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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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자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하기 난해한 저자, 다이앤 애커먼:
영문학과 출신에 인문사회학 교수. 그리고 시인이자 작가가 이 책의 저자 다이앤 애커먼이다.
그러나… 음…그러나이다.
어찌보면 작가를 평하기에 앞서, <A Natural History of Love>라는 원제를 <천 개의 사랑>이라는 얼토당토않게, 과감히 변경시킨 한국 출판사에 묻고 싶다. 어째서?
이와 같은 한국 제목을 붙인 편집장은 책을 어떻게 이해한 것일까? 사실 원제도 그다지 마음에 딱히 와 닿지 않는데, 한국 제목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시작부터 혼란을 안고 책 속으로 들어간 나는 읽으면서 내내 이 저자는 글쎄…
물론 나 자신 이 책을 읽으며 내 사랑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계기는 되었다. 그러면 나름 책을 읽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리스, 로마 시대 상도 어딘지 명쾌히 풀지 못하는 작가는 참으로 난해한 저자였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주제:
“삶이 수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신비 중에서, 나는 사랑이 제일 좋다 (18).”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랑”이란 주제는 동서고금 전 인류의 역사를 유유히 흐르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사랑 중에서도 저자가 무엇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를 좀 더 명확히, 조금 더 깊이 있게 짚어 주었더라면 보다 나은 인문교양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구성: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서인지 구성 또한 산만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분류를 한 건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잠시 살펴보면;
1부: 오랜 욕망에서는 사랑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이 밀도나 깊이를 논하기에 앞서, 그래도 시작은 그런대로 무언가 내용 있는 인문서일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다.
2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사랑에 대한 견해들에서는 플라톤에서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와 시인, 심리학자의 견해를 끌어내어 그야말로 사랑에 대한 견해들을 풀어놓고 있는데, 사실 난 책 제목만 보고 이 부분이 밀도 있게 다뤄진 책으로 생각했었다.
3부. 사랑, 마음의 불길부터 이야기가 조금씩 의아해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저자는 그야말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나의 관점에서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다시 한번, 이 책은 천 개의 사랑이 아닌, 그야말로 사랑에 대한 저자의 모든 생각과 지식을 풀어 놓은 책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모든 생각에 빗대어 나의 사랑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던 점은 분명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이었다.
고대일수록 사랑하는 방식이 동물들과 닮았다!
언젠가 내가 친구한테 “사람들도 동물이야”라고 말했을 때 친구가 무지하게 웃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하냐는 친구에게, “나 농담 아니야. 내 나름의 심오한 철학이라고”하면서 같이 웃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내 의미는 인간이 제 아무리 문명화된 것처럼 행동하여도 결국 우리 안에는 여전히 생존을 위한 경쟁이나 기본적인 욕구, 욕망 등이 존재하고 그러한 것들이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만해도 인류 역사에 대해, 우리들의 역사 95%가 수렵시대의 사냥꾼 시대였음을 잘 인식하지 못했기에 나나 친구나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갖고 웃기까지 했지만,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고대인일수록 심지어 사랑하고 가정을 이룸에 있어서까지 동물들과 더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명화된 것이 반드시 좋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l 아내와 연인의 철저한 분리: 완벽한 아내란 가꾸어진 황무지 같은 존재였다. … 남자들의 사회적, 지적, 문화적 그리고 로맨틱한 욕구는 모두 다른 곳에서 충족되어야 했다 (51) –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고대인들은 아내로부터 파트너로서의 충족감을 기대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들의 자손을 잇는 역할만을 기대했을까? 자식의 양육을 위해서는 시간이며 에너지며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어머니의 역할과 한 남자의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병행하는 것이 사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현대적인 관점이다. 그 때 당시 그런 것까지 헤아려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지식”이나 “감정” 등이 발달하면서 남녀 관계도 조금씩 더 현대적 파트너 관계로 진행되어 왔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음 문장이 그것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l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는 아이들: 그리스의 어린 아이들은 하렘과 비슷한 여자들의 구역에서 자라면서 자기 아버지를 보는 기회가 드물었다 (56)- 이 또한 원시 모계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상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고대뿐만 아니라 근, 현대까지도 이어져 오는 사회 현상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만 해도 “바쁜 아버지”가 대개 가정의 모습들이니 말이다.
정리하자면, 역시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란 장식을 살짝 거두어내면, 심지어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고대를 거슬러 원시 시대, 그리고 우리 역시 자연계의 한 부분임을 느낄 수 있는 동물들과도 흡사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과 겁탈, 그 오묘한 곡예
“결혼 첫날밤을 치르는 것은 합법적인 겁탈의 양상이었다. 그래서 신부는 ‘남편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한 채’ 겁탈에서 빠져 나왔다 (81).”
가벼이 간과하고 넘어갈 문제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과연 이 부분이 언제 한 번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나 싶다.
원시시대 때를 상상해 보아도 그 때는 아예 겁탈이라는 개념조차가 성립하지 않아서 그렇지 여자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을까 싶다. 심지어 동물들도 구애작전을 한다는데. 우리 선조들도 조금쯤의 노력은 했기를 기대할 뿐이다…
원시 시대 다음으로 고대시대로 넘어오면서부터 여자들은 남자들이 일으키는 전쟁 최대 피해자들 중의 하나였다. 많은 현대 여성들이 그 시대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가? 과연 여성들의 존엄성과 자존감은 지켜지고 있을까? 나는 기회있을 때마다 거듭 밝히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내 눈에 비치는 페미니스트 운동은 물론 긍정적인 부분이 아주 많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권력이 하나의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내겐 남녀평등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녀는 날 때부터 달리 태어났기에, 남녀상생이라면 모를까, 평등할 수는 절대 없는 존재라는 것이 내 믿음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현대는 “합법적인 겁탈”을 허용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나 근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이 맞다. 그런데 과연 현대는 어떠할까?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마음에도 없는 남성들과 결혼을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 가장 뿌리 깊이 박힌 것이 다름 아닌 “결혼 적령기”이다.
결혼 적령기라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여성들이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 안에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거기에 몰려서 여성들은 그 나이대로 진입을 하면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로부터 엄청난 압박에 몰리기 시작한다.
물론 남성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여기 생물학적 근본 원인이 닿아 있기에, 여성들의 뿌리 깊은 어려움이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남성들의 부메랑, 전쟁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재산 관리는 종종 여자들의 몫이 되었다. 교회와 사회가 모두 여성을 평생토록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제쳐놓았지만, 여성들은 재산관리 일을 침착하게 처리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미지와 자부심을 드높였다 (96).”
철저하게 여성들의 관점에서 전쟁을 보면 말이다. 이건 남성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부메랑일 뿐이다. 고대에도 그랬고 세계 제 1차, 2차 대전 때도 그렇고, 남성들이 전쟁을 일으켜 전부 전쟁놀이에 빠져 있을 때 여성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리고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들을 집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여러 번 경험에 의해 이제 여성들은 자존감이 무엇인지에 눈을 확실히 뜨게 되었고 실질적인 능력들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쟁. 여성들에겐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줄리엣은 왜 겨우 열 네 살이었을까?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새롭게 쓰면서 중요한 사항을 바꾸었다. 줄리엣의 나이를 열 네 살로 했던 것이다. 다른 작가들이 각색한 작품에서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그보다 많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줄리엣과 로미오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은 7월의 나흘 동안에 불과하다 (139).”
“ 내 생각에는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사랑의 감정이란 얼마나 무모하고 불안정하고 덧없는가, 더욱이 나이든 어른들의 신중한 사랑과 비교할 때 젊은이들의 사랑에서 그런 점이 얼마나 더 두드러지는가 하는 것이었을 듯 싶다 (140).”
과연 그럴까? 물론 그 의도는 이미 오래 전에 땅 밑에 묻힌 셰익스피어만이 알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쓸 때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가 사랑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안정한지를 말하고자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면, 어쩐지 그 작품이 지금까지 전 세계 최고의 로맨스 스토리로 살아 남지 못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로미오와 줄리엣>안에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혹은 절박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나이 겨우 14살. 그 때 우리는 어떠했나? 순수. 해맑음. 티없음. 뭐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나? 무모하다기 보다는 세상 어두운 면이나 어른들 세계의 그 계산적인 속성에 젖어 있지 않을 나이다. 그렇기에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지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벌써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대로 혹은 “가족”이나 “교육”에 의한 기대치에 따라 우리의 의무와 책임 혹은 손실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도저히 순수한 열정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놓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우리들이다.
열 네 살. 그 순수함만이 때론 우리를 목숨 걸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왜 나흘이었냐고? 순수한 열정도 시간이 흐르면 두려움이 끼여들 여지가 있을 테니까. 어릴 때 가장 두려운 존재들은 다름 아닌 부모님들이다. 더군다나 그 부모님들이 원수지간이라면 더더욱.
셰익스피어는 그 자신도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던 불꽃 같은 그러나 순백의 하얀 열정을 나이 어린 두 주인공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
여기서 잠깐 수많은 고전이 고전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잠시 살펴보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도 좋을 듯 하다.
수많은 주옥 같은 고전들이 왜 여전히 고전일까? 철학서도 그러하고 로맨스 스토리도 그러하고. 왜일까? 아마 답은 인간은 시대가 변해도, 우리를 제한하고 한정 짓는 사회적 규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현대인들 모두 자유로운 연애를 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더 이상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제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속성과 문명이란 이름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규범들 사이에서 인간은 어쩌면 완전히 원시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변함없이 같은 문제들을 갖고 씨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고전은 늘 빛을 발할지도 모를 일이고…
여자 카사노바, 마크 햄
“마크햄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그 나이 지긋한 남자가 평생 단 한번의 진지한 사랑이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그 상처를 잊지 않았다 (358).”
마크햄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여자 친구가 없었던 것은 진정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들끼리 친구관계에선 위의 문제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답을 주었을 테니 말이다.
“:야, 그 남자가 너를 떠났으니까 진지한 사랑으로 느끼는 거야. 만약 그 남자가 너한테 목을 매었다면, 넌 그 남자 역시 차버렸을거라고. 넌 늘 그런 식이었잖아 제발 좀 성숙해지라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 자체가 미성숙했던 것을 몰랐다. 하지만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누가 카사노바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어쩌면 가장 가여운 영혼들일지 모르는 데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 존중, 가족, 소속감을 간절히 원하면서 그는 자신의 불안정한 심리를 허세와 혈기 방장함으로 위장했다 (150).”
이 원인에 대해 프로이트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이가 사춘기를 맞아… 자신이 여지없이 반했던 첫사랑인 아버지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택하게 된다 (226).”
프로이트의 말에 의하면 아들은 어릴 때 엄마를 더 좋아하고, 딸들은 아빠를 더 좋아하는데, 성인이 되면 반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딸들은 엄마를 이해하게 됨으로 서로 친구 같은 관계로 발전한다고 한다.
사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최근까지 단 한 번도 내 스스로에게 대비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나의 변화와 함께 이번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대비시키며 여러 생각을 하면서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적절한 시기에 좋은 책이었다 할 수 있다.
이크족이 주는 교훈:
“이크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사랑이 잘려나가고 본능만 남았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하는 사실이다 (261).”
영장류 동물들의 경우는 감정이 있다고 한다. 그럼 그들이 사랑도 느낄까? 고릴라나 침팬지를 보면 자신의 암컷을 뺏기지 않으려고 싸움도 불사하는 수컷들을 보게 된다. 이 때 그들이 느끼는 것이 사랑일까? 아마 소유욕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래도 인간을 동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특성이 “지식”과 “사랑”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지식과 사랑을 어떻게 주고 받느냐에 따라 사실 동물만도 못해 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알량한 지식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거나 단 몇 초 만에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핵 폭탄을 만들거나 유전자 변형을 시도하거나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랑이 뒤틀려 집착하거나 반대로 인간들의 만든 사회적 규범에 걸려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목이 졸려 살기도 한다.
인생에는 결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 될 것 같은데. 뭐랄까. 인생이란 끝없이 개인의 자아와 내가 속한 사회 규범과의 힘겨루기라고나 할까. 다만 흥미로운 건 그 사회 규범을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난 항상 의문점이었다.
왜 인간은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 일생 힘들어할까? (물론 힘들긴 뭐가 힘드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그리워하고, 꿈을 이루지 못해 현실 앞에 탄식하고는 한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누구의 자유를 박탈하고, 누가 이룰 수 없는 것이 꿈이라고 한 것일까?
불가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누구나 “허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 내가 논하고 있는 자유나 꿈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근본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날고 싶다. 날개를 꺾을 수는 있을지언정 내 의지까지 꺾을 수는 없음이다. 내게 족쇄를 채울 수 있을지언정 나의 열정까지 가둘 수는 없음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크족의 삶과 그 무엇이 다를까…
심장과 결혼 반지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랑을 비롯한 주요 정서들이 심장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심장을 뜻하는 이집트 상형문자는 춤추는 형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거나 생각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261).”
결혼 반지를 끼는 손가락의 동맥이 심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와… 거기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이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의 내부 장기 중 하나를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 좀 특이하지 않은가? (261)”
현대 의학에서야 뇌사를 죽음이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까지 인간들은 심장이 멎는 순간을 죽음으로 간주했으니 당연히 이해되는 부분 아닌가? 즉, 그야말로 죽음이 우리를 가를 때까지를 의미하는 거겠지. 사실 죽음도 가를 수 없는 것이 인연인데…
시대가 흘러 현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 사랑
앞에서 고전이 고전일 수 있듯이, 사랑 역시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다. 아니 절대적으로 그러기를 바란다. 사랑이 멈춘 인간들의 삶은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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