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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일 10시 30분 등록

북리뷰 2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소명출판사. 2001(2004 1판5쇄)

***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高秉權)은 1971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저서로는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등이 있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철학 극장,욕망하는 영화기계>를 공저했다.

              <한권으로 읽는 니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를 번역했다.

   그는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대표)으로 활동하고 있으며(얼마 전에 역할이 바뀌었다), 부커진 R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부커진’ 은 책 Book의 깊이와 잡지 Magazine의 넓이를 결합한 새로운 개념의 매체이다.

부커진 R을 발간하며 그는 처음 장을 여는 글을 썼다.

“모든 혁명은 첫 글자 ‘R’만을 필요로 한다. 혁명이란 완성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 쓰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는 과거 혁명이 제 자신의 철자를 계속 이어가려 할 때마다 단호하게 미래 혁명의 첫 글자 ‘R’을 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R’을 쓴다. 너무나 오랫동안 발전해온 ‘발전’과 결별하기 위해, 너무나 선진화된 ‘선진’과 결별하기 위해 ‘R’이라고 쓴다. 우리에게는 발전론 자체가 낡은 과거다. 아니 반대로 말해도 좋다. 발전론과 결별한 우리에게는 어떤 과거도 충분히 미래적이다.”

“alteRevolution,
지금 우리 사회에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웅성거림, 웃음소리, 울음소리.....
수많은 타자들(alter)
부커진 R은 이 타자들이 됨으로써
타자들의 다른 alter 혁명Revolution 을 만들어 갑니다. ”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표지의 ‘고병권과 니체’ 에서

그는 어느 날 그를 찾아와 그의 심장에 불을 질러 황홀한 불꽃을 일으킨
니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때까지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니체, 난 그가 찾아온 때를 뚜렷이 기억한다. 사회학과 대학원에 들어가고 서울 사회과학 연구소라는 곳에 고개를 내밀 때 까지만 해도 내 관심은 온통 맑스에게 있었다.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 한풀 꺾이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맑스를 그 근본에서 새롭게 살펴보자는 흐름에 나도 끼여들고 싶었던 때였다. 때마침 대학원 동기들 사이에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경철초고>를 읽은 직후였을 것이다. 누군가 머리 좀 식히자며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소개했다. 하나의 휴식으로서. 그렇다. 니체는 내게 하나의 휴식으로 찾아왔다.

강력한 감전. 원인은 모른다. 다만 맑스 원전을 통해 좀더 깊어지고 있다던 내 믿음은 그때 박살이 났다. 나는 깊이 내려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게와 깊이의 혼동! 표정만 심각했지 난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급진적인 것은 오히려 니체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가벼웠으나 단단했다. 말들이 부딪히면 깨지는 건 내 쪽이었다. 하지만 말들의 패배는 내게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니체, 나는 맑스를 찾아가던 길에 그를 감추어둔 내 운명을 사랑한다. 그는 꼭 알맞은 때에 나를 찾아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는 그의 말들을 퉁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때 원전을 ‘새롭게’ 읽으려 하고 있었고, 그런 태도가 나를 과거의 오랜 습속과 신념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운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가 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

지금도 나는 니체를 사랑한다. 내게는 그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내 책들에서 그는 검토위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말할 따름이다. 하지만 우정이 썩을 때까지 그대로 눌러 앉을 생각은 없다. 게다가 원래 나는 길을 걷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지금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은 평범하다. 그는 책을 집필, 출간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한다.

 나는 그를 자주 만났었다. 수유+너머 연구소가 아직 원남동에 있을 때, 집에서 가까워 시간이 날 때에는 늘 그곳에 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요가도 하고 정화스님 강의도 들었다. 물론 저자 직강의 니체 강좌도 들었고 ‘망치’도 그려주고 ‘Amor fati’도 써준 책도 갖고 있다. 그는 매우 밝은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산다. 눈이 크고 맑아서 매우 선량한 인상이다. 그러나 새만금 반대를 위해 행동대장으로 나섰을 때는 불과 같았고,  불의에 대항할 때는 호전적인 전사로 변신하고는 했다. 이주 노동자와 우리 세상에서 핍박받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소수자들을 정성껏 도왔다. 나는 그가 책상 앞에 ‘호 아저씨’ 호치민의 사진을 붙여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땀을 흘리며 탁구를 치는 것도 보았고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잠재우는 것도 보았다.

문제는 니체다. 내가 갖고 있는 그의 니체 책을 보았더니 두 권 모두 밑줄이 단단하게 그어져 있었다. 끝까지 읽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저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누어 주려던 기쁨과 우정을 건성으로 받았으니....기억이 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 때가 이르지 아니해서 그랬을 것이고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자 이제 그러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100번 읽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그러면 조금은 더 운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책머리에

3.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4.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신념이나 시대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7.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 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서장

1. 천 개의 눈

17.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Wille zur Optik )혹은 시각 체제-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2. 천 개의 길

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의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3. 천 개의 기원

18.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4. 천 개의 젖가슴

19.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5. 천 개의 주사위

19.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6. 천 개의 화살

20. 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하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7. 천 개의 가면

20.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제2의 가면을 주시오.”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8. 천 개의 이야기

21.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제 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운명애 (Amor fati),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운명애 (Amor fati), 이것이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1.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플라톤의 저 유명한 언급처럼 “철학은 전체를 본다” 알튀세는 이 말을 “철학에는 외부가 없다” 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진정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난 사물이나 사건으로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헤겔 역시 자연으로 도피하는 루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세계정신의 훈풍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27.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들뢰즈가 쓴 저서의 제목처럼 ‘니체와 철학’에서 시작 할 수밖에 없다. 니체가 철학과 맺는 관계, 그 자체가 우리에겐 문제이다.

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30. 서구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 안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 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32.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5.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떤 신이 나를 통해 그와 같이 하였다.” 잘못은 신의 몫이다.

그들은 자신의 긍지를 위해 신들을 이용한다. 신은 그렇게 활용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37.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8. 오디오푸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이디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라고 묻는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세 개의 죽음

39. 그리스 비극은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드러낸다. 삶의 비극성은 삶에서 오지 않고 죽음에서 온다. 삶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죽음이 주는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관계한다.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죽음이다. 그러나 으 죽음이 대등하게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받는다.

41.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어 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 부터도 돌아온다.”

42.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이 철학자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소절을 하나 남겨놓았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장과 심판의 법정

44.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47. 이 때문에 니체의 철학처럼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극적이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가령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며, 바그너 역시 배우일 뿐이다. 관객들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아직 세계를 회전시킬 수 있는 가치들의 발명자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48.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미래의 철학자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 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50.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 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한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2.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 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4.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6. 사랑의 의미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

57. 그가 구했던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8.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59.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 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1 - 비판

62.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63.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4.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 이라고 불렀다.

2. 계보학2- 탐사

64. 탐사자는 용기있는 것 못지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65.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푸코는 계보학자의 탐사작업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3 도덕의 자연사

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 위조 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안에도 가치를 심어 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본다.

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4. 강한 자와 선 한자

77.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 한자는 “억압하지 않는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자들인 것이다.’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80.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83.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6. 도덕이라는 동물원

85. 그들은 스스로를 인도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목자’를 필요로 한다.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노동의 축복’.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주는 것.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86.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87.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 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행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쇠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죽어가고 동물원을 폐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7. 선악을 넘어서

88. 그는 분명히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평가를 비판했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다.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가치평가는 남는다.

89.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선/악의 개념은 좋고 나쁨의 의미만을 가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90.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92.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다.

93. 그러나 이는 결국 해석학자가 신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94.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해석학자들은 어떤 거래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2. 진리의 해석학

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96.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차이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해석학자들의 입장을 유형화해 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들을 따라 정리한다면 베티, 가다머, 하버마스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99.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이다. 상호 주관성은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102. 하버마스의 합리적 토론이 목표하고 있는 바는 사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안정성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단일성이며, 그 방법은 통합과 안정화이다.

3. 스핑크스의 눈

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perspektivismus)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105.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07. “너는 이러이러 해야만 한다 (Du sollst )”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 Wille zu einer Optik)"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110.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응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13.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과거와 전통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첫 번째 기념비적 방식은 과거의 고전적인 것이 다시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 그러나 대개의 기념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시도 속에서 수많은 차이들은 재현을 위해 깎이고 휘어진다. 두 번째는 골동품적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세 번째는 비판적 방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과거를 법정에 끌어내 심문하고,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115.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115. 해석자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흄,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마조흐, 니체, 푸르스트,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을 각각 책으로 내놓았던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17. 니체의 아포리즘들이 만들어 내는 페이스의 변화는 리듬을 만들어 내고, 독자들은 이 리듬에 반응하여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한다. 리드미컬한 운동은 우리에게 속도를 변환시킬 수 있는 기어를 제공한다.

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119. 재치와 배짱의 신 헤르메스, 헤르메스는 전령이기 이전에 해석자이다.

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122.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역사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3.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근대 사회와 정치의 문제를 니체와 비슷하게 진단하고 있는 학자는 아렌트(Arendt)다. 아렌트 역시 근대 사회를 ‘정치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124.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1 - 근대국가와 전쟁

126.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9.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계약은 다시 국가에 의해 보증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동이며, 정의와 법의 탄생이다.

131.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확실히 근대 정치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국가를 향하고 있다. “국가가 끝나는 곳, 거기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의 노래, 유일한, 그리고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고대 국가에서 근대국가로의 전환, 새로운 우상의 출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전쟁, 그리고 또 전쟁뿐이다.” 이른바 니체의 “전쟁 찬가.”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 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133.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추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136.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 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9. 하나의 제도와 법은 ‘폭력성과 잔인성’을 가지며 주체들은 그 아래서 거기에 맞게 ‘길들여지고’ ‘길러진다’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142.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체재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143.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이것은 지배적 도덕을 습속화하는 과정이다. 동등하고 규칙적이 되도록 길들여지며 지배적 도덕을 본능화하게 될 때, 니체가 말하는 “습속의 도덕”이 완성된다.

5. 아곤의 정치

146. 아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의 항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제이다.

147. 그리스인들은 인간들을 서로 적대적인 파멸의 전쟁 속으로 몰아넣는 여신은 악하다고 보았지만,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이라고 해도 인간들로 하여금 파괴적 투쟁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아곤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신은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49. 그리스인들은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arena)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152.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제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1) 자연학 + 윤리학

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156.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58.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의 복수의 원인들을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 보았다면, 에피쿠르소에게 세계는 ‘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159.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61.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이다.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162. 클리나멘이란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이탈해서 편위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편위는 원자들의 새로운 충돌과 거기서 기인하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낸다.

164.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166. 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167.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174.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175.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177.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179.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18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익숙한 오해

188.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 이해해 왔다.

189.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가 대해선 잘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

192.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196.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197.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 영원회귀는 두 개의 권력의지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 더 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이해해 가는 속도와 긍정의 권력의지에 다가가는 속도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느 심연으로라도 축복하는 예(Ja)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축복하는 자,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을 했고 씨름꾼이 되었다.” 중력의 영? 그것은 전혀 무겁지 않다. 두더지와 난쟁이? 그것들은 놀이감이다.

200.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praxis)이다.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201.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202.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204.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209.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 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207. 차이를 만들어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208. 주체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주체 역시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대상들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체도 복수로 존재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

209.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제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있는 밧줄

1. ‘과 (....und....)

211.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 아니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잘 해야 대지의 살갗에 생긴 피부병” 이거나 “작은 구더기가 아닐까?” “인간은 우주의 눈들이 자기 방에서 망원경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사유를 보고 있다.”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기들과 의사소통한다면 그들도 동일한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3.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

215.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함으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과’ 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 진화와 변신

216.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위버멘쉬, Ubermensch)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217.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의 목적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인간은 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22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222.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223.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225.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4. 보다 높은 인간들

228. 신은 연민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추악한 인간은 지며보는 자에게 복수를 하는 자이다. 항상 어느 곳에서나 그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신, 그가 추악한 인간의 복수를 받은 것이다. 추악한 인간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 즉 인간의 숨겨진 치욕과 추악함까지 본 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추악함을 본 목격자를 그는 살려둘 수 없었고, 가장 추악함을 내보임으로써 그 목격자에게 복수를 했던 것이다.

229.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밤은 거대한 변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무슨일이 벌어졌던가? 탄생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나귀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제의를 올린 것이다.

230.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232.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

233.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tm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4.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 회귀하는 신이다.

영원 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제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238.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3. 화약 냄새가 사라진 전투

246. <차라투스트라>는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4. 모든 가치의 전환

247.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의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8.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다.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250.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3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서명이 붙어 있는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 “니체씨로부터 떠나라” 는 것이다. 여행객은 항상 그 사회의 이방인이고 외부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이방인이라고 소개한다.

252. 확실히 유목민 기질이 니체를 이끌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nomad thought)'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253.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철학은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제2부 베버-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258.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59.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 해도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면 공공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2. 근대인의 탄생

26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3.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3. 관료제 기계

264.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고 부른 근대의 에토스는 독특한 생활방법론과 상응한다.

265.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268.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270.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훈육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정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5. 베버의 정치학

276.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277.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재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279.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280.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283. 현대 정당들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

285.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다.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의 징표다. 차이의 아상블라주로서의 생태학에 못지않게, 여러 잡다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예술품으로서의 아상블라주 또한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퀼트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혀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288.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적 상황은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다. 월러스틴 등이 말했던 것처럼 국가를 하나의 도덕적 버팀대로 삼고,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해왔던 기존의 정치세력들에게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난동이고 폭발이었다. 68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전통적인 영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학개혁, 가부장적 권위주의, 권위적 민주주의, 성에 대한 억압,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권위적인 노동조합과 당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욕망과 가치의 투쟁을 불러왔다. 그 공격을 단지 부당하게만 여겼던 구좌파들은 68혁명에 대한 어떤 이해나 대응도 취하지 못했고, 결국 68을 뒤집은 89의 복수로 쇠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파들에게 68혁명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293.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는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자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294. 답은 대개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은 질문들과 동떨어진 채 답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그 답의 형식과 내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297. 이것이 바로 국가,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호 계약에 의해 평화와 공동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격이다. 정의와 소유권은 국가의 탄생과 함께 하며, 평화와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또한 만든 시민법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보장받는다. 신민의 자유는 시민법이 그 규제를 면하는 것들, 가령 매매의 자유, 계약의 자유, 주거 선택의 자유, 생업 선택의 자유 등에 존재한다.

298.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편차 이상으로 그 둘 모두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가치들의 투쟁, 차이들의 투쟁을 정치 영역으로 보내서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받고자 했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은 동일한 요소를 정치의 영역에서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 열망과 그리 멀지 않다. 자유의 보증자로서의 국가,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들의 범위는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그것은 네그리의 표현대로 ‘핵심으로서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

301. “공허한 이치를 내세우며 반성을 일삼는 오성의 것”이라고 말하며, 완전성은 결코 “진행의 영속적 진행”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310. 주체 생산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왈쩌(Walzer)나 테일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단순히 인간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동체, 바로 문화적이고 언어적이며 종교적인 공동체 등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숙고해서 선택하는 연합체란 일종의 '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항상 미리 존재했던 '비자발적 공동체'에 들어가 있다.

313. 이제 국가는 공동선과 정체성, 공동체에 실재성을 부여해 주는 실체가 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레이건과 부시가 모두 도덕과 가족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국가가 이제 경제적 개입을 넘어서 도덕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도덕과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효율성과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들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은 윤리적 실체로서의 국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분명히 저자 고병권이 이해한 니체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열정이 그를 사로잡아 너무나 많은 것을 한권의 책에 다 담으려고 애를 많이 쓴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열정은 전해오는데, 그의 이성은 아직 샘터찬물을 거쳐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매우 힘들게 시간을 많이 들여서 마음을 무찔러대는 글귀를 옮겨 적었다. 그러면서 이 문장이 핵심 문장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미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나중에 복습이 다 된 후에 이 북리뷰를 다시 읽어보면 북리뷰 할 때의 나의 입장이 잘 이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고집스럽게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라는 조금 재미있는 소제목 하에 글을 옮겨적고 있고 , 아직 무찔러 들지는 않았으나 언젠가는 무찔러 들 수 있는 글귀도 다 써내려가고 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정말 외워서 다시 인용할 글귀만 뽑아내고 싶다. 한편으로는 글쓰기 훈련 중에 있기에 훈련을 하는 느낌을 고스란히 즐기는 마음도 있다.

저자 고병권이 다시 2년 후에 클래식 리라이팅의 형식으로 쓴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니 보다 원본적인 니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을 논하면서 니체를 읽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물론 맛이 없어도 철학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 아들러 융에게까지 매우 깊은 영향력을 남긴 니체는 ”어렵다, 어려울 것이다“라고 윗목으로 밀어놓을 사상이 아닌 것을 재확인 했을 뿐이다.

철학에 있어서의 가치문제,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개념, 디오니소스의 긍정 철학, 위버멘쉬,운명애.... 이러한 것들이 다시 더 큰, 근원적인 숙제로 남는다.

날은 저물어 가고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지친 몸은 그냥 한주일 살이를 반복하는 나의 운명.

운명애는 가장 큰 고통까지도 받아 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우리자신과 우리 운명에 대해 자유롭게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운명애는 우리 자신이 갖는 창조적 에너지를 거스르거나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며, 이렇게 결정된 우리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항상 고통받는 인간이며 고통에 대한 긍정은 삶의 기본 특성이다. 그러므로 니체가 운명애를 “나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며, 나의 철학이 힘입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니 나는 다시 시간을 쪼개어, 위버맨쉬 니이체를 알기위해서 그를 사랑하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문장 구성은 조금 더 책들을 탐색하고 난 후에 다시 정리해놓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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