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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일 09시 5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선택하여 북리뷰를 작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자신의 사업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차원에서였다. 그런면에서 제레미의 여러 책들 중 소유의 종말의 책 제목이 주는 상징성이 내 사업을 규정하고 규명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향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사회,인문과학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안목과 통찰에 놀라움을 가지게 되었다.

 

제레미 리프킨은 1945년 생으로 콜로나도주 덴버에서 태어났다.

그는 펜셀베이니아대 워큰스툴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터프츠 대학의 플레터 법과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 후 워싱턴시의 경제동향연구재단을 설립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과학 기술의 변화가 경제, 노동, 사회,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엔트로피 법칙이란 책을 통해 에너지 낭비가 가져올 인류의 재앙을 경고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새로운 재앙이 올 수 있음을 알리고, 지금부터라도 기계문명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소비의 형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생각과 행동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택하고 난 뒤에야 인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는 과학·교육·종교를 혁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엔트로피에서 보여지는 제레미의 사상은 인류공동의 새로운 질서를 갖춰나가고자 함에 기준을 두고 있는 듯 하다.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이라는 책을 통해서 정보화 사회로 인해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경고 하였고. 2000년에는 인터넷 접속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2002년에는 화석연료의 고갈과 함께 새롭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소 연료 시대를 다룬 《수소경제 The Hydrogen Economy》를 발표 하였다.

그밖에도 《생명권 정치학 Biosphere Politics(1991), 《바이오테크 시대 The Biotech Century(1998)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여 출간 때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내가 저자라면

 

내가 소유의 종말을 읽게 된 것은 내 사업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네트워킹 조직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풀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였다.

나는 디자인식스라는 회사를 제품의 런칭을 창조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감성브랜딩회사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영글지 않은 생각일지 몰라도, 런칭을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 창조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창조적인 인재를 얼마나 유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의 조직은 매번 새로운 브랜드와 새로운 시장 그리고 새로운 고객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고정적인 인재로 수행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다. 무엇보다 정보력 측면에선 다양한 네트워킹을 통해 수많은 전문가들의 경험을 녹여보고 그 실행과정과 결과를 회사의 자산으로 축적해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기에 네트워킹은 필수이다.

또한 디자인회사를 운영해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초기와는 다르게 창조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디자이너들의 습성도 그들의 직위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안정을 사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디자이너가 직업으로서의 역할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인정할 순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창조적 조직은 안정이 아닌 혁신을 추구하기에 그 대안으로서 네트워킹을 통한 조직운영을 시도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유의 종말은 나에게 창조적 실마리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고 본다.

 

소유의 종말은 크게

1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프론티어

2부    문화를 고갈시키는 자본주의로 나뉜다.

1부 자본주의 새로운 프로티어에서에서

저자는 재산을 모으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되는 시장주의적 관점들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음을 주장한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 물건보단 개념, 아이디어,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제품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어 하루아침에 퇴물이 되어버리는 시대에선 변화지 않는 것은 없을 만큼 물질에 대한 소유의 가치도 이 시대에선 퇴물이 되어감을 얘기한다. 지금 이 시대는 그간 자본주의를 주도해온 소유라는 관점이 접속이라는 새대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여러 현상과 증거들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접속으로의 변화가 단지 일부 시장의 변화에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고와 관념의 변화가 일어나 접속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으로 산업 생산 시대에서 문화 생산 시대로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으며, 사업도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측면에서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사업으로 변모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세계 여행과 관광, 테마도시와 공원, 종합 올가센터, 건강, 패션, 요리, 프로 스포츠와 게임, 도박, 음악, 영화, 텔레비전,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등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접속의 시대는 놀이의 상품화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제의, 예술, 축제, 사회운동,영성수련, 공동체 활동등도 놀이를 통해 유료화 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여 보여준다.

 

이렇듯 세계는 물질 생산에서 문화생산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직시한다. 인간의 여러 활동을 상업부분으로 끌어들이는 핵심적 사명으로 삼아온 자본주의 생활 방식이 문화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점점 상품화되고 공리와 영일의 경계선을 점점 허물어져 가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감을 드러낸다.

 

놀라운 것은 돈의 탈물질화가 진행되면서 돈을 이미지로 보는 관점이다.

그로 인해 재산의 축적이 아니라 발빠른 회전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 잡고 경제 활동이 점점 가혹화되는 시대에는, 개인이 저축의 형태로 재산을 보유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 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금융산업을 전략적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이유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산업은 미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낳고 있다.

 

아웃소싱 방식의 소유는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모든 분야, 모든 업종의 기업이 자신의 핵심 사업에 필요하지 않은 자산을 앞다투어 과감하게 처분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조직을 유연하게 운영해 보고자 하는데 이런 점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아웃소싱은 장기적 소유에서 단기적 접속으로 전화하는 기업이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아가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국의 아웃소싱업체는 14 6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아웃소싱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사가 160만개에 이르며 그 가운데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은 10명 미단의 직원을 둔 소기업이라 한다. 미국의 제조업체 가운데 30%는 생산활동의 절반이상을 아웃소싱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웃소싱의 예와 운영부분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가벼운 제품, 소형화, 부동산의 비중 감소, 저스트인타임 재고관리, 리스, 아웃소싱, 이 모든 것은 물질성에 역점을 두었던 세계관이 쇠락하고 있다는 증거라 한다.

 

그러나 점점 접속을 통해 유형,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는 주체들의 관계를 상품화하는 것, 이것이 곧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상업활동의 핵심임을 감안할 때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대부분의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고 모든 개인의 삶이 24시간 내내 상품의 틀에 갇혀 있을 때, 비상업적 관계, 다시 말해서 혈연,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종교적 결사, 민족 의식, 형제야,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는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1부에서는 소유에서 접속의 시대의 변화의 조짐을 다양한 예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사회를 주도하는 기업의 운영형태의 변화를 세세하게 분석해 보여주며 접속의 시대에서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접속의 시대가 가지고 올 부정적인 요소로 인간관계의 상품화를 꼽으며 이것이 가져올 사회적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2부에서는 바로 이 문제들을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양식을 통해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저자가 말하는 문화와 그것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즉 문화는 소통을 통해 발전해 나가며 그 자연스런 사회적 공유를 통해 인간다움을 지켜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업화되어가는 이 시대에선 순수한 예술가들과의 단절을 가져올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약자에겐 접속의 기회마저 잃게 하는 불안정한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는 돈을 내고 개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과 체험의 형태로 문화를 상품화하고 우려먹고 재포장하는 가상 또는 현실이 네트워크와 대중 문화와 대중 문화의 입구에 버티고 서서 출입을 통제하는 문지기가 실권을 휘두른다.

이 문안의 네트워크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트워크 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는 저자의 주장에 주목하게 된다.

지금까지 사이버 스페이스 접속의 문제는 협소한 차원에서 이해 되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이 아니라, 그 사이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을 위한 안정장치가 될 수도 있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이 더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접속은 단절이란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런 사회적 문제를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새로운 접속의 시대에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대응해야 할 지 알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시장과 네트워크는 사회적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된 강력한 사회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파생물이라고 한다.

전세계에 존재하는 풍부하고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상업 영역이 근시안적 영리 추구를 위해 착취하기만 하고 순환이나 재충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경제는 결국 문화 생산의 재료가 되는 인간 경험의 방대한 수원지를 잃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대안으로 그는 놀이를 제시한다.

산업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경제에서는 놀이가 점점 중요해진다.

이 순수한 놀이를 통해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을 경험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놀이를 통해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접속의 시대에는 단순히 투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임을 주시하며 글을 맺는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몸,노동,정신능력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접속의 시대에는 이런 전통적 소유 관념이 흔들린다.[105]

 

인체 섬유 안에 들어 있는 유형 재산은 재산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같은 인체에서 나온 세포 계열에 대한 특허 형태의 무형자산은 존중되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 만약 무어의 가족이나 직계후손이 나중에 이 세포 계열을 이용한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그들은 캘리포니아 대학에 접속료를 물어야 할 것이다.[106]

 

유전자군을 특허라는 형태로 독점한 소수의 생명과학 기업은 보건 서비스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심지어는 보건 시스템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른다.[107]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위험천만한 권력의 집중 양상을 드러내는 독점, 곧 기본적 정보에 대한 독점을 확실히 규제하기 위해서 반독점법을 활성화시키자고 제안한다.[109]

 

젊은디을 사이에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고 존재를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선언이요, 나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달라는 주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자동차를 애지중지하면서 자기 존재의 연장선상에서 자동차를 바라보고 자동차를 통해 남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한다.[111]

 

자동차를 가지는 것에서 빌리는 것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 관계의 구조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이다.[111]

 

메르세데스 벤츠의 헬무트 베르너 대표이사는 ,우리의 목표는 자동차 한 대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신의 기회를 보장하는 완벽한 패키지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113]

 

현대 세계에서 재산은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교섭하는 사회적 관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116]

 

매일같이 우리는 크든 작든 재산의 문제와 마주치고 있으며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116]

 

소유보다는 접속에 기반을 둔 세계가 몰고 올 충격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맺어온 사회적 계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보아야 한다.[127]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소유하기보다는 접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실물 거래가 서비스 접속으로 변하는 추세가 확산 일로를 걷고 있다고 지적한다.[132]

 

독창성, 기민성, 순발력만으로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원가가 제로로 곤두박질치는 경제에서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머지않아 이런 급락은 거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똥값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라는 것은 처음의 제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만 창출될 수 있다.[142]

 

쇼핑몰은 접속과 관련된 규칙과 규제가 적용되는 사유지라는 점이다. 보도, 벤치, 가로수가 늘어선 시원시원한 공간은 몰을 광장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몰에서 벌어지는 문화활동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살아 있는 체험을 물건과 오락물의 구입이라는 형태로 상품화하는 중요한 소임을 돕기 위해 옆에서 들러리를 서는 데 불과하다.[229]

 

오늘날 몰은 소비라는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연극 공간내지는 정교한 무대가 되었다. 부동산 개발업자는 몰을 지을 때 할리우드의 착상을 대거 따온다. 극장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관객이 전혀 다른 세상을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것처럼 몰도 일당 방문자가 들어섰을 때 털끝만한 불안감도 느끼지 않도록 머넞 치밀하게 공간 배치 계획을 꾸며야 한다. 몰은 시간을 넘어선 공간이다. 가급적 시계는 걸어놓지 말아야 한다.[229]

 

그는 이 새로운 상업영역()에서는 <시민과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찾기가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236]

 

문화는 체험의 공유다. 서로 비슷한 가치 아래 사람을 모아 들이는 것이다. 반면 문화 상품은 문화를 잘게 토막내어 분할하는 것이고 상업화된 오락물로 개별 판매하는 것이다.[236]

 

20세기 말, 미국을 이끌어가는 사업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락이다.[236]

 

게블러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 산업은 점점 전통적 오락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분야>가 주도하고 있다.[236]

 

아름다움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대중이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그동안의 무관심에서 벗어나….너도나도 장식물을 걸려고 한다. 기업의 호의로 저렴해진 가격 덕분에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미를 감상할 수 있다.[238]

 

영화관은 문화 체험의 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피처였다. 어두운 극장에서 사람들은 초라한 일상사를 잠시 접어두고 좀더 거창하고 화려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중에서 그 순간만큼은 단조로운 생활을 초월하여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240]

 

오늘날 오락산업, 환상과 유희의 산업, 강렬하고 유쾌한 살아 있는 체험의 산업은 공업 제품과 서비스에서 문화 상품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수적으로 점점 불어나는 미국인의 삶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241]

 

경제는 거대한 공장에서 거대한 극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241]

 

효율성, 생산성,실용성,납품 가능성, 계산력 같은 기계적 이미지는 문화 상품의 연극적 이미지에 의해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241]

 

사업은 공연예술이다.:어지러운 변화의 세계를 헤쳐가는 새로운 사고, 즉흥연주:창조적 경영의 원리와 비결, 체험 경제:일은 연극, 사업은 무대,오락경제: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거대 미디어의 위력, 존카오는 즉흥연주에서 사업은 공연예술이라고 역설한다. 여느 경영 컨설턴트처럼 카오도 <대기업도 스튜디오모델을 현실에 맞게 도입하면 유리한 점이 많다>고 강조한다. 독립 하청업체와 뛰어난 예술가의 재능을 하나로 결집하여 문화를 상품의 형태로 재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242]

 

맨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을 마음껏 동원하여 괜찮다 싶은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디어 기업의 총수와도 같다.[242]

 

제조업 중심의 자본주의에서는 산출량이 중요하지만 문화 중심이 자본주의에서는 연기가 중요하다.[242]

 

톰 피터스는 <모든 사람이 연예 산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말해도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피터스는 자문을 요청해 온 기업들에게 <사업의 성패는 고객의 머리에 감동적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집어 넣느냐에 좌우된다>고 조언한다.[243]

 

새로운 시대의 주역은<근면>이 아니라<창조>이며 사업은 일보다는 유희에 가까워진다.[243]

 

기업은 예술적 창조성을 유도할 수 있는 여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놀기 좋은> 온갖 종류의 혁신적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243]

 

경영의 연극적 기법을 도입한다는 지적 발상은 실은 사회학에서 상당 부분 빌려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케네스버크, 어빙 고프먼, 로버트 페린바나야감 같은 사회학자는 드라마와 연극의 원리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 행동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접근 방법을 획기적으로 시도했따. <연출적 관점>은 인간의 상호 작용은 모두 드라마이며 연극에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243]

 

몇 년 전부터 마케팅 전문가들은 고프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서비스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체험의 상품화 분야에서까지 적용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고프먼이 연출적 관점에서 제시한 방법론은 막스 베버의 관료주의 분석이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진단하고 이해하는 데 요긴한 수단이 되었던 것처럼 마케팅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244]

 

클렘슨 경영.홍보 대학에서 마케팅을 자르치는 스티븐 그로스교수와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의 마케팅 교수 레이먼드 피스크는 서비스와 체험의 마케팅은 근본적으로 연극이며 오직 그런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대 위의 배우가 신빙성 있는 공연을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서비스 분야의배우도 관객에게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서비스 제공자의 복장, 행동거지, 동작, 매너, 업무 방식, 지식, 의사 소통력은 모두 관객이나 고객에게 감동을 주고 공연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245]

 

서비스 연기는 서버와 클라이언트가 긴밀한 접촉을 맺을 경우, 이를 테면 웨이터와 식당 손님 사이의 관계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몇 해 전 영국의 의학 전문지<랜싯>, 의사는 환자를 볼 때마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연기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실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245]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방송을 뜻하는 <broadcast>라는 영어 단어는 씨를 뿌린다는 뜻으로, 주로 농업 전문가들이 쓰던 말이었다.[248]

 

영화와 텔레비전도 시간, 공간, 현실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보기 좋게 농락한다. 이 막강하고 새로운 통신 수단은 문화적 체험에서 알짜배기 상징을 감쪽같이 디지털 이미지와 형태로 변형시킨다. 디지털 이미지와 형태는 보는 사람의 눈에는 원래의 현상보다 더욱 또렷하고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야말로 체험이 되어버린다.[249]

 

인공 환경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상품으로 바뀐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삶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것을 구입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소비자가 되어버린다.[251]

 

문화상품은 체험에 흥분을 불어넣는다. 본전 생각이 나지 않도록 어떻게 해서든 짜릿한 감도응ㄹ 주려고 애를 쓴다. 마케팅 전문가는 정서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 문화의 숲을 누비고 다닌다. 심지어는 문화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빌려온 파격적인 이미지로 상품을 판매한다.[255]

 

접속의 시대에는 돈을 내고 개인적으로 즐길 수 잇는 오락과 체험의 형태로 문화를 상품화하고 우려먹고 재포장하는 가상 또는 현실의 네트워크와 대중 문화의 입구에 버티고 서서 출입을 통제하는 문지기가 실권을 휘두른다.[261]

 

접속관계는 그 사람이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의 수라고 하는 양적 조건과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가라고 하는 질적 조건으로 측정된다.[262]

 

네트워크 안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열리지만 네트워크밖에서는 점차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몰린다.[264]

 

문화의 중개자로 불리는 이 새로운 계급의 실력은 지식과 창조성, 예술적 감수성과 기획력, 전문가적 식견과 마케팅 안목 같은 무형 자산에서 발휘된다.[268]

 

접속을 통한 체험이 재산의 소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는 개인과 문화 체험 사이에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 마이크 페더스톤에 따르면 <이 새로운 취향의 기수들은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문화 상품이나 체험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새롭게 뜨는 생활양식이나 유행의 동태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다> 하나의 사회 집단으로 정의하자면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중 문화에서 새로운 경험을 추려내서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형태로 가공한다.[269]

 

1990년대 중반 새로운 문화 중개자 집단이 탄생했다. <유행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주로 젊은 남녀들로 젊은이 문화의 샛길을 배회하면서 포장하고 가공하여 상업 시장에서 팔아먹을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유행을 찾아다닌다.[269]

 

디디 고든 같은 유행 사냥꾼은 샌들이 크게 유행하리라는 것을 가장 먼저 간파했다.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누비고 다니다가 고든은 십대 소녀들이 몸에 착 달라붙는 새하얀 민소매 러닝 셔츠, 두툼한 목양말, 샤워 샌들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눈여겨보았따.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샤워 샌들이 뜰 것이라고 확신하고 디자이너에게 의뢰하여 1970년대에 유행한 컨버스 원 스타 운동화와 비슷한 복고풍 스니커 샌들을 제작했다.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컨버스 사는 큰돈을 벌었다.[270]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들은 문화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 지식인, 학자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이들은 문화 전체가 상혼으로 얼룩질 가능성을 무엇보다 우려한다.[271]

 

이 세상이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류가 쌓아온 지적 성취와 살아 있는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데이비스는 언어의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현실을 개탄한다.[273]

 

탈근대와 근대가 이토록 다른 원인은 무엇을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 문화, 실체험의 상품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탈근대와 맞물려 있는 반면, 근대의 자본주의는 토지와 자원의 상품화, 노동력의 고용, 제품생산, 기본적 서비스의 제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276]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근대라고 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를 가리킨다.[277]

 

이 시기동안 사유 재산은 인간 관계를 지탱하는 구조의 토대로서 단단히 뿌리내렸고, 합리주의, 과학주의, 이데올로기, 직선적 발전관이 사유 재산 체제 위의 웅장한 철학적 상부 구조로 부생햇따. 자연, 사회, 정신에 관한 계몽주의의 관념은 재산과 자본의 시장교환과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두었던 맹아기의 자본주의 체제가 정착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277]

 

근대인이 가졌던 믿음 혹은 신념은 무엇일까? 세계는 인간이 알아낼 수 있고 인간 생활을 개선하는 데 이용할 수 잇는 불편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근대인은 신앙을 버리고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277]

 

자연은<길거리에 널린 창녀>나 다를 바 없다면서 <불가능이 없을 만큼 인간의 제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창녀의 야성을 <누로고 순화하고 길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을 앞세워 마침내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자연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278]

 

데카르트는 자연에 남아 있던 실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벗겨내고 자연을 자신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생각한 수학적, 양적 요소로 환원시켰다. 계산할 수 있는 데라르트의 우주는 고정적이며 규칙적이며 분할이 가능하다. 그것은 위치와 속도가 현실 세계의 틀을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세계다.[278]

 

근대인은 진보의 관념을 받아들였다. 황금 시대는 아득히 먼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미래에 잇따고 그들은 주장했다.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새로운 지상 낙원을 건설 할 수 있다고 믿었다.[278]

 

계몽주의 세계관은, 소유 관계에 기반을 두었으며 자본주의 발달로 힘을 얻었던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리를 설명하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이 당신의 지식인과 철학자는 합리적 사유와 엄밀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고, 자연은 물론 인간 자신의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잇는 신과 같은 위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279]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중세인의 관념을 몰아내고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인식론을 전개했다. 이 세상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원근법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280]

 

원근법을 통해 화가는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280]

 

탈근대가 현실을 보는 눈은 다르다. 근대와는 전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런 가정은 소유에 대한 근대인의 가정을 허물어뜨리고 인간 관계를 접속 원리를 중심으로 하여 재구성한다.[281]

 

20세기에 들어와 독일 과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로 과학적 논쟁의 불길을 당기면서 계몽주의의 철갑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자연의 비밀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베이컨이 주장한 과학 방법론의 핵심 전제-는 한마디로 있을 수 없다.[281]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초연하기는커녕 경기자로서 참여자로서 자신이 조작하고 입김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세계에 끊임없이 양향을 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281]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관찰자를 관찰 대상에 연루시킨다면 독립성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282]

 

하나의 음은 순간의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의음이 어엿한 음으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선행음가 후속음이 필요하다.[283]

 

새로운 물리학은 존재와 운동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물은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283]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이 세상은 주체와 객체,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물리학은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잇는 철학적 틀을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세웠다. 오늘날의 카오스 이론, 카타스트로프 이론, 복잡성 이론, 무산 구조는 모두 자연계의 우발성, 불확정성, 배태성, 다양성에 초점을 두는 과학의 새로운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284]

 

근대 과학이 궁극적 진리와 근본적 입자를 찾았다면, 새로운 과학은 돌발적 가능성과 패턴 발생의 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불변의 법칙에 바탕을 둔 현실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적 행위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자연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을 모든 고비에서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284]

 

고정되고 인식 가능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고 그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개별적 현실들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현실을 모두 포괄하는 관점, 저 높이 우뚝 솟은 곳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는 관점은 존재할 수가 없다. 탈 근대론자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의 구성물이다. 기호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내는 이야기,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에 의해 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세계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우발적이다.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로 엮여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 창조된세계, 합의되고 공유되는 의미와 은유로 결속된 세계다. 언어, 의미, 은유는 시간 속에서 달라질 수 있고 또 실제로 달라진다. 현실은 우리가 증여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소통을 통해 지어내는 것이다.[285]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일찍이 현실의 수효는 관점의 수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관점주의 이론은 단순하고 인식 가능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근대적 발상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285]

 

탈근대론자는 심지어는 과학조차도 정교하게 구성된 텍스트나 이야기의 집합이며 과학의 권위는 그런 텍스트나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제시하여 독자를 설드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285]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방식이 노출시킨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언어로 자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설명하고 묘사하고 현실과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와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뜻이 된다. 햄릿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은 <, , >이다.[286]

 

새로운 시대는 상징과 기호를 연구하는 기호학에 열광한다. 근대 세계가 물리학의 법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문법과 의미론의 법칙에 관심을 기울인다.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집념은 더 이상 학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제 학자를 움직이는 힘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 탐구이다. 의미를 캐는 열쇠는 언어가 쥐고 있다.[286]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286]

 

탈근대는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286]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287]

 

규칙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두었던 근대 건축의 진지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탈근대 건축은 아이러니와 즐거움을 중시한다. 충격과 자극,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탈근대 건축가들은 역사적 양식을 짜집기한 건물을 짓곤 한다.[287]

 

관심을 끌 수 있고 논쟁과 토론의 주제로 부각될 수 만 있다면 어떤 건물을 지어도 상관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돠.[288]

 

누구나 열망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상적 사회 체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타당성을 모두 갖는 수많은 문화적 실험이 있을 뿐이다.[288]

 

탈근대론자는 인간 경험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국지적 경험의 다양성을 찬양한다.[288]

 

탈근대는 부드럽고 가볍고 느낌과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대다. 그것은 거꾸로 된 세계이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의식은 의심받고 성적 욕망, 몽상, 환영에 이끌리는 무의식이 전면에 나서서 사실상의 현실이,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이퍼 현실이 된다. 지하 세계에 갇혀 있던 환상은 찬양을 받으면서 표면으로 떠오른다.[289]

 

바깥 세계의 어수선함과 혼잡으로부터 격리된 차분하고 단아한 분위기,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부르주아 의식의 역사 [294]

 

양식이 있다는 말은 남녀불문하고 부르주아지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다. 양식은 무엇보다도 자기 절제와 자기 통제라는 관념을 연상시켰다. 양식은 시민 의식, 근면, 성실, 의지, 점약, 청렴, 그리고 성숙함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에 담긴 정신을 세속화시키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유 재산 체제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생산자 정신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말이었다.[295]

 

호감을 주고 창조적이고 흡인력 있고 끄는 힘이 있고 애교 있고 쾌할하고 속을 드러내는 포근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매력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수많은 군중 속에 있어도 단번에 좌중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고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 자신이 되자> <나의 개성을 표현하자> <자기 확신을 가지자> 같은 구호가 시대를 풍미했다.[296]

 

지난 세대의 사람은 자신을 <양식 있는 인간>으로, <매력 있는 인간>으로 여겼다. 거기에는 생산 중심의 가치관, 소비 중심의 가치관이 각각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 사이에는 스스로를 문화라는 장터를 이루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연기하면서 각본과 무대 사이를 경쾌하게 옮겨다니는 <창조적 공연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297]

 

19세기만 하더라도 사람은 고정된 자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증식되는 상품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인생은 무언가를 부단히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정이 존재를 앞도하게 되었다.[299]

 

탈근대로 접어들면서 이제 자아는 만들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아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재편집되는 이야기의 전개로 여겨진다.[299]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역사의 종말은 사유 재산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물질 자원과 자본을 집단이 소유하는 사회를 세우는 것을 의미했다.[299]

 

20세기 중반을 넘어오면서 역사 의식은 쇠락하고 심리 치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명감을 의식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사를 훨씬 비중 있게 생각했다.[300]

 

인생은 역사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각성이 움튼다.[300]

 

저작권이라는 관념은 자기가 쓴 말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발상으로 연결되었다. 저작권법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의 의사 소통을 하는 수단을 상품으로 만들어 주었다.[304]

 

인쇄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관념이 싹트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컴퓨터는 관계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북돋운다.[308]

 

우리는 서로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붙들어 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온갖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생활의 한가운데에 온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309]

 

자아 관념의 파편화는 조리가 없고 일관성이 없는 관계들의 복수성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런 관계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다양한 역할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른 자아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다.[310]

 

자아의 성격이 자율성에서 관계성이으로 변모하는 징후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끝을 열어 두면서 조건문에 가깝에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조차도 남들의 생각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심리적 성향을 드러낸다.[311]

 

변화무쌍함은 한편으로는 외부 상황에 맞추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간다는 것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응집하고 강화하는 노력이라고 리프턴은 말한다.[314]

 

접속의 시대에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연극성이다. 조직, 관계 마케팅, 공동 관심 단지, 오락센터, 테마 도시, 관광, 문화 상품, 가상 세계는 모두 연극이 냄새를 물씬 풍긴다.[316]

 

인간은 오래전부터 연극 예술을 통해 자연계를 모방하고 상징계를 창조했다.[317]

 

인간은 끝없는 변신의 과정을 밟는다. 자꾸만 존재의 상태를 바꾸어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 다른 누군가가 된다. 문화 행사가 벌어지는 자리, 교제의 장, 사업 환경에서 인간은 의혹을 접고 기꺼이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가면을 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317]

 

우리가 살고 일하고 쇼핑하고 노는 공간을 설계하고 건설하고 장식하고, 우리의 의상을 창조하고, 우리의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고 얼굴을 환하게 만들고, 우리의 몸을 날씬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소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주업무로 삼는 영역의 비중이 미국 경제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닐 개블러[318]

 

체험의 상당 부분이 연극화되고 상업 영역으로 거의 완전히 흡수되는 현상은 강한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역사가 다니엘 부어스턴은 지적한다. <우리는 종국에 가서는 그 안에서 살 수도 있을 만큼 너무나 생생하고 너무나 설득력 있고 너무나 실감이 나는 환각을 만들어낸 최초의 인간이 될 위험성 있다.>-부어스턴[319]

 

상업 영역이 상품과 서비스를 팔던 데서 상품화된 관계, 문화공연, 체험에 접속하는 권리를 제공하는 쪽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에, 연출적 관점은 이 새로운 사업 방식을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연출적 관점은 통신을 인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자아를 관계의 중심으로 재정의 하며, 체험 자체를 연극적 활동으로 만들고, 재산을 상징으로 변형시킨다.[321]

 

세계를 연극무대로 보는 데 익숙한 새로운 시대의 남녀에게는 상업 세계가 제공하는 대본, 무대, 다른 배우, 청중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사는 것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살찌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기를 할 수 있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322]

 

재산권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협소한 물질의 차원을 다루지만 접속은 체험 자체를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화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323]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통신에 대한 접속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324]

 

통신 회사들은 인터넷과 사이버스페이스로 들어가는 관문을 확보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그래야만 집이나 회사에서 온라인 공간을 점점 많이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기 때문이다.[329]

 

세계 통신.방송망의 규제 완화와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민 국가는 자국 영토 안에서 통신을 감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331]

 

민간 기업이 국내 인프라와 국제 접속 경로를 모두 장악할 경우 개발도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속국으로 되돌아가는 꼴이 되어 버린다고 비판가들은 지적한다.[333]

 

접속의 시대에는 주파수 대역이라고 하는 부동산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부각될 것이다. 글로벌 주파수를 보유한 기업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생활하기 위해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통신 회로를 장악한다.[335]

 

미래는 풍족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 중의 소수에게만 기회의 낙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 다시 말해서 대학을 나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디지털 암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한다.[340]

 

시장 거래가 복잡한 상업 네트워크로 바뀐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 우리의 경제 생활과 사회생활이 점차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문화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는 세상, 인간 관계에 항상 돈이 개입되고 체험도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세상, 자율성을 가진 자아는 물러나고 복수로 존재하는 인격, 연극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 사회는 연극적 용어로 파악되고 각 개인의 삶도 현실 무대와 가상무대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각본과 대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접속의 시대는 인간의 경험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도대체<업속>이 무엇을 뜻하는 가이다. 이것은 기술이나 테이터에 대한 협소한 차원의 접속이 아니라 좀더 광범위한 맥락의 접속을 뜻한다. 소유에 기반을 두었던 시대와 비교할 때 이런 접속의 의미가 좀더 명쾌하게 드러날 것같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법적, 경제적 문제는 인간 관계의 구조를 논의할 때 언제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했지만, 소유의 목적이라든지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생리를 정의하는 데 소유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묻는 좀더 심오한 철학적 주제는 인간존재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는 포괄적 틀을 제공했다. 소유 관계와 시장 교환의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철학은 그 시대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이바지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신 기술과 이 기술을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가 접속을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요 입구일 뿐이다.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직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348]

 

소유 대 접속의 문제를 가장 높은 수준의 사유 단계로 끌어올린 학자는 토론토 대학의 크로퍼드 맥펴슨 교수다. 맥퍼슨은 우리의 머릿속에 지금 들어 있는 소유 개념은 대부분 17세기와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분석을 시작한다. 맥퍼슨에 따르면 근대적 소유 개념의 첫번째 특징은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다. 우리는 이 지엄한 소유의 원칙을 너무나 맹신한 나머지 더 먼 옛날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것의 혜택을 보거나 어떤 것을 이용한 데서 베제당하지 않을 권리도 엄연히 소유 개념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망각했다고 멱퍼슨은 지적한다.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는 공공 소유라는 소유의 두번째 범주를 만들어 이 안에 공원, 도시, 거리, 공유지, 수로를 집어 넣었다. 개인은 누구든지 이런 공공 재산을 사용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데서 배제당하지 않을 법적 권리를 보장받았다.[350]

 

사유 재산은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고, 공유 재산은 타인으로부터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했다.[350]

 

소유는 물질이 희소하던 세계에서 인간 관계를 구조화하는 요긴한 장치였다는 사실을 맥퍼슨은 우리에게 환기시킨다.[351]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 다시 말해서 접속의 권리는 컴퓨터가 매개하는 상업적, 사회적 네트워크의 비중이 점점 커지느 세계에서 갈수록 중요해진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하는 의사 소통과 체험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면 접속의 문제와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는 심각한 사회적 화두가 된다.[353]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은 물론 그에 어울리는 문화적 치장과 복장까지도 구입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공공 생활은 상업공간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것은 장기적으로 문명의 미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355]

 

상업적 관계는 문화적 관계의 대용물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고객친화력이라든지 모사된 현실 같은 말은 모순어가 아닌가? [355]

 

인간의 삶에서 이념성이 줄어들고 연극성이 늘어난다면, 거창한 줄거리나 웅장한 세계관의 비중이 줄어들고 수십억 가지에 이르는 개개인의 드라마가 상업 네트워크와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자기 나름의 각복에 따라서 공연된다면, 그때 우리는 인간이 처한 조건,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상업 광고만이 난무하고 그 사이사이에 간헐적으로 본방송이 끼여드는 세상으로 바뀌지 않을까?[356]

 

전통적 관계는 친족,민족,지리,공유하는 정서로부터 탄생한다.[356]

 

반면에 상품화된 관계의 핵심은 그것이 도구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관계를 유지시키는 성격은 기본적으로 혜성보다는 계약성이 압도적으로 강하다.[356]

 

사회적 계약은 조상,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 지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온갖 피조물, 너그러운 신에 둘러싸여 있다는 일체감에서 출발한다.[357]

 

반면 상업적 계약은 일반적으로 그 유효 기간이 짧다. 역사나 유산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행이나 결과에 의해 구속력을 갖는다. 당사자 사이의 책무는 명시적이며 일반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고 합의한 계약 내용을 법률 용어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다.[357]

 

강한 공동체는 건강한 경제의 전제 조건이다. 강한 공동체만이 사회적 신뢰를 낳기 때문이다.[360]

 

리프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한다.[362]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362]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가령 코소보의 끔찍한 살육 현장이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면 가슴이 찌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감했다고 말하기에는 미진하다.[363]

 

대부분의 체험이 문화로부터 떨어져나와 상업 영역으로 밀려 들어갈 때 그것은 공감이라는 발상을 허용하지 않는 상품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클라이언트와 서버의 관계는 언제나 방편적이게 마련이다. 둘 사이에 공감이 오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체험을 구입할 때 우리는 투자한 돈에 걸맞은 반대 급부를 기대한다. 상품화된 관계에서 타인은 지불한 돈에 상응하는 서비스나 실행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토양이 아니다.[363]

 

시장과 네트워크는 사회적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된 강력한 사회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나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파생물이다.[365]

 

전세계에 존재하는 푸웁하고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상업 영역이 근시안적 영리 추구를 위해 찯취하기만 하고 순환이나 재충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경제는 결국 문화 생산의 재료가 되는 인간 경험의 방대한 수원지를 잃게될 것이다.[365]

 

식품과 요리는 현재 문화와 상업의 대결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역이다.[371]

 

21세기에는 지리적 공동체안에서 같은 인간끼리 직접 살을 맞대고 어울리 수 있는 기회들을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가장 깊은 수준의 체험을 통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깡그리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도 시간 문제다.[372]

 

문화를 소생시켜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문화 생산하는 데 원료가 도기 때문이어서만도 아니고 시장이 제대로 가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와 공감을 문화가 만들어내기 때문만도 아니다. 문화는 다른 이유를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생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낳는 유일한 원천이 문화이기 때문이다.[372]

 

모든 현실 문화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밀감은 지리적 공간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밀감이 없으면 사회적 신뢰망을 구축하기도 어렵고 진장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문화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려면 적어도 사이버스페이스에 쏟아 붓는 만큼의 관심을 공간에도 보여야 하고 채팅방에 들이는 만큼의 정성을 현실 공동체에도 기울여야 한다.

 

풀뿌리 교육 혁명

시민 교육은 학생,교사,부모,지역 사회에 있는 각종 기구가 힘을 모아서 커리큘럼을 짜고 체험 학습을 이끌어나간다. 시민 교육은 전통적 도제 훈련, 현장 학습, 문제 해결, 시스템 중심의 개념 학습을 정교하게 하나로 엮은 것이다.[375]

 

시민 교육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수집되는 모의 지식을 보완하고 교정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375]

 

문화는 대체로 생명을 긍정한다. 문화는 자연에 우리가 진 빚을 이야기하며 우리를 더 큰 생명의 힘으로 이끈다. 이런 생명의 긍정이 바로 내제 가치의 핵심이다.[380]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문화의 다양성을 되살리기 위해 문화의 복원을 부르짖는 것은 좋지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약한 형태의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극우 민족주의 정당, 분리주의 정당, 민족 청소운동, 종교 회복운동은 세계화와 탈근대화 추세에 맞서는 대항 운동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382]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에는 놀이가 세계 경제의 전면에 등장한다. 문화 체험의 상품화는 놀이의 모든 차원을 식민화하여 순전히 사고 팔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접속은 누구를 놀이에 참여시키고 누구를 배제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방식의 문제로 귀결된다.[384]

 

일과는 달리 놀이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386]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즐거움이다.[386]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재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다시 놀이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 점점 중요해진다.[389]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놀 때 가장 인간답다-프리드리히 실러[389]

 

문화와 상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392]

 

접속의 시대에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를 근본적 물음으로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은 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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