다.


일정량의 열을 일로 바꾼다고 상상해 보라. 그 때 열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거나 또는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었을 따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자동차 엔진을 생각하여 보자. 소모된 휘발유의 화학에너지는 ‘가솔린 엔진이 한 일과 거기에서 발생된 열과 그리고 배기가스의 에너지를 합한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에너지를 창조해 낸 적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절대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에너지를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변환시키는 일이다. 모든 사물이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변환은 당연한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48. 석탄을 태운다고 할 때, 그 연소 과정에서 에너지 총량에는 변화가 없으나 에너지는 탄산가스와 그 밖의 배기 기체로 변하여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에너지의 손실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다시 그 석탄을 새로 태워서 또 앞서와 같은 일을 얻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환될 때에는 반드시 모종의 불리한 상황이 부과된다는 것은 이 법칙은 천명한다. 그 벌이란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데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손실됨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에너지의 양에 대한 척도이다.

엔트로피의 용어는 1868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에 의해 최초로 창안 되었다.


카르노는 증기 기관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려는 연구에서 중요한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전체 계(system)의 한 부분이 매우 뜨겁고 또 다른 한 부분은 매우 차갑기 때문에 엔진이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에너지가 일로 변환되려면 반드시 에너지 농도의 차이(즉 온도 차이)가 있는 부분들이 계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9. 높은 농도로부터 낮은 농도로 에너지가 옮겨갈 때(즉 높은 온도로부터 낮은 온도로) 일이 발생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에너지가 온도 차이에 따라 옮겨 갈 때마다 다음 번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 양은 줄어든다는 사실이었다.


물이 높은 곳으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물은 전기를 일으키거나 수차를 돌리거나 또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바닥에 떨어져 버린 물은 더 이상 일을 수행할 수 없다. 바닥의 물은 아주 작은 물레방아조차도 돌릴 수 없다. 이들 두 상태를 가리켜 각각 ‘사용 가능한 에너지’(available energy) 그리고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unavailable energy)'의 상태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런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가 바로 공해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해는 생산물에 대한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환경 오염이라는 것은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 형태로 변환된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총량이다. 따라서 쓰레기는 분산된 에너지이다.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다만 그 형태가 바뀔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자연계에서 에너지는 분산된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만 변환이 가능하다. 따라서 환경 오염은 엔트로피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

                                                                      

51. 태양열은 실제적으로 총량으로는 거의 무한한 양이지만 지상에 도달하는 속도나 형태에 있어서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태양 에너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소하고 있지만 그것의 엔트로피는 지구의 모든 부존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최대값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담배를 한 대 피울 때마다 그만큼 이 세상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줄어들게 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일정한 시간의 고립된 장소에서 이러한 엔트로피의 증가 과정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에너지가 사용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주위의 총체적인 엔트로피는 증가되어야 한다.

                                                                       

52. 재순환과 계속 내리쬐는 햇빛으로도 같은 양의 작물을 매년 같은 땅에서 영속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다. 오늘 풀 한 포기가 자라는 것은 미래에 그 곳에서 풀 한 포기가 적게 자람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표토도 엔트로피의 흐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표토에는 풀이 자라는 데 필요한 유기 물질과 무기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표토에도 수명이 있다.

                                                                     

54. 에너지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대해 ‘열 종말(heat death)'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사용할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물질 혼돈(matter chao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모두 엔트로피로 인한 결과이다―물질과 에너지의 분산이 그 농도를 감소시키게 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유용한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55. 한 지역의 에너지가 많고 이웃하는 다른 지역의 에너지가 적으면,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옮겨가서 결국 양쪽이 같아질 때까지 이동한다. 이러한 전과정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59. 고립된 계에서의 모든 에너지가 질서 있는 상태로부터 무질서한 상태로 에너지가 옮겨 간다고 표현하는 것도 엔트로피 법칙의 서술이다. 에너지 농도가 가장 높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최대인 상태가 최소의 엔트로피 상태이며 또한 가장 질서 있는 상태이다. 반면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분산되고 흩어져 있는 상태는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이며 최고로 무질서한 상태이다.


60. 앙그리스트(Angrist)와 헤플러(Hepler)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이나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국부적인 엔트로피 감소는 주위의 엔트로피를 그 이상으로 증가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결국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1. 그 내용이 단순할수록 이론은 더 훌륭하며, 관계 있는 사물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이론의 적용 범위는 다 넓어진다. 그런 점에서 고전 열역학은 나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이것만이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내용의 유일한 물리학 이론으로서, 그 기본 개념의 적용성의 테두리 안에서 결코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62. 2년 후에 헬름홀츠(Helmholtz)는 엔트로피 법칙에 근거한 표준적 우주 이론을 제안하였다. 그의 ‘열 종말(heat death)' 이론은 우주가 점차로 붕괴되어 끝내는 최대 엔트로피 상태, 즉 모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일어나지 않게 될 열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우주의 열 종말은 바로 우주의 영원한 정지 상태에 해당된다.


오늘날 우주의 기원과 발달에 관해 가장 널리 수용되고 있는 이론은 ‘대폭발(big bang) 이론’이다. 레마트르(Canon Gedrges Lemater)에 의해 최초로 개념화된 대폭발 이론은 엄청나게 농축된 에너지가 외부로 팽창함에 따라 차츰 식으면서 은하계, 별, 행성들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계속 팽창되고 점점 분산됨에 따라 우주는 점점 그 질서를 상실하고 결국은 최대 엔트로피 상태, 즉 열 종말의 최후 평행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대폭발 이론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에 부합되는 이론이다. 그것은 완전한 질서에서 출발한 우주가 그 생성 이후 점점 무질서한 상태를 향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이론이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연하다. 고대 그리스와 중세 기독교 문명의 역사관도 우주 역사의 이러한 개념과 비슷하다.

                                                                     

65. 에너지가 항상 사용 가능한 상태로부터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항상 미래로만 흐른다.


66. ‘세계의 시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사건이 하나하나 차례대로 일어나는 것으로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서든 시간이 일어날 때마다 이 세상의 에너지는 소비되고 총체적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세계에서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는 말은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딩턴은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라고 표현했다.


엔트로피 법칙의 진실을 무시한 뉴턴 역학으로부터의 현존 패러다임은 시간이 자연의 작용과 관계가 없는 자동적인 과정이라는 환상을 심어 왔다. 자연으로부터의 격리라는 이러한 생각은 세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조직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67. 자연계의 모든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치가 있는 유용한 것으로 변환시킬 때까지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로크와 그 밖의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건축가들은 세계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전진한다’ 고 주장했다.


 시간과 역사에 관한 시간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진짜 양은 사용되어 버린 에너지의 양을 그대로 나타낸다. 우주에서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수록 일어나는 사건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것은 ‘실제’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 종말의 최후 평행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소비되면 될수록 장차 일어날 일의 수효는 줄어들고, 따라서 세계에 남겨진 시간은 짧아진다. 보다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시간은 결코 절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에너지를 많이 사용할수록 우리는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한 셈이 된다.

                                                                     

68. 시간의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 제2법칙은 인간의 행동 영역을 제한한다. 우리는 결코 시간이나 엔트로피 과정을 역전시킬 수는 없다. 이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엔트로피 과정이 진행되는 속도는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행한 모든 행동은 엔트로피 과정의 속도를 가속시키거나 또는 이완시킨다. 우리의 선택으로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의 유용한 에너지가 얼마나 빨리 분산되는가가 결정된다. 과학이 형이상학과 윤리학 분야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점이다.

                                                                      

69. “유기체의 생성으로 나타난 국부적인 미소한 엔트로피 감소는 우주 엔트로피의 더 큰 증가가 수반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모든 식물과 동물의 생명은 그 존속을 태양에 의존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의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의 말을 빌리면, “주위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계속해서 취함으로써 모든 생물은 살아간다. ……유기체가 먹고사는 것은 바로 음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이다. 생물은 주위로부터 지속적으로 질서를 흡수한다.”


70. 우리 인간들이 생각을 하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때나 항상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인간은 죽음의 평행 상태로 분산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유 에너지(음의 엔트로피)를 주위로부터 흡수해야 한다.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시체를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죽은 지 몇 시간만 지나도 시체는 완전한 혼돈의 상태로 분산되기 시작한다.

                                                                   

71.“모든 생명체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라고 러셀은 말했다.


화학자인 밀러(G. Tyler Miller)는 핵심을 잘 보여주는 간단한 먹이사슬을 제시하였다. 그 사슬은 풀, 메뚜기, 개구리, 송어 그리고 사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해 에너지의 손실은 없다. 그렇지만 제2법칙에 따르면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먹이사슬의 각 단계마다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바뀌고 따라서 전체 환경은 더 무질서를 겪게 된다. 이것은 정확하게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메뚜기가 풀을 뜯어 먹고, 개구리고 메뚜기를 잡아먹고, 송어가 개구리를 잡아먹는 등의 먹이사슬의 각 단계마다 거기에는 에너지의 손실이 따른다.


밀러의 계산에 의하면, 먹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80 ~ 90퍼센트의 에너지는 그저 낭비되어 열의 형태로 주위 환경에 버려진다’ 얻은 에너지의 10퍼센트로부터 20퍼센트 정도만이 먹이사슬의 다음 단계로 이전된다. 다음 단계의 생물이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서 죽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각 종의 숫자를 생각해 보자. ‘한 명의 사람이 일년을 살기 위해서는 3백 마리의 송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3백 마리의 송어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필요로 하고 그들 개구리는 2천 7백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이들 메뚜기는 자그마치 1천 톤의 풀을 먹어야 한다.’


72. 그러므로 한 사람이 고도의 ‘질서 상태’를 일년 동안 유지하려면 메뚜기로 따져서 2천 7백만 마리, 풀로는 1천 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생명체는 어느 것이나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보다 큰 무질서(에너지 분산)를 주위 환경에 조성한다는 사실에 어떻게 의문이 있을 수 있는가?


유기체는 그 환경으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축적하는 것에 의해서 살아간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생물이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치를 얼마나 잘 갖추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에너지 흐름과 생물학적 진화를 최초로 관련지었던 사람은 생물학자인 로트카(Alfred Lotka)였다. 그는 생물계의 종은 각기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사용하는 다른 형태의 변환기(transformer)로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73. 우리는 생물학상의 진화를 진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매우 익숙해 있다. 우리는 이제 진화의 사슬에서 고등한 종은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 가능한 것으로부터 불가능한 상태로 변환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고등한 종일수록 에너지의 변형기도 우수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이 에너지 유통이 증대된 체계는 그 주위에 더 큰 무질서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진화는 생명에 필요한 지구상의 사용 가능한 전체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진화가 마술처럼 지구상에 더 큰 가치와 질서를 창조한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점점 더 무질서해지고 분산됨으로써 우리의 무지한 눈에도 확실하게 보인다.


74. 진화는 점점 더 큰 무질서의 바다를 만드는 대가로 점점 더 큰 질서의 섬을 창조하는 것이다.


제2법칙이 생명과 진화의 참된 기초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인식할 때까지는 우리는 현재의 식민 단계로부터 절정 단계로의 이행을 이룩할 수가 없을 것이다.

                                                                    

77. 과거 수백 년 동안에 정치 및 경제 철학자들에 의해 저술된 수많은 논문들을 읽으면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연 법칙, 사회 계약, 생산 방법의 논리, 권력의 속성 등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을 뿐 에너지의 흐름이나 엔트로피 법칙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이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과학적 이론으로 체계화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의 믿음을 변명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도 제2법칙이 공식화되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2법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였고, 나아가서 그 핵심 진리를 그들의 문명과 세계관에 통합시켰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그 영향을 모든 학문 영역에 미치기 시작하면 정치학자와 경제학자 가운데 다수가 상당히 불편해질 것이다. 앞으로 몇 년 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정치학이나 경제학에서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왔던 근본적 개념들에 극적인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제3장  엔트로피 - 새로운 역사의 틀


(Entropy - A New historical frame)


83. 세계의 총체적 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하고 있다. 사용 가능한 에너지 양은 항상 줄어들고 있다. 인간의 생존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점점 악화되는 환경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따라서 인간 생활은 유지하기가 점점 더 벅차게 됨을 의미한다. 악화된 에너지 환경에 의해 추가되는 일을 사람들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처리할 수 없게 됨으로써 결국 더 복잡한 기술이 도입되어 인간의 존재를 가까스로 유지하게 된다.


84. 기술에서 주요한 진전이 일어나면, 계를 통하여 에너지를 추출하거나 흐르게 하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가속된다. 그런데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다만 한 방향 ― 사용 가능한 상태로부터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 으로만 변화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이른바 효율의 증진 ― 에너지의 흐름을 촉진시키도록 설계된 기술에 의해 측정된 증가 ― 은 오직 에너지의 분산과 세계의 무질서도를 촉진시킬 따름이다.

                                                                  

 85. 현재 믿음과는 정반대로 효율은 일의 감소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일이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해 버리는 것일 뿐이다. 현대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백만 년 전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에너지 양의 수천 배를 ‘없애 버린다.’  일이란 사람의 근육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로 행해지기 때문에 ‘적은’ 양의 일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문제는 항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엔트로피 분수령이 얼마나 빠르게 또는 얼마나 느리게 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환경과 정상 상태로 조화를 이룬 문명들은 세계를 닫힌 계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들이 채우고 있으며, 그 계로부터 도저히 도피할 수가 없는 그런 계이다. 그들에게는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2의 천성이었던 것이다.

                                                                 

86. 오늘날의 개척자 정신은 우주로 눈을 돌릴 열광자들에게 강하게 살아 있어서, 그들은 다른 행성을 정복하고 개발함으로써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달성될 수 없다. 6일 동안에 태어나는 아기들 수만큼 우주로 내보내는 데에도 일년 동안의 GNP가 모두 투입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구와 비교될 만한 기후 조건을 가진 행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가깝다 하더라도 아마도 10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을 것이고, 현재의 기술로 이 정도의 거리를 달리는 데는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것이 천문학자들의 주장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리라는 아무 보장도 없다.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들로부터 주요 자원을 채굴해서 지구로 가져온다는 생각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지구상의 자원을 캐는 것도 가격 때문에 이미 곤란을 겪고 있는 판국에, 지구에서 필요한 자원을 가진 행성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캐고 운반한다면 그 가격은 너무 엄청나서 상상도 못할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88. 대부분의 교과서는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을 인간 정신의 일대 각성으로 보고 있어, 마치 수백 년 동안 어떤 기이한 이유로 인해 인간 정신이 사고하는 것을 멈추고 그저 동면했던 것처럼 다룬다. 학자들은 종교 개혁의 의미,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의 대두, 교역로의 개척에 따른 개방화 등에 관해서는 여러 갈래로 논하였지만, 이들 변화의 바탕에 깔린 근본적 원인에 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걸쳐 서부 유럽은 엔트로피 분수령을 맞고 있었다. 중세식 생활 방식의 기본적인 에너지였던 삼림 자원이 차츰 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이러한 부족 현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새로운 대안의 추구는 결국 나무를 석탄으로 대치하게 만들었다. 나무에 기초했던 에너지 환경이 석탄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자, 서부 유럽 사회의 생활 방식은 그 전체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무로부터 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은 중세 시대의 붕괴와 산업 혁명의 출현의 배경이 되는 주요 원인이었다.

                                                                  

 90. 땅이 비옥했던 북부 유럽에서는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농지의 수확량을 늘려야만 했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전통적인 2포 농법은 3포 농법으로 대치되기에 이르렀다. 2포 농법에서는 비옥도를 재생하기 위해서 토지의 반을 항상 놀리게 된다. 3포 농법에서는 매년 토지의 3분의 1만 놀고 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몇 가지 이로운 점이 생긴다. 첫째, 토지의 생산량이 3분의 1이 증가된다. 둘째, 쟁기질을 해야 할 땅이 9분의 1로 감소한다. 물론 3포 농법의 이러한 단기적인 이익의 결과는 2포 농법에 비해 토양을 보다 빠른 속도로 쇠퇴시키게 된다. 토지의 이용이 증가되는 것에 의해서 3포 농법은 땅의 에너지 분산을 가속시켰고 엔트로피 과정을 재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3포 농법은 소 대신에 말을 부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말은 소보다 2배나 빨리 일을 하지만, 건초뿐만 아니라 곡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이다. 3포 농법에 의해 제공된 잉여 농산물 덕택에 농사일을 하는 말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효율적으로 작업시키는 데는 세 가지 기술적 향상이 요구되었다. 11세기경에는 근대적인 말의 굴레가 만들어졌고 말굽이 발명되었으며, 말을 세로로 세우는 방법(tandem harnessing)도 완성되었다. 이들 세 가지 기술, 진보 덕분에 한 무리의 말들이 무거운 쟁기를 끌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밭갈이 속도가 놀랄만큼 빨라지게 되었다.


91. 기술의 이러한 고도화는 에너지 흐름, 인구의 증가, 그리고 엔트로피 과정을 촉진하고 있었다. 14세기 중엽쯤에는 드디어 분수령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 때문에 에너지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토양의 척박화와 삼림 고갈의 심화는 서북부 유럽 지역의 인구 문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12세기 풍차를 사용함으로써(수차를 더 많이 사용하여) 이전에는 경작할 수 없었던 땅을 농토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림을 더욱 황폐시키고 인구를 더 증가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먹여 살려야 할 도시 인구의 증가는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도시는 11세기 잉여 농산물의 교환 장소로서 출발하였다. 이제 농산물보다 인구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자, 거래할 잉여 농산물이 없어졌고 따라서 도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전체 조직이 한꺼번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기초로 하는 시대로의 전환기에 이른 것인데, 그런 전환기는 부분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92. “원자재로서, 기구로서, 기계로서, 가사 도구로서, 땔감으로서, 최종 생산품으로서 나무는 주된 산업 자원이었다.”


경작으로 인해 삼림이 자취를 감추어 나무의 공급이 줄어들게 된 데다가,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자 나무의 고갈은 더욱 심화되었다. 예컨대, 새로운 유리 산업과 비누 공업의 발달은 다량의 나무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나무의 가장 큰 수요처는 철의 생산과 선박의 제조였다. 16세기 그리고 17세기 초엽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삼림 위기가 극에 달하게 됨으로써, 왕실은 벌목에 대해 규제하는 법까지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630년대에는 나무 값이 15세기 말에 비해 무려 2배반이나 뛰었다.


나무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석탄이었다. 한 종류의 에너지 기초를 다른 종류의 에너지 기초로 대치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유럽 문명은 나무 기초의 골격으로 완성되어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변환은 생활 방식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 놓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돌아다니는 방식, 옷 입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정부가 통치하는 방식 등등 ― 이 모든 것이 온통 뒤바뀌게 되었다.                  

                                                                     

 93. 오늘날 우리는 나무 대신에 석탄으로 대치한 사실을 일대 약진으로서, 발전의 원동력에서의 승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입시키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석탄은 열등한 에너지원으로 취급되었다. 석탄은 더러웠고 많은 오염을 야기시켰다. 1631년 하우스(Edmund Howes)는 “보통 사람들은 석탄으로 불을 지필 수밖에 없고, 귀족들의 방조차도 석탄으로 불을 때야만 한다니…….”라고 한탄하고 있었다.


석탄은 나무보다 캐어 내고 처리하기가 훨씬 어려웠으며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 이유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다시 한 번 발견된다. 세계의 유용한 에너지는 끊임없이 분산되고 있다. 사용하기 가장 수월한 에너지가 제일 처음에 사용되게 되어 있다. 다음 단계로 올라갈수록 처음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원으로 넘어간다. 석탄을 채굴하고, 만들고 하는 것은 땅위의 나무를 베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유정을 뚫고 원유를 채굴하는 것은 석탄의 경우보다 더 어렵고, 원자력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원자를 쪼개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94.「가난과 진보(Poverty and Progress)」에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은 인간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인간은 그가 의존하는 자원과 그 자원을 활용하는 데 썼던 방법을 끊임없이 바꿀 수밖에 없었다.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부터 차츰 이용이 어려운 자원으로 바꾸어 감에 따라서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공정과 생산기술을 사용하게끔 되었다. …… 광범위한 생태학적 맥락에서 보면, 경제 발전은 자연 환경을 보다 심하게 착취하는 방법에서 발전이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좀더 나은 방법을 개발했다는 이유로 역사상 사건을 진보의 대약진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다.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닌 다른 것의 에너지로 행해지지만,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이전의 방법에 비해 결국은 더 많은 일(혹은 에너지)을 소비하게 된다’고 윌킨슨은 주장하였다. 증기 엔진의 개발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산업혁명에 관해 배울 때 왓트(James Watt)라는 총명한 젊은이가 작업장에서 어느 날 수선을 하다가 증기 엔진이라고 하는 작은 발명품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순식간에 산업 시대가 열렸던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대인 기원전 3세기 헤로(Hero)가 증기엔진을 고안했지만 그저 궁중에서 귀족들의 장난감으로만 여겨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전혀 들은 적이 없다. 고대 그리스 당시에는 많은 노예들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증기 엔진을 동력원으로 이용한다는 발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95. 근대의 증기 엔진은 석탄의 채굴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었고 또한 최초로 그렇게 사용되었다. 채탄 과정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땅 밑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광산을 환기시키고 축축한 석탄을 끌어올리는 것이 차츰 문제로 대두되었다. 17세기에는 광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정도까지 깊게 파 들어가자 물이 나왔고, 따라서 공정에서 배수 작업이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 엔진이었다. 최초의 증기 펌프로 1698년 세이버리(Thomas Savery)가 특허를 얻었다.


채탄에 사용되었던 증기 펌프는 새로운 석탄의 환경으로부터 곧바로 출현했던 수많은 기계적, 구조적인 발명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석탄을 캐는 문제가 증기 펌프의 도입으로 해결되자, 곧 마찬가지로 중대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은 무거웠기 때문에 말이 끄는 마차로 장거리를 수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의 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석탄 마차의 무게 때문에 길은 엄청난 바퀴 자국으로 뒤덮여 비가 올 때에는 진흙탕으로 되어 운반이 거의 불가능했다. 동시에 석탄 수송용 말들을 유지하는 것에도 차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경작지가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말먹이와 사람 식량을 다 생산할 수가 없었다.


96. 이러한 수송 위기는 증기 기관차의 발명과 철도의 부설로 해결 국면에 들어갔다. 증기 펌프와 마찬가지로 증기 기관차도 석탄의 환경에 의해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다. 이와 같은 증기 펌프와 증기 기관차의 협동은 이후의 산업 시대의 기술적인 바탕이 되었다.

                                                                    

 97. 합성 섬유의 경우는, 동물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비교해 볼 때, 석유를 채굴하여, 거대한 공장에서 화학적인 공정을 거치는 등등 엄청난 양의 일(또는 에너지)이 소모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발전’이라는 것의 실체이다.

                                                               

 98. 인류의 천재들이 구상했던 모든 기술은 자연의 저장고로부터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기술은 결코 에너지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술은 오직 현존하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해 버릴 따름이다.


99. 오늘날 기술이 경이롭고 인상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열역학의 제1법칙과 제2법칙 내에서 작동한다.

                                                                     

105. 기술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힘을 가진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에너지의 변환기일 뿐이다. 따라서 굉장한 기술에서의 주요 돌파구는 에너지원의 질적 변화가 잇을 경우에 탄생한다.


109. 무질서에는 일반적으로 세 종류가 있다. 에너지가 여러 가지 재화나 용역으로 변형되는 결과로 생기는 것, 개인과 집단 간의 에너지의 교환으로부터 생기는 것, 에너지 쓰레기의 폐기로부터 생기는 것 등이다.

                                                                  

111.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나 엄청난 정부기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비되는 비용을 조사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운영에는 더 많은 에너지(또는 일)가 소비되는 한편, 거기서 얻어지는 성과는 차츰 더 감소되는 것을 보게 된다. 문화의 에너지 흐름을 촉진하도록 설립된 제도들이 일종의 기생충처럼 에너지의 대부분을 먹어치우게 된다. 전체 에너지 흐름이 느려지고 따라서 그 사회는 위축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복합적 제도들조차도 필요한 에너지를 얻지 못하여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이 시점에 이르면 전체 조직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 사회는 점차로 다른 국가나 내부적 소요 또는 혁명에 의하여 정복당하기 쉬워진다.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극동 지역의 수리 문명의 흥망이 모두 다 위에서 언급한 과정들은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문명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다.

                                                                

112. 기계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계가 간단할수록 부품 개수도 작고 고장도 덜 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간단한 기계일수록 더 융통성이 있어서 변동 상황에 잘 대처해 갈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사회는 기능들이 지극히 전문화되어 있어서 어떤 부분 하나가 작동하지 않으면 전체가 모두 위협을 받는다.


113. 1965년 9월 9일, 약 3천만의 미국인들은 극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단 한 가지의 작은 기능이라도 작동하지 않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직접 체험했다. 그 날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발전소의 조그만 계전기가 오후 늦게 고장났다. 몇 분 이내에 미국의 동북부 거의 전역에 정전사태가 벌어졌다. 수천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와 지하철에 갇혔으며 모든 신호등의 불이 꺼지자 교통 혼잡은 극에 달했다. 밤이 시작되자 이곳은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빛도 없었고, 열도 없었고 기술 사회에서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장비들도 작동하지 않았다.


일상 생활에서도 이처럼 극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비슷하게 절실한 상황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게리 시에서 철강 파업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덴버 시에 있는 백화점 점원도 영향을 받아 해고될는지 모른다. 철강이 없이는 자동차 회사가 차를 생산해 낼 수 없다. 3대 자동차 회사가 문을 닫거나 생산을 줄이게 되며, 이들 회사에 플라스틱에서 유리까지 많은 부속품을 납품하던 하청 회사들이 생산을 줄여야만 한다. 직장 중에서 6분의 1이 자동차 산업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몇 주일 이내에 경제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대중의 구매력은 감퇴하게 되고 그 결과 덴버 시의 백화점 점원도 해고될 가능성이 커진다.

                                                            

 114. 매일매일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전문가의 한계성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직업 사전」에는 미국 내에 존재하는 2만 종 이상의 전문직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바야흐로 전문화의 세상에서 점점 더 좁은 분야에 대하여 점점 더 깊이 알도록 되어 있다. 필경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에 대해서 거의 다 알게 될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과도한 전문화는 한 종을 멸망케 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한 종이 특정한 형태의 생태계에서 과도하게 전문화되면, 그 종은 환경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전환에 필요한 융통성과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과도하게 전문화되어 있고 현존 에너지 환경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에너지 양식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는데 필요한 융통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제4장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Nonrenewable energy and the approaching entropy watershed)


120. 중독! 미국의 에너지 습관을 이와 달리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 그에 관한 통계 숫자는 놀랄 만하다. 세계 인구의 6퍼센트밖에 안 되는 미국이 세계의 에너지를 3분의 1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122.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미 당면하게 된 범세계적인 에너지 문제 ― 결핍, 엄청난 가격, 축적되는 공해와 폐기물 ―를 생각할 때, 각 국가와 전 세계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코 예상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냉혹한 현실은 우리가 ‘사용 가능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바닥내면서 엔트로피 분수령에 위험하게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환경보고서> 출간으로도 잘 알려진 생태학자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은 그의 저서, 「29번째 날(The Twenty-ninth Day)」에서 이렇게 추산하였다. 이 세상에는 미국인 한 사람 당 약 500배럴 정도를 나누어 줄 정도의 원유가 남아 있다. 원유 1배럴을 정제하면 약 24갤런의 가솔린이 나온다. 따라서 1갤런 당 10마일을 가는 차를 사용하는 미국인이 1년에 평균 1만 마일을 주행한다고 하면 12년이면 자기 몫에 해당하는 기름을 다 써버리게 될 것이다.

                                                                  

126. 국립과학아카데미(NAS ;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의하면, ‘21세기 화석연료로부터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을 제한하는 주된 요인으로는 방출되는 탄산가스에 의해 기후 변화를 들 수가 있다.’ 석탄 사용을 증대시키면 엄청난 양의 타산 가스가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탄산가스는 우주로 방출되는 복사열을 차단하여 ‘온실 효과’가 야기된다. 2050년 이내에 공기 중의 탄산가스 양은 2배가 넘게 될 것이라고 NAS는 보고하였다. 그 결과, ‘지구의 중간 위도 부근에서는 3 ~ 6도가 올라가고 지구의 양극 부근에서는 9 ~ 12도 정도 기온이 상승될 것이다. 기온의 변화가 식물과 동물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생태계의 평형은 심하게 변화될 것이다. 한편, 극지대의 얼음이 녹아내려 해면의 수위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질 것이므로 거의 모든 항구가 물에 잠기게 될 것이다. 온도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현존하는 식물과 동물 등 종(種)의 다수가 거의 멸종될 것이다. 보고서에서 결론지은 75년 이내라는 시간 제한 때문에 환경에 적응해 볼 가능성도 거의 없다(이럴 정도의 엄청난 온도 변화에 식물이나 동물이 적응하려면 수백만 년이 걸린다)                     

                     

130. 핵 반응로는 1기 당 원자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매년 400에서 500파운드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 내의 반응으로는 전부 합쳐서 매년 40개의 원자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20년 이내에 2만 개의 원자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20년 이내에 2만 개의 원자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플루토늄이 국가 사이에서 거래될 것이다. 이 물질의 안전성을 보장할 길은 없다. 이미 700파운드의 플루토늄이 반응로나 창고에서 사라졌다. 원자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은 이제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할 때, 플루토늄의 이러한 생산은 일반 사람이 원자탄을 제조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높여 주고 있다. 미국의 기술 평가국(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이 조사한 연구보고서 ‘핵전쟁의 영향(The Effects of Nuclear War)'에 의하면 비교적 작은 테러용 폭탄으로도 도시 하나를 완전히 파괴시킬 수 있으며 인간의 허용 노출량의 수천 배에 해당하는 방사선을 방출시킬 수 있고 교외에 죽음의 재를 뿌릴 수 있다. 구태여 폭탄을 터뜨려 죽음이나 상해를 입힐 필요도 없다. 만약에 플루토늄을 도시 공기 중에 분산시키는 경우, 전지역은 10만 년 동안 방사능으로 오염될 것이다.


131. 그리고 핵 폐기물을 폐기하는 문제 또한 아직까지도 미해결 상태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핵 에너지의 연구 개발에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 수십 억 달러를 들여 발전소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계나, 에너지 회사나 정부, 어느 쪽도 방사능 폐기물을 어떻게 완벽하게 처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핵 폐기물 처리 문제를 다룬 NAS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하버드 대학의 하베이 브룩스(Harvey Brooks)는 이렇게 말했다. “원자력 에너지는 결국에 가서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이유는 주로 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기인될 것이다.”


1976년 말에는 3천 톤의 사용된 연료봉이 미국의 원자핵 저장소에 축적되었으며, 1983년에는 1만 3천 톤에 이르렀다. 고체 폐기물 ― 오염된 옷이나 기구들 ―의 처리도 큰 문제이다. 70년대 말의 미국의 방사능 고체 폐기물은 1천3백만 입방 피트였고, 그 속에는 2천2백 파운드 플루토늄이 포함되었다. 2천 년까지는 1억5천2백만 배럴의 액체 폐기물이 생길 것이라고 원자력 산업에서는 예상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양의 폐기물을 ‘안전하게’ 묻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 나와 있지만, 이 독성 물질을 수천 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을 보장하는 방법은 마땅한 것이 없다. 전반적으로 핵분열 반응의 제반 안전성에 대한 확실성을 보증하는 기술은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 중에 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는 겨우 200년이고, 인간 문명의 역사도 겨우 수천 년에 이를 따름이다. 인간 역사보다도 더 오랜 시간 동안 보관할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135. 모든 원자력 산업기술은 버터를 자르는 데 전기톱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다.

                                                                

137. 사회를 통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흐름은 재생 가능한 자원의 소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과 어류는 지속적으로 증식하는 유기체이지만, 매년 이러한 자원의 소비 속도는 증식 속도보다 더 빨리 증가하고 있다. 높은 엔트로피 계는 재생 가능한 자원을 사실상 재생 불가능한 자원으로 될 정도까지 사용해 버린다. 화석연료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나무, 물고기, 풀, 농작물에 의존하여 에너지를 흐르게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들 자원의 생산성은 절정을 지나서 차츰 감소하고 있다. 세계적인 삼림 생산성은 1967년 이래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어업은 1970년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이제는 전통적인 어장에서 물고기가 거의 사라지는 실정이다. 1인당 곡물 생산량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농업도 1976년이 최고였다. 목축에 있어서 1인당 양모, 양고기, 쇠고기(모두 풀에 의존하고 있음) 생산량은 모두 감소 일로에 있다.

                                                                


제5장 엔트로피와 산업 시대


(Entropy and the Industrial age)


-경제학

145. 미국 내 최고의 에너지 전문가인 베리 코머너(Barry Commoner) 박사에 의하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모든 에너지 자원은 동질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재생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게 복잡한 ― 때로는 두 가지 모두 ― 기술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에너지는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제품을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 기업의 자유 시장 체제 하에서는 가격이 점차로 상승한다.


 코머너는 엔트로피 법칙이 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는 통계를 지적해 보였다. 에너지 생산에 투자한 매 1달러마다, 1960년에는 2,250,000BTU의 에너지를 생산했다. 1970년에는 1달러당 2,167,000BTU의 에너지를 생산했으며, 3년 후인 1973년에는 겨우 1,845,000BTU의 에너지를 생산했다. 그러므로 13년 동안에 ‘에너지 생산에 있어서, 투자비용의 생산성은 18퍼센트나 감소했다.’(이 자료는 인플레이션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서 1973년을 기준으로 재조정한 것이다.)                                                                       


148. 이미 앞에서 기본 필수품의 가격 상승에 의해 소비자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보았다. 봉급 생활자도 영향을 받는다. 임금은 올라가지만 생활비 상승과 같은 보조로 실질 구매력이 따라서 증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76년의 평균 주급은 1971년의 수준 이하이다(소비자 물가지수를 감안하여).’ 다시 말해서 임금과 실질 구매력의 차이에 해당하는 돈은 에너지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임금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그 과정은 이러했다. 에너지 흐름의 출발 단계부터 비용이 증가하면서 에너지가 관련되는 다른 모든 경제 제도에 그 비용을 전가하게 된다. 증가된 비용을 보상하기 위해, 추출에서 산매에 이르는 전 과정의 경제 제도는 이익 수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임금을 줄인 그 결과 ‘실질’ 임금은 떨어지고 실질 구매력도 떨어진다. 실질 구매력의 감소는 소비자가 자신의 필요한 에너지 ― 식품, 의류, 위생 등 ―를 충분히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에너지 흐름이 늦어지기 시작하면 에너지 흐름을 직접 담당하는 경제 제도와 기구를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돈)가 투입되어야 한다.


소비자는 높은 물가로 고통받고, 노동자는 낮은 실질 임금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게다가, 세금 또한 에너지 흐름의 증가와 더불어 증가하는 무질서와 분산된 폐기물 때문에 올라간다. 에너지 흐름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쓰레기를 치우고 없애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몫을 납세자가 져야 한다. 대통령 환경자문위원회의 연례 보고서에 의하면, 공해 때문에 납세자가 지불한 돈은 1977년에 160억 달러였고, 이 비용은 매년 20퍼센트씩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 위원회는 1980년 10년 동안 공해 때문에 사용할 전체 비용은 3,610억 달러를 초과할 것이며, 그 대부분이 세금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149. 에너지 흐름이 설정된 방식 때문에 생기는 경제적 무질서와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비용도 결국은 납세자가 내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체제가 직업이나 소득을 분배하는 방식 때문에 개인이나 단체, 또는 계층은 에너지를 변환하고 교환하는 과정의 주변에 위치하게 된다. 주위 환경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에너지 흐름의 모든 부분에서 비용이 증가하면, 이러한 주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경제적 곤란을 느끼게 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질 때,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죄어드는 경제적 환경의 희생물로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정부는 복지 또는 다른 명목에 의해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야만 한다. 실업이란 결국 엔트로피 과정의 이면에 불과하다. 에너지 고갈이 빨라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거나 불완전한 고용 상태에 처한다. 죄어드는 경제 위기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희생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모든 기관들은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150.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체제를 수요와 공급에 대해 마치 진자의 진동에서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재조정하고 있는 역학적인 과정이라 보고 있다. 어떤 경제원론 교과서를 보아도, 경제란 수요 곡선과 공급 곡선의 주고받는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품에 대한 소비자 수요가 상승하면 상인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가격을 올린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면 수요가 감소되거나 다른 상품에 대한 수요로 이동함으로써 상인은 다시 가격을 인하하여 수요를 불러들인다 등등.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수정과 보완이 있었지만 수요와 공급의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기본 개념은 아직도 모든 고전 경제 이론의 중심에 남아 있다.

                                                                     

 152.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생산성을 단위 생산물의 생산 속도라 정의한다. 주어진 일을 가능하면 빨리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생산성에 대한 좀더 알맞은 열역학적인 척도는 단위 생산물에 대한 엔트로피의 생성이다. 몇 년 전에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연구 결과는 실제로 자동차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왜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가? 이것은 자동차를 더 빨리 만들기 위해서 소비된 것이다. 더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현대 산업 경제에서 낭비되는 대부분의 에너지는 속도 때문에 치르고 있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


153.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인간이나 기계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속도를 증가시킬 때마다 생산물의 감소되는 엔트로피와 증가되는 가치는 전체 환경의 다른 어떤 곳에 더 큰 무질서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생산성을 단위 생산물에 대한 속력으로 측정하는 한, 자원을 재화로 바꿀 때에 실제로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증가된 에너지 흐름은 더 큰 무질서나 엔트로피를 만들게 된다. 이것을 결국은 사회 전체가 갚아야 하는 부담이다. ‘서두르면 낭비가 생겨난다’ 라는 옛 속담은 엔트로피 법칙의 본능적인 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균형 예산(balancing budgets)'에 대한 논의는 사회가 생산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소비를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대체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사회 내부가 아니라 사회와 자연과의 사이에서 예산의 균형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54. 경제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 이론은 적자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생태계는 가능한 한 정상 상태(steady state)에 가깝도록 작동하고 있다(열역학 법칙에 의하면 완전한 정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낮은 엔트로피 상태로부터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변환하는 전체 과정은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유지된다. 생태계의 순환이 균형 있게 유지되도록 폐기물들을 내어놓고, 흡수하고, 다시 사용한다. 100퍼센트 재순환이라는 열역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인 상태에 가깝게 유지하려고 한다.


경제 활동은 이러한 생태계의 순환에 인위적으로 끼어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낮은 엔트로피 물질을 잠시 동안 이용하고는 높은 엔트로피 폐기물로 자연 생태계에 버리는 일이다. 사회가 낮은 엔트로피 물질이나 에너지를 이용하여 폐기물로 만드는 속도가 자연이 재생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되는 경우, 그 차이(적자폭)는 차츰 커진다. 자연이 흡수하여 순환시키는 속도보다 버려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면 주위 환경에 무질서가 쌓이게 되고, 따라서 사회는 더 많은 부대비용을 치러야 한다. 동시에 사용 가능한 물질과 에너지는 자연이 생산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고갈되어, 그 희소성 때문에 공급 가격이 올라간다. 물론 사회가 자연이 생산하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소비함으로써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차이가 차츰 더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만 그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 최선의 방도일 뿐이다. 석유와 천연 가스와 같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단 한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생태계의 고정된 자산이다.


155.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재생 가능한 자원도 생태 순환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사용함으로써 사회의 소비와 자연의 생산과의 차이는 최소화될 수 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레드릭 소디는 금세기 초반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부채는 물리학의 법칙보다는 오히려 수학 법칙을 따른다. 열역학 법칙을 따르는 부(富)와는 다르게 부채는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삶의 과정에서 소비되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매년 일정한 비율로 커갈 뿐이라서 복리법의 이자 계산이라는 간단한 수학 법칙이 따라서 불어난다.


복리법의 수학적 개념과 열역학의 물리적인 실제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결과를 경제학자인 데일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부채는 복리로 계속해서 불어가지만 실제 물리적인 부는 같은 속도로 커갈 수가 없다. ‘부의 물리적인 한계가 엔트로피의 파괴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소디의 분석을 답습하여 1980년 데일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156. 부는 부채와 같은 속도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부와 부채의 1대 1 상관 관계는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즉 부채에 대한 상환 거부나 상환 불능이 생기게 마련이다. 복리에 의한 증가는 인플레이션, 파산, 몰수와 같은 부채 상환의 반작용으로 항상 상쇄된다. 이와 같은 작용은 으레 폭력을 발생시키곤 한다.


 생산과 교환 과정의 전반에 있어서 모든 단계에는 항상 일이 수반된다. 즉 인간과 기계가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러한 에너지의 일부는 생산물로 변환되지만 일부는 소비되어 버린다. 즉 경제 과정에 단계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낭비됨을 의미한다. 경제 과정에도 2장에서 소개했던 사회일수록 경제 과정에 단계가 많아지고 따라서 더 많은 에너지가 분산된다. 그 결과로 생기는 무질서는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에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159. 17세기의 계몽적 세계관은 뉴턴 역학, 수학,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 등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둘 다 이러한 기본 개념들을 근간으로 하여 세계를 체계화하려 했다. 이런 것들의 중심 개념은 관측의 절대적인 재현성(과학적인 방법)과 모든 과정의 절대적인 가역성(보편 타당한 수학과 역학적 과정)을 믿는 개념이었다. 그렇지만 실제 세계에는 그 어떤 상황도 똑같이 재현되지 않으며 가역적이지도 않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모든 물리적 실체는 한 방향으로만 전개된다. 수학에는 모든 +T에 대응하는 -T가 존재하지만 물리적인 현실 세계에는 그러한 가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160. 과거 수세기 동안 인간이 역학, 수학, 과학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세계를 체계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실제 세계가 가역성과 재현성의 중심 가정을 증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 그가 살았던 동안 소모한 만큼 더 고갈된 세계를 남기게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높은 에너지 생산을 축복하는 것은 실제로는 지구의 한정된 에너지 자원을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짓이다. 이렇게 볼 때 국민총생산(GNP)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국민총비용(Gross National Cost)이라야 한다. 자원을 소비하면, 미래에는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도저히 또 하나의 미국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이러한 숫자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미국 하나도 유지하기가 어렵다. 전 세계가 모두 미국처럼 생산하고 소비한다고 상상해 보라! 중류 미국인 한 사람의 생활이 200명의 노예가 생산하는 양과 맞먹는 생활이라고 추정되었다.


161. 풀러(Buckminister Fuller)는 미국인 한 사람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이용하여 마치 200명의 ‘에너지 노예’를 부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자연 자원의 측면에서 볼 때, 미래 세대는 우리에 비하여 훨씬 가난할 것이다. 다음 십만 년 후에 오는 세대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름에 어떤 가격을 매길지 상상해 보라.


-농업                                                                    

164. 오늘날 29개 회사가 전체 미국 농경지의 2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농업의 경우에도 에너지가 소비될 때 일부는 생산물로 들어가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분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 미국 농부는 사용하는 에너지 양을 매년 증가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에너지 중에서 일부는 생산량을 늘리는 데 사용되었지만, 차츰 많은 양의 에너지가 주변에 버려지게 되었다. 약간 증가된 수확량으로 나타난 엔트로피의 감소는 전체 환경에 분산된 에너지 쓰레기에 의한 엔트로피 증가에 미치지 못한다. 분산된 대부분 에너지는 흩어져서 땅과 강과 호수 등을 오염시킨다. 비료에서 생기는 질산염에 의한 오염이 전체 수질 오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또한 고체 오염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 미국 농업은 여러 종류의 농작물 경작 방식으로부터 단일 농작물 경작 방식으로 변했다. 한 종류의 농작물만을 경작하는 환경은 해충에 대한 천적들이 모이기가 힘든 환경이다. 천적이 없으니까 자연히 더 많은 농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런 방법은 결코 성공적일 수가 없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처럼 많은 농업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30년 동안 해충에 의한 피해는 전체 농작물의 3분의 1 정도 수준으로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한 타당한 설명은 살포된 농약에 저항할 수 있는 유전인자를 해충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정부의 환경위원회 연례 보고서에 의하면, ‘한 종류 이상의 화학 농약에 견딜 수 있는 유전인자를 가진 해충은 305종류나 된다.’ 해충이 자꾸 농약에 내성이 강해지는 까닭에 더 독한 농약을 살포하게 되고, 새로운 농약에 견디는 해충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이 점점 정도를 더해가면서 계속된다. 농업 전문가인 퍼거슨(Deryel Ferguson)은 농약이 땅의 생태계에 미치는 장기적인 효과는 ‘가공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퍼거슨은 농약에 의한 토양의 피해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고 경고했다. “비옥한 땅 1온스에는 수백만의 박테리아, 곰팡이, 말미잘, 원생동물 그리고 지렁이나 지네 같은 무척추동물들이 살고 있다.”


166. 퍼거슨은 이들 모든 유기체가 ‘땅의 비옥도와 구조’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농약은 이러한 유기체들을 말살시키고 작지만 복잡한 이들의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따라서 땅의 엔트로피 과정은 촉진된다. 그 결과, 땅은 쇠퇴하고 피폐된다. 매년 40억 톤의 표토가 파괴되는 원인 중에는 농약과 비료에 의한 화학 물질의 사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표토들은 작은 시냇물에 의해 씻겨져 파괴된다.


 -수송                                                                    

169. 우리는 흔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 가는 시간을 자동차가 줄여준다고 생각한다.


170.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동차를 많이 소유하게 되자, 사람들은 직장에서 먼 곳으로 집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몇 십 년 전에는 사람들이 대개 직장을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살았다. 지금은 교외로 많이 빠져 나가, 심지어는 20 ~ 30마일 정도를 매일같이 출퇴근하고 있다. 자동차가 걷는 것에 비해서 빨리 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워에 시속 5, 6마일 정도로 기어가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이렇게 되면 자동차의 속력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다. 실제 대부분의 미국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경우를 따져 보자.

요즈음 사람들이 걸어다니거나 전차로 다녔을 때에 비교해 그다지 차이가 없다. 석유 위기가 닥쳤을 때에는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1979년 여름, 사람들은 기름을 자동차에 넣기 위해서 일주일에 평균 1 - 4시간을 주유소에서 기다려야만 했었다. 전 수송장관이었던 앨런 보이드(Alan Boyd)는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도시의 건물 주위를 맴돌고 있는 유독성 기체를, 태양을 가리고 있는 검은 연기를, 철모를 쓴 사람들로 가득 찬 대로에서 커다란 웅덩이를, 착륙하지 못하고 상공을 배회하고 있는 비행기를, 도시를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거리에서 꼼짝 못하는 수만의 사람들을, 기타 등등을 보았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 사람이 전쟁이 일어난 도시를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러시아워의 도시를 말하고 있는지 얼른 구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자동차로 인한 인명 상실과 물질의 파괴는 미국이 그 어떤 전쟁으로 치렀던 것들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


171. 자동차 사고로 매년 5만 5천 명이 죽고 5백만 명이 다친다. 안전위원회가 계산하기로는, 미국에서 자동차로 죽어간 사람의 숫자는 과거 200년 동안 전쟁 때문에 죽은 미국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에 백만 명 이상이 자동차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

                                                                      

172. 캘리포니아 대학의 뉴질(D.R.Neuzil)에 의하면, 새롭게 건설되는 고속도로 때문에 매년 십만 명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이웃을 이처럼 파괴하는 것은, 사회적인 연구로 확인되었듯이, 예상치 못한 수없이 많은 형태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 생태를 깨뜨리는 것도 생물의 생태계를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면에서 파괴적이다. 익숙했던 생활 습관이 갑자기 엄청나게 변하기 때문에 이러한 무질서는 범죄의 증가, 실업의 증가, 정신병의 증가 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전체 이웃과의 관계가 갑자기 단절될 때 그 사람의 심리 상태에 미치는 악영향을 생각해 보라.


심리학자에 의하면, 이러한 상실과 혼돈의 감정은 전쟁 때 폭격 후에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한다.

                                                                  

177. 최대로 커졌을 때, 로마 인구는 거의 백만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는 모든 것을 식민화함으로써 지탱될 수 있었다. 수많은 노예와 과도한 경작과 수로와, 가장 중요한 황제의 군대가 없이는 로마가 그 인구를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태양 즉 농업의 에너지 기반이 제한하는 자연의 여러 가지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로마는 세계를 약탈한 셈이었다. 북친(Murray Bookchin)은 이러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였다. “로마의 멸망은 로마의 융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로마는 환경의 자원으로 융성한 것이 아니라 중동 아시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등을 철저히 약탈한 것으로부터 융성되었던 것이다. 로마 대도시를 유지했던 바로 그 과정이 로마를 멸망시켰다.”


일단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가 커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 투입이 요구되었고,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수록 무질서가 커졌다. 무질서가 커질수록 여러 종류의 혼란에 대처하는 제도의 하부 구조는 많아졌다. 그 과정이 무한하게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에 의해 유지되었던 에너지 공급이 차츰 줄어들었고, 끝내는 군대가 사용하는 에너지 양이 군대가 얻어오는 양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과도한 경작 때문에 농산물 수확량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노예를 먹이고 재우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178. 도시 기관들이 거대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그것들은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과대하게 팽창했던 도시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고, 군대에 의하여 짓밟혔고, 급기야는 그 에너지 환경과 알맞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 멸망하고 나서의 로마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도시가 주위 환경에 의한 제약을 무시한 채 확장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로마의 경우는 잘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 자원을 광범위하게 찾아냄으로써 도시의 붕괴를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 멸망의 날은 다가오고야 만다. 현재도 이러한 상황이다. 현대 도시도 로마를 유지하였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세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지탱되고 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도시들도 지역적인 에너지 환경의 생산 능력을 훨씬 초과하여 남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자원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도시가 붕괴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180. 높은 에너지 도시 생활에 있어서, 인구 밀도가 인간 관계와 상호작용에 아주 묘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맨하탄 도심지에서는 반경 10분간의 거리에서 220,000명의 사람과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신경 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1.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이 남의 일에 더 적은 시간을 소비하고 덜 주의하게끔 된다. 대표적인 현상이 거지나 술주정뱅이 같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무시하는 현상이다. 수십 명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였더라도, 피해자를 돕거나 경찰서에 알리지 않는다. 저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서 쌀쌀한 얼굴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게 된다. 정신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대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친교를 나눈다. 이웃 간에 아무런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명대에 매달린 선원과 비슷해진 꼴이다. 주위가 모두 물이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다.


대도시(백만 이상)의 생활 환경과 소도시(십만 이하)의 생활 환경을 비교 분석한 연구에서 커크패트릭 세이트(Kirkpatrik Sate)는 대도시의 환경이 작고 흩어져 사는 소도시에 비해서 여러 조건이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대도시는 경제 불황 때 대량 실직의 위협이 따를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교통체증 때문에 수송비용이 많이 들고, 공기와 수질 오염 때문에 발병률과 사망률이 높아지고, 공기 오염으로 인하여 유지비용과 청소비용이 더 많이 든다. 또한, 여름에는 ‘열섬(heat island)' 효과 때문에 에너지 비용이 높고(겨울에는 건물들이 햇빛을 막기 때문에), 범죄 때문 순찰비용을 물어야 하고, 도둑 때문에 물건을 잃는 경우가 많고 학교가 별로 좋지 못해 노동자를 훈련시키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든다.”

                                                                    

 183. 백만 이상이 사는 도시의 거주자가 5만 정도의 소도시 거주자에 비하여 3배나 높은 세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도시위원회가 밝혔다. 이 돈의 대부분은 교육, 경찰, 건강 등에 사용된다. 그러나 모든 통계 자료에 따르면, 대도시 시민은 중소 도시 시민에 비하여 범죄에 더 많이 시달리고, 학교도 나쁘고, 건강도 나쁘다. 증가하는 에너지 유입의 결과로 계속해서 쌓이게 된 도시의 엔트로피 때문에 도시의 제반 문제는 더 이상 종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 레오폴드 코르(Leopold Kohr)는 “사회 문제는 도시 기구가 확장됨에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밖에 증가하지 못한다.”


뉴욕과 클리블랜드는 거의 파산할 뻔하였다. 미래에 과대하게 성장한 도시가 당할 운명에 대한 징조이다. 엄숙한 진실은 엄청나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도시 환경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군대

184. 미국 군대는 세계 초유의 엄청난 군사력이다. 중앙 정부가 지출하는 1달러 중에서 43센트는 전쟁-과거, 현재, 미래의-에 대한 비용이다.

                                                                    

185. 군대 때문에 사회에서 빠져 나간 에너지는 엄청난 사회 혼란을 일으킨다. 실직 통계만큼 이것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국방 지출이 직장을 만든다는 것은 흔히 믿기 쉬운 오류이다. 미시건(Michigan) 공공 이익 연구단체에 의하면, 군대 예산이 10억 달러 증가하면, 전체적으로 11,600군대의 직장이 없어진다. 이들은 26개의 주에서(전 국가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군대 지출이 증가할 때, 실직률도 증가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기계 제작공 연맹이 자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40억 달러의 국방성 예산 때문에 생기는 일반 직장 11만 8천 군데가 없어졌다. 이 정도의 예산 때문에 생기는 군 관련 직장 수는 8만 8천 군데이다. 따라서, 이 숫자를 감안하면, 전체적인 직장의 감소는 3만 군데이다.’ 마리언 앤더슨(Marion Anderson)이 주관했고,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이 1978년에 내놓은 보고서 역시 1,240억 달러 국방 예산(1979년)이 144만 군데의 직장을 없앴음을 보이고 있다.


돈을 투자하는 데도 실직이 증가하는 현상은 얼핏 보기에 모순인 것처럼 생각된다. 다시 생겨나는 직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러한 모순점은 곧 사라질 것이다. 국방비 지출로 인하여 생기는 직장은 돈과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들어가는 것들이다. 무기 생산에 관계하는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 인간 노동력은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보자.


186. 정부가 록히드 회사와 매년 10억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하였다. 이것은 치명적이고 아주 비싼 무기, 즉 트라이던트(tirdent) 잠수함 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회사는 1만 6천 명을 고용하였다. 그렇지만 같은 액수인 10억 달러로 노동력이 더 많이 들고 에너지는 더 적게 사용하는, 즉 태양 에너지 수집판 생산 같은 분야에 투자한다면 2만 명을 고용할 수 있다.


국방비 지출은 인플레이션을 증가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국방비 지출이 인플레이션화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소비자들이 살 수 있는 물품을 공급하지는 않은 채 ― 미사일 또는 그와 유사한 무기 시장은 제한되어 있다 ― 사람들 손에 돈을 쥐어주기 때문에, 자동차나, 냉장고, 혹은 공구류 등 일반 물품 가격이 올라가게 된다. 군비 생산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와 물질의 양은 고정되어 있다. 군사 분야가 전 국가 에너지 사용량의 6퍼센트와 재생 불가능한 광물 자원을 엄청나게 소비하기 때문에, 무기로 표시되는 엔트로피 증가는(더 이상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는 에너지 양) 자원 공급을 어렵게 함으로써 유류 가격을 올린다.


187. 국가 방어에 사용하는 돈은 결국 세계를 더욱 긴장시킬 뿐이다. 냉전 체제에서는 미국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면, 소련은 위협을 느끼고 따라서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은 여기에 대응하고, 그런 식의 경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80년대까지 미국은 매년 실질 가치로 1948년에 비해서 4배 가량을 국방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핵전쟁 발발 20분 이내에 1억 6천만 미국인이 죽게 된다고 하면, 누가 지금이 그때보다 3배 더 안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190. 증액된 군사비 지출은 엄청난 비극을 연출한다. 군대가 에너지 흐름과 그 체제를 유지하려면,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에너지를 군대 쪽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배고픔과 가난과 같은 문제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 국가가 모두 합해서 4천억 달러를 매년 무기에 사용하고 있다. 1분기 거의 백만 불이다.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전세계 생산량의 약 10퍼센트가 소비된다. 이 양은 세계 인구 절반의 GNP와 맞먹는 양이다. 8억 인구가 매년 200달러 이하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매년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 이러한 군사용 지출은 몹시 불쾌한 일이다.


191. 세계 군대 1년 예산의 2퍼센트만 전용하더라도, 제 3세계의 모든 가정에 난로 하나씩을 줄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항공모함 한 척의 가격이(16억 달러) 직장인을 위한 건강과 안전 사업에 대한 예산의 2배이다. A-7E 코세어(corsair) 공격용 비행기 한 대 값이 EPA의 수질 안전 사업에 배정된 예산의 2배이다.


결론적으로, 전쟁과 전쟁 준비는 인간 행동에 있어서 가장 엔트로피가 높은 형태이다. 미사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밖에 없다. 파괴하는 데 사용하거나, 못 쓰게 될 때까지 기다려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는 지구의 부존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든 간에 ‘현재 세대가 미래 세대의 쟁기로 칼이나 총을 만드는 격’이다.


-교육

197. 컴퓨터화된 사회가 정보를 더 빨리 만들어 낼수록 사회 변환기들이 유용한 에너지를 수집하고 변환하는 데 그 정보들을 사용하는 속도 또한 빨라진다. 결국 에너지 흐름은 증가하고, 무질서는 더 많이 만들어지며, 부존 에너지가 더 빨리 고갈되는가 하면, 더불어 사회의 경제 기관과 정치 기관들의 집중화와 비대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볼 때 컴퓨터의 목적은 더 많은 자료를 더 빨리 제공함으로써 유용한 에너지를 더 빨리 변환하는 것이 된다.


컴퓨터가 사회의 모든 기능에 침투해 들어와서, 사회는 차츰 더 컴퓨터에 의존하여 모든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컴퓨터화하게 되면 과정은 ‘효율적’으로 되지만 실제로 컴퓨터화가 진행될수록 사회는 복잡해지며, 이 복잡성 때문에 사회가 붕괴될 위험마저 파생된다. 컴퓨터가 고장났을 때 항공 사무실에 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고장으로 인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전체 시스템이 효율적인 성과 때문에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한 대의 컴퓨터라도 고장이 나면 시스템 전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인간이 기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더 많은 정보가 사람들에게 주어질수록 사람들은 정보에 더 어두워지는 것 같다. 판단하기가 더 어려워질 뿐더러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 같다. 심리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정보과잉 상태’라고 부른다. 엔트로피 법칙을 배경으로 한, 아주 적절한 용어이다. 정보가 사람에게 많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흡수, 저장하고 또 이용하는 정보의 양은 적어진다.


198. 나머지 정보는 분산된 에너지, 즉 쓰레기로 축적된다. 이렇게 분산된 에너지의 축적이 바로 사회적 공해이다. 그리고 이것은 온갖 종류의 정신질환을 발생시킨다. 마치 물질의 쓰레기가 건강을 해치듯이 그것은 정신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199. 각 개인들은 매일 정보과잉의 영향을 경험하고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동네에서 쉴새없이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차츰 그들이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알려고 들지 않는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한 번 일정한 분량의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자연히 외면해 버리고 만다.

                                                                     

201. 미국 학교의 교실과 복도는 분산된 에너지로 넘치고 있다. 그 대부분이 교육 제도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 집중을 못하고, 때로는 폭력사태를 일으키게 되는 불안한 상태로 번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원인은(전체는 아니다) 정보과잉과 관련된다. 가장 큰 원흉은 아마도 TV일 것이다. 하루에 5,6시간씩, 일방적으로 정보를 퍼부어 대니까 학생들은 집중해서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어느 교육자가 말하기를,


의사 소통은 내용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받는 것, 즉 말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한, TV와 같은 매체의 자극이 강렬한 만큼,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가서 선생님을 바라볼 때, 불행한 비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 선생님들로부터는 연속되는 그림에서와 같은 흥분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배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된 작업이지 영상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

204. 의료 기관의 집중화, 전문화의 증가, 기계의 정교화 등은 모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더 많은 에너지가 의료 분야에 소비될수록 그에 따르는 무질서도는 증가된다.


여러분은 의원성(Iatrogenic)이란 용어를 들어본 일이 없는 이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의사는 이에 관해서 알고 있다. 이 10개 철자로 된 단어를 의사 앞에서 말하면, 의사는 약간의 공포를 갖고 즉각적인 방어를 할 것이다. 의원성 질환은 의사, 병원, 약품, 기구 등 환자를 치료하는 데 사용한 것에 의하여 생기는 병을 가리킨다.


의료처치로 용태가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현상도 가끔은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환자에게 안겨 주는 일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은 다음의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진찰을 원하는 환자의 75 ~ 80퍼센트는 자연 치유될 수 있는 상태에 있거나 또는 어떤 의약품을 사용하더라도 치료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여러 가지를 처치를 하고 이런저런 약들을 처방한다. 이러한 약이나 수술이 가끔은 환자에게 원래 병보다 더 무서운 병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X선 촬영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얻는 이익(엔트로피 감소)보다 방사선에 노출됨으로써 입는 피해(엔트로피 증가)가 더 많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205. 이른바 만병통치약이라는 항생제는 이미 모든 전염병에 대해 처방되었으나 결과는 파멸이었다. 항생제는 무차별하게 박테리아를 죽이기 때문에 신체가 적절히 기능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신체기능을 파괴하였다. 질아구창, 내장의 이스트 전염, 비타민 결핍, 그 밖의 다른 여러 증세들이 항생제의 지속적인 사용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약품의 광범위한 많은 양의 복용은 결국엔 새로운 종류의 박테리아가 생기게 만들었다. 이 박테리아는 아주 강한 내성 때문에 직접 투약이나 신체의 자연 치유 능력에도 견딜 수 있는 것들이다. 1976년 서독 린베르크(Linberg)에서 열린 항생제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참가자 대부분은, 이른바 마술 탄환(magic bullets)이 개발되기 전의 인간에 비해서 현대 인간이 더 약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항생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62년 상원 소위원회가 발간한 자세한 연구에 따르면, 과거 24년 동안 합법적으로 판매된 4천여 개의 약품 중에서 거의 절반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약효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 효과 없는 약품들에 대해서(이들 대부분을 주요 약품회사들이 생산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약품들이 실제로 위험하고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약품, 이익, 정치(Pills, Profits and Poltics)」라는 제목의 책에서 연구 약사인 실버만(Milton Silverman)과 전 보건성 장관 보조였던 리(Philip Lee)는, “약품에 의한 ‘부작용’이 유방암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해서 의약품 부작용이 입원하는 환자들의 10대 이유 중에 들어가며, 이로 인한 총 입원 시간은 1년에 5천만 입원일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206. 현대의 의료 행위가 장기적으로 볼 때 얼마만큼 심각한 의료 문제를 어느 정도 야기시키고 있는가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병원에 치료차 입원한 환자 5명 중 한 명 꼴로 의원성 질환병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환자 30명에 한 명 꼴로 병원과 관계되는 병으로 죽는다.

                                                                      

207. 1950년대는 미국이 석유화학 시대로 들어선 때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정부조차도 1950년 이후 질환의 증가는 오염, 즉 석유 화학 경제가 만들어낸 높은 엔트로피 폐기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사람이 만들어낸 환경이 현재 미국인의 주요 사망 요인일는지도 모른다. 1900년의 사망 원인의 12퍼센트, 그리고 1940년에는 3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암, 심장병, 폐병이 1976년에는 전체 사망의 59퍼센트나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병의 발병과 환경의 성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208. 최근에 과학자들이 상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먹일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우유를 찾을 수가 없다. 모유에는 농약, 폐기물, 기타 발암성 물질이 들어 있다. 어린아이 처방전에도 유독한 납이 들어 있다.

                                                                  

209. 가까운 장래로 보면 건강문제는 암담하다. 인류는 고도로 산업화된 석유화학의 환경에 맞지 않게끔 창조되었다. 수백만 년 전에 지구상에 인류가 최초로 나타난 이후로 인간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사람은 수렵 사회에 알맞게 생물학적으로 만들어졌다. 경제적인 발달과 사회적인 발달의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인간의 생리적인 긴장은 점차로 더해갔다. 따라서 한 종(種)으로 살아남을 확률은 차츰 작아져 갔다.


대부분의 질환은 환경으로부터 기인된 것들이다. 주어진 환경의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폐기물의 축적(분산된 에너지)에 의한 병이 증가한다.

                                                                       


제6장 엔트로피 - 새로운 세계관


(Entropy - A new world view)


216. 저장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동이 나면서 거기에 구축된 전체 경제의 상부 구조는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217. 손대지 않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나머지 원천은 주로 빈곤한 제3세계 제국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이런 자원은 산업화된 국가들과 제3세계 사이의 좀더 공평한 부의 분배를 흥정함에 있어 그들이 지닌 마지막 카드인 것이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이미 그 지렛대를 유효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석유 수출의 유출량과 가격을 조정하는 그들의 카르텔 조직은 이제 그 밖의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다루는 제3세계 제국들이 본받는 바가 되고 있다. 이제는 보크사이트(bauxite), 구리, 철, 크롬, 납의 가격 조절에도 카르텔(kartell ; 기업 연합)이 형성되고 있다. 「포춘(Fortune)」지는 ‘만일 수출국들이 주로 이러한 노력에 성공한다면 선진 산업 국가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향상되던 시절은 막을 내릴 공산이 크다’라고 싣고 있다.

                                                                      

 220. 불행하게도 다수의 제3세계 국가는 미국 및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과 같은 노선을 따라서 그들의 경제를 산업화하기 위해 새로 축적된 부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된 경제정책들은 엔트로피 과정이 에너지 분수령을 향해 더 빨리 가속화되게 함으로써, 그들 국가나 넓게는 이 행성으로 보아 모두를 비극으로 유도할 따름이다.


브라질과 나이지리아 같은 제3세계 국가는 2000년까지 거대한 산업 구조를 구축할 것인데, 그들은 그 경제 기계를 가동시키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적정량 확보할 수 없게 될 것을 깨달을 것이다.


221. 서양식의 진보가 제3세계 국가에 오게 되면 그 결과는 흔히 ‘졸속의 저개발’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런 나라들의 대다수 사람들은 개발 이전보다 더 가난해진다. 이에 대한 주된 이유는 서양의 산업화는 농촌 지역보다는 도시에 유리하며, 인간의 노동력보다는 에너지 및 자본집약적 생산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산업화를 추구하게 되면 생산이 자동화되는 까닭에 일자리는 실제로 줄어들게 된다. 그와 동시에 대단히들 자랑하는 녹색혁명에 의해 추진된 기계화 영농이 농사 과정에 값비싼 에너지 투입을 요구하는 데 연유한다. 이 때문에 소농은 시장에서 견디질 못하게 되고 땅을 잃은 농부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에 떠돌아야 한다.

                                                                   

222. 제3세계 개발에 대한 적절한 모델은 이미 여러 가지가 나와 있다. 모택동 사망 이전에 중국은 자체적으로 사회의 농촌기반을 유지하고 노동 집약적 생산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개편하였다. 중국은 부유한 사회는 아니지만 일자리가 없거나 집 없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간디의 경제 모델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간디가 이끄는 독립운동 중에는 투쟁의 상징이 곧 손으로 움직이는 물레였다. 이것은 적절한 기술의 간단한 장비로써 가난하거나 두메산골일지라도 인도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간디의 경제학은 도시보다 시골, 공업보다 농업, 고도 기술보다 소규모 기술을 장려한다. 경제적 우선성을 이런 일반 골격에 두는 것이야말로 제3세계 개발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미국내의 부의 재분배


224. 자연계는 균형을 되찾는 데 자체 조절의 생물학적 법칙들에 의존하지만, 사회는 똑같은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경제적 정의라는 합의적 원칙에 의존해야 한다. 엔트로피 과정을 자연계의 엔트로피 과정에 더욱 가깝게 조화된 진도로 늦추려면 에너지 유입량을 극소화하고 또한 감소된 양의 에너지를 사회 전체에 더욱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취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의 이행 시기 동안에는 사회 질서가 무난히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태양 시대의 새로운 하부 구조


 226. 태양 시대로의 전환기는 미국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완벽한 재개편을 요구할 것이다. 일단 우리가 집중된 저장 에너지(화석연료)로부터 확산된 흐름(태양)으로 사회의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에 대한 막중한 의미를 포착한다면 우리의 현존 산업구조가 태양의 미래에 완전히 부적합하다는 것이 확연해진다.


문자 그대로 고도의 집중화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가 오늘날의 경제를 형성해 왔다. 현존하는 제도적 상부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system)를 통과하는 에너지의 고도로 집중된 흐름에 계속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태양 에너지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처럼 농축된 것이 아니므로 고도로 집중화된 산업 생활 양식에는 적합치가 못하다.


227. 태양 복사선은 확산되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집중시켜야 한다. 열역학의 법칙들은 우리에게 일이란 두 장소 사이의 온도 차이가 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으며, 그리고 태양 에너지는 어느 주어진 지역에서 단위 면적 당 거의 같은 정도로 내리쬐고 있으므로 태양의 흐름은 집열되어야만 한다. 만일 전력을 원한다면 저장된 태양 에너지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돼야 한다. 흐름의 본성과 태양열 기술 규모의 경제성은 각 가정에 충분한 열기와 온수를 제공할 수 있는 정도의 소규모가 가장 적합하다. 대부분의 태양열 옹호자들은 현 단계의 기술로써 가까운 장래에 기존 개인 주택을 태양력을 바꾸는 것은 주거용 에너지 수요의 60퍼센트만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시작부터 상당히 효율적인 태양열 주택이 세워질 것이긴 하지만 그런 전환은 느린 과정이 될 것이다. 2000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을 구조물의 75퍼센트는 이미 건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도시 수준에서 태양 에너지는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복잡한 기술적 조직에 전혀 유용치가 못하다. 예컨대 어느 추산에서는 현재의 산업화 상부 구조를 운영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태양열 집열판으로 전체 미국 땅의 10 - 20퍼센트를 덮어야 할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추계에 따르면, 맨하탄은 매일 그 지역 쬐는 햇빛을 모두 100퍼센트 효율의 집열판에 모아야 얻어질 에너지의 6배 이상을 소모한다는 계산이다. 여러 가지 태양열 기술로 뉴욕에 동력을 공급하려면 도시 크기의 여러 배 되는 지역을 온통 태양열 집열기로 덮어야 할 것이다.

                                                                      

228. 슈마허(E.F.Schumacher)가 지적한 바대로 ‘태양 에너지로 아주 넉넉하게 데울 수 있으나 록펠러 센터를 난방할 수는 없다. 한 채의 집은 실제로 태양에너지 더하기 풍력으로 승강기들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데 록펠러 센터 안에 수용시설은 승강기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30층 또는 50층을 기어오르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슈마허는 대규모 생산과 도시 생활은 태양 시대의 모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술가이자 생태학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인 북친(Murray Bookchin)은 이에 동조한다. 북친의 주장은 “태양력과 풍력의 과밀집된 인구와 고도로 중앙 집중식 공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양의 원자재와 대규모 에너지를 공급할 수는 없다. …… 태양열 장치……는 비교적 소규모의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생태학자 오펄스(William Ophuls)도 이에 동의한다. “전적으로 태양 에너지에의 의존으로 전환함은 분명 대단한 검약과 탈집중화의 방향으로 우리 기술과 경제의 주요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229. 태양력의 잠재력을 검토함에 있어서 환경 과학자인 오덤(Howard Odum)은 ‘알짜 에너지(net energy)'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알짜 에너지란 기술의 에너지 수확에서 그것을 회수하는 데 투자된 에너지를 뺀 값이다. 오덤은 “태양 에너지는 식품, 섬유, 전기의 형태로 알짜의 농축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 에너지의 대부분은 에너지를 수집하고 농축하기 위해서 유지되고 가동돼야 하는 다양한 구조 때문에 소모해 버리므로 면적 당 얻어지는 양은 적다.”고 주장한다.


오덤은 분명히 석탄이나 우라늄이나 기름보다 태양열 이용의 편에 서고 있지만 태양열 기술은 필요한 태양력 설비를 수백만 개 만들어 실용화하는 데 엄청난 양의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원자재가 필요함을 명심하라고 말하고 있다.


-엔트로피 사회의 가치와 제도들                                                          


236. 1977년 미국 순회 강연을 돌면서, 슈마허는 말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재구성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신념을 명백히 밝혀 주려는 다시없는 시도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인간 존재의 ‘큰 물음(Big Questions)'들이며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몰입하게 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의 근무에 묶인 생활 형태에서는 이런 문제들은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물음들은 뉴턴 세계관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단적이고 작은 표준화된 설명에 들어맞지 않은 까닭에 ’과학 이전(prescientific)'의 것이라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237. 저엔트로피 사회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 것(less is more)'이라는 구호가 광고 문구가 아니라 최고의 진리가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의 소비를 억제한다. 검소가 슬로건이 된다.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겠지만, 변덕스럽고 탐닉하는 욕망 ― 전국 각지의 모든 쇼핑센터들이 영합하고 있는 ―은 결제되어야 한다.

                                                                   

지구를 키우고 넓히는 것은 지혜에 위배된다. 그것은 또한 자유와 평화에 위배된다. 모든 요구의 증가는 인간의 외부 환경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주는데, 그 외부 환경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음으로 해서 존재에 관한 공포를 가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욕구를 줄임으로써만 인간은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그러한 긴장들을 진정으로 줄여갈 수 있다.

                                                                    

 238. 간디는 ‘문명의 본질은 욕구를 증식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흔히 우리가 소유하는 물건들이 우리를 소유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는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들이 우리들 손에서 빠져 나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을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239. 저엔트로피 문화와 고엔트로피 문화는 노동과 생산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또한 차이를 드러낸다. 고에너지 환경에서의 인간의 노동력은 현실적인 긍정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시스템의 목표는 인간의 노동을 제외시키고 생산 과정의 모든 단계를 자동화함으로써 에너지의 흐름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 경우 생산성과 경제 성장이 경제 생활의 유일한 목표가 된다. 인력이 재화나 노동의 생산에 반드시 개입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과학적 경영이 도입되어 생산 방법을 표준화함으로써 창의적이나 개인의 결정이 배제된다. 일, 특히 육체 노동은 품격을 떨어뜨린다 하여 육체 노동을 기피하려 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손으로부터 모든 일의 기능을 덜어줄 수 있는 ‘노동 절약적’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 월급 등급을 보면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등급 밑바닥에 위치하고 책상에 앉아 근무 시간을 보내는 화이트 칼라 경영진들은 상위 등급을 차지한다.

                                                                      

241.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일하는 연장 ― 기계들, 공장들 ―이 크면 클수록 더욱더 자본 집약적, 에너지 집약적이 되고 더욱더 엔트로피적이 된다.


규모가 커지고 중앙 집중적으로 될수록 인간의 역할이 또 하나의 생산 요소 정도로 전락하는 경향이 심화된다. 예를 들면 자동차 조립 과정에서 근로자들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 과정 자체가 개인이 아닌 기계를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은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이 감소된다. 근로자는 필연적으로 생계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일터에서의 인간 활동의 분업화는 고엔트로피 경제의 소산이다. 과학적 경영기술, 사고와 행동 그리고 이론과 실행의 체계적 분리 등은 사람들을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일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일의 생산된 결과만이 평가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243. 생태계의 제1의 법칙은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everything is connected to everything else)’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한 부분이라도 파괴한다면 인간을 포함한 다른 모든 부분에 그 영향이 돌아간다.


전통적 지혜를 가르친 모든 위대한 설법가들은 저엔트로피 생활에 고유한 가치관들을 신봉하고 있었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성인들은 모두 검소하고, 청빈하고, 재산을 사회와 나누는 모범적인 생을 이끌어 갔다. 그들의 교리는 어느 사회에서든 비슷한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20세기의 간디 역시 저엔트로피 가치 체계에 입각한 완전한 해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246.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경제,정치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 약속은 거창하지만 결국은 언제나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와해로 끝맺는 듯한 기술 발전에 대한 회의가 고조되고 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고엔트로피 세계관과 점점 더 대치되는 의견들을 보이고 있다.


247. 거의 3분의 2의 응답자가 ‘노동력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하는 일에서 보다 큰 내적, 개인적 보상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답했다. (1977년 봄 해리스 여론 조사 결과)

                                                                  

 249. 도시의 규모 축소와 아울러 교통 체계 역시 앞으로 대폭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교통 수단은 자동차와 트럭으로부터 대형 대중 수송 수단이나 장거리 철도로 기본적인 전환을 겪는 일이 불가피할 것이다.


250. 자전거 타기나 걷기도 점점 더 인기 높은 교통수단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회, 경제 생활은 교통수단 변화를 반영하는 급격한 변모를 거치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여행에서 교통난 때문에 소모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며 아마도 여행은 좀더 가까운 곳으로 좁혀질 것이다. 상업 지역은 노동력 집중지의 가까운 행동반경 내에 자리 잡을 것이며 또한 대규모 중앙 집중적 주거 단지로부터 인구가 넓게 확산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자동차 시대와 더불어 성장해 왔던 대규모 쇼핑센터나 다른 시설들 대신 이웃에 생활 중심지가 형성된다.


산업 생산과 용역 부문은 미래의 저엔트로피 경제에서는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될 것이다. 이것은 식품 생산 쪽으로 많은 노동력이 이전돼야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용역의 하부 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높은 에너지 유출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55.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각 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임을 기억해야 한다.

                                                                      

256. 만일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뉴턴적 기계론의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재구성 
                                                                  

257. 일반 사람들이 과학을 철두철미하게 믿기 시작한 반면, 실험실의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던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거의 모든 물리학자들은 물리 법칙들이 물체의 운동에 관한 참된 정보를 제공하며, 물리학자들의 방정식에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실체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258. 독일의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원자 입자의 본성에서 볼 때, 관측이라는 바로 그 행위가 관찰대상을 고정시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변동을 가하는 것이라서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을 객관적으로 관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과학자 사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양자역학의 미시적 세계로 빠져들었던 당시의 과학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관측마다 고전물리의 핵심적 근거인 물질의 정밀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던 바, 그것은 주어진 어느 순간에 물체의 속도, 위치를 둘 다 결정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전자라는 작은 알갱이를 관찰할 때마다 그들이 관측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자 자체에 영향이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과학자는 전자가 빛을 발산할 때에만 그것을 볼 수 있고 전자는 활동할 때에만 빛을 발산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자가 어디 있는가를 보려면 ‘당신’은 ‘전자’가 활동하도록 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고 보니, 전자에 대해 위치와 속도의 두 가지 모두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당신의 전자의 위치나 또는 속도를 측정할 수는 있으되, 동시에 양쪽을 다 측정할 수는 없다. 요점을 간추리면, ‘만일 당신이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자기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를 말할 수 없으며, 만일 당신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를 안다면 당신의 위치를 말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발견은 고전물리학의 역사로 보면 가장 암담한 날을 기록했다. 어느 점으로 보나, 그는 거의 300년 동안 물리학의 법칙을 에워쌌던 철판 같은 결정론(determinism)을 뒤집어 놓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259. 과학에서는, 기존 패러다임과 부합되지 않는 치명적인 변칙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위기의 징조가 된다. 이 경우 그것은 하나만으로도 기본과학 이론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뉴턴 과학(Newtonian Science)의 골격과 그 위에 구축된 세계관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본(Max Born)은 그 자신의 연구가 진척되는 방향에 대한 근거를 추구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주는 더욱더 오리무중이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춤추는 현상이다.”


260. 과학자들이 터득한 것은 모든 사건이 각기 독특하다는 점이었다. 그 자체의 발생은 모든 다른 사건들로부터 그것을 구별짓는 고유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각 사건은 세계 속에서 그 자체의 고유한 위치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현상과도 객관적 실재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고립된 물질의 성분 또는 고정된 재료인 듯 다루는 근대의 뉴턴 식 견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동적인 흐름의 일부라는 개념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두 가지 분류만을 인지한 고전물리는 도전을 받고 붕괴됐다. 사물은 단순히 고립되고 고정된 물질의 어떤 유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61. 세계에 대한 이런 정적인 견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항상 전화(轉化) 과정에 있다는 견해로 대치되었다. 살아 있지 않은 현상조차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전환 과정은 실로 가동중인 ‘엔트로피 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각기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는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 모든 변형은 어느 것이나 전화 과정에 있는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풀 한 잎마다의 생명과 죽음은 세계 에너지의 전체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엔트로피 법칙’은 에너지 흐름의 방향을 말해 줄뿐이지 그 속도를 일러주지는 않는다. 속도는 흐름의 높낮이에 따라서 다르다. 전화 과정의 성쇠는 완만하지 않으며 도약과 분출을 계속하여 움직인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고전물리의 금자탑인 인과론의 정밀 측정의 전반적 개념은 열역학 제2법칙의 중요성에 근거한 과학의 재정의에 길을 양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발생은 어느 것이나 독특하다고 프리고진은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관찰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과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유사한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이다.


262. 프리고진과 그의 공동 연구자들은, 고전물리가 보장했던 옛날의 안전성은 처음부터 환상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 베이컨, 뉴턴이 생각했던 의미에서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킬 수 있고, 자연에 내재하는 신비를 찾아내고, 다음에 자연계를 조종하고 변화시키는데 ‘고정된 진리의 틀(fixed body of truths)'로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잘못된 이해라고 판명됐다. 첫째로, 20세기 중반에 보어(Niels Bohr)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자연의 질서를 벗기는 무대에 있어서 관객일 뿐만 아니라 배우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위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 둘째로, 고전물리의 결정론적 의미를 지닌 진리의 고정된 틀이라는 개념은 지속적인 변동과 불안정성의 우주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프리고진은 ’자동기계(automation)라는 세계의 고전적 묘사 대신에 우리는 세계를 예술의 작품으로 본 그리스의 패러다임으로 더 가까이 복귀한다‘는 표현으로서 과학의 새로운 재구성의 정수를 포착하고 있다.

                                                                 

270. 서양인들은 진리와 지혜에 대한 동양식의 접근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서양인들은 부지런히 행함으로써만 이 세계의 온갖 숨겨진 신비를 벗길 수 있다고 믿었다. 서양인들은 그런 시도가 인간을 더 큰 지혜로 이끌고 궁극적으로 우주의 최상의 설계자와 대면하게 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끊임없이 진리의 단편들을 모아서 잇고, 주위의 세계를 조작하고 정돈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해 왔던 것이다. 동양 종교가들은 서양인의 열광적인 행동이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킬 따름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신성의 현시(現示)로부터 오히려 유리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278. 어찌 보면 우리는 중력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과 비슷하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 또는 적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 그는 마천루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뛰어내린다. 물론 중력은 그를 가차없이 땅으로 끌어내림으로써 회의를 품었던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281. 프리고진은 분산 구조가 복잡할수록 그것은 더 완전하고 복잡하며, 따라서 자체 유지에 더 많은 에너지 유통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분산 구조를 통하는 에너지 흐름은 변동을 일으킨다는 것에 주목해서, 프리고진은 만일 계(system)가 흡수하기에 너무 큰 변동이 되는 계는 재조직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옳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286. 엔트로피 법칙은, 사회의 에너지 흐름이 모든 생활의 전개를 가능한 한 먼 미래에까지 연장시키게 하려면 가능한 한 낮은 점으로 감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는 점이다.

                                                                    

289. 적어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급자족이 됐다. 그들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 반면에 우리는 우리의 고에너지 환경의 완전한 노예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자신들의 식량을 경작하고, 여흥을 제공하고, 옷을 지어 입을 줄을 모른다. 우리는 필요한 것마다 받쳐 줘야 하는, 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아기와 같다. 농부이며 작가인 베리(Wendell Barry)는 훌륭한 문장으로 우리 현대의 딜레마의 자화상을 그린다.


‘미국인’은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민인지도 모른다. 그는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제공할 힘이 없는데, 그의 돈은 풍선처럼 인플레를 타고, 역사적 상황과 다른 국가의 힘에 따라 떠나가 버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자기가 만든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휴식과 여흥으로 인하여 늘 지쳐 있고 자꾸만 살이 찌면 건강도 신통치 않다. 그가 마시는 공기, 물, 음식은 모두 독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죽을 때는 기가 막혀 죽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기의 성생활이 다른 사람들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는 좀더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좀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등의 생각을 한다. 그는 도대체 그의 자녀들이 왜 그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실상 별로 상관도 안하고 왜 상관 않는지도 모른다.


290. 그는 자기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잡지의 광고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원래 못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의 모든 소유물이 모두 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불안해진다. 그는 만약 직장을 잃는다면, 만약 경제가 실패한다면, 만약 전기, 수도회사가 망한다면, 만약 경찰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트럭 기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아내가 도망간다면, 만약 아이들이 가출한다면, 만약 죽을 병에 걸린다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걱정들 때문에 자격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 상담한다. 그러나 그 의사들 역시 그들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시 자격이 있는 전문가들과 상담한다.

                                                               

292. 고엔트로피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필연적인 전환을 늦추면 늦출수록, 엔트로피 청구서는 점점 커지고 그 전환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만일 너무 오래 지체된다면, 치러야 할 액수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현대 과학과 기술로써 자연의 저장고에서 소모해 버린 모든 것에 대한 대체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줄곧 살육과 재해에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299. 우리는 세계를 돌보는 하인이어야만 한다.

                                                                       

단서(但書)

Postcript


300. 열역학에서는 세 가지 형태의 계를 고찰하게 된다. 바깥 세계와 물질이나 에너지를 교환하지 않는 고립 계(isolated system), 에너지는 교환하지만 물질은 교환하지 않는 닫힌 계(closed system)가 그것들이다. 지구는 태양계에 대한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닫힌 계이다.

                                                                    

 후기

Afterword


307. 열역학이 관심을 둔 기초적 사실들은 문명의 여명 이래 인류에게 알려졌던 것이지만, 그것들이 과학 분야에 끼어든 것은 겨우 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과학 하는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 즉 열은 항상 뜨거운 물체로부터 차가운 물체로 흐르며, 결코 그 거꾸로는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에는 이 진리가 열역학 제2법칙, 별명으로는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공식을 이루게 되었다.


제0법칙은 고전 열역학의 필수적인 이론적 기둥으로서 마지막에 첨가되었으며, 만일 두 물체가 각기 제3의 물체와 열평형에 있다면, 그 두 물체 역시 서로 접촉하는 경우 열평형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가르친다.

                                                                        


역자 해설

319.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부류로 묶을 수 있다. 이른바 기술적 메시아주의, 수정주의, 생태주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데, <엔트로피>가 저술된 기본 개념은 생태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역자의 느낌으로는 적어도 이 책은 과학기술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는 과학기술 일변도의 문명이 제기한 부정적 측면을 분석하는 방향에서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특성은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기된 기본개념들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과학의 발달이 누적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라는 쿤의 파격적인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저자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계론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엔트로피(유기론적,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세계관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320. 엔트로피란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865년 독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 ~ 1888)에 의해서였다. 그의 논문 <열의 역학적 이론(On the Mechanical Theory of Heat>에서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란 말을 만들어 낸 의도를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나는 중요한 과학적 양의 명칭으로서 그것이 현존하는 모든 언어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고대어를 빌리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리스어의 변형(tropy)이란 단어를 따서 ‘S'를 물체의 엔트로피(entropy)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의도적으로 ’에너지‘에 유비(類比)되게끔 <엔트로피>를 지어내는 바, 이 두 가지 양은 그 물리적 의미에서 유사하여 이런 유비적(類比的) 명명이 유익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정의와 함께 클라우지우스는 그것이 우주적 과정들의 방향성을 기술하는 데 유용한 개념임을 깨달았고,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한 두 가지 기본 법칙」이라는 다음의 유명한 서술로서 1865년의 논문을 끝맺었다.

1.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2.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이로써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엔트로피 개념은 1850년부터 이미 형성되고 있었으며, 더욱이 열역학 제2법칙의 바탕에 깔려있는 관념, 즉 자연 세계에서의 변화에 어떤 방향성이 있다는 생각은 기원조차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321. 라부아지에(Antoine L.Lavoisier, 1743 ~ 1794)도 열의 본질 이론과는 무관하게 열의 보존이 성립된다고 주장하다가, 1789년에는 「화학원론(Elements of Chemistry)」에서 열은 칼로릭(caloric)이라는 무게 없는(impon derable) 입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열의 물질 이론을 수용하게 된다.


칼로릭 이론에 따르면, 칼로릭을 많이 함유한 물체는 뜨겁고, 물체의 온도 변화는 칼로릭의 방출 또는 흡수의 결과로 설명되었다. 간단한 실험으로도 이내 모순을 드러낸 칼로릭 이론은 럼포드(Count Rumford, 본명 Benjamin Thompson)와 데이비(Humphry Davy)에 의해 한때 부정된 적도 있었으나, 19세기 중반까지는 전적으로 열의 칼로릭 이론을 신봉하는 형편이었다.


칼로릭 이론에 기초로 하여 이론적, 수학적으로 열 현상을 다루려는 시도로부터 열역학의 법칙들을 낳게 되는 개념은 구체화된다.

                                                                      

 322. 카르노는 열 기관과 수력 기관의 유추로부터 유용한 개념을 끌어낸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면서 일을 하듯이, 열도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하면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일정량의 물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두 위치만의 함수이듯이, 일정량의 일이 할 수 있는 일의 양도 두 온도만의 함수일 것이었다.


가령 증기 기관이라면, 증기는 칼로릭의 운반 역할만 맡을 뿐 그 자체로 일이 생성되는 건 아니고, 열효율은 작용 물질에 무관하게 기관 내의 두 온도만의 함수이다.

                                                                       

323. 1830년대에 들어서는 자연 세계의 현상들―전기, 자기, 빛, 열, 화학적 친화력 등―은 내재하는 단일한 힘―나중에는 에너지라고 불리는―의 다양한 효과로서 상호 변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었다. 이런 식의 에너지 보존원리는 1842년부터 5년 간에 걸쳐 마이어(Robert Mayer, 1814 ~ 89), 쥴(James p. Joule, 1818 ~ 89), 헬름홀츠(Herman-nvon Helmholtz, 1821 ~ 94) 등에 의해 거의 독자적으로 발표됐다. 에너지 보존의 한 예로서, 열은 물질입자의 운동에 의한 역학적 에너지이며, 열과 일이 정량적으로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확신은 그밖에도 여러 학자들에게서 나타났던 것이며, ‘시대는 무르익은 탓’이랄지 에너지 보존원리―나중에 열역학 제1법칙이라 부를―과학사상 가장 두드러진 동시 발견의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움직임에 기여한 사상적 요소로는 주로 계몽사조(Enlightenment)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에서 18세기 말부터 퍼져 19세기 초 20년 간 최고조에 달했던 자연철학사조(Naturphilosophie)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모든 자연 현상에 적용되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를 추구했던 자연철학주의자들의 노력은 에너지 보존의 발견에 적합한 철학적 배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특히 영국 과학의 특성을 잘 드러냈던 쥴은 열과 일의 상호변환을 보이는 실험적 연구로서, 1845년 역학적 일이 생성될 때 열은 정량적으로 소모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324. 1847년 톰슨(William Tomson, 1824~1907)은 이러한 쥴의 결론이 카르노의 견해와 모순됨을 인식하게 됐다. 카르노의 열 기관은 높은 온도에서 열을 낮은 온도로 보내고(즉 열이 보존되고) 일을 하는 것인데 비해, 쥴의 주장은 생성된 일에 비례하는 양의 열이 소모되고, 열과 일을 합친 양이 일정하다는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1851년에는 에너지가 물리학의 기초 개념으로서 물리학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며 변환 속에서의 통일적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하여 우주의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을 이제 역학적 에너지의 변형의 형태로서 인식된다.


역사적으로는 에너지 창조의 불가능성, 즉 영구 기관의 제작의 불가능성을 증명해 보인 카르노의 논의가 그 사상적 유산으로서 열역학의 법칙들을 탄생시킨 것이며, 따라서 열역학이라는 전문 분야는 증기 기관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325.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저절로 솟아 올라가는 일은 없다. 화로에서 꺼낸 부젓가락이 식지 않고 더 뜨거워지는 일은 없다. 영원히 사는 목숨은 없고,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일어나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시간은 과거로 돌이킬 수가 없고 오직 미래를 향해 흐를 뿐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일상적 경험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자연계의 변화 방향성에 대한 규정이었고, 제1법칙은 열과 일의 상호변환에서 그 합이 보존된다는 진리의 천명이었다.

                                                                   

 326. 열역학 제2법칙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1850년으로부터 15년 간 클라우지우스는 하나의 물리적 양을 써서 자연 세계 변화의 방향성을 수학적으로 간결하게 표현코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 속의 모든 변화에서 ‘에너지’는 항상 보존되는 양이고, 변화의 방향성을 나타내면서 항상 증가하는 양이 ‘엔트로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존재론적으로 에너지와 동등한 것도 아니었고, 측정의 결과로 추론된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를 수 없다는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추론된 임의적 개념이었다.                                                               

                                                          

 329. 엔트로피 법칙은 가리켜 물리학자 에딩턴은 자연계의 최고 법칙이라 하고, 엔트로피를 가리켜 ‘시간의 화살(Time Arrow)'이라 불렀다. 아인슈타인(Alvert Einstein)은 결코 붕괴되지 않을 유일한 물리학 이론으로서 고전열역학에 감명받았다고 술회했다. 섀넌(Claude Shannon)이 ’정보 엔트로피‘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낸 것말고도, 엔트로피의 개념은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예술 분야까지도 파고들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어느 면에서 엔트로피 법칙의 위력을 보여준다 하겠다.


엔트로피 법칙이 인류의 에너지에 관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의 변화에는 거스를 수 없는 방향성이 있어서, 低 엔트로피의 농축된 에너지들로부터 高 엔트로피의 분산된 에너지로 바꾸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석탄이라는 쓸모 있는 에너지를 태워 이산화탄소라는 쓸모 없는 형태, 즉 쓰레기를 만드는 변환만이 가능함을 일러주고 있다.

                                                                     

30.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 진리로 천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이른바 발전에 의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한편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연 세계에서의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한계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세계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 성장이란 결국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속적으로 높임으로써 끝장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현상이 되고 만다.


문명이 야기시키는 쓰레기(엔트로피)를 처리하는 데에는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 최상의 지속적 방법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귀결점에 이르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엔트로피 법칙은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 또는 서양의 근대 이전의 자연관과 만나게 된다. 엔트로피 개념이 제시하는 성장 한계론 또는 반성장론이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해 시사하는 바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331. 이러한 자성의 소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전통적 사고 체계였으면서도 어느새 실종되어 버렸던 동양적인 자연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며, 그것들이 결국 저엔트로피 사회의 추구를 의미했던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마도 저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하는 발전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예컨대 천인합일사상과도 잘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상 속에는 ‘우주는 근본적으로 우주적 생명의 합류점이요, 상생(相生)이다. 거기서는 물질적 상태와 정신적 현상들 사이에 어떠한 괴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 물질과 정신은 일종의 삼투상태로서 서로 합일되어 인간의 삶과 우주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 체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전체론적 모습이었다.


이러한 동양의 전통사상, 그리고 또한 서양의 근대과학 이전의 여러 사상을 현대의 과학기술 사회에 가져와 재해석한다면 현재의 고도의 물질 문명이 봉착한 갖가지 부정적 측면으로부터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상당히 절실해 보인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우선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주는 새로움이 이 책을 열게 만들었다.
무언지 모르지만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번역판에는 제목 위에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이라고 씌여있다.

한참을 이 ‘Entropy' 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책을 두 번째 읽을 때에는’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이라는 말이 더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오랫동안 함께 만나오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일찍 ‘녹색평론’을 읽고 있었고 '여럿이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해 온 사람들이어서 제레미 리프킨이 강조하고 있는 말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방향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방대하고 섬세한 정보는 없었다. 번역자를 알고 있다는 감정의 쏠림이 없었으면 더 일찍 제레미 리프킨을 알고 지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제레미 레프킨은 말을 하듯 쉽게 책을 써내려가는 것 같다.


우선 저자 서문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내어 놓는다.

이 책에서는 그릇된 환상을 부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진리를 세움으로서 실현 가능한 현실을 만들어가자는 희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단다.


다시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엔트로피 법칙이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시대의 선구자가 될 것”이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이 그렇게 발전했는지 검증을 해 볼 일이다.


역자서문에서는 82년 방학을 이용해서 미국에 갔을 때 이 책을 발견했고 바로 번역을 했단다. 83년에 처음 출간했는데 사실, 번역을 할 때는 별 기대가 없었는데 20판을 넘기고 또 롱 셀러가 된 데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는 92년 개정판으로 다시 읽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제목을 들어봤을 만큼 알려진 책이고 많이 읽힌 책이다.


구조를 살펴보자.


제1장 세계관-11

제2장 엔트로피 법칙-45

제3장 엔트로피-새로운 역사의 틀-80

제4장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119

제5장 엔트로피와 산업시대-143

제6장 엔트로피-새로운 세계관 213


요즈음 책이 만들어지는 방법 중의 하나는

저자의 강의를 녹화하고 풀어서  다시 저자에게 돌려주면 저자가 수정보완을 하던지,

아니면 거의 다시쓰는 수준으로 가던지 해서 완성된 책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강의로 먼저 시작햇던 책들은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신경림 시인은 시를 쓸 때에도 다 쓰고 난후 입으로 다시 소리를 내어보라고 하고 구본형 선생님도 저자에 대하여를 쓸 때나 내가 저자라면을 쓸 때 모든 내용을 잘 소화시켜서 입에서 리듬감 있게  굴려져서 나오는 글을 쓰라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이 말들이 잘 이해가 된다.

어떤 경우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도 어렵게 설명된 책들이 있다.

이런 때에는 이렇게 씌여진 책을  집어던지며 더위에 대한 화풀이를 할 수 있어서 좋다.

비록 화가 풀린 후에 다시 가서 집어오는 한이 남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려울 것 같은 주제인데도 쉽게 읽혔다.

일단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저자가 하고자하는 말이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활용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잇는 지구를 분석해 놓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불편함들을 매우 분석적으로 정확한 통계수치나 역사적인 자료를 활용해서 설명해 두었기 때문에 “ 에... 또 145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숫자는 틀린 것 같은데요....” 이렇게 반박을 해볼 수가 없다. 이미 저자가 정학한 통계자료와 출처를 먼저 잘 밝혀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불편함들을 우리도 한번은 느껴 봤기에 곧바로 공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에서 특히 6장 새로운 세계관 중에서도 235쪽 “엔트로피 사회의 가치와 제도들”을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가끔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본인이 전과 성격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만히 얘기를 더 들어보면 스승을 만났던지, 책을 읽었던지, 새로운 자극을 접하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일이 선행했을 때 이런 말을 한다. 그럴 때에는 성격이 달라졌다고 하기 이전에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임으로서 전과는 다른 태도로 반응하고, 또 다른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즉 , 가치관에 변화가 온 것이다.


어쨋든 , 고엔트로피로 가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인격이 앞서야하는 윤리적 태도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나의 가치관이므로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게 정리되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글이 흥미를  불러 일으켜서 도서관에 가서 구할 수 잇는 그의 책은 다 찾아들고 왔다.

특히 1996년에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생명권 정치학>은 환경을 다룰때 꼭 알아 두어야 할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었다.

엔클로져 운동, 아마존의 열대우림의 파괴 , 소가 사람을 잡아먹고, 지정학과 자연의 죽음 등 , 우리가 직관으로 느낀 반미 문화에 대한 설명을 돕는 역사적 배경지식을 많이 설명하고 있다.

<수소 혁명> 과 <바이오 테크 시대>도 읽었는데, 대체 에너지 개발에 대한 심각한 요구와 유전자공학에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인식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친 걸음에 토머스 프리드먼의 <코드 그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도 읽기 시작했는데 설명이 매우 잘 되어 있는 책이다.


그러나 즐겁게 이 책을 읽고 있다가는 50쪽" Me- story" 를 완성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 같아서 우선 발밑에 있는 뜨거운 불을 먼저 다루려고 한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발칸반도에서 볼캐노 사이에 앉아서 읽으면 정신이 번쩍들고 태도에 변화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레미 리프킨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프리드먼은 1953년생이고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이 책은 2008년 출간되었고 한국에서 2008년에 번역출간 되었다.


우리 정부의 새로운 그린 정책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도 필독을 해야 할 것 같다.


IP *.248.91.49

프로필 이미지
범해
2009.07.31 01:37:57 *.248.235.10
미완성 입니다.
사무실에서 아주 오래된 컴을  사용하고 있어서
몇배나 더 공을 들여야 겨우 글을 올릴 수 있어요.

나머지는 집에가서 보충하려고 합니다.

아직 읽지 마시고 좀 기다려 주세요.
프로필 이미지
해운
2009.08.04 07:39:16 *.248.91.49
매주 월요일 정오까지 글을 올려야하는 것이 
연구원  북리뷰의 규정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했습니다만...

시간은 엔트로피의 화살이다.(에딩턴)
이 세상 어디서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세상의 에너지는 소비되고 총 엔트로피는 증가합니다.(66쪽)

다음주와 다다음주는 크로아티아 여행중이어서 북리뷰 올리지 못합니다.

8월 24일  앨빈 토플러로 다시 북리뷰할 때까지
여기까지 찾아와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도 여름을 잘 지내고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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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6] 숙인 2009.07.19 1836
1956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4] 書元 이승호 2009.07.19 2062
1955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4] 혁산 2009.07.19 2053
1954 나를 명품으로 만들어라 - 리처드 N. 볼스 [1] 혜향 2009.07.14 2326
1953 [15] <나를 명품으로 만들어라> 수희향 2009.07.14 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