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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9일 10시 39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
책 머리에>

ü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로 답할 것이다. 언젠가 헤겔은 밤에 모든 암소들의 색깔은 검다고 말했지만 장님이 된 철학자는 밝은 대낮에도 암소들의 색깔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실 세상에 엄마소와 똑 같은 송아지는 단 한 마리도 없다 (3).”

ü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4).

ü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4).

ü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

ü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의 아들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사상도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시간이다 (5).

ü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5).”

ü  당신은 지금 어떤 사막도 옥토로 바꿀 수 있을 만큼풍성한가, 아니면 어떤 옥토도 사막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메말라 있는가? (6).

ü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7).”

ü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7).

ü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8).

 

<1: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ü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27).

ü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27).

ü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29).

ü  서구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다 (30).

ü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30).

ü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1).

ü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승의 죽음 (31).

ü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33).

ü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36~7).

ü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37).

ü  그리스의 비극에는 삶의 종말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리스인들의 전략이 들어 있다 (37).

ü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8).

ü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9).

ü  (디오니소스)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39).

ü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40).

ü  그러나 니체는 나중에 그리스 비극에 대한 자신의 변증법적 분석을 후회했다. … “변증법적 무뚝뚝함이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40).

ü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느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1).

ü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41).

ü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2).

ü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42).

ü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런 것이다. “, 크리도! 인생은 질병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가장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바로 죽음을 의사로 받아들였으므로 (43).

ü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44).

ü  극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 속에서 철학은 자신들의 체계와 구조를 확인한다. … “극장에 갈 때 사람들은 그 자신들을 집에 놓고 간다. … 가장 개별적인 양심도 최대다수로 평등화하는 마력에 굴복한다 (47).”

ü  극장이 관객들을 바보로 만든다면 법정은 그들을 죄수로 만든다 (48).

ü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49).

ü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49).

ü  어떤 사상이 자신에 부합하는 삶을 생산해내는 과정은 폭력과 훈련을 동반하고 있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철학은 이 과정에 동원되어 왔다. …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50).

ü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니체가 볼 때 국가에 대한 철학의 양보는 너무 지나치다 (50).

ü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51).

ü  그러나 역사는 매번 습속이 지배하는 것을 깨뜨려왔따. 니체는 그것이 습속의 윤리를 뚫고, 무서운 호위자들이 만들어 낸 대사건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무서운 호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광기. 습속과 대결했던 많은 지혜로운 인간들은 광인으로 불렸고, 그들의 생각은 광기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51).”

ü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52).

ü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되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52).”

ü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길들여진 두뇌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진 것이 신앙이라면 명령하는 자, 새로운 가치의 발명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다 (52).

ü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구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53).

ü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53).

ü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53).

ü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56).

ü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혹시 철학은 그것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예속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56).

ü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때문이다. …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아테네에서 그의 변증법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 것 죄다 까발리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57).

ü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너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러면 너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57).

ü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57).

ü  사랑을 희생과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과 바그너가 공유하고 있는 사랑관이다. 그러나 희생은 사랑을 구속으로 만든다 (58).

ü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 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59).”

ü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 ‘삶을 바꿔 보라!’- 철학을 떠난 철학자들이 철학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 (59).

 

<2: 강한 자와 선한 자>

ü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61).

ü  도덕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 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62).

ü  도덕학자들은 진리를 다루는 철학자들과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열망. 그러나 그 열망은 철학자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도덕학자들의 열망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어떤 절박함이 느껴진다 (62).

ü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63).

ü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63).”

ü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63).

ü  겁에 질려 소심한 사람은 사물이나 사태를 단순화해서 쉽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63).

ü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63).

ü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64).

ü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 (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 계보학은 무엇2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65).

ü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65).

ü  푸코는 계보학자의 탐사 작업을 잃어버린 사건들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65).

ü  기원이라는 심층을 향해 파 내려가서 그들이 확인하는 것은 이질성과 다양성이다 (67).

ü  니체는 도덕을 화폐위조에 비교하곤 했다. 성직자들은 곧잘 화폐위조자로 불렸으며 또한 마법사라고도 불렸다 (68).

ü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가 가치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의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 행위인 것이다 (69).

ü  도덕학자들로서는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도덕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어느 만큼의 억압이다 (69).

ü  뱀처럼 흉측하게 생긴 동물이나 기괴한 식물들을 악과 연관시키고, 우리 안에 있는 자연, 즉 본성에 대해서도 본래적인 선과 악을 논한다. 우리는 확실히 자연을 지나치게 도덕화했다 (69~70).

ü  인간(과 자연)의 도덕화, 그것이 바로 문제다 (70).”

ü  19세기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승인한 것이다 (70).

ü  도덕은 그 사회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70).

ü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72).”

ü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 (72).

ü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 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비이기적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73).

ü  그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에서 허무에로의 유혹, 종말의 발단, 죽음과 같은 정체, 회고적 권태, 삶을 부정하는 의지, 궁극적으로는 병의 우울한 징표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유럽 문화의 무서운 징조이기도 했다 (73).

ü  니체는 토양이나 혈통에 있어서의 건강함의 차이를 귀족적인 것노예적인 것으로 나눈다 (74).

ü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고귀한 사람들은 비속한 자들과 달리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가진다 (75).

ü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77).

ü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 …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7).

ü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느 ㄴ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78).

ü  노예들, 약자들, 그들의 정신적 공격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할 때, 그 본능은 안으로 투사된다 (81).

ü  인간은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 (82).

ü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3).

ü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이다 (84).

ü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먼저 병든 자들의 방어자, 의사, 구원자로서 다가 온다. … 니체는 이 돌팔이 의사의 활동을 좀 더 섬세하게 나눈다 (85).

n  첫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n  두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생각 없는 반복적 활동을 통해 병을 내면화시킨다.

n  세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 주는 것. … 사람들은 여기서 냉혹한 사회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들을 맛본다. 성직자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무리를 조직한다.

n  네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 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이 고통에 더 이상 항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ü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86).”

ü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87).

ü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적 덕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88).

ü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90).

 

<3. 투지주의와 광학의지>

ü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95).

ü  우리가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 (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95).

ü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해석학자들은 헤르메스를 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 해석학자들에게 차이는 분명히 골칫거리다 (95).

ü  그러나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 (pathos of distance)’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96).

ü  그가 보기에 과학주의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한 오만의 결과물일 뿐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면 결국 이해 역시 상황에 따라 한정적일 수 밖에 없고 이해를 통해 얻은 지식도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97).

ü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은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103).

ü  그런데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

ü  스핑크스의 눈! …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3).”

ü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 (104).

ü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 (107).

ü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7).

ü  우리 시대 진리의 해석학에서 논리학이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논리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도덕, 즉 가축떼의 도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들이 동등해지는 시대에 논리학은 번성한다 (107~8).

ü  도대체 진리가 있다는 것일까, 없다는 것일까? …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109).

ü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 …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112).

ü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딩다. …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12).

ü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112).

ü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 정신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많이 배운 자들의 해석은 너무 노쇠하다. “많이 배운 자들은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어 버렸다 (113).”

ü  창조하는 자를 그들은 가장 증오한다. .. 선한 자들은 말하자면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113).

ü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의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4).

ü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115).

ü  그녀는 (코프만)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116).

ü  니체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행위이다. 우선 니체 자신이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자이다. … 니체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는 헤르메스다. 니체에 대한 고달픈 주석가들은 다시 니체의 말에 속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 한다 (118).

ü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 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118).

ü  해설학자들은 제우스를 보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은 헤르메스다 (119).

ü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으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120).

 

<4.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ü  지난 시대 많은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의 실패에 그토록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체제자체를 문제 삼는 거대한 비판과 새로운 체제에 대한 소중한 꿈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로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 정치 사상은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121).

ü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122).

ü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어이다 (123).

ü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 군주적 본능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123).

ü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 (124).

ü  니체식으로 보자면 순응주의 사회, 즉 사람들이 한 무리의 가축떼로 전락한 사회느 ss오 지속되어온 서구의 형이상학과 기독교, 그리고 그것이 습속화된 삶이 도달한 곳이다 (124).

ü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 (125).

ü  우리는 니체의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125).

n  첫째는 정치의 형이상화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이 보여준 폭력성이 정치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이를 억합하는 동일성의 정치가 된다.

u  근대 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봉쇄가 두드러진다.

u  우리는 더 이상 가치들이 어떤 것인지혹은 누구의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n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길러내기가 개입한다.

ü  그런데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하나의 요소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측면을 매개해 주는 새로운 우상, 즉 국가에 대한 설명이다. 국가는 근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127~8).

ü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128).

ü  군사적 원시 국가는 군사적 수호신을 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모든 인간과 그들의 노동은 이 수호신의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128).

ü  국가의 원형이 군사적 수호신을 생산하기 위한 무의식적 활동에 있다는 것을 직관을 통해 간파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128).

ü  국가는 바로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계약에 동의한다 (129).

ü  홉스는 국가의 기원에 전쟁을 둠으로써 국가의 도덕적 정당화를 포기했다 (129).

ü  니체가 말하는 국가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29).

ü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131).

ü  고대의 국가가 전쟁에서 기원한다면 근대의 국가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에서 등장한다. 모두가 지쳐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할 때, 새로운 우상인 국가가 등장한다 (131).

ü  근대 정치 체제에도 다양한 유형들이 있어 왔지만,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이름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2).

ü  자유로운 개인을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 (133).

ü  니체는 자유주의자들이 합의된 가치에 포함된 폭력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을 이렇게 꼬집었다: 이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은 법률 속에 있는 폭력, 모든 종류의 속에 있는 냉혹함과 이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제도는 그것이 이룩되자마자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제도보다도 더 철저하게 해가 되는 것은 없다. … 자유주의 그것은 쉽게 말하면 가축으로의 몰락이다 (135).

ü  다음으로 니체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니체는 이것을 선량한 원시인의 권리 찾기 운동이라고 말하고 형이상학적 운동이 그렇듯이 이 운동도 종국에는 기진맥진한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136).

ü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136).

ü  게다가 사회주의자들은 반동적인 운동을 통해 국가 속에서 최고의 이상을 발견한다. …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를 닮아간다 (136).

ü  사회주의의 거친 음성이 가능한 한 더 많은 국가를!’하고 외칠 때, 정반대의 외침이 솟구쳐 나온다. ‘가능한 한 더 적은 국가를!’ 하면서. 결국 이 외침은 사회주의의 실패, 정치의 쇠퇴와 연결되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승리로 연결된다 (137).

ü  그래서 니체는 현대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나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국가의 부흥을 외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 니체에게는 국가란 항상 거짓 신일 뿐이다 (137).

ü  어떻게 보면 유럽의 민주주의는 허무주의의 변증법이 도달한 필연적 현상이다 (138).

ü  니체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 ‘근대성 비판이라는 제목의 소절에서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 (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138).

ü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38).

ü  니체는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고도의 권위를 윤리라고 보았는데, 윤리는 관습에 의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니체는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에 주목했는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는 것들은 개인적인 것, 자유로운 것, 제멋대로인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 예측되지 않은 것, 계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141).”

ü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첫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142).

ü  문명 (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 (142).

ü  잔인한 형벌은 기억술을 위해 동원된다. … 니체는 이 작업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명명한다.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143).

ü  길들임의 작업이 끝나면 길러내기의 작업, 즉 재생산의 작업이 시작된다.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 (143).

ü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44).

ü  이것은 지배적 도덕을 습속화하는 과정이다. 동등하고 규칙적이 되도록 길들여지며 지배적 도덕을 본능화하게 될 때, 니체가 말하는 습속의 도덕이 완성된다. 지배적 도덕이 습속화되면 통치는 사람들의 살갗을 뚫고 들어온다.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144).

ü  각 체제에서 선언된 가치들을 능동적으로 가치 평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허위적 능동성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허무주의는 하나의 지배를 이룰 수가 있었다 (144).

ü  니체가 아곤 (agon)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문화는 정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소재들을 제공한다. 아곤은 보편화나 전쳉화에 빠지지 않는 다양서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적대가 아닌 경쟁을 위해 어떤 정치적 기술들이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46).

ü  그리스인들은 동시대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선조들과도 경쟁했다. 특이하게도 아곤적 문화에서는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과 경쟁할 만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47).

ü  소크라테스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은 덕은 금지들의 모음이며, 그 위반에 대한 처벌들의 나열일 뿐이다 (149).

ü  스트롱은 이것을 (그리스의 폴리스) “시민들은 도시 국가 안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다. 사회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의 선택형태가 자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기반을 제공할 뿐이었다고 표현하였다 (149).

ü  이것은 대단한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했고, 탈레스나 엠페도클레스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은 폴리스가 이러한 아곤적 힘을 상실하지 않도록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였다. 니체는 이것을 예술적 수완이라고 치켜올렸다 (150).

ü  니체가 오늘날의 국가에 대한 유일한 저항 수단이라고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151).

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초월적 기구에 양도하면 양도할수록, 가장 평균적인 자들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대 다수자들의 지배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하는만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니체가 법과 관습, 문화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52).

ü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152).

 

<5.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1)>

ü  그리스인들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교의 창조론이 에서 시작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출발점은 이다. 세계의 기원이나 운동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사고 방식을 잘 보여주는 주장 중의 하나가 원자론이다 (154).

ü  원자론자들은 세계가 원자와 허공뿐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원자들의 영역이므로 신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원자로 구성되든지, 아니면 허공으로 있든지 (실존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신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155).

ü  니체 역시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는 점에서는 원자론들과 통하는 면이 있다 (155).

ü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156).

ü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하며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는 명제 (157).

ü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159).

ü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159).

ü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161).

ü  니체의 의지라는 용어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 능력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힘 안에 내재하는 그야말로 어떤 것이다 (165).

ü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65).

ü  그렇다면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등으로 그려진다 (166).

ü  들뢰즈는 능동적인 것반동적인 것이야말로 힘의 질적인 구분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 (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167).

ü  반동적 힘의 작동 방식에 드러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7).

ü  그러나 능동적 힘 역시 반동적 힘의 질을 변화시킨다. … 능동적 힘에 의해 수많은 부정적 수단들이 긍정적 수단으로 변한다 (168).

ü  금욕이나 단식도 부정의 의도 아래서는 욕망을 억누르는 도덕적 통제의 수단이지만, 강화의 의도 아래서는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배가 시켜 주는 수단이 된다.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 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 (169).

ü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69).

ü  니체가 힘의 내면의지로서 권력의지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정신적인 작용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내면의지의 본질은 명령에 있으니 권력의지는 모든 힘에 내재한 명령 자체이다 (170).

ü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171).”

ü  그러나 결핍된 대상을 얻는 수단으로 권력이 정의되고, 그것을 의지하게 될 경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대상들이나 가치에 대한 종속이다. 한 사회에서 이 높이 평가되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을 강하게 의욕한다면 대부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172).

ü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정의를 구분했는데.. 첫 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 욕망이라는 것.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 아마도 이 첫 번째 정의가 욕망에 대한 통념일 것이다 (172).

ü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3).

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 의지다 (173).”

ü  따라서 그는 이제 허무주의 역시 하나의 권력의지이며 지배의지라고 말한다. …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으며 상황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174).

ü  니체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용어들은 다양하다. …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의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176).

ü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

ü  우리는 부정의 권력 의지가 왜 반동적 힘과 공모하고 긍정의 권력의지가 왜 능동적인 힘과 공모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행위에 대한 금지나 부정, 단념을 조장한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법이나 제도, 관습과 도덕에서 자신의 훌륭한 도구를 발견한다. 긍정의 권력 의지는 행위 자체를 촉진시키며, 더욱이 지속적 행동을 강조한다. … 우리는 행하는 바를 행하고, 우리가 방기할 것을 결정하자. …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나의 신조이다 (176).

ü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자극하는가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 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176).

ü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작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 (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 (약자의 생성)’를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177).

ü  (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178).

 

<6.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ü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180).

ü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180).

ü  원자론자들은 세계를 조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로서 이해했다. 원자들은 영원한 투쟁과 전투를 벌이며, “계속해서 만나고 계속해서 헤어진다. 영원불멸하는 존재란 미신 속에서나 존재할 뿐 이 세계 안에는 존재할 수 없다 (181).”

ü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성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182).

ü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 (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 (183).

ü  한 번 생성된 것은 소멸할 수 밖에 없다이것은 슬프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사물들은 그들이 생성되어 나온 바로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183).

ü  소멸의 여지가 있는 어떤 특성도 갖지 않는 존재만이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면서 영원 불멸할 수 있는 원 존재가 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러한 존재를… ‘무규정자라고 불렀다 (184).

ü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185).

ü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186).

ü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사실상 사물들이 벌이는 생성에 다름 아니다 (187).

ü  니체는 기계론자들의 해석에 반대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 그 놀이라는 순환 운동을 즐기고 있는 세계로서 영원회귀를 묘사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언급에서 보았던 것처럼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188).

ü  세계는 거대한 힘들의 바다다. 세계를 이루는 힘들은 동일한 양이면서도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또 한 곳에 집중되다 다른 곳으로 퍼져가며 하나의 유희를 벌인다 (188).

ü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188).

ü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189).

ü  생성의 반복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영원회귀는 또한 시간을 구성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생성들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191).

ü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전적으로 긍정의 의지 편에서 서서 부정의 의지와 대결한다 (192).

ü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197).

ü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

ü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03).

ü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위계가 나타난다. 긍정은 부정보다 강력하다 (203).

ü  이로써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205).

ü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207).

ü  긍정의 권력 의지가 벌이는 차이의 놀이를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207).

n  그 하나는 다수성이다. … 초월적인 중심은 없으며 모든 것은 각각의 고유성을 표현한다.

n  차이의 놀이를 보여주는 두 번째 차원은 자신의 생성이다. 이 때 생성은 자기와 자기의 차이다. … 니체가 운명애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n  세번째 차원은 우연이다. … 우연은 창조의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ü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208).

ü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 (208).

ü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209).

ü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 (209).

 

<7. 인간>

ü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 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211).

ü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별들에 있어서도 그 존재했던 시기를 측정해 보면 생명이란 한 순간에 확 타오르고 만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이 별들의 존재 목적이나 궁극적 의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211).

ü  오히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 (211).

ü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고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 (214).

ü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이 제 자신의 척도에 자연을 끼워 맞추고, 제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과 다른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자연과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215).

ü  사실 인간은 자연을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 자신도 잘못 이해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하지만 모든 것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해도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 니체는 인간자연’, ‘인간세계사이에 끼어 있는 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5).

ü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216).

ü  제 주검에 깜짝 놀라 되돌아가면 그 길목에는 원숭이가 서 있고, 앞으로 돌아서면 초인이 서 있다.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216).

ü  어떻게 할 것인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초극할 것인가? (217).

ü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결과라면, 초인은 인간의 철저한 몰락으로부터만 출현한다. 초인은 결코 인간이 진화한 종이 아니다. 니체는 초인에 대한 진화론적이해를 경멸했고, 반다윈주의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217).

ü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을 주장한다. 변신이나 변용은 진화가 아니다 (218).

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 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218).”

ü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19).

ü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219).

ü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19).

ü  인간이 진화를 통해서라면 초인은 변신을 통해서 태어난다 (220).

ü  돌 속에는 하나의 형상이 잠자고 있다. … 이제 나의 망치는 형상을 감금하고 있는 감옥을 격노하여 내리친다.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비처럼 흩어진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완성하고 싶다. …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요하고 가장 가벼운 것, 즉 초인의 미가 하나의 그림자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220).

ü  만약 초인이 생성 (변신)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221).

ü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이 인간 종족을 계승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의 종국적 존재이다 (221).

ü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221).

ü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222).

ü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 왜냐하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 즉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면 신의 죽음은 없는 것과 같다 (222).

ü  부처가 죽은 후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세기 동안 한 동굴 속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시켰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종이 존재하기에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동굴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222).

ü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동굴 벽에는 신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신은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방식이다. 신은 인간 이전에 존재해서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것,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인간보다도 늦게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223).

ü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함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후자를 이라고 부른 것이다 9223).

ü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223).

ü  루터는 신 그 자신이 현명한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니체는 그가 정작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신은 우매한 인간 없이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는 것 (223).

ü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224).

ü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 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224).

ü  과연 인간의 몰락과 신의 죽음을 복음으로 이해하는 자는 없는가? 신에게 항변하고 신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없는가? 마이스터 에카르트처럼. “나는 나로부터 신을 제거해 줄것을 신에게 요구하고 있다그리고 스탕달처럼. “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25).”

ü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225).

ü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225).

ü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밤은 거대한 변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탄생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나귀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제의를 올린 것이다. 낡은 신은 나귀의 모습으로 부활했고, 사라진 줄 알았던 신앙심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29).

ü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친다 (230).

ü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231).

ü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과 자기 극복,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 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231).”

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231).

ü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1).

ü  왜 보다 높은 인간들은 변신에 실패했을까? 그들에게는 초인과 영원회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에게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231~2).

ü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른다. 차라투스트라가 왜 아이들의 나라만을 사랑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이지만, 그들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위험성과 확실성을 따져야 하는 과학이 된다. …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232).

ü  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차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라! (232).

ü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춤출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 뛰기와 넓이 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233).

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3).

ü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233).

ü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귀를 구한다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는 이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은 신호로써 끝난다. 디오니소스가 비로서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가 비로소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신체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234).

 

<8.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ü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이름은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착화시킨다. ..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사실 이름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가장 오해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236).

ü  <즐거운 지식>의 제 2판 서문에서 니체는 니체씨를 떠나자고 말한다. .. 그는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와 내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나를 나 자신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237).

ü  이 점에서 니체의 자전적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 사람을 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저작이다. … 니체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생애조차 별도의 책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ㅈ는 게 안리까? 사람들은 저자의 생애를 모든 작품들의 근원으로 이해하지만 니체는 그것 역시 하나의 작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237).

ü  니체의 이름 안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니체들이 들어 있다. …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니체라는 이름 바깥에도 니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238).

ü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8).”

ü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38~9).

ü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239).

ü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신의 힘, 그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 (240).

ü  니체는 바그너 음악이 사람들을 하나의 무리들로, 아무런 개성도 없는 평준화된 무리들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243).

ü  시간은 단절된다. 1878년부터 1881년 사이에 그는 중요한 변신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 니체를 만난다 (245).

ü  어느 덧 으르렁거리던 사자는 자신의 장난감을 쥐고 있는 어린 아이가 되어 웃고 있다 (245).

ü  <차라투스트라>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사도로서 니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246).

ü  니체는 이 책이 완성된 시각이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죽은 시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공표했다. 바그너는 제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제국적인 것에 대한 반대, 국가와 교회라는 우상에 대한 반대! (246).

ü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이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247).

ü  병균 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의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47).

ü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248).

ü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괌루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이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 2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 (250).

ü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250).

ü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0).

ü  그는 독일적인 국가주의와 인종에 대한 증오를 증오했다 (251).

ü  여성이 그 방랑자를 숭배해서 정착시켰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영원히 방랑하기를 멈춘 것이다. 그는 결혼했다. … 그를 숭배한 여성이 그의 파멸의 근원이다 (252).”

ü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 외부란 계산되지 않은 힘들의 영역, 지배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힘들이 영역이다 (252).

ü  여행자의 목소리는 전쟁을 시작하는 나팔수의 나팔처럼 시끄럽지 않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252).”

ü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253).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ü  어떤 점에서 근대는 제 발로 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제 발로 서야 하는 시대다. .. 더 이상 유대-기독교라는 보편 종교가 모든 사건을 해명해 줄 수 없고, 더 이상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로서의 근대! (258).

ü  이렇게 보면 근대가 시작되는 공간은 절대신의 무덤 속과도 같다. … 그동안 그를 떠받들어 왔던 신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신의 묘지기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를 장사지내고 다른 신을 찾아 나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앙마저 장사지내고 제 발로 설 것인가? 인간들에게 신의 무덤은 새로운 생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258).

ü  우리가 막스베버를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 속에서다. 그는 무덤으로부터 새로운 시대의 인간들, 다시 말해 근대인들이 탄생했음을 보았다 (258).

ü  그에 따르면 근대인들이 그 절대적 신을 장사 지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마저 장사를 지낸 것 같지는 않다 (258).

ü  베버는 근대인들이 주술로부터 벗어나 과학의 시대로 이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탈주술화야말로 무덤에서 나온 또 다른 신의 주술이라는 것을 포착했던 것이다 (259).

ü  근대의 자연과학은 신앙들을 추방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신앙을 확보해 나갔다 (259).

ü  합리성이라고 불리는 이 탈주술화된 주술은 근대인의 모든 생활 질서 속에서 나타난다 (259).

ü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해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260).

ü  중세인들은 교회에서만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근대인들은 가정에서도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262).

ü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 (시간표)의 도입이었다 (265).

ü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 (266).

ü  합리적인 시스템이 개인들의 일상 생활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이나 제도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 관료제다. 베버는 관료제를 기계라고 불렀다 (266).

ü  관료제란 개인적 수준에서는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계획표일 것이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거대한 행정 체계 및 사회제도들을 의미한다 (266).

ü  소명 의식에 불타던 근대인은 언제부턴가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의거해서 수동적으로 일 처리에 동원되고 있는 암울한 근대인으로 돌변해 버렸다 (267).

ü  처음엔 시간표든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268).

ü  그는 이른바 과학적 경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수도원과 군대의 합리적 훈육이 발전된 형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271).

ü  신체의 자연적 리듬을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새로운 리듬으로 대체하는 것! 신체는 새롭게 길들여진다. 그리고 길들여짐으로써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이 새로운 신체는 통제나 관리가 훨씬 쉬워진 신체다 (271).

ü  적어도 신체를 부품화하는 훈육 작업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는 것 같다. … 하지만 이 과정은 항상 가혹한 폭력을 수반한다 (272).

ü  니체는 이러한 끔찍한 폭력을 기억할 수 있는 동물 기르기라고 묘사한 바 있다. 잔인한 폭력을 통해 스스로 어떻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지에 대한 기준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273).

ü  약속하는 신체는 더욱 큰 계산 가능성을 보장하고 더 큰 사회적 안정을 가져온다. 약속은 미래 행위를 고정시키는 일이고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잇는 변동을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이제 통제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이 되고,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된다. 베버가 말하는 철창이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것은 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내적인 감옥이기 때문이다 (274).

ü  테일러의 지적처럼 근대적 주체성의 큰 특징은 내면의 세계에서 생겨난, 다시 말해서 신체와 분리되어 영혼이 확보하게 된 거리이다. 이 내면의 거리는 의심과 반성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277).

ü  베버는 소명 의식과 거리 두기 능력, 책임감 등을 가진 정치인에게서 관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발견한다. 이러한 정치인이야말로 그가 보기엔 관료제 기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279).

ü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의 출현이 낳은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뿐이었다 (280).

ü  근대가 맞딱뜨린 가장 큰 문제를 영혼의 상실로 보고 있는 베버는 그 해결책을 영혼의 회복에 두는 것 같다 (282).

ü  합리적 수단의 효율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그것의 지배를 막아낼 수 있는가? … 베버의 정치적 저작들을 보면 그 성공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283).

ü  베버가 멈추어 선 곳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성하는 합리성보다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284).

ü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했다. “자연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나 욕망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 자신이 원인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285).

ü  니체는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 (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리의 열정이란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힘과 능력을 긍정하고, 그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차이 (거리)를 생산해내는 열정이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자들을 니체는 가치의 신봉자가 아니라 가치의 생산자라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나 신성한 가치를 신봉하기 위해 제 자신을 합리적 기계 속에 던져 버리는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내적인 거리거리의 열정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제 스스로가 이용할 가치를 생산해 낸다 (286).

ü  확실히 근대인들은 절대신의 무덤 속에서 절대신을 장사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까지 장사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복종할 새로운 신들 (다이몬들, 종교적 신, 과학적 진리, 최대다수의 행복, 국가 등)을 찾아냈을 뿐이며 복종 자체를 폐기시키지는 못했다. 합리성이란 프로테스탄트로 대표되는 근대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가치들을 으ㅟ해 제 안에 있는 욕망과 능력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287).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ü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적 상황은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다 (288).

ü  68 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전통적인 영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학개혁, 가부장적 권위주의, 권위적 민족주의, 성에 대한 억압,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권위적인 노동조합과 당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욕망과 가치의 투쟁을 불러 왔다 (288~9).

ü  그 공격을 단지 부당하게만 여겼던 구좌파들은 68혁명에 대한 어떤 이해나 대응도 취하지 못했고, 결국 68을 뒤집은 89년의 복수로 쇠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파들에게 68혁명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289).

ü  1968년 이후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파들의 생각을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289).

ü  니체가 허무주의라 명명했던 서구 사회의 현실, 바로 주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율적 능력을 소진하며, 그 동안 시민들을 키워왔던 전통적인 공동체들이 붕괴되는 현실이 위기의 원인이다. 위기는 전쟁이 아니라 질병에서 온다! (292).

ü  탈산업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은 푸코나 데리다 등의 ()니체주의자들의 공격에 전혀 성공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292).

ü  68혁명 이후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것이 초래한 재정적자와 비효율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 않는다 (293).

ü  이것은 현대 국가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293).

ü  아마도 근대 정치철학자들이 만들어 냈던 국가의 모습들은 다양하게 해체되어 현대적 맥락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295).

ü  이런 상태에서 제일 먼저 요구되는 자연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화를 추구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네가 너를 위해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296).

ü  이것이 바로 국가, 리바이어던의 탄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호 계약에 의해 평화와 공동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격이다 (297).

ü  홉스적 국가는 개개인이 정치적 부담을 양도함으로써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국가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297).

ü  자유주의는 명백히 아나키 상태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의 문제즉 안정성이다 (304).

ü  앞서 말했듯이 전쟁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공동체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병적 상태였다. 대중들의 소외,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전통적 가치관들의 해체와 같은 병리적 상태가 공동체주의자들이 인식하는 문제다 (309).

ü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어주던 수많은 공동체들이 점차 소멸하고 사람들은 점차 동질화되고 있다 (311).

ü  여기서 우리는 차이의 문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동질화를 비판하고 차이의 소멸을 우려했던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전체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313).

ü  다양성이 파괴되고 동일성이 드러날 때 이러한 공동체는 파괴되고 만다 (317).

ü  차이의 아상블라주에 대해 전망하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생태학과 미학은 그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319).

ü  낯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 정치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다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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