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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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개정판을 내며>
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11).
ü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다 (11).
ü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 (12).
ü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 항상 상이성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거대 정부나 거대 기업에 의한 통제를 설파하는 학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는 권한 분산과 실험정신 그리고 공동체 창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3).
ü 그리고 정부와 거대 기업을 유일한 형태의 단체이자 하나의 ‘현대 사회’와 맞먹을 수 있는 세력으로 간주하는 접근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나는 비영이란 공익단체, 즉 ‘제 3 섹터’의 중요성과 핵심적 역할을 강조해 왔다. 이런 비영리나 공익 단체들은 독립성과 다양성을 키우는 요람을 제공하고, 가치관의 수호자 역할을 하며, 공동체에 지도력과 참여 정신을 공급하는 원천이 된다 (13).
ü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도 ‘큰 것이 최고다’라는 말만큼이나 숨이 막히게 만드는 독선이다. 게다가 똑같이 멍청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신의 창조물 속에서 다양성을 봐야 한다 (14).
ü 지금 우리가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는 지식사회는 조직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조직들의 사회 (조직이 여러 개라는 점에 주목하자)는 다양하게 분산된 다중적인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조직 안에서는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구조를 탈피하게 될 것이다 (15).
ü 이제는 조직 설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는 조직 설계를 위해 조직의 임무와 목적, 전략, 환경에 관한 정보를 확보해야 하고, 환경은 사회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15).
ü 이 책은 사회적 초상화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17).
ü 사회 초상화를 처음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19세기의 소설 작가들이다. … 그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19세기 초기 영국 사회의 실제 모습과 느낌,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역사학자나 통계학자는 결코 그 정도 수준의 생생한 표현을 전달 할 수 없으며, 그들이 전달하는 내용은 당시 ‘삶의 질’과도 큰 차이가 있다 (18).
ü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19).
ü 이 책의 마지막 장인 ‘그 밖의 사람들’에서 나는 사회적, 심리적, 감성적 환경의 실제 느낌과 의미를 재창조하려고 시도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에서 실시된 뉴딜 정책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사회, 역사학적으로 유래가 없는 기간으로, 불안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했고 지식사회는 동요했으며 사회적 불균일성과 다양성이 풍부했던 시기다 (19).
ü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20).
<프롤로그: 한 사람의 구경꾼, 탄생하다>
ü 여기서는 주로 내가 살아온 삶의 순서에 따라 인물들이 등장한다 (21).
ü 여기서 다루는 사람이나 사건들은 내게 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전히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로, 기록하고 검토하고 재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과 사건들을 기존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사고 유형에 적용하고, 서로 분리된 채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 시각에 끼워 맞춰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주변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보았다 (22).
ü 당시 나는 군중들에 의해 원치 않는 방식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웅덩이를 돌아서 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즉 거대한 인간집단의 압력이자 집단운동의 물리적 위협이 나를 압도했다. … 나는 웅덩이의 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내 뒤를 따르던 덩치 큰 의과대학생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깃발을 넘겨버렸다 그리고 대열에서 벗어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27).
ü 나는 두 세 시간을 걸어야 했다. … 심한 고독감을 느낀 나는 그들과 합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27).
ü 그 차갑고 떠들썩한 11월의 어느 날, 나는 내가 구경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경꾼은 만들어진다기보다 타고난다 (27).
ü “..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크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별난 생각을 내세워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행동은 절대로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야.” 이것은 구경꾼이 언제나 듣게 되는 충고다. 그들은 언제나 사물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충고는 적절하게 받아들였지만 나는 그 충고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 책도 마찬가지다 (31).
<1부: 사라진 제국 아틀란티스>
할머니: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 준 유쾌한 사람
ü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했다. 똑같이 친근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똑같이 구식 예절에 따라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41).
ü 누군가의 종교를 비웃는 행위는 누군가의 여드름을 비웃는 것만큼이나 무례한 행도잉야. 너도 누가 너를 여드름쟁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쁠거야, 안 그래?” 나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이미 아무도 만자 표시 (나치 표시)를 비웃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60).
ü 모든 가족이 할머니가 초래한 위기에 혼비백산하면서도 모두들 그녀의 순박함과 고지식함, 우둔함에 폭소를 터뜨렸다. “나치즘이 그저 여드름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군요. 하하하 (61).”
ü 나 역시 다른 가족만큼 큰 소리로 웃었다. … 하지만, 할머니가 단지 어리석기만 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61).”
ü 나는 나치당과 여러 해 동안 논쟁을 벌였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증거, 통계수치, 논리적 주장…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먹혀들지 않는 곳에서 할머니는 양심에 호소했고 성과가 있었다. … 물론 할머니는 결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지적이지도 않다. 생각도 단순할 뿐만 아니라 융통성도 없었다. …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할머니가 지식이나 영리함, 지능이 아니라 일종의 지혜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62).
ü 여성의 지위나 남녀간의 관계가 적절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할머니의 사고범위 밖이었다. 그것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남성중심이고 여성은 그런 세상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64).
ü 할머니는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들의 모든 단점을 참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65).
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창녀는 동정의 대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신의 몸을 배역과 인긴, 결국 돈 많은 남편을 얻는 데 사용한 젊은 여배우는 오직 경멸의 대상일 뿐이며 결코 ‘영광’을 얻을 수는 없었다 (67).
ü 무엇보다 저 지방색이 강하고 독선적이며 우스꽝스러운 늙은 여편네는 공동체란 것이 단지 수입이나 서비스나 현대의학의 기적을 분배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동체는 인간을 위한 조직이었다 (67).
ü 직공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만든 세계는 크기는 작고, 범위는 좁으며, 근시안적이고, 숨막히는 곳이다. …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 즉 일과 기능에 대한 존중과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생각해주는 것 등,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가치는 분명히 20세기에는 없어졌거나 부족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68).
ü “젊은이, 당신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를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구려. 당신 차에 낯선 여자가 타고 있으면 당신의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른다오.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거든.” 10분 뒤에 앰뷸런스가 도착했지만 할머니는 관상동맥 출혈과다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69).
헤메와 게니아: 경영의 귀감으로 삼은 괴짜 부부
ü 나는 항상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관념이란 철학자들이 범주화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내게 흥미롭고 다양성을 가진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관념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발전하고,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변화를 일으키면서 무엇인가로 바뀐다 (72).
ü 나도 그에게 따듯한 안부의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감상적이 됐다고 그가 비웃을까 두려워 감히 편지를 쓰지 못했다. 나는 그랬던 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고, 다시는 그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78).
ü 해외 무역부에 들어갔다는 말은, 특히 재무부에 갈 수도 있는 사람이 그쪽으로 갔다는 것은 단지 그가 괴짜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즉, 다른 모든 사람의 뺨을 후려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는 해외무역부에 들어감으로써 가족과 완전히 결별하려고 했으며, 이를 위해 가족에게 가장 크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85).
ü 그는 재무부 대신 해외무역부를 선택했지만 그 부서가 갖고 있는 기본 정책이나 신념에 전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는 할 일이 없었다. 찬성은커녕 오히려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89).
ü 이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그는 케인스가 등장하기 40년 전부터 이미 케인스 학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경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거나 공급 관리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에 수요관리를 생각했다. 그는 정부의 통화와 신용, 화폐 조작이 필요하다고 믿었는데, 당시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따르면 그런 조작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멸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부분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비자의 구매력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단지 그와 같은 혁명적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 수단이나 자료가 1890년대에는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헤메는 체계적인 이론가라기보다 말로써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선지자였다 (90).
ü 그는 유대인을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유대인이 가진 부르주아적 근성과 탐욕적이고 유물론적인 정신은 사회를 오염시킨다고 여겼다. 그에게 유대인이란 종교나 인종적인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정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최대한 비유대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92).
ü 헤메에게는 돈은 물론 가족을 통한 연줄도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사고력만 있었을 뿐이었다. … 사실 그는 생각 자체도 너무 공격적이었다. … 그의 말도 너무 공격적이어서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려놓기 일쑤였다. 헤메는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동원해 스스로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했다 (93).
ü 헤매는 유대인이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유대인 정신을 모두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헤메의 두드러진 경력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고, 실제로 어떤 공무원 사회의 연보를 보더라도 그의 경력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다 (96).
ü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루기 힘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 그건 전부 헤메의 일이 됐지.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불쾌한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으니까 (96).”
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거의 동시에 차관으로 승진했고, 거의 독재적인 권한을 가지고 국가의 모든 재무와 통화문제를 책임지게 됐다. … 여기에 노망한 황제부터 시작해서, 정치계든 군사분야든 적절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가 결국 붕괴될 때까지 효과적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는 헤메의 역할이 가장 컸다. 왜냐하면 4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전비 지불 능력을 유지해낸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99).
ü 헤메의 후임자가 오스트리아의 (아마 유럽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인 요제프 슘페터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헤매와 달리 슘페터는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 재무장관이라고 해도 결국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오스트리아 정계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은 공공부분의 지출에 대한 어떤 삭감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슘페터도 결국 일 년 뒤에 공직을 떠났다 (100).
ü 슘페터는 재무장관 직책을 떠날 때 인플레이션을 멈추는 길은 경제 이론이나 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 그의 비관적 결론은 경제학의 고전이 된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속에 반영됐다 (101).
ü 그 책은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없애거나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그 이유로 정치적 의지의 부족을 들었다 (이 예언은 1946년 당시보다 오늘날의 상황에 더 잘 적용된다 101).
ü 실제로 슘페터가 물러난 뒤에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이 잡힐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있던 사제 겸 정치인인 몬시뇨르 이그나츠 자이펠의 공로였다. 그는 경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고실업의 위험을 감수하고 복지비를 급격하게 삭감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101).
ü 게니아가 잘하는 분야에서 그녀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성취는 여러 가지 면에서 헤매보다 더 뛰어났는데, 훨씬 더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더 풍부한 상상력이 엿보였다 (106).
ü 빈에 정착해서 여성을 배척하는 오스트리아 대학 교육 체계를 쇄신하기로 결심했다 (107~8).
ü 성공을 거둔 모든 활동가들이 그랬듯이, 그녀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오랜 아일랜드인의 정의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상대방을 신나게 두들겨 패 의식을 잃게 한 다음 기꺼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111).
ü 우리 아버지는 그녀가 고용한 첫 번째 선생이었고, 헤매가 그 뒤를 이었다. “도대체 게니아가 무슨 말로 아버지를 설득했죠?”… “너도 게니아가 내게 설득 같은 것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잖니. 그녀는 자신의 학교에서 가르치라고 통보했을 뿐이야 (111).”
ü 게니아는 대단히 강하게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선생이었다. 긴 세월 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오직 마사 그레이엄만이 게니아와 비슷한 영향력으로 현대 무용에 입문한 학생들을 강력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114).
ü 게니아는 독자적인 이사회를 갖고 있는 학교 재단을 설립한 다음 자신의 학교를 거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학교의 운영을 전문적인 관리자의 손에 맡겨버렸다 (115).
ü 그녀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에게 대학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 달성되자 학교는 더 이상은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다 (116).
ü 대신 그녀는 특정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충족시키기 위한 온갖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16).
ü 1915년부터 ‘가족 캠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 그 다음엔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이 문제가 됐다. .. 그 다음에는 전시자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럽 최초의 어린이 캠프를 개설했다. … 1917년부터 시작된 기아상태가 오스트리아를 휩쓸기 시작했을 대 게니아는 공동 식당을 설립했다 (116~7).
ü 베를린의 공동 식당이 원래의 사명을 완수해서 그곳을 폐쇄하게 되면서부터 게니아는 자신을 ‘사회운동가’의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는 활동들 쪽으로 점차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된다. 아무런 대가나 직함은 없지만 고도로 효과적인 ‘옴브즈맨’으로서 개인을 대신해 관료적 형식주의와 경직성에 대항한 것이다 (117).
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119).
ü 결과적으로 게니아는 결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관계 당국에게 성가신 존재일 게 뻔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개인적인 호의를 베푸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접근법을 택했다 (119).
ü 헤매외 결혼한 그 무렵부터 그녀는 ‘살롱’을 운영했다 (123).
ü 미국에는 실질적으로 살롱이라는 개념이 없다. … 살롱은 그것을 발명해 낸 국가인 프랑스에서만 유행했던 것이다 (124).
ü 그녀의 살롱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속성을 게니아가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롱도 오페라나 발레를 비롯해 르네상스 이후의 다른 부르주아적 공연 예술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공연예술의 한 형태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24).
ü 살롱은 여성에 의해 운영 및 관리됐고 여성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됐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들이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살롱이 고대의 비밀스런 종교의식이 제공했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한 것 같다. … 이런 종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남성이 주도했던 문화에 여성의 영역이 생겼던 것이다 (125).
ü 게니아는 점점 더 규모가 커지던 자신의 학교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아테네는 게니아의 가장 중요한 공동 경영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성장하게 됐다. … 아테네와 헤메가 연인으로 발전했다 (133).
ü 헤메는 아테네와 결혼하기 위해 게니아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테네는 일생 동안 헤매의 곁에 남아 있기 위해 세 가지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헤매의 청혼은 게니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134).
ü 역사적으로 볼 때 살롱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처음 생긴 유형은 ‘프레시외즈 Precieuses (17세기 전반에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했던 잘난 체하는 취미와 경향을 가진 여성들을 부르던 말), 즉 루이 14세 시절 파리의 ‘블루스타킹 (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자처하는 여성들을 경멸적으로 이르는 말. 풍습에 맞지 않게 청색 모직 양말을 신은 데서 연유됐다)’ 의해 생겼다. 이곳은 여성에 의해 운영됐으며 배우의 역할과 대화 상대의 역할을 하기 위한 여성들이 상주했다. 이런 살롱이 헨리 제임스가 1880~1890년 런던에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곳이다 (134~5).
ü 다른 유형의 살롱은 볼테르의 정부가 최초로 시작했다고 하며, 여성 관리자가 남성 스타를 주연으로 삼는 형태를 취했다 (135).
ü 게니아의 살롱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 일단 게니아가 자신의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가 앉아 있는 긴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 방문자는 그것이 이제부터 자신들을 대상으로 ‘촬영’이 진행된다는 신호임을 알고 있었다 (135).
ü 행사의 여주인인 게니아는 지금까지 내가 봐온 사람들 가운데 최고였다. 그녀는 결코 손님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재능을 끌어낼 수 있도록 언제나 친절하고 사려 깊게 행동했다 (135).
ü 어떤 손님이든 자신의 공연을 수행하는 사람은 다수의 잘 훈련된 인물들의 지원을 받았다. 게니아의 방에는 ‘합창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법으로 무대의 배경처럼 가벼운 여흥을 제공했던 것이다 (136).
ü 살롱에는 믿을 만한 조연 배우들도 있었는데, 적절한 질문을 던지거나 주연 배우를 응원해 주거나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일에서 그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136).
ü 마지막으로 살롱의 ‘스타’가 남는다. 하지만 그들이 유명인사인 경우는 벌로 없었다. … 그가 유명해서 대담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출현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다 (137).
ü 게니아의 살롱에서는 누구라도 스타가 될 기회를 갖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무대에 앉았던 때는 아마 열네 살인가 열다섯 살 때였던 것 같다 (139).
ü 내가 교훈을 끝냈을 때 헤메가 특유의 목소리로 뱉어낸 말은 내 생애에서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된 교훈이 됐다. “통계치를 다룰 때는 명심해. 절대로 그것을 신뢰하지만. 그 통계를 집계한 사람이 네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어떤 경우에도 통계 수치는 의심해봐야 해 (140).”
ü 게니아는 감수성이 적었는데, 사실 그녀의 무감수성은 위대한 자질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런 특성 때문에 그녀는 어떤 조롱이나 비평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142).
ü 호사가들이 비난한 대로 그녀에게는 원칙이 없었다. … 교육의 중요성을 믿었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을 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학교는 여성의 평등으로 향하는 약간의 전진에 불과했다 (144).
그녀에게는 어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이념도 없었다. … 당시 취리히는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무정부주의와 신지학, 시오니즘에 이르는 온갖 정치사상의 온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특정한 필요성과 그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145).
ü 그녀를 인터뷰하며 사람들이 원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다. … “그것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원칙이란 내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야.” 이는 절대주의적 세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이단이다. 교육과 심리, 환경, 경제, 정치, 심지어 인종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이상적인 미래나 ‘절대 다수를 위한 선’이라는 망상을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146).
ü 왜 우리는 헤메와 게니아에게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가? 그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간이다. .. 아니 그보다는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업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147).
ü 나는 1939년 <경제인의 종말>에서 나치가 어떤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유럽에서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지적했던 것 같다 (153).
ü 당시에는 찰스 린드버그의 표현처럼 모든 것이 “과거를 향한 물결”이 되고자 기를 쓰고 있을 때, 나치즘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향한 물결”이었던 것이다 (153).
ü 젊은 시절에 나는 본능적으로 ‘전쟁 이전’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가능한 빨리 빈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153).
ü 미국에서조차 ‘이전’ 증후군은 존재했다. …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한정됐다. 반면 뉴딜의 미국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대공황 이전’ 증후군이 미국인의 상상력을 장악하고 마비시키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유럽의 ‘전쟁 이전’ 증후군이 유럽인의 의지와 상상력을 장악하고 마비시켰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미국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54).
ü 물론 ‘전쟁 이전’이란 것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누구도, 그리고 그 어떤 설명도 그 근처에 접근하지 못했다. … 여기서 ‘누구도’는 게니아와 헤메를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154).
ü 그들이 무엇을 만들어냈고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든, 그것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유주의 시대의 환영이자 문명화된 도시의 환영이다. 그런 도시는 그들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가난하고 비좁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154).
ü 그들이 품고 있던 ‘전쟁 이전’의 환영에서는 천박하게 경제적 실체를 따지지 않았다. 실제로 게니아의 살롱에는 경제계의 인물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두드러지게 부각됐을 정도였다. 그 곳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함께 살면서 완벽한 우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니아의 살롱에 있는 사람들은 인종에 대한 아무런 차별없이 잘 지냈다. … 그것은 아테네아 헬무트 몰트케, 도로시 톰프슨의 지성이자 아름다움이었다 (155).
엘자와 소피: 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ü 선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신의 재능 가운데 가르치는 재능이 포함돼 있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학생에게 학습을 프로그램해서 넣는 방법을 알고 있는 교육자가 있다 (158).
ü 그럼 지금까지 합의된 내용을 기록하자꾸나. 그래야 너하고 내가 네 목표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지. … 그리고 나는 네게 준 학습장의 진도표와 똑 같은 것을 내 책상서랍에 보관하고 있겠다 (161).
ü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수의 천사처럼 우리를 사정없이 야단쳤다. 우리가 특별히 잠재력을 가진 분야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 나의 경우는 작문이 거기에 해당됐다 (166).
ü 그녀는 조금도 ‘아동중심’적이지 않았다. 사실 아동이란 개념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아동의 학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166).
ü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숭배했다 (167).
ü 우리의 장점을 발견하는 일에 관한 한 미스 엘자는 신이었으며… (167).
ü 미스 엘자와는 대조적으로 미스 소피는 전적으로 아동 중심적이었다. … 심지어 ‘남성’적인 모습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하는 다 큰 5학년 남학생들도 그녀의 품에서 훌쩍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67).
ü 미스 소피의 얼굴에는 나의 웃음에 답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이 그녀가 보여주는 유일한 칭찬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완벽한 희열 그 자체였다. … 순간적인 깨달음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을 겪었을 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172~3).
ü 미스 엘자가 소크라테스적 문답법을 완벽하게 적응했다면, 미스 소피는 선의 달인이었다 (174).
ü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 때문에 나는 가르치는 일이 똑 같은 일이나 반복하고 있는 평범한 교사들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80).
ü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스스로 수업을 끔찍하고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181).
ü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자신을 연마하는 데 게을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문적인 작가가 별 생각 없이 빠져들게 되는 위험이다. 나는 자신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181).
ü 나는 그녀 (소피) 덕분에 장인정신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게 됐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작업의 기쁨과 노동에 대한 존중이 어떤 것인지 일생 동안 지속되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182).
ü 미스 엘자는 공부에 필요한 규율과 계획을 세우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전수했다 (182).
ü “사랑스런 릴리, 너도 느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 두 작품을 정말 잘 연주했다. 하지만 너는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지 않더구나. 단지 네 귀에 이렇게 들려야 한다는 식으로 연주했지. 그건 진실한 연주가 아니란다 (185).
ü 슈나벨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슈베르트의 안단테를 자신의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릴리는 ‘갑자기’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186).
ü 좋은 선생은 연예인과 같고 연예인에게는 관객이 필요하다 (191).
ü ‘선생 관찰’을 통해 처음에 도달했던 결론에 따르면, 선생들은 어떤 유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옳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르치는 능력은 재능이고, 좋은 선생은 그 재능을 타고 났다 (193).
ü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다른 종류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그들은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해 가르침을 전수한다 (193).
ü 그들은 개개의 학생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기 위한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에 비로소 그들은 학생들의 단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193).
ü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는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 그들은 효과적 학습을 계획할 뿐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학생을 만나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194).
ü 사실 타고난 선생은 자신의 재능에 교육법을 추가함으로써 아주 쉽게 더 훌륭한 선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 뒤에 그는 만능선생이 되는데, 여기서 만능선생이란 대규모 강연장이든 소규모 교실 수업이든, 초보자든 석사과정이든 어떤 조건에서도 뛰어난 교육효과를 거두는 선생을 의미한다 (198).
ü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학습’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델피의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고 했던 것이다 (198~9).
ü 하지만 소피스트들이 거의 2000년 동안을 지배했고, 바로 그들이 가르치는 일을 가르치는 게 가능하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승리의 결과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등교육에 대한 맹목적 신앙이다 (199).
ü 서양 전통에서는 기술로서의 가르침에 집중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교훈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199).
ü 가르침과 학습은 인지적이며 동시에 행동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특별한 요소를 더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열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열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200).
ü 가르침과 학습은 플라톤의 에로스, 즉 그가 <향연>에서 언급한 참된 실재를 향한 갈망이다 (201).
프로이트: 프로이트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
ü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거의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첫째, 프로이트가 평생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거의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는 것. 둘째, 반유대주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 셋째, 빈에서 살던 시절에 빈 의학계가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완전한 허상이다 (205).
ü 토마스 만은 프로이트이 여든 살 생일축하 자리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분석은 소설이라는 예술에 그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219).
ü 프로이트가 문화와 문학, 종교와 예술에 힘있고 창의적이며 자극제가 되는 비평가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영혼에 창을 냈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치료가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219).
ü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이 치료라는 것을 주장하려 했고, 대부분의 빈 의사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이 ‘학문’이라기보다는 ‘시’라고 평가되는 데 아주 예민했다 (219).
ü 여기서 한 가지 사실만은 아주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무시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고, 그러고 나서 그를 거부한 것이다 (220).
ü 프로이트는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사람들은 종종 금세기의 성 개방을 프로이트의 공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프로이트 자신은 그런 인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223).
ü 프로이트가 주장한 억압과 신경증을 일으키는 성적 욕구는 문화나 사회적 관습과는 상관이 없다. … 그것들은.. 성인과 아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224).
ü 프로이트 시대 빈에서 억압의 대상이 됐던 것은 성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은 이미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언급돼서는 안 될 대상이기도 했다 (224).
ü 빈곤 신경증은 끝내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이나 수입이 충분치 못한 것에 대한 끝없는 걱정의 형태로 나타난다 (227).
ü 프로이트와 같은 중앙 유럽 (특히 오스트리아) 유대인 세대는 문화나 정체적,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독일 국민성을 지니려고 전심으로, 그리고 격렬히 노력했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보다 더 의식적으로 독일을 지향한 사람은 없었다 (228).
ü 끊임없이 독일 시인과 작가들을 언급하고, 독일 김나지움의 인문주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고, 바그너주의를 강하게 따르고, 독일의 식자층 인문주의자의 미학 (이들의 취향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 의해 형성됨)을 추구하는 등 독일 문화를 그렇게나 지향했음에도, 프로이트 학파의 멤버들은 강한 유대인 성향을 벗지 못했다 (228).
ü 하지만 비유대적인 독일 문화에 대가인 프로이트는 이를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 탓을 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했고, 따라서 유대인 차별과 박해라는 프로이트의 실언이 나온 것이었다 (229).
ü 프로이트는 죽는 날까지 정신분석학이 엄격히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30).
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 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 (230~1).
ü 프로이트는 분명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융의 동양적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 프로이트는 자신이 위태롭지만 세심하게 잡아놨던 종합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231).
ü 프로이트는 하나의 주장에 치료를 위한 과학적 방법과 우주론 모두를 담아야만 했다. … 하지만 프로이트 세대와는 다르게 우리 세대는 양립할 수 없는 우주로 나누어진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232).
ü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논의하게 되는 순간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의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 과학적 이론 및 치료법과 인간의 인성 및 철학이라는 신화를 한데 포함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이중적 특성을 논의하는 순간에 말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무시함으로써만 통합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빈 의사들을 무시하기 위해 빈 의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척해야만 했던 것이다 (232).
ü 현실의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다. 허상보다는 현실에서 더욱 위대한 그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 불편한 모든 질문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세계와 영혼의 암흑 세계 사이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의 이론은 종국에는 무너져버리고 말 약한 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좀 더 매혹적인 이론인 동시에 인간적 감동을 주는 이론이기도 하다 (233).
트라운 트라우네크: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ü “그건 내가 늘 꿈궈오던 자리였고, 게다가 나는 그 일을 맡을 준비도 되어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맡을 수 없었어. 나는 단지 내 어린 시절 친구들, 그리고 같은 이상을 갖고 있던 동지들의 죽음을 대가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던 거야 (235).
ü 오스트리아 제정이 붕괴한 뒤 이혼과 재혼이 합법화됐다. 그래서 벡작은 정신이상인 부인과 이혼하고 미스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마리아가 거절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가톨릭 신앙을 버렸지만 백작은 여전히 신앙을 지키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 때문에 백작이 종교적 믿음을 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241~2).
ü 나는 그 분에게 법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형벌의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라는 것이 삼촌의 답이었다 (252).
ü 인류 역사를 통틀어 문화나 문명, 법조문에 상관없이 사형과 사지절단, 추방, 구금, 벌금 등 형벌이 전부 똑같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어떤 문화나 문명이든 반드시 형벌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253).
ü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 (254).
ü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대와 잃어버린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를 새로운 사회를 향한 길잡이로 봤어. 우리 가운데 마르크스를 읽거나 경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지. 우리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평화였어 (257).
ü 사회주의는 평화를 위해 헌신했지. 바로 그게 당시 우리가 사회주의자가 돼야 했던 이유야. 우리는 평화를 이룩했다고 생각했었어 (258).
ü 세계대전의 책임을 놓고 군인과 정치가, 사업가들을 비난하는 게 요즘 세태라는 걸 너도 알 거다. 하지만 진정으로 전쟁을 원했던 사람은 바로 위대한 사회주의 대중이었어. 그들은 사회주의를 완전히 때려치웠지. 그리고 조레스가 이미 경고한 유럽의 ‘완전한 침몰’을 초래한 거야. 그것으로 사회주의도 종말을 고했고. … 저 밑에 로마의 말도 안 되는 무솔리니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거야 (264).
ü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을 파괴했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쟁이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거야. 전쟁으로 한 세대의 지배계층이 사라져버렸어 (265).
ü 때때로 나는 쓸모없이 부서진 내 육체와 함께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심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기꺼이 생을 마감하고 싶어질 정도니까. 단지 마리아가 아직도 나를 원하지만 않았다면… (267).
ü 사회주의는 1914년 8월의 총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 사회주의 대중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포기하고, 그 대신 열광적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지들 간의 상잔인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268).
n 민족이 이념을 우선하다??
ü 그것은 미래의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종말이었다. 비록 영원히 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세대 전체에 관한 한 말이다 (268).
ü 그 이후로 사회주의적 이상과 권력의 실체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결국은 권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사회주의의 약속과 민족주의의 열정 사이의 투쟁에서 언제나 민족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268).
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부활한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독재와 오래된 구호 뒤에 숨어 있는 노골적인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 (269).
ü 오늘날 제1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럽의 지도층을 제거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269).
ü 영국의 몰락이 빅토리아 여왕이나 에드워드 7세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한 지도층의 전멸과 생존자의 의욕상실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270).
ü 영국이 가장 큰 손상을 입었던 이유는 분명,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의 지도층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유일한 지도층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데 있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과 나폴레옹 재위 및 부르주아 정권들의 지도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자신의 지도자를 단지 한 계층에서만 찾지 않아도 됐다. 독일에서도 두 계층이 지도력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271).
n 한국의 근대기와 흡사: 일제 강점 이후, 미국은 또 다시 그들을 사회 지도자 계층으로 흡수할 수 밖에 없었다. 사회의 다양성이 얼마나 필요한지! 현대에도 위험성은 도사리고 있다. 친미 일변도의 식자층만을 양상해서는 안 된다.
ü 지도층이 감소 및 붕괴, 신뢰를 잃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것은 분명 영국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프랑스에서는 지적으로 교육을 받은 ‘그랑 제콜’ 출신의 ‘기술 관료’들이 지도층 자리를 메웠다. 독일에서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각종 조직의 관리자들과 기업과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적법한 지도자 집단으로 부상했다 (272).
ü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과 마리아 뮐러도 탈출했다. 독일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빈으로 행진해 왔던 바로 그날, 그들은 조용히 동반자살했다 (275).
<2부: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폴라니 가: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ü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그러니 카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 (285~6).”
ü 폴라니 가는 (아버지와 네 자녀)… 19세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자유를 추구하되 부르주아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번영을 이루되 경제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를 지향하되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286).
ü 그들은 또 가장 생기 있고 호기심과 활력이 충만한 가족이었다 (286).
ü 그 (둘째 형 아돌프)가 브라질에 매료됐던 것은 유럽의 ‘타락해 가는 자본주의’와는 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인디언이 섞여서 현대적이면서도 부족적인, 자유로우면서도 개인주의적이지는 않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내는 다인종 사회를 기대했던 것이다 (291).
ü 그는 더 이상 브라질이 미래의 사회가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 “브라질은 또 다른 일본이 될 거야. 서구화됐지만 그렇다고 서양도 아닌 국가 말이야. 그러다 마이애미의 문화적 변방이 되겠지 (292).”
ü 무지가 공적인 생활을 한 몇 년 동안 쏟아낸 팸플릿과 잡지, 기사, 연설 역시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키부츠의 탄생에 한 역할을 했다 (293).
ü 오펜하이머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그러나 완전하게 사회주의적인 키부츠의 원형과 유대인 사회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데 이용했던 것은 고귀한 문화와 소박한 생활상을 지닌 전원적이고 평등한 농민 공동체를 생생하게 묘사한 무지 폴라니의 소논문이었다 (294).
ü 카를은 무지와 마이클 중간에 태어났다. … 카를은 예순 살이 다 된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자신의 창조성을 꽃피우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296).
ü <위대한 변환>에서 폴라니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국 사회와 경제를 바꾼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 영국 사화와 경제를 바꾼 것은 재화의 거래와 자본의 교환을 넘어서 또 다른 두 가지 생산 요소인 토지와 노동, 특히 고용과 사람들의 생계 문제를 포함하기 위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지닌 시장 시스템이 확대된 때문이다 (303).
ü 카를에게 <위대한 변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와 그가 개발한 사회의 이론적인 통합 모델이었다. 시장만이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또한 가장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304).
ü 문화인류학과 경제선사학에서 카를 폴라니는 권위자가 됐다 (305).
ü 그가 경제사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해답이었다. … 고대로 파고들면 들수록 시장이 없는 사회는 더욱 더 찾기 어려워졌다 (305).
ü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실패 때문이었다 (309).
ü 그들의 실패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절대적인 하나의 시민 종교에 대한 탐구, 완전한 또는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실패가 나타내기 때문이다 (310).
ü 당시 카를은 미온적인 타협이라고 비판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하고 견딜 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자는 것이 <산업인의 미래>에 녹아 있는 내 의도였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자유를 지키게 될 것이다 (310).
ü 이는 사회 그 자체가 부수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쇠퇴해 가는 사회의 시대에 절대적으로 옳은 종교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종국에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사회의 조직도 그럴 수 있음을 의미한다 (310).
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초월하는 대안을 찾으려 했던 명석한 폴라니 집안의 실패 역시 절대적으로 옳은 사회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것에 대한 예고일 수도 있다 (311).
크레머: 키신저를 만든 외교 정치 고문
ü 크레머는 옛 프로이센의 이상에 동참한 것이다. … 그는 오래 전에 없어진 프로이센의 이상을 부흥시키는 것만이 독일과 유럽을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320).
ü 크레머는 ‘추한 독일인’을 증오하고 ‘선한 독일인’을 존경했지만, ‘선한 독일인’이 ‘추한 독일인’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322).
ü 여러 해가 지난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는 크레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나치가 아니며 나치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만 했다 (323).
ü 크레머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는 외부적인 힘없이는 히틀러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독일을 떠났다 (324).
ü 자신은 인생에 딱 두가 야망만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나는 육군 참모총장의 정치자문이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외무장관의 정치적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324).
ü 크레머는 키신저를 발견했고 키웠다. 사실상 그는 크레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329).
ü 우리는 직관적으로 서로가 추구하는 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똑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도 금세 알게 됐다. …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게끔 만들었다 (331).
ü 내가 정치적인 이단자로서의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크레머는 그 누구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내 관심사는 그의 관심사와 같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 자신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331).
ü 어떤 토론이든 크레머의 주장은 딱 세 가지로 요약됐다. 이 세 가지 주장이 그의 정치 철학을 형성했고, 나아가 키신저의 정치 철학을 형성했다 (332).
n 첫째는 외교정책이 국내 정책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은 한 국가의 존립을 결정한다. 국가의 존립이 보장되고 나서야 비로소 국가는 헌법과 법률, 사회정의 그리고 경제를 생각할 수 있다.
n 나는 국가의 존립이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당시 (현재는 더욱 더 그렇다) 나는 외교 정책이 절대적으로 언제나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국가나 제국은 외세의 침략이나 정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에 의해서도 파괴된다. 국내문제를 경시하는 외교정책의 대가들이 사용한 바로 그 수단이 궁극적으로 나라의 쇠락을 가져왔던 것이다. … 17세기 프랑스의 리슐리외, 19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그리고 특히 19세기 초 비스마르크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된다.
n 내가 모범으로 삼은 이는 엘리자베스 세 때 영국의 위대한 대신이자 훌륭한 외교관이었던 제 1대 세실이었다. 그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국가존립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했지만, 언제나 외교 정책과 국내 정책의 균형을 유지했고, 양자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양자 간의 거래와 타협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사실 나는 이런 토론을 통해 정치를 최적화의 예술로, 손해를 최소화하는 거래를 모색하는 방안으로 깊이 생각하게 됐다.
n 두 번째 주장은 대외 문제에서는 힘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힘이란 정치적인 힘, 궁극적으로는 군사적인 힘을 의미했다. … 크레머는 정치가가 기획이나 정책을 수립할 때는 경제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아주 작은 역할, 즉 단역을 맡겨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 역사에서는 기초로 ‘피보호국’을 두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예가 무궁무진하다. … 이를 근거로 크레머는 열강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외교 정책만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n 나는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이런 일반 통념에 따라 행동한 미국의 정치가 가운데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나는 힘과 이데올로기 외의 다른 요인들, 예를 들어 경제 같은 요인들이 고려돼야 하며, 아울러 세력 균형이란 강대국과 중간 국가를 모두 통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35).
ü (그는) 외무장관은 위대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대외문제의 처리는 최고의 정치수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천재가 필요했다 (336).
ü 디즈데일리는… “불쌍한 독일이여, 비스마르크는 늙었으니 오래 가지 못하리라. 그가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그 자리를 소심해서 아무것도 못하거나, 아니면 너무 멍청해서 자신이 비스마르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해병 대위로 대신 채우려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독일은 결국 길을 잃은 꼴이 되고 말리라 (336~7).”
ü 역사 서적을 읽어갈수록 나는 천재적인 외무 장관이 나라에 큰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프랑스는 리슐리외를 극복하지 못했다. …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 때문에, 독일은 비스마르크 때문에 사멸했다 (337).
ü 그 옛날 크레머와 나눈 긴 대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인물이 지니는 패러독스를 인식하게 됐다. .. 예술이나 과학과는 달리 공적인 일에서는 개인적인 성취 외에도 연속성이 필요하다.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대한 사람은 자기 뒤에 공백 상태를 남긴다 (337~8).
ü 엘리자베스 1세 때의 세실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우수한 동료들을 포진시켰고, 훌륭한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아들을 준비시켰다. 조지 워싱턴은 기라성 같은 후계자들을 줄줄이 남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합참의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 역시 이 문제를 해결했다 (338).
ü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리슐리외나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같은 ‘천재 외무장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프리츠 크레머가 발견해서 가르친 헨리 키신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천재 외무장관’이었다 (339).
ü 크레머와 키신저가 힘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중간국가를 배제한 것이 타당한지, 또는 경제력을 중요한 요인으로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옳은지 평가하기 위해 기다려야 할 필요는 없다. 키신저가 크레머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 일본을 거절한 일은… 엄청나면서도 불필요한 실책이었다. 왜냐하면 산업의 힘으로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 지역의 ‘강대국’이 됐기 때문이다 (341).
ü 키신저의 경험이 뭔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은 ‘천재 외무장관’이라는 원칙이 오류라는 것, 사실은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342).
ü 세력 균형의 정책이 필요하다. 중간 국가를 동반자로 통합하고 힘이라는 정의에 군사적인 잠재력 이외의 다른 요인들을 포함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리더십은 영리함이나 기교가 아니라 단순함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342).
헨슈와 셰퍼: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ü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한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셰퍼처럼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 (344).
ü 베르톨트를 만난 다음 날 나는 나치가 나와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게 하고, 나 또한 나치와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게 할 책을 쓰기 시작했다 (348).
ü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지라도, 나 자신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던 것이다 (349).
ü 나치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통제하는 것이 바로 독일 하계 전체를 통제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350).
ü 나는 가끔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해로울까를 생각한다. … 권력을 탐한 헨슈의 죄와 셰퍼의 자기 과신과 오만의 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쁜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죄는 아마도 이 두 가지 고전적인 죄가 아닐 것이다.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 (364).
브레일스포드: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ü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절대로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심이었다 (367).
ü 보어 전쟁은 노엘 브레일스포드를 학문의 전당에서 끌어내 정치판으로 몰아 넣었다. 그는 양심의 문제로 전쟁을 몹시 반대했다 (370).
ü 영국의 주요신문들 가운데 <맨체스터 가디언>만이 보어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스콧은 브레일스포드에게 <맨체스터 가디언>의 외교 담당 논설위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국가적인 인물이 된 것은 바로 이 일을 맡으면서였다 (370).
ü 10년 후 발칸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맨체스터 가디언>의 종군 기자가 됐다. … 1012년에서 1013년 사이에 벌어진 발칸 전쟁이 지금은 역사서적의 각주 정도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두가 예상하고 두려워했던 전 유럽 전쟁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다. 25년 후에 일어난 스페인 내란이 1930년대의 세대들에게 그렇게 비추었던 것처럼 말이다 (371).
ü 발칸 제국에서 보낸 2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371).
ü 브레일스포드는 자유주의 소수파로 발칸 전쟁에 갔다가 사회주의 소수파가 되어 돌아왔다. … 발칸 제국에 가기 전에 브레일스포드는 톨스토이를 접한 것이 분명하다 (373).
ü 브레일스포드는 농촌사회학자가 되지는 않았다. .. 농촌사회학과의 조우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로, 즉 17세기 디거파나 평등파 같은 영국의 소수 전통인 공동체적 종교사회주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374).
ü 그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유약함이나 명석함을 경멸했다. .. 마르크스에 싫증을 느꼈으며 경제학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375).
ü 그의 사회주의는 역사의 과학적 법칙보다는 신앙과 도덕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머리나 재력의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가슴의 사회주의였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외톨이였다. 하지만 페이비언주의자나 블룸즈버리 그룹, 노동조합주의자 또는 마르크스 주의자보다는 더 오래된 영국의 전통을 대표했다 (375).
ü 그것은 프롤레타이라의 결속보다는 동정심을 호소하는 전통, 부자에 대한 보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전통, 정부의 행동보다는 개인적 변화, 그리고 번영보다는 존엄성의 전통, 힘보다는 양심의 전통이었다. 근본적인 소수 의견의 전통이었다. … 그는 양심이었다 (376).
ü 1913년이 저물어갈 무렵 발칸 전쟁이 끝났다. … 그리고 몇 달 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브레일스포드는 즉시 전쟁을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376).
ü 그 때문에 <맨체스터 가디언>을 사임해야 했던 브레일스포드는… 자기처럼 전쟁을 반대하는 소수파 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쳤다 (376~7).
ü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 년도 안 돼 전쟁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반대한 사람은 영웅이 됐고 노동당은 의기양양하게 지배력을 되찾게 됐다 (377).
ü (지역구 선거에서 개인적으로) 선거에서 패배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방문객이 그를 찾아 왔다. … 그의 이름은 자와할랄 네루였다 (378).
ü 그 일을 계기로 브레일스포드는 1920년에 인도의 독립을 지지한 최초의 영국인이 됐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핵심적인 지지자가 됐다 (378).
ü 브레일스포트에게는 영국의 인도 통치가 인도를 위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가 요점이 아니었다. 그에게 인도의 독립은 영국의 양심 문제였다 (379).
ü 나는 기질적으로 구경꾼이었고 그는 활동가였다.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나의 접근 방법은 브레일스포드의 접근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떤 주의나 신조가 구제를 표방하고 나선다 하더라도 나는 그 무렵 이미 사회에 의한 구제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383~4).
ü 브레일스포드는 공산주의에 마음이 끌려본 일이 전혀 없었다. …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꾸준히 지지를 얻는 것을 지켜보면서 점차 소련공산주의를 파시즘과 나치즘을 상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됐다 (384).
ü 그는 공산주의자에게 그들의 관념적 ‘순수성’을 단념하고 파시즘을 지지하고 물리치는 데 더 치중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1970년대의 용어로 말하면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보다는 ‘유로코뮤니스트’가 되라고 촉구했다 (385).
ü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싸우는 것보다는 비공산주의 좌파를 약화, 파멸시키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잇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386).
ü 노엘은 그 서문에서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 공산주의를 실패작이라고 부름으로써 공산주의와 깨끗이 결별했다 (393).
ü 20세기 현실의 반대자인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효과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397).
프리트베르크: 19세기의 탁월한 개인 금융업자
ü “자네는 이 회사가 향후 5년 동안 매출과 이익 모두를 매년 10퍼센트씩 올릴 것이라고 예측했군. 이런 예측은 이 회사 경영진에게서 나왔을테고.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그게 얼마간이든 매출과 이익을 함께 올리겠다고 약속하는 경영진은 사기꾼이거나 멍청한 인간들이야. 대개는 둘 다이기 십상이지 (411).”
ü “바로 그거야. 그가 자네의 제안서를 이해하면 그대로 할 걸세. 그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자네 제안서가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야. 어떤 일이든 반드시 멍청한 사람이 다룰 수 있어야 해. 결국 일은 늘 멍청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거든 (412).”
ü 일단 상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사가 효과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이 하급자로서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고 나자 해결 방안은 아주 간단했다 (417).
ü “소매에는 오직 두 가지 원칙만 있네. 첫 번째 원칙은 ‘2센트 에누리에 안 넘어오는 고객은 없다’이고, 두 번째 원칙은 진열해 놓지 못한 상품은 팔 수 없다’는 거지.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424).”
ü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 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이야 (424).”
ü 헨리 아저씨는 미국 소매업계의 중요한 혁신자였다. 그는 시어스 로벅보다 훨씬 먼저 업계 최초로 “고객의 만족을 보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불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방침을 채택했다 (423).
ü “고객의 불만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해 (426).”
ü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베른하임 백화점은 미국의 다른 소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종업원 좀도둑이 기승을 부렸다. … 베른하임 백화점에서는 어느 정도의 감소량이 정상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네. 그러고는 6개월마다 시행되는 재고조사에서 정상적인 감소량보다 상품이 적게 줄어든 매장의 직원들에게는 후한 보너스를 지급했지. 또한 직원들 월급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상품을 점포 내 어떤 매장에서든 공짜로 가질 수 있게 했고, 그보다 약간 더 많은 액수 한도 내에서는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해주었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매장에서 정상적인 감소량에도 미치지 못했어. 직원들이 서로서로 단속했고, 그걸 아주 좋아했지 (426).
ü 헨리 아저씨가 주장한 방침은 모두 그 자신이 밖에 나가 관찰해서 깨달은 것이었다 (427).
ü 1950년경 헨리 아저씨가 아흔 살이 훨씬 넘었을 때, 그의 손자가 베른하임 백화점을 상당히 좋은 가격에 대형 체인에 매각했다. ..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인의 본사가 있는 도시까지 가서 그 회사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며칠을 지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베른하임 백화점 주식 대신 받은 그 체인의 주식을 팔겠다고 발표했다 (427).
ü 손자는 당황했다. “그 회사 재무제표를 한 번이라도 보셨어요?” “재무제표 따위는 볼 필요도 없다. 난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조작했으니까. .. 하지만 다들 회사를 위해 싸게 구매하고 있었지. 고객을 위해 싸게 구매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잘못된 일이야. 고객을 잃고, 매출을 잃고, 수익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 (427).”
ü 나는 좋은 예술가나 좋은 과학자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좋은 상인의 마음은 헨리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이는 식으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428).
ü 지금 우리는 다시 헨리 아저씨와 찰리 켈스타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검증되지 않은 수량화에 의존하고, 경험보다는 가정에 근거한 논쟁을 하고, 대칭적이고 형식적일 뿐인 모델을 만들고, 구체성을 지닌 견고한 현실을 다뤄보지도 않은 채 관념에서 관념으로 움직인다 (430).
ü 그 두 개의 대화편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크리톤> 우리에게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아 아니라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라고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다시 찰리 켈스타트가 “아니면 어떻게 내가 마음의 눈으로 문제를 볼 수 있었겠소?라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431).
ü 헨리 아저씨는 백네 살까지 살았다. … 한 시간 후에 돌아온 그는 베른하임 백화점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쟁사에서 스타킹을 더 싼 가격에 팔고 있다고 마구 호통을 쳤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봤지? 이 나이에도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고는 벽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431~2).
ü 그가 내게 귀띔한 바에 따르면 그에게는 대략 40명의 ‘동업자’가 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기 재산의 5퍼센트씩을 파르붐에게 맡겼다. … 이렇게 모인 돈은 파르붐이 ‘특별사업’이라고 부르는 것에 투자됐다. … 이익의 50퍼센트는 투자자에게 돌아갔고 파르붐은 25퍼센트를 챙겼다. 나머지 25퍼센트는 파르붐이 ‘미친 돈’이라고 부르는 ‘투기사업’에 투자됐다. 투기 사업에서 생기는 이익은 투자자와 파르붐이 50대 50으로 나누되 모든 손실은 투자자가 감수했다 (439).
ü “특별사업이란 내가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리스크 외에 다른 리스크가 없어야 하오. 그리고 최소한 돈의 두 배는 거둬들여야 하죠. 투기사업이란 리스크가 높은 사업을 말해요. 반면에 그 사업을 성공시키면 최소한 투자액의 다섯 배를 보장하죠 (440).”
ü 난 내가 그 회사를 위해 기여하고 뭔가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소. 머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오래 전에 버렸지요 (444).
ü 아직도 어느 정도 잔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프리트베르크나 파르붐, 헨리 아저씨가 대표했던 문명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는 프리트베르크사가 대표했던 인식과 형이상학으로 움직이고 있다. 돈, 매매와 거래, 이자율, 국민총생산 같은 상징을 점점 더 실재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중세논리학자의 말처럼 상징은 실체가 있다고, 반면에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은 이름뿐이라고 생각한다 (447).
ü 케인스 학파나 프리드먼 통화주의자 같은 반케인스 학파에게 경제학은 상징과 그 상징의 행동을 다루고 통화 공급, 신용, 완전 고용 예산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실업은 더 이상 인간의 상황이 아니라 목표수치일 뿐이다. 상징을 조작함으로써 현실이 만들어지고, ‘미디어 이벤트’를 실행함으로써 역사가 만들어진다 (447).
ü 19세기의 은행가는 사라졌다. 아니, 최소한 그들의 ‘시티’에 존재했던 특유의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상징으로 그물망으로 이해하는 그들의 방법은 보편화됐다 (447~8).
ü 프리트베르크와 파르붐은 해를 끼치지 않고 수익이 생기는 일을 한 이 극소수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상징과 이미지를 궁극적인 현실로, 사람과 사물을 허울로 여기는 극도의 최소한주의가 대다수의 인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그것이 여전히 무구하고 무해한 것일까? (449).
로베트트와 파르크하슨: 사업가에게 여성이 미친 영향
ü 그는 우울하고 감정적이었으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 그는 통찰력이 있었다. … 그는 결코 충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통찰력은 여러 주나 여러 달 동안 조용히 사색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연구와 분석을 몹시 싫어했다 (452~3).
ü 그러나 로베르트를 진짜로 흥미롭게 만든 것은 그이 애인인 메리언 파르크하슨이라는 코르티잔 (귀족이나 부자를 상대로 하는 고급 창녀나 정부)의 존재였다 (453).
ü 파르크하슨은 로베르트보다 스무 살 정도 연상이었다 (454).
ü 로베르트는 그녀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456).
<3부: 순수의 절정기>
헨리 루스: <타임>, <포춘>, <라이프> 잡지 왕국의 제왕
ü 관계가 진지해질 조짐이 보이면 곧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467).
ü <타임>지의 외신담당 편집자 자리는 당시의 젊은 기자라면 누구나 되고 싶어할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으며 봉급도 아주 많았다. … 하지만 나는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나는 루스 스타일의 ‘집단 저널리즘’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타임>의 운영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470).
ü 루스의 집단 저널리즘은 개개의 기사를 기계적으로 통일시켜서 신문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나는 그런 방법이 편견과 부정확성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471).
ü 루스는 ‘조사원’이라는 역할을 만든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 이것은 결국 기자가 스스로 조사하고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71).
ü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474).
ü 현재는 <포춘>이 친기업적인 잡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는 기업을 위한 잡지라기보다는 기업에 관한 잡지였다. 루스의 생각은 기업을 미국인의 생활과 미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업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잡지가 되는 것이었다. 루스가 만들어낸 “기업 이야기”는 ‘독자적인 조사보도’의 시초였으며, 적대적인 입장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479).
ü IBM 이야기를 쓴 그 젊은이는 독자적인 조사보도가 흠집 내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독자적인 조사보도를 하는 사람들이 크게 혼동하기 쉬운 문제였다 (480).
ü 젊고 팔팔한 친구들은 그와 논쟁을 벌였고, 그럴 때면 루스는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아이디어와 의견을 논의할 때면 직위도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았다 (483).
ü 비록 사람을 언제나 존중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디어와 의견은 존중했다 (484).
ü 루스의 인간관계, 관리 방식, 통제 시스템은 중국의 통치자들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들은 행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직접적인 역학을 하지 않았지만, 임무를 대신할 수 있는 관리, 관료적인 파벌, 경쟁적인 인맥을 조직해서 어느 누구도 위협적인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489~90).
ü 그 무렵에 나는 어떤 종류의 출판물이든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재무예측이 아니라 편집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출판물의 편집 방향이 타당한가? 그렇다면 그 계획입안자들이 그런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 그 다음에야 비로소 재무적인 수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491).
ü 지식인은 이제 더 이상 여러 분야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의 전문 분야를 지식의 영역과 결부시킬 능력이 있는 전문가다 (493).
ü 20세기 초반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잡지로 만든 호레이스 로리머는, 잡지 수입은 광고에서 나오며 구독은 기본적으로 광고 수입을 얻기 위한 판촉이라고 역설했다. … 그러나 이는 아주 위험한 헛소리이다. 구독에서 (그리고 가두 판매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 잡지는 소멸하게 마련이다 (495).
ü 잡지가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특별 사은 행사’나 ‘경품’, ‘끼워팔기’등의 명목으로 구독자에게 받을 것 이상을 지출한다면 그것은 ‘편집의 성공’이 아니다 (495).
ü 독자가 그 출판물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광고가 판매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런 출판물에 들어가는 광고는 제품의 가치를 믿지 않게 만들며, 그러면 광조주는 그 출판물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돈을 주고 산 최고의 발행부수는 파멸을 불어 온다 (496).
ü 미국 잡지는 현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마셜 맥루안이 “인쇄된 말은 죽었다”고 한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죽은 것은 우편으로 전달되는 말이다. 편집자와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지일 뿐, 전달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496).
ü 전자전송은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과 함께 융통성, 다양성, 편집의 개성에 있어 엄청난 이익을 제공할 것이다 (497).
ü 잡지는 계속 살아남아도 우편 전송은 구시대의 유물이며 이미 사라지고 있다 (498).
ü 만주인의 중국이든 장제스의 중국이든, 또는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역사적으로 중국만큼 미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미국의 관념과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든 영역에서 미국과 공통점이 없는 나라는 없었다. 또한 미국이 중국에 대해서만큼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태도를 보인 나라도 없었다 (501).
ü <포춘>을 창간했을 때 루스는 친기업적인지 반기업적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업의 중요성과 가시성이 커지고 있다고 본 그는 피카소와 독일 바우하우스의 그래픽 모두를 망라하는 완전히 새로운 그래픽을 통해서 기업이 중심 주제가 되는 새로운 형태를 이해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포춘>은 미국 잡지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적인 미술 감독을 두었다 (504).
ü “나는 누가 국가의 정책을 만들었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국가의 비전을 만들어 나가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505).
플러와 맥루안: 테크놀러지의 위대한 예언자
ü 어떤 일이 달성될 때 마다 나는 그것이 사명감을 갖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헌신했다. 맥루안은 비전을 찾는 데 25년을 소비해서 마침내 비전이 그를 붙잡았다. 그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 (507).
ü 맥루안에게 기술이란 인간의 자기완성이며,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이 자연적인 친화를 통해 특정 기관을 새롭게 발달시켜 다른 동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508~9).
ü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기술에 대한 적대감과 환멸이 대의명분이던 시기였다. … 그러나 “반과학기술적”인 일만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그 10년은 실제로 기술에 대해 깨닫게 된 시기였다 (509).
ü 1960년대 들어서면서 갑자기 기술도 인간의 활동으로 여겨지게 됐다 (509).
ü 내가 처음 버키를 만났을 때 그 는 쉰 살이 다 되어 가는데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511).
ü 자칭 기하학자인 버키는 ‘기하학’이 의미하는 지구의 질서 그 이상을 이해한다. 그는 우주의 질서와 리듬, 또는 ‘구체의 조화’를 경험으로 깨닫는다 (514).
ü 버키 풀러는 자신을 기하학자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는 선각자였다 (517).
ü 맥루안은 괴벽과 공상과 관찰력의 소유자였다. … 그림이 아닌 말의 초현실주의였지만, 달리나 스타인버그의 만화처럼 진정한 초현실주의자였다 (521).
ü 맥루안이 자신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러 들른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1960년대 초반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6월의 어느 날 밤에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날 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말해 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갑자기 깨닫게 됐고, 그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 서둘러 왔던 것이다. 그날 밤 그가 말한 내용은 가장 중요하고 명쾌하며 독창적인 그의 책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년 후에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됐다 (522).
ü 맥루안의 가장 중요한 통찰력은… 기술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이라고본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주인’이 아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킨 바로 그만큼 인간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524).
ü 버키 플러와 마셜 맥루안은 내게 한 가지 목표에 정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례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 나를 포함해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재미를 즐기기는 하겠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하지만 플러나 맥루안 같은 사람은 ‘사명’을 수행한다 (526).
앨프레드 슬론: 절대적 권위로 GM을 이끈 전문 경영자
ü 나는 관료체계의 부속품 역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런 업무에 능숙하지도 않았던 나는 내가 정부관료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컨설턴트로서 훨씬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531).
ü 가난하지만 야망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모든 대기업이 떠맡아야 할 주요한 책임이라고 믿었다 (538).
ü 일반 대중들은 부자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지만, 경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541).
ü <기업의 개념>이 지난 30년 지속됐던 ‘경영학 선풍’을 일으킨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런 시류의 선구자격인 사람이 됐다. 어쨌든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관심사인 조직과 사회의 책임, 개인과 조직의 관계, 최고경영자의 기능과 정책결정 과정, 관리자의 양성, 노사관계, 집단 관계, 소비자 관계 (심지어 환경까지도) 등이 모두 <기업의 개념>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제들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43).
ü 한 세대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경영’이라는 개념이 기업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예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모든 기관과 조직에도 해당된다는 주장까지도 인정하게 됐다 (543~4).
ü 그는 GM이 전개하던 분권화는 (나는 오늘날 이 원칙을 ‘연방적 분권제’라고 명명했다) 한 회사의 어떤 부분이 수익과 손실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있고 자신만의 시장을 가지는 별개의 사업을 가질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550).
ü 분권화를 통해 자체조직을 재정비한 최초의 기업은 바로 포드였고, 그곳에서 <기업의 개념>은 공식적인 교과서였다 (552).
ü GM이 보여준 분권화는 1950년대에 미국 경영 컨설팅 회사들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갈 때 그들의 장사밑천이 됐다 (552).
ü 하지만 그 때 나는 이미 GM 유형의 분권화가 가진 특징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고, 대다수의 조직들, 즉 기업이면서 사회봉사의 성격이 강한 대학과 정부 부처들을 포함한 조직에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을 개발 중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에서는 분권화를 단지 ‘흉내’만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업의 개념>에서 연방적 분권제를 그 해답으로 제안했고, 그것은 바로 피에르 뒤 퐁과 앨프레드 슬론, 도널드슨 브라운 그리고 GM에 있는 그들의 동료 및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552~3).
ü 남은 문제는 캐딜락의 모든 것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름이라도 살려 놓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뿐이었는데, 당시 앨프레드 슬론과 도널드슨 브라운을 포함한 GM의 대다수 이사들은 완전히 포기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 있었다 (555).
ü (그러나) 드레이스타트는 캐딜락을 ‘지위의 상징’으로 만드는 판매전략을 세워 성공했다 (555).
ü 트레이스타트는 이 예상치 못한 현상을 조사하면서 캐딜락은 부유한 흑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556).
ü 드레이스타트는 디자인을 위해 돈을 썼고, 그보다 더 많은 돈을 공구에 투자했으며, 품질관리와 애프터서비스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다 (557).
ü 드레이스타트를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557).
ü 그는 (드레이스타트)는 GM의 이사 가운데 가장 젊고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세상 사람들이 출세의 종점이라고 생각하는 인사부서에 배치시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짐 로셰는 언젠가 GM의 총수가 될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여자와 남자를 상대하는 법을 알아야 할 거에요. 그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559).”
ü 그는 자신이 ‘흑인 애호가’, ‘매춘부 포주’로 조롱당할지언정 여자들이 맡고 있던 일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의 합의를 얻어내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561).
ü 드레이스타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그들 인생에서 처음으로 괜찮은 월급을 받으며 쾌적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고 자기들의 권리라는 것도 일부 갖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존엄성과 자부심이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 번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모욕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구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여성 근로자들을 내보내야 할 시기가 되자 많은 여자들이 자살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닉 드레이스타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은 채 눈물을 머금고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신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소. 저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561~2).”
ü 윌슨은… “… 호시ㅏ의 구조를 구상하고 대기업에 적합한 근본원칙을 만들어 낸 것은 GM을 창설한 사람들, 지난 세대의 위대한 업적이죠. 그리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다음 세대의 일입니다 (564).”
ü 나는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하나는 노동비용 유연성과 노동시장의 유동성을 해치지 않고 고용인에게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훗날 명명했던 ‘자체관리 공장 커뮤니티’의 필요성이었다 (564).
ü 경영 및 산업 계급의 해부에 관한 나의 연구 가운데 나는 자체관리 공장 커뮤니티와 책임과 권한을 가진 노동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장 중요하고도 독창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영진들은 이런 아이디어들을 그들의 특권에 대한 ‘침략’으로 여겨 거부감을 보였다 (565).
ü “… 우리는 20년 후에 월터 루서 같은 조합의 리더를 볼 수 없게 될 겁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학에 가서 회계사와 관리자가 될 것이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만 남아서 조합을 이어나가게 되겠죠.” 불행하게도 이런 예언의 시대가 오고 말았다 (570).
ü 이 경연 대회를 통해서 알게 된 또 한 가지는, 고용인들은 자기 직업과 업무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를 원하고, 그 일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보수를 받고 있는 일에서 배제되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572).
ü “당신이 실패하면, 드레이스타트 씨, 당신은 캐딜락에서 직업을 잃게 되겠죠. 캐딜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GM이 있는 한, 내가 이끌고 가는 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솔선수범하며, 용기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자리느 ㄴ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슬론 씨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캐딜락의 미래를 걱정하세요. 하지만 GM에서의 당신의 미래는 내가 걱정하겠소 (577~8).”
ü “회사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에 대한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결정이 뭐가 있는지 말해 보세요. … 적절치 못한 사람을 데이턴에 있는 기계공장 자리에 앉히게 되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정들은 무용지물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죠 (581).
ü “… 우리가 사람들을 배치하고 적절한 자리에 임명하는 사안에 대해 네 시간씩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의 실수를 처리하느라 400시간을 소비해야 할 거고, 내겐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요 (582).”
ü “… 우리가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은 사람들을 잘 판단해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이죠 (582).”
ü “… 사람에 대한 결정보다 더 냉정한 것은 없습니다. .. 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적소에 잘 배치시키는 것이 전부에요. 그게 회사의 역할이에요 (583).”
ü 무엇보다도 슬로는 다양성을 조성하려고 했다. … 내가 언젠가 GM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최고 이사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다양성이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게 바로 GM의 진정한 힘이죠 (587~8).”
ü 그는 특정인물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그들의 성과에 대해서만 논했다. 그는 쌀쌀맞기는 해도 정중한 사람이었다 (589).
ü 슬론은 쩨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경제와 산업의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검소했고 개인적인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590).
ü 슬론은 의리가 있었다 (591).
ü 슬론은… 이해를 통해서 결정을 내렸다 (595).
ü 나는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내 책에서 경영의 원리를 다루었다. 그러나 슬론에게 중요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관리자였고, 그 점을 자신의 책에서 다루었다 (598).
ü 그는 전문가에 의해 경영되는 첫 번째 거대조직을 세운 사람, 진정한 전문 관리자 1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여전히 소유주의 위치에 있었다. 슬론은 그것이 바로 헨리의 회사가 혜성처럼 떠오르다가 그의 인생 마지막 20년 동안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치달았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월터 P.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회사를 소유주 경영에서 전문인 경영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에 세상을 떠났다. 슬론은 크라이슬러 회사의 변모가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결국 회사가 흔들리고 주요 계획은 불발이 되거나 도약의 시점과 나갈 방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GM은 슬론의 본보기와 지도 덕분에 전문적인 회사가 됐다. 그리고 슬론은 전문 경영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후대 사람들에게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599).
ü 슬론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에 대한 결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601).
ü 그에게 전문가란 관심사가 없고, 신념도 없고, 사생활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문가란 자신의 관심사와 신념과 사생활을 공적인 업무와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했다 (602).
n 요즘은 좀 다를 듯…
ü 슬론은 전문 경영인들에게 좀 더 많은 권위를 주고 싶어했고, 따라서 그들이 높은 책임감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직업적인 권한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부의 영역에서 책임을 받아들이거나 주장하기를 거부했다 (606).
ü 나는 슬론의 지위에서 나오는 힘을 인정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힘에 끌려 다닐 수 없는 내 자신을 보게 됐다. GM의 약점은 (기업의 경영까지 통틀어) 슬론이 주장했던 신중하고 정확하고 엄격한 경영의 ‘책임’ 구조라고 정확하게 주장할 수 있다 (606).
ü 그들은 항상 ‘공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전문적’인 것에만 제한하려는 고집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조직들은 (그리고 그 조직을 관리하는 ‘전문인들’까지도) 반드시 공공복리를 위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 경영자밖에 없다 (606~7).
ü 어쩌면 너무 완고하고, 지나치게 고지식하며, 빈틈없는 원리원칙주의자일지는 모르지만, 슬론의 위치는 쉽게 잊혀질 수 없을 것이다 (607).
ü 하지만 내가 <기업의 개념>을 통해 이미 30년 전에 꿈꿨던 것들을 훨씬 뛰어넘는 ‘공적 책임’을 요구하다 보면, 결국 기업이 어떤 권위를 발휘하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 요구의 원래 의도는 기업의 힘을 빼앗는 데 있다. 하지만 슬론이 30년 전에 이미 예상했듯이 그것들은 기업을 비롯한 다른 ‘영리단체’들을 오히려 우리의 주인으로 만든다 (607).
그 밖의 사람들: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ü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치법이었다. … 대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의 방식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때와 똑 같은 방식이었다…. 공동체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 됐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마치 자연재해를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609).
ü 대공황은 많은 중년층 남성에게는 대재앙이었고, 대부분은 그 충격에서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 그런 가장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오랜 불안과 실업으로 고통을 당했고, 그 결과 경제적 안정성은 물론 남성적 자신감도 잃어버렸던 것이다 (612).
ü 당시 미국에서는 대체적으로 격의 없는 행동이 예절로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면 약간 거친 행동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618).
ü 예절에서 격의 없는 태도는 대공황 시기에 더욱 심화됐던 특징이지만, 이와 달리 상호의존과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려는 적극적 자세는 대공황 시대 미국만의 독특한 특성이다 (621).
ü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처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었고, 오히려 대공황으로 인해 의심과 무뚝뚝함, 두려움, 질시만 더 깊어졌다 (621).
ü 모든 자연재해가 끝났을 때처럼, 대공황의 생존자들은 대단히 웃음이 많은 사람이 됐다. 살아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행복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스스로를 향해 웃었다. 대체로 악의 없는 웃음이었고 가끔은 농담의 정도가 지나쳐 기분을 언짢게 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대재앙이 끝난 다음에 유행하는 농담의 특성이었다 (622).
ü 당시 그 누구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계적 경제팽창과 번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길고 급속한 성장기를 말이다. 사실 가장 어리석은 낙관자자조차 세계대전이라는 커다란 재앙 앞에서 세계경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626).
ü 경제적으로 경기 침체는 ‘재앙’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정상상태’다. 하지만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느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중심’을 유지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건전하고 활력이 넘쳤으며, 사실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626).
ü 나는 이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진정 놀랍고 진정 역사적인 성취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따라서 그의 경제정책이 형편없는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627).
ü 하지만 모순으로 인해 더 극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대공황기의 미국이 공동체의식을 강조했기 때문에, 결국 지역적이고 편협하며 부족적인 미국인의 삶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동체는 종교적이고 인종적이며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했고, 그러다보니 서로 다른 가치관 사이에 경계선이 뚜렷하게 형성됐다. 대공황기의 미국은 1920년대의 미국보다 더욱 반유대적이고 더욱 반카톨릭적이 되면서 그와 대등하게 더욱 친유대적이고 친카톨릭적으로 변했다 (627).
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들러의 교훈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세대에서 이런 차별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633).
ü 1960년 존 케네디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상당수의 가톨릭은 그에게 너무 미온적이어서 심지어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정도라고 보고됐다. 그가 홀리 크로스 대신 하버드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공황이 한참이던 1930년대에 정치에 뜻을 두고 있던 케네디 가의 젊은이들은 대학에 갈 나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음으로써 20년 뒤에는 비아일랜드계 가톨릭 인구의 표를 확실하게 잃는 것보다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인구를 포기하는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635).
ü 대공황 때 종족주의가 정점에 도달했던 이유는 분명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심각한 해약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차별은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종족주의가 대공황 시기 미국인의 삶과 상상력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637).
ü 공황기의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백인은 물론 대부분의 흑인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현상으로 간주됐다 (639).
ü 하지만 내게 있어서 인종차별은 속죄와 참회의 대상이다. 흑인은 실제 존재하는 사실이고 대공황보다 더 중요하며, 더 오래 지속될 현상이다 (639).
ü 미국의 흑인은 이제 북부인이자 도시 거주자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농촌을 벗어나고 있었고, 20년 뒤에는 ‘흑인 문제’가 북부 도시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642).
ü 흑인 소작농을 밀어낸 것은 바로 풍요의 경제학이었다. 흑인이 구시대 남부에 대해 향수를 품게 된 것은 한 세대가 지나 최근에야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다. 기술도 중고차의 형태로 흑인 소작농을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 모데카이 존슨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흑인 노예들이 해방될 것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흑인은 이미 해방됐죠. 단지 문제는 백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입니다 (643~4).”
ü 기술은 미국 흑인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 기술은 대량생산 산업 분야에서 대체 일자리를 창조해 냈고, 그곳으로 숙련되지 않은 산업화 이전의 남부 흑인 소작농들이 이주해 들어갈 수 있었고, 돈을 벌 수 있었으며, 학교에 다니는 것은 물로 노조에 가입하고 투표권이라는 정치적 권력도 누릴 수 있었다 (644).
ü 하지만 기술조차도 진실의 작은 한 단면에 불과했다. … 노예제는 흑인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인이 그들을 해방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 사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지위와 위치, 대우 등에 거대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남부 백인들로서 남부 연합 군대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흑인의 개종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해리 트루먼과 린든 존슨에 의해서 말이다 (644~645).
ü 뉴딜 정책이 집행되던 시절은 흑인의 개종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 흑인들은 처음으로 우수한 능력을 지닌 인재, 비전을 가진 인물, 진정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무더기로 배출해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645).
ü 그들을 (흑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요인은… 그들의 고결함에서 비롯됐다 (645).
ü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고결함을 통해 일어섰다. 고결함은 흑인 지도자들에게 내적 자주권과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고, 그것은 자기와 같은 흑인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백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646).
ü 미국 백인들이 노예제도의 굴레에서 진정으로 해방되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대공황 시절이었을 것이다 (647).
ü 대공황 시기의 미국 고등교육은 가장 흥미로운 소재였다. … 미국 고등교육의 ‘위대한 시절’은 바로 1930년대였다 (650).
ü 1930년대는 사고의 시기이자, 도전의 시기이며, 감동과 혁신의 시대였다 (651).
ü 당시에는 대학이 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과 기능에 대한 관심도 대단히 높았다. 이는 유럽에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주제였다 (655).
ü 이 시기가 바로 주립 종합대학이나 단과대학들이 원숙기에 접어들면서 지역적인 색채를 벗고 진정한 ‘국가’ 기관으로 자리 잡았던 시기다 (656).
ü 대공황 시기에 벌어진 미국 고등교육 내부의 격렬한 정치적 투쟁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소동이었다. 그 무렵 공산주의는 이미 미국 노동운동에서 영향력과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658).
ü 대중매체와 공개토론에서는 ‘간판이 큰’ 대학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작은 규모의 대학원 중심 대학에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미국만의 특징으로, 유럽에는 국립대학이 아니면 이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대학 군집 가운데 한 가지 형태만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소규모 단과대학들조차도 독특한 특성과 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661~2).
ü 강연은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 그것은 낯선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도 됐다 (662).
ü 강연은 어떤 국가를 직접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시 나는 대부분 대도시에서 연설했지만, 강의는 점점 더 작은 단과대학에서 했다. 그들은 해외 출신에 이해력이 빠르고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누군가에 목말라 있었다 (664).
ü 외국인이 봤을 때 나라 전체가 교육과 학습에 열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한 숫자의 제대로 된 단과대학들이 존재했다 (664).
ü 대부분의 실험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곳은 소규모 학교들이었다. 규모가 작다 보니 운영자의 과감한 요구가 별다른 저항 없이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665).
ü 소규모 대학들은 젊은 인재들에게 덩치 큰 종합대학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인문과 예술 분야에서 유리했다 (666).
ü 유럽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유럽은 세련미, 즉 ‘문화’와 ‘질적으로 우월한 삶’의 상징으로서 미국인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미국 역사상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어떤 시대보다 그 시절에 더 경건하게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572).
ü 미국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중에게 성인과 같은 지위를 누리는 곳이다. 미국만이 진정 고유한 기술적 형태를 가진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뿐이며… (673~4).
ü 뉴딜은 미국인의 근본 믿음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메리카 합중국은 다른 나라들처럼 하나의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가치관이다 (674).
ü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의 학생시위는 베트남 전쟁과 흑인 빈민가라는 독특한 미국적 원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676~7).
ü 미국적 가치관은 감상주의와 허풍, 대중적 장광설로 흐르기 쉽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 (677).
ü 하지만 미국의 가치관은 링컨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희망’이기도 했다. 게다가 점점 더 많은 유럽인들을 미국으로 끌어들였던 요인이 그 미국의 가치관이었다. 유럽인들이 얼마나 깊이 거기에 매료됐던지,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유럽인이기를 포기했을 정도였다 (677).
ü 1938년이 되자 미국은 거대한 국제분쟁에 직면했으며, 급진적인 국제정책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680).
ü 미국은 점차 대공황의 미국에서 전쟁 이전의 미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설정된 기본 입장이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미국의 국내 및 외교 문제를 지배하고 있다 (680).
ü ‘팍스 아메리카나’ 아래서 미국의 비전은 ‘대서양 공동체’로 확대되고, 결국 그것은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자는 누가 됐든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의미였다 (682).
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선조들께서 한겨울의 눈보라와 한 여름의 모래 폭풍을 견뎌가며 황량한 광야에 농장을 세우셨을 때, 거기에는 국가의 명예를 위한다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군사적 영광이란 허울 좋은 정부의 독재에서 해방돼 진정한 자유인으로 삶을 누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 선조는 한 인간보다 법에 복종하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기도합시다. 미국이… 길고도 헛된 제국의 명단에 또 다른 항목으로 등록되지 않기를 말입니다.”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이전에, 그리고 그 뒤로도 아메리칸 드림을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고 감동적으로 요약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 기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694).
ü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다!... 순수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불과 몇 주일 만에 미국은 자신의 존재의미와 신념을 배신하고 ‘열강’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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