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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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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1일 03시 58분 등록


1부 저자에 대하여

자크 아탈리, 알제리가 낳은 세계적인 지성:

난 그가 프랑스 학자로 알려지는 것이 싫다. 1830년부터 알제리는 해적 소통을 빌미로 자국을 침범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고난의 역사를 겪으며 1962년에 가까스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쟁취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1962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1956년부터 8년간 피비린내 나는 독립 전쟁을 펼쳐야만 했고, 그 동안 희생된 희생자의 수만도 150만 명이나 되니 말이다. 물론 1830년 식민지화가 된 이후 여러 번에 걸친 산발적인 독립 투쟁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이것이 선진국의 참상이다. 프랑스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도 알제리를 내놓지 않았다. 세계적인 지성국가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역시 현재의 미국이나 그 옛날의 로마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국가가 권력을 쥐면 그게 어떤 국가라 할지라도 겉으로 지향하는 국가적 시스템과는 달리 내면으로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니까.

 

비 오는 아침. 나는 저자에게 고국을 찾아주고 싶다 (물론 대통령 특별 보좌관에 오르자면, 프랑스로 귀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학자가 아니다. 알제리가 낳은 세계적인 지성이다.

 

자크 아탈리 Vs 앨빈 토플러

자크 아탈리와 앨빈 토플러는 자국의 역사만큼이나 그 깊이가 다르다. 앨빈 토플러는 아무래도 미국 학자로서 한국에서 그 명성에 거품이 낀 것 같다. 그의 책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글이 학자라기 보다는 저널리스트에 가깝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주제인 미래를 논한다고 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고 그들의 저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은 이론적 논리에 그 배경을 두고 분석에 기초하여 예측하는 것이고, 또 한 사람은 전체적인 흐름과 그 흐름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저널리스트 스타일이다 (그래서 사실 앨빈 토플러의 글은 읽는데 부담은 없다. 앨빈 토플러보다 한 단계 격이 떨어지지만 대중적으로 엄청 인기를 얻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 토마스 프리드만이 같은 계열의 대표적인 저자라 하겠다).

 

사실 내가 읽은 책 <위기 그리고 그 이후>와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다루고 있는 주제가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년에 읽은 아탈리의 책 <미래의 물결>을 애써 기억해 내어 비교해보면, 역시 아탈리의 경우, 자본주의의 역사 (9군데의 거점으로 기억한다)를 설명한 뒤, 그 역사 위에서 미래를 향한 3가지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를 전개한다 (하이퍼 제국, 하이퍼 분쟁 및 하이퍼 민주주의).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깊이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전개에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반면 내가 토플러를 감히 이렇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 번 리뷰에서도 잠시 밝혔지만, 너무 많은 사안들 혹은 흐름에 대해서, 즉 흐름의 뒤에 있는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안에만 치중한 점과 다음으로 유럽의 미래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부의 미래가 그 곳에서는 아직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단순화된 결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주관적인지. 그리고 나의 깊이로 감히 토플러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하지만 현재의 내 눈에 비친 그가 그러하고, 내 생각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미래가 유럽에는 없다,라는 단순 명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토플러도 미국의 미래를 장밋빛으로만 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 명망의 세계적인 저자가 그런 식으로 자국에 치우쳐진 관점을 지닌 것은, 더군다나 초강대국의 저자이기에 더욱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노암 촘스키처럼 앤티-미국까지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초강대국 저자이기에 더욱 객관적인 시각에서 세계의 문제를 논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런 면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아탈리가 내는 객관적인 목소리가 내겐 훨씬 편했다. <미래의

물결>이 깊이 있고, 분석적이고. 그 선상에서 제안하는 미래 예측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책

<위기 그리고 그 이후>의 경우 손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군더

더기 하나 없이 명쾌하게 글로벌 금융 위기의 원인을 분석했다.

 

모든 일은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서 명확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7).

 

이번이 처음 만남은 아니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를 사로잡은 지성의 목소리다.

 

자크 아탈리 Vs 제레미 리프킨

토플러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지녔다 생각되는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을 읽어야만 유럽의 미래 혹은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본 글로벌화가 좀 더 보일 것 같다.  남은 숙제이다.

 

미테랑 대통령 & 그의 보좌관으로서의 아탈리

경제적으로 아탈리가 신자유주의가 아닌 케인즈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다면 (이 부분은 내가 저자라면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그가 누구인가? 프랑스 최초의 좌파 혹은 사회당 대통령으로서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미국을 상대로 좀 더 자주적이었던 대통령이었다 (그의 단점에 대해서는 주제에서 많이 벗어남으로 논하지 않겠다). 그런 그의 특별 보좌관이었다는 것은 아탈리의 정치 성향 역시 좌파적 성향을 띄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책에서 보여지는 그의 좌파적 해법 역시 내가 저자라면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주제

책의 주제는 2009년 현재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불황의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로 인해 하마터면 지구 위에서 자본주의라는 단어조차 사라질 뻔 한 사실과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의 꽃이자 인류가 그토록 염원했던 개인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짧지만 아주 날카로운 분석.

 

구성:

이런 류의 책에서 내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순을 따르고 있어서 읽기 너무 편했다.

 

아쉬운 점을 미리 말하자면:

그가 제시하는 미래 해법 말이다. 어쩌면 거기에 진정한 해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인류는 또 다신 천년 전쟁과도 같은 지리멸렬한 고통의 시간을 겪은 뒤에나 유럽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개인 간이던 국가들 가운데건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리더의 사상과 경험이 나머지 전체를 주도하는데, 난 개인적 리더이건 국가적 리더이건 사상의 뿌리가 약하거나 실력과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나로 하여금 미국을 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국이기에, 그처럼 맹렬한 도전 정신과 진취적인 기상을 갖춘 리더이기에 가능한 일들이 있다. 특히나 현대로 넘어오는 1970년대에 이룬 인터넷 경제는 진정 미국이 아니었으면 이루기 어려웠던 경제적 업적이라 인정한다. 하지만 난 결코 미국 같은 나라는 천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지구를 이끄는 리더는 될 수 없다 생각한다. 사람들은 미국을 로마에 많이들 비교하고, 그러한 면도 많이 있지만: 흥미로운건 토플러는 미국이 로마의 제국주의와 비교되는 것조차 꺼려한다, 내게 미국은 칭기즈칸의 몽고와 더 가깝다. 미국이 진정으로 전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이 무엇일까? 내가 말하는 것은 인터넷과 같은 살아가는 방식에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천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과연 인류는 미국을 어떤 나라로 기억할까…?).

 

그래서일까? 인류가 아직 그의 해법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서 일까? 아탈리의 해법이 내겐 참 멀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해법에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 살면서도 무엇이 위기의 실체인지, 어떻게 그것을 해결해야 할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리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힘겨워 하는 나의 본능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 Vs 존 메이나드 케인즈

“1941 10월부터 미국과 영국은 전후 세계 경영 방침, 특히 통화와 금융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28).”

 

자본주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새로 쓰여진다기 보다는 신자유주의로의 진행이, 미국이 달러로 헤게모니를 쥐면서 가속화되는 출발점이라고나 할까.

 

미국의 재무부 차관인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영국의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1942년 초 통화 개혁을 위해 각자의 안을 놓고 팽팽히 맞서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한 이 협상은 처음부터 차세대 강국인 미국의 승리를 예견하고 시작한 협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잠깐 채택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혹평을 받은 케인즈의 안을 살펴보자.

 

“<국제 통화연합을 위한 제안>에서 케인즈는 가장 이상적인 체제는 초국가적인 은행 설립을 전제로 하며, 이 은행은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일반 은행들과 맺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각국의 중앙은행들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 이 같은 중앙 은행들의 중앙 은행인 이른바 통합은행은 금에 비례해서 가격이 책정되는 방코르bancor’라는 국제 화폐로 이루어진 계좌를 관리한다 (30).”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항하여 미국이 취한 조치는 결제 통화로서 달러가 헤게모니를 쥐는 것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 강대국의 통화가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역사적으로 늘 있어왔던 바였기에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자였던 미국의 달러가 헤게모니를 쥔다는 사실 자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달러본위제를 도입함으로써 생길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 브레턴우즈 협정은 전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려면 미국이 적자 재정을 운영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협약에 의하면 달러만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유일한 통화였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이 통화 수단에 대한 신뢰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달러가 준비통화로 자리잡을수록 달러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게 되는 구조였다 (34).”

 

한 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세계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미국은 적자 재정에 허덕이고 그에 따라 달러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국이 몰랐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이러한 사실을 미 통화 전문가들이 몰랐다고는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그들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터이다. 그들의 생각을 추측하기에 앞서, 이와 같은 달러의 헤게모니는 과연 어느 시점부터흔들렸을까? 달러는 세계 통화 시장에서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나 그 빛나는 위용을 자랑했을까?

 

“1971 8 15, 독일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자국의 금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은 미국 정부는 금-달러 교환을 중지했다. …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달러는 폭락하고, 그 결과 석유 생산국의 수입도 폭락하게 되어, 1973 10월 마침내 1945년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게 된다 (36).”

 

독일과 일본이란 양대 산맥에 더불어 우리나라까지도 초고속 성장기를 이루어 내는 70년대 이미 달러는 그 위용을 잃기 시작한다. 달러가 헤게모니를 쥔 지 불과 30년 뒤의 일이다.

 

미 통화전문가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을리는 없지만, 아마 그들은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때 당시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성장”.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넘어오면서 가장 사랑하는 단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성장이다.

 

미국이 70년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80년대에 일기 시작한 인터넷을 배경으로 하는 정보산업에 의한 어마어마한 성장이듯이,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인권을 통제하며 온 국민을 산업 경제 체제의 도구를 밀어 넣으며 질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성장 후 분배혹은 성장 없는 분배란 있을 수 없다라는 모토였듯이, 1940년대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신생 국가 미국은 자신들이 세계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음을 확인하며 흥분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피는 뜨거웠고 성장에의 욕구는 강했다.

 

결국 시장은 그 자체로 판단 능력이 없기에 국가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케인즈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고, 이후 세계 금융과 통화 정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시카고 학파 혹은 슘페터가 이끄는 신자유주의가 케인즈 학파를 누르는 양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가 금융 위기를 맞을 때까지는 말이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 & 자크 아탈리

유럽인들이 모두 케인즈 학파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인 모두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아탈리는 케인즈를 닮았다.

 

이를 위해서는 (조화로운 성장) 특히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지닌 권력을 통해 시장 권력과의 균형을 도모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 중에서도 우선 금융시장의 권력을 법의 권위 밑에 두어야 하며, ‘정보선점자들의 권력을 시민의 권리 밑에 두어야 한다 (8).

 

내가 보기에, 현재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시장은 한정된 재화를 분배하는 가장 나은 기제이기는 하나, 자력으로는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법치성을 만들어낸다거나 생산수단을 완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수요를 창출해내는 능력은 지니고 있지 못하다. 시장 중심 사회가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고, 경쟁을 유지하며, 충분한 임금과 공공발주를 통한 수요를 창출하는 법치성이 존재해야 한다. 요컨대 수입과 자원의 배분에 정치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며, 이 때 개입하는 권력은 민주적일수록 바람직하다 (9).

 

낯설지 않은 이론들이다. 케인즈의 이론에서 많이 듣던 친숙한 이론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는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을까? (여기서 잠시, 경제학자의 정치 성향이 왜 중요할까? 그건 다름아닌 그들이 내놓는 해법이 각자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학자에 따라 어느 한 가지 성향을 놓고 분석에 있어서는 비슷한 경향을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그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달라질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력은 결코 서로가 절대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음이다).

 

너무 길어서 여기에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155~157쪽에 이어지는 그가 제시하는 해법들을 보면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경기를 일으킬 만한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대대적이고 점진적으로 금융업계의 부채 비율을 감소시켜야 한다. 현재 국내 총생산의 350퍼센트로 되어 있는 것을 100퍼센트 이하로 내린다. 아마 이 항목을 보면 성장제일주의자들은 경기를 일으키다 못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350%에서 100%까지 내려갈 때 발생할 경제 여파는 나 같은 비전문가의 시각에도 심히 염려스럽다. 어쩌면 그래서 아탈리는 이미 적어도 100년이란 세월이 걸려야 한다고, 그만큼 서서히 경제여파를 줄이며 가야 한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신자유주의자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AIG의 국유화도 발생했다. 미국의 여타 다른 은행들이 일부 국유화가 비현실적이라고는 더 이상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법하다.

 

이제 공ball은 민주당 출신의 버락 오바마에게로 넘어 갔고, 역사가 늘 그러하듯 미국식 자본주의는 내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유색인종을 대통령의 권좌에 올려 놓았다 (오바마라는 유색 인종이 대통령이 된 것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강대국은 늘 내적 붕괴에 의해 체제가 무너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시점이요 흐름의 변화이다). 이에 아탈리가 오바마에게 주는 제안은 다음과 같다.

 

버락 오바마는 모든 미국인들이 이제 정말로 심각한 위기가 시작된다고 믿는 시기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버락 오바마는 루스벨트가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백악관에 입성했으며, 로날드 레이건이 포드식 생산 모델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대통령이 된 것과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앞으로 글로벌 경제 성장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시작하는 이 정책을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이 처한 특수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서 이용할 수 있다 (154~5).”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걸까? 사실 비전문인들은 무엇을 지켜보고, 무엇을 판단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만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에 아탈리는 오바마가 글로벌 경제 성장 프로그램을 잘 실시하는지 지켜보자고 제안한다.

 

, 아탈리는 작금의 금융 위기를 자초한 미국이 이제야말로 진정한 글로벌 강대국으로서 거듭 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은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미국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현대 위기는, 케인즈 Vs 신자유주의에서, 케인즈의 승리인가?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슈 중의 하나가 케인즈의 승리이냐 신자유주의의 승리이냐이다.

 

사실 한 두마디로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달러가 헤게모니를 쥔 이후로 통화정책을 경제 운영 정책의 전면에 앞세우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의 경제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던 시카고의 악동들이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카고 대학에서 가장 발달하여, 시카고 학파라고들 한다).

 

그러나 역사가 늘 그러하듯이, 현재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맞는 시점에서 신자유주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역시 폭풍이 다 지나간 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점검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겠다.

 

다만 한 가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메커니즘이 인간의 본능인 탐욕을 너무 깊게 허용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현대인들은 관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관료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선 비효율성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리니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체제를 제어하려면 관료주의 혹은 국가의 개입은 피할 길이 없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가에서는 점점 더 작은 정부를 추구하며,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민영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끝없이 그렇게 갈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작금의 금융 위기라 할 수 있겠다.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정치와 경제, 시장과 민주주의는 케인즈냐 신자유주의냐의 문제를 넘어 고찰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장주의의 결과물들: 버블 성장, 아웃소싱, 리스 그리고 빈곤 감소

언제부터인가 버블 경제라는 말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해졌다. 그 뜻은 과연 무엇이고 왜 우리는 버블 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버블 경제란 경제 성장에 거품이 끼었다는 표현인데, 그렇다면 거품의 실체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실질적 생산에 의한 성장 없이 자산 가치만 상승하는, 즉 글로벌 경제 위기의 주범인 산업 성장이 아닌 금융 성장에만 의존한 자산 가치 증가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잔치를 벌인다는 표현인 셈이다.

 

여기까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다.

 

지식 산업 혹은 무형 자산은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걸까? 아탈리 스스로 <미래의 물결>에서도 밝혔듯이 미래는 더 이상 굴뚝 산업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토플러의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다름 아닌 지식 산업에 기반을 제3의 물결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산업군은 아직 현대 회계 방식에 의해 제대로 숫자화되지도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토플러가 지적하는 비화폐경제 부분도 있다. 현대 화폐로 계량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이 주고 받는 수 많은 경제활동 중에는 비화폐 경제 활동이 상당하다 (토플러에 의하면 총경제활동의 50%가 비화폐경제 활동이라 한다).

 

,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현재 우리가 칭하는 버블 경제가 전부 빚더미의 금융 위기에만 기인한 걸까? 반드시 그렇다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탈리의 <위기 그리고 그 이후>는 금융 위기의 원인에 집중한 나머지, 지식 산업에 대한 부분까지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말처럼 거품 낀 경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가계처럼 기업들도 점점 더 위험부담이 많은 방식으로 빚을 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업 경영진들과 금융업자들은 아주 적은 자기 자본만으로 엄청난 대출을 얻어 기업들을 사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기업에 대해서는 1년에 20퍼센트라는 높은 수익성을 요구했다. … 20퍼센트라는 경이적인 수익성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은 활동 범위를 축소하여 특별한 노하우를 보유한 전문 분야의 생산 활동에만 집중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55).”

 

왜 이 부분을 읽는데 한국의 민담인 자린고비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효율성의 극치이자 현대 기업 경영의 최첨단이라고 하는 아웃소싱리스는 고삐 풀린 투자자자들의 채찍 앞에서 찾아낸 궁여지책은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는 Life Time Employment가 더 옳은건지 1년 계약에 의한 연봉제가 더 맞는 건지 알 수 없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질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모를 질문아닌가 말이다.

 

흔히들 기업을 평가할 때 하는 방식은 수익률이 있겠고, 수익률에도 여러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생존하는 기업의 경우, 당연히 숫자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여러 이유들이 쏟아져 나오기에 사실 기업 경영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 기준부터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다만 기업 경영의 최첨단이라 일컬어지는 아웃소싱리스역시, 최첨단 경영 기법이라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강한 놈이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하다,는 방식이야말로 무법의 정글이라 일컬어지는 현대 기업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단 한 가지 그와 같은 무법자들도 공헌을 한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빈곤 퇴치이다. 이 역시 토플러도 지적한 바처럼, 경제가 성장을 하다 보면, 자연히 중산층의 층이 두터워지면서 절대적 빈곤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사실 우리 나라의 경우 시간과 대비하여 볼 때는 빈곤 문제는 엄청 개선된 것은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인간에게는 배고픔이 첫 번째 욕망이긴 하지만 절대적 욕망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바로 자본주의가 빈곤 퇴치에 기여한 바는 크지만, 기타 다른 많은 문제점들도 양산했고….하는 복합적 문제가 이어진다.

 

최고의 변수: 중국

여기 내가 뒤를 봐주던 불쌍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가부터 내가 그 애로부터 돈을 빌려 쓰기 시작한다. 이제 그 부채 비율이 점점 높아져서 만약 그 애가 내게 더 이상 돈을 빌려주기를 꺼린다면 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 애는 더 이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얼마든지 스스로 자립의 힘을 키웠기 때문이다.

 

간단히 표현한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이고, 한 때 일본과 미국의 관계이기도 하다.

 

역사는 흐른다고 했나? 이제 칼자루는 중국의 손아귀로 넘어 갔다. 아탈리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보자.

 

미국의 채무, 그 중에서도 특히 외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달러는 폭락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었다면, 연방 준비이사회는 성장을 위해 금리를 인하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와 반대로 금리를 인상해서 달러 가치 유지를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달러 가치의 하락은 아주 임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중국이 아직도 달러를 사들여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며, 달러화의 가치를 웬만한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수출 역량을 지키는 것이 중국에게는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122~3).”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채무의 증가와 세계적인 예금 고갈 사태로 인하여 달러는 점점 더 유일한 글로벌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 중국이 내수 시장에 전념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실제로 산업 구조를 이 방향으로 전환한다면, 더 이상 달러의 교환 가치에 연연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달러의 가치는, 미국 중앙은행이 지나친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금리 전쟁을 선언하지 않는 한, 정말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123).”

 

공고하지 못한 중미관계는, 중국 측이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동안에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123).”

 

한 마디로,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중국이 칼집에서 칼을 빼기 전까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독자로서 당연히 그럼 중국은 왜 칼을 빼지 않을까? 만약 뺀다면 언제쯤일까?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중국은 왜 칼을 휘두르지 않을까? 점잖은 동양국가여서? 역사가 점잖은 동양 국가도 권력 앞에서 얼마나 잔혹했는지 생생히 증명해준다. 그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유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내수 시장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Made in China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절대적으로 제조업 수출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산업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수출 시장에 비해 내수 시장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절대적 수치의 부유층 수는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앞서는 중국이지만, 자국의 인구 대비 부유층 혹은 중산층의 숫자는 아직 갈 길이 먼 중국이다. 당연히 내수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돌릴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중국 역시 칼을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는 상황이고, 그 시점은 자국의 내수 시장이 충분히 성장했을 때까지는 지금의 정책을 변화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때까지 중국이 여타 다른 정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금처럼 성장 기조를 유지한다는 가정 아래이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 경제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 되는 시기는 예측할 수 있을지언정, 미국을 제치고 리더가 되는 날은 예측하기 어렵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바로 산업주의로, 거기에서 또 다시 지식 산업 시대로 전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 초스피드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많은 시한 폭탄 같은 정치, 사회 및 소수 민족 등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시간은 미국 편인 듯싶다. 하지만 그 사이, 자본주의 산물 중의 또 하나가 위협받고 있으니, 다름 아닌 세계화의 몰락이다.

 

세계는 과연 세계화를 유지할까?

세계화. 버블 경제만큼이나 친숙한, 아니 친숙하다 못해 일상 생활이 된 단어 중의 하나이다. 그런 세계화가 위험에 처했다. ?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각국은 기업의 국유화나 지원금 지급 등, 저마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책들을 내놓게 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의 중심이 개별적인 국가의 내부로 옮아가는 회귀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1929년 대공황 당시의 사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재앙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최악의 경우, ‘세계무역기구 (WTO)’라는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던 협약들이 쟁점화될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무역거래의 자유화라는 면에서 이룩한 이제까지의 진보는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116~7).”

 

세계화가 지속될까?를 논하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과연 세계화는 진보인가의 문제이다. 이 역시 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 중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처럼 천연 자원이 빈약하고 수출 의존국의 경우는 사실 세계화로부터 손실보다 득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실과 득이 철저히 경제적 관점에서의 측량이라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다 (여기서 경제 외적인 것까지 논하기에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거대 주제가 될 터이니 이쯤에서 각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현재 세계는 묘한 두 가지 흐름이 동반 발생하고 있다. 세계화의 진행과 동시에 각 블록간블 결속력 강화이다. 세계는 지금 이 시간에도 각 나라마다 FTA를 맺으며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는가 하면, 유럽은 유럽대로, 아시아는 아시아대로 각자가 속한 지역간의 공조를 그 어느 때보다 공고히 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경제적 관점에서 선진화가 된 나라일수록 타국과의 경제 교류를 배제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이 앞다투어 FTA를 맺으며 세계화의 물결에서 뒤쳐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혹은 그럼으로 전 세계가 이제는 서로의 경제 위기로부터 자유로울수가 없어져 버렸다. 1997, 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더 이상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화를 추구하는 국가일수록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려 하고, 그 해법의 하나로서 지역간의 블록 공조라는 반대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세계화 속의 지역간 공조라는 묘한 현상은 지구에서 당분간 지속되는 양상을 보일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장과 민주주의의 궁합은 어떠할까?

역사적으로 볼 때 시장을 만든 것은 강력한 국가,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국가이며, 일단 만들어진 시장은 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어 낸다. 자본시장의 주인인 부르주아 계급은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보편화되어 가면서 권력을 획득한다 (136).”

 

원래 시장의 첫 사랑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시장의 첫 사랑은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를 기반으로 움트기 시작한 시장은 더 이상 마초 같은 강력한 국가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를 좀 더 추구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시장민주주의라는 커플은 조화롭지 못하다. … 이 커플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오로지 개인의 자유만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139).”

 

그렇다. 강력한 국가의 통제와 규제가 답답하여 시장이 민주주의에게 눈길을 주고 마음을 주지만, 그렇다고 이 커플이 애당초 완벽한 궁합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장도 민주주의도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선으로 인정하는 근본이 같았을 뿐. 하지만, 그와 같은 근원이 같은 것이 사랑에선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이다.

 

어쨌든 시장이 새롭게 사랑하기 시작한 민주주의에게도 단점은 있었으니

 

만약 민주주의가 완벽하고, 공정성이란 기준을 모두에게 부과할 수만 있다면, … ‘정보선점자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137).”

 

그랬다. 강력한 국가 체제보다 세련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듯한 민주주의에게도 단점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겉보기와는 달리 모두에게 공정할 수는 없다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 혹은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공정하다는 것이 현실에서 과연 가능은 할까?

 

이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 없다고 시장은 민주주의의 단점을 파고 들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유는 환상과 무제한의 영역이다. 금융 또한 마찬가지다 (141).”

 

이렇듯 법치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가운데 세계화된 시장은, 각 나라의 법치성과 법치성의 근간으로 간주되는 민주주의를 잠식한다 (141).”

 

세상에! 때로는 강력한 마초 맨이 여자를 사로잡는 이유도 있게 마련이다! 세련된 민주주의의 부드러움을 간파한 시장이 그 활동 무대를 넓히고야 말았다! 당연히 민주주의의 가슴에는 상처가 나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오호~ 애재라~

 

민주주의의 가슴앓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장은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마음껏 자아를 뽑내고 있었으니

 

, 이렇게 된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상황이 전개된다. 한 나라를 놓고 볼 때는, 항상 강력한 국가가 시장을 만들어내면 시장이 그 뒤를 이어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온 반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국가의 개입이 전혀 없이 시장이 스스로 형성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형성된 시장에 대해 법치성을 부여해 줄 아무런 기구도 없는 형편이다 (141~2).”

 

어떻해야 할까? 어떻해야 고삐 풀린 시장을 다시 얌전히 민주주의의 품 안으로 돌려 놓을 수 있을까?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서 보면, 해법은: (145)

1.     예전처럼 각국의 국내법이 미치는 영역, 즉 보호주의와 경쟁력 저하를 택함으로써 국내에서만 통하는 시장을 운영하거나 (1929년에 실시되었으나, 대공황만을 불러 일으킴)

2.     아니면 세계 차원의 시장에서 법치를 확보하는 일, 즉 민주주의적이면서 복잡한 시장을 규제할 수 있는 국가를 세움으로써 소수의 정보선점자들이 이익을 독식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번을 따르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1929년 선배 민주주의가 시도했었는데, 시장이 완전히 침체되다 못해 삶의 의욕조차를 잃어 곤욕을 치룬적이 있다. 선배들의 말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1번 해결책은 잊어 버리자.

 

그렇다면 남은 것은 2번뿐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민주주의 역시 초국가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시장이 얼핏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장은 그 자체로는 타락하거나 방종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자유를 갈망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시장과 커플을 이루고 싶다면 민주주의가 발맞추어 성장해야 함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날개를 꺾어 곁에 두지 말라는 싯구도 있듯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민주주의, 그대여 초국가적으로 변신하라.

 

달러의 운명은?

, 그렇다면 시장과 민주주의의 적자인 달러의 운명은 또 어찌될까? 이 녀석은 그 동안 시장의 강력한 힘을 등에 입고 엄청 화려한 황태자 시기를 보내왔지만 최근 들어 점점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연 무사히 황제에 등극할 수 있을까?

 

이러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을 때 (초국가적 기구), 국제통화기금은 비로소 케인즈가 구상했던 방코르 같은 세계 단일 통화에 대해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일 통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달러와 엔, 유로화 정도를 포함하는 통화 바스켓을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달러가 곤경을 겪게 될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단일 통화는 언젠가 때가 되면 달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163).”

 

아무래도 왕위 계승은 어려울 것 같다. 작금의 위기를 민주주의가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사실 강력한 국가 역시 그 외모를 수술하여 다른 모습으로 시장에게 접근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도 있다), 무기력한 달러가 계속해서 적자를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방법은 그 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유로와 지금은 약간 기운이 떨어졌지만 내공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엔과 함께 연합 작전을 펼쳐야 할 듯. 그렇지 않으면 시장과 민주주의 커플의 주요 고문 중의 한 사람인 케인즈 고문에 의해 방코르bancor란 녀석한테 권력을 완전 이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탈리의 결론은?

아탈리는 결국 세계화된 시장에 걸맞는, 그래서 세계화된 시장을 감시하고 규제할 수 있는 초국가적인 기관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금융위기가 통화위기보다 훨씬 더 시급한 문제이니 일단 초국가적 기관을 만든 후 달러의 약세에 대해서도 방관하지 말고 해결책을 모색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끝으로 미래 금융구조는 인터넷에 이은 모바일 폰의 적극 개입으로 인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시 새로운 구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미국이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신기술에 이어 당분간 호황이 이어질 가능성도 아주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원인이 법치성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체 전 세계 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시장과 그 시장을 조종하는 정보선점자들에게 있는 만큼, 백 년 뒤라도 결국은 민주주의 성향을 지닌 초국가적 기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내가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드는 점은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점과 원인 그리고 해결책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이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좌파 정권에서 우파적 결정이 나오고, 우파 정권에선 시간을 되돌려 실패한 우파적 해법만을 내놓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과연 우리는 진솔하게, 깊이 있게 개개인의 정치적 및 경제적 성향에 대해 심사숙고한 적이 있었나 생각하게 된다.

 

60~70년대에는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했을 수 있다. 배가 고픈데, 좌파면 어떻고 우파가 또 무슨 상관이었을까? 그저 배불리 먹고 자식들 공부시키면 그만 아닌가. 충분히 이해된다. 독재자에 대해선 관대하지 않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부모님 세대들인 산업 역군들에겐 오히려 존경심과 측은한 마음만이 들 뿐이다. 그들도 꿈이 있었을 터인데. 당신들은 당신의 꿈이 무엇인지 생각이나 해보셨을까

 

진정 내가 묻고 싶은 세대는 다름 아닌 386세대, 즉 나 자신이다.

 

학생 때는 누구보다 학생 운동에 격렬히 참여했던 386세대들. 그들이 사회제도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어째서? 우리들의 이상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식들의 사교육비에 우리들의 꿈조차 날려버린 것일까? 아파트 한 채에 우리들의 이상을 묻어버린 걸까?

 

누군가 내게 외국에서 대학을 나온 나는 이러한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또래들이 한참 화염병 속에서 기침을 해가면서도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청춘을 바쳐 교실보다는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난 그 곳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인이 아닌 걸까? 난 내 나름 치열한 이십 대를 보냈고 한국에 여전히 애정을 품고 있으니 내 방식대로 조국에 기여하면 안 될까…?  

 

아탈리에게서 과연 난 무엇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난 거품 없는 성실한 작가요 기획자이고 싶다.

결국 금융위기란 무엇인가? 내재된 생산성보다 앞서가서 벌어진 일이다. 미래의 수익을 끌어다 쓴 모양이라고나 할까.

 

성실함과 인내의 부족이다.  

그러므로 난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예술가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걷고 싶을 뿐이다

 

후기

여러분 거시 경제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

거시 경제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말인데, 시간이 흘러 연구원 해외 연수 때에는 사랑은 삶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밖의 또 다른 무엇이 삶일까…? 누군가에게는 욕망이 삶이 될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삶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미건조한 일상이 삶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융합된 거대한 용광로 같은 것이 결국 거시경제가 아닐까 싶다. 글로벌 위기의 원인이 몇몇 정보선점자들이건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때문이건, 대한민국의 위기가 몇몇 무능한 정치가들의 문제이건, 경제와 정치의 불균형적인 발전때문이건, 결국은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다. 위기를 자초하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 그것만이 혼란한 글로벌 시대의 가장 정확한 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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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31 04:15:51 *.10.137.192
사부님, 저 며칠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물론 <천개의 사랑> 책 들고 갑니다.

아침, 저녁 바람이 더 이상 여름이 아님을 느끼게 해줍니다.
어느 새 연구원을 시작하고 세번째 계절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이제 슬슬 긴 팔 옷들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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