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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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자에 대하여
내 눈에서 비늘을 떼 내어 주신 최고의 스승, 프리초프 카프라? 사부님?:
캠벨과 찰스 핸디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그리고 11월.
니체에 의해 벼랑 끝에 떨어져 있는 나를
노장자가 구름 위로 들어 올렸다.
이윽고 카프라는 그런 나를 구름 위에서, 우주 속에서 그리고 지구 위에서 시공을 초월한 체 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 살아 있는 현현한 스승이 계신다.
그 분을 향해 까르륵 웃음짓자 스승은 온화한 미소로 화답하신다.
당신 역시 장난기 가득 머금은 표정이시다.
스승이 인도하신 카프라를 통해 스승의 미소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새로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 처럼
나 역시
새로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빛을 선사한 이는 카프라일까? 사부님이실까?
아마 우주의 현현 그 자체일게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
- 노자 (380)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마음 놓고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기원전 6세기는 스타 총출동 시대?
기원전 6세기는 사상으로만 놓고 본다면 참으로 격동적인 시기였다. 인도의 싯다르타 고타마, 중국의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대단하지 않은가!
중국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공자와 노자가 동시대 인물인데다 한번은 만남까지 가졌다는 그 사실을 처음 알고 너무도 놀라우면서 동시에 어째서?라는 의문이 강렬하게 들었었다. 어떻게 그렇게 인류의 사상을 이끄는 몇몇 현자들이 기원전이라는 아득한 고대에 한꺼번에 출현했던 것일까..?
물론 그 이후에도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시대의 스승 혹은 현자들을 배출하고 있으나, 엄격히 기원전 6세기의 바운더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낄 때, 다시 한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어째서?
혹시 말이다, 격변의 시기에 그 답이 있는 걸까? 춘추전국시대라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류 역사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사상이 필요했었나…? 라고 답하기에는 통일을 이룬 진나라가 받아들인 사상은 유가도 도가도 아닌 법가였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뒤로 하고, 일단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가야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 동양사상 = 상호 관통
<#1>
얼마 전에 공전의 히트를 친 초대형 베스트 셀러 책으로 <시크릿>이 있었다. “끌어당김의 법칙” 운운하면서 그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걸 끌어당기면 우주가 도와 이룰 수 있다는 상업성의 극치를 이룬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뭐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상호 관통의 법칙에서 뿌리 다 생략하고, 나무 끝의 썩은 가지 하나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해야 할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을 가르는 그 큰 경계선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놓여 있다. 상대성 이론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사실 난 이 책에서 언급하는 과학적 이론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느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에서 시간과 공간은 별도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현대 물리학 이야기에 따르면 우주를 이루는 물질 세계를 초미시적으로 잘게 쪼개도 물질 자체는 결코 스스로 독립적이지 않고 다른 물질들과 여전히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단 한 순간도 정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러한 현상을 거시적으로 확대하면 은하계 전체로까지 그 시선을 돌릴 수 있는데, 우주 역시 어느 하나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단 한순도 정지해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전자들을 실험할 때는 부딪히는 힘이나 속도에 따라 그 결과 역시 달라지기 때문에, 이 때 관찰자 역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요소 중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동양 사상과 닮아 있는 현대 물리학 이론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주는 거대한 그물을 형성하고 서로서로 절대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관계론의 보고인 불교 철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불가의 연기론과도 그 맥을 함께 하는 저자의 주장은, 상징화에 기대어 있는 힌두교나 자연과의 합일을 논하는 도가 역시 그 원류에 있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책을 덮으니 한 가지 생각이 피어 오른다..
저자에 의하면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들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돌이나 금속 같은 무생물조차도 그것들을 잘게 쪼개 보면 죽어 있는 것이 아닌 (즉, 멈춤 혹은 정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닌),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물자들의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노트북도, 저 옆의 서랍장도 다 살아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우주 삼라만상 모두에 생명이 깃들어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며 살고 있다는 불가의 말씀이 더 이상 비유적인 표현만이 아니게 된다. 놀랍다..
우주 모든 물질들이 이렇게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상대적인데, 하물며 우주 지성의 표현이라 불리는 인간끼리의 관계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리…
불가에서 이르기를 마음에 미움의 씨앗을 품지 말라 한다. 그것이 그대로 내게 돌아오니.. 마음에 분노의 씨앗도 품지 말라 한다. 그 또한 그대로 내게 돌아오니..
지금까지 난 그 말씀들을 말씀으로만 받아 들였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말씀들이 달리 해석되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말? 행동? 아니다. 마음이다. 마음에 따라 말과 행동이 결정되고 표현되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말이나 행동은 위장할 수 있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다라는 점이다.
내가 속으로 A가 싫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무난한 척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비록 말로서 “난 네가 싫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상대방은 이미 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맞지 않나?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내 느낌 또한 전달 할 수 있다. 반대로 내가 꺼리는 사람은 겉으로 아무리 예의 바르게 행동해도 상대방이 내가 자기를 멀리한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나의 분위기 속에, 표정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내가 분출하는 나의 에너지 속에 부정의 기운이 담아져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가면 또한 서로 말하지 않고 침묵 속에 묵인하지만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은 미소, 진정이 담기지 않은 칭찬은 듣는 사람도 불편함을 느끼는 것 또한 같은 이치다.
보이지 않지만, 의도하지 않지만 주고 받는 우리의 에너지. 아무리 유능한 포커 페이스를 두르고 있다 해도 감지할 수 있는 본심은 다름 아닌 우리의 진심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관찰자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조차도 상대적이라는 의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비록 같은 사람이라도 상대에 따라 맺게 되는 관계는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상대적이란 말, 참으로 오묘하다… 어쩌면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논하지 않은 이론적 바탕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에너지를 주고 받는 인간 혹은 우주에 있어 질서를 부여하는 운행 법칙이라고 할까… 뭐 그런 것 같다.
<#2>
내가 굳이 표현하지 않지만, A는 좋아하고, B는 미워한다면, 에너지의 주고 받음에 있어서는 A도 나를 좋아하고, B는 나를 싫어해야 옳다 (이것이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즉, 내가 원하는 사람이던, 물건이던, 소망이던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반드시 그렇게 순환하지만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론 내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나와 얽히고 설키는가 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쉽게 남녀로 예를 들자면,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짝사랑도 있다는 말이겠다. 왜 그럴까?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좋은 마음을 품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야 옳지 않나?
여기서 바로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적용된다. 나는 태어나기를 사자로 태어났는데, 호랑이처럼 살겠다고 한다고 해서 살아지는 게 아니다. 반대로 난 호랑이인데 사자한테 구애를 한다고 해서 그 결합이 온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도 그러하고 도교에서 말하는 바로 본성을 찾아 거기에 순응하며 살라는 이치이다. 끌어당김도 좋고 선한 마음으로, 선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좋은 관계를 이루고자 애쓰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한 데 가서 뻘짓해봐야 백날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그렇구나… 들을 때는 그저 통속적인 말처럼 흘려 들었던 말씀 안에 그런 가르침을 담고 있었구나..
<#3>
인연 중에는 선한 인연도 있고, 거쳐가는 인연도 있고 안타깝지만 악연도 있다. 이건 또 왜일까…?
여기에 바로 카르마, 즉 업이라는 요소가 등장한다. 아무리 좋은 씨앗을 품으려 발버둥치고, 아무리 나를 찾으려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이란 게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한 생애가 아닌 전생부터 이어져 오는 카르마인데, 과학적 용어를 붙이자면 우주 순환의 에너지의 부딪힘이 될 수도 있겠고, 주역으로 풀이하자면 천시가 내게 불리한 기운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상당히 외적 요인에 의해 영향 받는 것 같은 카르마도 가만히 심연 깊숙이 들여다보면, 결국은 “내”가 원인인 경우가 태반이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욕심, 나의 무지 등. 즉 원인도 나였기에, 해결의 실마리를 지니고 있는 것도 나라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자신을 낮추고 남부터 도우며 공덕을 쌓으라 한다. 사람부터 얻어, 사람으로부터 탈출구를 도모하라는 말이겠다. 불가에서는 우선 참회 기도를 하고 업장 소멸 수행을 하며 역시나 타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공덕을 쌓으라 한다. 그러다보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말씀이다.
자… 한껏 풀어헤친 이야기들을 정리해보자.
<#4>
사람들은 저마다의 카르마에 의해, 혹은 인과 연에 의해 그에 걸맞는 환경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다. 누구는 평탄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시작부터의 불공평에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부분이다. 모든 것은 내 카르마에 의함이다.
태어났으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일까? 동양 사상에서는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선한 삶이고, 지고한 상태라 이른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과 여러 규칙들을 만들어 냈고, 그 중에는 인간 본성을 제한하고 억제하는 요소들도 많다.
내가 늘 풀지 못했던 의문점 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야기되는 혼란은 과연 어떡할지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나 오늘 난 이 책을 읽으며, 그건 그야말로 “우문”이었음을 깊이 깨달았다.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본성에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즉, 법신 혹은 진여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선 엄청난 자기 수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인만큼, 그 길은 단순히 일탈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길인 게다. 즉, 통찰과 일탈의 차이라고나 할까.
통찰의 길을 가게 됨으로 얻게 되는 자유란 그럼 어떤 것일까? 그건 아마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나를 사회에 끼어 맞추기 위한 모든 사회적 규범과 제도를 뛰어 넘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 그 끝이 쾌락에만 닿아 있는 일탈과는 사뭇 다른 삶이 되겠다.
일탈의 길을 걸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그 끝에는 자기 파괴라는 블랙 홀에 빨려 들어간다면, 버리면서 채우는 통찰의 길은 내면의 빅뱅을 만들어내면 새로운 자아 창조의 길로 간다고나 할까…? 일탈에서의 사랑이 어둠 속에서 벌이는 육체적 탐미의 의식이라면, 힌두교에서 말하는 억압하지 않은 사랑은 남녀 모두 깨침의 유사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영육이 하나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었으면 전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 오지도 않았을 게다. 그런데 몸서리치게 싫은 건, 지금 이 순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세세생생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내 삶은 변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5>
흥미로운건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기 (영혼의 레벨)에 따라 끼리끼리 모인다는 사실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옛말도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똑 같은 사랑을 먼저 준다고 해도, 돌아오는 사랑이나 정도는 서로의 연관성에 의해 다 제각각이란 의미이다.
캠벨의 말처럼 내 안의 영혼이 우주와 공명을 일으켜 나의 본성을 찾는 일을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알게 모르게 내 주변에 몰려드는 인연들이 나와 늘 선한 인연을 맺는 선순환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
진리를 깨치는 길은 철저히 스스로 각성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 길에 도달할 때까지 그 누구도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이다. 조금이라도 본성을 찾아가고자 자기 수행을 쌓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과 선한 인연을 맺고, 그래서 그 사람들과 좋은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좋은 관계를 쌓아가다 보면, 나를 감싸고 있는 우주도 나를 도와 내가 점점 더 선순환의 삶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던 세상 일도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과 합일에의 길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우주의 순행 법칙이 아닌 타인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규범에 속박당하지 않고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내 영혼은 태초부터 자유였고, 지금도 자유다..
사부님 저 지금 들어갑니다. 아무리 해도 여기까지 밖에는 못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수행 들어가 마음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특히 인용문 부분, 제가 좀 미련해서 앞부분 밑줄 그은 거 다 치다 보니까
결국 뒷부분은 말도 안되게 타이프를 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어려운 책이었지만 정말 좋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겨울입니다. 아침, 저녁 날씨가 예사롭지 않으니 사부님 그 어느 계절보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수희향 올림.
덧: 사부님, 사자 칼럼은 사례가 준비되지 않아, 책과 연관된 칼럼을 쓰고 있는데
도저히 너무 짧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적절히 조절하지 못한 제가 쫌 마니 미련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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