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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7일 06시 21분 등록

북리뷰 30: 강의 - 신영복

책: 강의 . 신영복 지음.  돌베개  출판. 2005.


*** 저자에 대하여

우이 신영복 선생님

작년(2008년) 8월 15일은 우이 신영복 선생님께서 20년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으로 되돌아오신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선생님을 위한 축제를 기획했다. 아트 선재센터에서 선생님의 귀환 20년을 기리는 공연이 있었고, 진정성을 담은 사람들의 사랑과 감사는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었고, 많은 사람들이 밤바다의 등대 같은 스승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공연은 막을 내렸고 선생님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펜 사인회 책상에 앉으셨다. 나는 그때 선생님 옆에서 책을 펼쳐드리는 일을 했다.

선생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꽃을 들고 와서 가만히 책상 앞에 내려 놓는다. 들꽃 한묶음이기도 했고 온갖 꽃이 어우러진 꽃바구니이기도 했다. 이 만남을 위해 그이들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선생님은 연예인이 아니시지만 꽃을 참 많이 받으신다.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해서 선생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꽃을 드리고 싶은가 보다. 오래 기다리다가 이제야 용기를 내어 마음의 꽃다발을 드리러 온 청년들도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이 게시판에 그런 마음들을 항상 올려놓기에 알 수 있다. 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그 꽃다발들을 잠시 들어드리기도 했는데 그때에도 사람들의 향기가 진하게 전해져 왔다.

그날, 우리 더불어 숲 사람들은 선생님께 러브레터를 써 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책과 글씨로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 더불어 숲 홈페이지를 통해 인사를 나누었으며, 그 후 긴 세월을 한결같이 함께 만나오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예쁜 종이에 존경과 사랑을 가득담은 편지들을 하나씩 둘씩 내밀었고 그루터기들은 그 편지를 고운 보자기에 싸서 선생님께 전해드렸다. 나는 그때 편지를 쓰지 못했다. 숙제를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간직해 온 이 마음을 어떻게 네모 칸 안에 다 집어넣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 목요일, 성공회 대학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다.

올해 들어 눈앞에 닥친 숙제를 먼저 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늘 그곳에 잘 계시려니...하던 마음에 제동이 걸렸다. 할 수 있는 한 더 자주, 선생님 가까이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생각이 스스로 떠 올라와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못다 쓴 편지도 쓰기로 했다. 가을은 편지를 쓰기 좋은 시간이고 정말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밤늦은 시간, 느티나무 앞에 서있는 새 천년관 3층에서 선생님은 나직한 음성으로 대학원 강의를 하고 계셨다. “생명은 네모? ” 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선생님은 “생명은 푸른 보리밭이다” 라고 대답하시겠단다.

1968년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인 육군 중위 신영복.

그곳에 군 법무관이 되어 와있던 1년 후배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선배에게 담배한대, 커피한잔을 대접하며 미안하다고, 그러나 결코 사형까지 몰고 가지는 못할 거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던가? 냉혹하고 서슬 푸르던 일인 군사독재하 였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미 한명은 본보기로 라도 사형을 시켜 대학생들의 동요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그 해,1968년은 김신조가 청와대 앞까지 내려왔고 프에블로호의 원산납북, 한일회담 반대데모 등, 시국이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신중위'라 불리던 신영복 선생님은 마음속으로는 이미 사형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고 그 시절 가까이 옥살이를 함께 했던 후배는 회고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 가장 완전한 죽음이다.

  "척박한 식민지에서 태어나 피끓는 젊은이가 포악한 군사정권에 항거하다 죽는 것은
식민지 청년의 삶의 완성이다."

한편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장교이기에 그나마, 총살형을 희망하며

“찬란한 햇빛아래 대지에 피를 뿌리고 ..........”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창 밖을 바라보다가 접견을 마치고 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게된다. “설혹, 나에게는 죽음이 빛나는 혁명이며 삶의 완성일지라도 저분들께 나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며 함몰일 것이다. ”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고 그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을 때, 그는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깊이 생각했고, “이렇게 죽는구나, 죽을 준비를 하자...” 그러면서 어린 소년들과 함께 책을 읽던 “청구회 추억”을 기록했고 휴지에 빽빽하게 써내려간 그 글은 26세의 사형수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절창이 되어 오늘 우리 앞에 더 없이 아름다운 글로 되돌아왔다. 그때 그 종이를 선생님 댁까지 고이 가져다 준 그 교도소의 헌병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느 봄날, 그의 가슴에 진달래꽃 한송이 붙이고 서오능, 그때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천천히 돌아오는 그를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형수와 무기수와 반공법죄수만 모아놓은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1동 8호. 오직 조그만 창문만이 세상의 빛을 보내오는 곳에서 1년이 넘는 기간을 결심 공판을 기다리며 보내게 된다. 그때 그는 빚을 진일이 남았는지 생각했고 또, 글을 잘 알지못하는 후배 군인들의 상고 이유서를 써주며 시간을 보냈단다.

육사 교관을 하던 신영복 중위, 그는 대학에서 독서회를 만들어서 급진적 사회주의 책을 함께 읽었고 책을 돌려 읽으며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들이 찾아낸 죽음에 이르를 죄목이었다.

국가 보안법 1조 2항, 반국가단체 구성죄였다. 이 항목을 걸어 기소되었고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는 반 국가단체의 구성을 음모죄로 변경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미 모순이었다. 허위를 유지 관리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상고를 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대법원 판례로 남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공판, 그 과정에서 그렇게 엄정한 시절에도 그를 아끼는 모교의 은사들이 재판정에 나오셔서 아까운 젊은이를 사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선도해 주길 바란다고 읍소하셨다. 스승이 제자를 위하여 어려운 자리에 함께 서계셨다.

그때 그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는 이제 없어지고 지금은 축구장이 되어 있다.

선생님이 처음 계셨던 서대문 구치소의 그 방은 이제는 기념관이 된 공원 속에 보존되어 있고 6개월을 계셨던 남산의 20헌병대 지하 영창은 한옥 마을로 변했다.

그리고 안양교도소를 거쳐 이른바 좌익사상범들을 한 곳에 모아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대전 교도소에 오래 사셨다. 그때 노촌 이구영 선생님과 함께 4년을 같은 방에서 지내셨고 동양고전 독법의 씨앗을 심고 움을 틔워내셨다. 지금도 선생님은 이 “국립대전대학” 동창생들과 동창회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선생님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게 되면 우리는 열심히 인사를 한다. 이미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 되고말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고 또 읽다보면, 때로는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상상력은  나자신도 설득하기 어려운 빈약한 그림일 뿐이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쓰신 편지는 한달에 한번 오직 직계 가족에게만 허용되었고 손바닥 만한 엽서에 씌여졌다. 선생님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과 동생에게 누를 끼칠 수 없어서 형수님과 제수씨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형수님 곁”, “제수님 곁”이라고 쓰시면서... 물론 이 편지는 가족 모두가 둘러가며 보았다. 선생님의 친구들이 이 편지를 함께 읽고는 책으로 엮어 간직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사진본 “엽서”가 한정판으로 간행되었다. 내 친구가 이 책을 한권 구해서 내게 생일선물로 주었다. 참 고마운 선물이었다.

선생님은  언젠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강물처럼 흘러갈 상념들이 아까웠고,
또 그러한 상념들을 길어올린 그 세월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고  말씀하셨다.

지금 선생님은 이 편지를 다시 쓰고 계신다. 감옥에서의 체험은 몹시 충격적이어서 기록을 해두고 싶었지만 종이 한 장, 필기구 하나 허용되지 않던 무기수 신분이어서 오직 한달에 한번 있는 편지쓰는 날을 기다려 모든 글을 다듬고 다듬어 다 외워서 써내려간 편지글이 그 엽서였다. 그 글을 쓸 때는 집에서 노심초사하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다시 짐을 지울수 없었고, 검열을 하는 교도관들에게도 결코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행간에 묻어둔 이야기가 많으시단다. 선생님의 마음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행간의 생각들을 담아 “다시 쓰는 편지”를 쓰고 계시는 것이다.

1988년 5월, 평화신문이 창간되면서 실렸던 이  편지글은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독자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햇빛출판사에서 간행했지만 정보부에서 염려하는 바람에 일찍 배포하지는  못했고 ,결국 선생님의 출소 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 정해놓은 책의 제목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붓으로  쓰셨을 뿐이다.

끝으로,  선생님이 “생명은 푸른 보리밭”이라고 하시며 해주셨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1968년,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 계시는 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 7명의 사형집행을 옆에서 겪으셨다. 물론 최후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사형수는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죽음이 찾아오면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보인다.
그리고 그 날, 그 시간을 누구보다도 먼저 느끼게 된다. 교도과장의 접견이 예고되고 불려 나가게 되면
성직자를 만나고 난 후 사형이 집행된다. 사형수는 제일 먼저 내의를 갈아입는다.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간다. 한번은 새 옷을 자기는 죽어 피를 묻힐테니 헌 옷을 입고 새 옷은 누군가에게 남겨주고 싶어하는 사형수가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성직자 한분이 그대로 새옷을 입고가면 내가 꼭 그 사람에게 새옷을 한 벌 사다 전해주마고 달래서 새 옷을 입혀 보낸적도 있었단다.

교도소 뒷마당에는 막대가 하나 세워져 있고 사형수는 왼쪽 심장위에 조준표를 붙이고 검은 헝겊으로 눈을 가리운다. 사격수는 5명인데 모두 살인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심적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중 1명의 총에는 공탄이 들어있다. 그래서 서로 자기의 총이 공탄일 거라고 위로를 하게 된단다. 이 일은 현장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 다음날 전해주어서 알게 된 이야기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그렇게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세세한 사연을 다 알고 계셔서 이 사람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책속으로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려본다. 나는 그 긴 사연을 다 옮길 수가 없다. 다만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봄이 찾아와서 수감자들이 목욕을 하는 날이 왔다. 방향을 감지할 수 없도록 6갈래로 지어진 건물을 돌아 나와 쪽문을 향해 수감자들이 감옥을 나섰다. 목욕탕이 감옥 울타리 밖에 조그맣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 그렇게, 옥문을 나서며 보았던 푸른 보리밭이, 두 눈과 가슴으로 맞이한  그 푸르른 보리밭을 생각하면 선생님은 바로 생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그때 그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자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하사가 신 중위로 불리던 신영복 선생님을 끌어안고 울었단다. “ 신 중위님, 살고 싶어요.......” 라고 외치면서.

신영복 선생님의 약력은 더불어숲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www.
shinyoungbok.pe.kr 입니다.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장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15. 내가 동양고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어요. 6학년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그때의 붓글씨나 한문 공부란 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대학 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내가 59학번이거든요. 휴전 협정이 53년에 체결되었지요. 일제 식민지 잔재에서부터 해방 후의 예속적 정치권력, 부정과 부패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환경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지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유일한 탈출구를 근대화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근대 기획’이 우리 사회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 문화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방獄房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건 훨씬 더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집에서 보내주는 책은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해야 그 다음 책을 넣어주는 식이었어요.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동양고전 몇 권을 한 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했습니다.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국어사전 290쪽

18. 나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입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박사와 동학 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한학漢學의 대가입니다. 이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같은 감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함께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함께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였고,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가 KBS의 <인물현대사>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19.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던 의병 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서 번역 일을 도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같이 공부하고자 하는 예시 문안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20.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21.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談論이 주류를 이룹니다. 주周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宗法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주 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文明論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23. 또 한 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관계론’에 대해서는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 『경주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의 논문집』)라는 글에서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해두기도 했습니다. 이 서론 부분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란 책을 알고 있지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verg Hodge 교수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책의 부제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Learning from Ladakh)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oxymoron)입니다. 작은 거인(little giant)이나 점보 새우(jumbo shrimp)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천지현황과 I am a dog

25. 욕심입니다만 고전 예시 문안을 여러분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자나 한문 공부는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문 공부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른 어학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습니다.

26. 그러나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 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시작詩作 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7. 이 책에는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한자나 한문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그 뜻을 재조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32.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 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이를테면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의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담론들이 동양과 서양의 사회 구성 원리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근대사회, 나아가서는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로부터 연유한다는 반성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33.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死活的 공세攻勢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대립면을 상실한 일방적 질주에 다름 아니지요.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갈 세계 질서 역시 동일한 모순 과정을 답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

서구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entry point)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着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着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장場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磁力場, 중력장重力場, 전자장電磁場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集合과 장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멸生滅 유전流轉이 이루어지는 4차원의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資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주宇宙라는 개념도 우宇와 주宙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宇는 물론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사방上下四方이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宙는 고금왕래古今往來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39.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마을에서는 도자기가 익고 난 다음 가마를 열면 맨 먼저 도공이 망치를 들고 들어가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깨트린다고 합니다. 열을 잘못 받아서 변색이 되었거나 비뚤어진 것은 가차 없이 망치로 깨트리는 거지요. 예술가 특유의 고집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쌓이는 도자기 파편으로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릇이 진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생성의 질서가 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진흙(空)이 그릇(色)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主我)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도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40. 일반적으로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성人性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 아래에 인간적 가치를 배치하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43.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勘天役物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事前에 견제하고 사후事後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44.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고 지구과학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동양 사상에 관한 설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존재存在와 인식認識 일반의 존재 형식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그 존재 형식에 내재하는 관계론적 구조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론 부분에서 고전 강독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짧은 강의 시간으로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끝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처음이 그렇듯이 각오가 지나쳐서 우리는 지금 너무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친김에 하나만 더 합의하고 시작하지요. 고전 강독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미래 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한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새로운 담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한 것이지요.

46.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구성 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중국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와 지양에 의하여 과연 새로운 문명이 모색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근대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성 원리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사적 과제와 직결되는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민족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명사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분단과 냉전 질서의 청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극복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적 주제로서의 화和와 동同에 관한 논의이기도 합니다. 화동 논의和同論議는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심화시켜가도록 하겠습니다. 동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同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 문제를 세계사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전 강독을 진행하면서 적절한 곳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52. 이제 『시경』詩經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선 300여 편이 넘는 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시의 내용이나 형식이 같지 않고 또 작시作詩의 목적과 과정도 판이합니다. 수많은 주註가 달려 있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대단히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전 독법에 비추어 『시경』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가 사실은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정약용丁若鏞, 심대윤沈大允 같은 조선의 지식인은 주희朱熹의 국풍 민요설을 부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식인들이 임금을 바로잡으려는(一正君) 저작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던 조선 사대부들의 입장이 과도하게 투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국풍의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광범하게 불려지고 또 오래도록 전승된 노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민요民謠로 보아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노래가 계속 불려지고 전승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4. 나는 이 「여분」汝墳이란 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 시절의 어느 마을, 어느 곤궁한 삶의 주인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강둑의 연상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이 시를 읽으면 함께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역시 별리別離를 노래한 시인 정지상의 「송인」送人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 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이별의 아픔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읊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가 우리나라 한시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면 부벽루에 걸려 있는 한시 현판을 모두 내리지만 이 시 현판만은 그대로 걸어두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시의 자존심인 셈이지요. 시인도 매우 훌륭한 사람임은 물론입니다.

이 「여분」이란 노랫말이 어떤 곡에 실렸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辭)+노래(調)+춤(容)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은 것입니다.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56.『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절반이 넘는 양이 국풍입니다. 국풍은 각국의 채시관採詩官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最古의 시입니다. 은말殷末 주초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 운동古文運動, 신악부 운동新樂府運動 등 문예 혁신 운동을 벌여 민중 정서에 다가서기를 호소합니다. 근세 이후에는 고문 운동이 오히려 보수화의 논리와 결합되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社會詩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投我以木瓜 報之以瓊쩆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衛風, 「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 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 ―「모과」

이 시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기린 시라 하였으나 완벽한 연애시라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남녀간의 애정 표시로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이 시는 남녀가 편을 나누어서 화답하는 노래, 또는 메기고 받는 노래로 추측됩니다. 이 시는 남녀간 애정 표현의 자유로움뿐만이 아니라 놀이와 풍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 시 역시 위衛나라에서 수집한 국풍입니다.

『시경』에는 국풍 이외에 궁중에서 연주된 105편의 의식곡儀式曲도 있으며 종묘宗廟의 제사 때 연주된 40편의 무용곡舞踊曲도 실려 있습니다만, 국풍만 읽기로 하겠습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62. 물론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수집하는 까닭은 이러한 진실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민심을 읽고 민심을 다스려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채시관들이 조직적으로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여정통’樂與政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오늘의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고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64.『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6. 앞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모시서毛詩序의 구절을 소개했습니다만 이 구절이 김수영의 시에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이미지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白樂天의 「국화」菊花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 잎새 꺾이고 연꽃은 시들어 기울었다. 오직 동쪽 울타리의 국화만이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一夜新霜著瓦輕 芭蕉新折敗荷傾 耐寒唯有東籬菊 金粟花開曉更淸)는 내용입니다. 「국화 옆에서」는 시상의 핵심을 여기서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67.『시경』에 이어서 『서경』書經의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은 2제(요堯·순舜) 3왕(우왕禹王·탕왕湯王과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주고받은 언言,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書 또는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左右 2사二史가 있었는데 좌사左史는 왕의 언言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行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春秋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言行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死後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竹帛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임금의 언행을 남기는 것은 물론 후왕後王이 그것을 거울로 삼아 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9.『서경』은 본래 하夏, 은殷, 주周의 사관史官이 작성한 것으로 3천 편이 있었는데 공자가 100여 편으로 정리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습니다. 현재 전하는 『서경』은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 33편은 금문今文입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진秦의 분서焚書 이후 구전되다가 한대漢代의 언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노공왕魯共王의 궁실을 넓히다가 공자의 구택舊宅 벽에서 얻은 벽경壁經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고문상서』는 동진東晉의 매색梅펽이란 자의 위작僞作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금문상서』 역시 주공周公 전후의 여러 편이 먼저 성립되어 가장 오랜 부분이고 그 다음에 은殷 부분이 추가되고 그리고 하夏, 다시 요堯, 순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가상 학설’加上學說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최초에는 주周 왕조의 창건자인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중심으로 기록했으나, 유학자들이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설적 제왕들에 관한 단편적 기록들까지 추가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70.『서경』에서는 단 한 편만 골라서 읽기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가장 신뢰성이 있는 주공 편에서 골랐습니다.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周書, 「無逸」

이 글은 주공이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 창건 초기의 어려움을 도맡아 다스리던 주공의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71. 이 「무일」편에서 개진되고 있는 무일 사상無逸思想은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 사상은 주나라 시대라는 고대사회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 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 운동下放運動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방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主觀主義와 관료주의官僚主義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72. 여기서 주공周公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이름이 희단姬旦이지요. 주공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를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逆取)에 의하여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때의 일입니다.

개국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魯나라에 봉했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했습니다. 당시 72제후국 중 희姬씨가 55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했지만 여呂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어요. 원래 주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山間의 제후국이었는데 남하南下하여 위수渭水 평야로 이동하고 문왕文王 때에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어 강대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姜族과 주족周族의 연합이었음은 물론입니다. 17개 제후국을 장악한 여씨가 바로 여상의 강족입니다.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무너뜨린 것이지요. 이 여상이 바로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73. 그뿐만 아니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를 후侯에 책봉하여 은나라 유민遺民을 그에게 복속시켰습니다.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왕은 그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무경에게 사부로 붙였는데 무왕이 죽자 무경과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을 모아 주紂의 형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부근인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는 송의 시조가 됩니다. 송은 은나라를 계승한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지요. 이 송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이며 이 노가 바로 주공이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74. 주공은 조선 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君權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74.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중국 고대의 제왕 계보는 황제黃帝―전욱?頊―제곡帝?―요堯―순舜―우禹(하夏)―탕湯(은殷, 상商)―문文―무武―주공周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 바로 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이었거든요. 그러나 황제 이하 요, 순까지는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반면에 하우夏禹는 실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서경』 「우공」편禹貢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하夏의 건설지로 알려진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와 그 주변 지역에 있는 궁궐 터, 분묘 등의 유물과 유적은 당시에 이미 권력과 계급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염지鹽地 유적은 그곳이 경제적 중심지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리고 갑골문자甲骨文字(가장 오래된 것이 19대 반경盤庚 이후) 또는 복사卜辭(귀갑龜甲, 수골獸骨에 새겨진 문자)의 존재라든가 우禹의 아들 계啓가 왕위를 세습함으로써 비로소 세습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는 하夏부터 실재한 왕조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75. 기원전 1760년경에 이 하夏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은殷입니다. 원래는 상商이었는데 주周가 상商을 정벌한 후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나라로 낮춰 불렀지요. 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28대 주왕紂王(제신帝辛)을 무왕이 멸하고 주를 세웠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100년경이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76.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히기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 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77.그러나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78. 이어서 『초사』楚辭의 시 한 편을 읽도록 하지요. 『초사』는 『시경』과 함께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대적으로는 『서경』 다음에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17편입니다.

『시경』이 북방 중원의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 운문韻文인 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의 남방 문학입니다. 남방 국가인 초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詩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초사』는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 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시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굴원이 중국 시인의 대표인 것도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굴원의 「이소」離騷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전쟁 영웅을 기리는 서사시이거나 인간 이성의 구법 여행을 표현한 작품이 아닙니다. 실연한 여인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이소」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374행이나 되는 장편이어서 여기서는 짧은 「어부」漁父 한 편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於斯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其糟 而?其?
何故深思高擧 自見放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 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80.「어부」는 굴원이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고뇌와 울분을 토로한 애국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는 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시입니다. 고등학교 한문 교재에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그 뜻을 새겨보기로 하지요. 전체의 구성은 어부와 유배된 굴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구성을 그렇게 가지고 간 것이고, 굴원의 자문자답으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어부는 가상의 상대로 봐야 옳습니다.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유배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함과 정치적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으로, 전국시대 말 초나라 왕족의 후예입니다. 그는 뛰어난 학식으로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좌도左徒에 오릅니다. 당시 합종연횡合從連橫의 대세 속에서 강국인 진秦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반진反秦주의자로서 줄곧 제초齊楚 동맹을 주장했습니다. 친진파親秦派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모함을 받게 되고 유배流配와 해배解配를 거듭하다가 결국 강남으로 추방됩니다. 어쨌든 추방당한 이유가 부패한 친진파의 참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주장은 일단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이유에 대하여 어부는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를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깊은 생각과 고결한 행동)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어부는 노를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이 노래가 이 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부가 읊조리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굴원이 스스로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명구로 암송되는 구절이지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8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사실 『초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영원한 삶의 고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83.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美學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 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大長征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현재의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물론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 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방의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지요.

84.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정 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직의 류사오치劉少奇 이론의 마오쩌둥”이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만,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기원전 295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詩人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3장 주역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87.『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88.『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90.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庶人)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경經과 전傳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91.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經)를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가 해설한(傳)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卜筮迷信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경은 8괘,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8괘를 소성괘小成卦라 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大成卦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傳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뜻으로 십익十翼이라 합니다. 공자의 저작이라고 전하지만 대체로 훨씬 후대인 진한秦漢 초기의 공동 창작으로 추측됩니다.

여러분이 혹시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4장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춘추전국시대

137.『논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노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공자 당시에 『논어』라는 책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학단學團 차원의 사업으로 편찬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정황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입니다.

138.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공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경卿)―사士(가신家臣)―서인庶人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士君子)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계층은 민간인 신분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공자학파 역시 춘추 말엽에 활동하던 여러 민간 학파 중의 한 갈래로 분류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이고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공자의 사설私設 학숙學塾은 이러한 수요에 부응한 관리 소개소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0.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온 사상이 바로 유가 사상이고 그 중심이 공자이고 『논어』입니다. 2천 년 동안 쌓아온 공자상孔子像은 이미 실증적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곡부에 있는 대성전大成殿의 장대하고 화려한 풍경은 공자 당시의 풍경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공자를 빙자하려는 역대 제왕들이 공자를 금으로 칠갑해놓았습니다. 진짜 공자를 만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141.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시 문안을 읽어가면서 필요한 대목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배움과 벗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 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곳 이외에도 ‘습’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 가지(또는 여러 번)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145.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문안을 통해 다시 확인되겠지만 『논어』는 인간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 관계에 관하여 깊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회의 본질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만은 여러분과 합의해두고 싶은 것이지요.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어느 기자로부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자본론』資本論과 『논어』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의아해했어요. 이 두 책이 너무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 같이 사회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 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 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은 물론 변혁 이론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지만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제도의 핵심 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線型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존과 평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 다.”

160.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먼저 지적해야 하는 것은 화와 동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162.『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路」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 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1.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2.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 또는 위악僞惡인 경우에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다음 글은 『맹자』 「진심 하」편盡心下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내가 향원鄕愿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紫)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향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학습과 놀이의 통일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200.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 인식이 정보 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雍也」

이 구절도 위 구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 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수고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모습

202. 공자와 『논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많고 각각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자와 『논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조실부早失父의 천사賤士 출신으로 회계를 담당하는 위리委吏, 목축을 담당하는 승전乘田 등 말직에서 시작하여 50세에 형벌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에 이르렀습니다. 사구로 있을 당시 자기의 경쟁자이며 개혁가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직권으로 죽였고 전田의 크기에 따라 징세하는 전부제田賦制에 반대하는 등 왕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로써 공자를 규정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203.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이 마오쩌둥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5장 맹자의 의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211. 맹자孟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00년경인 기원전 372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향년 74세에서 84세, 94세, 97세 등 여러 설이 많으나 사전史傳에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00년 뒤에 산동성 남부 추芻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가軻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 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고견高見을 듣는 것이 상례화되어 조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맹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풚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梁惠王 上」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뵈었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셨으 니 장차 이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 입니다.”

213.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에서는 『맹자』로써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의 문학적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첫 장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지요.

214.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의 태도는 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孟子見梁惠王 王立於沼上 顧鴻??鹿 曰賢者亦樂此乎
孟子對曰 賢者而後樂此 不賢者雖有此 不樂也
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 庶民子來 王在靈? ?鹿攸伏
?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於?魚躍
文王以民力爲臺爲沼 而民歡樂之 謂其臺曰靈臺 謂其沼曰靈沼
樂其有?鹿魚鼈 古之人與民偕樂 故能樂也
湯誓曰 時日害喪 予及女偕亡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梁惠王 上」

위의 예시문은 1장에 이어지는 글로서 여민락장與民樂章으로 불립니다. 여민락與民樂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맹자의 민본民本 사상이 표명되어 있는 장입니다. 물론 맹자의 민본 사상은 「진심 하」盡心下에 분명하게 개진되고 있습니다. 잠시 그 내용을 먼저 읽어보지요.

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맹자』는 7편 261장 3만 4,685자에 달하는 대저大著입니다. 그 내용도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장에는 맹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맹자』의 대부분은 치세治世에 관한 도도한 논설임에 비하여 이 장은 매우 성찰적이면서 엄정함을 느끼게 합니다. 먼저 본문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盡心 上」

전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太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244. ‘난위수’難爲水와 ‘난위언’難爲言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물이기 어렵다, 물이라 여기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문법적으로 무리가 없고 그 뜻도 좋습니다.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난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老子의 ‘지자불박知者不博 박자부지博者不知’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244.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로, 서예전에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일입니다만 도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내가 달아놓은 설명문(caption)을 교정했습니다.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면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로 바꾸어놓았어요. 깜짝 놀라서 다시 바로 잡았습니다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이지요. 세태의 일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 역시 ‘불영과불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章은 수많은 무늬(文)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治人의 장場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치인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도道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老莊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拮抗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유가와 노장이라는 두 축은 중국 사상사의 오래된 심층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노자』老子는 그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통하여 확인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論語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25장)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노자』의 체계에 있어서는 자연의 생성 변화가 곧 도道의 내용입니다.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反文化的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의지建築意志에 대한 비판입니다. 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해체론이며 바로 이 점이 노자의 현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8.『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上篇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下篇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周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설파한 노자가 언言을 책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259.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운자韻字를 붙인 구句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서 한 사람의 필체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주요 부분은 한 사람이 정리한 것으로 봅니다. 금본今本 『노자』는 왕필王弼(226∼249)이 주석한 왕본王本을 지칭합니다. 1973년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의 백서帛書 『노자』가 발굴되고, 1993년 호북성 곽점촌郭店村에서 죽간본竹簡本이 발견되었지만, 『노자』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몇 종류의 『노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이며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350∼기원전 200년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61.『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제8장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은 물론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도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作爲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全國爲上 파국차지破國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破國)은 최선이 못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국全國, 즉 나라를 온전히 하여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85.『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 ‘천지도天地道 이이불해利而不害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6.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고 천하의 왕이 되는 까닭,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이유를 읽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288.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落水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 권력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인 것이지요.

290. 그리고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下放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중소 기업, 하청 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이러한 연대 담론에 있어서 노자의 생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291.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唯不爭 고무우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빔이 쓰임이 됩니다

三十輻共一곡 當其無 有車之用
선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제11장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해석상의 논란이 약간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 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軸을 끼웁니다. 곡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294.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無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제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 이다.

299.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대’大입니다. 대성大成·대영大盈·대직大直·대교大巧·대변大辯에서 알 수 있듯이 대는 최고의 개념입니다. 최고 수준, 최고 형태를 의미합니다. 성成·영盈·직直·교巧·변辯의 최고 형태는 그것의 반대물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곧 결缺·충沖·굴屈·졸拙·눌訥이 그것입니다.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질적 전환에 대한 담론입니다. 노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를 통하여 사물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합니다.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형식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위를 배격하고 무위를 주장하는 노자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대大의 기준, 즉 최고最高의 기준은 ‘자연’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301.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예에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이란 글씨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언젠가 라이브 콘서트에서 느낀 것입니다. 노래 중간 중간에 가수가 엮어 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릿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 감각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을 지배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304.『노자』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노자 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 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상선약수’를 설명하면서 언급했습니다만,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노자』는 도교의 기본 교리로 경전화되기도 하고, 불교 사상의 정착과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본체론本體論과 인식론認識論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외에도 문학, 회화, 예도藝道, 무도舞蹈, 그리고 무위無爲의 관조적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 깊이와 다채多彩를 더했다고 평가됩니다. 한비자韓非子의 통어술統御術, 병가兵家의 허실 전법虛實戰法도 노자의 영향에서 발전했음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제25장)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7장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309. 장자』莊子는 6만 5천여 자나 되는 대단히 방대한 책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쿳)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

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311.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逸民들의 경물중생輕物重生,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楊朱學派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 보존이나 생물학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2. 그러나 그런 일탈과 농세弄世라는 패배주의자들의 개인주의적 대응과는 달리 역사의 엄혹한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또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과 감옥에서 함께 살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해금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수용하기에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역사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패배의 미학이 훨씬 더 친근하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313.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미도중’曳尾塗中의 일화는 장자의 그러한 면모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초楚의 위왕威王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어 재상을 삼으려는 뜻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寧生曳尾塗中)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부정적이기는커녕 대단히 낙천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317. 내편內篇 「소요유」에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초월이 바로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318.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常識人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局量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칭찬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초월하지 못한 단계에 있습니다. 세번째 단계로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유유소대자’猶有所待者,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단계가 장자가 절대 자유의 단계로 상정하고 있는,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입니다. 소요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신인神人·지인至人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가 장자의 이른바 ‘절대 자유’의 경지입니다.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319.『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320.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기피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 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공자의 무리’ 즉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推察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321. 현재 우리가 읽는 『장자』는 4세기 서진西晉 때의 곽상郭象이 그때까지 전해오던 여러 『장자』본들을 정리하여 6만 5천여 자 33편으로 편집하고 주를 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 다른 『장자』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금본今本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雜篇 11편 모두 33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자 사상의 정수입니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일곱 편입니다. 이 일곱 편은 장자 자신의 저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편과 잡편은 내편에 대한 해석으로 후인들에 의한 2차 저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여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唯恐其似己也 ―「天地」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334. 저는 한참 만에야 이 구절의 진의를 알아냈어요. 다름 아닌 각성覺醒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335.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까닭은 문명론도 문명론이지만 자기반성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迷惑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齊物論」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 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345.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相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나비 꿈’이 들어 있는 제2편 「제물론」에 대하여는 그 ‘제물론’이란 편명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사물(物)을 고르게 하는(齊) 것에 관한 이론(論)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물物과 논論을 고르게 한다(齊)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물物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理論, 즉 ‘물론’物論을 통일한다(齊)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편명에 대한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수용하는 태도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齊란 ‘고르게 한다’, ‘하나로 한다’, ‘가지런히 한다’, ‘같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제齊는 하나의 체계 속으로 망라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齊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分別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과 통일에 관한 것이며 앞서 읽은 방생지설方生之說에서 이야기한 모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전 독법인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6.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이 구절의 끝에 나옵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습니다. 장자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일관된 주제인 관계론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입니다.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齊物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靜態的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347.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整體性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因과 과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 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시문은 이 ‘나비 꿈’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혼돈칠규’渾沌七竅입니다.

혼돈과 일곱 구멍

南海之帝爲?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應帝王」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 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349.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와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끝으로 잡편 「외물」外物의 끝 구절을 소개하고 마치기로 하지요.

이 구절은 여러분도 잘 아는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得兎忘蹄’의 출전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이지요.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356.『노자』나 『장자』의 원전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노장’老莊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노장 사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득어망전’으로 끝내려는 것이지요. ‘득어망전’으로 끝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론의 관점에서 부언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의 전筌은 통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통발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이 통발(筌)을 그물(網)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전筌을 망網으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관계망關係網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한 천망(天網恢恢 疎而不淚)이나 제석천帝釋天에 있다는 인드라망網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든 ‘득어망망’得魚忘網이든 고기를 잡고 나면 그 고기를 잡는 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忘魚得網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362.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墨家는 유가儒家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顯學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입니다. 천하 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가 중국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367.『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함께 읽어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도 부각되리라 생각합니다.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은 송宋나라 대부로서 성城을 방위防衛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周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禹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371.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신청년운동新靑年運動과 함께 『묵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380. 이제 만승의 나라가 수천의 빈 성을 빼앗았다면 그 수천 개의 성 모두에 입성하기 어렵고, 수만 리에 달하는 넓은 땅을 빼앗았다면 그 넓은 땅을 모두 다스리기가 어렵다. 이처럼 땅은 남아돌고 백성은 부족하다. 이제 백성들의 생명을 바치고 모든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 하는 일이 고작 빈 성을 뺏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아도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치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묵자의 반전론은 매우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묵자는 공전攻戰(공격 전쟁)을 예찬하는 자를 반박합니다.

전쟁은 수년, 빨라야 수개월이 걸린다. 임금은 나랏일을 돌볼 수 없고 관리는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겨울과 여름에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고 꼭 농사철인 봄과 가을에 (전쟁을) 벌인다. 농부들은 씨 뿌리고 거둘 겨를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백성을 잃고 백성은 할 일을 잃는 것이다. 화살·깃발·장막·수레·창칼이 부서지고, 소와 말이 죽으며, 진격 시와 퇴각 시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죽은 귀신들은 가족까지 잃게 되고 죽어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어 원귀가 되어 온 산천을 떠돈다. 전쟁에 드는 비용을 치국治國에 사용한다면 그 공은 몇 배가 될 것이다.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國家失本 而百姓易務也).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天下之害厚矣). 전쟁의 폐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王公大人樂而行之 則此樂賊滅天下之萬民也).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하늘일 뿐

403. 순자는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하학파稷下學派의 제주祭主였다고 합니다. 직하학파는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 있는 학자 단지團地를 근거지로 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파였습니다. 제나라 수도 임치는 폭 4km 전장 20km에 달하는 대단히 큰 성이었으며 모두 1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서문西門을 직문稷門이라고 했습니다. 이 직문 부근에 학자 단지가 조성되었던 것이지요. 잘 알려진 『관자』管子가 바로 이 직하학파의 선집選集입니다. 이 직하학파의 제주란 물론 제사의 책임자이지만 학문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직책입니다. 제나라에서도 그를 매우 존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04.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覇者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순자의 사상 영역도 물론 광범위합니다만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법제法制 사상입니다. 그리고 성악설性惡說 등 그것과 관련된 것에 한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여하튼 순자는 유가의 천天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배척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천관天觀에 의거하여 순자는 인간의 적극 의지를 주장합니다.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418. 순자 사상의 논리적 전개 과정에 따라 먼저 예론禮論을 검토한 다음에 교육론敎育論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세하게 번역하거나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순자 사상의 체계와 전체적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
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
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 禮者養也
―「禮論」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

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 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 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신 지주층과 상인 계층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사활적인 패권 경쟁을 치르고 있는 패자들에게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은 고매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420.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순자의 이러한 현실론에 대해 유가의 발전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맹자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냉정함은 그의 문장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순자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뜻의 창달暢達에 주안을 두었으며, 논설 기능을 가일층 발전시켜 논리가 정연하고 주장이 분명한 위에 전체적인 구성에도 짜임새가 있는 것으로 정평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천론」天論, 「성악」性惡 두 편은 고대 논설문의 규범이 되어 이후의 논설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순자의 인문 철학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굳이 이 글의 뜻을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의 내용을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규제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는 법학적·경제학적 의미만으로 예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욕구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탁월한 인문 철학입니다. 순자가 단순한 법치주의자나 제도주의자가 아니라 뛰어난 인문 철학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가 예론과 함께 교육론을 개진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인문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이 문장은 여러분에게도 매우 귀에 익은 것입니다.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凡人之性 堯舜之與桀?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塗之人可以爲禹: 「性惡」).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仁·의義·법法·정正을 알 수 있는 지知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 예시문은 순자의 교육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勸學」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 어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이 구절은 일반적인 교육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도와 규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자가 맹자에 비하여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禮, 즉 제도의 의미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오히려 맹자에 비하여 문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인문 사상이며 발전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425.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人道와 인심人心입니다.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天地之道)가 아니라 사람의 도(人之所道)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장 법가와 천하통일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431. 우리가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2.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世事變 而行道異也)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人民少而財有餘 故民不爭 …… 是以人民衆而 貨財寡 事力勞而供養薄 故民爭: 「五?」)

433.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양보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임금이란 오늘날의 노복奴僕보다 힘든 자리였다.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는 것은 이를테면 노복을 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현령縣令 같은 낮은 벼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치부하는 자리가 되고, 자손 대대로 잘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남에게 양보하기는커녕 한사코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436.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한韓나라는 지금의 호남성 서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한비자는 한왕韓王 안安의 서공자庶公子라고 합니다. 서공자라는 것은 모계의 신분이 낮은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한비자는 55편 10만 자字의 『한비자』를 남겼는데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왕에게 간하는 글들입니다. 「고분」孤憤, 「오두」五?, 「세림」說林, 「세난」說難, 「저설」儲說 등 대부분의 논설은 그러한 동기에서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437.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국인 진秦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 「오두」 같은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한비자와 동문수학한 이사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황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한비자는 이사와 순자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는 듯합니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눌변訥辯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했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비자를 위로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의 사상과는 반대로 매우 우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인 순자는 그 성정이 강퍅불손强愎不遜하고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지요.

한비자는 엄정한 형벌을 주장하고 유가와 묵가의 인의仁義와 겸애兼愛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術數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유가의 이단인 순자와 인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한비자에 대하여 부정적 평가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비자』를 읽어가는 동안에 그러한 선입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병역兵役·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음은 물론입니다. 군제 개혁, 성문법成文法 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 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군주 권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의 내용이란 실상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을 거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탁과 발, 책과 현실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
也 ―「外儲說左 上」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

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 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452. 이 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에 대한 성찰적 접근에 있어서도 탁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관심만 있다면 이 부분의 연구 성과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 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 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범어로는 Mahavai plya-buddha-ganda-vyuha-sutra입니다. 이 명칭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대大는 절대적 대의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방광方廣은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佛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佛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경經을 수식하는 형용사구입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공식적인 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고해가 아닌 화엄의 세계인가? 나는 그 비밀이 바로 ‘대방광불’大方廣佛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방’은 최고最高의 법칙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474.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75. 흔히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고 일컫는 까닭은 이러한 화엄 사상이 당나라 전 시기에 난숙하게 꽃피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엄학의 핵심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集合表象,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476.『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조주趙州 스님은 사람들(衆)에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揀擇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경우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자가 슬퍼했듯이 ‘국역유염’國亦有染, 나라 전체가 물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7.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相生의 개념이라고합니다. 연緣하여(pratitya) 일어나는(samutpada)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 두 개를 마찰하면 연기煙氣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는 나무와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목상마’二木相摩의 비유입니다.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相摩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478.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가슴에 두 손

508. 시와 산문을 묶어서 이야기하자니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와 산문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감성과 정서의 영역으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09.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1.『시경』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시적 정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시적 정서와 마찬가지로 서書와 화畵의 영역 역시 풍부한 관계론의 담론을 보여줍니다.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서의 의미는 ‘같다’는 것이지요. 우선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다는 뜻입니다. 지시 기호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경우 서書가 상형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새 을乙’ 자는 모양이 백조입니다. 그러나 같다는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같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오히려 서도書道의 본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書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만 그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2. 시와 산문을 함께 읽지 못하지만 유종원柳宗元(773∼819)의 시 한 편과 산문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유종원은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당여黨與가 되어 혁신 정치 집단을 만든 개혁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관료와 번진藩鎭 세력이 연합한 보수 집단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개혁은 좌절되고 그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봉건론」封建論, 「천설」天說 등은 역사 인식에 있어서 그 진보성이 높이 평가됩니다. 당시의 유가들의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군현제가 필연적임을 역설하여 진시황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특히 「천설」에서는 천명론天命論과 봉건적 지배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한유韓愈와 더불어 당대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산문 개혁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문장은 한유와 겨루고 시는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다음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5언 절구 「강설」江雪은 당대 이후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몇 자 안 되는 짧은 시구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앞에 보듯 선명한 그림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함의하는 메시지의 날카롭기가 칼끝 같습니다.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이 시가 보여주는 그림은 동양화에서 자주 보는 풍경 같기도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전원田園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풍설이 휘몰아치는 강심江心에서 홀로 낚시 드리우고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필시 그의 자화상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 관련된 시화詩話를 따로 접할 수 없어서 정확한 시작詩作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이 시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그의 고독한 고뇌입니다. 개혁 의지의 끝없는 좌절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대하大河입니다.

다음은 유명한 「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입니다. 전문全文은 너무 길기 때문에 앞부분만 소개합니다. 해석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함의含意는 여러분이 읽어내기 바랍니다.

郭?駝不知何始名 病?隆然伏行 有類?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曰 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駝非能使木壽且?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514.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우이 선생님은 10년 전에, 처음 성공회대학에서 사회교육원을 시작할 때 “동양 고전 읽기”로 첫 강좌를 시작하셨다. 주로 학교의 선생님들이 이 강좌에 많이 모여왔다. 논어의 관계론을 막 얘기하기 시작하셨을 때였다.

선생님은 20년 감옥생활 중 독방에 계셨던 시간을 다 합쳐 보면 5년 정도의 시간이 된다. 그때 면벽명상을 많이 하셨는데,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기보다는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을 추체험의 형식으로 반복해서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사는 세상과 지나간 역사와 사람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루어 내셨다.

“ 진정한 자유란 다른 사람들과의 배타적인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 속에 들어와 있고,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 또한 내 속에 들어와 나를 만듦기 때문에 결국 동시대와 동시대 사람들과 얼마나 융화되느냐의 문제 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움 이라고 생각 합니다.”

추 체험의 반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의 글은 거의 언제나 관계론을 말씀하시고 직접 말과 행동의 일치를 위해 언제나 노력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을 따르는 것 같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신선생님께 길을 묻고 있다. 사람들이 돈을 향해서 마구 달려가고 있을 뿐, 참으로 삶의 지표가 될 만한 스승이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큰나무로 우뚝 서 계시는 참 스승을 발견한 것이다.

신 선생님은 대학 2학년 때, 4.19를, 3학년 때 5.16을 겪으셨다. 4.19는 젊은이들이 피로 이룬 혁명이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처음 맞는 사람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던 혁명은“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으로 감동을 채 누려보기도 전에, 자유를 맛보기도 전에 그만 군사 구테타에 의해 “총탄이 모자만 뚫고 지나간 혁명”이 되고 말았다. 선생님은 그렇게 4.19와 5.16 사이에 목격했던 우리사회의 억압구조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한 엄청난 억압과 부조리에 대해 청년다운 감수성으로 맞서다가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셨다.

20년 20일, 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을 읽어 우리시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후에는 언제나 선생님께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시대의 아픔을 그렇게 온 몸으로 겪어내시는 동안 우리는 공부할 수 있었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 빚을 진 느낌은 노촌 이구영 선생님께도 같이 가는 마음이었다.

선생님의 공부 방법은 성찰이다. 선생님은 독서를 할 때는 우선 책의 텍스트를 먼저 읽고, 그 다음은 그 텍스트를 쓴 필자를 읽고, 그 다음에는 텍스트를 읽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읽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을 독자들도 그렇게 읽어주었으면 하신다.

요즈음 선생님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을 자주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걸어가면 길은 저절로 뒤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결론 지으신다.

짧은 글, 긴 생각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오래오래 잘 녹여 기가 막힌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정성을 다하여 글을 짓고, 쓰고, 글씨로 남기고 가르치신다.

선생님의 부탁처럼 우리는 고전을 반복하여 읽고 익혀서 우리 삶에서 자연스러운 태도로 표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하며 스승이 간 길을 함께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유년시절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부터 시작된 고전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20년의 감옥생활에서의 성찰과 출옥 후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실 때의 경험이 모두 녹아있다. 그러니 결국 고전이 가장 고전답게 읽혀졌고 고전답게 가르쳐져 왔던 것이다. 선생님의 60년 세월이 그대로 담긴 삶의 진수이다.

간혹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있다.
“밖에 나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말하면 안될 것 같은 사람도 있어요.”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설마, 나는 아니겠지....”하면서
옆사람을 보고 웃는다. 옆에 앉은 사람도 나를 보고 웃는다. 이심전심이다. ㅎㅎ

그리고 때로는 “가르치는 사람 생각해서 좀 잘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씀 하신다. 정신이 번쩍든다.
“아, 선생님이 오래 기다리고 계셨구나....”

이 시대의 고전을 이 시대의 참 스승께 배우며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한번 외워본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두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선생님은 “더불어 한길”을 함께 가자고, 오늘도 우리 모두를 일깨우고 계신다.

이 책에대하여 혹자는 선생님이 동양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다고 딴지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동양고전 전공인 교수에게 이 모든 글을 미리 읽어보게 하셨다. 이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지금도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선생님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른 아침 샘터참물에서 엉크러진 꿈을 헹구시고, 뜨거운 쇳물 속에서  단련받은
백년강을 보여주셨다. 어느 문장 하나하나 그의 긴 사색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소설가는 피로 글을 쓰고 혁명가는 피로 역사를 쓴다.  선생님은 피로  무엇을 쓰셨을까?
이미 다 만들어놓은 밥상을 그저 선물로 받기만 한 우리는 선생님의 고뇌에 찬 영혼을 간과하기 쉽다.
사람은 그가 걸어간 발자욱으로 후대에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진정 스승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외로운 스승은 묵묵히 앞을 보며 걸어나간다. 무언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만큼 자란 어린제자들은  스승께 무엇을 갚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어떻게하면 스승을 빛내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의 숙제를 가지고 스승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스승의 앞날에 영광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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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11.17 14:58:27 *.11.176.203
샘은 신영복선생님을 가까이서 뵙는 것으로 아는데 지정도서로 읽으니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전 방송에 나온 모습 많이 뵈었지만 책으로 만나니 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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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11.17 19:49:54 *.248.235.10
춘희,
아니, 댓글만 있고... 그대의 원글은 어디갔어?
시경에 있는 시들이 참 아름다워, 속이 깊고.....
그리고 짧은 글 긴 생각도 아름답고 매우 깊이가 있는데....향도 깊고..ㅋㅋ
더불어 숲 홈피에 가면.... 다 정리되어 있으니까...

오늘 밤에라도 꼭 리뷰 해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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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18 09:02:58 *.108.48.236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매료시켰을 뿐 아니라
후배작가들에게 교과서 노릇을 하고도 남았을  '무진기행'의 김승옥이
몹쓸 병으로 언어를 잃어
"나는 버스에 탑니다" 같은 문장을 연습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할 때
인생의 가혹함에 아연실색합니다.

반대로 신선생님의 생애를 보면,
인생의 중추를 감옥에서 베혀 내고도,
그 시공간이 최고의 배움이 되었고,
그 후에도 얼마든지 뜻을 펼치시는 것을 보고
인생의 축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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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11.19 07:56:02 *.248.91.49
명석샘,
김승옥 선생은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지셔서
옆에서 조금만 도우면 일상의 불편함이 전과같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살고 계시는군요.

신선생님은 유머 센스가
선생님의 혹독한 겨울인생을 극복하게 한 힘의 하나가 아닐까? 할 정도로...
선생님 곁에 있으면 많이 웃게 됩니다.
촌철살인의 한마디입니다.

정말, 심신을 웃기시지만......
돌아서서 나올 때는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명석샘은 ?
4계절을 바꾸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꽃피는 봄날이 남았고 삶의 겨울은 이미 지나갔나요?

글로써 선생님을 맞이 했으니...
글로써 계절을 펼치시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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