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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대해서
출생과 학업 (1844 – 1869)
니체 1861년 모습 니체는
186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입학하였다,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입문 과정을 이수 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 아마도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란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자원하여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해동안 복무하였으나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고 다시 그의 학업에 집중 할 수 밖에 없었다.
바젤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1869–1879)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눠진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이 교수직을 사임했다(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독립 철학자 생활 (1879–1888)
바젤 대학교에서 나온 이후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의 발병으로 어둡고 괴로운 말년을 보내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작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즐거운 지식>에서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한 것은 유럽을 비판한 것으로, 키에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으나, 사망 이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니체의 저작
1872년 : 《비극의 탄생》
1873~6년 : 《반시대적 고찰》
1873년 :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1874년 :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1874년 : 3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1876년 :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1878~9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81년 : 《아침놀》
1882년 : 《즐거운 학문》
1883~5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부
1884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1885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비공개 출판)
1887년 : 《즐거운 학문》 개정판 서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8년 : 《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내가 저자라면
니체의 철학과 삶 그리로 영향력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의 저자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트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니체의 철학의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관습과 법으로부터 벗어난 초인을 모습이다. 니체는 그 초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차라투스투라라는 인물을 통해 초인의 사상과 이념 및 가치등을 해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사람이다. 니체는 조로아스터의 이야기를 가져와 자산의 책에 사용했는데 차라투스트라도 조로아스터와 마찬가지로 10년 동안 산속에서 명상과 수련을 반복했고 사람들에게 꿀처럼 달콤한 지혜를 나누어 주어야겠다며 길을 떠났다고 한다
니체는 이 인물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런 역사속의 인물을 활용하여 니체 스스로의 정신적 가치를 상징화한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왜 그는 하나의 인물을 선택하였으며! 니체 자신의 말이 아닌 대변자를 새롭게 창조해 냈을까? 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나의 궁금증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니체를 처음접한 것이라 하겠지만, “ 신은 죽었다 “의 주인공 니체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지라 그런 그의 말이 경망스럽고 왠지 부적절한, 기피해야 할 사회의 악의 존재로서 미친사람이라는 느낌으로 그를 대했던 것 같다.
“광인” “광기” 이것이 그를 상징하는 사회의 언어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외자” “탈주자” “위험 인물” “미래의 아들”로 간주한다.
니체 그리고
과거, 니체의 사상은 과거에 있지 않다. 그러나 니체는 과거의 인물이다.
그 극적인 만남은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 여기에 있으니 이 것을 다 담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 하여 핵심적인 부분만 간추려서 내용을 글의 구성을 따라가 볼까 한다.
우선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은 니체가 가지고 있는 생각하는 방식을 표현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천개의 다른 차이가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진리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리’가 없는 것을 어떻게 ‘진리’처럼 얘기할 수 있는가! 반문해 볼 수 있는데
마치 니체는 먼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 아주 가까이에 깊숙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유리한 것이 ‘사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주제인 것처럼 그도 그렇게 우리를 유혹한다.
철학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까? 이 질문은 다시 철학 자체의 건강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 철학 자신은 얼마나 건강할까? 철학에 대한 진단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철학에 “청진기를 대는 일”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이 장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철학 그것이 바로 니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러나 니체가 더욱 부각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시대의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스도의 철학과의 한판대결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 한판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관념들과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장은 역대 최고의 철학가들과 홀로 선 니체와의 짜릿한 승부의 장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며 인간의 한없이 모자름을 지적하고, 그리스도는 인간이 신의 분노를 샀으니 그 죄값으로서 살아야 한다며 인간을 죄지은자로써 죄책감으로 살게 할 때 니체는 이 땅속 위에서의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가리킨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한판승부중 승자를 니체로 여긴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우리 삶의 주요한 부분이 되지 못햇다. 그것이 아쉬웠을까?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르레상스적 덕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한나 피트킨에 따르면 르네상스에서 덕은 능력이나 힘을 의미했다
이 책에서 주요하게 살펴볼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도덕적 금기 즉 니체의 표현으로는 ‘노예적 도덕’의 틀 속에서 가치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박탈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에서 학교에서 이 사회의 도덕에서 규정된 틀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 틀에 대한 규정으로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비평과 성직자들이 많은 신도들을 죄인으로 의식화 하였다는 것, 강한자가 아닌 약자들의 논리로 강한자를 끌어 들였다는 것 그것을 ‘도덕이라는 동물원’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물원에서 빠져나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강한자와 선한자의 개념에서 이다. 니체의 철학이 강자의 철학이라는 오해도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다음의 글로 유추해 보길 바란다.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이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제 3장역시 2장의 계보학에 대한 소개처럼 어떻게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을 볼 수 있게 되었나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니체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기술에 대한 이해의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3장에서는 해석학이 무엇이고, 니체의 해석학은 기존의 해석학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준다. 기본적으로 해석학은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 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인데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는 진리를 끄집어 내었다. 사실 니체의 해석학을 해석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아래의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이 해석학은 새로운 생성을 위한 해석이며, 그 차이를 드러내고자하는 의도로서 존재하는 듯 하다. 특히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는 니체의 힘을 빌린
그렇다면 위대한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다루는 장이 다로 다음장 4장인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니체는 전쟁 즉 힘의 충돌로써 원자론을 끄집어 낸다. 왜냐하면 원자론이 이 시대의 절대성이란 명목으로 신격화 되어 신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대성처럼 보이는 원자를 해석하여 분해해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길들여진 고정관념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그래서 원자론을 힘이라는 용어로 대처해 버렸다. 아무리 분해해도 원자인데 원자에도 신의 영혼이 있으니 그것이 신의 위대함을 상징한다는 속성을 타파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외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오랜 동안 가르쳐온 보다 해로운 원자론, 즉 영혼 원자설에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이것은 영혼이 불멸하고 영원하다는 신앙을 가져왔다. ‘사멸하는 영혼’’공동 주체성으로서의 영혼’’충동’과 정동등의 개념이 시민권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야한 양을 가졌으면서도~~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구 자체이다.거기서 그는 힘의 내면의지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권력의지라는 것을 명명하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하물며 “행복의 최초 효과는 권력 느낌이다. 이 권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의해서든, 상상에 의해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욕망은 욕망자체가 아니라 욕망이 지시하는 의도에 있는 것일까?
욕망의 의지란 무엇인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다음의 6장에서 영원회귀를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사상의 총체성을 정리해 준 개념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불의 철학이다.
나는 도울
니체는 이 불에서 자신의 철학의 한계를 극복 할 수 있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정체된 버린 자신의 철학이 왜? 가지가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순간’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니체의 철학이 사는 곳이다.
살아있음 계속적인 변화, 끊임없는 노력, 어떠한 진리도 없으며 오직 다시 창조하는 세계
그곳에선 파괴마저 신선한 용도로 사용된다.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생성된다. 우연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생성들의 충돌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우연은 다시 생성된다. 그 우연들 속에서 니체는 말한다. “ 신은 죽었다 “
고정되어 있는 모든 것, 정체되어 있는 모든 관념은 진리가 아니다. 세상은 이렇게 불처럼 매일 매순간 변화해 왔고, 변화되어 갈 것이다. 초인은 그 변화를 몸으로 실천하는 변용된 사람이며, 그 초인이 결국 신이라고 한다. 그것을 깨닫고 오늘을 살라고 한다.
인간의 몸은 2개의 몸이며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다. 그것은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잠재가능성으로서의 능력이다. 초인은 바로 인간이면서 신처럼 사는 인간이다.
그 신이 된 인간이 초인이다. 그 초인의 얼굴을 다음 8장에서 들어다 보자.
나는 첫번째 말고도 두 번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아마 세 번째 얼굴도 있는지 모른다. 이제 니체씨를 떠나자. 니체씨가 다시 좋아진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8장 N개의 얼굴,N개의 철학은 변화무쌍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니체의 철학은 고정적이지 않고 늘 변화하기에 기존의 관념들을 깨고 새로운 인식을 찾아주는 데 영향력을 발위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변심의 힘, 드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리우나 보다.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고 니체는 말하였다.
나는 이 장을 끝으로 창조성이란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혁신과 닿아 있고, 혁명과 물려있다. 시대의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펼쳐놓는 것 아니 그것을 즐겁게 즐기며 사는 것이 창조성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안정”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지속하는 것으로서의 안정임을 재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미래의 모습을 N개의 얼굴로서 N개의 철학으로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그게 삶이다!
세상에는 N개의 고정적인 이름이 생성되며, N개의 고정관념이 생성된다. 그만큼 N개의 기회가 나에게 열려져 있다. 깊이 들어가보면 N개의 변화되어야 할 무한한 기회가 열려있다. 그것을 느끼고 봐야 한다. 내 비즈니스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정돈될 필요가 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자로서 초인으로서 다시 새 얼굴을 그려봐야 겠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키에르 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3]
장님이 된 철학자는 밝은 대낮에도 암소들이 색깔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실 세상에 “엄만소와 똑 같은 송아지는 단 한 마리도 없다”[3]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3]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3]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트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4]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4]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4]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4]
철학이 사람들의 두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국가의 시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때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광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4]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발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는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미친 것’과 ‘아픈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그와 그의 사상을 정신병원으로 보냈지만, 그는 자신의 광기가 건강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두뇌 훈련과 싸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가 ‘미쳤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보편점 신념이나 시대 정신의 구속을 견딜 수 없었기 떄문이다.[5]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으로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5]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창조와 생성, 그리고 변신이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나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잇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6]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함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7]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졍을 보면 알 수 있다. “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7]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8]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할 수 있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명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8]
끝으로 독자들에게 이 책의 토양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필요할 듯 싶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나마’>의 자유로운 공기와 풍성한 대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8]
1.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 체제 –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27]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을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18]
3. 천 개의 기원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18]
4. 천 개의 젖가슴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19]
5.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 두었다.[19]
6.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 아포리즘과 화살”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20]
7.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20]
8. 천 개의 이야기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끊이는 법- 나는 어떠 ㄴ우연이든 나의 냅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 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 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을리라.—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21]
1장 아모르 파티 ;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의 철학은 철학의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철학, 혹은 철학 외부에 위치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25]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전체를 설명해 주는 질서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27]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27]
확실히 니체는 자신과 철학의 관계를 철학 외부에서 맺었다. 니체의 철학이 생리학이나 병리학, 징후학, 자연학등의 모습을 띠는 것도 이 떄문이다.[28]
철학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까? 이 질문은 다시 철학 자체의 건강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 철학 자신은 얼마나 건강할까? 철학에 대한 진단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철학에 “청진기를 대는 일”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28]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29]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 있다. 니체는 자신이 대결하고 있는 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른다. 니체가 철학자들을 죽음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어떤 생성도 없는 영원불명의 세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29]
서구 철학의 거대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를 기소했던 그리스 법정은 그를 “땅 아래와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는 기이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던 이유는 ‘이 세계’에서 진리를 찾지 않고,그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설교자’라는 니체의 공격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정의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만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아 있는 영혼은 육체의 제약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이 설교인 것은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벌어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30]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면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롱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메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댈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소망한다. 그렇게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제발 빨리 그들이 원하는 세계, 천국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기를…[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다릴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31]
생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이 부딪친 과제 : 철학을 치료하는 철학, 삶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덜어주는 철학, 삶으로부터 죄의식을 걷어 내는 철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삶을 긍정하는 철학, 삶의 사랑하는 철학은 가능할까? 불행히도 서구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져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라는 두 스스으이 죽음.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31]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소크라테스가 진리의 기준으로 내세운 ‘보편성’ 앞에서 그리스인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초라함과 부족함을 고해바칠 수밖에 없었다.[33]
진리는 고딕의 첨탑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진리를 잃어버린 개별적 존재들은 한없이 낮아졌다. ‘너 자신의 초라함을 알라!’[33]
신한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누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33]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해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33]
거인족이 상승의 백터라면 난쟁이는 거대한 하강의 벡터다. 니체의 저서 속에서 난쟁이는 “중력의 영”으로서 거인족들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무겁게 만드는 존재,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날개를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 모든 춤추는 존재들, 모든 유목하는 존재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중력은 또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상징한다. 그것은 모든 우연들을 필연에 종속시키는 강제적 ‘법’이다. “우연이 갖는 귀족성”은 필연의 힘 아래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34]
니체는 올림포스 산에서 펼쳐지는 거인족들의 이야기도 들여준다. 그곳에서 피조물은 인간이 아니라 신들이다. 그곳에서 한숨을 쉬는 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신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긍지를 위해 신들을 이용한다. 신은 그렇게 활용되기 위해 창조되었다.[35]
그리스 신화 속에서 죄가 들끓는 곳은 ‘이 세계’가 아니라 신들의 세계다.[35]
그리스인들은 삶에 죄가 있다는 죽음의 설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삶이야말로 무구한 것이라고 말한다.[36]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인간이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삶’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오히려 ‘삶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다음으로 나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37]
가장 위대한 영웅일지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37]
그리스 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38]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39]
극장이 관객들을 바보로 만든다면 법정은 그들을 죄수로 만든다.[48]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랑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49]
미래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자향하고 있는 바다.[49]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할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50]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난 뒤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50]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50]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더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51]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틴 짓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51]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52]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53]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53]
그가 “기독교는 유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부패’이며 ‘타락’이다.[56]
사랑의 의미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56]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무리나 신도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57]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9]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일까? [59]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2장 강한자와 선한 자
도덕은 사물과 행동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60]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63]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지가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65]
도덕학자들은 도덕을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겠지만 도덕이야말로 인위적인 조작 행위다.[69]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가치중에서 니체가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 비이깆거 가치, 즉 연민이나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미화하고 신성시해서 ‘가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73]
니체는 ‘좋음’의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고귀한 사람들은 비속한 자들과 달리 자신이 창조한 가치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가진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좋음’이나 ‘정의’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다. 이러한 방식의 질문이 묻고 있는 것은 그 덕의 주인이다.[75]
그리스에서 좋음을 표현하는 단어인 아가토스는 좋은, 태생이 훌륭한, 온화한, 용감한, 능력있는 등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귀족 혹은 강자의 특성을 나타낸다.[76]
강한자는 선한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합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77]
사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어 왔다. 강자와 지배자를 쉽게 혼동했던 사람들은 니체의 철학을 지배자를 위한 철학이라고 불렀다.[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이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자비야말로 법을 넘어서는 강자의 특권이다.[83]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84]
네번째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성직자들이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자를 죄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86]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87]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 르레상스적 덕이란 도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한나 피트킨에 따르면 르네상스에서 덕은 능력이나 힘을 의미했다. [88]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해석학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는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다.[92]
장사꾼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와 거래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 상업과 부귀의 신이기도 했다. 상업과 부귀는 거짓말과 도둑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스인들도 이해했던 것일까?[94]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95]
우리가 니체의 해석학을 다른 해석학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해석학과 니체의 구분선은 제우스의 의중에 있기 보다는 헤르메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95]
인간의 삶과 문화는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100]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103]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103]
우리의 습관화된 관찰은 여러 현상들을 단일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사실들이라고 부른다. 또 이 사실들과 다른 사실들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각각의 사실들을 고립시킨다. 그러나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104]
인과성이 법칙처럼 신앙으로 완전히 길들여진 경우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종족이 몰락할 정도로 혈육화된 것이라고 해도, 이것 때문에 진리란 말인가? 얼마나 희한한 추론인가? 마치 진리는 인간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증명이나 되고 있는 것처럼…[106]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화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107]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다. 따라서 세계에는 아무런 진리도 없다. 니체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그것이 상대주의의 절대성이라고 해도- 진리, 모든 해석을 수렴시킬 수 있는 매듭은 없다. 그 이유는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110]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한느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110]
특히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나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111]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다.[112]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112]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114]
니체는 “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115]
이제 나의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이다. 기호와 템포를 포함하여 기호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의 상태, 파토스의 내적 긴장을 전단한다는 것, 그것이 모든 스타일이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내적 상태의 다양성이 아주 크기 때문에 아주 많은 스타일의 가능성을 자기고 있다. 그것도 이제까지 한 인간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스타일이다.[116]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119]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이 생태주의적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120]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떄문이다.[122]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 “군주적 본능”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123]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126]
길들임의 작업이 끝나면 길러내기의 작업, 즉 재생산의 작업이 시작된다. 강제된 덕목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본능이 되어야 한다.길들이기의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니체는 학교보다 군대가 열등한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학교의 도움으로 저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런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144]
그리스인들은 동시대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 즉 자신의 선조들과도 경쟁했다. 특이하게도 이곤적 문화에서는 자신이 지나치게 성공한는 것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과 경쟁할 만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공이 신의 시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147]
위계 질서, 능력간의 거리, 서로 서로를 독립시키면서도 적대적으로 만들지 않는 기술, 어떤 것도 혼합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화해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혼돈과는 반대되는 저 거대한 변화는 비밀스런 과업이자 예술적 수완이다.[150]
이제 안정성은 힘의 안정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 문화의 안정성이 되고 만다. 사회는 힘을 상실하고 정태적인 제도만이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안정성을 생성의 힘에 둘 것인지, 법과 제도에 둘 것인지는 그리스의 정치 체제와 오늘날 우리의 정치 체제를 가르는 중요한 구분선이 될 것이다.[151]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152]
세계가 무에서 시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또한 무로 돌아갈수도 없다. 세계에는 구성 요소들이 빠져나갈 어떤 외부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 외부가 없다는 사고방식은 세계를 창조할 창조주가 서 있을 공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154]
에리쿠로스는 제자 헤로도토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한편 우주는 항상 현재의 모습과 같으며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변화하게 될 지향점이란 없으며, 우주의 외부 안에는 우주 안으로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154]
원자론자들은 세계가 ‘원자와 허공뿐’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원자들의 영역이므로 신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원자로 구성되든지, 아니면 허공으로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신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155]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힘의 첫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159]
힘은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힘은 다른 힘들의 종합이다.[159]
힘의 두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기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159]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오랜 동안 가르쳐온 보다 해로운 원자론, 즉 영혼 원자설에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이것은 영혼이 불멸하고 영원하다는 신앙을 가져왔다. ‘사멸하는 영혼’’공동 주체성으로서의 영혼’’충동’과 정동등의 개념이 시민권을 얻을 필요가 있다.[160]
힘의 세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잇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정이’나 ‘불변’과 항쟁하고 있으며,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본질은 유동적인 것이다. 힘의 양이 고정된 것처럼 보일때조차 그 성격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화’는 힘의 앞지를 수 없는 본질”이다.[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야한 양을 가졌으면서도~~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구 자체이다.[161]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공격적인 것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한느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니체는 강함과 약함이 능동과 반동을 고유함으로 갖고 있다고 보았다. “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시작된다.”[167]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에 드러난 의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능동적 힘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박탁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것이 반동적 힘의 내적 의지이다. 우리는 힘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의 의지, 즉 권력의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7]
고급의 인간이(귀족적 인간)이 이제는 노예가 가진 덕의 가치 척도에 따라 스스로를 측량하고 –고급한 고유성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강자가 약자의 덕에 맞추어서, 귀족이 노예의 덕에 맞추어서 살아간다![168]
결국 우리는 힘들의 질적인 차이가 그 내면에 있는 의지나 의도,다시 말해서 ‘권력의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권력의지의 차이이다.[169]
힘의 내면의지의 본질은 명령에 있으니 권력의지는 모든 힘에 내재한 명령 체제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힘이란 항상 다른 힘에게 명령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170]
의지란 본래 주인으로서 욕망을 다룬다. 즉 그것에 방향과 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171]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나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173]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173]
사실상 해석은 “무언인가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다. 어느 것이 해석하는가? 권력의지가 해석한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177]
행복의 최초 효과는 권력 느낌이다. 이 권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의해서든, 상상에 의해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178]
권력느낌이 권력의지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지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가 권력의지를 경험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행사함을 통해서이다.”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육체” 육체, 육체는 자신의 감수성, 민감성을 드러내고 행사한다.[178]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게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이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179]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들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179]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2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185]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처럼 영원 불멸하는 곳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사실상 사물들이 벌이는 생성에 다름 아니다.[187]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게 아니라 힘으로서 편재하고, 힘과 힘의 파랑이 벌이는 유희로서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여기서 모이면 저기서 감소하고, 광포하게 밀려들고 넘쳐드는 힘의 대양이다. 영원히 방황하면서 영원히 달음질쳐 돌아오는 회귀의 세월을 거듭하여,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188]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189]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191]
영원회귀란 존재의 세계를 생성의 세계로 만드는, 혹은 “그것들을 근접시켜”이해하는 표현이다.[192]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192]
차라투스투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 두 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 “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이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196]
니체는 반 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197]
그에게 반복은 두 번째 의미, 바로 새로운 생성의 반복으로서 다가왔다. 시간은 부담스럽기는커녕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생성이 반복될수록 양산되는 것은’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198]
맑스의 말을 빌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200]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영원회귀도 초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202]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느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202]
우선 첫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205]
니체가 운명애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208]
세번째 차원은 우연이다. 우연이란 차이가 모든 것 속에 분포된 상황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208]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너는 “ 너 자신을 영원회귀의 원인들의 일부로 만들 수 있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를 의욕 하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의 원인이고 싶어하는가?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다 [208]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 모든 쾌락안에서는 원환의 의지가 꿈틀거린다.”[209]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209]
인간이라는 말은 측량자를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212]
니체는 인간의 유일하게 위대한 점은 곧 몰락할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217]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217]
인간이 진화를 주장한다면 초인은 변신과 변용을 주장한다.[218]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 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219]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 진다.[219]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아나타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너는 해야만 한다만 조냊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219]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219]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그 번개이며, 그가 바로 그 광기이다.[220]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거인,강자,귀족,주인,어린아이다.[22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은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221]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222]
신은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방식이다. 신은 인간 이전에 존재해서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것,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인간보다도 늦게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이 가진 두 측면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223]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인간’ 후자를’신’이라고 부른 것이다.[223]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223]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이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움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신앙을 가진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231]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초인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 세가지, 놀이와 웃음과 춤이 있다.[232]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232]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선택적으로만 만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다이노소스의 신호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귀를 구한다.”보다 높은 인간들에게느 이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귀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은 “신호”로써 끝난다. 다이니소스가 비로서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가 비로소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신체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234]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나는 첫번째 말고도 두 번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니 아마 세 번째 얼굴도 있는지 모른다. 이제 니체씨를 떠나자. 니체씨가 다시 좋아진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235]
‘이름 부르기’를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알튀세의 지적처럼 이름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서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이다.[236]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238]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여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잇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
니체, 그는 우리에게 변심의 힘, 드리고 변신하는 힘으로 불린다.[240]
예술이야말로 삶의 최고의 과제이며, 진정한 형이상학적 행위이다. 음악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형이상학적인 위안을 제공한다. 음악은 현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으지 자체의 직접적 모사이고, 세계의 모든 물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이며, 모든 현상에 대한 ‘물자체’이다.[241]
차라투스투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사도로서 니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246]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 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248]
자신을 찾는 길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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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코드 ![]() | 백산 | 2009.11.09 | 4519 |
2105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 書元 이승호 | 2009.11.08 | 3451 |
2104 | 북리뷰 29 - 삶의 기술 - 안셀름 그륀 [2] | 범해 좌경숙 | 2009.11.08 | 4166 |
2103 |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 | 정야 | 2009.11.03 | 2994 |
2102 |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 희산 | 2009.11.03 | 2713 |
2101 | 사람에게서 구하라 <수정> [5] | 혁산 | 2009.11.03 | 2724 |
2100 | [28] 아니타 로딕의 <영적인 비즈니스> [1] | 수희향 | 2009.11.03 | 2706 |
2099 |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 혜향 | 2009.11.03 | 2718 |
2098 |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1] | 書元 이승호 | 2009.11.03 | 3142 |
2097 |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심리학 [1] | 백산 | 2009.11.02 | 8052 |
2096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 예원 | 2009.11.02 | 4107 |
2095 | 북리뷰 28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 고병권 | 범해 좌경숙 | 2009.11.02 | 2702 |
2094 |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효인 | 2009.11.02 | 2825 |
2093 | 포트폴리오 인생 - 찰스 핸디 | 혜향 | 2009.10.26 | 28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