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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3일 01시 44분 등록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여동빈저/이윤희.고성훈 역 /여강출판사(1994)

 

저자소개


중국의 8대 신선중의 한 사람인 여동빈은 당말(唐末) 경조인(京兆人)으로 이름은 암()이고 자는 동빈(洞賓)이며 호는 순양자(純陽子)이다. 회창년간(會昌年間:841~846)에 세 차례나 진사시(進士試)에 낙제했는데 그때 그는 이미 64세의 고령이었다. 실의(失意)한 그는 노구를 이끌고 강호를 유랑하다가 우연히 장안에 있는 술집에 들렀는데 여기서 종리권(鍾離權)이라는 사람을 만나 장수할 수 있는 방 (方術)을 배웠다. 처음에는 종남산(終南山)에 있었는데 후에 종리권이 다시 그를 학령(鶴嶺)으로 데리고 가서 상진비결(上眞秘訣)을 남김없이 전수했다. 이렇게 해서 여동빈은 도를 터득해서 선화(仙化)하였다. 후에 중국 팔선(八仙)중의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선도(仙道)에 크게 통하였고 뒤에는 불에 입문하여 역시 불도(佛道)도 통했으므로 여조(呂祖)라고 불리기도 하고, 원대(元代)에 이르러서는 순양연정경화존우제군(純陽演政警化尊佑帝君)에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또한 여조는 종리권(雲房道人)으로부터 천우(天祐) 원년(904)에 화산(華山)에서 금단(金丹)과 검법(劍法)을 전수 받았다. 11세기경부터 점차 신선의 대표로서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전진교(全眞敎)의 시조인 왕중왕에게 비도(秘道)를 전해 준 선인(仙人)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전진교의 교조(敎祖)로 받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영험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에 대한 민중의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또한 미륵보살이 도교적 전승자(傳承者)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반드시 검을 등에 지고 있는데 이 검은 탐진 애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진검(眞劍), 혹은 심검(心劍)이라고 한다.

출처: 대순 진리교 홈페이지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 온 글귀

 

태을금화종지 해설

 

p192

전설에 따르면 노자가 그를(관윤자) 위하여 <<도덕경>>을 지어주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실제로 본서의 체계 속에서는 <<도덕경>> 안에 비밀한 모습으로 숨겨져 잇는 신비한 교의에 유래하는 위대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p193

노자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사상가였으며 또한 그의 후계자인 장자는 요가수행자나 자연적(신앙적) 치유자나 연단술사 등이 행하는 모든 요술을 비웃고 있다.

 

여동빈은 모든 힘을 다하여 현상의 흐름 hr에서 정지하여 있는 극을 찾는다. 그곳에서 달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어떠한 실체적인 자아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불교의 교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명상에 있어서 빛을 돌림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신생(新生)과 신적(神的)인 종자를 창조하는 수련과정은 이 책의 앞머리에서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뒤의 부분에서 논하여지는 훈련단계에서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p194

그리스도교에서 친숙한 표현법이 이 책 안에 나타나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유럽에서는 단지 흔히 예배의식의 문구로서 이해되는데 지나지 않는 익숙한 관념들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쓰여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심리학적 의미연결에서 그같이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눈에 띄는 몇 가지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직관적인 관념들을 꼽을 수 있다. 곧 빛은 사람의 생명이다. 눈은 몸의 빛이다. 사람은 물과 불로부터 영적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궁 또는 경작지로서의 사념의 대지를 갈무리 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표현이다.

p195

그리스도교의 관념과 비슷한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라는 관념이나 영적인 신부라는 관념도 언급되고 있다.

 

이 책에서 등불이 밝게 타오르기 위해서는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라는 표현은 새롭고도 중요한 심리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심해야 할 일은 황금꽃(金華)’이라는 도교적인 관념에서 이 표현은 빛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의 자형을 서로 접속이 되도록 상하로 쓰면 위의 자형의 밑부분과 아래의 자형의 윗 부분이 합체해서 광이라는 문자가 이루어진다. 분명히 이 비밀의 문자 은 박해의 시대에 고안된 것이다.

 

p197

우주와 인간은 근본에 있어서 공통한 법칙을 따르고 있어서, 소우주인 인관과 대 우주와의 사이에는 어떠한 두터운 벽 같은 것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전제가 서 있는 것이다. 곧 동일한 법칙이 이 둘을 지배하고 있으며 한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려 있는 것이며, 사람의 심령과 우주는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로서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도는 사람을 지배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자연과 보이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p198

도 라는 이 글자의 본래 뜻은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처음부터 곧바로 목표를 향하여 열려 있는 길이 된다. 곧 도 그 자체는 운동하지 않으나 그것은 모든 운동의 수단이며 그 운동으ㅔ 법칙을 부여한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는 것이다.

 

조자는 이 말을 형이상학적인 뜻으로 쓰고 있는데 그것은 구극적인 세계원리이며 모든 현상의 顯在化에 앞서 있는 이며, 양극적인 대립관계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모든 현실화의 과정은 이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라는 말은 세계내적인 (초월적이 아닌) 의미를 가지며, ‘바른 길곧 한편으로는 천()의 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의 도를 뜻하고 있다.

 

또 또는 태극으로부터 현실성의 원리가 생겨난다. 그 한쪽의 극은 빛()이며 다른 한쪽의 극은 어두움 또는 그림자()이다. 유렵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陽과 陰을 무엇보다 먼저 性의구별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글자는 원래 자연현상과 관련된 것이다.

 

p199

음과 양은 둘 다 현상의 영역 안에서만 나타나며 이들의 원천은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인 것이다. 양은 능동적 원리로서 조건을 부여하는 것이요, 음은 수동적 원리로서 파생되는 것이며 조건을 부여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현상계에 있어서는 다양한 개개인으로써 나타나지만 그 각기의 내부에는 중심이 되는 하나(一者, central monad), 가 생명의 원리로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 수태되는 순간에 바로 본성과 생명(性과 命)이라는 양극적인 현상으로 갈라진다. 본성(human nature) 을 표시하는 문자인 性은 ”(심장 도는 마음) 의 합성으로 이루어진다. 心은 중국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情動的 意識의 자리()이며 그 의식은 오관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밖으로부터의 인상에 대한 감정적 반응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경우에도 기본적 바탕으로서 남아 있는 것, 다시 말하자면 초월적인 의식을 넘어선-상태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 본성()이다.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 보다 더 엄밀한 정의를 내릴 경우에, 그것은 영원한 이념이라는 관점에서 보년, 本來善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는 그 경험적 역사적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을 本來惡이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중립적인 것이어서 오랜 예속의 개발에 의해서만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p200

본성은 정신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자체는 개인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p200-201

사람의 몸은 다음의 두 가지의 심적인 구성물(psychic structures)의 사옿작용에 으해 활기가 있게 되는데, 첫째는 魂. 이것은 의 원리에 속하므로 나는 이를 아니무스(animus)라고 번역한다. 둘째는 魄인데 이것은  의 원리에 속하므로 아니마(anima)로 번역한다. 이 두가지는 본래 죽음의 과정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혼과 백은 모두 망자를 나타내는 鬼를 공통의 자형으로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 아니마()는 특히 육체적인 여러 과정과 결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땅속에 묻혀서 썩어버리는 거시다. 다른 한편으로 아니무스()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혼(soul)이다. 그것은 사후에 위의 대기 속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아니무스는 잠시동안 활동하다가 천계에서 흩어지든지 또는 생명의 보편적인 저수지로 흘러 들어간다.  사람의 생체 가운데서 이둘과 어느 정도의 대응관계가 있는 것은 大腦神經계통과 太陽神經叢계통이다. 아니무스는 두 눈안에 살고 있으며 아니마는 하복부에 살고 있다. 아니무스는 밝고 활동적이며, 아니마는 어두우며 땅에 매여 있다.

 

p201

중국 밖의 다른 데서도 그림자 영혼이라든지, 몸체있는 영혼이라든지 하는 비슷한 관념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분명히 이 중국적 개념에는 이 같은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p202

보통 오른쪽으로 돌음’(시계방향으로 흐름), 다시 말해서 자연히 하강하는 생명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과정 안에서 이 둘(혼과 백)은 지적인 요소와 동물적인 요소로서 서로 관계를 갖는데, 이 경우에 일반적으로는 아니마 곧 무반성적인 의지가 충동을 따라서 아니무스 곧 지성을 억지로 자기를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적어도 아니무스 곧 지성은 아니마의 힘에 내밀려서 외계의 사물로 향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힘(에너지)은 밖으로 밖으로 누출되며 생명은 점차로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긍정적인 성과로서 새로운 존재 (곧 아기)가 탄생되어 생명이 이어져 나아가게 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원적인 존재가 스스로를 외재화하여 버림으로써 최종적으로는 物(thing)로 말미암아  (a thing)이 되어 버린다.  그 종점은 죽음인 것이다. 아니마는 가라앉으며 아니무스는 올라간다. 그래서 힘을 빼앗긴 자아는 뚜렷하지 못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p203

사람의 일생동아네 생명력이 거슬러 흐르는’(역행의)상승운동을 이끌어 들일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서 아니무스로 하여금 아니마의 힘을 자유로이 지배할 수 있게 한다면, 심령은 외면적인 사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된다. 외계의 사물은 인식의 대상은 되지만 이미 욕망의 대상은 되지는 않는다. 이로써 마망은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여기에 내면적이면서도 상승하여 가는 힘의 회전이 일어난다. 자아는 세계의 사물과의 갈등 상태로부터 벗어나며 그래서 사후에도 이어 살아간다. 그것은 내면화에 따라서 생명력이 밖으로 새어나감을 막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출 대신에 신체적 존재양식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의 중심이 일자(모나드)의 내적인 회전운동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아가 곧 하나의 신

Dues,ein Gott)이다.  神을 나타내는 글자는 뻗어나감(), 만들어 감(創出)의 뜻을 가진다. 요컨대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의 옛 글씨는 이중의 꾸불꿀불한 소용돌이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우레나 번개 같은 전기적인 작용을 뜻하기도 한다. 이 같은 존재는 내적인 회전이 계속되는 한은 존속하며, 그것이 감각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며, 위대한 사상이나 숭고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몇 천 년 동안에 걸쳐서 인간성을 고무하고 발전시켜 온 고대의 성자나 현자는 모두가 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p204

사물과의 모든 얽힘으로부터 내면적으로 분리되어 자라나는 황금꽃’(金華)뿐이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그의 자아를 높은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그의 자아는 모나드

(個的인 一者)에 한정됨이 없게 되며, 모든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양극적인 이중성이 미치는 범위를 뚫고 나아가서, 일자인 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불교와 도교의 차이가 있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 니르바나로의 복귀는 이세상과 마찬가지로 다만 미망에 지나지 않는 자아의 완전한 소멸과 관련되어 있다. 열반이 죽음 또는 삼의 정지라고 해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직도 그것은 다만 초월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도교에서의 목표는 인격의 이념이며 체험의 흔적을 영적인 변용 가운데서 지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과 더불어 자기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빛인바 이 책에서는 그것을 황금의 꽃으로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p205-206

이 으뜸된 본성은 몸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앞서, 곧 수태되는 때에 진리가 감추어진 참된 공간에 머물게 된다. 탄생의 때에는 개체화의 한 울 울음소리와 더불어 본성() 생명()의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때로부터 오전한 고요함()을 성취하지 않는 한 본성과 명은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태극도에서 말하기를 위대한 하나(太乙)는 그 자신 속에 참된 기와 씨앗과, 정신과, 아니마 아니무스를 품고 있다. 생각(思念)이 완전히 안정에 이르고 따라서 하늘의 중심(天心)이 나타나게 되면, 심령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근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인간의 본성은 보이지 않는 신체 속에 머물러 살고 있으나 빛의 빛남은 두 눈 사이에 머물러 산다. 그러므로 조사는 빛의 회전에 대해서 가르치어 사람들이 참된 본성에 이를 수 있도록 한다. 참된 본성이란 근원적 정신이며 근원적 정신이란 바로 사람의 성과 명을 이름이다. 그것은 구극에 있어서는 근원적 기운이며 진리의 길이라는 것이다.

 

p208

元神 에는 분별하는 의식과 지식이 없으나 살아 있는 몸의 형성과정을 규제할 수 있다. 識神은 매우 분명한 것이며 매우 활동적이고 또한 언제든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주인이다. 그것은 사람의 몸 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니무스가 되고 몸을 떠나면 영()된다..

 

p209

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식신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빛의 회전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을 실습할 때에는 몸과 마음의 양쪽을 다 잊어버려야 한다. 마음은 죽고 정신은 살아 있듯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이 활동하면 기가 몸을 돌기 시작하여 놀라운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조사가 이르는 가장 좋은 상태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신을 하복부에 가라앉도록 해야 한다. 그때에 기는 정신과 교통하며 정신은 기와 하나로 되고 뭉쳐서 결정한다.  이것이 우선 출발점이 되는 방법인 것이다.

p211

조사는 특별히 생명을 양육하는 방법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두 누능로 코의 끝머리를 볼 것과 눈꺼풀을 반쯤 닫고 마음을 안으로 향할 것과 바른 자세로 편히 앉아 마음을 緣中 에 집중시킬 것 등을 지시하고 있다.

 

수행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조용한 방에 앉아 있을 것이며 몸은 마른 나무와 같이, 마음은 찬 재와 같이 해야 한다. 두 눈의 꺼풀을 내리고 안쪽을 볼 것이며 마음의 상념을 청결하게 하여 욕망을 끊고 힘의 씨앗()을 보존해야 한다. 이같이 하여 날마다 결가부좌하여 닦고 익혀야 할 것이다.

 

눈 안의 빛은 머물러 있도록 하고, 귀는 듣는 작용을 모으고 혀는 입 안의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 천정에 붙이며, 코의 호흡은 조용히 다스리며, 생각은 신비한 관문에 집중시키라, 만일 처음부터 호흡이 잘 조정이 안 되면 숨쉼이 갑자기 멈추게 되다든지, 거칠어져 헐떡이게 된다든지 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눈을 감을 때에는 두 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해지는 콧등의 한 점을 기준으로 삼아라. 그 자리는 두 눈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는 점에서 반치도 안 되는 곳, 콧등의 끝에 있는 콧방울이 있는 언저리가 그곳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해서 상념을 집중시켜 나가는 것이다.

 

p212

이렇게 호흡을 조정하면 몸과 마음은 편안하고 조화로운 상태가 된다. 눈의 빛은 조용히 오랫동안 빛나도록 해서 졸음에 빠진다든지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눈은 밖을 향하지 말고 눈꺼풀을 내리어 안쪽을 밝게 비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비치는 자리는 바로 안에서부터 빛나는 자리인 것이다. 입은 말은 하지도 말고 웃지도 말 것이며, 입술은 닫고 안쪽에서 숨을 쉰듯이 기와 숨을 집중시킨다. 숨을 쉬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코로 밖으로부터 오는 냄새를 맡지 않도록 한다. 냄새를 맡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귀는 밖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한다. 소리를 듣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마음을 안의 한 점에 집중하여야 하니 바로 이 자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면 참된 생각이 저절로 축적되어 간다. 진념이 축적되어지면 씨앗이 축적된다. 기가 축적되면 신이 축적되게 된다. 신이란 상념이며, 상념이란 마음이며 마음이란 불이며 불이란 영양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사람이 내적인 영역을 관조해 가면, 하늘의 문의 열림과 갇힘의 놀라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흡의 조정을 수련하지 않으면 창조와 변화의 깊은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p213

백일동안 꾸준히 수련을 쌓으면, 빛이 비로소 진정한 것이 된다. 그럴 때에 그 빛은 정신의 불(神火)이 될 것이다.  이같이 힘을 써서 수련에 전념해 나아가면 다시 백일 뒤에는 빛 가운데에 참된 창조적인 한 점의 빛(一點之眞陽) 이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道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탐구해야 할 것이다.

 

서양인을 위한 심리학적 해설

칼융

 

p225

이른바 과학적 이해라 하는 것은 두루마기 속에 자기의 본심을 감추는 서양적인 태도라 하겠다.

 

p226

서양의 과학과 학식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낮게 평가하려 한다면 그것은 유럽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큰 기둥을 깎아 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과학은 분명히 완전한  利器는 아니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다만 그 것이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자기 목적화하는 때인 것이다. 과학적 방법이 쓸모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잘못에 빠지는 것은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과학은 서양정신의 이기이며 사람은 이것을 잘 활용함으로써 맨손보다는 더 많은 문을 열어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들이 이루어 놓은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통찰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과학으로 얻어진 앎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러하다.

 

동양적인 지혜를 곧잘 인용부 안에 집어넣고 신앙과 미신이 교차하는 애매한 영역으로 몰아넣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취급해 버리면 우리는 동양이 가지고 있는 사실성을 전적으로 오해하고 말게 될 것이다.

 

p227 서양사람이 언제나 저지르는 잘못은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학생과 같이, 과학을 경멸하여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동양적인 황홀경에 빠져들어가 요가의 명상수행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어설픈 모방을 하는 데 이르는, 그러한 잘못이다.

 

p227-228

어떤 중국고대의 현자가 말하기를 옳은 수단(방편)이라 할지라도 바르지 못한 사람이 쓰면 그 수단은 옳지 못한 데로 쓰여진다.”라고 하였다. 이 중국의 격언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대로 맞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올바른방법은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옳은 것이라고 믿는 서양인의 신념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현실적으로 인간사의 모든 것은 그 사람 나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방법이 어떠한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방법이란 다만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며 방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그 방식이야말로 그의 본질을 바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는 방법이란 단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갖다 붙인 뿌리도 없고 물끼도 없는 것이 돼 버리고, 자기 스스로를 감추는, 정당하지 아니한 목적에만 쓰여질 뿐이다. 그러한 방법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수단이며 자기 존재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냉혹한 법칙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서양문화로 교육을 받는 사람이 그 스스로가 마땅히 해야 할 절박한 과제인 도전에 맞서 싸워라하는 교훈을 외면한 채로 열심히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질적인 것을 흉내 낸다든지 더욱이 그것을 선전 한다는지 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p229

동양의 현자들이 그들의 본성으로부터 오는 본능적인 요구를 총족 시킬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거소가 또한 이 같은 내관을 할 수 있는 심적 태도로 인해서 저같이 세속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우리 둘을 감각적인 것에 얽매이게 하는 저 야망이나 정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직관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해방은 바로 본능적인 요구의 실제적인 충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서툴고 불안스러운 본능의 억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대지의 법칙을 따를 때에 비로소 심령을 향한 우리들의 눈은 눈뜸을 얻는 것이 아닌가?

 

서양의 중세의 몰락으로부터 19세기를 거쳐오는 동안에 그 정신은 점차 지성으로 본질되어 갔으며 드디어 이즈막에 와서는 지성주의의 지배에 참을 수 없게 된 나머지에 반작용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반발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지성을 정신과 혼동하여 지성의 잘못된 점을 정신의 탓으로 비난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지성이 정신의 상속자임을 감히 자처하고 나설 때에 지성은 심령에 상처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정신의 상속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정신이란 지성뿐만이 아니라 감정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지성보다 더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나고 초인적인 높이로 향하고자 하는 생명의 방향이며 원리인 것이다.

 

p230

심성의 중심적인 사실로부터 멀리 떠나서 하나하나의 심적인 기능만을 일면적으로 과장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에 갖추어진 역설성과 이원대립성을 인식하는 데 있어 실패한 적이 없었다. 서로 대립하느 ㄴ것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해 왔으며 이것이야말로 높은 문화의 징표인 것이다. 일면성이란 비록 충격적인 힘을 제공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야만성의 표시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즈음 감정을 찬양하고 직관을 찬미하며 지성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문화적인 전진의 징표라고 생각된다. 즉 그것은 폭군과 같이 힘을 휘두르는 지성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서 의식이 확대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현재의 서양의 지성적인 권위에다가 다른 제 3의 심령적인 기능을 제고시킬 수 만 있다면 서양은 동양을 훨씬 높은 수준으로 앞지를 수 있음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사람이 자기본성을 벗어나 동양을 흉내낸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러한 척 꾸민다거나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유럽사람이 자기자신을 참되게 유지하면서 동양이 수천년을 거치는 동안에 내면적인 본성을 따라 발전시킨 그러한 모든 것을 유럽사람의 본성 안에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들에게 열려 잇는 가능성은 더욱 더 큰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231

지성의 어쩔 수 없는 피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양이 그토록 높이 평가해 온 것들은 서양인들에게는 탐낼만한 값어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의 한갖된 지성은 동양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줄지도 모를 실천적인 중요성을 처음부터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면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동양적인 이념을 철학적이거나 문화인류학적인 골동품밖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몰이해는 매우 한심한 일로서 학식있는 주국학 전문가들마저도 역경의 실천적인 활용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는 바 없는 탓으로 이 책을 다만 난해한 주문을 엮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을 정도이다.

 

p232

사람의 신체는 모든 인종적인 차이를 넘어서 보통의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도 또한 모든 문화나 의식형태의 차이를 넘어서 공통의 기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집합적 무의식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인류의 공통의 무의식의 마음은 의식화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잇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동일한 반응으로 향하는 잠재적인 소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합적 무의식은 모든 인종의 차이를 넘어서 뇌의 구조가 동일한 사실의 심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로써 여러 가지 신화의 모티브가 상징 사이에서 보이는 유사성 내지는 동일성과 나아가서는 인류가 서로의 사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로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발전의 여러 가지의 방향은 하나의 공통적인 밑뿌리로부터 출발된 것이며, 그 뿌리는 모든 과거의 발달단계로까지 잇닿아져 있으며 거기에는 동물들과의 심적인 유사성마저도 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인류란 표상하고 행동하는 본능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모든 의식적인 표상과 행동이란 이 무의식적인 원형적 심상을 그 바탕으로 하여 발달해 온 것이며 언제나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경우란 의식이 아직 그리 높은 정도의 명석성에 이르지 못한 경우인데, 다시 말하면 의식이 그의 모든 작용에서 의식화된 의지보다는 오히려 충동에 따라서 또한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

 

p214

의식화된 의지를 과대평가하는 현대인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나는 의식화된 의지가 갖는 높은 도덕적인 가치를 조금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의지란 인간이 성취한 가장 높은 문화적인 업적이라는 평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덕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른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의지와 능력의 조화시키는 일이야말로 도덕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도덕을 지켜야 한다라는 것은 야만성의 징표가 아닐까? 나에게는 지혜라는 것이 보다 훌륭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아마도 이것은 내가 의사라는 직업적 안경을 통해서 보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의사라 하는 것은 문화적 성취만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생기는 온갖 병폐를 치유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간에 일방적으로 고양된 의식이 필연적으로 원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서 좌절하고 만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p237

인생의 가장 크고도 중요한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이러한 문제들은 모든 자기조절적인 시스템 안에서 반드시 내재적인 이원대립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들이 결코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성장을 통해 극복될 뿐이다.

 

p238

우리에게는 모든 이을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방법으로 바꿔서 보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어느 한쪽만의 방향으로만 곡해되는 것을 피하고자 일부러 매우 추상적인 표현을 쓰게 된다.

내가 말하려는 새로운 것이 곧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나누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고정시켜서 말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되는 처방전이 되어 버리므로 그것은 곧 옳지 아니한 사람의 손에 옳은 수단을 쥐어주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깊은 인상을 얻은 것은 운명에 따라 주어진 그 새로운 것이 결코 의식적인 기대에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이 기묘한 일은 그 새로운 것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뿌리 깊은 본능과는 서로 모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인격의 이상하리만치 적절한 표현이며, 사람이 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상상해 낼 수 없는 완벽한 표현방법이 되는 것이다.

 

p239

이 팩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빛 이란 사람이 일상적인 일을 그만두지 안고서도 그 고유한 법칙에 따라서 순화하고 있다, 모든 것을 생겨나는 그대로 맡겨두는 일, 곧 무위을 통해서 행위하는 것,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자기 스스로가 나아가도록 내버려두는 일, 이러한 것이 나에게는 길()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의 심혼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그대로를 맡겨줄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하나의 기술임에도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란 언제나 간섭하려 들고 도우기도 하며 부정하기도 하면서 심혼의 성장과정을 조용히 내버려두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 일을 매우 단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잇지만 참으로 단순한 것인 만큼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인 것이다.

 

실제로 의식은 자연 발생하는 공상의 작용을 끊어 버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통찰력을 가지고 심혼의 성장과정에서 그것이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굳은 결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극단적인 의식의 긴장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p241

어떤 사람은 주로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p242

인생과 운명에서 미적이나 지적인 장난은 여기에서 끝장이 나게 되는 것이다.  보다 높은 의식으로 발을 들여놓는 길은, 모든 후방지원이나 안전장치를 철거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희생시켜야만 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그의 성실성만이 그를 앞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게 하며 그의 길이 어리석은 모험으로 되지 않도록 하는 보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243

중국의 저자들은 언제나 중심적인 문제로부터, 우리 서양인 같으면 최종목표 또는 행선지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통찰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판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이 볼 적에 남들을 웃기는 말이나 뜻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 그래서 폭넓은 이해심이 필요한, 그러한 관념들을 앞세우고서 글을 시작한다. 따라서 서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동양의 위대한 정신이 지니는 미묘한 심혼에 관한 체험에 대해서 지적인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헛된 일이 될 뿐이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아음 같은 그로 시작한다. : 자기자신을 따라서 존재하는 것을 길이라 이른다.” 그리고  혜명경에서는 도의 가장 정묘한 비밀은 사람의 본성과 생명에 있다.” 라는 그로 시작하고 있다.

 

p247 

이 황금의 꽃은 내가 환자들의 표현 가운데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만다라의 상징이다. 그것은 규칙적인 기하학적 장식인데 평면도로 그려지거나 또는 식물로부터 꽃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p249

첫째, 이 만다라를 낳는 원천은 무의식이며 자연발생적으로 그 같은 공상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둘째, 그 원천이란 생명인데 무슨 일에 완전히 몰두해 있을 때에 그 개인의 인간적 본질인 본래의 자기(the self)에 과한 직관이 생겨나는 경우이다. 본래적인 자기가 감득되어질 때에 그것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무의식에는 생명활동에 몰두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적 만다라의 개념과 일치하고 있으나, 만다라의 상징은 마음의 표출방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떤 작용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p256

심리학자로서의 관심은 이 콤플렉스의 실체에 관한 것보다는 오히려 그 같은 심흔적 현상의 경험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자율성을 가진 경험 가능한 심혼적인 내용의 것이다. 그것은 단편적인 심적 체계인데, 황홀상태 속에서 자연발생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강력한 인상이나 작용 아래에서 유발되기도 하며 도는 정신장애로 말미암아 망상관념이나 환각이라는 형태로 정착되어 결국은 인격의 통일을 파괴해 버리고 마는 ,그러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이루어진 심적 체계인 것이다.

 

p261

광기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에 동화하지 못한 무의식적 내용에 의한 憑依狀態

인 것이다. 그 무의식적 내용은 의식이 그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동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신에의 외경심을 가지지 않으며, 모든 것이 사람들 기준으로 판단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오만함은 곧 의식의 편협성인데 바로 정신병원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p262

서양인의 경우에는 혼령이란 환각이라 함을 자기 스스로 다짐하기보다는 먼저 이 환각의 사실성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는 그러한 심혼적인 힘을 인정할 수 있게 다시 배워야 하며 스스로의 기분이나 신경질이나 망상이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서 스스로가 그의 집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려서는 아니된다.

 

p263

분열경향이란 것은 상대적으로 현실성을 가지는 활동적인 심적 인격의 모습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못하고서 밖으로 투영될 때에는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 된다. 또한 그것을 의식에 관계시키는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의식이 그의 내용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그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마지막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때에만 해당한다. 즉 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온 힘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살아왔으므로 이제 그 이상의 인생의 의무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가 세속적인 일로부터 내면적으로 초월하는 길로 들어서려고 할 때 따라서 어떻나 세속적인 요구라도 서슴없이 희생할 수 있을 때가 이러한 경우인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들 스스로를 속여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마니아라 또는 이라 부른다든지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병벽을 받드는 혐오스럽고 품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며 더욱 풍부한 일로서 보다 높은 정신적인 존재에 순종하는 태도이다. 인격화하는 것은 자율적이며 단편적인 체계의 상대적 현실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의 동화력을 가능케 하고 운명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 이기적 병벽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 병벽으로부터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p272

동양은 외부적인 세계에 관해서는 어린이처럼 무지한 듯하나 그러나 내면적인 일에 관해서는 이미 지식을 갖추고 잇는 것이다. 이제 우리 서양인은 그 대신에 방대한 역사적, 자연과학적 지식의 뒷받침을 가지고 심혼과 그것의 심층을 탐구해 나갈 것이다.

p277 심리학적으로 정확히 바라본다면 죽음이란 생의 끝머리가 아니라 목표인 것이다.

 

p278

본능을 무리하게 억압하여 정신을 히스테릭하게 긴장시킨다든지 독성을 끼치게 만든다든지 하는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이다.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은 또한 본능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킬 수도 있다.

 

p278-279

모든 종교는 심령의 고뇌와 장해에 대한 치유이기 때문이다. 서양적인 지성과 으지의 점증적인 발달은 무의식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거의 악마적인 기교로, 겉보기에는 그러한 태도를 성공적으로 흉내낼 능력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p279

형식적인 흉내는 언제나 불안정한 장황을 낳게 되며 무의식에 의해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새로운 것이 언제나 낡은 것의 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이미 획득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오늘날의 상황에 맞도록 절실히 응용하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의 실현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81

그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것만큼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형이상학적이라 한다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신이 절대적인 존재여서 모든 인간적인 경험의 건너편에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신은 나에게 있어서 차가운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이 신을 향하여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며 신이 나의 마음에 대해서 작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란 나의 심령 속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것이라 함을 내가 알고 있을 경우에는 나는 곧 신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때에는 신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현실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인, 두려울 정도로 일상적인 존재인 것이다.

 

p287

이 대지의 사실성은 테르톨리아누스 의 베일을 쓴 처녀와 같이 영원히 가려진 채로 머물러 잇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자기 폭로는 이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첫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잇는 그대로의 현실 가운데 서서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을 고백한다. 만일 그가 아무런 뜻도 없이 그러한 자기폭로를 감행한다면 그는 혼란에 빠진 어리석은 자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그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괴로움을 참아내면서 그리스도라는 상징을 실현하는 숭고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288

神 또는 道 를 심령의 활동이라든지, 심령적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인식될 수 잇는 그 무엇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인식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 불가능한 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기술적인 지침은 카메라가 어떤 것이며 가솔린 엔진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계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쓸데 없는 것이다.

 

p289

모든 문화적 인간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뇌와 희망과 노력이라는 분위기인 것이다.

그것은 의식화한다는 인류에게 부과된 두려운 실험인 것이며 이 실험이 공통의 과제가 되어 양극으로 갈라진 동서의 문화를 하나로 만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의 확대는 다른 사람들의 의식양식을 희생시켜 가면서 밀고 나갈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혼 가운데 있는 이질적인 (동양의)심혼의 특질과 유사한 요소를 성장시켜 나감으로써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동양이 우리 서양의 기술, 과학, 그리고 산업 없이는 활동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1986년 국가대표 코치가 되면서 스포츠 과학에 좀 더 가까워졌다. 올림픽 유치로 인하여 스포츠 사회에 아직 세계화라는 말이 낯 선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새롭고 앞선 정보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1986년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내가 읽었던 책들은 거의 대부분 스포츠과학과 연관되어 있었다. 어려서는 소설이나 위인전, 그리고 아무 책이나 잡지도 가리지 않고 보았지만 펜싱을 하게 되면서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전문영역에 대한 공부 외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전공외의 서적들을 전혀 안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전공이외의 서적들은 모두 우연히 주어지게 된 책들이었다.  전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심리학 공부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책과 만나게 된 것도 단학이 한 참 유행하던 시절에 융이 그 해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여동빈이 직접 쓴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후반부에 정리된 리하르트 빌헬름과 칼 융의 해석을 더 중점적으로 읽었다.  그래서 나는 여동빈의 책을 읽었으면서도 여동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여동빈이 이발사들의 수호신이고 또 그의 스승 종리권으로부터 금단과 검법을 전수받았다는 것도 후일에 알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이나 검을 다루는 점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의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나는 사실 금단, 혹은 금화 등 내공이나 내단 그리고 심리적 기법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융의 동양에 대한 이해와 서구인으로서 그의 풍부한 동양에 관한 지식이었다. 사실 나는 동양적인 사상서들을 읽을 때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서양인이 해설한 동양인의 사상이나 문화에 관련된 책이나 글들을 읽을 때 훨씬 더 이해가 된다.  그 이해는 개념적인 이해 위에 감각과 느낌의 수준에서도 공감이나 통찰이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든 동양적인 사상에 대해 서양인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의 의식은 이미 동양적이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말한다면 미국식 교육제도 아래 성장한 세계화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몸은 아직도 한국 고유의 것들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식의 내용은 태어나서 배우는 것이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유구한 세월 동안 축적된 유전정보들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좀더 세월이 가면 금단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 볼 생각이다.
왜냐고… ^^
그것은 옛 부처들이 깨달음을 얻고 시공을 가로질러 다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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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8:36:38 *.250.117.172
오빠. 우리의 사상은 더 이상 동양적이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참 의미있는 말이다..
이제쯤이라면 우리 모두 한번쯤 짚고넘어가야할,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화두가 아닐까 싶은데...

오빠가 서구인이 쓴 동양사상이 훨씬 더 이해가 잘된다고 하는건 약간 의외다.
펜싱이지만, 오빠의 시에서 드러나는 머랄까...느낌? 분위기?? 머 그런건 상당히 그야말로 동양의 무사같은 느낌이었거든.

나 또한 서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것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우리와 유사한지 다른지, 언젠가 더 파보고 싶은 분야라 생각하고 있는데.

무튼, 오빠의 북리뷰에 올라오는 책들, 때론 넘 어려워서 감히 댓글 달 엄두를 몬내는 적도 있지만 (내가 스포츠나 과학 글고 심리학에 무쟈게 무식하자녀 ^^:::) , 여하간 오빠가 어떤 길을 가는지는 어렴풋하게나마 조금씩 더 이해가 될 듯도 해.

오빠. 이해 몬하면 단순무식하게 소리라도 질러서 응원할께~ ㅎㅎㅎ
내가 단순무식한 건 자신있엉~!! ㅋㅋㅋ
산이 오빠, 홧팅!!!  케켁. 소릴 넘 질렀나~ 들었징, 오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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