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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일 08시 40분 등록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  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저자에 대하여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1945
년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태어나 일로노이주 시카고에서 자랐다. 1967년 펜실베니아 대학의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학위 취득했으며 터프스 대학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현재 'Foundation of Economic Trends (경제조류재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사회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활발한 계몽운동과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93년에서 현재까지 'Beyond Beef Coalition'을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워튼 스쿨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세계의 최고 경영자와 고위 간부들에게 과학, 기술의 새로운 조류와 이것이 글로벌 경제,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경제학자, 미래학자, 환경학자, 운동가, 저술가, 문명비평가이다. 제러미 리프킨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극단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너른 시야로 지구적 구조와 미래를 바라보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활동가로 추앙하는 반면, 그를 사이비 저술가, 기껏해야 영향력 있는 선동가로 보기도 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통찰하는 부분이 평화로운 사회를 선동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난 그것이 선동인지 혜안인지 아직 판단하기 힘든 지적 상태인지라 그의 식견이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과학 기술의 변화가 경제, 노동, 사회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30여년 간의 활동이 언제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조류재단'을 창설한 이후 리프킨은 십수권의 논쟁작을 썼고, 전세계 20개국 500여개 대학에서 강연했으며, 미국정부의 각종 환경. 경제정책 방향에 입김을 넣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15권의 저서를 통해 경제, 노동,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1989
년 기계적 세계관에 의거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에너지 낭비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경고한 저서 <엔트로피 법칙Entropy>으로 세계적인 이름을 얻었다. 1995년에는 정보화 사회로 인해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경고한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 >을 출간하였다. 2001년에는 인터넷 접속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제시한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을 출간했으며 2002년에는 쇠고기로 집중되는 음식 문화와 그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를 다른 <육식의 종말>을 집필하였다. 가장 최근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유러피안 드림 The European Dream>이다.

 

그의 글은 인류의 문명과 사회적 전망에 대해 거시적으로 통찰한다. 리프킨은 단편적인 현상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표면적으로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조류를 날카롭게 파악한다. 이런 안목에 대해 반대의견이나 저항도 많다. 그렇지만 그는 게의치 않는다. 그의 눈부신 활동은 다음과 같은 철학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혹자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미래를 얻는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연구가 추진되어야 하는지 제어할 수단이 없으며, 어떤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을 것인지 회사 중역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중매체와 광고의 일제 공격에 반대하고 외면하는 다른 어떤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모두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시장이 소비자를 창출하는 것만큼, 소비자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이들 조직적인 세력들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들 각자는 함께 공유해야 할 집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대부분이 우리의 운명과 숙명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수동적 방관자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또한 그는 부인 캐롤 그룬왈드 리프킨과 함께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는 채식운동과 녹색생활운동도 그의 활동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다. 리프킨은 유명한 환경운동가 이기도 한데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든, 지구 생태계상의 보전을 위해서든 제3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든 또는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서든, 산업사회에 있어서 고기 중심의 식사습관을 하루 빨리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 반대운동 시작한 리프킨은 작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하여 광우병 논란으로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그때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국민의 먹거리와 건강에 직접 관련 있는 신문기사의 원문을 실어 그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

 

<2008년 5월 5 서울신문>

 [집중 인터뷰] 석학 리프킨에 들어본 쇠고기·GMO 개방

美쇠고기 수입땐 후회치열한 토론 먼저

 

 인류는 건강을 놓고 룰렛 게임(Roulette Game)을 하고 있다. 한국이 무턱대고 GMO와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면, 결국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육식의 종말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세계적 석학인 제레미 리프킨(63) 미 경제동향연구재단(FOET)이사장은 4일 서울신문과의 국제전화 인터뷰에서한국 국민들은 GMO나 미국 쇠고기를 받아들이기 전에 미래에 어떤 음식을 원하는지에 대한 신중하고 합리적인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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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GMO 등 먹거리 논란이 진행 중이다.

-미국 농림부가 쇠고기 생산과정을 잘 관리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 정부는 순진한(naive)것이다. 나는 미국 농림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평생을 지내왔다. 육가공업계나 생명공학기업은 워싱턴에 엄청난 로비를 한다. 미국 정부는 때때로 로비에 의해 움직인다.

이에 반해 유럽을 비롯한 세계 다른 나라들은 GM 작물이나 쇠고기를 수입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 매우 엄격한 수입 기준을 세웠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압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나?

-미국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한국 국민, 정부, 시민단체가 과학자들과 함께 폭넓은 토론을 하기를 권한다.GMO나 쇠고기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여러분은 그것을 더욱 달가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한국 정부나 기업에서 ‘GMO와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려깊은 처사가 아니다.

당신은 일관되게 GMO와 쇠고기 소비를 반대해 왔다. 이유는 무엇인가.

1981년 미 연방정부에서 유전자가 조작된 유기체를 개방된 환경속에 방출하는 것을 처음으로 허용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게 GMO 반대운동의 시작이었다.

내가 GMO를 반대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이종교배의 문제다. 인류는 지금까지 동종교배의 원칙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전자조작을 통해 어떤 유전자도 다른 유전자와 쉽게 섞을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1990년대 과학자들은 토마토와 물고기의 유전자를 조합했다. 추운 대서양에 살고 있는 물고기로부터 추위에 견디는 유전자를 빼내 토마토에 주입하면 냉해에 잘 견디는 토마토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생태계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둘째로 유전자 확산 문제다.GMO가 비GMO사이로 들어가면 수분 작용을 통해 GMO유전자를 계속 생산해낸다. 예전에 바이오테크 기업들은 GM작물 재배지 근처에 보호막을 세우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그 기업들은 이제 유전자오염이 안 된 땅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한다.GMO유전자가 확산되면 생태계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이건 마치 담배 논쟁과 비슷하다. 옛날에 사람들은왜 내가 담배를 피우면 안 되냐.”며 담배 필 권리를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간접흡연으로도 암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흡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특히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GM 음식은 원래의 유전자 조합과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알레르기를 유발할지 모른다. 최근 식용 백신을 만드는, 새로운 종류의 유전자조작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가령 바나나에 특정 질병의 백신 기능을 하는 유전자를 넣는 식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이다. 바나나와 백신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정확한 투약량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바나나를 먹는 사람이 그 안에 들어있는 백신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면 어떻게 되나. 이런 일이 몇 년 후 한국의 슈퍼에서 벌어진다고 상상해보라. 끔찍한 일이다.

광우병에 대한 견해도 궁금하다.

-광우병에 대해 얘기하자면,1990년대 초부터 나는 미국 농림부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골육분을 먹이는 것이 잠재적인 광우병의 위험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부 입장은 광우병이 보고된 사례가 없으니 위험이 없고, 문제될 것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지 않은가. 광우병에 걸린 소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아마 더 많을 것이지만 미국 정부가 모니터를 철저히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다. 정부가 광우병 위험을 인정하면 고기 소비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꺼려한다. 결국 우리의 지속적인 요구가 관철돼 1990년대 말에 골육분을 먹이는 것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위험은 존재한다. 지금 내게 미국 소고기가 광우병에 대한 잠재적 위험이 있다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미국 정부가 광우병 위험에 잘 대처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절대 아니다. 한국에도 알려져 있겠지만 몇 달 전에 미국의 한 시민단체에서 도축장을 비밀리에 촬영한 동영상을 공개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소는 도축을 하면 안 되지만, 그들은 소의 질병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소를 도축했다. 미국에서도 상당히 큰 이슈가 됐다. 미국 농림부는 도축업계에 순진하게 대응해 왔다.

그렇다면 GMO와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먼저 GMO에 대해서는 유전자표식에 의한 선발(MAS·Marker Assisted Selection)방식이 대안이다.MAS는 생명공학 기술을 전통 육종기술에 도입한 것이다. 육종을 할 때 유전자 표식을 거쳐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를 고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유전자 변형이 없고, 최첨단이고, 정보개방형이라 거대기업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 나는 GMO는 반대지만 MAS는 찬성이다. 지난해 내가 있는 경제동향연구재단은 그린피스, 우려하는 과학자모임(UCS·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등의 단체와 토론회를 열었는데, 많은 그룹이 MAS를 찬성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 GMO를 수입하라고 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다. 한국은 모든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이를 되돌리려 할 텐데, 그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나의 책육식의 종말에서 언급했듯, 현재 우리는 사람이 먹을 곡물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도축당할 소나 바이오연료를 위한 곡물을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충분한 곡물을 생산하는 데도 굶주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사료용 곡물은 줄이고, 식용 곡물을 늘리는 일이다. 가령 사료용 곡물가를 매우 비싸게 책정하는 방법이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휘발유를 살 때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책임을 지기 위해 세금을 내는 것처럼,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소가 배출하는 가스와 소를 키우기 위한 곡물가를 부담하는 차원에서 돈을 더 많이 낸다면 고기 소비도 줄어들고 궁극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쇠고기를 먹나.

1977년부터 얼굴이 있고, 걷거나 나는 모든 동물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다. 때때로 먹어야 할 경우가 있으면 아주 적은 양의 해산물을 먹기는 한다.

광우병이 두려워서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인가?

(웃으며)그렇지는 않다. 내가 육식을 하지 않는 이유는 육식은 나와 같은 종류를 먹는 것일 뿐 아니라 나의 건강과 전체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음식은 생존뿐 아니라 문화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상징한다.

유럽 사람들이 GM 식품을 싫어하는 이유는 치즈나 와인 등 음식의 지역색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다. 미국은 패스트푸드 문화를 갖고 있지만 이와 달리 한국은 아직도 음식이 문화 정체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음식의 문화적 차원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물론 안전성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 유럽처럼 경계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화학물질이든 음식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는 도입을 보류하는 보수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제가 생기면 그제서야 그 문제에 대처했다. 그러면 안 된다. 이미 일어난 문제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고 행동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불행하게도 미국보다 유럽이 더 좋은 모델이다.

민희기자 haru@seoul.co.kr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1,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다. 기업과 소비자는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시장에서 재산을 교환하던 근대 경제의 기본 구도를 포기하기 시작했다.[11]

 

근대 경제의 중요한 특성이었던 판매자와 구매자의 재산 교환은 네트워크 관계로 이루어지는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단기 접속으로 바뀐다.[11]

네트워크 경제여서 기업은 물적 재산이건 지적 재산이건 교환 하기보다는 접속하는 쪽을 택한다.[11]

 

예전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시장의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자와 사용자가 주역이다.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시장을 통한 거래는 줄어들고 전략적 제휴, 외부 자원의 공유, 이익 공유가 활성화된다.[12]

 

접속 중심의 구도에서 기업의 성공은 시장에서 그때그때 팔아 치우는 물건의 양보다는 고객과 장기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점점 좌우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데 유념해야 한다.[13]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변화 밖에 없는 세상에서, 소유하고 축적하는 태도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14]

 

산업 생산 시대가 가고 문화 생산 시대가 오고 있다. 앞으로 각광을 받을 사업은 예전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사업이 아니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사업이 될 것이다.[14]

 

산업 생산에서 문화 생산으로 탈바꿈하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노동 의식이 유희 의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노동을 상품화하는 것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접속의 시대에는 놀이의 상품화가 그 특징이다.[15]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체험>경제라고 부르는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 개개인의 삶은 사실상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린다. 기업가는 이 새로운 개념을 고객의 <평생가치 lifetime value>라고 부른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온갖 형식으로 상품화 할 경우 그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값이다.[15]

 

문화 생산이 경제 활동의 지배적 형태로 뿌리내리는 새로운 시대에는 사람의 정신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문화적 자원과 체험에 가급적 많이 접속하는 것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16]

 

문화 생산은 더 많은 인간의 활동을 상업 분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핵심적 사명으로 삼아온 자본주의 생활 방식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16]

 

개인의 삶 속에서 유료로 얻을 수 있는 경험의 양이 많아지면서 문화적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분야에서 많은 고용 창출이 이루어질 것이다. 공간과 재료의 상품화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여정은 인간의 경험과 생활을 상품화하는 것으로 끝난다.[17]

 

공급자와 소비자와의 <상품화된 관계>를 선호한다. 얼마든지 갱신할 수 있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영속적인 교분을 맺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임대, 가입, 등록, 수임료 등을 통해 이런저런 형식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모든 시간은 영리적 시간이 되어 버린다. 문화적 시간은 기울고 인류는 영리적 고리를 통해서만 문명을 지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탈근대 사회의 위기이다.[19]

 

다가올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정부와 문화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상업 영역만이 인간 생활의 으뜸가는 매개 고리로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문명이 살아남겠느냐> 하는 것이다.[19]

이 책에서 우리는 접속의 시대를 위한 조직적 토대와 개념적 바탕을 제공하는 수많은 구조적 변화를 짚고 넘어갈 것이다.[19]

 

&문화와 상업이 충돌&

상업 영역은 언제나 문화 영역에서 파생되었다. 상업 영역은 언제나 문화 영역에 의존했다. 문화는 합의된 행동 기준을 낳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합의된 행동의 기준이 신뢰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런 믿을 만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은 발생한다.[21]

 

문화 영역과 상업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어쩌면 접속의 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정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문화자원도 과도한 영리 추구로 인해 언제 고갈 되어 버릴지 모른다.[21]

 

21세기의 인간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교점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갈 것이고,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세계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주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개인적 자유의 의미는 소유권이라든지 남들이 간섭에서 벗어나는 능력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대신 상호 관계의 그물망에 포함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의미가 점점 부각될 것이다. 그들은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세대이다.[22]

 

세대 격차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경제적.사회적 격차이다.[24]

 

현실 공간에서 가상 공간으로, 산업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본주의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조류 앞에서 사람들은 사회 계약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5]

 

정보와 서비스, 의식(意識)고 살아 있는 경험을 거래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물질이 비물질에 밀려나고 시간을 상품화하는 것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는 세계에서, 산업시대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지었던 종래의 소유 관계와 시장 개념은 점차 실효성을 잃어가고 있다.[26]

 

사람들은 접속이란 말을 들으면 가능성과 기회로 가득 찬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구멍을 연상한다. 접속은 전진과 개인의 자아 실현을 약속하는 입장권이 되었고 몇 세대 전의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26]

 

접속은 결국 구별과 분리의 문제다. 들어가는 사람과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다. 접속은 우리의 경제관과 세계관을 제고할 수 있는 막강한 개념적 도구가 되었다. 다가올 시대의 성격을 예고하는 가장 강력한 메타포가 되었다.[27]

 

2. 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

〈앞으로 올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는 모든 것을 모든 것에 연결시키는 것〉,〈크건 작건 모든 물질이 다양한 차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미래가 올 것이다〉-와이어드Wired의 편집 고문 케빈 켈리[32]

 

새로운 시장에서는〈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시장에 먼저 제품을 내놓는 기업만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경쟁자들보다 몇 달을 앞서느냐 뒤지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37]

 

제품 주기가 짧아지는 것은 소비자의 주의 집중 기간이 그만큼 짧아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37]

 

타임 워너 월터 잭슨은〈구체제가 클럽이었다면 신체제는 네트워크〉라고 갈파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핵심적 의미를 이보다 잘 요약함 말도 보기 드물다.[39]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전문 지식과 재주를 가진 날고 기는 전문 제작사와 독립 하청업체가 하나의 팀으로 묶인다. 이들은 프로젝트가 진해되는 동안만 한시적으로 존속하는 네트워크의 일원이 된다.[43]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산업 시대에 중요했던 것처럼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동맹 관계가 끝없이 변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네트워크로부터 탈락한다는 것은 곧 낙오를 의미한다.[46]

 

문화 산업이 재화로 쌓아두고 거래하는 것은, 현실을 모방한 세계와 의식을 고양시키는 세계로 잠시 접속할 수 있는 권리이다. 물건과 서비스를 상품화했던 것에서 경험자체를 상품화하는 단계로 변모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이것은 더없이 이상적인 모델이다.[47]

 

3. 무게 없는 경제

네트워크 환경에서 개인적 공간은 사회적 공간으로 바뀐다.[50]

 

새로운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돈의 탈물질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56]

 

커츠먼은 탈물질화된 새로운 돈의 형태는 〈전화선을 통해서, 광섬유 고속도로를 통해서, 위성을 통해서, 전파 중계소를 통해서 전송되는 … 연산의 기본 단위, 0 1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57P)

〈이 차가운 잿빛 그림자는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감촉이 없다. 무게나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 이제 돈은 이미지다.[57]

 

다양한 형태를 틴 재산의 보유보다 상거래 기회에 대한 단기적 접속 권리의 확보가 더 중요해지는 새로운 사회에서 실제로 저축은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63]

 

〈사용하되 소유하지는 말라〉[64]

 

기업들이 구입보다 리스를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의 변화에, 그리고 기존의 설비가 쓸모 없어졌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67]

 

로버트 스텁스는 < 이제 우리는 금융 회사가 아니라 자산 관리 회사가 되었다>고 말한다.[67]

 

아웃소싱은 < 기업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독자적이며 울타리로 둘러싸인 낡은 기업 관념은 복수의 파트너들이 업무적으로 깊숙이 얽히고 공식, 비공식의 상호 관계를 맺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70]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산업 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73P)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사고 파는 것은 아이디어와 이미지이다. 이런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물리적 구현물은 경제 과정에서 점점 부차적 존재로 밀려난다. 산업 시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교환했다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물리적 형태 안에 담겨 있는 개념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한다.
새로운 상행위의 저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는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고 추구하는 바도 그렇고 이제는 가상 회사가 되어버렸다. 일반인들은 나이키를 운동화 제조업체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이키는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이라고 보아야 옳다. 나이키는 내세울 만한 공장도, 기계도, 설비도, 부동산도 없다. 대신에 나이키는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한 공급업자들의 망 - 나이키는 이들을 <생산 협력업체>라고 부른다 - 을 구축하여 본사에서 디자인한 수백 종의 운동화와 각종 운동 장비를 이들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 나이키는 광고와 마케팅 업무도 과감히 아웃소싱했다.[73]

 

나이키는 개념을 판다. 이 회사는 동남 아시아에 있는 무명의 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그 개념의 물리적 형태를 생산한다.[74]

 

아웃소싱 계약은 그러나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웃소싱은 경영진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수단이 되었다.[75]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 남들에게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적대적 입장이었던 두 당사자가 정보를 공유하고 신뢰를 구축하게 됨을 의미한다.[77]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사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경제 활동의 공유라고 할 수 있다.[77]

 

작가이며 언론인인 프레드 무디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공장 자산은 직원들의 상상력이다.> 라는 말로 핵심을 찔렀다.[78]

 

기업의 무형자산은 비록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기업의 미래를 훨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길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79]

 

21세기의 경제는 정보과학과 생명과학, 즉 컴퓨터와 유전자가 함께 이끌어나갈 것이다. 둘 다 물리적 재산보다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든 두뇌가 되었든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접속에 기반을 두고 있다.[81]

 

새로운 시대는 비물질적이고 사색적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원형의 세계다. 개념의 세계, 픽션의 세계다.

산업 시대의 인간이 물질을 축적하고 가공하는 데 빠져들어 있었다면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정신을 관리하는 데 훨씬 관심이 크다.

사업의 성패를 아이디어가 좌우하는 접속과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드높은 꿈이다.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확장하여 보편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업 활동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84]

21세기는 개념을 거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사람들도 이런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의 물리적 구현물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많이 사게 된다. 새로운 경제에서는 생각을 관리하고 파는 능력이 궁극적으로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84]

- 물리적 재산은 점점 중요성을 잃고 가치도 떨어진다.

- 공기처럼 가벼운 지적 재산은 새로운 황금이 된다. 정신이 물질 위로 솟아오른다. 가벼운 제품, 소형화, 부동산의 비중 감소, 저스트인타임 재고관리, 리스, 아웃소싱, 이 모든 것은 물질성에 역점을 두었던 세계관이 쇠락하고 있다는 증거다.

- 하지만 이기심, 탐욕, 착취가 똑같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접속의 시대에는 착취가 오히려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 아이디어를 지배하는 것은 공간이나 물리적 자본을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85]

 

상업권에서 아이디어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라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온갖 유형의 아이디어가 거대 기업들이 관리하는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얽히고 설켜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미래의 사회적 담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85]

4. 지적 재산의 독점

판매자와 구매자의 협상에 대한 재산의 양도 행위는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구입해서 정기적으로 소유하는 것보다 잠시 접속을 즐기는 것이 더 유행한다. 접속을 통해 유형,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는 주체들의 관계를 상품화하는 것, 이것이 곧 네트워크 기반을 둔 상업활동의 핵심이다.[87]

 

각각의 사업 영역에서 아이디어에 대한 독점권을 보유한 소수의 기업은 산업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지에 올라선다.[87]

 

상품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개념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릴 것이다.[89]

 

체인 가맹점은 사업체를 시들인 것이 아니라 공급자와 미리 정한 조건에 따라 사업체에 단기간 접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데 불과하다. 이 관계는 판매자-구매자가 아니라 공급자-사용자의 관계이다. 체인점 계약은 접속의 합의이지 소유권의 양도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이다.[93]

 

체인점이라는 새로운 사업 형태는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혼성체라 할 수 있다.[96]

 

판매자-구매자 시장이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로 바뀌는 것만큼 중요한 변화가 생면과학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97]

 

세계 석유 화학 산업의 혁명을 주도해 온 4대 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폰, 아벤티스- 이 유전자 연구 그리고 유전자에 기반을 둔 기술 개발과 제품 개벌에 주력하기 위해 화학 부문을 일부 또는 전부 정리하거나 매각하는 결정을 단행했다.[98]

 

유전자는 팔지 않는고 빌려줄 뿐이다. 사지 않고 빌릴 뿐이다. 유전자 정보는 특허의 형태로 공급자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98]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었던 생물 종자의 소유권이 몇몇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농업의 역사에서 일대 분수령이 될 만한 사건이다.[104]

 

5. 서비스 세상

〈모름지기 사물의 진가는 지닐 때보다는 쓸 때 발휘되는 법이다.아리스토텔레스[114]

 

앞으로 경제 생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건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접속이 될 것이다.[115]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재산을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사물에 대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개인으로부터 침해 받지 않고 배타적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전제적 지배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현대 세계에서 재산은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교섭하는 사회적 관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적 맥락에서 서로 관계를 설정하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116]

 

재산은 고정 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통용되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기호와 변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유동적 개념이 된다.[116]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은 인간의 노동을 격상시켰고 인간의 가장 숭고한 업적은 물질의 획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마땅할 기회가 노동 안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재산이라는 것도 개인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120]

 - 근대적 의식도 나타났다. 자아를 보는 눈이 새로워졌고 개인의 영역이 만들어졌으며 국민 국가와 입헌 정부 같은 새로운 제도도 탄생했다.

 

아담스미스에 따르면 바로 이 시기부터 토지를 비롯한 각종 부동산과 동산은 유언의 집행으로 사망 후에도 양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소유 관계의 성격이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상속은 소유를 세대에서 세대로 양도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소유의 교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정착시켰다. 상속이 일반화되면서 소유는 계급을 가르고 유지하는 데 요긴한 역할을 하는 권력의 한 형태가 되었다.[121]

 

양도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재산을 시장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다.[121]

 

일괄 처리 공정이 처음 도입된 1880년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량 생산된 상품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했다. 물질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곧 사업이었고 소비재가 수많은 소비자의 지위와 행복을 정의하던 시대에는, 소유권이 모든 것 위에 군림했다.[123]

 

<상품의 양으로 생활 수준을 재는 것이 산업시대였다면 탈산업 시대에서는 지금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건, 오락, 교육, 예술 같은 각종 편의와 서비스를 가지고 생활의 질을 따진다>-다니엘 벨[126]

 

서비스는 재산이 아니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비스는 물질이 아니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것은 수행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서비스는 실행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보유하고 축척하고 상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자는 사는 것이고 서비스는 받는 것이다. 서비스 경제에서 상품화되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지 장소나 물건이 아니다. 서비스는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호소한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과 사람의 접속도 점점 금전을 매개로 한 관계로 바뀐다.[127]

 

물품은 제품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진화를 거듭하는 서비스로 탈바꿈한다. 물품의 가치는 물품을 구성하는 재료나 물품을 담는 통이 아니라 물품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얼마나 접속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128]

 

이제 기업은 제품을 고정된 특징과 일회적 사용 가치를 지닌 고정된 품목이 아니라 온갖 유형의 업그레이드와 부가 가치 서비스를 실어 보낼 수 있는 〈플랫폼〉으로 여긴다. 새로운 제조업의 풍토에서 중시되는 것은 서비스와 업그레이드이다.[128]

 

결국 물리적 형체보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서비스가 더 중요하다. 고객이 정말로 구매하는 것은 물품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접속력이다.[130]

 

크라이슬러는 일리노이 주 벨버디어에 있는 공장에서 PPG 인더스트리와 절감분 공유 계약을 맺었다. PPG는 크라이슬러가 만드는 자동차의 세척, 처리, 코팅에 들어가는 일체의 화공약품을 책임지고 공급한다. 크라이슬러는 돈을 주고 PPG의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자 없이 생산되는 자동차 한 대당 일정액을 PPG에 지급한다. 다시 말해서 PPG는 이제 더 이상 페인트를 파는 것이 아니라 도색 공정 자체를 관리하는 서비스를 크라이슬러에 제공하는 것이다.[135]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 남는다. 머지 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 개발한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 -〈기술의 역설〉[142]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식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필요한 것을 빌린다. [143]

 

6. 인간 관계의 상품화

접속의 시대는 한마디로 모든 인간 경험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이다. 온갖 유형의 상업 네트워크가 인간 생활을 거미줄처럼 사방에서 에워싸서 살아 있는 경험의 모든 순간은 상품으로 자리매김된다.[145]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의 상품화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인간 관계의 상품화다. 빠른 속도로 정신 없이 변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고객의 관심을 묶어 둔다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최대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45]

 

앞으로 생산 중심에서 마케팅 중심으로, 판매 중심에서 관계 구축 중심으로 궤도를 수정하는 기업반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마케팅 전문가와 경영 컨설턴트, 경제학자, 미래학자가 쏟아내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145]

새로운 마케팅 전략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시장을 얼마나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고객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이다. 페퍼스와 로저스는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한 종류의 제품을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팔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고객에게 이런저런 다양한 제품을 평생에 걸쳐서 최대한 많이 팔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한다.[146]

 

기업들이 한번에 최대한 많은 고객에게 제품을 파는 것을 포기하고 개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곧 개인이 일평생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상품화될 수 있다는 잠재성에 주목함을 뜻한다.[147]

 

MIT 슬론 경영 대학원 협동 과학 센터의 마이클 슈레이지는 <우리는 기술이 정보를 관리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관계의 매개물이라는 쪽으로 과감한 의식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알베르 브레상은 R-기술은 새로운 기술을 묘사하는 적절한 용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리되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상품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149]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마케팅이 중심에 오며 고객을 관리하는 것이 상업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152]

 

스톱 워치와 조립 라인이 노동자를 관리하는 과학적 수단을 제공했다면, 사이버스페이스의 피드백 고리와 바코드는 소비자를 관리하는 과학적 수단을 제공한다.[153]

 

아마존과 나이키처럼 메드코는 순수 마케팅 회사에 가깝다. 이런 회사는 실질적으로 재산을 보유하지 않는다. 가장 큰 자산은 고객에 접속할 수 있는 힘, 최종 사용자와 장기적으로 상업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다.[157]

 

생산 관점에서 마케팅 관점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강조한 현대 경영 기법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썼다.

‘고객은 사업의 기초이며 기업의 존재 이유이다. 고객만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사회가 부를 낳는 자원을 기업에 위임한 것은 고객에게 그것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기업의 목표는 고객을 창출하는 데 있으므로 모든 기업은 오직 두 가지 기능, 즉 마케팅과 혁신에만 전념하면 된다. 마케팅은 제품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특이한 사업 기능이다……. 모든 사업을 최종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고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케팅에 대한 관심과 소명이 모든 사업 부문으로 확산되어야 한다.[158]

 

「마케팅 근시 Marketing Myopia」라는 중요한 논문에서 하버드 경영 대학원 명예교수 시오도어 레빗은 고객의 관점에서 사업계획을 세워야지 생산자의 관점에서 사업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기업의 목표는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사로 잡는 것이라고 그는 역설했다.[158]

 

모든 최신 마케팅. 경영 이론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불연속적 매출의 확대라는 협소한 목표에 연연하는 것보다 고객과의 장기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기업의 생존에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이다.[159]

 

백드로 같은 회사는 앞으로 소비자 성향, 생활 양식, 지출 패턴을 토대로 유망 고객을 발굴하기 위해 R-기술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소프트웨어 분석 기법이 더욱 발전하면 유망 고객의 취향을 여행 상품에 더욱 정확하게 반영하여 더욱 뜻 깊은 경험을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고 고객 사이의 공동체적 결속력도 자연히 강화될 것이다.[164]

 

물건의 판매에서 관계의 상품화, 공동체의 구축으로 상거래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사업 방식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165]

이 새로운 세계에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관심을 공유하는 네트워크, 관계망, 취향의 공동체에 상업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 소속된다는 것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를 구성하는 수많은 네트워크에 연결된다는 뜻이다.[165]

 

모든 것을 삼키는 상업 관계망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 빨려 든다면 과연 인간은 어떻게 될까?[166]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경제는 연결의 속도를 높이고, 지속 시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 함으로써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고 모든 개인의 삶이 24시간 내내 상품의 틀에 갇혀 있을 때, 비상업적 관계, 다시 말해서 혈연,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종교적 결사, 민족의식, 형제애, 시민 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167]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168]

 

7. 삶으로서의 접속

CID(Common-Interest Developments, 공동 관심 단지)는 단순히 집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을 파는 것이다 집 그 자체는 독특한 생활 경험을 제공하는 서비스 네트워크 안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172]

 

기타 편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이 도시가 제공하는 모든 것은 상품화된 경험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는 상업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공 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 기구도 있고 투표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결속이지 시민적 결속이 아니다.[174]

 

CID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가치관, 감수성, 라이프스타일이 엇비슷한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끼어드는 대가로 개인 재산의 권리 일부를 기꺼이 포기한다. CID의 일원으로 들어가면 단독 주택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사유 재산 체제에 수반되는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품화된 관계를 구입하는 데 수반되는 상호 의존성을 선택한다.[179]

지리와 공간적 동일성에 늘 바탕을 두고 있었던 인간의 귀소 본능은 단기적 시간 경험으로 생활 공간을 받아 들이는 새로운 의식에 밀려나고 있다. 시간 공유는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이라는 개념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별장이나 제2의 주택을 구입하기 보다는 공유시간에 접속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188]

 

렌트, 시간 공유 콘도 구입, 점수 구입은 모두 <시간화> 사업의 다양한 방식이다. 이제는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접속권을 사는 시대이다. 아파트, 콘도미니엄, 빌라 같은 시설을 지정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판매자 - 구매자 관계는 서서히 공급자-사용자 관계나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바뀐다. 재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191]

사람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재산으로 확인하고 또 표현한다고 헤겔은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묶어둠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헤겔의 세계관에서 일은 노동 행위가 아니라 창조적 표현이다. 그리고 일이 만들어낸 생산물은 세계로부터 징발한 것이며 일을 한 사람의 인격 안으로 세계를 통합한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격은 스스로에게 현실을 부여하려는, 다시 말해서 외부 세계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몸부림이다.’[193]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적이라는 뜻이다. 재산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인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194]

 

우리의 더욱 원초적인 본능은 시간성뿐 아니라 지리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토는 단순한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존재의 상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장소에, 영토에, 우리의 기원에 맞닿아 있다는 원초적 감정을 경험한다.[196]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징한다는 이 심오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생활 경험을 공유하는 시회적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가 가져다 주는 좀더 편리한 시간적 가치가 그 자리를 메꾼다.[197]

 

장소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공간을 폐지하고 우리의 경험을 시간화하려는 욕망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공간을 소유에서 접속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바꿈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21세기를 어떤 식으로 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감수성의 우열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198]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우리는 디지털 통신 기술과 문화 상업주의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 둘은 실제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강력한 쌍두마차다.[202]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말대로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 주위에 엮어나가는 <의미망>이라면, 커뮤니케이션--언어, 미술, 음악, 무용, , 영화, 음반, 소프트웨어--은 우리 인간이 이 의미망을 해석하고 생산하고 유지하고 변형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가 리 데이어는 말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인간 문화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떤 인간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화를 매일매일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알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커뮤니케이션이 문화의 핵심, 아니 생명 그 자체의 핵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203]

 

정보 전문가와 공학자는 커뮤니케이션을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협소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204]

 

인류학자는 의사소통을 텍스트의 전달을 통한 사회적 의미의 생산으로 이해한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가 선구적으로 개척한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의미를 확립하고 공동의 가치를 생산하며 사람을 사회적 관계로 묶는지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주의자는 언어, 신화 같은 상징 체계가 공동의 사회적 경험에 의미를 불어넣는 데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문화를 표현하고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한다는 말이 성립한다.[204]

모든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요체인 문화도 필연적으로 상품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05]


문화-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공동의 경험-는 미디어 시장으로 인정 사정 없이 끌려 들어가서 상업적으로 개조된다.[205]

문화 생활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늘 접속과 포함의 문제에 직결된다. 사람은 공동체와 문화의 일원으로 의미와 경험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권리를 누리든지 배제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206]

 

예술은 인간을 표현하는 가장 정교한 수단으로 문화의 가장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예술은 경제나 정치라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보다 인간 정신의 심층을 더욱 깊게 파고드는 방식으로 사회적 경험을 조직하고 전달한다.[208]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예술은, 이제 광고 회사와 마케팅 전문가의 볼모가 되어 <생활 양식>을 파는 데 동원되었다.[210]

 

미래의 기업은 사람의 생활 전체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점점 더 떠맡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미래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앨빈 토플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는 체험의 생산자가 경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축을 떠맡게 된다>고 토플러는 내다본다. 그것이 실현되는 날에는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체험이라는 가장 일시적이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212]

미래학자 제임스 오길비는 이렇게 지적한다. <체험 산업의 성장은 산업 혁명이 생산한 물건의 효용성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제 소비자는내가 아직 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지 않고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 중에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뭔가?’ 라고 묻는다.>[213]

 

경영 컨설턴트 조셉 파인과 제임스 길모어는 기업들에게 <새롭게 떠오르는 체험 경제에서는 상품이 아니라 '기억'을 만든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213]

 

관광을 어엿한 산업으로 발전시킨 주역은 토머스 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관광 여행 산업의 아버지로 사람들은 선뜻 이 사람을 꼽는다. 쿡은 관광을 패키지로 만들고 여행을 유료 체험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출발은 소박했다. 수백 명의 금주회 회원을 더비, 노팅엄 같은 중부 도시에서 대중 집회가 열리는 레스터까지 할인 철도 요금으로 수송하는 데서 그의 사업은 시작되었다.[216]

고객의 온갖 변덕과 요구에 부응하고 고객이 클럽 메드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이 클럽 메드의 목표다.[220]

자연적, 역사적 복원, 주제가 있는 도시, <토속적> 환경에서 쾌적하게 보는 휴가는 모든 문화 생산을 경제 활동의 중심부로 끌어당기면서 눈부시게 발전하는 글로벌 관광 산업이 가져온 결과이다.[221]

 

한 나라가 갖고 있는 문화의 내밀한 영역은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특권을 누릴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접속 지역>으로 제공된다.
자연 경관, 성당, 박물관, 궁전, 공원, 의식, 축제 같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 영역이 점점 시장으로 흡수되어서 여유 있는 사람의 오락과 정서 함양을 위한 문화 상품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한때는 당당히 제 몫을 해냈던 역사적 유산이 이제는 그저 돈을 받고 문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무대나 소도구, 배경이 되어 버렸다.[222]

과거와 산업 자본주의가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할 목적으로 자연 자원과 노동력을 포획하고 이용했다면, 새로운 문화 자본주의는 문화 생산을 위해 문화 자원을 징발한다.[222]

 

이러한 누손(한 나라로 흘러 들어 왔다가 금새 빠져나가는 돈>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전 세계의 20퍼센트 인구가 소득의 점점 많은 부분을 문화 소비와 살아있는 체험을 위해 지출하는 한, 21세기에도 관광 산업은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223]

 

세계은행 같은 금융 기관은 상업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 발전해 온 자본주의 체제가 문화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직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관광 산업에 점점 많은 연구와 자본을 쏟아 붓고 있다.[223]

 

몰은 문화의 다양한 부분들을 상업화된 형태로 모사하여 재현하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몰은 인공의 문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첨단의 전자 기술을 총동원한다. 세심하게 배치된 건축학적 모티프, 늘 쾌적한 상태로 유지되는 실내 기후, 세련된 조명 체계, 컴퓨터가 통제하는 감시 시스템이 어우러져 쇼핑몰 바깥에 존재하는 공유 지향의 문화 공간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문화의 자리를 <전달>한다.[228]

 

미래의 새로운 몰은 <궁극의 엔터테인먼트 센터>로 불린다.[233]

문화는 체험의 공유다. 서로 비슷한 가치 아래 사람을 모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문화 상품은 문화를 잘게 토막내어 분할하는 것이고 상업화된 오락물로 개별 판매하는 것이다.[236]

 

<20세기 말, 미국을 이끌어가는 사업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락이다.> 개블러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 산업은 점점 전통적 오락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236]

많은 역사가들은 19세기 후반 그래픽 분야에서 일어난 혁명을 오락 경제의 시발점으로 본다. 미국에서 양질의 다색 석판 인쇄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처음으로 시각 이미지의 대중 시장이 형성되었다.[237]

 

닐 개블러에 따르면, 영화는 <온 국민이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진 관객을 영화라는 상상의 국가 시민으로 변모시켰다. 그 상상의 국가는 조만간 현실의 나라를 대체하고 삼켜버렸다.>[240]

 

오락 산업이 급속히 부상하는 현상은 물건을 축적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온 세대가 체험을 축적하고 관계에 접속하는 것을 선호하는 세대로 바뀌고 있음을 웅변한다.[241]

경영 컨설터트 톰 피터스는 자문을 요청해 온 기업들에게 <사업의 성패는 고객의 머리에 감동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집어넣느냐에 좌우된다>고 조언한다. 이제 사람들에게 <신화>, <상상>, <환상> 같은 단어가 먹혀 들어간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 근면>이 아니라 <창조>이며, 사업은 일보다는 유희에 가까워진다.[242]

 

<무대 위의 배우가 신빙성 있는 연극을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서비스 분야의 배우도 관객에게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244]

 

문화 생산은 21세기 고부가 가치 산업을 선도할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 문화 생산은 경제 생활의 제1열로 부상하고 정보와 서비스는 2열로, 제조업은 3열로, 농업은 4열로 내려간다. 이 네 개의 열은 소유 관계에 바탕을 둔 체제를 접속에 바탕을 둔 체제로 꾸준히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통합한 네트워크 관계 안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것이다.[246]

9. 문화의 광맥을 찾아서

인공 환경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상품으로 바뀐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삶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것을 구입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소비자가 되어버린다.’[251]

 

마케팅은 문화라는 공공재로부터 가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캐낸 다음 예술적 조작을 거쳐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품화된 체험으로 변형시키는 수단이다.[252]

 

마케팅은 문화적 규준, 관습, 활동을 상품 형태로 번역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술이다.[252]

 

점점 확대되는 마케팅의 새로운 영역은 문화 상품의 기획자로서의 역할이다.[254]

 

저항문화는 마케팅 전문가가 특히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다. 환경문제, 여성 문제, 인권 문제, 빈부 문제, 이 모든 것이 이미 마케팅에 동원 되었다.[256]

 

그런 생활 양식 마케팅 행사로서 가장 먼저 언론과 대중의 크나큰 관심을 끈 것은 미국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미국 인간 띠잇기> 라는 행사였다..이 행사는 세계 기아 문제를 여론에 부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기 위해 비영리 문화 단체들에서 구상했다. [256]

이 행사를 기업체가 후원하는 문화적 체험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코카 콜라는 <미국 인간띠 잇기>행사를 위해 전국의 2천 개가 넘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행사에 참여할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1986 5 25 4백만여 명이 손에 손을 맞잡고 미국을 하나로 이었고 200만 명은 각 지역 학교와 교회에서 벌어진 별도의 행사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주요 방송사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코카 콜라로서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257]

라이프 스타일 행사 마케팅의 목표는, 기업이 문화의 적극적인 후원자이며 주역이라는 인식을 지역 사회와 소비자 단체에 심어주어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쌓아나가는 데 있다.[259]

 

접속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그 누구건 커뮤니케이션 회로를 소유하고 네트워크에 이르는 통행로를 장악한 사람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262]

 

마누엘 카스텔스는 말한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트워크 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264]

 

이제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 단계로 이행하고 체험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엘리트 계급이 정치 영역과 시민 사회에서 공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있다. <문화의 중개자>로 불리는 이 새로운 계급의 실력은 지식과 창조성, 예술적 감수성과 기획력, 전문가적 식견과 마케팅 안목 같은 무형 자산에서 발휘된다.[268]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들은 문화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 지식인, 학자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이들은 문화 전체가 상혼으로 얼룩질 가능성을 무엇보다도 우려하고 있다.[271]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구어의 종류는 6천 가지가 넘지만 1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언어는 3백 개에도 못 미친다. 6천 개의 언어 가운데 절반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반면 영화와 텔레비전의 주역이며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는 꾸준히 사용자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영어를 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미디어 기업들이 전세계의 문화 상거래를 주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1세기 안에 영어는 세계 구석구석으로 파고들 것이다.[272]

<<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웨이드 데이비스는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소멸한다>고 지적한다. <이 세상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가 살아 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데이비스는 언어의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현실을 개탄한다.[272]

산업 시대에는 자연 자원과 노동력에 대한 식민주의와 그 이후의 신식민주의 지배를 놓고 지정학적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소유와 재산권의 문제는 민족과 국가가 벌이는 쟁패의 본질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대로 새로운 시대에는 지역 문화와 세계 문화에 대한 접속의 문제, 상업화된 형태로 문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회로를 둘러싼 지정학적 쟁탈전이 점점 전면으로 부각된다.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문화 중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접속이 체험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지기의 노릇을 하게 된다.[273]

10. 탈근대

7초 안에 할 말을 모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정보에 즉각 접속하여 인출하는 데 익숙하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성찰적이기보다는 찰나적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임시직에 익숙하고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편성된 조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부모 세대처럼 단단히 뿌리 박은 삶보다는 아주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쪽이다. 작문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자 데이터를 처리하는 실력은 한 수 위다. 분석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275]

 

이들의 세계는 점점 가상의 행사와 순간적 경험으로 채워진다. 그 것은 네트워크와 문지기와 연결의 세계다. 이들에게 접속은 생명이다. 접속이 끊긴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이들은 영국의 역사가 토인가 말한 대로 탈근대 세계를 처음으로 살아가는 세대다.[276]

탈근대와 근대가 이토록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 문화, 실체험의 상품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탈근대와 맞물려 있는 반면, 근대의 자본주의는 토지와 자원의 상품화, 노동력의 고용, 제품 생산, 기본적 서비스의 제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276]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 이 세계를 무한히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객관적 현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굳건한 신념 때문이었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기술은 객관적 현실의 결과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사유 재산은 정복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제도적 장치였다.[279]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 그리고 훗날 계몽주의자들이 자연에 대해 품었던 생각의 대부분은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베이컨의 세계에서 모든 활동은 주변에 널린 객체를 소유하고 착취하기 위해 주체들이 생사를 걸고 벌이는 투쟁으로 귀착된다. 결국은 주체의 의지만이 남는다. 주체의 의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것을 먹이고 살찌우는 객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사물>의 배타적 소유와 통제에 바탕을 둔 사유 재산 체제는 우주를 능동적 주체 아니면 수동적 객체로 양분하는 세계관 속에서 힘을 얻는다.[280]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초연하기는 커녕 경기자로서 참여자로서 자신이 조작하고 입김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281]

 

새로운 물리학은 존재와 운동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사물은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283]

 

근대 과학이 궁극적 진리와 근본적 입자를 찾았다면, 새로운 과학은 돌발적 가능성과 패턴 발생의 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불변의 법칙에 바탕을 둔 현실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적 행위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자연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을 모든 고비에서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284]

 

탈근대자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의 구성물이다. 기호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내는 이야기,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에 의해 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세계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우발적이다.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과 시나리오로 엮여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 창조된 세계, 합의되고 공유되는 의미와 은유로 결속된 세계다. 언어, 의미, 은유는 시간 속에서 달라질 수 있고 또 실제로 달라진다. 현실은 우리가 증여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소통을 통해 지어내는 것이다.[285]

 

이제 학자를 움직이는 힘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 탐구이다. 의미를 캐는 열쇠는 언어가 쥐고 있다. 우리가 생각과 느낌을 남과 주고받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버그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탈근대 세계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생활 영역의 으뜸가는 현실이 되었다>.[286]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들은 생각한다. 반면에 창조적 무질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하는 쪽에 가깝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286]

 

새로운 시대는 모호하고 다양하며,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며, 어수선하고 너그럽다.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이데올로기, 만고 불변의 진리,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철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온갖 유형의 공연이 펼쳐진다.[288]

탈근대는 부드럽고 가볍고 느낌과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대다. 그것은 거꾸로 된 세계이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의식은 의심받고 성적 욕망, 몽상, 환영에 이끌리는 무의식이 전면에 나서서 사실상의 현실이,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이퍼 현실이 된다. 지하 세계에 갇혀 있던 환상은 찬양을 받으면서 표면으로 떠오른다.[289]

 

새로운 인간은 얼마나 많이 생산했고 얼마나 많이 축척했는가 보다는 얼마나 생생한 경험을 많이 했고 얼마나 많은 관계에 접속할 수 있는가에 흥미가 있다. [292]

 

부르주아지는 덕보다는 양식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양식은 무엇보다도 자기 절제와 자기 통제라는 관념을 연상시켰다. 양식은 시민의식, 근면, 성실, 의지, 검약, 청렴, 그리고 성숙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295]

 

지난 세대의 사람은 자신을 <양식 있는 인간>으로, <매력 있는 인간>으로 여겼다. 거기에는 생산 중심의 가치관, 소비 중심의 가치관이 각각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문화라는 장터를 이루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연기하면서 각본과 무대 사이를 경쾌하게 옮겨 다니는 <창조적 공연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297]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20세기 가속화되는 도시 세계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인간형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삶 자체의 <본질이 불안정해졌다>고 말한다. 인간 활동의 속도가 워낙 빨라지다 보니 고정된 형태가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발 밑에 놓여 있는 무정형화된 삶의 심연을 응시한다>고 지멜은 말한다. 인간의 활동은 가속화 되고 인간 의식은 유동성이 커진다고 강조하면서,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자리에 고정되어 같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생산품들과 부단한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다>고 지멜은 말한다.[298]

 

헌터 대학의 마이클 우드와 텍사스 대학의 루이스 주커 두 사회학자는 『탈근대 자아의 전개』라는 책에서 <누적된 노력을 통해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자아가 부단한 과정 속에서 각성되고 발견되고 실현되는 현재 지향의 자아>로 변모하는 양상에 주목한다. 이제 자아는 만들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아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재편집되는 이야기의 전개로 여겨진다.[299]

 

인생은 역사나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각성이 움튼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에 더욱 끌리게 마련이다. <역사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살아가지만 <치료를 지향하는 인간>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며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300]

래시는 <우리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감각, 과거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식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시간 감각의 소멸이다> 라고 말한다.[301]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놓은 데 기여한 요인의 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통신 기술이 인쇄에서 컴퓨터로 바뀐 것이다.[301]

 

새로운 자아는 섬처럼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를 지향하는 자아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사이버스페이스 전자 네트워크 안에서 <자아는 대수롭지 않다……. 섬처럼 혼자 설 수 있는 자아는 없다. 모든 자아는 관계의 낱줄과 씨줄 안에서 존재한다……. 늙었건 젊었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가난하건 사람은 언제나 특정한 통신 회로의 '접속점'에 위치한다>[307]

 

인쇄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관념이 싹트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컴퓨터는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북돋운다.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하고 다양한 네트워크에 참여하면서 성장한 세대는 연결성과 접속 관계에 치중하는 상업 세계에 친근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컴퓨터 의식과 새로운 사업 방식이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머지 않아 치밀한 그물망이 완성될 것이다.[308]

이 자아 관념의 보편화는 조리가 없고 일관성이 없는 관계들의 보수성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런 관계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다양한 역할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른 자아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탈근대 의식>이라고 거건을 비롯한 학자들은 지적한다.[310]

 

MIT의 셰리 터클 교수에 따르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 공동체의 다양한 집단 안에서 온라인 인격체로 살아가는 사람은 수십만, 아니 벌써 수백만에 이른다. 가상 공간에서 만들어진 여러 개의 나는 현실 속의 통일된 자아 관념을 허물어뜨린다>[312]

 

인간은 끝없는 변신의 과정을 밟는다. 자꾸만 존재의 상태를 바꾸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 다른 누군가가 된다. 문화 행사가 벌어지는 자리, 교제의 장, 사업 환경에서 인간은 의혹을 접고 기꺼이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는 원래 가면을 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317]

 

존 로크는 자아가 개인의 사유 재산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지만 인간 행동을 연출적 관점에서 파악하며 이제 자아는 더 이상 개인의 사유재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어빙 고프먼이 말한 대로 자아는 <그가 공유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 의해 [한 인물에게] 부각된 감각>에 가까워진다.[319]

 

페린바나야감에 따르면 연극 정신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상징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한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도 그들 나름으로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교감을 주고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적 사실이나 사회적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사실이나 대상이 연극적으로 전개되어서 하나의 주제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극장은 사회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극장은 사회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현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의 실상을 응축하고 정형화해 놓은 곳이다.’[320]

세계를 연극 무대로 보는데 익숙한 새로운 시대의 남녀에게는 상업 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322]

 

11. 접속자와 비접속자

벌써 20년 전에 다니엘 벨은 앞으로 나타날 시대의 성격을 이렇게 진단했다.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새로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누가 접속권을 소유하느냐가 핵심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라는 점을 강조했다.[324]

사이버스페이스 혁명을 선전하는 4대 전도사라 할 수 있는 에스더 다이슨, 조지 길더, 조지 키워스, 앨빈 토플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통신 시장의 특징이 '규모의 경제' '자연적 독점'이었다면 기술의 진보는 이것을 전형적인 경쟁 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정부의 임무는 이런 변환을 적극 후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쟁자와 새로운 기술이 자꾸만 나타나 과거의 자연적 독점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332]

 

<민간 기업이 국내 인프라와 국제 접속 경로를 모두 장악할 경우 개발도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속국으로 되돌아가는 꼴이 되어 버린다.>고 비판가들은 지적한다.[333]

 

경제와 사회에서 비중 있는 활동이 상품화된 문화 체험의 형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세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주파수와 통신 채널에 대한 관리권을 포기할 경우 정부의 역할은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336]


인간 활동의 기초가 지리적 공간이었을 때에는 정부의 존재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경제 활동과 사회 활동이 점점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중요할까?

지리에 기반을 둔 항구적 공동체보다는 가상 세계 안에서 어울리면서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일시적 공동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 나라가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오래전부터 여겨져 온 땅과 국토에 대한 애정과 집단적 연대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장 마리 게노는 『국민 국가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가 시민이 국가 바깥에 세우는 무한히 많은 연합체들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제 정치가 사회생활을 조직하는 원리라는 소리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버린다. 정치는 현대 세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기만 한 인위적 구성물로 전락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아무튼 주변적 지위로 밀려난다.>[338]

세계 인구의 부유한 1/5이 문화 체험과 개인적 변신을 찾아 소유를 과감히 포기하고 있지만 나머지 4/5는 아직도 초라한 살림살이 속에서 더 많은 재산을 갈망하고 있다.[339]

컬럼리스트 데이비드 클라인은 하이테크 잡지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340]

빌 게이츠는 미국 인구의 절반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의 30억 노동자 가운데 1/3은 일자리가 없거나 생활비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1998년 국제 노동기구의 보고서 내용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가장 부유한 인구 집단은 오락을 즐기면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현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거의 10억에 달하는 인구는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수십억 명은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다. 코 앞의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모두 16억 명이 살아가는 전 세계의 약1백여 개의 국가에서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89개국은 소득이 10년 전보다 떨어졌으며 35개국은 1930년대 대공황기보다 더욱 큰 폭으로 국민 소득이 떨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가구당 평균 소득 수준이 20년 전보다 20퍼센트 이상 하락했다.[341]

실제로 미국인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연간 80억 달러)과 유럽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쓰는 돈(연간 110억 달러)은 학교 교육을 못 받고 공동 화장실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 20억 명의 인구에게 기본 교육, 깨끗한 물, 위생 시설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보다도 많은 액수이다.[342]

개인과 기업의 통신은 점차 전자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매체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이런 매체를 통해야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접속의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이다.[346]

 

앞으로 인간이 영위하는 문명 생활의 상당 부분은 전자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접속의 문제는 다가오는 시대가 성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가 된다.[346]

 

12. 문화와 자본주의의 생태학을 향하여

접속의 시대는 인간의 경험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도대체 <접속>이 무엇을 뜻하는가이다. 이것은 기술이나 데이터에 대한 협소한 차원의 접속이 아니라 좀더 광범위한 맥락의 접속을 뜻한다. 소유에 기반을 두었던 시대와 비교할 때 이런 접속의 의미가 좀더 명쾌하게 드러날 것이다.[348]

 

새로운 통신 기술과 이 기술을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가 접속을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네트워크는 새롱누 시대에 펼져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요 일부일 뿐이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348]

사유 대 접속의 문제를 가장 높은 수준의 사유 단계로 끌어올린 학자는 토론토 대학의 ㅡ로퍼드 맥퍼슨 교수다. 후기 산업 시대의 기술로 인해 승부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통찰했다.[349]

 

접속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는 시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의 활발한 전개 덕분에 최근 몇십 년 동안 상당한 입지를 확보했다.[351]

 

물질의 희소성을 극복한 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가 우위를 점하며, 자기 실현과 자기 변신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그런 사회에서는 <충만한 삶>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권리야말로 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소유의 가치가 된다. 새로운 시대에 소유는 <개인이 인간으로서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보장하는 역학 관계의 체제에 참여하는 권리로 성격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토론토대학의 크리스토퍼 맥퍼슨 교수는 결론짓는다.[352]

 

풍요로운 생활이 웬만큼 정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사회에서는 개인이라면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다.[353]

 

네트워크 세계에서 자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반면, 배제되지 않을 권리, 곧 접속의 권리는 개인적 자유를 재는 잣대가 된다.[354]

 

점점 확대되는 글로벌 네트워크 세계에서 정부가 과연 누구나 접속의 권리를 누리도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354]

새로운 시대의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업적으로 규정되는 관계와 전자로 매개되는 네트워크가 전통적 관계와 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일 것이다. 이런 전제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인가의 활동을 조직하는 두 가지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제재와 가치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들은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관계

상품화된 관계

- 친족, 민족, 지리, 공유하는 정서로부터 탄생

-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음

- 뒷받침하는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의미를 끊임없이 확보하고 재생산함

- 이렇게 공유되는 의미가 공공의 문화를 이루어나감

- 관계와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 핵심은 도구적이라는데 있다.

- 이런 관계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결속력은 쌍방이 합의한 거래 가격이다.

- 이런 관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호혜성보다는 계약성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 쌍방이 계약상의 의무를 존중하는 동안 존속하는 공동 관심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된다.

사회적 계약

상업적 계약

- 시간적 지평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관슴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내리는 평결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다.

- 조상,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 지구와 그안에 서 살아가는 온갖 피조물, 너그러운 신에 둘러싸여 있다는 일체감에서 출발한다.

-전통사회의 일원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행동에 제약을 가져온다.

-자기만의 변덕보다느 타인에 대한 책무가 우위에 놓인다.

- 더 큰 사회적 유기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인정감을 얻는다.

- 일반적으로 그 유효기간이 짧다.

- 역사나 유산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행이나 결과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다.

- 당사자 사이의 책무는 명시적이다

- 일반적으로 수량화 할 수 있고 합의한 계약 내용을 법률 용어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다.

- 추기 의무를 질 필요가 없고 어떤 계약으로부터도 자유롭다

- 복수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있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빠른 시간 안에 관계를 맺고 끊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구성원들이 우선적으로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전통적 공동체와는 달리 상품화된 관계를 표현하는 상업 네트워크에서는 고객과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의식이 우선이다.[357]

 

이제는 도대체 우리가 추구하는 접속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차례다

시장이, 그리고 지금은 사이버스페이스가, 공유되는 문화를 문화 공연이 문화 상품의 형태로 식민지화하려는 추세를 가속화하면서, 전통적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기존의 공동체를 육성할 수 잇는 시간과 고간은 점점 줄어들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을 네트워크로 조직하고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상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활발하게 어울리게 하면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있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 활동의 대부분이 상어 영역으로 옮겨짐에 따라 잃는 것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데 되면 탈 근대가 그토록 찬미하는 자기 실현이라는 목표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358]

 

사회적 공동체, 다시 말해서 문화는 상업 영역보다 먼저 나타났다.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인간은 늘 사회적 공동체를 먼저 세웠다. 사회적 교환의 규칙을 수립하고 복잡한 사회 관계 안으로 구성원을 끌어들이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했다. 이런 관계를 통해 굳건한 신뢰가 형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공동체는 상업적 교역에 나서고 교환을 위한 시장을 만들었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358]

시장은 어디까지나 파생적 성격을 가지며 거래 조건을 확신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가 충분히 조성되어 있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서유럽과 미국의 기업은 동구권이 몰락하고 난 뒤 이런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많은 기업이 과거 공산국이었던 나라로 너도나도 몰려가서 사업체를 차렸지만 상당수는 실패했다. 상거래를 보장하는 사회적 신뢰, 이른 바 <사회 자본>이 모자랐던 탓이다. 공산주의 정부는 제3부문, 그러니까 사회적 신뢰를 창출하여 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문화 기구들을 없앴다. 자연히 기업과 기업의 합의는 어렵거나 심지어는 불가능에 가까운 형편이 되었고 설령 상업적 계약이 맺어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359]


모든 나라는 시장이라고 하는 제1부문과 정부라고 하는 제2부문을 중심으로 공공 정책을 운용하면서 문화라는 제3부문은 당연시한다. 사회 자본을 수립하고 시장과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막중한 역할이 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 기구 -교회, 세속 기관, 민간 단체, 상조회, 스포츠 클럽, 예술 집단, 비정부 기구-는 사회적 신뢰의 샘물이다.[359]

3부분의 조직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본적 기능의 상당 부분을 떠맡는다. 이들은 제도적으로 자행되는 권력 남용에 도전하고 사회적 불만을 표출시키는 피뢰침이다. 3부문의 종교, 상담 조직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잡이로서 공유하는 가치를 만들고 닦는 곳이다. 문화가 풍성하게 유지되는 놀이의 장이다.[361]

 

자본주의 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문화 영역의 상당 부분을 상업화된 문화 상품, 공연, 체험의 형태로 자기 영역 안으로 흡수할 경우, 문화가 더 이상 사회 자본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할 만큼 위축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그렇게 되면 경제도 타격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문화에 의해 생산되는 사회 자본은 경제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사회 자본이 고갈되면 문화와 상업의 섬세한 균형은 무너져버린다.[362]

  

문화는 인간 문명이 원활하게 기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또다른 가치의 산실이 된다.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은 가장 심오한 인간의 감정에 해당된다.[362]

 

친밀함과 예의 바름을 하나로 이어주는 힘도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타인 안에서 감정의 둥지를 틀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노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362]

 
화면 앞이나 가상 세계 안에서 성장한 세대-그들의 상호 소통은 기술과 상징의 두꺼운 층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가 남들과 또는 다른 생명체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모사의 세계에서 사람은 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363]

 

모사된 세계에서 자라고 문화 상품과 체험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산다는 발상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 세대는 공감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던지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늘어나고 있다.[363]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는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364]

 

경제는 문화와 인간성의 기본 틀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와 감정,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상업 영역이 인간 문화와 체험의 조각조각을 닥치는 대로 짜깁기하여 제공할 때, 우리가 중요한 인간적 가치와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우물은 독으로 오염될 위험성이 있다.[364]

시장과 네트워크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장과 네트워크는 사회적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된 강력한 사회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나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파생물이다.[365]

 

한 민족이 공유하는 가치와 역사적 유산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고유 음악은 어떤 인간 집단이 처한 어려움이나 고난을 대변하고 정신적 열망이나 정치적 갈망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은 사회적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문화 형태의 하나로 사람들 가슴속 깊이 파묻혀 있던 감정을 움직인다.[366]

 

세계 음악 옹호론자들은 전세계인에게 토착 음악을 제공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와 관용의 폭을 넓히고 세계는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장르와 장르의 혼합 교배는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로 연결되어 가는 오늘날의 탈근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차적 회로였던 음악을 판에 박힌 대중 오락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음악의 세계화는 지역 문화를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본질과 맥락을 토착 음악에서 고스란히 제거했다는 것이다.[367]

 

전통 음악의 원래 역할이 지역 문화와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재생산하고 유지, 전승하는 데 있는 반면, 상업 음악은 순전한 오락물이어서 일시적 유행과 변덕에 놀아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더욱 절박한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 상업 영역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토착 음악과 전통 음악이 상실되고 그 문화적 배경이 평가 절하된다면 지역 문화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369]

 

상업 영역은 문화 영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토착 음악이 상업 논리에 흡수당하여 결국 고갈되면 상업 영역도 약화된다. 경제는 인간이 문화적 토양에서 길러왔고 상업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상품화와 교환의 원료를 제공하는 감정, 가치, 공유 체험, 의미 같은 자원 기반을 삼켜버릴 것이다.[369]


<1998
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보고서>는 문화와 상업의 점증하는 긴장관계를 유난히 강조한다.

마을, 지역, 국가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질감을 부여하는 문화적 가치가 글로벌 시장의 무자비한 힘에 압도당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지역 문화나 국가 문화,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창조성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 향상되는 방향으로 세계화의 충격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370]

문화와 상업이 생태학적으로 균형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되찾으려면 시장에 나와 있는 문화 상품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못지않게 지역 문화를 소생시키는 데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371]

새로운 상업 네트워크는 새로운 문화 네트워크와, 새로운 가상 체험은 새로운 실생활 체험과, 새로운 상업적 오락은 새로운 문화적 의식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372]

 

전자 통신이 매개하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21세기에는 지리적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인간끼리 직접 살을 맞대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을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가장 깊은 수준의 체험을 통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깡그리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 데 원료가 되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372]

가장 깊은 인간의 교류는 언제나 지리적 공간에서 일어난다. 문화 체험은 방송 매체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원산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진정한 의미의 공유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줄어든다.[373]

 

지리적 맥락을 박탈당한 문화 표현은 총체적 체험의 그림자일 뿐이다. 물론 그림자도 엄연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즐거움도 줄 수 있지만 원래의 무용이 전달하려고 했던 대지와의 깊은 일체감은 맛볼 길이 없다.[373]


모든 현실 문화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밀감은 지리적 공간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밀감이 없으면 사회적 신뢰망을 구축하기도 어렵고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문화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려면 적어도 사이버스페이스에 쏟아 붓는 만큼의 관심을 지리적 공간에도 보여야 하고 채팅방에 들이는 만큼의 정성을 현실 공동체에도 기울여야 한다.[373]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시민 사회와 저변 문화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데 목적을 둔 풀뿌리 교육 혁명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374]

 

시민 교육은 학생이 살아가는 동네와 지역 사회에서 직접 체험하는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기본 가정에서 출발한다.[374]

 

시민 교육 옹호론자들은 문화를 자기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길 수 있도록 학생의 자기 정체성을 심화 확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은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육성하고 타인과의 유대를 권장하며 문화가 문명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학생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376]


3부문이 우위를 차지하려면 다양한 기구, 활동, 이익을 공동의 사명감 아래 결속시켜 정치 세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378]

근대의 정치 형세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층, 빈민층은 물리적 자본을 가용하고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최선의 방안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생산 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인간 노동의 결실을 누가 주도적으로 분배할 것인가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지난 3백여 년 동안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 구도에 흡수된다. 내재 가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는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화 자원, 의식(儀式), 활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379]


따라서 좀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문화와 상업의 갈등은 내재 가치와 효용 가치의 갈등이다. 두 가치가 모두 지난 몇 백 년 동안 사회 담론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내재 가치가 효용 가치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사회의 준거들이 자꾸 효용성으로 치우치는 것은 상업 영역이 점점 득세하고 문화 영역이 퇴조하는 시대 추세를 정확히 반영한다.[379]

생물 다양성과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21세기의 중요한 두 사회운동이다. 이 두 운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화라는 것은 결국 대지와의 친밀한 결속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모든 문화는 자연에 공동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음악, 노래, 무용, 이야기, 미술, 의식, 축제는 자연이라는 현실과 자연에 존재하는 리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식물 동물 풍경, 하루의 주기, 변화하는 계절은 모두 문화적 형식을 만들고 문화적 표현을 낳는 데 영감을 주었고 은유로 활용되었다.[380]


문화는 자연을 이루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한결같은 외경과 헌신에서 탄생했다. 문화는 대체로 생명을 긍정한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빛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재 가치의 핵심이다. 따라서 문화는 모든 현상이 효용성으로 환원되고 편의와 징발이 행동의 표준으로 수용되는 상업 영역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380]

문화의 다양성을 되살리기 위해 문화의 복원을 부르짖는 것은 좋지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약한 형태의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극우 민족주의 정당, 분리주의 집단, 민족 청소운동, 종교 회복운동은 세계화와 탈근대화 추세에 맞서는 대항 운동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운동은 늘 지리적 공간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 근본주의 세력은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부동의 질서를 찾으려 하고 세계가 감히 넘볼 수 없도록 영토를 다시 거룩하게 만들려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이어서 접속은 무조건 불순한 영향력으로 간주한다.[381]


시민 사회 조직은 지역 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의식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국지적으로>라는 말은 너무나 남용된 나머지 상투적 구호로 변질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전세계의 제3부문 조직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한다.[382]

 

자기만의 문화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 시민 사회 조직운동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많은 시민 사회 조직의 정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문을 굳게 닫아놓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온 세계에서 불어오는 문화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밖에서 불어온 문화에 덩달아 휩쓸려 가지는 않겠다.>[383]

산업 자본주의가 문화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지금, 노동 정신은 놀이 정신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문명도 존립할 수 없다.[384]

네델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가 사회를 만드는 데 맡았던 중요한 역할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호칭으로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호모 사피엔스(사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와 동렬에 올려놓자고 제안했다. 다른 생물도 놀기를 좋아하지만 인간은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384]

인류학자들은 아득한 원시 시대부터 산업 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에는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는다. 가령 중세의 그리스도교 달력을 보면 1년의 절반 가까이가 공휴일, 축일, 안식일 명목으로 노는 날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정부가 그리스도교 달력을 폐지하고 공휴일이 훨씬 적은 세속 달력을 도입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자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고 놀이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산업 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385]

놀이를 지배하는 전제와 규칙은 전통적으로 일을 지배해 온 전제와 규칙과 크게 다르다. 우선, 놀이는 신나고 즐겁다. 즐거운 일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일 - 산업 사회에 존재하는 직업의 75퍼센트 이상 - 은 기본적으로 단순 반복 업무라서 따분하고 지루하다. 둘째, 놀이는 자발적이다. 놀기 싫은데 억지로 놀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가 선택해서 자유롭게 끼여드는 활동이 놀이다. 물론 일도 자기가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이 일 저 일 골라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세계 노동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사람들이게 일은 생존의 문제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다. 자연히 근로조건도 혹독하고 열악하다.[385]

진정한 놀이는 살과 살이 맞닿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이때 사람들의 참여도도 높아진다. 놀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겉으로 드러난 규칙과 드러나지 않은 규칙이 있고 심각하고 방향성이 있으며 목적 지향적인 놀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장이나 사무실의 통상적인 근로 환경에 비하면 훨씬 덜 딱딱하다.[386]

놀이는 또 일보다 친밀감을 주고 더 많은 몸놀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한껏 발현할 수 있다. 고독하게 혼자서 즐기는 놀이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어울리는 놀이가 훨씬 많다.[386]

일과는 달리 놀이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논다는 행위 자체에서 보상을 얻는다. 치밀하게 조직된 시합이나 운동 경기와는 달리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놀이는 일처럼 쉽게 계량화할 수가 없다. 놀이는 도식적인 잣대를 거부한다.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즐거움이다.[386]

 

놀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가볍고 경쾌하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놀이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놀이에 빠진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놀이는 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387]

 

근대로 넘어오면서 일과 놀이의 비중이 뒤바뀌었다. 일은 인간 활동의 주역이 되었고 놀이는 일과 잠 사이에 잠깐 잠깐 끼어드는 조역으로 밀려났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관계가 바뀌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시장이 사회적 교제보다 우위를 점하고, 시장 자본이 사회 자본을 압도하고, 놀이가 여가 활동으로 밀려나는 동안 일은 단단한 입지를 굳혔다.[387]


그러나 다시 일의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 돌아왔다.... 전체 노동력의 극히 일부만 동원하여 전체 인구에 필요한 온갖 유형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현대 농업에서는 이미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다.[388]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재산을 축척하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다시 놀이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389]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 점점 중요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생산되는 놀이는 문화 영역에서 생산되는 놀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389]

 

순수한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프리드리히 실러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 라고 썼다. 문화 영역의 순수한 놀이는 인간적 결속이 숭고한 표현이다.[389]

남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희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놀이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놀이도 희열도 결국은 경험의 공유이다. 숲을 혼자 거닐 때 느끼는 잔잔한 희열도 나를 둘러싼 생명과 혼연 일체가 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390]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 라고 말했다.[390]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390]

성숙한 놀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 모은다. 그것을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섬세한 인간 교류의 형식이다. 성숙한 놀이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건 상업적 성격을 띠었건 제도화된 권력의 무분별한 횡포에 저항하는 힘이다.[391]

 

자본주의 체제 스스로도 앞으로 가장 유망한 사업 영역으로 놀이를 꼽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391]

 

새로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제에 대한 접속을 보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건강하고 다양한 지역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정된 길을 보장하는 것이다. 적절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 시장의 힘은 문화 영역을 집어삼켜 상업적 오락물, 체험, 유료공연, 금전 관계의 상품화된 파편들로 변질시킬 것이다.[392]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지금 세대가 자연 경제와 인간 경제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기울인 것과 똑같은 정성과 노력을 이 운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392]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92]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은 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392]

 
내가 저자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있는 현상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흐르는 실체에 놀랍다. 더 놀랍고 읽으면서 글들이 다가오는 것은 현재 내가 리프킨이 말하는 접속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제시한 경제의 모든 영역이 지리적 시장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로 이동하고 다양한 차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연결과 지적 소유하지 않고 접속해야 하는 지적 재산의 독점, 자산의 확대와 판매의 종말을 부를 서비스 경제의 탄생 등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현실에 직면해 있는 사항들이기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역자 후기에 언급하였듯이 이 책을 쓰는데 무려 6년이 걸렸으며, 350권의 책과 1천여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카드와 약 2천개의 주석이 동원되었듯이 현재 세계 경제의 흐름을 제시하는 기업가, 철학자, 미래학자, 경제학자 등 석학들의 말을 적재적소에 잘 인용함으로써 더욱 자신의 주장에 신빙성을 갖게 한다.

 

리프킨은 세계 경제의 흐름을 냉철하게 예견하고 하고 있다. 또 다른 삶을 꿈꾸며 세상에 흐름에 편승하려는 나는 어떤 단서의 끈을 잡는 것이 유리한지, 나와 맞는 흐름은 어떤 것 인지 두리번거리며 찾게 된다. 가슴 들떠 흥분하지 않은 마음을 자세히 보니 저 밑바닥에 깔리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크게 1,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네트워크 경제의 탄생, 물품의 점진적인 탈물질화, 물질적 자본의 비중 감소, 무형 자산의 부상, 물품의 순수한 서비스로의 변신, 생산 관점보다 사업 확장으로서의 마케팅 관점, 관계와 경험의 상품화 등 21세기에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하고 그로 인한 문제점을 도출해내고 있다. 2부에서는 1부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듯 궁극적으로 문화를 고갈 시키는 사회의 유형을 제시하고 전통적 관계를 극대화하고 하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둔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나가는 것만이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일러준다. 그리하여 1부와 2부가 물 흐르듯이 유기적으로 엮어져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서술의도를 밝힌 서문 부분이 별도로 있지 않다. 그래선지 1장에서 접속의 시대가 오고 있다라는 부분은 이 책의 서문 같은 역할을 한다. ‘소유의 종말이라는 아주 낯설고 궁금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본분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내용이 미칠 영향과 내용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 아닐까?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은 모든 경험과 문화를 상품화하고 이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문다고 주장한다. 소유와 상품화라는 자본주의가 네트워크라는 접속을 통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역설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고 임시적으로 접속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모습이며 접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제 활동이 어려울 것이며 시장의 주역도 판매자와 구매자가에서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만이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를 고민해야 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갈 바를 제시해 준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그가 주장한대로 일어나고 있다. 시기상으로 미국은 과학의 발달로 우리나라보다 접속으로 대변되는 네트워크 시대가 훨씬 빨래 도래했으며 전통적 관계로 약한 사회이므로 급속도로 확산되어 더 우려스러운 것 같다. 각각의 경험과 문화가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뿌리 없는 것으로 재생산되어 전세계를 휩쓸기도 하지만 유구한 전통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그의 주장이 너무 호들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혜안은 탁월하다. 거침이 없다. 그의 식견을 따라가 본다.

접속의 시대의 경제 현실의 변화와 새로운 인간 유형

시장 경제 현실이 소유보다 접속으로 바뀐다. 물적 자본을 많이 가진 기업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 등 가치 있는 지적 자본을 많이 보유하는 기업이 주도권을 갖는다. 소비자의 의식도 소유에서 접속으로 바뀌게 됨으로 자동차, , 가전 제품 등을 임대하는 형태를 갖는다. 산업시대는 가고 문화 생산 시대가 온다, 이는 세계 여행과 관광, 테마 도시와 공원, 종합 오락센터, 건강, 스포츠, 도박, 영화,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상세계 및 온갖 유형의 온라인 오락은 문화적 경험에 대한 접속권을 거래하는 하이퍼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주로 상업 영역의 문화생산 분야에만 일자리가 생길 것이고 이러한 문화의 상품화는 고용의 성격에도 근본적으로 변화를 가져 오며 노동 의식도 유희 의식으로 전환된다.

 

인류 문명이 발생한 이후 줄곧 문화는 상업에 선행했고 시장보다 우위에 있었다. 상업은 문화의 파생물이었다. 그러나사정이 바뀌어 문화는 상업화를 위한 공급원이 된다. 이로써 상업 영역이 문화를 삼키면 상업적 관계를 낳는 사회적 토대가 허물어 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서 풍요로운 문화의 다양성을 더욱 지키고 지속적으로 지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리들의 과제이다.

 

접속의 시대의 새로운 인간유형은 닷컴세대가 대표적일 수 있는데 이들은 상거래의 거부감이 없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고활동도 적극적이며 의식은 노동정신보다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으며 접속은 생활의 일부이며 재산보다 연결된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연결된 사람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의 갭도 생긴다. 접속이라는 사이버 가상 세계의 확대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겠지만 외로운 인간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네트워크 경제의 특징들

네트워크 시대에는 자동차를 개발하고 제작하는 기간의 단축, 신약 평균 개발 기간 단축, 신제품이 계속 쏟아지면서 전자 제품의 생산이 길어야 18개월로 제품의 생명력이 짧아지고 있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개선된 후속 모델을 계속 보기 때문에 새로운 과학, 서비스를 미처 경험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변화가 빠르기 때무에 소유하는 것보다 임대 형태로 상품이나 서비스에 단기간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네트워크 시대에는 소유한다는 것은 불리하고 단기적으로 접속하는 것이 유리하다.

헐리우드의 조직 모델의 변화는 네트워크 시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1950년대 등장한 네트워크 시스템은 작품에 맞는 다양한 인재를 그때 그때 모을 수 있고 흥행에 실패해도 위험을 분산 시킬 수 있었다. 오락성을 강화하고 관객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소수의 영화에 전력을 쏟는 제작방식을 버리고 네트워크 시스템 도입으로 건물, 시설, 인력을 유지하는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로써 할리우드 문화 산업은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조직을 운영한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조직 개편 운동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아웃소싱 방식의 장. 단점

자체적으로 처리해 온 기능이나 서비스를 위탁 계약을 맺고 외부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웃소싱이다. 이러한 아웃소싱 산업은 호황 중이며 전 세계에 확산 되었다. 기업의 일차적 목표를 당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나 업무를 제외하고는 외부하청업체에 맡기는 추세다. 기술의 발달은 아웃소싱에 들어가는 비용이 계속 줄어들면 더 많은 기업이 꼭 필요하지 않은 내부 업무를 외부로 대폭 넘기려 들 것이다.

아웃소싱의 장점은 기업은 돈을 버는데 집중하고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기 하지만 수익 창출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지원 기능을 외부 지원업체에 맞길 수 있다. 이로서 기업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업체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값비싼 설비를 구입하거나 기업의 수익 창출에 직결되지 않는 주변적인 업무의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돈을 낭비하지 않지 않아서 좋다. 상품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시장 상황에 기업이 유연학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이키의 경우 이러한 아웃소싱을 잘 활용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나이키는 제조업체들이 공장과 부동산을 처분하여 생산을 외부 하청업체에 맞기고 정교한 마케팅 원리와 유통망을 갖춘 연구 디자인실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나이키는 공장, 기계, 설비, 부동산이 없으며 광고와 마케팅도 아웃소싱한다. 전화교환 비서 등을 대행하는 로렐사도 아웃소싱을 잘 활용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처럼 아웃소싱 열풍은 새로운 유형의 기업이 전문 틈새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아웃소싱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전파로 전자 상거래 관리에 유리하다. 아웃소싱은 노조의 힘을 약화 시킬수 있다. 아웃소싱 다국적 기업의 저임금 노동력 착취의 논란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지적 재산 독점의 문제

21세기의 새로운 비즈니스는 딱딱한 물리적 자산이 아니라 아이디어로 가치를 평가하는 가벼운 자신을 선호한다. 따라서 판매자와 구매자의 협상에 대한 재산의 양도 행위는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접속 통해 유형,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는 주체들의 관계를 상품화하는 것, 이것이 곧 네트워크 기반을 둔 상업활동의 핵심이다. 아이디어에 대한 독점권을 보유한 소수의 기업은 산업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체인점 계약 관계는 판매자-구매자가 아니라 공급자-사용자의 관계이다. 소유의 양도가 아니라 다기간 접속을 허락 받는 형식이다.
이러한 중요한 변화가 생면과학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 석유 화학 산업을 주도해 온 몬산토, 노바티스, 듀폰, 아벤티스 기업은 유전자 연구 그리고 유전자에 기반을 둔 기술 개발과 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전자는 팔지 않는고 빌려줄 뿐이다. 유전자 정보는 특허의 형태로 공급자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생명과학 기업은 유전자를 이식한 종자를 개발하여 특허를 따낸 종자를 해마다 사서 써야만 하도록 하는 독점을 가졌으며 함부로 파종하는 농부는 누구든 고소하는 입장을 취했다.

인간의 먹거리와 직결된 생물에 대한 유전자 조작, 유전자 변형도 문제이지만 생명과학 기술의 독점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었던 생물 종자의 소유권이 몇몇 기업으로 집중되고 씨앗에 대해 접속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이것이 생명 특허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제 동물 등 여타 영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을 갖춘 몇 개의 다국적 기업의 지식 경제의 반독점을 맞기 위해 기술력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라지는 의식 구조

지난 세대의 사람은 자신을 양식 있고 매력적인 인간이 되려고 했었다. 거기에는 생산 중심의 가치관, 소비 중심의 가치관이 각각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모호하고 다양하며,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며, 어수선하고 너그럽다.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위를 우습게 여긴다. 탈근대는 부드럽고 가볍고 느낌과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대다. 새로운 인간은 얼마나 많이 생산했고 얼마나 많이 축척했는가 보다는 얼마나 생생한 경험을 많이 했고 얼마나 많은 관계에 접속할 수 있는가에 흥미가 있다.

 

자아 관념의 보편화는 조리가 없고 일관성이 없는 관계들의 보수성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런 관계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다양한 역할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상품화된 관계, 문화와 체험에 접속하는 권리를 제공하고 연출적 관점은 통신을 인간 활동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자아를 관계의 중심으로 제정의 하며 체험자체를 연극적 활동으로 만든다.

 

나아가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엄청난 상업적 잠재적 소스이다.

세계를 연극 무대로 보는데 익숙한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업 세계로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을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진정 인간적인 측면을 놓치지 말아야  

그가 말하는 급변하게 변하는 사회현상의 대목마다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근대를 떠나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대에 기계와 기술적인 네트워크, 상술적인 마케팅만 있을 뿐 정작 인간은 없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먹을 거리가 풍부하고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정작 사람은 행복해 질 것 같지 않다.

 

기술의 발전이 사고하지 않은 인간을 양성하고 탈물질, 탈생산, 탈사고로 인간의 정신세계 조차도 기계화로 맞춰가는 느낌을 준다. 빠른 새로운 시대로의 전개에서 상업화 되지 않고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으로 문화적 공동체를 토대로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지켜낸 문화의 다양성 조차도 상업적 목적으로 오래 동안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접속>으로 대변되는 문화적 가치보다 상업적 문화의 상품화와 네트워크 시대에도 진정 인간적인, 진정 자연적인 측면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하다면 인간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문화가 고갈되고 접속에 연결된 사람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들의 접속을 둘러싼 대립 등 사회 비평가로써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인간적인 면을 저버리는 상술, 독점적 행태는 버려야 한다. 

 

또한 시대가 아무리 빨리 변화하고 사고보다 체험을 좋아하고 가볍고 재미만 추구하는 시대로 간단하여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공허하면 견딜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때는 <탈접속>의 패러다임이 전개되지 않을까. 지금은 탈근대로 새로운 네트워크로 진입한 과도기적 시기이기에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 지고 있는 시기라고 보아진다. 기술과 과학의 문명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만 조절한다면 훨씬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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