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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6일 20시 57분 등록

2주 연속 피터 드러커 저자에 대하여가 같은 내용이라 마음이 무겁던 차에 피터 드러커의 일대기가 잘 정리된 연보가 있어 직접 쳐서 올립니다. 향후 인용을 할 때 정확한 연도와 순서를 검색할 수 있어 유용하게 쓰일듯 합니다. 정리하다 보니 정말 20세기의 중심부를 관통한, 엄청난 일생을 사셨네요.

제가 쓸 책에 인용할까 싶어 결혼에 관한 드러커의 언급도 따로 정리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이 책을 번역한 남상진 씨의 역자후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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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연보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청림출판, 2006)에서 주로 인용하였습니다. (약간의 틀린 부분은 임의로 수정.)
이 책은 일본경제신문(일명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연재기사인 ‘나의 이력서’로 게제된 27회분의 피터 드러커 박사 기고문과, 드러커 박사를 인터뷰한 마키노 기자의 해설로 구성된 자서전적 성격의 저서인데, 일본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으로 미루어 일본경제신문이나 마키노 기자가 연보를 정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때문에 나중으로 갈수록 일본 관련한 활동은 생략하기도 했습니다.


1909년
11월 19일: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대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남. 정부의 요직에 있던 아버지 아돌프는 1876년생으로 33세,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의학을 전공한 어머니 캐롤라인은 1885년생으로 24세.

1911년 (만 1~2세)
동생 게르하르트 태어남

1913년 (3~4세)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 책벌레가 되었으며 95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획적이며 집중적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유지했음.

1914년 (4~5세)
6월: 일가족이 함께 아드리해를 여행하던 중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소식을 들음. 아버지 아돌프는 빈으로 호출되어 전쟁 방지를 위해 측근을 통해 황제에게 직소함.
7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아돌프는 전시경제를 지휘하는 정부고관 세 명 중 한 사람이 되어 공업생산을 담당함.

1915년 (5~6세)
9월: 빈 교외의 공립초등학교에 입학

1918년 (8~9세)
9월: 빈 시내에 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 그곳에서 생애 최고의 교사인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 두 사람을 만나게 됨.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1919년 (9~10세)
글씨 이외에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간주되어 5년간 다녀야 할 초등학교를 월반하여 4년 만에 마침.
9월: 라틴어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진학 예비교인 김나지움에 입학함. 28명의 학생 중 최연소로 1학년이 됨.
부모님이 매주 집에서 개최한 정치가, 은행가, 지식인이 참가하는 파티에 얼굴을 내밀게 됨.

1920년 (10~11세)
아버지 아돌프가 잘츠부르크음악제를 공동으로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함.

1923년 (13~14세)
11월19일: 사회주의자가 지배하는 빈 시민이 매년 축일로 삼는 ‘공화국의 날’ 데모 행진에 참가하여 붉은 깃발 대열의 선두에 섬.
오스트리아의 유력한 잡지인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를 읽기 시작함.

1925년 (15~16세)
부모님의 친구가 주최하고 저명인사들이 출입하는 살롱에도 출입하게 되었으며 후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작가인 토마스 만을 만남.

1927년 (17~18세)
김나지움 졸업, 함부르크에서 무역상사 견습사원이 됨.
9월: 함부르크 대학 법학부 입학.
대학 입학을 위한 논문 <세계 무역에 있어서 파나마운하의 역할>이 독일의 경제 계간지에 실림.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의 편집회의에 초빙되어 부편집장인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에 매료됨.

1929년 (19~20세)
1월: 독일의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함. 그곳에서 미국계 투자은행의 증권분석가로 취직하여 최초로 제대로 된 일을 하게 됨.
프랑크푸르트 대학 법학부에 편입함.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슈탈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함.
독일의 경제 계간지 9월호에 계량경제학적인 논문을 두 가지 발표.
10월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 ‘암흑의 목요일’을 맞게 됨.
10월25일: ‘암흑의 목요일’에 관해 쓴 기사가 프랑크푸르트 최대의 부수를 자랑하는 지역 석간 신문인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에 게재 됨. 신문기사로는 처녀작임.
암흑의 목요일의 영향으로 미국계 투자은행이 파산.  실직.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로 곧 취직함.

1930년 (20~21세)
1월2일: 석간 신문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로 첫 출근함.

1931년 (21~22세)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조교를 하면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취득함.
장래의 아내인 도리스를 알게 됨.
<프랑크푸르트 게네럴 안차이거> 세 명의 부편집장 중 한 사람으로 발탁됨. 부편집장으로서 매주 몇 편의 논설을 쓰는 한편 해외면이나 경제면의 편집도 담당함. 동료가 병가로 쉬고 있을 때는 여성면의 편집도 담당함.

1932년 (22~23세)
아돌프 히틀러나 요제프 괴벨스 등을 단독 취재함.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조교에서 강사로 승진을 타진받음.
쾰른의 명문 신문인 <쾰르니쉐 차이퉁>으로부터 해외뉴스 전반의 편집책임자 자리를 타진받음. 쾰른 대학의 강사자리를 제안 받음. 둘 모두 받아들이지 않음.

1933년 (23~24세)
1월: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 후 독일 탈출을 계획함.
그 무렵부터 저널리스트로 자리잡기 위해 유대계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슈탈에 관한 책을 집필, 독일에서는 정치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출판사인 모아에 보냄.
2월 하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나치스의 새로운 지배자가 소집한 교직원 회의에 최초로 출석함.
4월: 런던으로 이주. 보험회사와 증권분석 일을 얻게 됨.

1934년 (24~25세)
영국 투자은행인 프리트베르크사에서 일하게 됨.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케인스 경제학’의 아버지인 존 메이나드 케인스 강의를 청강하기 시작함.
외국 은행 기관의 이코노미스트로 구성되는 클럽에 가입.
영국 최초의 일본 회화전을 우연히 보게 되어 일본화에 매료됨.

1935년 (25~26세)
런던에서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와의 교제를 돈독히 함.
미국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함.

1936년 (26~27세)

빈의 출판사를 통하여 독일시대의 체험을 살린 <독일의 유대인문제>를 독일어로 출판. 훗날의 <경제인의 종말>을 예고하는 득한 내용.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동생 게르하르트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의사로 일하기 시작함.

1937년 (27~28세)
1월: 도리스와 결혼,
2월~3월: 호화여객선으로 지중해로부터 미국으로 향하는 수주일간의 신혼여행. 베니스나 그리스, 시칠리아 섬, 알제리아, 리스본 등을 경유하여 마지막으로 대서양 한복판에 떠있는 아조레스 섬에 들림.
4월 하순: 뉴욕에 도착. 뉴욕 교외의 아파트를 빌려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함.
<파이낸셜 뉴스>(현재의 <파이낸셜 타임스>)등의 영국신문사 미국 특파원으로서 출발함.
도리스도 영국 대형소매회사(막스&스펜서)의 뉴욕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함.

1938년 (28~29세)
3월: 나치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 유럽으로 출장하여 미국의 유력 신문인 <워싱턴 포스트>에 유럽 정세에 관한 글을 처음으로 기고함.
미국 중서부로 출장했을 때 지역 유력 신문의 1면 기사로 소개됨. ‘미국에 관해 영국 신문에 기고하는 미국 주재 특파원’이 특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드러커를 소개한 기자는 기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람이었음.
런던에서 쓰기 시작한 <경제인의 종말>을 탈고, 뉴욕의 출판사인 존 데이와 출판계약함.
<경제인의 종말>의 출판이 결정됨으로써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월간지인 <하퍼스 매거진>에 기사를 쓰도록 권유받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주함. 아버지 아돌프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서 국제 경제를 가르치기 시작함.
장녀 캐슬린이 태어남.

1939년 (29~30세)
연초: 취재를 위해 인종차별이 남아 있던 조지아 등 미국 남부를 방문.
4월: 처녀작인 <경제인의 종말> 출간. 나치스 독일은 유대인의 말살에 나서는 동시에 소련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예상.
5월: 영국 수상이 되기 전의 윈스턴 처칠이 <경제인의 종말>을 영국 고급 잡지인 <런던 타임스>의 서평에서 높게 평가함. 그 영향으로 영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문필가로서 경력에 토대가 됨.
8월: <경제인의 종말>에서의 예상대로 나치스로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를 놀라게 함. 일주일 후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
잡지왕인 헨리 루스로부터 주간지 <타임>의 편집자 자리를 제안받음.
뉴욕 근교의 사라로렌스 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로 취임. 경제학과 통계학을 주1회 가르침.

1940년 (30~31세)
잡지왕 헨리 루스가 창간한 경제지인 <포춘>의 창간 10주년 기념호의 편집에 참가.
경제지 <포춘>의 편집을 하고 있던 시기, 편집부 내에서 후일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우는 천재건축가인 백민스터 프러를 만남.
학회 모임에서 후일 <미디어의 이해>등을 발표 일세를 풍미한 캐나다의 저명한 미디어연구가 마셜 맥루언과 알게 됨.
유력지인 <하퍼스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함. 그로부터 4반세기에 걸쳐 정치나 경제, 국제 문제 등 폭넓은 주제에 관하여 1년에 6~8편의 기사를 씀.

1941년 (31~32세)
베닝턴 대학으로부터 정치학과 경제학 분야의 학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를 소개함.
부모님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함. 아버지 아돌프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미 관세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함.
가을: 장남인 빈센트가 태어남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함. 이를 계기로 워싱턴으로 불려가 정부에서 일하게 됨.

1942년 (32~33세)
워싱턴을 떠나 육군성 컨설턴트로서 디트로이트 등 중서부에서 군수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경영을 재건하는 일을 맡고 후일 품질관리의 권위자가 되는 에드워드 데밍을 스카우트함.
여름: 뉴욕에서 버몬트로 이사하고 여자대학인 베닝턴 대학의 교수에 취임. 정치나 경제, 역사, 철학 등 폭넓은 주제를 취급함.
아내 도리스는 베닝턴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의 연구를 시작함.
나치스 독일의 패배를 전제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산업사회를 그린 두 번째 저작 <산업인의 미래> 출간.

1943년 (33~34세)
<산업인의 미래>를 읽은 GM의 부회장으로부터 GM의 경영 방침이나 구조에 관해 조사하도록 의뢰받음. GM의 조사 의뢰를 쾌히 승락함.
미국시민권을 취득함

1944년 (34~35세)
GM의 주요 간부를 대부분 인터뷰하는 것 외에 주요 공장도 방문. ‘미스터 GM’인 앨프레드 슬론을 만남으로써 ‘경영의 프로’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귀중한 발견을 함.

1945년 (35~36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육군성의 컨설턴트 일도 끝남.
18개월간의 GM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3부작 <기업의 개념>을 탈고.

1946년 (36~37세)
<기업의 개념> 출간. GM식 분권제 등을 주창한 이 책은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발매와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됨. GM의 경영진으로부터는 ‘좌익의 공격’이라고 통렬한 비판을 받음.
부모님이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이사함. 아버지 아돌프는 70세로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가르치기 시작함.

1947년 (37~38세)
GM에서 미국 산업 역사상 최초가 될 대규모 종업원 의식조사를 실시. 이 결과를 바탕으로 품질관리의 도입을 시도하지만 전미자동차 노동조합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절함.
미 국무장관 마셜이 제창한 ‘마셜플랜’의 실시를 지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국가를 시찰. 물자조달을 담당하면서 군인 출신인 마셜의 지도력을 보게 됨.
<하퍼스 매거진>에 ‘헨리 포드의 성공과 실패’를 기고함.

1948년 (38~39세)
조지아 애틀란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으로부터 학부장 자리를 제안받음. 아직 흑인 차별이 있던 남부로 이주하는 것을 주저하여 거절함.
빈 시대의 지인으로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부 장관이던 얀 마사리크가 자택 앞에서 시체로 발견됨.

1949년 (39~40세)
뉴욕으로 이사하여 뉴욕 대학의 교수로 취임. 동대학 대학원에 매니지먼트 학과를 창설.

1950년 (40~41세)
1월: 아버지 아돌프와 하버드대학을 은퇴하려고 했던 저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를 방문,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슘페터는 숨을 거둠.
2월: <하퍼스 매거진>에 ‘연금의 신기루’ 기고.
10월: GM의 최고경영책임자, 찰스 윌슨과 협력하여 GM에서 세계 최초의 근대적 기업연금제도를 창설함.
GE의 컨설턴트가 됨.
근대적인 경영컨설턴트업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마빈 바우어로부터 맥킨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지만 거절하다. 그래도 바우어와 함께 일하는 일이 많았고 둘이서 ‘경영컨설턴트’라는 용어를 만들어냄.
<새로운 사회> 출간.

1951년 (41~42세)
매니지먼트 연수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인 미국경영협회와 접점을 갖기 시작하다. 창설자인 앨빈 댓과 만나다.
매니지먼트 분야의 선구자인 여성철학자, 메리 파커 폴렛의 존재를 알다.

1953년 (43~44세)
소니의 공동창업자인 모리타를 뉴욕에서 만나다.
1947년 GM이 실시한 대규모의 종업원의식조사 결과를 도요타자동차에 가져감.
GM의 회장인 앨프레드 슬론으로부터 MIT의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쳐주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

1954년 (44~45세)
11월: 다섯 번째 저작 <경영의 실제> 출간, GE 등 대기업에서의 컨설턴트 경험을 살려서 최초로 매니지먼트를 하나의 기능으로서 파악하여 체계화하는 데 성공함. 이를 통해 ‘매니지먼트의 발명자’로 일컬어지게 됨.
어머니 캐롤라인이 60대 후반으로 영원히 잠들다. ‘어머니는 미국에 온 시점에 이미 병약했다. 어머니에게 미국은 줄곧 외국이었으며 미국에서의 생활에는 끝까지 익숙치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

1955년 (45~46세)
<미국의 다음 20년> 출간.

1956년 (46~47세)
민주화의 움직임에서 소련의 군사개입을 초래한 헝가리동란이 발생하다. 국제구조위원회의 지원자로서 헝가리 난민인 앤드류 그로브를 돕다. 그로브는 훗날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인 인텔의 창업에 가담함.

1959년 (49~50세)
7월: 일본사무능률협회(현 일본경영협회)의 초대로 하코네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
<내일의 이정표> 출간.

1960년 (50~51세)
가족과 함께 두 번째 방일.

1961년 (51~52세)
‘허둥대는 일본의 젊은이들’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관해 <하퍼스 매거진>에 기고함.
앨프레드 슬론의 회고록 <GM과 함께한 나날들>에 관한 서평을 씀.

1964년 (54~55세)
<결과를 위한 경영> 출간.

1966년 (56~57세)
6월: 산업경영의 근대화와 일미친선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서옥장을 수여받음.
<목표를 달성하는 경영자> 출간.

1967년 (57~58세)
아버지 아돌프가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 드러커는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미국에 곧 적응해서 대학에서도 일했다. 아주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

1969년 (59~60세)
<단절의 시대> 출간. 이 책에서 ‘민영화’라는 조어가 등장함.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리처드 닉슨은 <단절의 시대>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드러커 교수에 따르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의 수행과 통화의 증발뿐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연설 중 발언함.

1970년 (60~61세)
영국 보수당은 드러커의 저작에서 인용했다고 밝히면서 당의 기본 정책에 ‘민영화’를 도입함. 후일 대처 정권 하에서 수많은 국영사업을 민영화하는 형태로 실행하게 된다.

1971년 (61~62세)
미국을 대표하는 경영 전문지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논문 ‘일본식 경영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발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주.

1973년 (63~64세)
<매니지먼트> 출간. 그때까지의 매니지먼트 연구를 집대성한 대저작. 경영대학원의 교과서로 정평이 나 있음.

1975년 (65~66세)
미국 최대의 경제 전문 신문인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하기 시작함. 이후 20년에 걸쳐 이 잡지의 경영과 경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칼럼니스트로 활약.

1976년 (66~67세)
<보이지 않는 혁명> 출간. GM의 컨설턴트로서 세계 최초의 근대적 연금제도의 창설에 일조함. 그 당시 예상한 대로 ‘연금기금사회주의’가 미국에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나타냄.

1979년 (69~70세)
<방관자의 시대> 출간. 1940년대까지 만난 사람들에 관해서 쓴 자서전적인 요소를 포함한 이색적인 저작. (?)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동양미술 강사에 취임. 이후 일본 회화에 관해 5년간 가르침.

1980년 (70~71세)

<격변기의 경영> 출간.

1981년 (71~72세)
<새로운 경제학을 위하여> 출간.
GE의 최고경영자 잭 웰치의 컨설턴트를 맡게 됨. 이후 5년간 ‘웰치 혁명’의 방향 설정자로 활약하고 ‘시장점유율이 1위 혹은 2위 이외의 사업에서는 손을 뗀다’는 경영 방침을 만들어 냄.

1982년 (72~73년)
최초의 소설 <가능한 세계들의 최후> 출간.
<변모하는 경영자의 세계> 출간.

1983년 (73~74세)
저명한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와 존 메이나드 케인스 두 사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포춘>에 ‘슘페터와 케인스’를 기고함.

1984년 (74~75세)
두 번째 소설 <선에의 유혹> 출간.

1985년 (75~76년)
<혁신과 기업가정신> 출간.

1986년 (76~77년)
<경영의 최전선> 출간.

1989년 (79~80세)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기사 ‘우편과를 팔라!’로 세계 최초로 아웃소싱의 개념을 보임. ‘이 신문에 기고한 기사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기사일지 모르겠다’고 회고함.
소련의 붕괴 등을 예상한 <새로운 현실> 출간.

1990년 (80~81세)
<GM과 함께한 나날들>의 재판 서문을 씀.
오랜 비영리단체NPO분야에서의 컨설팅 경험 등을 살려 <비영리단체의 경영> 간행.

1991년 (82~83세)
<월 스트리트 저널>에 ‘빅3는 일본의 중대한 교훈을 배우지 않는다’를 기고.

1992년 (82~83세)
<미래 기업> 출간.

1993년 (83~84세)
자본주의사회 이후에 지식사회가 도래할 것을 설파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간행.
과거의 저작활동 중에 쓴 기사나 논문을 뽑아 정리한 <생태학적 비전> 출간.

1995년 (85~86세)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메리 파커 폴렛의 저작을 모은 <메리 파커 폴렛, 관리의 예언자>의 서문을 집필.
<미래의 결단> 출간.

1996년 (86~87세)
1976년 발간한 <보이지 않는 혁명>을 <연금기금혁명>으로 재출간.

1997년 (87~88세)
3월: <포춘>지의 표지를 장식. 타이틀은 ‘지금도 마음은 가장 젊다.’
가을: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어페어>에 논문 <세계경제와 국민국가>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
<드러커 온 아시아> 출간.

1998년 (88~89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한 논문을 정리한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경영자> 출간.

1999년 (89~90세)
비즈니스의 전제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낸 <21세기 지식경영> 출간.

2001년 (91~92세)
드러커를 처음으로 읽는 사람들을 위해 과거의 저작들로부터 주요 부분을 추출하여 에센셜 드러커 시리즈 <프로페셔널의 조건>, <변화리더의 조건>, <이노베이터의 조건>을 출간.

2002년 (92~93세)
7월9일: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요하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메달’을 수상.
12월24일: 미국방송사 CNBC가 제작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방송 ‘피터 드러커 지적 거인’이 방영됨.

2004년 (94~95세)
과거의 저작을 토대로 366개로 읽기 쉽게 편집한 <데일리 드러커> 출간.

2005년 (95세)
일본 언론인이 피터 드러커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가 출간
기술계의 독자를 위한 경영서 <테크놀로지스트의 조건> 출간
11월11일: 타계

 

 

 

 

 

결혼에 관해 인용할 만한 구절

드러커 박사의 성공적인 삶의 중요한 측면인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비결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역자 후기를 대신할까 한다.

2004년 5월에 드러커 박사 자택을 방문했을 때 도리스 부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93세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분이셨다. 드러커 박사와 마찬가지로 도리스 부인도 그녀의 일을 계속하는 분이셨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정력적으로 일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데서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도리스 부인의 자서전인 <당신을 만나기까지>는 도리스 부인이 드러커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의 생애와 시대 배경을 그 시대의 시점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귀중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드러커 박사가 쓴 ‘도리스와 결혼하여 60년—행복한 결혼의 비결’이란 글이 있는데 여기에 그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석탄창고에서 밤을 지낸 사건 이래로 도리스나 나나 모두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실은 내쪽이 석탄창고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면서 도리스 어머니가 떠나는 것을 기다리는 사이에 이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실제로 결혼한 것은 3년 후인 영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주하기 직전이었다. 결혼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자면 70년 전의 최초의 세계대공황이 그 배경에 있다.”

도리스는 전문직업여성
“나나 도리스나 우리들의 결혼이 오랫동안 행복하기 위해서는 도리스가 직업인으로서 성장하고 계속 발전해 갈 수가 있을 것, 그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드러커가 결혼 전부터 도리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은 도리스는 전문 직업 여성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생활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전문 직업 여성을 부인으로 둔 분들은 특히 참고할 만한 내용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도리스와 드러커의 일
“도리스가 나의 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는다.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대답한다. 아내의 일에 내가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과 똑같다. 우리들은 재능이나 전문적인 흥미도 전혀 다르지만 아내는 줄곧 나의 좋은 모범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전문가로서의 일처리나 자기 단련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아내는 내가 늙어도 나 자신의 껍질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을 방지해 준다. 내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흥미나 지식의 범위를 넓히도록 격려해 준다. 무엇보다도 계속 활동적으로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이 글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의 일에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거나 간섭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격려와 자극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한 결혼의 비결
“60여년간의 결혼생활을 지탱해 준 것은 무엇이냐고 질문을 자주 받는다. 아이들에게도 질문을 받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복한 결혼의 비결’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정반대라는 것뿐이다. 보통 행복한 결혼은 부부가 함께 일함으로써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함께 일하지 않는다. …… 내가 도리스의 일에 참가할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나는 과학에 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직업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결혼을 지속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도리스 부인은 드러커 박사의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을 편집한 적이 있다고 한다. 드러커 박사는 도리스 부인을 생애 최고의 편집자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일을 하면서 의견 차이로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도리스 부인이 드러커 박사의 저서를 편집하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결혼생활이 수십 권의 저서보다 더 값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연한 말인지 모르지만 일과 같은 다른 모든 것보다 결혼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성격의 차이는 불행의 씨앗인가?
흔히들 성격의 차이로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근거있는 말일까? 이에 대한 드러커 박사의 의견을 들어보자.

“통상 행복한 결혼에는 파트너의 성격과 기질이 잘 맞아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통설이 별로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한 부부는 대부분이 아주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가진 남녀이다. 어쨌든 세상의 법칙이 어떻든지 우리 부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도리스와 나는 성격이나 기질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늘 말하고 도리스는 잘 듣는 편이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도리스는 싫어한다. 도리스는 친구를 잘 만들고 줄곧 친구로 지내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행복한 인생의 비결
‘인간은 다른 이의 행복에 기여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부부생활이든 비즈니스든 진정 성공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가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드러커 부부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도리스의 친구들은 도리스가 그들의 인생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준 것 때문에 도리스를 좋아한다. 나의 친한 친구들은 내가 그들의 경력이나 비즈니스를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

전 세계에 드러커 박사에게 배우고 그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드러커 박사가 좁은 학문 영역 안에서만 뛰어난 학자라면 그의 인기는 단기적이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언제나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 중심의 경영철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역자후기, 18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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