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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9일 11시 52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고병권 지음/ 소명출판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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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고병권은 1971년 전담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니체에 대한 연구(논문 제목 :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화폐에 대한 연구(논문 제목 : 서유럽에서 근대적 화폐구성체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연구공간 수유 + ‘너머’>의 공동 대표인 추장을 맡고 있으며(그래서 그를 ‘고추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부커진R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등 총 6권의 저서와 3권의 번역서가 있다.

 

그가 주로 활동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그의 지적 작업의 중심점이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기, 산책하기, 사랑하기를 배우며 자신의 지적 토양을 다졌다고 말하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함께 활동하는 그의 지인들이 바라본 그는 일상에서 항상 웃고 있다고 한다. 니체가 말한 '긍정의 힘'이 그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 웬만한 일로는 화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가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행복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면에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고 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인데,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고 한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 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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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리히 빌헴름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8월 15일 – 1900년 8월 25일)은 19세기의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1844년 독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5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으며, 1865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 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스위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사색과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6개월 동안 무려 5권의 책을 출간한 이후 그 해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1889년 1월 거리에서 쓰러진다. 바젤의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그는 그때부터 11년간 뇌 손상과 정신착란으로 살아가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 머리에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3]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4]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5]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창조와 생성, 그리고 변신이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니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 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6]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7]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7]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7]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8]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17]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의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 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18]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18]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19]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19]

 

 “아포리즘과 화살.”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20]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20]

 

 

1부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누구도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26]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행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27]

 

니체가 보기에는 잘못된 철학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28]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29]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그들 역시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삶의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음을 비웃고 있다.”[30]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31]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초라함과 부족함을 고해바칠 수 밖에 없었다.[32]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33]

 

거인족이 상승의 벡터라면 난쟁이는 거대한 하강의 벡터이다.[34]

 

그리스인들은 삶에 죄가 있다는 죽음의 설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삶이야말로 무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삶의 고통을 발견하며, 그것의 공포와 전율을 경험한다. 다만 그들은 그 비극성이 죄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36]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이지 결코 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넘쳐 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젠가는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37]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38]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주신제(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찢겨진 신체들이 모아져 디오니소스가 부활하기를 바란다.[39]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 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40]

 

차라투스투라의 여정을 거쳐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41]

 

하나의 파괴는 다른 생성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의 건너뜀은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 떄문이었다.[41]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고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49]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된다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 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51]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52]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가진 전사로 등장한다.[52]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 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53]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 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54]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55]

 

니체가 “기독교는 유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부패’이며 ‘타락’이다.[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56]

 

그가 구했던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친구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5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57]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8,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 니체의 계보학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63]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63]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 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63, 64]

 

탐사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날 수 있는 대단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다. 그러나 탐사자는 용기 있는 것 못지 않게 박식해야 한다. 파편 하나도 세심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64]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64]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 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건강과 영양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치 판단들이 존재했는가.[65, 66]

 

기원이라는 심층을 향해 파 내려가서 그들이 확인하는 것은 이질성과 다양성이다. 계보학자는 또한 덮여 있던 이질성을 확인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같은 표면 위에 올려 놓는 사람이다.[67]

 

도덕은 그 사회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모험 정신, 과감성, 복수심, 교활함, 탐욕, 지배욕 등 -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 이 좀더 강하게 육성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던 시대”도 있고(공동체의 적들이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그런 충돌들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부도덕한 것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시대에는) 독립적인 정신, 뛰어나게 되려는 의지, 강한 이성조차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인을 떼거지보다 위로 끌어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반면, 정중하고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70, 71]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72]

 

니체는 토양이나 혈통에 있어서의 건강함의 차이를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으로 나눈다. ‘무엇을 선이라고 부르는가?’ 즉 선의 항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을 규정하는가?’, 다시 말해 가치 평가 양식이다.[74]

 

‘좋음’이라는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있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하는 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귀족들이 ‘좋음’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떠한 선악의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을 뿐이다. [76]

 

노예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과 판이하다. 노예는 ‘외적인 것’,’다른 것’,’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노예는 자신과 대립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먼저 ‘악’이라고 규정하고 그와 상반되는 자기 자신을 ‘선’이라고 정의한다.[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ve)이다. 그렇다면 능동적 힘에 대한 반동적 힘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반동적 힘의 승리는 능동적 힘을 자신에게 가담시킴으로써, 다시 말해서 능동적 힘에서 그 능력을 박탈해 반동적 힘으로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84]

 

이제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84]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85]

 

니체는 이 돌팔이 의사의 활동을 좀 더 섬세하게 나눈다 :

l       첫 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l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l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 주는 것

l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으로.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86]

 

정리해 보자. 먼저 저 세계를 성정하고, 그것의 고차적 가치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그 다음 고차적 가치들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평가하는 것 자체를 명가절하하기 시작한다.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無)를 향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87]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라고 말한다.[88]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90]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95]

 

자신과 거리를 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보다 ‘차이(거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95]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아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96]

 

가다머는 과거나 전통이 결코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나 전통은 우리가 사고하기 위한 전제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고방법을 전통에 적용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평과의 융합뿐이다. 과거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는 우리가 딛고 설 지반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와 지평 융합을 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전통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만 융합할 수 있다.[98]

 

하버마스는 차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차이는 합의를 향한 출발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가장한 초월적 가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상호 주관성’을 택했다. 상호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의 운동은 서로의 공통성을 찾아 나선다. 의사소통은 변증법적 운동이며, 모든 변증법이 그렇듯이 차이를 해소하는 운동이다. 하버마스는 본인이 헤겔의 계승자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102]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103]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105]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107]

 

니체는 논리학은 “참된 것은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08]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110]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111]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설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112]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거 없다고 설득한다.[112]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114]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115]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흄,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마조흐, 니체, 푸르스트,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을 각각 책으로 내놓았던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115, 116]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122]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123]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124]

 

정치의 과제를 가치의 창조와 평가가 아니라 안정성의 유지로 설정하면, 정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거나 평가하기 보다는 기존에 설립되어 있던 가치를 내면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니면 내면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가치의 발생과 유래에 대한 물음을 철저히 단속하려 할 것이다.[127]

 

기존의 가치를 추구하고 내면화 하는 행위는 수동적인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양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이 과정에는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127]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은 볼 수가 없으며, 볼 수 있는 인간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움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란 특이성을 갖추지 못하고 보편성 아래서 단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자들인 셈이다.[133]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136]

 

변증법은 항상 반대의 항을 불러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해결은 변증법론자들이 말하는 고양이 아니라 쇠락이며 힘의 상실이다.[137]

 

민주주의는 ‘니태함과 피로, 약함의 해방’이다.[137]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의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138]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142]

 

그리스인들의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현재의 우리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들은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이라고 해도 인간들로 하여금 파괴적 행동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아곤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신은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147]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들이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랬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리스인들에게 이것은 ‘덕’의 문제였고, 자유는 덕에 기초한 강함의 표시였다. 반면 기독교적 의미의 덕이란 무리의 질서를 제도적 배치를 통해서 정당화하는 것이다.[149]

 

그리스인들이 아곤이라는 경쟁을 벌인 곳을 아레나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덕에 기초하여 이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쟁하였다. 폴리스는 이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로 구성됨으로써만 전체일 수 있었다.[149]

 

위계 질서, 능력간의 거리, 서로 서로를 독립시키면서도 적대적으로 만들지 않는 기술, 어떤 것도 혼합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화해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혼돈과는 반대되는 저 거대한 변화는 비밀스런 과업이자 예술적 수완이다.[150]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 자연학 + 윤리학

 

그리스인들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교의 창조론이 ‘무’에서 시작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출발점은 ‘유’이다. ‘무’에서 시작한 기독교의 창조론이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유’에서 시작한 원자론은 세계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154]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156]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하며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는 명제. 파르메니데스가 막 해명하고 해결했던 모든 것을 다시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린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가 파르메니데스를 격노하게 만들었다.[157]

 

니체는 원자를 힘으로 대체한다 :

l       힘의 첫 번째 속성은 그 자체로 단수로 존재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라는 점이다.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l       힘의 두 번째 속성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l       힘의 세 번째 속성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멈추어 있는 힘은 없다.[159~161]

 

힘은 니체의 철학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단적인 표상이란 없으며”, “부분이나 사건들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고, 이들 특성은 관계를 통해서 결정된다.”[159]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론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회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161]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165]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167]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169]

 

권력의지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171]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173]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174]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 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175]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176]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177]

 

(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178]

 

권력의지는 새로운 힘들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촉수를 내민다.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 방식인 것이다.[179]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세계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권력의지가 갖는 느낌과 평가도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전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에 대해 “한 번 더!”라고 말하겠지만, 후자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것이다.[180]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182]

 

니체에게 세계란 “어떤 손실도 없이 정말 긴 세월을 거듭 회귀(반복)하는 힘의 대양”이었다.[183]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하다.[184]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186]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를 하나의 놀이로 이해해 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성의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학자들처럼 동일한 것이 언제 출현할지 계산하고 있는 게 아니다.[188]

 

세계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다. 니체는 이것을 ‘주사위놀이를 하는 세계’로 그리기도 한다. 주사위놀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때도 등장하는 놀이다.

항상 자기로 귀환하는 놀이 주사위 던지기! 우리는 학자들에게 영원회귀가 왜 어려운 개념인지를 안다. 그들은 주사위는 잘 알고 있지만, ‘놀이’가 대해선 잘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189]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191]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 표현이다.[191]

 

이로부터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192]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를 외치기 때문이다.[196]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196, 197]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의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197]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200]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201]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202]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204, 205]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205]

 

차이를 만들어내는 놀이!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207]

 

주체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다. 주체 역시 건강 상태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대상들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체도 복수로 존재한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208]

 

우연은 창조적 힘이다. 우연은 카오스와 미로를 즐기는 정신이다. 미로나 카오스는 길이 없음이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이로써 생성의 공간이 열린다.[208]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계”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209]

 

 

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연에 자기 잣대를 들이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끌어냈을 때,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말한다.[213]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216]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221, 222]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222]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나 강함이 초인간적인 것으로서, 밖에서 온 것으로 포착되고 있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극히 가련하고 약한 면과 극히 강하고 놀라운 두 가지 면을, 두 가지 영역 가운데로 분열시키고, 전자를 ‘인간’, 후자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223]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225]

 

나귀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해 버렸다.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함이 없다.[230]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정의의 양심가’인 학자의 말대로 과학이 불안과 공포를 본질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232]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233]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233]

 

영원 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234]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238]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246, 247]

 

병균 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247]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3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250]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은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253]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253]

 

 

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우리는 그 독특함의 전형을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260, 261]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다고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 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말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점에 주의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261]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염려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구원의 표지’ 문제가 생겨났다. 그 누구도 구원 여부를 알려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구원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신은 현세에서 자신이 하는 일도 돌볼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표지를 찾는 것이란 스스로 구원의 표지를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 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263]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원래 시간표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265, 266]

 

처음엔 시간표는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든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268]

 

현대의 정당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그에게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 시킬 뿐이다.[283]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시장의 파편화되고 원자화 된 개인들로부터 집합적인 규범성이나 정체성을 추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각 가치들이 화해하기 쉽지 않다면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각기 상이한 가치들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며, 그 문제를 정치의 문제에서 제외하는 것이다.[298]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로부터 훌륭한 시민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301]

 

“서로 갈등하고 심지어 불가공약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어떻게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자유주의는 명백히 아나키 상태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의 문제’ 즉 안정성이다. [304]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다양한 철학 사상과 학파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니체 뿐만이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한 니체와 연관된 그들의 주장이 섞이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정말로 힘들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공하는 잘 정리된 주제별 가이드를 통해 비록 전체는 아니어도 니체의 사상의 몇 가지 정수들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어떤 작은 통찰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책에 나타난 니체의 여러 주장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온 메시지는 (1)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방식과 마음자세가 중요하며, (2) 동일한 세계이지만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서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 안에 삶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삶을 비탄하기 보다는 자신의 긍정적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실천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주된 메시지라고 생각되었는데 이는 마음을 깨우는 좋은 깨달음으로서 오래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은 긍정적인 영향 :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

 

삶은 나 만의 예술 세계를 만드는 것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7]

 

이 문장을 읽으면서 최근의 나를 잘 묘사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정말로 신이 나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원 생활 이후로 나는 몸 뿐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춤을 추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조금씩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가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도록 자신을 조금씩 가꾸어 가는 나의 모습에 내 스스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8, 59]

 

나는 지금의 나의 노력이 나만의 예술 세계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잘 만들기 위한 작은 시작임을 이제 느낀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그저 즐겁게 내가 좋아서 하는 것. 그것이 삶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이제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강함, 그것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일어서고 자신의 의지로 실행하는 것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삶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그들만의 세계 또한 인정하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긍정적인 자기 노력(권력의지에 기반 한 실행)으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 그 안에 삶이 있고 행복이 있고 실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행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실행 속에서 우리는 진정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176]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 표현이다.[191]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나와 다른 타인의 삶 역시 긍정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이러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하고 나중에는 그 힘을 나누어 주는 것. 이것이 나를 극복한 나의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부가적인 도움들 : 니체에 대한 작은 이해의 시작

 

돌아보면 니체만큼 유명하면서도 잘 못 이해 되고 있는 철학자도 없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이 책을 통해 단지 피상적으로 몇몇 키워드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아니 정확히는 잘 못 인지하고 있던 니체의 사상 몇 가지에 대한 단초를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해 설정된 틀에 대한 인지와 맹목성에 대한 경계

 

삶을 살다 보면 맹목적인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인데 특정 사고의 프레임웍에 갇혀 다른 사람의 사고 방식을 조금도 받아 들이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최고로 여기거나 강제하는 사람들을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니체의 사상에서 이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사람들이며, 조직이 추구하는 어떤 절대성에 대해 교육 받은 대로의 신념을 가지며,조직의 타성을 깨는 변화를 선택하기 보다는 그 안에 안주하면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그룹을 지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소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리고 가치관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서로 공동의 ‘덕’을 공유할 수 없음일 뿐인 것이다.

 

신의 죽음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33]

 

니체가 “기독교는 유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심판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부패’이며 ‘타락’이다.[56]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 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59]

 

니체는 왜 신이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222]

 

 

초인에 대하여

 

건강한 광인은 자유 정신을 가진 전사로 등장한다.[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52]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장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죽음을.”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231]

 

영원 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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