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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일 10시 34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1.jpg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1971년 전남 담양(또는 함평?) 출생

서울대 화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학석사학위를 받고

(학위논문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2005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 <서유럽에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에 관한 연구>)

 

(2001년 초판이 나온 이 책 앞머리에는 박사과정 수료라고 나와있어 확실히 찾아 올립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 추장

(수유+너머는 서울 강북에서 활발히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던수유
고병권이 속해 있던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 두 공부모임이 의기투합해 탄생시킨 연구공간으로
벌써 10년이 지났다고 한다)

 

부커진R 편집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부커진R>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를 참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33152&PAGE_CD=12)

 

이 공동체에서 하는 세미나와 강연, 저술, 강연이 그의 하루를 설명해 내는 핵심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국가와 권력, 자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철학자 니체와 들뢰즈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상이다. (세계일보 기사 중)

 

 

올해(2009) 출간된 그의 책 <추방과 탈주>의 책날개에서는 그는 이렇게 표현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고추장'으로 불린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세미나와 강의를 하고, 밥을 먹고 아이를 키우는 일까지, 말 그대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살아왔다. 연구자 대중으로서 평생 공부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해준 세상의 모든 동료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특히 지난 3년 동안 '길 위에서' 내게 귀중한 물음을 던져 준 분들,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 앎의 가치를 저 깊은 곳에서 되묻게 해준 분들께 감사하고 있다. 이제 그 물음들을 차분하게 되새김질해 보려고 한다. 행동이 사유한 만큼이나 사유가 행동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홀수 해마다 혼자 이름의 책을 내놓았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게 됐다. (후략)

 

 

2005년 박사학위를 받고 펴낸 <화폐, 마법의 사중주>의 책날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얼마나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석사논문을 니체에 관해 썼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니 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내 논문의 주제를 묻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웬 화폐?" 놀랄 만한 변신을 본 것처럼 신기해하는 사람부터 공부의 깊이 없음을 걱정하는 사람까지 모두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저기 풀을 뜯으러 다니는 초식동물이 아니다. 내가 화학에서 사회학으로, 사회학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떠도는 것처럼 보인 것은 연구자의 주제나 소속을 특정하게 나누고 있는 학문분과 체제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로부터 떠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나는 항상 ''인 채로만 나를 떠날 수 있었다. 내가 맞닥뜨린 문제들, 내가 던지고서만 풀 수 있던 그 문제들이 어디에 속하는지는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었다. 굳이 답한다면 그것들은 내게 속하고,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제도의 선분들을 따라 자기 욕망의 일관성을 끊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아니 왜?"

 

나는 여전히 욕망의 사회화학을 하고 있으며, 비철학자로서 니체·스피노자·맑스의 철학에 관심이 있고, 경제학보다 먼저 신학의 대상인 화폐를 이해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꼭 필요한 재료를 위해 먼 곳으로의 여행을 마다 않는 요리사이고 싶다. 그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몰두하려 한다. 그리고 최근의 운동 속에서 그것들의 작동을 살펴보려 한다."

 

 

저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2001)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3)

<화폐, 마법의 사중주> (2005)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2007)

<코뮨주의 선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2007, 이진경 등과 공저)

<추방과 탈주> (그린비 트랜스 소시올-로지 002) (2009)

 

 

번역서

<한 권으로 읽는 니체> (2001)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2001) (이 책은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

<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시리즈) (2007, 공동번역)

 

 

주요논문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니체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

<들뢰즈의 니체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노동거부의 정치학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프레드리히 니체

 

내가 니체에 대해 어떤 저자에 대하여를 쓸 수 있겠는가.
그의 저작 중 하나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서 말이다.

 

그래도 더 충실한 정보 전달을 위해 <철학 이야기>의 니체 부분을 요약해 두었다가, 이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파편적으로 전달하면 무엇하나, 하는 회의감에 그만두었다.

 

 

사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니체가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다.

특히 8장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니체는 자신을 증식시켜줄 독자들을 낚기 위해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특히 그의 스타일은 아주 다양하다. 군데군데 시가 등장하기도 하고, 드라마의 형식의 작품들도 있으며, 서평이나 에세이, 심지어 논문을 흉내낸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아포리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구사는 니체가 의도했던 것이다. (116)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중략)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118)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신의 힘, 그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 (240)

 

삶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실천이라는 예수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자. 그때부터 니체는 자신의 필명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쓰기 시작했다. (250)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중략)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250~251)

 

 

 

 

내가 저자라면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대체 어떤 책이기에?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껌뻑 넘어가며 인정하는 극소수의 사람 집단(이라 할 수나 있을런지) 중 무려 두 명이나 추천한 책이기 때문이다! 일단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책이기는 했다.

 

 

 

우선 구본형 사부님부터 짚어 보자.

 

 

사부님은 올해(2009) 광복절 아침에 올린 칼럼(http://www.bhgoo.com/zbxe/199557)에서 철학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알게 된다. 철학에서 멀어지면 삶은 먹고 과시하는 저자거리의 인생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철학이 없으면 우리는 삶에서 멀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이 없는 뛰어난 인물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중략)

 

그것은 생활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철학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적인 대화이기 때문에 플라톤과 헤겔의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좋다. 세상은 질문을 좋아하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질문 없이는 살 수 없다.

 

(중략)

 

생각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그러나 생각이 우리를 위대하게 한다. 확실한 것은 평범을 넘어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른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 볼 수 있는 제 세상 하나를 가진 자, 그들이 바로 평범을 넘어 자신을 창조한 인물이다.“

 

 

 

또한 사부님은 2002년 성탄절(1225)에 올린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에 대한 서평(http://www.bhgoo.com/zbxe/36314)에서 드물게 책읽기의 흥분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극찬을 남긴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펜하우어가 되었고 또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 개념을 창조해 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있는 '니체씨'를 떠나갔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였으며, '광대'였으며, '모든 금지된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민이었으며 외부인이었고 방랑자였다. '떠나는 사람이었으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니체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피끓는 방랑의 유혹이지만, 그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곳에 허물만 남기고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그 니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니체라는 이름은 어떤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불싸지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워지려고 한 사람이었다.

 

니체는 그러므로 '미래의 아들'이었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 곁에 있지만 감지되지 않거나 오해받고 있는 시간'이다. 즉 니체의 미래는 어느 시대이건 '적절한 때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는 늘 '너무 일찍 와서' 이해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대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시대에 적응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광인'으로 이해 될 수 밖에 없었다.

 

고병권의 이 책은 독자와 니체 사이에 존재하는 천애의 절벽에 걸쳐진 줄다리와 같다.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들은 니체라는 '위험한' 광인에게 다가가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지만, 조금 지나면 줄다리의 출렁거림과 천길 만길 심원한 계곡의 경관을 즐기는, '금단의 영토'에 들어 선 지적 모험가임을 행복하게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드물게 책읽기의 흥분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만한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아마, 추측컨대, 북한산 기슭에서 꽤 많은 산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음은 시골의사 박경철 님 순서다.

 

얼마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당시 고등학생들의 필독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엄청나게 맞았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시골의사 박경철님이 생각나 그의 서평을 찾아보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100009826597)

2005 1월에 쓴 그의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에 대한 서평은 역시 극찬에 가깝다.

 

 

이책은 물론 니체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러나 니체를 이야기하기는 정말로 어렵다, 천개의 눈으로 천개의 생각을 가진 니체를 하나의 무엇으로 규정하는것 자체가 난센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니체를 접근하려면 니체의 말과 선언들에 매몰되어 니체의 정신을 읽지 못하고 그저 "니체"라는 관념 덩어리에서 허우적거리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정돈하고 있다.

 

이 책은 천개의 눈을 가진 니체를 하나하나 새로 세우고, 이야기하고, 사유를 정돈한다, 특히 니체를 읽다가 니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은 구명조끼보다 더 반가운 책으로 다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니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이책을 만난다면 그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남들이 다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바다를 비행기로 건너가 버린 셈이니 말이다.

 

(중략)

 

니체...

 

이 매력덩어리를 새로 알고자하는 분이나, 니체를 읽으면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탄식이 흘러 나오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가 존경하는 두 사람에게 이런 극찬을 받은 책을
어찌 내가 읽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중간중간 힘겨워지는 고비를 맞았음에도 '일단 끝까지 가 보는 거야!'를 외치며.

 

 

 

 

 

 

 

나의 짧은 지식으로

 

일단,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것이 놀랍다.

누구든 니체를 알고 싶어하지만, 그의 책을 먼저 읽고는 혼란에 빠져 꽁무니를 빼고 오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점에서 니체의 모든 저작을 읽고 이런 깔끔한 가이드(?)북을 탄생시킨 저자의 노고가 대단하다. 누군가 지적했듯, 그는 우리나라에서 니체의 헤르메스 역할을 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각 장 내 절끼리의 유기적 관계도 매우 좋다. 끈끈한 정도를 넘어서 논리적 구성이 착 맞아떨어진진다고나 할까. 이런 점은 책을 쓸 때 꼭 배워뒀다가 써먹어야 할 기술이다. (물론 머리와 논리력에서 따라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우려.
그가 만약 조금이라고 오해의 소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고병권이라는 또 다른 사람의 안경을 쓴 채 니체를 함께 오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니체가 제대로 썼군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니체를 다 읽을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잘못되고 흠집났을 수도 있는 안경에 의지해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마저도 있음에 감사한 채.

 

 

 

 

 

내가 지금 이 책을 접한 것은 운명?

 

실은 많은 30대의 연구원들이 구본형 사부님의 다음과 같은 지침에 많은 부담을 느꼈던 듯하다.
30
대에 꼭 해보라고 추천하신 일 중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은 대목 한 가지.

 

“철학사를 뒤적여 가장 매력적인 철학자 한을 골라라.

에 관한 책 두 권을 정독하여 그으로 만들어라.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 하고,

좋은 스승은 반드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다.”

 

아마 많은 연구원들이 노력했으며, 노력 중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가는 초입에서 맛을 보니, 이거 마냥 어려울 것 같지만은 않다.

게다가, ‘철학은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지금 내게 이 책이 찾아온 것은 운명인 것도 같다.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6~7)

 

 

나는 (비록 영어영문학이었지만)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편하게 읽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 아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철학과는 찬밥 신세다. 내가 졸업한 대학에도 철학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있었다 해도 어려워보이는 과목 이름에 선뜻 수강신청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문학을 전공했는데도 철학을 제대로 모르는 창피함을 은근슬쩍 고백하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제대로 공부하려는 이들이라면 고등학교부터 이런 철학자들의 저작과 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논술 등을 대비해 철학자 이름과 핵심 사상을 키워드로 외기 바쁘다. 이 점이 빠릿빠릿 성장해왔지만 무언가 빈 것 같은 우리 나라 젊은 세대와 느릿해 보이지만 무언가 깊어 보이는 서양 아이들의 엄청난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지. 그리고 대학에 가서도, 접해보지 않았던 철학책을 선뜻 집기보다는 1학년부터 학점과 영어성적 그 밖에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활동에 다시금 입시 경쟁을 치르는 이 세태가 (나도 그대로 겪어왔지만) 아쉽기만 하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지금, 처음으로 제대로 철학이란 것과 인사를 한다.

그러나 욕심내지 않겠다.

철학은, 젊은 날 쉽게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성질의 무엇이라는 게

어렴풋이나마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열심히 파서 씹어먹었다, ‘소화시켰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 순간,

나의 무지함에 다시 좌절하게 될 것을 예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인생을 겪고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면 그 때야 비로소

무언가 하나를 잡을 듯 말 듯 이해할 수 있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철학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입문서

아직 전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쉽게 가이드해주는 책

 

 

니체에 대한 선입견을 벗다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중략)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5~26)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략)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28~29)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31)

 

 

그래서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중략)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53)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중략)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에 대한 사람’, 그것이 철학이다. (56)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7)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사유는 삶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철학은 삶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5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가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아하!’ 체험까지는 아니라도 쏠쏠한 재미가 있는 가르침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89~90)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1)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는 번역어와도 무관치 않다. 영어의 “will to power”나 우리말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은 권력을 향한 의지로 읽히게 한다. 이러한 오해는 의지를 무엇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고, 그 의지를 대상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된다. (171~172)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186)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203)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중략)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서도 살 수 있다! (222)

 

 

 

 

 

나를 좀 더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해 줄 힘

 

우리는 더 이상 가치들이 어떤 것인지혹은 누구의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니체는 사람들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획득을 고려하는 자(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127)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목표를 세우고 경쟁하였으므로 목표는 항상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중략)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랐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148)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 즉 권력이다. 섬김으로서의 권력이 하인이나 약한 자들을 예속시켜 자신의 명령을 집행한다. 하인들이나 약자들은 그 권력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도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대단히 착하고 커다란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인 듯이상상한다. (174)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177)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195)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201)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03)

 

 

 

올바른 독자의 자세 그래, 차라리 괴물이 되련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단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라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239)

 

 

 

나 철학자 지망생이 되어 보련다

철학적 삶을 살아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중략)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53)

 

 

 

 

 

 

그런데, 딴지 하나.

도대체 2부는 왜 있을까?

니체가 말했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근대를 이어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1장인 베버는 왜 있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그가 명확히 밝히는 베버 부분의 목적을 읽고 나면 조금 더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베버의 연구를 따라가면서 근대인의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근대 사회의 특징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들이 맞부닥뜨린 운명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베버의 근대인에 대한 진단과 근대인의 운명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을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260)”

 

그러나 앞서 1부에서 설명했던 내용과 중첩되는 부분도 있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마 이 부분이 내게 무척 재미있게 읽힌 것은 2007년 처음 대학원으로 돌아가자마자 베버의 <관료제>를 읽으며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왜 이런 쓸데없는(?) 글을 첫 수업 준비 글로 읽어야 하는지, 일부러 어렵고 두터운 텍스트를 읽혀 학생들의 기를 죽이려는 교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조직과 경영의 기본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텍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 많은 철학자 중 왜 굳이 어렵다고 소문난 니체를 읽혔는지
구본형 선생님의 의도를 우리는 몇 년 후에 이처럼 무릎을 치며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어 있는 2장은 아직도 왜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제목은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이 글은 <문화과학> 22(2000년 여름호)에 실렸던 같은 제목의 논문을 수정한 것이라고 한다.

 

5년 내에 이 책을 한 다섯 번 정도 더 읽으면 굳이 덧붙인 저자의 의도가 이해가 되려나?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3~4)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중략) 그는 또한 얼음 덮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4)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이 사람들의 두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국가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때,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광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4)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 아닌 것(Unzei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5)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5)

 

그 천 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 아래,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6)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6~7)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7)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8)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8)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철학이라는 영토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니체의 철학을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25~26)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철학의 지반을 떠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26)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 부른다. (중략)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호가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중략)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 (27)

 

니체는 (중략) 철학하는 일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평가한다. (중략)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략)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28~29)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31)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힌 과제: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중략)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31)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중략)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32)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다. (32~33)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7)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41)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42)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49)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51)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1)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2)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중략)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53)

 

그래서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중략)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53)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중략)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에 대한 사람’, 그것이 철학이다. (56)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7)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amor fati).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사유는 삶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철학은 삶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58)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철학은 철학을 떠난 사람들의 철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지반을 떠난 맑스, 다 쓰고 난 인식의 사다리를 버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은 철학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가 아닐까? ‘삶을 바꿔 보라!’-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59)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59)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들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61)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중략)

도덕학자들은 진리를 다루는 철학자들과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열망. 그러나 그 열망은 철학자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도덕학자들의 열망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어떤 절박함이 느껴진다. (62)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중략)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중략)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3)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63)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그는 꼼꼼하게 보아야 한다. (64)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hie)이라고 불렀다. (64~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65)

 

가치의 보편적 기분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69)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72)

 

도덕의 계보학도덕의 자연사를 넘어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가치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 도덕적 토양의 건강성을 진단하는 것으로…… (73)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좋음이나 정의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다. (75)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중략)

사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어 왔다. 강자와 지배자를 쉽게 혼동했던 사람들은 니체의 철학을 지배자를 위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가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현실에서 복수할 수 없었던 약자들은 정신적으로 복수해 버린다! 그들은 마음속 정의의 신의 이름으로 심판을 행한다. 강자에 대한 원한에 찬 비난, 그것이 바로 그들의 복수다. (80~81)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할 때, 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귀족들, 강자들이 사라졌다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그건 바로 너다! (81)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82)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활에 사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생활을 꼼꼼하게 계획하고, 계획표대로만 생활한다. “완전한 자기 망각, 단호히 고정된 생활 양식, 완전히 짜여진 시간, 그리고 그것을 위한 훈련.” (86)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는 자신의 책제목이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 평가를 비판했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다. (88)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89~90)

 

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90~91)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필요할 경우 주석을 달아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해석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92)

 

신의 사자 헤르메스는 정직하고 성실하기는커녕 거짓말의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다. (93)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95)

 

우리가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95)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

 

우선 니체는 객관성을 믿지 않고 있다. (104)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중략)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1)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115)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중략)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 (115~116)

 

니체는 자신을 증식시켜줄 독자들을 낚기 위해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특히 그의 스타일은 아주 다양하다. 군데군데 시가 등장하기도 하고, 드라마의 형식의 작품들도 있으며, 서평이나 에세이, 심지어 논문을 흉내낸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아포리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구사는 니체가 의도했던 것이다. (116)

 

니체의 스타일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니체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117)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중략)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118)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중략)

근대 사회와 정치의 문제를 니체와 비슷하게 진단하고 있는 학자는 아렌트다. 아렌트 역시 근대 사회를 정치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123)

 

우리는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의 형이상학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125)

 

우리는 더 이상 가치들이 어떤 것인지혹은 누구의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니체는 사람들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획득을 고려하는 자(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127)

 

기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내면화하는 행위는 수동적인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127)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하나의 요소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측면을 매개해 주는 새로운 우상, 즉 국가에 대한 설명이다. (127)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29)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131)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 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132)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138)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141)

 

니체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 중의 하나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142)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정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배적 도덕을 습속화하는 과정이다. (144)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베버는 이것을 능동적 자제라고 불렀으며, ‘일기를 능동적 자기 검열의 대표적인 기제로 보았다. (144)

 

그리스인들의 선악에 대한 판단기준은 현재의 우리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중략)

그리스인들은 동시대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선조들과도 경쟁했다. (147)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목표를 세우고 경쟁하였으므로 목표는 항상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중략)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랐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148)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자연학+윤리학

 

기독교의 창조론이 에서 시작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출발점은 이다. (154)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159)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159)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161)

 

우리는 의지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통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170)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는 번역어와도 무관치 않다. 영어의 “will to power”나 우리말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은 권력을 향한 의지로 읽히게 한다. 이러한 오해는 의지를 무엇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고, 그 의지를 대상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된다. (171~172)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 즉 권력이다. 섬김으로서의 권력이 하인이나 약한 자들을 예속시켜 자신의 명령을 집행한다. 하인들이나 약자들은 그 권력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도 지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대단히 착하고 커다란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인 듯이상상한다. (174)

 

긍정은 디오니소스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175~176)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177)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178~179)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179)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180)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186)

 

니체의 영원회귀를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186)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성의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학자들처럼 동일한 것이 언제 출현할지 계산하고 있는 게 아니다. (188)

 

학자들이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의 돌아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90)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그것은 피로를 조장하는 의지, 무를 의지하게 하는 의지와 대결한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부정의 권력의지로부터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 같은 것이다. (193)

 

영원회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즐거운 지식>이다. (193)

 

생성 즉 시간을 긍정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대면해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욕하고 있다면 그는 먼저 이미 지나간 시간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195)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

 

시간은 부담스럽기는커녕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198)

 

영원회귀는 두 개의 권력의지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 더 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199)

 

영원회귀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이름이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럼 변하게 하면 된다! 세상이 영원회귀하지 않는다고? 그럼 영원회귀하게 만들면 된다! (199)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201)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03)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203)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던지는 주사위는 던질수록 더 많이 던지게 되는 주사위다. 그것은 창조적인 힘의 표현이다. (206)

 

니체가 운명애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208)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영원회귀하는 것일까? (209)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209)

 

영원회귀의 유혹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09)

 

 

 

 

 

제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결려 있는 밧줄

 

지구는 반문한다. 내가 인간을 위해 준비된 혹성이라고? 하하! (210)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시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중략)

오히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 (211)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215)

 

니체는 인간의 유일하게 위대한 점은 곧 몰락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217)

 

니체가 보기에 오늘날의 인간은 퇴화한 소인들이다. (218)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중략)

천국이란 믿음(신앙)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서도 살 수 있다! (222)

 

보다 높은 인간들의 출현은 우리에겐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226)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231)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233)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변신하는 장에서 긍정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의 삼위 일체를 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234)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234)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그러나 활동의 순간마다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 저자의 이름 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이름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착화시킨다. (236)

 

<즐거운 지식>의 제2판 서문에서 니체는 니체씨를 떠나자고 말한다. 그는 곧이어 변화하는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은 철학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237)

 

이 점에서 니체의 자전적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 사람을 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저작이다. 이 책은 니체의 생애에 대한 자기 진술이며, 그가 출판한 책들에 대한 자기 평가이다. (237)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단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라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239)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신의 힘, 그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 (240)

 

1878년부터 1881년 상에 그는 중요한 변신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 니체를 만난다. (245)

 

<차라투스트라>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46)

 

삶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실천이라는 예수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자. 그때부터 니체는 자신의 필명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쓰기 시작했다. (250)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중략)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250~251)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중략)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253)

 

 

 

 

2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항상 새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유대기독교라는 보편 종교가 모든 사건을 해명해 줄 수 없고, 더 이상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로서의 근대! (258)

 

우리가 막스 베버를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 속에서다. (중략) 그는 근대인들의 심리적 긴장을 이해했고 그것을 해소하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주목했다. (258)

 

이 글은 베버의 연구를 따라가면서 근대인의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근대 사회의 특징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들이 맞부닥뜨린 운명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베버의 근대인에 대한 진단과 근대인의 운명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을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260)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데 있어 맑스와 베버의 차이를 물질과 정신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우스꽝스러운 물음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260)

 

같은 돈 욕심이라 해도 프랭클린의 말에서는 다른 것이 느껴진다. 소명의식에 기초한 철두철미한 자기관리, 바로 그것이다. (261)

 

물론 중세의 도시 한복판에 위엄을 자랑하며 서 있던 교회는 이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는 없어진 게 아니라 각자 가정으로 그리고 각자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중세인들은 교회에서만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근대인들은 가정에서도,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262)

 

사제도 성례도 심지어 교회도 나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중략) 이 때문에 개인들은 극도의 고독과 불안 속에 내던져진다. 이 고독과 불안을 완화해 줄 수단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262~263)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63)

 

종교적 회의와 소심한 자기 질책을 방지하고 모든 성적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네 직업에 열심히 하라는 처방이 주어졌다.(PE; 115) (265)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265)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꿈꾸던 철저한 자기 관리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시간표였던 것이다. (266)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 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266)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놓은 계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수행력을 보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구이다. (266)

 

그러나 자기 관리를 위한 수단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기계가 되면 질적인 차이가 생겨난다. (266)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267)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268)

 

베버의 종교학이 끝나고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근대가 도달한 허무주의와의 대결! (268)

 

우리는 새로운 지배자인 것 같았던 근대인들이 새로운 노예로 전락하는 메커니즘을 좀더 상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69)

 

훈육은 근대인들의 신체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이다. (269)

 

베버는 사람들의 생활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하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훈육이라고 개념화했다. (270)

 

베버는 종교와 전쟁을 목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훈련시키고 길들이며 철저한 규율 아래 관리했던 수도원과 군대의 방법을 고대의 플랜테이션이나 자본주의적 공장의 이상형으로 보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른바 과학적 영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1)

 

적어도 신체를 부품화하는 훈육 작업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신체를 길들이는 작업으로 신체가 이전의 습관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도록 강제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신체를 길러내는 작업으로 신체가 능동적으로 이 과정을 의욕하고 여기에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272)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고 그들의 신체에 잔인한 기억이 심어지면 훈육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잔인한 기억술로 심어진 행동방식이 반복되어 습속의 도덕으로 자리하면 이른바 능동적 자제라는 게 생겨난다. (273)

 

베버가 말하는 철창(iron cage)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움직일수록 감옥은 더 강력하게 조여든다. (274)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276)

 

베버는 바람직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이러한 내적 거리라는 점을 주장했다. (277)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리 위해 내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277)

 

내적 거리 두기의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일상 세계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한다. 베버는 거리두기를 통해 관료제나 합리적 훈육이 초래한 기계적 과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훈육의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관료제가 수단으로써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을 막아낸다. (277~278)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279)

 

그는 책임 윤리신념 윤리를 구분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소명이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거리 두기의 능력과 그것에 대한 책임 문제다. 자신의 행동을 거리 두기를 통해서 올바르게 예측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책임 윤리. (279)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은 관료제적 정치인과도 대립한다.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 (280)

 

베보는 근대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윤리를 갖춘 정치인,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뿐이었다. (280)

 

카리스마는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한다. (중략) 대중들이 카리스마에게 의존하면 대중들의 자율성이 박탈되고, 카리스마가 개중들에게 의존하면 카리스마적 성격이 박탈된다. (281)

 

두 가지 문제를 던져 보자. 먼저 근대적 정신의 강화는 근대성이 맞닥뜨린 한계를 무너뜨리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근대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를 영혼의 상실로 보고 있는 베버는 그 해결책을 영혼의 회복에 두는 것 같다. (282)

 

베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284)

 

그런데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써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던 것이다. (285)

 

베버가 바람직한 정치인의 덕목이라고 내세운 거리두기능력은 누구보다도 대중들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기초해야 한다. (285)

 

스피노자는 합리적 이성과 의지를 통해서 신체를 올바르게 지배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꿈을 비판하면서 신체의 능력에 주목하라고 충고했다. (287)

 

비이성적 힘을 경멸하고 신체를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정치가가 수동적 대중들을 보고 놀라는 장면은 베버의 딜레마가 보여주는 가장 큰 희극일 것이다. (287)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68혁명 이후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것이 초래한 재정적자와 비효율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 않는다. (293)

 

자연상태에서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하는 정치적 정언명령은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곧바로 제2의 자연법이 나온다.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네가 너를 위해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296)

 

가족은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인륜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국가에 대한 제1의 윤리적 기초이다. (302)

 

롤스의 회피의 방법보다 차이의 문제에 대해 훨씬 더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은 로티의 무관심이다. 로티의 무관심에서는 롤스에게서 강하게 느낄 수 없었던 어떤 배제를 목격하게 된다. 롤스의 공적/비공적 영역의 구분은 로티에게서 공적/사적 영역이라는 훨씬 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306)

 

로티는 현재적 상황을 포스트모던으로 규정한다. (307)

 

그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통합하거나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도 없으며 또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앞서 말했듯이 전쟁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공동체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병적 상태였다. 대중들의 소외,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전통적 가치들의 해체와 같은 병리적 상태가 공동체주의자들이 인식하는 문제다. (309)

 

동물학적 패러다임와 의학적 패러다임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전개해 왔다고 해도 더 깊은 곳에서 이들은 어떤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이의 고유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316)

 

아렌트의 그리스 정치에 대한 분석은 죽은 것이 차이가 아니라 정치임을 말해 주고 있다. (317)

 

상식과 보편성을 발견하기보다 차이와 특이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결코 정치에 생소한 것이 아니다.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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