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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일 02시 48분 등록


“엔트로피” – 제레미 러프킨 지음/ 이창희 역/ 세종연구원

 

 

저자에 대하여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1945년 1월 26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비닐 가방 제조업자인 비비테 라벨 리프킨과 밀튼 리프킨 사이에서 출생했고 어린 시절 시카고 남서부 지역에서 자라났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터프스 대학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 관계학 석사학위를 각각 취득하였다. 1977년에 'Foundation of Economic Trends (경제동향재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1993년 'Beyond Beef Coalition'을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4년부터 와튼 스쿨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전공인 경제학과 국제 관계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분야를 아우르며 과학과 자본에 중심을 둔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 및 이에 의존적인 현대인의 생활방식, 그리고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과학 기술의 폐해 등을 날카롭게 비판해 오고 있다. 그의 선구자적인 의견 제시로 인해 그는 미국 및 국제적 공공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전세계 지도층 인사들과 정부 관료들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이슈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핵심에 있는 것들이다. 그는 과도한 에너지의 사용에 따른 오염 및 환경 파괴의 위험과 과학기술의 재앙적 남용을 경고하며 유전자 조작에 반대한다. 또한, 세계관적으로 인류가 기본으로 가정하고 있는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수정을 요구한다. 노동 양태의 변화와 인터넷 발달에 따른 새로운 접속 중심의 소유 관계의 변화도 들춰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파묻혀 놓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들춰내어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과학적 관점에서 그것이 왜 중요한 이슈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향후에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강력한 통계 사례와 참조문헌을 가지고 우리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슈의 함의를 파악한 후에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힘을 합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까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문명 비판가로까지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논조는 행동주의적인 그의 운동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초기 학력은 사회적인 기준에서 보아도 화려하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의 경제학 학위와 보스톤에 있는 명문 터프스(Tufts) 대학원에서의 석사 학위(국제관계법과 외교학을 전공)은 화려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는 보증 수표였다. 실제로 그의 동기들이 화려한 월가의 애널리스트나 다국적기업에서 CEO 자리에 오른 반면, 그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그러한 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 같은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는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그가 버트란드 러셀 재단의 일을 맡아 하고 있을 때,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부대의 활동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전해들은 미군 부대의 잔학성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그 후 그는 미군 전쟁 범죄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위원회'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반전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70년대 초 워싱턴 DC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먼저 결성한 조직은 1971년에 만든 ‘새로운 아메리카 운동’이었으며, 이 조직은 다음해에 ‘200주년 국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 후 ‘국민기업위원회’를 조직하여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기존 경제 시스템의 민주적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을 시작한다. 리프킨은 77년에 현재 그가 활동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경제동향 연구재단’을 세웠다. 그가 처음에 주로 다룬 이슈는 노동 문제였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환경 문제, 유전자 변형/조작 문제, 그리고 에너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게진 하기 시작했다.

 

그는 17권에 이르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썼으며, 그 책들은 무려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 출판 되었다. <노동의 종말>은 정보화로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인간의 노동이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으며 노동 시간의 삭감을 위한 사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바이오테크 시대>는 유전자의 시대가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생명공학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환기시켰으며,<소유의 종말>에서는 문화마저 자본에 잠식되어 ‘소유의 시대’는 가고 ‘시간과 체험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모든 경험과 시간이 상품화되는 현대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또한 <수소 혁명>에서는 경제, 정치, 사회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소 에너지 체계의 미래를 진단하고, 에너지의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단순히 저술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책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한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그는 책으로 벌어들인 돈을 시민운동을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문제들이 우리의 생활과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핵심적인 이슈이다 보니 그가 제기한 문제가 가지는 영향의 유/불리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넓은 시야로 사회 구조와 미래를 바라보는 탁월한 사상가로 보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라는 <타임>지의 표현대로 사이비 저술가로 매도하기도 한다. 장장 17권에 달하는 저서를 통해 매번 핫 이슈를 다루어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그는 어쨌든 사람들로부터 항상 관심의 초점이 되는 대상이었다. 리프킨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그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리프킨은 경제학과 국제 관계학을 전공했으며, 정식으로 과학 교육은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땨라서 비판자들은 그 점을 꼬집으며 리프킨이 몇몇 과학적 사실을 수집하여 근거 없는 종말론적인 사상을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그의 초기 문제작인 <엔트로피>는 엔트로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하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새롭지 않은 주장을 풍부한 실례를 통해 대중을 설득하는 그의 역량만큼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부 세계관의 변화

 

세계관

 

세계관이란 것은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철저히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19]

 

세계관은 우리의 현실인식과정에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있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20]

 

현대의 세계관이 형성된 것은 약 400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17세기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의 영향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20]

 

엔트로피 법칙! 이제 새로운 세계관이 떠오르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 제 2 법칙이다. 제 1 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제 2 법칙(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규정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 불가능한 상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20]

 

본질적으로 제 2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일정한 구조와 가치로 시작해서 무질서한 혼돈과 낭비의 상태로 나아가며, 이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란 우주 내 어떤 시스템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지구상이건 우주건 어디서든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21]

 

먼저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가 진보의 과정이라는 가설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질서있는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가설을 파괴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세 기독교 세계관이 매우 설득력 있는 뉴턴의 우주관으로 대치되었듯이 이제 엔트로피 법칙이 당시의 뉴턴 역학만큼이나 강력한 설득력으로 오늘날의 세계관을 뛰어넘는다.[21]

 

엔트로피 법칙은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진리를 파괴해 버린다. 엔트로피 법칙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왜 무용지물인가를 이해하게 해 준다.[21]

 

엔트로피 법칙이 물리적 세계 – 모든 것이 유한하고 모든 생물체가 삶의 과정을 마치면 그 존재가 종식되는 세계 – 만을 다룬다는 것은 중요하다. 엔트로피 법칙은 시간과 공간의 수평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정신적 초월이라는 수직적 세계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정신적 차원은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철칙에 의해 지배되는 차원이 아니다. 정신은 비물질적 차원으로 어떤 경계나 제한도 없다.[23]

 

어떤 문명이 그 내부의 물질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그리고 그 문면이 존재의 물질적 차원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는가에 따라 정신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행위의 조건이 결정된다.[24]

 

열역학 법칙은 물질 세계를 지배한다. 인간이 물질적 존재의 틀을 확립하는 데 있어 이 법칙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영역이 번영하느냐 쇠퇴하느냐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24]

 

그리스인들과 역사의 다섯 단계 순환과 몰락

 

우리 현대인들은 일주일에 40시간 일하고 1년에 2,3주 정도 가지는 휴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렵 채취인들에게 있어 이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존재하는 수렵 채취인을 보면 그들은 일주일에 12~20시간 밖에 일하지 않고 몇 주, 몇 달에 걸쳐 전혀 일을 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를 하거나 스포츠, 예술, 음악, 춤, 제례 의식, 상호 방문 등으로 여가시간을 즐긴다. 또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수렵채취사회 구성원들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들의 먹거리는 영양이 풍부하며 그들 중 상당수가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60세가 넘도록 잘 산다. 많은 수렵채취사회에서는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구성원간 또는 다른 조직간 적대행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27]

 

기독교적 세계관

 

중세 전반에 걸쳐 서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적 역사관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음 생을 향해 가는 중간 과정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리스적인 순환의 개념은 버렸지만 역사를 쇠락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과정, 종말을 가지고 있다. 창조, 구원, 최후의 심판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원죄’ 개념이다. 원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여지조차 박탈당한다. 인간이 역사에 뭔가 변화를 가하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중세 사람들은 신이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제하는, 완벽하게 질서 정연한 구조물로 세상을 파악했다. 그러므로 개인적 목표도 없었고, 진보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뭔가를 남기려는 열망도 없었다. 신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인간의 목표는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30]

 

현대적 세계관

 

튀르고는 역사의 순환과 지속적인 쇠락을 거부했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 준다. 역사는 축적의 산물임과 동시에 진보하는 것이다.” 정체 상태를 찬양한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중세 교회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튀르고는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의 미덕을 역사에 도입했다.[33]

 

기계의 시대

 

현대는 기계의 시대이다. 정밀, 신속, 정확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기계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며, 우리의 세계관은 기계에 집약되어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 역사는 기술 발달의 과정이다.[34]

 

기계가 우리 내부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버렸기 때문에 기계가 어디서 끝나고 우리는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이미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기계의 언어이다.[35]

 

기계론적 가치관의 창시자들

 

기계론적 세계관은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 세 사람의 공동 작품이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들이 만든 사상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37]

 

베이컨에 의하면 “객관적 지식으로 무장하면 모든 자연물을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 의학, 기계적 힘 그리고 무수한 다른 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베이컨은 현대 실용주의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 베이컨을 생각하면 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 “증명해봐.” “사실만 얘기해.”

 

베이컨이 새로운 세계관의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사람은 수학자인 데카르트였다. 그는 막 문을 연 새 집의 평면도를 들고 왔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아이작 뉴턴이 상점을 열고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가져왔다. [39]

 

데카르트는 기계 패러다임의 금과옥조가 된 다음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다. “나는 수학이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지식 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수학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드디어 최초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진정한 신봉자’가 나온 것이다.[39]

 

데카르트는 자연을 단순히 움직이는 물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는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치했고 “중요한 것은 오직 공간과 위치이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40]

 

기계론이 세계관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측이 가능해야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연의 법칙을 바꿔버리는 신 같은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데카르트는 신을 교묘한 방법으로 ‘은퇴’시켰던 것이다.[40]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의 진리를 알아내고 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심어 주었다. 그러자 뉴턴이 나타나 그 신념을 실현할 도구를 제공했다. 뉴턴은 기계적 운동을 설명할 수학적 방법론을 찾아낸 것이다.[41]

 

뉴턴의 3대 법칙은 이렇게 가르친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정지하고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직선운동을 하려고 한다. 물체의 가속도는 그 물체에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그 방향은 가해진 힘이 가리키는 직선 방향이다. 모든 힘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이 작용한다.”[41]

 

기계론적 세계관은 운동하는 물체만을 다루었다. 왜냐하면 운동하는 물체만이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계관은 기계를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창시자들은 생명의 질을 분리해서 죽여버렸고, 그 결과 남은 것은 완전히 죽은 물질만으로 구성된 차갑고 생명 없는 우주뿐이었다.[42]

 

기계론적 우주관은 천하 무적임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예측가능하며 무엇보다도 실효성이 있었다.[42]

 

인간은 새로운 삶의 목표를 얻었다. 사후 세계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중세의 목표는 이제 사라지고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목표가 그 자리를 채웠다.[43]

 

우주의 법칙과 사회의 기능 원리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정부와 사회의 역할을 기계 패러다임 안으로 끌어들인 존 로크와 경제를 기계론 안으로 끌어들인 애덤 스미스였다.[43]

 

일단 쓸데없는 관습과 미신을 타파하고 나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창출해 내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는 단 한 가지의 목표만을 갖게 된다. 구성원의 재산 축적을 보호하고 허용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로크에 따르면 순수한 자기 이익의 추구가 사회 구성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는 유물론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각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경력을 쌓아나가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는 어떤 가치 판단도 필요 없다. 자기 이익이야말로 사회의 유일한 기반이기 때문이다.[44]

 

“인간은 본성상 획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가 가진 부의 총량을 계속 늘려가기만 하면 사회의 조화는 끊임없이 개선될 것이다.” 이리하여 로크는 무한정한 확장과 물질적 풍요의 철학자가 되었다.[45]

 

사람은 부를 창출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환경론자에게는 끔찍한 일이겠지만 로크는 “자연은 인간의 노동과 합쳐져 생산성을 가져야만 비로서 가치 있는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46]

 

로크로 인해 현대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의 생존 의미와 목표는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47]

 

경제학의 법칙을 들여다 보면 가장 효율적인 경제 운영 방법은 자유방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다. 자유 방임이란 아무 것에도 참견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존 로크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도 모든 인간 활동의 기본은 물질적 자기 이익의 추구라고 믿었다.[47]

 

두 사람의 주장대로라면 각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따라 부의 희소성은 부의 잉여로 바뀔 수 있다.[48]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본 가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 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혼돈과 혼란 속에 있다.  따라서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질서를 지구상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해 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역학의 과학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익이 증대되는데 가장 적합하도록 자연을 재배열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패러다임의 논리적 귀결은 간단하다.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 시키는 것이 되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천하는 도구다. 이것이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주요 가설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다.[49]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 이론은 뉴턴의 과학적 발견 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진화론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무대에서 밀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구성원리로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은 뉴턴이 제창한 기계론적 세계관의 부록이 되고 말았다. 그보다는 다윈 이론의 좀 더 피상적인 부분 몇 개가 채택되어 기계론적 세계관을 더욱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50]

 

기계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진보라는 개념이다. 진보란 ‘덜 질서 있는’ 자연적 세계가 인간에 의해 이용되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즉, 진보란 자연에 존재했던 최초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자연으로부터 창출해 내는 것을 말한다.[51]

 

기계론적 세계관, 수학, 과학, 기술의 세계관, 유물론과 진보의 세계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은 이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에너지 환경이 빈사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51]

 

 

2 부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 법칙 :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 1 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제 2 법칙).[56]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는 창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여기에 성공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에너지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는 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형태, 모습, 운동은 에너지를 여러모로 집중 변화시킨 결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인간, 초고층 빌딩, 자동차, 풀 한 포기 등은 모두 에너지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57]

 

2 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에너지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낸다.” 여기서 벌금은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화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57]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이 된다. 사람들은 오염이 생산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염이란 것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된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을 의미한다.[58]

 

오염이란 엔트로피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엔트로피란 어떤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무용한 에너지의 총량을 나타낸다.[59]

 

식어버린 부지깽이나 바닥의 물은 더 이상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다. 이 때 이들의 에너지는 구속된 에너지이며, 무용한 에너지이다.[59]

 

평형상태는 엔트로피가 극대점에 달한 상태이며,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롭고 유용한 에너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상태이다. “엔트로피는 극대점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59]

 

고립된 시간과 장소에서 엔트로피 과정을 역행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은 증가한다. 이러한 사실은 재생과정에서 특히 중요하다.[60]

 

예를 들어 오늘날 금속의 재생효율은 30% 정도이다. 재생을 위해서는 재생 대상을 수거하고, 수송하고 가공하는데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환경 전체의 엔트로피 총량이 늘어나게 된다.[61]

 

엔트로피 법칙은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느끼기도 해야 한다. 이 법칙의 핵심은 바로 진실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종의 직관이 필요하다.[62]

 

어떤 장소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있고 인접한 장소에는 매우 적은 에너지가 있을 경우 에너지는 항상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동한다. 이 현상은 “민주화를 향한 경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62]

 

수많은 사람들이 엔트로피 법칙을 피해가려고 몸부림쳤다. 사실 이 ‘피해가기’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매우 즐기는 소일거리였다.[63]

 

엔트로피 법칙은 폐쇄계에서 모든 에너지는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이동해 간다고 가르친다. 엔트로피가 최소인 상태, 그러니까 집중도가 가장 높고 유용한 에너지가 가장 많은 상태가 가장 질서 있는 상태이다. 반면에 엔트로피 값이 최고인 상태, 그러니까 유요한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고 확산된 상태는 가장 무질서한 상태이다.[67]

 

그냥 내버려두면 어느 것도 저절로 더욱 질서 있는 상태로 옮겨가지 않는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그냥 내버려두면 점점 더 무질서해진다. 이것을 질서 있는 상태로 되돌리려면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한다. [67]

 

한 곳에서 엔트로피 증가를 역행시키려면 다른 곳에서 엔트로피를 증가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국 주변 환경의 전체 엔트로피는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소실되며, 따라서 미래에는 결코 쓸 수 없는 무용한 상태로 되기 때문이다.[67]

 

인간 또는 기계에 의해 국부적으로 감소되는 엔트로피는 반드시 주변 환경에서 더 큰 엔트로피의 증가를 수반한다. 이렇게 해서 엔트로피의 총량은 늘어나게 된다.[68]

 

우주론과 제 2 법칙

 

과거 일정 기간 동안 지구는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또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막으려면 뭔가 조치를 해야 하는데, 그 조치는 현재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69]

 

시간, 형이상학, 엔트로피

 

뉴턴의 법칙은 수학에 입각해 있으므로 움직이는 물체의 모든 변화는 이론상 가역적이다.[73]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한 방향, 즉 앞으로만 흘러간다. 이 방향은 또한 엔트로피 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항상 쓸모 있는 상태에서 쓸모없는 상태로 움직여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주변에서 발생하는 엔트로피 변화를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다.[74]

 

뉴턴 역학에 기초한 오늘날의 패러다임은 엔트로피 법칙을 무시하여 시간이 독립된 과정이라는 환상을 낳았다. [75]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창시자들은 세상이 혼돈에서 질서를 향해 “진보한다”고 외쳤다. 이런 관점은 시간과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관점이다. [75]

 

시간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만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양은 소비된 에너지의 양에 비례한다.[75]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시간의 방향을 알려 주기는 하지만 속도를 알려 주지는 못한다. 사실 엔트로피 과정은 끊임없이 속도를 바꾼다.[76]

 

우리는 시간을 뒤로 돌리거나 엔트로피 가정을 역행시킬 수는 없다. 그것인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엔트로피 과정이 발생하는 속도를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 행하는 모든 활동은 엔트로피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늦춘다. 우리가 삶의 방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지구상의 유용한 에너지를 얼마나 빨리 혹은 얼마나 천천히 소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과학은 형이상학 및 윤리학과 만나게 된다.[77]

 

생명과 제 2 법칙

 

과학자들이 생명체와 제2법칙을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평형 열역학이 폐쇄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계는 주변 환경과 에너지를 교환하지만 물질을 교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명체는 개방계이다. 개방계는 주변 환경과 에너지 뿐만 아니라 물질도 교환한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평형 상태에 이를 수 없다. 평형 상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평형상태로부터 멀리 있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정상 상태’라고 한다. 물질과 에너지가 생명체를 통해 흐르는 것을 멈추면 정상 상태는 깨지고 이 생명체는 평형 상태, 즉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주요 관심사는 엔트로피가 아니라 자유 에너지의 흐름이다.[79]

 

버트란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명체는 주변 환경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변화시켜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에너지 사냥의 과정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를 자신의 시스템으로 통과 시키면서 소비하고 결국 무용한 에너지로 만들어버린다. [80]

 

에너지는 모든 생명체를 통해 계속 흘러가며 높은 수준에서 생명체로 들어가 낮은 수준에서 빠져 나온다.[81]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위기는 전환의 위기이다. 다음 시대로 가면 인간은 절정 단계로 옮겨가서 인간 및 사회 시스템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극소화하는 방향으로 활동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그러한 전환에 실패한 수많은 생물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82]

 

엔트로피 법칙은 진화로 인한 생명체의 활동으로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든다고 말한다.[83]

 

신체 외적 도구와 에너지

 

사회 발전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질서의 섬’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지속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능력을 통해 생존한다. 또 문화는 더 큰 환경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수단이 된다.[85]

 

수세기에 걸쳐 칠해지고 덧칠해진 문화의 페인트를 한 겹씩 벗겨가다 보면 그 밑바탕에는 유용한 에너지가 계속 변환되고, 교환되고, 폐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85]

 

어떤 사회에서든 권력은 에너지를 변환, 교환, 폐기하는 신체 외적 도구를 통제하는 사람이 장악한다.[86]

 

 

3 부 새로운 역사관의 틀 – 엔트로피

 

역사와 엔트로피 분수령

 

개인 차원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고 있을 때 그 방식을 바꾸고자 노력한다.[92]

 

개인의 역사는 사회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행복은 공백 상태를 남기고 위기는 발명의 시대를 남긴다.[92]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볼 때 수렵 채취인들은 필요에 의해 농경을 시작했다. 사냥감과 식용 식물은 점점 줄어들었고 새로운 사냥터도 사라졌고 활동영역을 넓힌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생존 위기에 직면한 이들은 실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결핍, 위기, 실험”의 이론을 뒷받침한다.[94]

 

역사란 제2법칙의 반영이다. 엔트로피 과정은 항상 극대점을 향해간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량의 에너지는 영원히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에너지원 자체에 대한 질적 변화를 꾀하는 때가 이른바 역사의 분수령이라는 시점이다. 바로 이 전환의 시기에 낡은 방식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회의 엔트로피 총량은 너무 커져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 태어나며 새로운 사회, 경제, 정치 체제가 형성된다.[95]

 

엔트로피 법칙은 유용한 에너지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렇게 새로 형성된 환경이 앞선 환경보다 더 열악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이유는 각 단계를 지날 때마다 이 세계가 갖고 있는 유용한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계의 전체적 무질서는 항상 증가하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감소한다. 인간의 생존이 유용한 에너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갈수록 열악해지는 환경 속에서 버티려면 일을 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열역학 환경에서는 인간의 육체만으로 늘어난 작업을 감당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적절한 수준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복잡한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던 것이다. 뉴턴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은 이런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95]

 

뉴턴 추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보의 과정이며 인간은 먼 옛날보다 훨씬 잘 산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고의 배경에는 근본적인 가설이 깔려있다. ‘에너지의 흐름이 클수록 사회는 더욱 효율적이 되고 문면은 더욱 진보하며 세계는 더욱 질서있게 된다.’ 이제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인류가 기술 발전을 이룩할 때마다 에너지를 추출하고 소비하는 과정이 더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결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유용한 쪽에서 무용한 쪽으로만 변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효율성이 한 단계 높아질 때마다 에너지의 분산과 무질서의 증가만이 가속화되었을 뿐이다.[96]

 

일이란 간단히 말해서 유용한 에너지를 써버리는 것이다.[96]

 

지구라는 폐쇄계에 내재하는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 스스로를 완전히 구할 수 있는 길이다. 의지력을 발휘하여 이제까지 우리가 지구에 입힌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자연적 재생 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준다면 우리와 모든 생명은 지구상에서 오랫동안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98]

 

최후의 에너지 분수령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서유럽은 엔트로피의 분수령을 거쳤다. 중세의 에너지 기반이었던 나무는 점점 구하기 힘들어졌고 인구 증가로 인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석탄을 발견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생활방식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즉 나무에서 석탄으로의 경제기반의 변화야말로 중세에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산업혁명의 첫 장을 연 것이다.[101]

 

중세 에너지 위기가 얼마나 심각해졌는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나무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화석연료처럼 나무는 모든 곳에 쓰였다.[104]

 

오늘날 우리는 나무를 석탄으로 대치한 것이 대단한 발전이며, 진보를 향한 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의 먹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석탄은 열등한 에너지원으로 천대 받았다. 석탄은 더러웠고 많은 오염 물질을 내 뿜었다. 석탄은 또한 나무보다 캐기도 힘들고 처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사용 가능한 형태로 바꾸기까지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했다.[106]

 

인간은 가장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에너지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사람들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에너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나무를 베는 것보다 석탄을 캐고 처리하는 것이 힘들다. 유전을 개발하고 석유를 뽑아 올리는 것은 더 어렵다. 원자력 발전은 더더욱 어렵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뭔가 좀 더 나은 방법을 발명하면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진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사실 이른바 ‘더 나은 방법’이란 에너지를 추출하기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개발된 ‘다른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은 궁극적으로 앞선 단계보다 더 많은 일 또는 에너지를 요구한다.[106]

 

역사 전체에 걸쳐 기술의 질적인 변화는 항상 더욱 복잡하고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환경의 변화는 항상 덜 유용하고 캐기 힘든 에너지원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108]

 

기술

 

사실 기술은 결코 에너지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기존의 유용한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기술의 규모가 크고 복잡할수록 에너지 소비량도 많아진다. 이 모든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환경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112]

 

기술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리 끌고 가는데도 우리는 바로 이 기술 때문에 자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문화 패턴과 개인 생활 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자연의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112]

 

외부 비용

 

‘외부 비용’은 엔트로피 법칙의 결말을 피해 가려는 손쉬운 방패일 뿐이다.[114]

 

모든 기술은 주변 환경에 더 큰 무질서를 창조하는 대가로 일시적인 ‘질서의 섬’을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진실이다.[115]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 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그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115]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문제는 커지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따라서 무질서도 늘어난다. 이 모든 과정은 지수함수적으로 진행된다. ‘지수함수적 성장’이란 두 배가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117]

 

기술의 수확 체감

 

에너지 흐름이 분수령에 도달하고 새로운 에너지 환경이 창출되면 과거의 에너지 흐름에 사용되던 낡은 형태의 기술은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아니면 에너지원이 고갈됨에 따라 쓸모없게 된다. 사회의 에너지 기반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갔을 때 발생한 기술적, 제도적 변화만 살펴 보아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122]

 

제도의 발달

 

위기가 닥칠 때마다 중앙 집중식 통제가 더욱 강화된다는 결과가 나온다.[123]

 

권력을 분산하고 책임과 통제권을 더 많은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위기가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123]

 

전문화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나친 전문화는 종의 멸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어떤 종이 특정한 생태계 내에서 지나치게 전문화되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즉 전환에 대비할 수 있는 융통성과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131]

 

세계관과 에너지 환경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문화 혹은 문명이 발전시키는 세계관은 그것이 속한 특정한 에너지 환경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에너지 환경이 변하면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도 변해야 한다. 즉, 환경에서 에너지를 변환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사람들이 주변 환경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나면 그들의 세계관도 새로운 환경을 반영하고 합리화하고 고무하고 설명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133]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변환하는 것으로 살아가던 문화는 세계를 끊임없는 계절의 순환으로 파악했다. 나고,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 과정은 질적인 과정이다. 에너지원은 생기와 다채로움으로 넘쳤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초기 기독교의 세계관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재생 가능한 자원에 입각한 에너지 환경의 모습을 보여 준다.[133]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환경에서의 석탄과 석유는 무생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고, 아무리 작아도 각 부분은 전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은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쉽게 계량화된다. 정확한 측정도 가능하다.[134]

 

학자들은 무한한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해서 세계 전채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사고와 손을 잡았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답 역시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찾을 수 있다. 사상 최초로 거대하고 끝없는, 비축된 태양 에너지가 나타났던 것이다.[134]

 

하지만 이제 뉴턴의 패러다임은 도전에 직면해 있고 이제 곧 포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떠나 다시 한 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옮겨 가려는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135]

 

 

4 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에너지 위기

 

미국인들의 에너지 소비행태를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하나 뿐이다. 그것은 ‘중독’이다.[139]

 

아무리 노력해도 인류의 미래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141]

 

합성 원료

 

모든 합성 연료는 뭔가를 합성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다.[142]

 

모두들 더 많은 연료를 원하고 있지만 아무도 자기 동네에 연료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145]

 

열역학의 법칙은 에너지를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순 에너지는 총에너지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투입된 에너지를 뺀 값읻. 이렇게 보면 합성연료는 효율성도 형편없다.[146]

 

핵분열 에너지

 

비싼 건설 비용은 제외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비용이 ‘원자력은 값싼 에너지’라는 신화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비용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및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킨다.[149]

 

“궁극적으로 원자력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로 대중이 핵폐기물 문제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151]

 

이 거대한 양의 폐기물을 ‘안전하게’ 파묻으려는 계획은 많지만 아직 안전이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다. 미국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고 인류문명의 역사라고 해봐야 수천 년에 불과하다. 인류문명의 역사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치명적인 방사능 물질을 저장해두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151]

 

핵융합

 

고온과 방사선 때문에 핵융합 발전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질 것이라고 말한다. 핵융합 수준의 방사선은 강철을 위시한 구조물의 강도를 매우 약화시킨다. 따라서 이들은 곧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부품을 교체해야 하고 이로 인해 가동이 자주 중단될 것이다. [155]

 

로빈스는 분열이든 융합이든 원자력은 버터를 자르려고 톱을 들이대는 격이라고 말한다.[156]

 

광물

 

에너지 자원의 고갈 자체는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물리적 한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고도의 산업경제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주요 재생 불가능한 광물자원은 거의 빠짐없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다.[157]

 

대체와 재생 그리고 보전

 

대체재는 일반적으로 당초 재료보다 효율이 떨어지고 따라서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든다. 또 어떤 물질은 특이한 성질 때문에 대체가 불가능하다.[161]

 

오늘날의 재생 효율은 대부분 금속의 경우 30% 정도이다. 그리고 재생은 또 한 번의 오염을 유발하며, 원료의 수거, 수송, 변환에도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대체재와 마찬가지로 재생도 기하급수적인 금속 수요 증가라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파국을 잠시 늦춰줄 수 있을 뿐이다. [162]

 

보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어떤 보전 계획도 한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소비 체제에 조금이라도 제약을 가하는 보전 계획은 에너지 흐름 여기저기에 심각한 왜곡 현상을 발생시킬 뿐이다.[162]

 

 

5 부 엔트로피와 산업 시대

 

경제학

 

오늘날의 인플레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고갈이라는 문제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환경으로부터 유용한 에너지원을 끌어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따라서 많은 비용이 요구됨에 따라 에너지 흐름 전 과정을 통해 변환, 폐기와 관련된 비용이 계속 상승한다. 그 결과 생산자의 입장에서든 소비자의 입장에서든 가격은 끝없이 상승한다. 에너지 환경이 완전 고갈을 향해 다가감에 따라 인플레는 더욱 격심해진다. [168]

 

에너지 수요 충당을 위한 전체 자본의 양은 점차 증대될 것이다.[169]

 

임금은 올라가지만 실질 구매력은 생활비 상승을 따라가지 못한다.[171]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학 이론은 개선되고 세련되어졌지만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 메커니즘의 기본 개념은 모든 고전 경제학에서 아직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74]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기계와 인간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과 기계는 기존의 가용한 에너지를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변환시킬 수 있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잠시 동안의 효용’을 만들어 낼 뿐이다.[175]

 

시장에서는 아무도 후손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아 있는 천연자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180]

 

농업

 

미국 농업은 인간이 고안해 낸 영농방식 중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다. 소 한 마리에 쟁기를 매서 밭을 가는 농부는 기계화된 현대 미국의 대형 농장주보다 투입된 단위 에너지당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183]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미국 농부들은 에너지 사용량을 계속 증가시켜 왔다. 에너지의 일부가 수확량 증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더욱 더 많은 양이 낭비된 것이다. 약간의 수확량 증가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부분적인 엔트로피 감소는 전체 환경에서 발생하는 엔트로피 증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184]

 

수송

 

자동차는 화석 연료 문화의 핵심적 부분이다. 화석 연료 시대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날, 자동차를 사고, 굴리고, 유지보수 하는 비용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전체 에너지 흐름에서 비용의 증가를 재는 좋은 척도가 된다. 자동차로 인해 발생하는 엄청난 무질서는 또한 어떤 경제체제가 엔트로피 법칙의 효과를 너무 늦을 때까지 고려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된다.[190]

 

고속도로와 자동차의 무서운 결합에서 발생하는 환경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192]

 

도시화

 

현대 대도시에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따라서 대도시 환경 내 엔트로피는 도시 존재 자체가 의문시 될 지경으로 급상승하고 있는 실정이다.[197]

 

이렇게 대도시가 겉잡을 수 없이 팽창한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에너지 환경이 크게 바뀐 데 기인한다. 도시는 주변 환경에서 유용한 에너지를 끌어 모아 이것을 저장하고 사용함으로써 살아간다. [198]

 

도시 팽창의 길로 들어선 순간 로마는 이미 쇠락을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가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더 많은 에너지가 흘러 들수록 무질서도 커졌다. 또한 무질서가 커짐에 따라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통치기구는 비대해졌다.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수가 없었다. 결국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이 거대도시는 안팎으로 와해되기 시작했고, 게르만 정복 후에야 에너지 평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도시가 주변의 자원 기반에 의해 가해진 제약을 무시하려고 부질없이 몸부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로마는 보여주고 있다.[200]

 

여러 가지 형태로 에너지를 대량 주입하지 않으면 도시는 쇠퇴하고, 실업이 생기며, 도시 생활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202]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엔트로피를 증대 시키는 도시 환경을 이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 되었다.[206]

 

군대

 

국방비 지출은 인플레를 부채질한다. 왜냐하면 군사 분야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지급되는 반면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은 시장에서 공급 증가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사일 같은 것을 일반 시장에 내다팔 수는 없다.[209]

 

옛날 군대는 밥을 먹고 이동했지만 오늘날의 군대는 기름을 먹고 움직인다. 그러나 석유는 고갈되어 가는 자원이다.[212]

 

결국 전쟁 준비는 인간 활동 중 가장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 시키는 활동이다.[214]

 

교육

 

사고 과정에 단계가 많을수록 일은 더욱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중앙 집중화 된다. 그래서 에너지가 더욱 분산되고 무질서가 발생한다. 인간 정신 발달의 역사는 인간의 정신을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에서 점점 멀리 떼어내는 과정이다.[219]

 

정보가 대량으로 늘어나면 에너지 소비도 크게 늘어난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은 무질서의 축적, 가속화되는 중앙집중화 및 전문화 그리고 엔트로피 과정이 더욱 빨라짐에 따라 나타나는 무수한 현상이다.[220]

 

정말 이상한 것은 입수 가능한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적어진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 보인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정보 과부하’라고 부른다.[223]

 

보건

 

오늘날 병원은 첨단 진단 및 치료 기기로 넘친다. 의료비가 자꾸 늘어나는 주 이유도 의료기기의 도입 때문이다. 집중화, 전문화, 정밀한 기기 등은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의료 분야에서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됨에 따라 이에 따른 무질서는 더욱 커진다.[230]

 

치료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이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병원, 약품 또는 사용된 기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을 말한다. 치료를 통해 어떤 증상이 일시적으로 완화되기는 하겠지만 이로 인해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건강 문제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230]

 

오염이란 사회의 에너지 흐름에서 축적되는 분산된 에너지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이 크면 클수록 오염도 커지고 그로 인해 죽는 사람도 많아지는 것이다.[234]

 

산업사회에서는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으로부터 발생한 폐기물이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이다.[237]

 

결국 사회 전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놓인다. 하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기반을 둔 저 에너지 소비 사회로 회귀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구 창궐하는 역병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237]

 

 

6 부 새로운 세계관 – 엔트로피

 

새로운 경제 이론을 향하여

 

‘영원한’ 물질적 번영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유한한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둔 엔트로피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241]

 

오늘날 우리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에 기초한 산업 사회에서 다시 한 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에 기초를 둔 사회로 이행해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 성공하려면 철석 같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헤라클레스적인 투지로 완전 무장해야 한다.[242]

 

에너지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맞는 새로운 기술과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는데, 태양 에너지 시대를 움직여 갈 변환자들은 화석 연료에 기초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변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243]

 

장기적으로, 산업 사회와 태양 에너지 사회의 기능적 차이는 중세와 산업 사회의 차이만큼이나 클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향해 옮겨 가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243]

 

3 세계의 발전

 

세계의 자원은 유한하다고 미친 듯 외치면서 미래 세대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세계 총인구에 비춰볼 때 부유한 소수에 불과하다. 풍요의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인간다운 생활 수준을 확보하는 것조차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246]

 

3 세계 국가들이 서양과는 다른 형태의 개발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에너지 소비가 많고 중앙 집중화 된 기술 대신 시골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노동 집약적인 중급 기술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구가 과밀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필요 없게 된다.[249]

 

부의 재분배

 

이제 경제가 위축되어 감에 따라 남은 자원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올 것이다. 따라서 각 계층간 싸움은 처절할 것이다.[251]

 

한 사회의 에너비(부)가 소수에게 너무 집중되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생존을 위협 받을 정도로 에너지 결핍에 시달리게 되면 그 사회는 붕괴되거나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252]

 

깨끗한 공기를 요구하려면 우선 자신들의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부를 좀 더 균등하게 재분배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자진해서 그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일으켜 줄 것이다.[253]

 

태양 에너지 시대의 새로운 인프라

 

태양 에너지 시대로 옮겨가려면 사회 모든 측면에서의 경제활동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집중적이고 정체적인 개념(화석연료)에서 분산된 흐름의 개념(태양에너지)으로 에너지 기반이 바꾸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면 기존의 산업구조가 태양 에너지 시대와는 전혀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255]

 

흐름으로서의 태양 에너지는 깨끗하고, 풍부하며,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라는 장점이 있다. 동시에 본질적인 단점도 있는데,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255]

 

“태양 에너지로 집 한 채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록펠러 센터에 난방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 에너지와 풍력을 합친다고 해도 엘리베이터 조차 가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록펠러 센터는 엘리베이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30, 50층을 걸어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슈마허의 주장은 대량 생산과 대도시의 삶이 태양 에너지 시대의 모델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257]

 

태양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우리의 기술과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검약과 탈 집중화를 지향하는 것이다.[257]

 

우리의 미래 에너지원은 태양이며,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기술집약적이며, 자원 집약적인 태양 에너지 시설을 건설하려는 헛된 노력에 계속 매달려 자원의 고갈을 촉진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와 자원의 흐름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려는 에너지 기반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다. [260] 

 

태양 에너지 시대가 되면 우리는 더욱 더 고대세계의 생활리듬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263] 

 

엔트로피 사회의 가치와 제도

 

1977년 미국 순회강연에서 E.F. 슈마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형이상학의 재건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한 우리의 깊은 신념을 분명히 밝히려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큰 의문들은 우리를 기다리는 저엔트로피 시대에 부활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엔트로피 환경에서는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의 윤리적 기준은 에너지의 흐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지나친 물질적 부는 소중한 자원을 돌이킬 수 없이 낭비하는 행위로 인식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주장은 한 때의 슬로건이 아닌 최고의 진리가 될 것이다. [266,267]

 

세계의 위대한 종교가 모두 동감하는 불멸의 지혜가 있다. 그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우주의 형이상학적 전체와 하나가 될 때 느끼는 해방감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당신이다.” 이 진리를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서 이해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이 진리에 따라 삶을 이끌어 가는 것 – 이것이 불멸의 지혜를 따르는 데서 오는 인간의 발전이다.[267]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믿었다. ‘문명의 본질은 욕구를 증가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를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포기하는데 있다.’ [268]

 

우리가 찬양해야 할 것은 절제, 단순함, 자발적인 가난, 한계의 인정 같은 것들이다. [268] 

 

산업사회는 생산의 목적이 소비에 있고 노동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지만 저엔트로피 사회에서는 노동이야말로 의식의 계몽상태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은 ‘우리는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아는 데 도움을 주는 활동으로 신성시된다. 저엔트로피 문화에서 노동은 수면, 명상, 놀이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삶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인식된다. 노동 없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노동은 무엇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존엄성과 목적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270]

 

저엔트로피 문화는 ‘최소한의 통치를 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저엔트로피 문화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며 이 둘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생명의 원천이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에서는 자연을 ‘정복’한다는 생각이 다른 생물과 전체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대치된다.[273]

 

태양 에너지 시대에 농업은 다양화된 유기 농법으로 바뀔 것이다. 또한 농작물을 멀리 떨어진 시장까지 수송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비용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고 따라서 소규모 지역 영농은 좀 더 경제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전거와 걷기가 중요한 이동 수단이 될 것이다.[278,279]

 

어떤 의미에서 45억이나 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엄청나게 변화시킨 결과 태어난 사람들이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의존한 산업시대는 인류역사의 0.02%밖에 되지 않지만 ‘인구증가의 80%가 이 기간 중에 이루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84]

 

유일한 대안은 엔트로피 패러다임을 완전히 내재화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의 수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85]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과거의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택하고 난 뒤에야 인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287]

 

과학의 개혁

 

 “세계를 자동기계로 보는 고전 물리학을 버리고 우리는 세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그리스적 패러다임으로 회귀하고 있다.” – 프리고긴 [293]

 

엔트로피 법칙은 이제 곧 과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서 뉴턴 역학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엔트로피 법칙만이 변화의 본질과 방향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 관련된 모든 것들의 상호 연관성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294]

 

교육의 개혁

 

오늘날의 교육이란 12세부터 16세까지 뉴턴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훈련 과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양, 거리, 위치 같은 것들은 열심히 가르치지만 질이나 개념 형성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295]

 

교육은 측정보다도 과정을 중시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고립된 인과관계의 연속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운동과 변화의 시나리오를 품고 있는 상호 연관된 현상의 그물로 파악될 것이다. [298] 

 

학문이란 조각가가 작업을 하듯 세상이란 재료를 깎아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서 물려받고 또 그 안에 속해 있는 이 세계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299] 

 

2의 종교개혁

 

동양 종교, 특히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에너지 흐름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인식해 왔다. 명상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늦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302]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접근방식은 생태계 파괴의 주요인이 되었다.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현재의 물리적 세계는 무시당했고 착취당하기까지 했다. 이 세계는 내세로 가는 정거장에 불과하다. [303]

 

오늘날 형성되기 시작한 창세기의 새로운 해석은 이렇다. 신은 하늘과 땅과 지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모두 중요하다. 죄악이란 신의 피조물을 신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오만을 말한다. 다른 방법으로 대한다는 것은 창조의 기본 취지와는 다른 목적을 위해 조작하고 착취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배라는 것은 자연을 착취할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학자들은 “지배란 자연의 시중을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303]

 

그렇다면 신은 인간과 약속을 한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신의 시중꾼으로 일해야 하며, 모든 피조물을 보전하고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약속으로 인해 인간은 신과 특별한 관계에 놓인다. [304]

 

시중꾼 이론과 열역학의 법칙을 정통 신학 이론과 결합하면 엔트로피적 세계관의 생태학적 전제와 부합하는 새로운 기독교 교리와 약속이 탄생한다. 시중꾼 이론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한다. “왜 내가 자연의 질서를 돌보고 보전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했고 인간에게 그것을 관리할 책임을 위탁했다.” [305]

 

엔트로피 위기

 

기존의 세계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첫째는 낙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착취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둘째는 실용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구조를 약간 수정하여 엔트로피적 세계관의 의미를 일부나마 반영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본질적으로 세계관의 시야가 한정되어 있게 된다. 셋째는 향락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 말기처럼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나게 놀아보자’를 주장할 것이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좋든 싫든 우리는 저에너지 사회를 향해 가고 있고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저에너지 사회로 가는 것이 우리의 생존과 나아가 더 나은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움직여 갈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세계관에 기를 쓰고 매달리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미래로 끌려 들어갈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327]

 

이 역사적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그러한 움직임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여 생활방식을 자발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밑바닥에서 힘을 모아 기존의 고에너지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 동시에 엔트로피 과정에 대한 인식을 담은 새로운 가치체계를 기초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327]

 

엔트로피 법칙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다. 이 법칙을 통해 우리는 우주를 지배하는 달콤하고도 씁쓸한 최고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며,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동시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얻는다. [328]

 

엔트로피 법칙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는 저마다 독특하고 일회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로 이런 일회성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지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지구의 유한성과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한성도 깨닫는다. 지구의 취약함이 우리 자신의 취약함을 일깨워주는 것이고, 지구의 연약함이 우리의 연약함도 알려주는 것이다. [330]

 

깨달음이란 뭔가를 ‘경험’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몸부림친다. [332]

 

우리에게 남겨진 자원을 최대한 보전하고, 생성과정을 지배하는 자연의 리듬을 최대한 존중하는 길은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생명과 우리 뒤에 올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 식민화 단계에서 절정 단계로 옮겨가는 첫 발자국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중꾼인 것이다. [334]

 

후기

 

신기하게도 제1법칙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엔진을 언젠가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인간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338]

 

물론 소수의 가진 자들이 미미하게나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빈자들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지만 인류 전체는 다가올 파국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보호하려는 일은 거의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국내관계,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가치들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개인적 이기심 그리고 미래에 후회할 일을 줄이기 보다는 개인적 만족을 극대화 하려는 이기주의에 입각한 행동 양식에서 비롯된 인류 전체의 위기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346]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평소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많이 접하면서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제레미 리프킨의 여러 책들 중에서 과감히 이 책을 선택했다.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자연 과학 전공이 아닌 사람이 읽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생각될 만큼 과학적 이론(열역학 제1법칙 및 제2법칙)에 논리적 기반은 두었으되 인문, 사회, 문화, 자연, 종교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과도한 에너지의 사용으로 인한 위기의 도래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으로서의 엔트로피적 세계관(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효율적이고 저 수준의 사용을 통한 자연과의 합체된 생활 방식의 중요성 강조)의 함의와 대응 방안을 좋은 예제와 인용을 통해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저자는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예시들을 구체적, 실증적으로 충분히 들어주므로 설득력을 더했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전개는 이해를 한층 도왔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잇고, 나아가 미래를 가늠케 하는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맥을 잃지 않도록 했다. 역자의 표현대로 리프킨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높은 조망대 위에서 인간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의 전체상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제시하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다고 생각된다.

 

먼저 저자는 <세계관의 변화>에서 인류의 세계관의 변화 과정을 요약하여 보여 주면서 엔트로피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흐름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 후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 ‘엔트로피 이론’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면서, 이를 새로운 역사관으로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관의 틀 – 엔트로피>에서 인류의 역사를 엔트로피 세계관의 시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현대가 처한 에너지적 어려움을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에서 설명하면서 에너지의 과도한 ‘중독적’ 소비에서 비롯된 현 인류의 생존 위험성에 대해 한층 더 강력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엔트로피와 산업시대>에서 경제학, 농업, 수송, 교육, 보건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관점에 살펴 보면서 이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 후 <새로운 세계관 : 엔트로피>에서 앞으로 우리가 선택하고 구현해야 할 새로운 엔트로피적 가치관에 기반 한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은 태양 에너지 시대의 도래가 어떤 특징으로 우리 사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일부가 가지고 있는 태양 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깨끗이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익한 설명이었다는 생각이다. 특히 다음의 사례 제시가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할 만큼 강렬하게 다가 왔다 :

 

“태양 에너지로 집 한 채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록펠러 센터에 난방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 에너지와 풍력을 합친다고 해도 엘리베이터 조차 가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록펠러 센터는 엘리베이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30, 50층을 걸어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슈마허의 주장은 대량 생산과 대도시의 삶이 태양 에너지 시대의 모델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양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우리의 기술과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검약과 탈 집중화를 지향하는 것이다.[257]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단순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실제로 행동할 것을 간접적으로 나마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었다.

 

이 역사적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그러한 움직임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여 생활방식을 자발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밑바닥에서 힘을 모아 기존의 고 에너지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 동시에 엔트로피 과정에 대한 인식을 담은 새로운 가치체계를 기초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327]

 

그가 기계적 세계관에서 저 엔트로피 시대로의 이행을 위해 대안으로 제시하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지역 공동체 의식, 유기농업, 순환적 자연관 등은 이미 과거에 동양의 가장 기본적인 일상적 생활 형태였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과학 기술에 기반 한 서구 문명의 과도한 소비 중심의 고 엔트로피 시대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미래의 제안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이미 살아 가던 과거의 모습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에너지를 펑펑 낭비하는 서양 과학 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구원 방안이 우리가 서구 문명을 닮아가기 위해 쉽게 버리려고 하는 우리의 과거 모습에 살아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제라도 ‘온고이지신’ 자세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마음 자세를 잡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판적 시각과 교훈

 

다만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엔트로피 법칙이 과연 인간의 사회 생활 전반과 정부, 산업, 교육, 경제와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자연법칙인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점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본 저서와 관련된 비판적인 서평으로는 서강대 이덕환 교수의 글이 있다 (http://chemistry.sogang.ac.kr/~duckhwan/essay/books/books-entropy.htm).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엔트로피 법칙과 또한 그가 사용한 통계 및 인용이 본래의 열역학 법칙 고유의 의미에서 벗어나서 저자의 주장을 위한 도구로 과도하게 오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은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비평과는 달리 글에 나타난 여러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과학자의 입장에서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 책과 함께 균형 잡힌 시각의 확보를 위해 꼭 읽어봐야 할 글로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전문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방향에 대해서는 쓰여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더 나아가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설사 엔트로피 법칙을 과학 법칙 본연의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중간의 통계 및 인용에 약간의 논리적 부적절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논리 이전에 직관이 계산 이전에 감각이 더욱 더 나를 그의 주장에 동조케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책의 활용 방안

 

제레미 리프킨의 책은 모두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주요 존재론적 문제점들을 공공의 이슈로 만들어 이의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는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저술을 바탕으로 실제 대중들과의 만남 및 강연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형태로 그의 주장의 영향력을 높임으로써 사람들에게 변화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주제는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 연결의 추구라는 비전 하에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현실을 지배하는 거대한 독트린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편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책 전부를 보고 개별 주제를 이해한 후 각각의 주장의 전제와 기반이 되는 사상을 잘 파악하여 이를 이해하고 또 그의 행동적 실천과 같이 자신의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행하는 것이 이 책을 읽고 가장 잘 활용하는 방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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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14:52:22 *.210.3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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