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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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칼리 피오리나 (Cara Carleton Sneed Fiorina)
결혼전 이름은 Cara Carleton Sneed
1954년 9월 6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출생
(텍사스주 오스틴은 ‘제2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첨단 정보통신 도시로 거듭나고 있어
그녀와 실리콘밸리와의 인연을 생각나게 한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carlyfiorina.com
부모와 성장배경
아버지 조지프 타이리 (Joseph Tyree Sneed III)는 법대 교수와 학장을 지내고, 나중엔 미국 항소 법원의 연방 판사가 된 학자다.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졌고, 척추 하나가 없는 채로 태어났지만 의지력으로 고교시절 운동부에서 뛰어난 선수가 되었다. 머리를 쓰는 일에 장래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자녀들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역사, 문학, 라틴어를 교육받기를 원했다. 저녁 식탁에서는 자녀들과 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텍사스 주립대, 코넬, 예일, 스탠퍼드, 듀크 등 미국 명문대에서 가르쳤고, 런던경제대학과 가나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아버지가 학계에서 위상을 높여감에 따라 가족은 자주 이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칼리 피오리나는 뉴욕, 코네티컷, 캘리포니아에서 초등학교를, 캘리포니아와 영국에서 중학교를, 아프리카와 캘리포니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 매들런 몬트로스 저진스 (Madelon Juergens Sneed)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딸이라고 대학에 보내주지 않자 가출을 감행한다. 고향을 떠난 그녀는 세계 제 2차 대전 중 육군 여군 부대에 열여덟 살의 나이로 입대해 텍사스 공군기지 셰퍼드 필드에서 배치되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화가로 활동하던 어머니는 60대에 접어든 뒤 예술사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어릴적 돌아가신 우아한 프랑스인 생모를 잊지 못한 그녀는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오페라를 보여주었으며 피아노 교습을 시키는 등 문화적이고 세련된 자질을 갖추도록 애를 썼다.
칼리 피오리나의 부모는 자식을 못 가질 줄 알다가 장녀인 언니를 얻었고, 칼리 피오리나와 남동생을 더 두었다. 칼리 피오리나의 이름은 친할머니 ‘카라 칼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칼리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식이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늘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언니와 남동생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은 자서전에서 그녀는 ‘형제자매에게 나는 늘 밉살스런 ‘천사표 내숭’이었다.’고 고백한다.
뛰어난 교육, 지적 우수성, 모범생
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에 그녀는 제대로 공부를 했다.
주요 학력은 다음과 같다
1976년 스탠퍼드대 졸업 (BA, 중세사와 철학 전공)
1977년 UCLA 로스쿨 자퇴
1980년 메릴랜드대 MBA (마케팅 전공)
1989년 MIT 1년 단기집중 경영학 MS (AT&T 재직중, 임원 육성 차원에서 지원)
1970년대에도 대학원에 가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 학자풍의 집안에서 자란 그녀여서인지 거쳐간 명문대의 이름만도 화려하다. 미국에서도 인문계 졸업생들에게 인기 대학원인 로스쿨, MBA 대학원을 모두 별 어려움 없이 입학했다. LSAT, GMAT 등의 공부를 모두 해 낸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의 계단을 밟아간 그녀는 기초가 탄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네 살에 프랑스어 교습을 받았다는 것은 특히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그녀의 부모가 중산층 학자이지만 자식들만은 일류로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엿보게 한다.
학부 시절
대학 입학 시기부터 대학원에 갈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녀는 스탠퍼드 학부 시절을 인문학으로 기초를 닦는 시기로 백분 활용했다. 화학과 생물학, 천문학 등을 들을 것도 그런 이유에서리라.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싶었던 그녀는 최대한 여러 철학 과목을 수강하기로 작정하고 철학서를 원전으로 읽기 위해 라틴어, 프랑스어, 독어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까지(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기 위해서) 배웠다. 철학과 사상을 배우는 과정에서 열심히 핵심을 추출하는 과정과 머릿속에서 정제하는 훈련, 20쪽짜리 내용을 2쪽 분량으로 확실하게 말하는 능력을 배양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아버지가 역사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녀는 역사도 공부했다. 역사란 사람들에 대한 것이고, 변화를 이루려던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이끄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아하게 공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숙식비를 벌기 위해 일 주일에 사흘씩은 근처 미용실에 나가 일했다. 심한 단핵증에 걸려서 1년간 병과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늘 공부하고 일한 기억밖에 없다는 그녀의 학부 시절은 역시 암울했던 나의 학부 시기와도 겹쳐지는 것 같아 가슴이 저릿했다.
로스쿨 중퇴
하지만 공부 잘 하는 기대주의 길은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법대 교수였기에 큰 열의 없이 UCLA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첫날부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법을 존중할 수는 있어도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법학이 싫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쉽게 포기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포기는 실패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버텨야 했던 그녀는 매일 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몇 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일요일 아침 샤워를 하다가 문득 자신의 몸이 몇 달간의 두통을 통해 이 길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자는 결론을 내렸다. 스물두 살의 그녀는 드디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서 뭔가 다른 쪽으로 인생의 목적을 돌린다. ‘그날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언어 습득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 어렵다는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에다 프랑스어, 독어를 배웠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어 역시 거의 완벽하게 배웠다.
MBA에 가서도 ‘훌륭한 학생이 되는 법’을 알았던 그녀는 전과목 A학점을 따내고 교수들의 눈에 띄어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학교에서는, 그리고 학교와 비슷한 열의와 모범생 기질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분명 반짝반짝 빛이 나는 존재였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커리어
요약
1980 미국 벨사(AT&T)에 MBA 출신 관리자 프로그램(M.D.P.er 엠디퍼)으로 취직
1998 루슨트 테크놀러지 최고경영자 (CEO)
1999 Kellogg, Merck 이사회 임원
1999~2005 휴렛팩커드(HP) 최고경영자(CEO)
1980년 (25세)
법대 중퇴 직후 생계를 위해 부동산 중개 회사에서 사무계원으로 일했던 그녀가 MBA를 마친 뒤 정식으로 취직한 첫 직장은 AT&T였다. MBA 동기들이나 교수들은 이 회사가 너무 느리고, 지나치게 관료적이며, 침체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통신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또한 그녀가 택한 경영 개발 프로그램(Management Development Program)은 MBA 출신들이 입사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여러 부서를 순환한 뒤 관리자로 성공적으로 안착하거나 쫓겨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여러 부서를 거치는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입사하면서는 이 회사에서 1, 2년쯤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처음 선택한 부서는 AT&T 장비부문인 네트워크 시스템 영업직. AT&T에서 연방 정부와 거래하는 부서였다. 제품에 대해 배워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부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으므로 영업 부문을 골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영업 부문 선택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 세일즈팀에 처음 온 (석사 출신) ‘엠디퍼’였다.
그러나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놀랍도록 재기 발랄한 두뇌'라는 평가와 함께 발군의 비즈니스 역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국·대만·일본 같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합작사업을 훌륭히 성사시키고 덩치만 비대했던 가전산업을 과감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1985년 3월
중간급 관리자에서 부문 관리자로 승진했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승진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미 엔지니어링 부문을 편안하게 느끼게 된 상황에서, 그곳을 떠나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만다.
1988년 1월
AT&T가 1년에 두세 사람을 선발해 보내주는 MIT의 1년 집중 MS 과정에 가기로 결정된다. 남편과 잠시 떨어져 살아야 하는 희생이 따랐지만, 각 회사에서 선발된 뛰어난 경영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1990년경
칼리 피오리나는 35세에 AT&T 네트워크 부문 최초의 여성임원이 된다.
1995년
40세, 그녀는 북미 영업 담당 이사로 승진하는 기록을 세워나간다.
1996년
AT&T는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통신장비 부문(훗날 루슨트 테크놀로지)을 분할시키기로 결정한 뒤 칼리 피오리나를 새 회사 창립준비팀에 전격 발탁한다. 이때 그녀는 기업분사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루슨트 테크놀로지를 AT&T로부터 분사시키면서 올린 30억 달러의 수입은 당시로서는 기업공개 분야에서 최고 액수를 기록했다.
이후 피오리나는 루슨트 테크놀로지 내에서 2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전체의 60%)을 올리는 글로벌 서비스 부문 책임자로 일하게 되는데, 이 부문의 대표를 맡으면서 그녀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루슨트 주가는 12배 정도 올랐다.
1998년
루슨트 테크놀로지 CEO
이때부터 칼리 피오리나는 경제 주간지 포천(Fortune)지가 선정하는 ‘미국 최고의 여성 기업인 50’ 순위에서 6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스타 경잉인이 된다. 더불어 뉴욕 증시 다우존스공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대 기업 중 첫 여성 CEO가 된다.
1999년
휴렛팩커드(HP)의 최고경영자(CEO)로 영입.
199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아쉽게도 서부에 와서 살 일이 없을 거라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한 “혹시 누가 아니. 어느 날 네가 휴렛팩커드의 CEO가 될는지”라는 이야기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때 칼리 피오리나는 웃으며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건 모른단다, 칼리. 사람 일은 몰라”라고 대답한다.
그녀가 HP의 CEO가 되자 남편 프랭크 피오리나는 유능한 아내를 돕기 위해 회사를 사직하고 집안 일을 맡아 화제가 됐다. 1985년 AT&T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프랭크는 그녀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뒤 늘 ‘칼리는 언젠가 대기업의 CEO가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녀의 성공을 도왔다.
2001년
컴팩 인수합병. 그녀는 합병된 회사의 CEO를 맡게 된다.
9개월에 걸친 치밀한 계획 끝에 2001년 9월 4일, 컴팩과 합병 계약 체결을 발표하지만 불과 일 주일 후에 911 사태가 벌어지는 등 악재가 겹치고 만다.
2005년 2월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사임.
칼리 피오리나는 주주와 중역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한 컴팩 인수와 이후 주가 하락, 미래 전략을 둘러싼 이사회와의 이견 때문에 사실상 축출되고 만다.
용기 있는 여성
스스로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했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용기를 냈다고 생각된다.
부모님의 압박을 견디고 법대를 그만둔 것,
남편을 따라 이탈리아에 가서 1년 간 살았던 것,
당시로서 쉽지 않았을 이혼을 결심한 것,
원래 눈물이 많았은데다 겁 많고 소심한 여학생이었다던 그녀는 ‘강한 의지를 갖고 일하다 보니 리더십이 길러져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털어놓는다.
CEO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자기 성찰 능력 –인문학의 힘
그녀 책에는 유난히 ‘내 영혼’ 타령이 많이 나온다. 그녀를 다른 경영자와 차별화할뿐아니라 지금껏 지탱해준 힘은 인문학을 공부하며 생긴 자기 성찰 능력이 아닌가 한다.
그녀가 1989년 회사의 지원으로 MIT 대학원에 가서 얻은 가장 심오한 경험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를 읽은 일이었다. 원칙을 버리라는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결과 고립과 추방에 직면하게 된다. (그녀의 나중 상황과 꽤나 흡사한 듯하다) 하지만 용기 있고 외롭고 단호한 사람이었던 안티고네는 ‘영혼’을 알았고 그것을 지켰다.
그녀는 처음 <안티고네>를 읽은 이후 1년에 한 번씩 시간을 내서,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깊이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새해 무렵 일종의 ‘연중 점검’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내렸던 결정에 마음이 편안한지. 자신의 영혼이 여전히 자기의 것인지 해마다 스스로 조용히 성찰할 수 있었던 그녀는 각박하고 빨리 돌아가는 비즈니스계를 떠나서도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2006년 이후,
HP에서 은퇴한 이후
MIT 이사회와 월드 이코노믹 포럼 재단의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컴퓨터 보안업체인 사이버트러스트의 이사회에도 참여했다.
2009년, 현재의 그녀
유방암 극복
2009년 2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3월 스탠포드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정치계에 노크 중
2008년 대선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의 경제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녀는 2010년에 있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출마를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외신에 따르면 칼리 피오리나는 내년에 치러질 공화당 경선을 위해 '칼리 포 캘리포니아'란 이름의 캠페인 위원회를 등록했다.
책 출간 직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나도 잘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웃음) 하지만 공식 인터뷰에서는 아직 계획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직 그럴 때는 아니라고 봐요.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고, 자유를 만끽하고 있어요. 다른 일들을 할 기회가 많이 있을 것이고요. 나중에 선택의 순간이 오면 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할 겁니다.”라고 여운을 남긴 바 있다.
그 동안 HP에서 정치적 배타성에 질릴 법도 한데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겠다니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경력과 능력을 놓고 보았을 때, 50대 초반의 그녀는 아직 너무 젊고 할 일은 많아 보이므로 앞으로 그녀의 행보를 눈여겨보아야겠다.
내가 저자라면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변신할 수 있는 그녀, 칼리 피오리나
성공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책은 출간되자마자 읽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는 2006년 말이나 2007년 초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특히 여성 최고경영자는 아직도 드문 편이므로 무척 흥미를 끌어당겼다. 책 출간 시기는 마침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그녀처럼 탄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대학원 전업학생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시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곳곳의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았고, 힘이 되었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듯하다.
아주 기억에 생생한 부분은
1) 부모님의 실망이 클지 알았지만, 법대를 그만두고 회사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그녀
2) 공부를 무척 열심히 했던 그녀의 모습. 나 역시 학부 시절에는 기초를 닦겠다며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워낙 소수인 인문학을 전공한 것에 회의를 느낄 때쯤 인문학 전공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해 주었다. 수천 페이지의 책을 읽고 핵심을 요약하는 능력이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먼저, 여성 경영인으로서의 그녀
여성으로서 비즈니스를 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구구절절 토해내서 ‘굳이 이렇게까지 낱낱이 파헤쳐 이야기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판단한 반면, 다른 분은 여성으로의 모습은 배제하고 경영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MBA 출신에 능력 있다고 CEO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 그녀가 이 정도의 일을 사내에서 겪었는데, 평범한 여성이라면 얼마나 더 구차한 아픔을 겪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책에 나오는 사건을 간단히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 전날 밤 내게 퇴짜를 맞은 남자가 아침에 출근해서 나랑 멋진 잠자리를 했다고 떠벌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경악했고, 창피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의아했다. (57)
“칼리랑 인사하시지요. 우리 ‘얼굴 마담’입니다.” (64)
나는 서른 살이었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쟁력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내가 제법 매력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속단했다. 희롱당하고 유혹당한 적도 있었다. (83)
“그런데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편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면서 자녀를 갖고 싶지 않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105)
그는 계속해서 내게 남편에 대해 물었다. 그의 직업이 뭔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그는 남자 동료들에게는 아내나 결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서 혼자 울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운다는 게 화가 났다. (105)
세상에. 결혼하고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잘나가는) 남편이 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 경우를 보니, ‘결혼하고 나면 이 시끄러운 소음 따위는 내 진로를 방해하지 않겠지’하고 안심했던 나를 더욱 긴장케 한다. 게다가 미국에서조차 이 정도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오죽할까.
게다가 그녀는 끊임없이 외모로 평가된다.
“출장 때마다 헤어 디자이너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데리고 다닌다거나 사무실에 분홍색 대리석 욕조를 설치했다는 소문들 이 나돌았죠. 다 사실이 아니에요. 내 사무실에는 욕조를 둘 공간이 없었어요. 그건HP 직원들이 더 잘 알걸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Mrs. or Ms. 피오리나’가 아닌 ‘칼리’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
사람들은 흔히 나를 성이 아닌 ‘칼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내가 ‘너무 야심이 많아서’ 자녀를 갖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특히 마음 아팠다. 사람들은 ‘전업주부’라는 부정확한 묘사로 프랭크의 커리어를 비롯해 우리 가정과 지역사회에 쏟는 그의 기여를 무시했다. (240)
그녀는 여성이어서 자신의 능력까지도 폄하된다고 생각했다.
컴팩 합병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여성 CEO라서 더 그렇다’라고 몰아가는 식이었어요. 여성은 큰 회사를 맡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이어졌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기자) 당신이 남성이었다면 차별이 덜했을까요?
“사람들은 명사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더 보고 싶어하죠. 아, 내가 남성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한 것은 여성 CEO에 대해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spoken about differently). 그래도 나는 비즈니스에서 나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필요하면 도전했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직원들을 해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그녀는 서술한다.
나는 남성 CEO들이 직원을 해고하면 ‘단호하다’고 칭찬받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내가 해고하면 ‘보복 인사’라는 딱지가 붙었다. (303)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런 상황을 신임 CEO의 잘못으로 돌리고 ‘사슬톱 칼리’라는 새 별명을 붙여주었다. (중략) 아이러니컬하게도, 한참 후에 내가 해고된 이유가 인원을 줄이지 못하고 비용을 삭감하지 못해서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321)
얼마나 억울했을까.
강하면 강하다고, (사슬톱 칼리)
눈물을 흘리면 눈물의 여왕이라고
일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매도되며
항상 화제의 중심에 섰던 그녀.
게다가 그녀는 실리콘밸리의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그 배타성, 상상만 해도 견디기 쉽지 않았을 법하다.
“실리콘밸리의 주류는 남성 엔지니어 출신이에요.
그런데 나는 여자였고, 인문학도였어요. 그리고 외부에서 영입된 CEO였지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죠.
여자라서 그런지, 더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책날개에서는 그녀가 동부에서 온 것까지 그녀를 더욱 '이방인'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녀의 ‘극과 극’ 평가 둘.
책을 읽고 내가 처음 받은 느낌은 순진무구(?)한 여린 CEO가 노회한 세상에서 이리저리 상처받고 팽당한 불쌍한 이미지였다.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까닭인지, 노회한 경영인보다는 노력파 범생이, 세상 물정에는 어느 정도 순진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매일 밤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처럼 몇 번이고 거듭 외웠다. 상황이 힘들어질 줄은 짐작했어도, 설마 가족들과 싸움을 벌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30)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하고 지각이 있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과 정보만 준다면, 그들은 선하고 지각 있는 선택을 한다.
진보의 힘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늘 승리할 것이다. 또 역사의 행보는, 다수가 소수를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HP는 회사의 장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회사이다. (중략) 나는 이것을 위해 싸웠다. 우리가 승리할 줄 알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51)
HP의 회장으로 오는 것도 그랬다. 그녀는 단지 뛰어난 능력으로 영입되어 왔다. 내부의 치열한 혹은 치졸한 정치 따위는 거치고 올라가지 않았다. (루슨트에서도 워낙 뛰어난 성과 때문에 CEO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참신한 면도 있었다. 머리와 능력으로만 성공하다니! 그러나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신라시대의 미실 편이 훨씬 나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가졌지만 사람을 끌어모으지 못하고 있는 덕만공주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아! 순진무구, 지켜주고 싶은 그녀.
(가 그녀가 책을 쓰고는 뒤 만들어지길 원하는 그녀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자.
그녀가 마냥 그랬다면, 과연 여기 올 수나 있었을까?
이 책은 정말 그녀의 강하고 차가운 모습을 감추기 위한 ‘교묘한 위장술’의 일환인가?
그녀의 입장만 구구절절 적힌 이 책을 읽고는 정말 가치판단이 어려워진다.
‘칼리 피오리나’라는 조지 앤더스의 책(해냄출판사, 2003)을 구해 읽어봐야 할까? 그 책이 과연 객관적 평가에 도움을 주는 책일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녀의 ‘극과 극’ 평가 셋.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고 말하자 남편은 ‘자기 잘못을 해명하기 위한 변명서 아니었어?’하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에는 칼리 피오리나가 부임한 뒤 HP가 괜찮은 조직들을 지나치게 분할함으로써 고유의 가치가 많이 바라게 되었다고 한다. 전자공학과 통신을 전공한 사람이니, 괜히 전문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HP라는 회사와 이쪽 산업에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워낙 문외한이고 관심이 없었기에 기업 내부 조직의 분할과 컴팩의 합병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정말 그녀의 잘못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녀가 서술한 대로 기업 분할은 그녀가 영입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그래서 성공적으로 루슨트를 분할한 그녀를 데려온)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컴팩과의 합병 시너지 효과가 정말 그렇게 컸는지에 대한 판단은 내가 섣불리 하기 어려운 문제라 보류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책이 뒤로 갈수록 칼리 피오리나 그녀만의 견해, 배제되었다는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감정적인 문장들이 곳곳에 나오는 것 같아 읽기 불편할 때가 꽤 있었다. 책을 쓴 것은 회사에서 나오고 불과 1년 사이였으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한 번 더 숙성(?)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자기 변명’이었다는 악평을 듣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칼리 피오리나 힘든 선택들
프롤로그 –내 영혼은 나의 것이다
“칼리, 이사회는 최고위직에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어요.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13)
난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이 최선의 대답이라고 믿는다. (14)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전에도 알았다. 강한 사람들과 어마어마한 이해관계를 놓고 큰돈이 걸린 승부를 벌이던 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미처 몰랐다. 힘든 작업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을 찰나였고, 이사회도 이 사실을 알 거라 생각했다. (14)
2005년 2월 9일, 공식 발표를 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을 다지면서,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안 좋은 얘기들이 불거져 나왔다 나도 마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더 가슴 아파했다. (15)
이 모든 것을 느꼈지만, 두려움에 젖어 평생을 살아온 터라 두렵지 않았다. 난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내가 믿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다. 실수도 있었지만, 변화를 이루어냈다. 내가 한 선택과 그 결과를 평온하게 받아들였다. 내 영혼은 여전히 내 것이었다. (15)
1. 부모님께 받은 선물
결국 어머니는 60대에 접어든 지 한참 지나서 예술사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20)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를 쓰는 일에 장래가 걸려 있으며, 캘버트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1)
아버지는 자녀들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역사, 문학, 라틴어를 교육받기를 원했다. 그는 학자(법학 교수)였고 자녀도 그러기를 바랐다. (21)
그래서 나는 네 살에 프랑스어 교습을 받았고 일곱 살에 오페라를 보러 갔으며 박물관에 가고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들딸이 똑같이 문화적이고 세련되며 성공하기를 바랐다. (21~22)
나는 두 분의 어릴 적 이야기를 알았기 때문에, 부모님을 잃을까 봐 걱정하며 자랐다. 그것은 강박관념의 수준이었다. 이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22)
우리는 기품 있는 중산층 가정이었다. 전업주부인 어머니와 학자인 아버지, 그리고 세 자녀가 있었다. 부모님에게 성공은 명성과 재력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성공의 기준은 개인의 품성과 인격이었다. (22)
부모님은 자식을 못 가질 줄 알다가 장녀인 언니를 얻었다. (23)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늘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집안의 외교관이 되었다. (중략) 형제자매에게 나는 늘 밉살스런 ‘천사표 내숭’이었다. (24)
부모님 모두 매사에 탁월함을 추구했다. 아버지는 타고난 선생이자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중략)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24)
아버지가 학계에서 위상을 높여감에 따라 가족은 자주 이사했다. 아버지는 텍사스 주립대, 코넬, 예일, 스탠퍼드, 듀크에서 가르쳤고, 런던 경제 대학과 서아프리카 아크라에 있는 가나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냈다(결국 미 항소 법원의 연방 판사가 되었다). 나는 뉴욕, 코네티컷, 캘리포니아에서 초등학교를, 캘리포니아와 영국에서 중학교를, 아프리카와 캘리포니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렇게 이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 대해 많이 배웠다. 변화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25)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 말은 할 수 있다. 나는 높은 기대치의 힘을 경험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적었다면 많이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두려움과 결핍감이 있었기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는 것을 알았다. 살면서 마주치는 두려움과 불확실성 때문에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부모님이 본보기가 되어 가르쳐주었다. (28)
어릴 때 나는 재능을 선물 받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선물은 부모님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29)
2. 이방인
대학에 진학할 시기가 되자, 스탠퍼드 대학을 선택했다. (30)
언제나 대학원에 가는 걸 당연시했기 때문에 학부는 순수한 지식을 쌓는 시기로 생각했다. 부모님은 이런 생각을 격려했고, 덕분에 정말 관심 있는 과목들을 공부하는 멋진 경험을 했다. 화학, 생물학, 물리학, 경제학, 인류학, 천문학, 음악 과목을 수강했다. (30)
난 집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아는 게 얼마나 없었는지 깨달았다는 사실을 밝히며 의기양양해 했다. 또 내가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역사와 철학이야말로 내 열정을 사로잡아버렸다. (30)
내가 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끌렸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중략) 실제로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은 내게 깨달음을 주었으며 대단한 사상을 담고 있었다. 철학이 행동하도록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기로 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다. 선택의 힘과 중요성, 정체된 것보다는 이루어가는 움직임, 이런 것들은 내게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심오한 사상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처지를 선택하지는 못해도, 그 처지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 (31)
나는 최대한 여러 철학 과목을 수강하기로 작정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싶었다. (31)
헤겔은 카뮈만큼이나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반합의 철학, 즉 맞선 것처럼 보이는 사상끼리 화해할 가능성은 탁월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비즈니스에서 이것을 정신적 모델로 사용했다. (31)
윤리학을 공부하면서, 옳고 그른 데는 뉘앙스가 있어 복잡할 수 있으며, 해결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걸 배웠다. (32)
철학서들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 여러 나라 말을 공부하기로 했다. 덕분에 라틴어, 프랑스어, 독어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까지(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기 위해서였다) 배웠다. (이탈리아어는 재미삼아 익혔다.) 아버지가 역사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분야도 공부했다. 역사란 사람들에 대한 것이고, 변화를 이루려던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마음에 들었다. (중략) 영감을 받아서 새 길을 선택한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이끄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2)
책의 분량은 방대했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1천 쪽을 읽었다. 주말에는 그 철학의 담론을 2쪽으로 요약했다.
나는 우선 20쪽 분량의 글을 쓰는 데서 시작했다. 그런 다음 10쪽으로, 그 다음에는 5쪽으로 줄이고, 맨 마지막으로 2쪽으로 요약했다. 2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단순하게 요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의 실체제어 중요한 사안을 빼내 그 의미의 진수를 걸러내려 했다. 2쪽짜리 보고서 작성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2~33)
철학과 사상이 내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 배운 것은, 열심히 핵심을 추출하는 과정과 머릿속에서 정제하는 훈련, 20쪽짜리 내용을 2쪽 분량으로 확실하게 말하는 능력이었다. 이 과정을 마무리할 때는 시작할 때보다 그 내용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중요한 경영 기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엄청나 보이는 분량의 정보에서 핵심을 이해하고 추려내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또 리더십 교육도 받은 셈이었다. 사물의 핵심을 이해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은 어렵고, 많은 생각을 쏟아야 하며, 큰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배웠다. (33)
하지만 스탠퍼드 대학 시절이 특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은 진지한 시기였다. 모두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아서 따라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공부할 분량이 많은 데다 중세 사법제도에 관한 우등 논문을 써야 했다. 또 숙식비를 벌기 위해 사흘씩 일해야 했다. 심한 단핵증에 걸려서 1년간 병과 사투를 벌였다. 재미있게 지낸 기억은 없다. 늘 공부하고 일한 기억밖에 없다. (34)
여러 방면에 관심이 있었고, 소방관에서 댄서에 이르기까지 되고 싶은 게 많았다. 부모님은 늘 모든 야망을 격려해 주었다. (34)
요즘의 젊은 여성과 대화할 수 있다면, 마음을 가볍게 하라고 말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매사가 내게는 심각한 일로 보였다. (35)
큰 열의 없이 UCLA 법대에 진학했고, 첫날부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법학이 전례에 초점을 두는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은 어쩌고? (35)
법을 존중할 수는 있어도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 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몇 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법학이 싫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걱정했지만, 내가 포기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포기는 실패였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버텨야 했다. (35)
드라마틱하게 들리겠지만, 일요일 아침 샤워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몸은 몇 달간의 두통을 통해 내게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중략) 당시 난 스물두 살이었고, 인생의 목적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능력과 재능을 모두 발휘하려면, 나 자신을 가지고 뭔가 이루려 한다면,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야 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두통이 가셨다. (35)
“행복해지려거든 다른 사람들을 너무 신경 쓰면 안 된다”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중략)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그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스스로 정말 어려운 결정을 내렸으니까. 그 선택을 하면서 외로웠고 결과가 두려웠지만, 잘한 선택인 것만은 분명했다. (36)
3. 다음 직장을 생각지 말라
1976년에는 역사와 철학 전공자는 학교에 남아 공부를 더 하지 않는 한은 취직이 잘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법대를 자퇴할 때까지, 나는 경제계를 직업으로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중략) 우리는 언제나 대학가나 그 주변에서 살았고, 비즈니스업계 종사자도 전혀 알지 못했다. (37)
무슨 이유인지 나는 스파이 세계를 좋아했고(단짝 친구와 나는 CIA 요원인 척하며 놀곤 했다), (중략) <미션 임파서블>에는 여자 스파이가 나왔다. 비즈니스를 하는 여자였는데, 내 눈에는 멋지게 보였다. (38)
스탠퍼드 시절, 방세와 식비를 감당해야 했기에 ‘DJ 헤어 디자인’에 나가서 장부 정리를 하고 전화를 받고 예약을 받았다(동네 미용실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38)
직급이라는 사다리에서 맨 아래였으므로, 특별한 비즈니스든 일반적인 비즈니스든 생각하지 않았다. 타자를 많이 쳤고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39)
아무런 계획도 없고 돈도 없이 법대를 자퇴한 후, 처음 시작한 일은 구인 광고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비서와 안내직을 찾았다. 면접 요청에는 모두 응했고, 처음 제의받은 직장에 취직했다. 처음 살게 된 아파트는 지하실이었지만, 내 형편으로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중략) 난 차를 살 형편이 아니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했다. (중략) 그런데도 모든 과정에 승리처럼 느껴졌다. (39)
마커스&밀리챕(Marcus & Millichap)은 상업용 부지 중개업소였다. (중략) 내가 맡은 업무는 사무실 앞에 앉아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전화를 받아 연결해주고, 문건이 넘어오면 타자를 치는 일이었다. 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업무에 능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찮은 업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직장이 있는 게 고마웠고, 내게는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게 흥미로웠다. (40)
이 일의 실용적인 면이 마음에 들었다. 일은 학문적이지도 않고 추상적이지도 않았다. 어떤 일을 하면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41)
다음 업무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지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몰두하라.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라. 각 업무의 한계가 아닌 가능성에 집중하라. (41)
그들이 내게서 잠재력을 보았기에, 나도 내 안에서 잠재력을 찾기 시작했다. (41)
4. 새로운 두려움
이탈리아인 비즈니스맨들과 그 가족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입소문이 났다. 시간당 10달러의 교습비를 받아서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43)
이탈리아어를 완벽하게 배우면서 비즈니스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넓혔다. 그래서 오래 생각한 후에 MBA를 따기로 결심했다. (43)
나는 훌륭한 학생이 되는 법을 알았고, 뛰어난 경영대학원생이 되어 전과목 A학점으로 졸업했다. (44)
어떤 이유인지 경영대학장 루디 라몬 박사는 내게서 뭔가를 보았고, 어느 오후 사무실로 오라고 불렀다. (44)
그는 단순한 일을 했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누군가를 믿어줌으로써 그들이 그 자신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엄청나게 뛰어난 리더십이 있는 행동이다. (45)
또 나도 사람들을 가르치면서(일주일에 8시간씩 대학원 수업을 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낼 때 가장 잘 배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45)
사람들은 내게 이 회사가 너무 느리고, 지나치게 관료적이며, 침체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흥미를 느꼈다. 통신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46)
벨 시스템에서는 경영 개발 프로그램(Management Development Program)이라는 것을 시행했다. 젊은 관리자들이 다른 부서를 순환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업오어아웃(up-or-out) 기회로 알려졌다. (46~47)
내가 보기에는 엄청난 도전의 기회 같았다. 성장하는 업계에서 엄청난 교육을 받는 셈이었다. 어떤 부서가 흥미로울지 아직 모르므로, 여러 부서를 맛보는 게 마음에 들었다. (47)
AT&T 신입사원으로서 처음 내려야 했던 결정은, 어느 부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략) 고민한 끝에, 어떤 부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으므로 영업 부문을 골랐다. (중략) 회사의 제품에 대해 배워야 되기 때문에 영업부가 일을 시작하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47)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일에서도 같은 유형을 보게 되었다. 두려워하는 이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역할 놀이에서의 나처럼, 새롭고 낯선 일에 당면하면 (상당히 간단하고 무의미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기 일쑤이다. (48)
5. 숙녀가 일어날 때까지는
AT&T에서 연방 정부와 거래하는 부서였다. 업무 첫날에는 몰랐지만, 나는 배정받은 세일즈팀에 처음 온 ‘엠디퍼’였다. (중략) 나처럼 석사학위를 들고 경영 개발 프로그램을 수료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49)
“왜 안 되는데요?”
“저기, 우린 ‘보드룸’에 갈 거거든, 미안.” 그가 가버렸다. (52)
다음날 사무실에서는 힘의 균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내가 무서워하기는 해도 누구에게 겁먹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데이비드와 스티브에게 똑똑히 보여준 셈이었다. 내가 다른 엠디퍼들과는 다르다는 것도 증명해 보였다. (54)
결국 전날 밤 내게 퇴짜를 맞은 남자가 아침에 출근해서 나랑 멋진 잠자리를 했다고 떠벌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경악했고, 창피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의아했다. (57)
그 1년 반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틀렸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는 것을 믿어야 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추진하는 업무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능력을 총동원한다면, 기회는 저절로 찾아온다는 것도 배웠다. (58)
6. 마음이 한 선택들
이때 처음으로 남자들이 유능하고 성공한 여자에게 얼마나 위협을 느끼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중략) 결혼생활에서 현실로 드러나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중략) 나를 사랑한다던 사람이 어떻게 내 재능에 분개할 수 있을까? (60)
당시에는 몰랐지만 처음 프랭크를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그가 능력 있는 나를 좋아했기에 나는 그를 사랑했다. 프랭크는 내게 언젠가 회사도 경영하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능성을 인정해 주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보다 좋은 것은 그가 내 능력을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짜릿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61)
프랭크와 나는 아이를 낳으려고 애썼지만, 실망스럽게도 하느님의 계획에 아기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의 가족으로도 완전하다고 느꼈고, 서로를 발견한 것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62)
7. 얼굴 마담
1982년 처음으로 관리자가 되었다. 상사 노릇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상사가 되는 연수 과정 같은 것도 없었다. (63)
“칼리랑 인사하시지요. 우리 ‘얼굴 마담’입니다.” (64)
나는 지금까지의 기록이 거의 없는 신참 관리자였다. 회사의 정치는 실제 정치처럼 권력에 기반한다. (중략) 나야 권력 같은 게 워낙 없는 사람이니,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기에 임했다. (68)
어떤 직위에 앉아 있든, 사람은 사람이기 마련이다. 그런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로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상당히 놀랐다. (69)
8. ‘할 수 있다’와 ‘하겠다’
내 손으로 진짜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업무, 그게 내가 추구하는 일이었다. (76)
그들은 업무에 관해 나보다 잘 알았다. 각자 감당해야 할 고민도 많았다. 내가 공연히 ‘돕는답시고’ 주변을 어슬렁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78)
몇 주일 후, 한 달에 수천만 달러가 초과 청구되었음이 분명해졌다. (80)
나는 서른 살이었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쟁력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내가 제법 매력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속단했다. 희롱당하고 유혹당한 적도 있었다. (83)
상사가 부하 직원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 것은, 그가 더 출중해서가 아니다. 상사가 부하 직원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 것은, 상사가 책임을 더 많이 지기 때문이다. (85)
난 그때까지 사랑을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특히 여성들은 상대에게 유쾌하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그날 나는 가끔은 사랑받는 것보다 존중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85)
중간급 관리자에서 부문 관리자로 승진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승진한 셈이었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중략) 그날 밤 남편 프랭크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을 때, 승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울었다. (중략) 내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엔지니어링 부문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곳이 편안했다. (중략) 그런데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운 것은 두려워서였다. (88)
때로는 선택에 위험부담이 클수록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만한 좋은 기회가 생긴다. 또 언제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증명해 보이게 된다. (90)
9. 눈물을 아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편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면서 자녀를 갖고 싶지 않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105)
그는 계속해서 내게 남편에 대해 물었다. 그의 직업이 뭔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그는 남자 동료들에게는 아내나 결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서 혼자 울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운다는 게 화가 났다. (105)
그날 밤 오랫동안 울고 나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울지 않겠노라고. 물론 남이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짓에도 마음을 다치겠지만, 그들의 좁은 마음이나 편견을 내 짐으로 떠안지 않으리라. 인생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특히 그렇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위축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리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이유가 있는 옳은 일에 매진하리라. (중략) 그런 사람들이 다시는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 마음 역시 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06)
또 휴렛팩커드를 떠날 때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1986년 이후 나는 더 중요한 것들 것 위해 눈물을 아꼈다. 가족, 아름다운 자연, 베토벤, 사랑하는 친구, 사람들의 선의, 그들의 지혜, 그들의 슬픔과 승리, 그런 것들을 위해서. (106)
10. 성공의 본질
어떤 직업이든 상대의 말이 그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이것을 놓쳤을 때 그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다. (109)
우린 늘 ‘미디어’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이 언론 기관이나 기계 장치인 것처럼 느낀다. 사실 기자들도 사람이고, 보통 사람들처럼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정직한 기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다. (중략) 기자든 기자가 아닌 사람이든 할 것 없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누구나 좋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자들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사실보다 중요하다. (112)
11. 목적지가 아닌 여정
1988년 1월, 루는 내게 전화해서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MIT)의 슬론 경영대학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대학에는 경영학 분야에서 이학 석사학위를 주는 1년짜리 집중 과정이 있었다. (중략) AT&T는 1년에 두세 사람을 보냈는데, 이 자리를 놓고 여러 지원자가 경쟁을 벌였다. (120)
AT&T에서 부사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80년 처음 입사했을 떄는 이 회사에서 1, 2년쯤 버틸 거라고 생각했다. (121)
슬론에 다닌 것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희생과 선물을 주었다. (121)
가장 개인적인 성찰을 하게 한 강좌는 에이브 시걸(Abe Siegel)에게 배운 ‘권력과 책임에서의 연구’였다. 가장 심오한 경험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를 읽은 일이었다. 원칙을 버리라는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결과 고립과 추방에 직면하게 된다. (중략) 안티고네는 용기 있고 외롭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영혼을 알았고 그것을 지켰다. 윤리적인 선택은 사적인 결정이지, 대중에게 내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안티고네>를 읽은 후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씩 시간을 내서, 나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깊이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새해 무렵에 일종의 ‘연중 점검’을 g는 것이다. 해마다 스스로 조용히 묻는다. 그동안 내가 내렸던 결정에 마음이 편안한지. 내 영혼이 여전히 나의 것인지. (125)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임을. 그 길을 따라서 옮기는 걸음걸음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127)
12. 정면충돌과 이해
어느 조직 심리학자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대로 인정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그 말을 6번은 들어야 한다.” (중략) 새로운 아이디어를 듣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138)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이유에서 이탈리아 출장을 연상했다. (141)
내 옆에 앉은 기생 아가씨와 보낸 시간도 정말 즐거웠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만큼 교육 받은 사람이었다. (145)
오늘까지도 나는 한국이란 국가와 그 나라가 성취한 것에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들과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유머 감각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 (146)
13. 힘의 결과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때, 행동을 이끄는 것은 바로 가치관이다. (152)
사람들은 타인의 힘과 성공을 높이 평가하거나 분개한다. 성공한 강한 사람들은 존경받고 동시에 공격당한다. (중략) 또 어떤 이들은 상대의 성공이 본인의 부족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자기보다 더 성공한 사람들을 질투하기도 한다. 질투와 미움은 열등감이나 부족함의 감정이고, 그런 감정들은 반항심과 불공정한 싸움을 벌이고 싶은 본능을 일으킨다. (153)
14. 변화하려는 마음
사장단이 되고 보니 당장 다른 점들이 생겼다. 사무실이 더 커졌고, 권위도 커졌다. 나는 예전과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예전과 똑같이 봐주지 않았다. (157)
리더가 할 일은 가치를 더하는 것이지, 직원들을 방해하거나 지배하거나 공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다. (중략) 때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직원들은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원인을 짚어내지 못하고 그 결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원인을 찾아서 접근하는 것이 리더가 할 일이다. (163)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과 비슷하다. 새로운 운동 습관, 새로운 식이요법, 새로운 골프 스윙, 새로운 일. 처음에는 무척 어렵다. 부자연스럽고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때로는 포기하고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꾸준히 해나가면, 시간이 흐르면서 새 습관이 점점 수월해지다가 결국 몸에 배게 된다. (172)
더할 수 없이 독특했던 그날 저녁을 떠올리니, 늘 새 도시와 새 학교로 옮길 때마다 향수병을 앓았던 기억이 났다. 방금 떠나온 곳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중략) 그리고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다시 ‘집’에 돌아갈 길이 없다는 점을 깨달으면, 미래와 대면하기가 수월하리라는 것을, (173)
15. 한 장을 넘기며
기업 공개와 관련해서 처리할 문제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우선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포부를 가져야 할지 합의할 필요가 있었다. 직원들이 AT&T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었다. (175)
나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었다. (176)
우리는 몇 주간 밤샘을 밥 먹듯 했다. 많은 것을 배웠는데, 모든 배움이 그렇듯 아주 재미있었다. (179~180)
시간이 흐르면서 협상단은 누가 중요한 문제를 짚어내는지, 누가 시간을 허비하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181)
16. 버스를 타고 앞으로
회사 경영 부문의 선임 부사장을 맡은 지 2년이 되자, 헨리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나에게 소비재 부문의 사장직을 맡아 달라고 했다. 루슨트에서 소비자 통신 장비(주로 무선과 유선 전화기)를 제조하고 마케팅하는 부문이었다. (185)
우리가 내릴 선택은 간단했고 몇 가지 되기도 않았다. 우리는 갖고 있는 것(혹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더 잘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187)
리치는 나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일하는 동기는 돈과 스톡옵션이 아니었다. (194)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상대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핵심을 찔러 표현했을 뿐이다. (201)
17. 고독
1998년 가을은 지독한 시간이었다. 나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두 가지 일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는 것, 또 두 일 모두 나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는 것. (202)
“혹시 누가 아니. 어느 날 네가 휴렛팩커드의 CEO가 될는지.”
(중략) 나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꾸했다. “그건 모른단다, 칼리. 사람 일은 몰라.” (206~207)
가끔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숨을 쉴 수가 없다. 매일매일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 하시도록 매일 노력한다. 어머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지만, 평생의 삶은 축복이었다. 나는 생의 마지막에 어머니가 용기를 내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나 자신을 찾았다. (중략) 어린 시절 이후로 내가 겁내던 것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다른 두려움들은 모두 하찮아 보였다. (209)
18. 채용
이 회사에 대한 기사와 이 회사와 상대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CEO직은 독특한 도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휴렛팩커드는 차고에서 시작해서 실리콘밸리를 낳은 원조 기업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성장하지도, 혁신하지도 않았다. (210)
기업 분할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잠재력을 펼칠 기회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니, 상처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214)
부지런히 조사에 착수했다. 데이브 팩커드의 <HP 방식(The HP Way)>을 네 번째로 읽었다. (218)
나를 HP의 신임 CEO로 선택한 것은 1999년 6월 하순의 회의에서였다. (225)
19. 그거, 아르마니 슈트인가요?
1999년 7월 15일 금요일 오후, 나는 리치의 사무실에 앉아서 사임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리치는 눈물 고인 눈으로 말했다. “칼리, 이제 전 같지 않을 거요. 당신은 루슨트의 영혼인데.” (231)
HP는 깊이 뿌리내린 문화를 가진 관료적인 조직이었다. 이방인은 드물었고 보통은 따돌림당했다.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변화는 내부에서 우러나와야 가능했다. (236)
사람들은 흔히 나를 성이 아닌 ‘칼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내가 ‘너무 야심이 많아서’ 자녀를 갖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특히 마음 아팠다. 사람들은 ‘전업주부’라는 부정확한 묘사로 프랭크의 커리어를 비롯해 우리 가정과 지역사회에 쏟는 그의 기여를 무시했다. (240)
CEO에 부임한 후 처음 며칠 동안 나는 미디어의 논평, 실리콘밸리의 냉담한 반응, 경영진의 의구심, 중요한 이취임을 맞는 이사회의 수동적인 태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휴렛팩커드 직원들 덕분에 기운이 솟았다. 첫날 하루에만도 수백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241)
20. 천 개의 부족들
CEO 업무에도 새로운 일이 주어질 때마다 쓰는 접근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최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는 방법이었다. (243)
나머지 실리콘밸리 전체가 연거푸 커피를 마셔대며 잠을 아끼는 마당에, HP 직원들은 긴장을 풀고 차분해 보였다. 회사 주차장은 매일 오후 4시 반에서 5시면 텅텅 비었다. (250)
언제나 변화에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지 않기 마련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노력하는 데 지쳐서,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제 와서 보면 그때가 좋았던 것 같으니까. (252)
“칼리, HP에는 변화 매개체 정도로는 부족해요. 우리에게는 ‘변화 전사’가 필요하다고요.” 그녀가 옳았다. 또 그녀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몇몇 사람에게 나는 변화의 챔피언이 될 테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이단자가 될 터였다. (253)
“그물망도 없이 외줄타기를 해야 될 것 같네요.” (255)
21. 리더가 되겠다는 선택
자산 구조를 완전히 검토하니,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대단한 능력과 자원을 확보했지만, 그것을 너무 얇게 분산시키고 있었다. (257)
HP는 늘 발명을 축하하는 회사였지만, 이제는 발명품이 나오지 않았다. (259)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순수한 제품의 시대는 끝이 났다. 우리는 독립형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고객들은 시스템과 솔루션을 요구했다. (260)
우리는 더 큰 능력이 있었고, 그러므로 더 큰 포부를 품었다. 승리는 장담한 것 이상의 일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또 ‘우수하다’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267)
22. 변화의 전사
HP 경영 철학은 “준비, 조준, 조준, 조준……”이 되었다는 농담도 있었다. 모든 여건이 완벽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발사하지 않았다. (중략) 모든 준비물을 다 모았을 때는 몸이 너무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었고, 시간은 흘러가버렸다. (275)
변화는 나쁜 게 아니고, 필요한 것이다. 멈춰 서 있는 것은 위험하다. 적응하지 않는 종은 멸종하게 된다. 배우기를 멈춘 사람은 때를 맞이하기 전에 늙어버린다. 적응과 배움을 멈춘 기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다시는 과거의 영광을 얻지 못한다. (277)
사람들은 경쟁적인 메시지를 듣거나, 메시지에 반항하거나, 전혀 듣지 않기 때문에, 나는 원래 계획한 의사소통 양의 10배를 쏟아야 진정한 변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278)
23. 영락없이 똑같다니까
내가 중세사를 공부했던 이유는, 인간성이 어둠과 두려움의 시기를 빠져나와 인간 잠재력을 깊이 믿고 낙관하는 것으로 진보하는 데 매혹됐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인터넷은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즉각적이고, 계급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을 창출했다. (중략) 그 속에서 시대와 지리, 부, 권력, 지위라는 전통적인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인의 잠재력이 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힘, 지식과 정보와 그것들이 연결되는 힘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놀라운 아이디어를 가진 똑똑한 이들이 세계 어디에나 살고 있다. (291)
24. 큰 아이디어, 소소한 세부사항
나는 남성 CEO들이 직원을 해고하면 ‘단호하다’고 칭찬받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내가 해고하면 ‘보복 인사’라는 딱지가 붙었다. (303)
주가는 중요하지만, 내 견해로는 회사의 주가가 너무 중요시되어 왔다. (305)
25. 사슬톱 칼리
2001년 초반 무렵, 나는 경제 침체를 넘어서는 뭔가를 보고 있었다. 우리 산업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순히 주기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조적인 변화였다. (중략) 소비자들은 테크놀로지에 돈을 쓸 의향이 없었고, 돈을 쓸 때는 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 (310)
경제적으로 불황일 때는 회사의 모든 단점이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경제 침체는 회사 경영상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한때 숨겼던 문제들을 더 이상 못 본 체할 수가 없어진다. (315)
우리는 정직해야 했다. 나는 경영진을 비롯해 더 많은 조직과 진실을 말할 필요성에 대해 의논했다. (316)
나는 6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의 손실을 발표하는 CEO가 되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대처했다. (32)
나는 고통을 미루는 것이 조직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믿지 않는다. 직원들을 해고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알려줘야 한다. (중략)
사람들에게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접어드는 데 필요한 도구와 시간을 주는 것 또한 존중의 일부이다. 그해 여름, 나는 해고를 신속하고 품위 있게 처리하기 위해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외부 회사를 고용해서, 관리자들이 직원들을 똑바로 대면하고, 회사를 떠날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조언과 직업적인 원조를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320~321)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런 상황을 신임 CEO의 잘못으로 돌리고 ‘사슬톱 칼리’라는 새 별명을 붙여주었다. (중략) 아이러니컬하게도, 한참 후에 내가 해고된 이유가 인원을 줄이지 못하고 비용을 삭감하지 못해서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321)
다시 한 번 매일 밤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처럼 몇 번이고 거듭 외웠다. 상황이 힘들어질 줄은 짐작했어도, 설마 가족들과 싸움을 벌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30)
26. 최악의 더러운 싸움
2001년 9월 4일, 우리는 계약 체결을 공표했다. (331)
나는 마이클과 연단을 떠나면서, 막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그래도 나는 결국 시작됐다는 것에 안도했다. 지난 9개월에 걸친 분석, 협상, 비밀 유지는 정말로 힘겨웠다. (중략) 내가 예상한 대로, 양쪽 회사 모두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332)
우리에게는 컴팩의 투쟁 정신, 속도, 할 수 있다는 태도가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HP의 품질과 윤리에 초점을 두는 면모가 필요했다. (334)
데이비드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전면 광고를 몇 차례 내서, 내가 경쟁력이 없고 비윤리적이며 적임자가 아닌 이유에 관해 긴 비평을 썼다. (339)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하고 지각이 있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과 정보만 준다면, 그들은 선하고 지각 있는 선택을 한다.
진보의 힘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늘 승리할 것이다. 또 역사의 행보는, 다수가 소수를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HP는 회사의 장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회사이다. (중략) 나는 이것을 위해 싸웠다. 우리가 승리할 줄 알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51)
27. 채택해서 밀고 나가기
HP와 컴팩의 합병은 지금껏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352)
우리는 장단기 기획에 초점을 맞추었다. (중략) 일단 목표들을 정한 후에는 눈도 깜빡 하지 않았다. (355)
가치는 포부이다. 조직원 전부가 매일 그런 가치를 실천하며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속도와 민첩성에 대한 포부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신뢰와 존중과 윤리 같은 근본 원칙을 일부러 깨뜨리는 것은 아주 다르다. (358)
28.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비즈니스에서 실적을 내본 사람이라면 안다. 작전적인 실행은 경영자의 본질이지, 스타일이나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371)
29. 권력 정치
2004년 가을 내내, 회사 내부에는 내가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HP를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그런 기회를 모색하지 않았는데도, 의미있고 도전할 만한 공직을 맡으라는 제의를 몇 번 받았다. 나는 그런 자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유혹을 느낀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지금은 회사를 떠날 시기가 아니었다. (382)
30. 내 영혼을 가졌다는 것
어느 리더에게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호텔방에 앉아서, 내가 모르는 이유로 예상치 못하게 임기가 끝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사회사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유를 말해줄 거라는 기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날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내게 감사 인사도,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정 사항이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405)
인생은 항상 공정하지 않다. 나는 말 그대로 ‘빅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맡은 일을 완수했다. 실수도 했지만, 변화를 이루어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회사와 내가 믿는 것에 내주었다. 나는 힘든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들과 목표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내 영혼을 잃었다는 슬픔은 없었다. (410)
에필로그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한다
사퇴 후, 쓰여진 것이나 말하여진 것을 읽거나 보지 않기 위해 단단히 각오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중략) “체육관으로 가자. 더 이상 초콜릿은 단 한 조각도 먹으면 안 돼.” 어떤 날은 성공했고, 어떤 날은 실패했다. (412)
또 법대를 그만뒀을 때와 같은 들뜬 기분이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내 인생은 내 거야. 내가 선택하는 일을 할 수 있다.” (412)

왜냐하면 내가 책을 읽은 관점 자체가 예인의 질문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하고 읽었어.
1. 난 HP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거기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충분한 정보가 없다.
2. 이 책은 그녀 자신의 자서전이다. 즉, 어느 부분, 충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아니, 그와 같은 생각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정립하기에는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정리하자면, 내가 이 책을 접근한 관점은:
그녀의 결정들이 옳았던 틀렸던
그녀가 어떤 타입의 경영자였던
여성 최초로 글로벌 기업의 CEO로 내정되었고, 거기서 쓰디쓴 실패아닌 실패를 맛본 경영자라면
반드시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에만 포커스를 맞췄던 것 같아.
그리고 상대적으로 내가 내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른 업계의 여성 임원들이 쓴 자서전에 비해서
그리고 피오리나의 자서전 전체 분량에 비해서
오히려 그녀가 여성으로 겪은 어려움에 대한 토로는 적었다는 게 내 느낌이었고.
그럼으로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피오리나가 절제한 부분도 있다고 내겐 느꼈졌고.
만약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부각시키려 했다면
아마 책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만으로도 다 채울 수 있었을거라 생각하거든.
그래서 이건 지금 다시 정리되는 부분인데
결국 그녀가 여성 후배들과 남성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진정 여성들도, 능력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진실로 한 사람의 경영인으로 봐 달라고
책 전체를 통해 호소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쨋든 다시 한 번 책을 정리할 수 있는 문제 제기 고맙워.
근데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니어서 좀 미안한데
이번 책은 워낙 접근 견해자체가 달라서 어쩔수가 없다...
그럼 다음 책 또 기대할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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