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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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ü 인류의 사상사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사상의 조류가 만나는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풍요한 발전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전적으로 타당한 얘기일 것이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역자 서문>
ü 고전 물리학을 키워 온 기본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11).
ü 이와는 반대로 불교 등의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11).
ü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12).
ü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12).
ü 현대 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적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심각한 사상적 고민 속에서 그들은 일찍부터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3).
ü 고전 물리학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가졌다면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데카르트나 칸트를 찾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 카프라 박사는 이것을 동양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본 것이다 (13).
ü 저자는 이 책 속에서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 등 동양사상을 통틀어서 신비주의라 했다. …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 모든 존재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일 것이다. 일체를 시공 4차원적인 변화의 견지에서 보는 동양 사상은 3차원적인 논리로는 적절하게 해설할 수 없으므로 그로서는 신비주의라 말할 수 밖에 없등ㄹ 것이다 (14).
ü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인 것의 한 과정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현대 물히가의 자연관은… 동양 사상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14).
ü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15).
ü 주관적 경험은 예술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서양 예술과 동양 예술의 주류가 양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 예술의 주류가 동적인 것이라면 동양 예술의 주류는 정적인 것이다 (15).
<제2판 저자 머리말>
ü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을 집필하면서도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19).
ü 그 흐름은 서양 문화 – 서양 사상과 감정, 가치관과 태도, 사회와 정치 구조-의 심각한 불균형을 중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나는 중국의 음양 사상이 그와 같은 불균형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0).
ü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 (vision of reality)이 출현하게 된다 (21).
ü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21).
ü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 길은 부처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21~2).
ü 그뿐 아니라 동양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은 물리학에 그치지 않고 생물학, 심리학과 그 밖의 과학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주제들은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느껴진다 (22).
<제 1판 저자 머리말>
ü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24).
ü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산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4).
ü 나는 양자 이론의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의 불가사의함에 특히 이끌렸다 (25).
ü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6).
<1부: 물리학의 길>
1장.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ü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Don Juan의 가르침>
ü 현대 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끔 했다 (34).
ü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34).
ü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존재의 드라마에 있어서 관객이며 연기자로서의 우리 입장을 조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혔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할 것이다- 닐스 보어 (35).
ü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바로 이 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의 유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것이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 말인지 모를 지경에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 (35~6).
ü 내가 ‘동양적 신비주의’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철학을 뜻한다. 그들은 정묘하게 짜여진 수많은 계율과 철학 체계를 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관의 기본 특성은 다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점은 동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신비적 성향을 가진 철학에서 어느 정도씩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이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종교 속에는 신비적 전통이 담겨 있으며 서양 철학의 많은 학파 가운데서도 신비적 요소는 찾아질 수 있다 (36).
ü 신비주의가 서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 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 종교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데 동, 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36).
ü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 ‘물리학’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ㅂ h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37).
ü 이것은 또한 신비주의자들의 중심 과제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은 이런 신비주의적 경향을 실로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그리스 인들은 밀레토스 학파를 ‘물활론자’, 즉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37).
ü 탈레스는 모든 물질은 신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선언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인체가 공기에 의해 유지되듯이 우주는 우주의 숨결인 ‘프노이마 (영혼)’로 지탱되는 일종의 유기체라고 본 것이다 (37).
ü 동양 사상과의 유사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훨씬 더 뚜렷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 그의 보편 원리는 만물의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불이었다 (37).
ü 이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38).
ü 헤라클레이토스에 세차게 맞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 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38).
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립적인 관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 원자-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 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39).
ü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라는 아이디어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000년 이상이나 서양 사상을 사로잡는다.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000년 동안이나 서구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39).
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39).
ü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ㅅ ㅣ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서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서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사변적인 아이디어를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39).
ü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40).
ü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40).
ü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펼쳐 천상에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법으로서 보인 것이다 (40).
ü 데카르트는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무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40).
ü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41).
ü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고전 무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 과학이 20세기에 와서 이제 그 분열을 극복하고 초기 그리스와 동양 철학에 표명된 전일의 이데아로 다시금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41).
ü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게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1).
n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ü 동양의 신비주의는 각각의 종파에 따라 세세한 면에서는 다른 점도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도가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 시키는 일이다 (42).
ü 동양적 관점에서는 자아를 쪼개진 대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도 활동하고 무상하게 변전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이는 것이다 (42).
ü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43).
n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는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ü 동양 철학의 이 같은 유기적, 생태학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최근 서방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아직도 기계론적인 분열된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저변에 만연되고 있는 불만의 잠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해방에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44).
ü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 도-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44).
2장. 아는 것과 보는 것
ü 허망한 것에서부터 진실한 것으로 /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어둠으로부터 밝음에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죽음에서 영생으로 /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 우파니샤드 (45).
ü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인정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절하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이다. 서양과 동양의 위대한 두 사람의 지식에 관한 다음의 진술은 이 두가지 입장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고, 중국의 노자는 “알아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46).
ü 어떠한 지식도 그 한계가 현대 과학에서 점점 두드러지고 있으며,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의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48).
ü ….. 우리는 이 개념들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혹을 떨쳐 버리게 하는 일이 바로 동양 신비 사상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48).
ü 도가의 현자 장주는 이렇게 말했다 (48).
n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ü 서양에서는 어의론자인 알프레드 코지프스키가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힘찬 슬로건으로서 똑 같은 견해를 정확히 표현했다 (49).
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지적 사상뿐만 아니라 감각적 인지까지도 초월하느 실재의 직접적인 체험에 관심을 두었다. <우파니샤드>의 말중에 (49).
n 소리도 없고 접촉도 없고, 형체도 없고 불멸하며/ 또한 맛도 없고 항존하며, 냄새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위대한 것보다 더욱 높고 영속하는/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사람은 죽음의 아가리로부터 해방되나니.
ü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불교도들은 절대지라고 불렀다. … 불교도들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차별이 없고 불가분하며 한정되지 않은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의 이해는 동양 신비 사상의 중핵을 이룰 뿐만 아니라 모든 신비스런 체험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49).
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 즉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 점에 관하여 말한다 (49).
n 거기엔 눈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며,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 그것을 누가 어찌 가르칠 수 있으랴
ü 이 실재를 도라고 부른 노자는 <도덕경>의 첫 줄에서 똑 같은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50).
ü 절대지란 이렇게 전적으로 실재의 비지성적인 체험인데, 이것은 ‘명상적’ 또는 신비적 상태라고 불릴 수 있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50).
ü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50).
n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깨어 있는 의식은 실상 의식의 한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얇은 스크린에 의해서 분리된, 그 건너 저편엔 전혀 다른 의식의 잠재 형태가 가로누워 있는 것이다.
ü 한편 그리스 철학은 이 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 그리스 인들은 기본 공리나 원리로부터 연역해서 그들의 모델을 얻어 낸 것이지 그들이 관찰한 것에서부터 귀납한 것은 아니다 (52).
ü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52).
ü 이 기본 작업에 있어서 추상화가 가장 요긴한 특성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를 그려 내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짜여진다. 이 지도는 다만 실재의 어떤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52~3).
ü 우리 언어의 부정확성과 모호성은 잠재 의식층과 그 연상 작용에 따라 시작을 하는 시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53).
ü 실상 많은 수학자들은 수학을, 단지 자연을 기술하는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 신조의 창시자는, ‘만물은 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매우 독특한 수학적 신비론을 발전시킨 피타고라스였다. 이리하여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종교의 영역에 논리적 추리를 도입시켰는데, 이것은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면 서구의 종교 철학에 결정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53).
ü ‘아시아의 더 솔직한 신비주의’도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동양적 견지에서는 고도로 특수화되고 잘 정의된 구조를 가진 수학은 우리들의 개념적 지도의 일부로서 간주되어야지 실재 그 자체의 특성으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비가들의 경험에 의하면 실재란 철저히 불확실하고 분별되지 않는 것이다 (54).
ü 과학적인 추상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그것을 더욱 능률화시키며, 그 연결을 더욱 엄밀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54).
ü 만약 과학에 직관적 요소가 있다면 동양의 신비주의에도 또한 추론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 유파에 따라서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정도가 무척 다르다. 예컨대, 힌두교의 베단타나 불교의 마댜미카는 대단히 지적인 교파지만, 반면에 도가들은 이성과 논리를 언제나 심히 불신했다. 불교에서 생장해 나왔으나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종은 문자에 서지 않고 (불립문자), 언어를 끊고, 지혜없는 지식없이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개오의 증험에 집중하며, 이 증험을 해석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선의 명구가 있다. “네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 표적을 잃어버린다.” (55).
ü 동양 신비주의의 다른 유파들에 있어서도 좀 덜 극단적이긴 하지만 직접적 신비 경험은 여전히 그들 모두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세련된 논설을 벌이는 신비가들도 지성을 지식의 원천으로는 보지 않고 그것을 단지 그네들의 개인적 신비 경험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사용할 따름이다. 모든 지식은 이러한 체험의 기반 위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은 그 지지자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강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스즈키 다이세쓰는 이렇게 말했다 (55).
n 개인적 체험은… 불교 철학의 기반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오 체험의 뜻을 찾기 위하여 후에 어떠한 논법이 발전되었든지 간에 불교는 철저한 경험론 또는 실험주의인 것이다 (56).
ü 이와 같은 정신은 선구에서도 비치고 있다 (56).
n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는/ 계절과 인과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
ü 신비적 체험의 본성은… 동양적 전통에서는 지성의 영역 밖에 있고, 생각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직접적 통찰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스스로의 안에서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관조에 의해서 (56).
ü 도교에 있어서 이 관조의 뜻은 본래 ‘본다’는 것을 뜻하는 ‘관’이란 도가의 사원 이름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도인들은 그들의 사원을 관조의 장소로 여겼다. 중국의 선종에서는 개오를 자주 ‘도통’이라고 불렀으며 불교의 모든 종파에서는 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의 기초로 여겼다 (56~7).
ü 스즈키 다이세쓰는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57).
n 불교적 인식론에 있어서는 본다는 것이 안다는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앎은 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지식은 본다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앎과 봄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보인다. 그러므로 불교 철학에서는 궁극적으로 실재를 본래 면목대로 보는 것을 지향한다. 봄은 개오를 증험하는 것이다.
ü 동양의 신비가들이 ‘봄’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시각을 포함한 지각의 한 양식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언제나 또 본질적으로 그것을 초월하여 실재에 대한 비감각적인 경험으로 되는 것이다 (57~8).
ü 선불교의 학도들은 그네들의 ‘본래 면목’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이 본래 면목을 돌연히 ‘기억해 내는 일’이 곧 개오인 것이다 (59).
ü 정신적 통찰과 농담의 이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개오한 인사들에게는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을 터다. … 특히 선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기담으로 가득 차 있는데, <도덕경>에는 ‘그것이 웃음거리가 아니라면 도가 되기에는 아직 불충분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60).
ü 이 깨달음- 직접적이고 비개념적인 실재에 대한 깨달음- 을 위한 마음의 준비야말로 모든 유파를 초월한 동양 신비주의와 동양적 생활 양식의 많은 국면에 걸친 주 목적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오랜 문화사는 엄청나게 다양한 기예와 의식과 예술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말의 가장 넓은 뜻에서 명상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60).
ü 이러한 기예의 기본적 목적은 사고하는 마음을 누르고 깨달음을 추론적인 데서 직관적 의식의 모습으로 바꾸는 데 있는 듯하다. 수많은 명상의 형태에 있어서 이 추론하는 마음을 침묵시키는 것은 이를 테면 숨결이나 만트라의 소리나 만다라의 영상처럼 한가지 것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60).
ü 동양의 예술 양식들 역시 명상의 양식이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이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직관적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실현의 방도인 것이다 (61).
ü 명상에 침잠하면 마음은 모든 이념과 개념을 텅 비우고 오랫동안 그 직관적 형태를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노자는 학구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61).
n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ü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 장주의 말에, “성인의 고요한 마음은 천지와 만물의 거울이다”는 것이 있다. 주위 환경과 합일하는 체험은 이러한 명상 상태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62).
ü 선의 대가 야수타니 노사는 선 명상법인 ‘시칸타자’를 기술하는 데 이 이미지를 쓰고 있다 (62).
n ‘시칸타자’는 긴장되거나 조급하지 않으며 분명 이완도 되지 않은 집중된 자각의 고양 상태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 보고 있는 자의 마음이다. 고대 일본에서 곧잘 있었던 것과 같은 검도의 칼 겨룸을 당신이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이 상대방과 마주 섰을 때 당신은 한치의 틈도 없이 노려보면서 심신을 다잡아 조일 것이다. 만약 일순이나마 방심하면 당신은 즉각 베일 것이다. 군중들이 검투를 보러 모여든다. 당신은 장님이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목의 한쪽 귀퉁이로는 그것들을 보고 들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이 그 같은 감각적인 인상에 홀리지는 않는다.
ü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63).
ü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64).
ü 동양의 전통은 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무엇보다 먼저 신비가들은 실재의 체험에 주로 관심을 가지지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65~6).
ü 인도의 신비주의, 특히 힌두교는 신화의 형식을 빌려 이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은유와 상징과 시적 이미지와 직유와 우화가 동원되고 있다.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마력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암시적인 이미지가 풍부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적인 언어보다는 신비가들이 실재를 체험하는 방식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르면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66).”
ü 깊이 있는 혜안을 지닌 힌두교도들은 이런 모든 신들이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과 신화적 이미지는 실재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것들이… 신화적 경험에 뿌리 박고 있는 철학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수레라는 것도 알고 있다 (66).
ü 중국과 일본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언어적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도록 실재의 역설적인 본성을 창출해 내는 대신에 그들은 가끔 사실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가에서는 언어적 소통에서 유발하는 부조화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역설을 자주 상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도가들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에게 계승시켰고, 소위 공안을 가진 선불교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67).
n 잎들이 떨어져/ 서로서로 위에 몸을 누이고/ 비는 비를 때리네
ü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 이론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68).
3장. 언어를 초월하여
ü 그 본질에 있어서 어의를 초월하고 있는 우리의 내적 경험을 / 전달하는 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범상한 사고 방식을 그처럼 당혹시키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 스즈키 다이세쓰 (69).
ü 언어의 문제는 여기에서 정말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일상 언어로써는 아무래도 이야기할 수 없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69).
ü 현대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70).
ü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확실히 가장 흥미로운 사태 발전이 되어 왔으며, 여기에 그것을 동양 철학과 연관지을 수 있는 뿌리의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다 (70).
ü 동양의 신비 사상이 부딪친 언어의 문제는 현대 물리학이 당면한 문제와 똑같다 (70).
ü 동양의 신비 사상은 실재의 역설적인 면을 다루어 내는 몇 가지의 유별난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힌두교에서는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우회한 반면에 불교와 도교는 그 역설을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했다. 도가의 주요한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이다. 그것은 당황스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단단하고 강력하고 지극히 시적인 언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논리적인 추론의 낯익은 상궤에서 떨쳐내 버린다 (72).
ü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들은 신비적 체험을 전달시키는 이 도교적 기교를 취해서 그 역설적인 성격을 열어 보인다. 다이토 대선사가 선 수업을 받고 있던 천황 고다이고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72~3).
n 우리는 수천 ‘칼파 (겁)’ 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
ü 선종은 대화에서 야기되는 불일치에서부터 지덕을 창출해내는 특별한 비결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언어로써가 아니라 공안의 체계를 가지고 온전히 전수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시켜 왔다 (73).
ü 비합리적인 언사와 역설적인 내용은 사유로써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은 사유 과정을 정지시키고자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며, 그래서 제자에게 실재에 대한 비언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73).
ü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 세계 자체는 우리들의 자각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76).
ü 우리가 자연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일상 언어의 이미지와 개념을 더욱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77).
ü 무한히 작은 세계로의 이 여행에서 철학적 견지에서 보아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그 첫 걸음, 즉 원자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원자의 내부를 조사하고 그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가진 감각적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논리와 상식에 그의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77).
4장. 새로운 물리학
ü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79).
n 현대 물리학의 최근의 발전에 대한 격렬한 반응은 물리학의 기초가 여기에서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 동요로 해서 과학의 토대가 와해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ü 이러한 변화로부터 새롭고도 아주 다른 세계관이 나왔고, 그것은 현재의 과학적 탐구에 의하여 아직도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하여 동양의 신비가들과 서양의 물리학자들은 거의 동일한 혁명적 경험을 통하여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된 듯하다 (80).
고전 물리학
ü 현대 물리학의 제 발견에 의하며 변화된 세계관은 뉴턴의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모델은 고전 물리학의 확고한 체계를 구축했다 (81).
ü 모든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더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82).
ü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에 의하여 묘사되었는데, 그것 또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관계 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82).
ü 이 절대적 공간, 절대적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뉴턴적 세계의 요소들은 물질적 입자들이었다. … 이것은 그리스 원자론자들의 모델과 아주 흡사하다 (82).
ü 후자가 (뉴턴적 원자론) 물질적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은 매우 단순하며, 오직 입자들의 질량과 상호 거리에만 의존한다. 그것이 중력인데, 그것은 그 작용을 받는 물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거리에 상관없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뉴턴은 보았다. 이것은 생소한 가정이기는 하였으나 그 이상 연구되지는 않았다.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그 이상의 분석을 받지 않았다 (82~3).
ü 뉴턴 역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사건들은 상호의 인력, 즉 중력에 의해서 야기되는 공간에서의 물리적 점들의 운동으로 환원된다 (83).
ü 뉴턴의 운동에 관한 방정식은 고전 물리학의 기초다. … 뉴턴의 견해로는, 태초에 신이 물질적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을, 그리고 운동의 근본적 법칙들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 우주는 운동하게 되었으며, 그 후 항상 불변의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기계처럼 우주는 계속 운동하여 왔다 (83~4).
ü 이와 같이 자연의 기계론적 견해는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 이 거대한 우주 기계는 완전히 인과적인 것, 결정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84).
ü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84).
ü 18세기와 19세기는 뉴턴 역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보았다. 뉴턴 자신은 그의 이론을 유성들의 운동에 적용시켜서 태양계의 근본 특색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성 모델은 아주 단순화시킨 것이어서, …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규칙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러한 불규칙한 것을 바로잡으려고 우주 안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신을 가정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84~5).
ü 천문학에서의 뉴턴 역학의 눈부신 성공에 고무되어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유동체의 연속 운동과 탄성체의 진동에까지 확장시켰는바, 역시 성공하였다 (85).
ü 이 기계적인 모델의 엄청난 성공은 19세기 초의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우주가 진실로 뉴턴의 운동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거대한 역학적 체계라고 믿게 하였다. 이러한 법칙은 자연의 기본 법칙으로서 이해되었으며, 뉴턴 역학은 자연 현상의 궁극적인 이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뒤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뉴턴 모델의 한계를 나타나게 하고 그 모델의 어느 특성도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발견되었다 (86).
ü 이러한 발전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전기 및 자기적 현상의 발견과 탐구였는데, 이것은 역학적 모델로는 적절히 기술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새로운 타입의 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86).
ü 그들은 힘의 개념을 역장으로 대체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뉴턴 물리학을 최초로 넘어서게 되었다 (87).
ü 대신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각 전하는 다른 전하가 나타나면 어떤 힘을 느끼도록 그 주위의 공간에 ‘산란’ 혹은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이라고 부른다 (87).
ü 이것은 인간의 물리적 실재에 관한 개념의 가장 심오한 변화였다. 뉴턴적 견지에서는 힘이 작용하는 물체와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힘의 개념이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물질적인 것들과 아무런 관계 없이도 연구될 수 있는 훨씬 미묘한 장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87).
ü 이처럼 모든 것이 엄청나게 뒤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 역학은 모든 물리학의 기반으로서의 위치를 처음엔 고수했다 (89).
ü 그는 명백하게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의 이론에 있어서의 근본적 실체는 장이지 역학적 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사람은 50년 후의 아인슈타인이었는데… (89).
ü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은 상이한 현상들에 적용되는 두 개의 성공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으니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 역학이 그것이었다. 이리하여 뉴턴적 모델은 더 이상 모든 물리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 (89).
현대 물리학
ü 금세기가 시작되고 처음 30년간에 물리학의 전상황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이 현재 뚫고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영역에로 확장될 수 없었다 (89~90).
ü 현대 물리학의 초기에 비범한 지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이 곧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에 간행된 두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두 혁명적인 추세를 창도했다. 그 하나는 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적 복사에 대한 새로운 고찰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그 후 원자 현상에 관한 이론인 양자론의 특성이 되었다. 완전한 양자론은 25년 후에 물리학자들의 전체 팀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의 경우엔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자신에 의하여 완전한 형태로 수립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논문들은 20세기 초에 세워진 당당한 지적 기념비- 현대 문명의 파리미드였다 (90).
ü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고전 물리학의 구조를 통일하고 완전하게 하였지만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히 변화시켰으며 뉴턴적 세계관의 한 근본을 전복시켰다 (90).
ü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90).
ü 상대성 이론에서 물리적 현상의 토대가 되는 뉴턴의 절대 공간의 개념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91).
ü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 mc2에 의해 주어진다. 이 때 c는 빛의 속도다 (91).
ü 빛의 속도인 이 불변수 C (초속 30만 킬로미터)는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91).
ü 1915년에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중력, 즉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들의 상호 인력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대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창하였다 (91).
ü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92).
ü 이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3차원 공간이 실제로 휘어져 있고, 그 만곡이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장에 의해 야기됨을 말해 준다 (92).
ü 그리고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이 시간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물체의 존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폐기시킨다.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전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빈 공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93).
ü 러더퍼드가 원자들에 이 알파 입자들을 발사하였을 때, 그는 놀랍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고대로부터 믿어 왔듯이 원자는 딱딱하고 견고한 입자들이 아니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전기력에 의해 핵에 묶여져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94).
ü 이러한 원자의 ‘유성’ 모델의 출현에 뒤이어 곧 원소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수가 그 원소의 화학적인 성질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95).
ü 그러나 이러한 법칙들을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그룹에 의해서 1920년대에 발견되었다. 이들 물리학자들은 국가적인 모든 경계를 넘어서 그 힘을 합하여 현대 과학에서 가장 열띤 한 시기를 이루었으며, 이 시기에 인간은 처음으로 아원자적 세계의 기묘하고도 예기치 않은 현실과 접촉하게 된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원자적 실험을 통해 자연에 질문을 제기했을 때마다 자연은 이에 역설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을 더욱 명백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역설들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95).
ü 일단 이러한 사실이 파악되자 물리학자들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모순을 피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아무튼 그들은 양자론의 정신 속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이 이론의 정밀하고도 일관된 수학적 공식을 발견해 냈던 것이다 (96).
ü 양자론의 개념들은 그 수학적 공식이 완성된 후에도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양자론적 개념들은 물리학자들의 상상력에 대해서 실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러더퍼드의 실험은 원자들이 견고하고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극도로 미세한 입자들이 운동하고 있는, 공간의 광막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으며, 양자론은 이제 이러한 입자들조차 고전 물리학적인 견고한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때로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전자기파 혹은 입자의 형태를 취하는 빛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96).
ü 물질과 빛의 이러한 성질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 이 모든 발전은 막스 플랑크가 열복사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다발들’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에너지 다발을 ‘양자’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자연의 근본적인 한 양상으로서 인정하였다 (96).
ü 입자상과 파동상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모순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 즉 물질의 실재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97).
ü 양자론은 이렇게 견고한 물체와 엄격한 결정론적인 자연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들을 말소시켰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97).
ü 그리하여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98).
ü 두 번째 수수께끼는 원자들의 이상한 기계적인 안정성이다 (98).
ü 양자론은 원자들의 이런 모든 놀랄 만한 성질들이 그 전자들의 파동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99).
ü 모든 원자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서 거시적인 세계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것은 양전하는 원자핵과 음전하의 전자들 사이의 전기적인 인력이다. 이 힘과 전자파간의 상호 작용은 우리 주위에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102).
ü 양자론이 원자의 세계를 해명한 후인 1930년대에 원자핵의 구조, 즉 구성 요소 그리고 그것들을 매우 단단하게 속박하고 있는 힘들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주요 과제였다 (102).
ü 원자핵 구조의 이해를 위한 첫 번째 중요한 단계는 원자핵의 또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의 중성자를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양성자와 거의 동일한 질량- 전자 질량의 약 2천 배-을 가지고 있지만 전하를 지니고 있지 않다 (103).
ü 그 모든 별난 특성들을 설명해 주는 핵 물질의 본질적인 새로운 양상은 강한 핵력이며, 이런 힘을 그와 같이 독특하게 하는 것은 그 극도로 좁은 범위라는 것이다 (103~4).
ü 열 에너지가 약 100배쯤 증가하면 대부분의 항성들에서처럼 모든 원자와 분자의 구조는 파괴된다. 우주에 있는 대부분의 물질은 실로, 방금 기술된 것과는 매우 다른 상태로 존재한다 (104).
ü 우리의 지구에 있어서도 태양의 중앙에서 발생하는 핵 작용들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지상의 환경을 유지해 주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우주와 우리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태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출이 무한히 작은 세계의 현상인 핵반응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현대 물리학이 거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 (104).
ü 이 초미시적 세계로 꿰뚫고 들어가는 인간의 역사에서 보면, 1930년대 초기에 와서 물리학자들이 물질적 ‘기본적 구성체’를 최종적으로 발견했다고 생각한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105).
ü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두 가지의 발전은 물질의 근본적인 단위로서의 소립자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두 가지 발전 중의 하나는 실험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적인 것으로서 이것들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105).
ü 핵 세계의 완전한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양자론과 상대론 이론을 통합시킨 이론이다. 그러한 이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직까지는 핵의 완전한 이론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핵의 구조와 핵자들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으나, 아직 그 근본적인 단계에서의 핵력의 본성과 그 복잡한 형태는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원자 세계를 밝혀 준 양자론에 견줄 만한 핵자 세계에 관한 완전한 이론이 없다. … 하지만 입자 세계의 완전한 이론을 위하여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을 융합하는 일은 여전히 현대 기초 물리학의 중요 문제며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 (106).
ü 상대성 이론은 입자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본질적으로 바꾸게 함으로써 우리의 물질상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어떤 실체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또는 작용과 관련된 동적인 양이다 (108).
ü 입자들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디랙이 전자들의 동태를 기술하는 상대론적 방정식을 정립시켰을 때 그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108).
ü 지금은 양전자로 불리는 양성 전하의 이 입자는 디렉이 그것을 예언한 2년 후에 실제로 발견되었다 (108).
ü 근본적인 의문은 물질이 계속하여 거듭 분해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결국엔 어떤 최소의 불가분적 단위에 도달되는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디렉의 발견 이후 물질의 분할에 관한 모든 질문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109).
ü 우리는 물질을 거듭해서 분해할 수는 있지만 더 작은 조각들을 얻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 과정에 수반된 에너지로부터 입자들을 생성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원자적 입자들은 파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109).
ü 이러한 사태는 우리가 ‘기본적 구성체’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적 ‘물체’라는 정적인 견해를 취하는 한, 결국 역설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동적이며 상대론적인 관점을 취할 때에만 그 역설은 사라지게 된다. 그 때에 입자들은 우리들에게 질량으로서 타나나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의 역동적 모형 또는 작용으로 보이는 것이다 (109).
ü 아원자적 입자들의 고에너지 충돌은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입자들의 속성을 연구하는 데 이용되는 주된 방법이다. 그러므로 입자 물리학은 또한 ‘고에너지 물리학’이라고도 불린다 (109).
ü 이러한 충돌에서 생겨나는 대부분의 입자들은 100만분의 1초보다도 훨씬 더 작은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며, 그 뒤에는 다시 양성자들, 중성자들 전자들로 붕괴된다 (110).
ü 지난 수십 년 동안에 행해진 고에너지의 산란 실험들은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입자 세계의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물질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났다. 모든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것들은 에너지에서 생겨나 에너지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소립자’, ‘물질적 실체’ 혹은 ‘독립된 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전 우주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 모형들의 역동적인 그물로서 나타난다 (111).
ü 그것들 입자의 속성들은 그 활동- 주위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입자는 독립된 실체일 수가 없고 전체의 통합된 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12).
ü 상대성 이론은 입자에 관한 우리의 개념뿐만 아니라 이 입자 간의 힘에 관한 이미지에도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112).
ü 이것은 물질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힘을 다른 구성 요소들의 속성과 관련시켜 힘과 물질의 두 개념을 통일하는 것이나, 이 두 개념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 이후 줄곧 근본적으로 매우 다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제 힘과 물질은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역동적인 모형들에 그 공동의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12).
ü 최근 몇 년간 양성자와 중성자들 역시 복합적인 것이라는 증거가 점증하고 있다 (113).
ü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113).
<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장: 힌두교
ü 인도의 경우 거의 모든 사상이 어느 의미에서는 종교적 사상이며, 힌두교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인도의 지적 생활에 영향을 끼쳐왔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 문화적 생활까지도 거의 전반적으로 결정지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117).
ü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불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과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117).
ü 힌두교는 신화적인 영역과 심원한 개념들을 지닌 고도의 지적인 철학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단순 소박한 의식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18).
ü 힌두교는 그 정신적 원천을 <베다 경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베다의 ‘예언자들’인 무명의 현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고대의 성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118).
ü 이러한 <베다경>은 각기 다른 시기, 아마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몇 부분들로 구성돼 있다 (118).
ü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마지막 부분은 베다의 철학적 실천적 내용을 완성한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힌두교의 정신적 메시지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으며… (118).
ü 그러나 인도의 일반 대중들은 <우파니샤드>를 통하지 않고… 수많은 민간 설화- 이것은 방대하고 다채로운 인도 신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를 통하여 힌두교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119).
ü 그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에는 인도인들이 애송하는 경전인 <바가다드 기타>라는 아름다운 영적인 시가 실려 있다. 보통 ‘기타’라고 줄여서 불리는 이것은 크리슈나 신과 전사인 아르주나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다 (119).
ü 신이 입을 떼자 두 종족 간의 전쟁이란 현실적인 배경은 금세 퇴색해 버리고, 아르주나의 싸움은 인간의 영혼적인 투쟁이요, 깨달음을 찾아가는 전사의 싸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크리슈나 신이 몸소 아르주나에게 충고한다 (119):
n 그러므로 네 심장 속 무지에서부터 움터 난 의심을 지혜의 칼로써 베어 버려라. 자기 조화 안에서, 요가 (이때는 명상이라는 뜻) 안에서 하나가 되어라, 그리고 깨어나라, 위대한 전사여, 깨어나라.
ü 대부분 힌두교가 그렇듯이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실일 뿐이라는 사상에 있다. ‘브라만’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 (120).
ü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120).
ü 사람들은 이 실재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특히 신화를 좋아하는 힌두 현자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게 그렸고 신화적 언어 속에 담아 얘기한다. 그 신성의 제각기 다른 여러 모습에 맞추어 힌두교도의 숭배를 받는 다종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주어줬으나 이런 모든 신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 (120).
ü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 (자아)’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120).
n 가장 순수한 정수 – 온 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 그것은 아트만이다. 그것은 당신이다.
ü 힌두 신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기 희생에 의한 세계 창조라는 주제가 반복하여 나온다. … 이 신성의 창조적인 활동은 ‘릴라’, 즉 신의 유희라고 불리며, 이 세계는 그 성스런 유희의 무대로 간주되는 것이다. 힌두 신화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 릴라의 신화도 마술적인 취향을 강하게 풍긴다 (121).
ü 마야라는 말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꾸어 왔다. 애초엔 신선한 행위자와 마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 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들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121).
ü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이다 (121).
ü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2).
ü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 여기에서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역동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122).”
ü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122).
n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에 사로잡혀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ü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123).
ü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23).
ü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숭배되는 세 신은 시바와 비슈누와 성모다 (124).
ü 우주적 무도자로서의 시바는 춤을 추어 우주의 끝없는 율동을 유지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다. 비슈누 또한 여러 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신이다. 대체로 비슈누의 역할은 이 우주를 보존하는 데 있다. 이 삼위 중 세 번째 신이 샤크티, 즉 성모로서 자신의 여러 많은 형태를 가지고 이 우주의 여성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여신이다 (124).
ü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의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육욕을 의식적인 의지로써 제어하려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전존재로써 스스로 깨닫는 데 목표를 두었다 (124).
ü 힌두교는 중세의 탄트라 밀교라는 한 분파로까지 발전돼 나갔는데, 여기에서는 개오를 감각적인 사랑- 이 속에서는 서로서로 양성이다-의 깊은 체험을 통하여 추구했다. 그것은 <우파니샤드>의 다음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124~5).
n 사랑하는 아내의 품속에 안긴 사내라면 그는 그 안의 또는 그 밖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지적인 영혼의 품안일지라도 그는 그 안의 또는 그 밖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ü 힌두교에서 언제나 여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이 전적으로 신성의 불가분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 풍부한 여신상들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힌두의 여신들은 성처녀로서 나타나지 않고 뇌쇄적일 만큼 아름다운 관능적 포옹상으로 나타난다 (125).
ü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브라만의 다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25).
6장. 불교
ü 힌두교와는 달리 불교는 소위 ‘역사상’ 부처인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단일한 창시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중국의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이클레이토스 등 수많은 정신적, 철학적 천재들의 탄생을 보았던 그 범상치 않은 시기에 인도에서 생을 누렸다 (127).
ü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막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 (128).
ü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 (소승불교)와 마하야나 (대승불교)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128).
ü 인도 자체에서는 불교가 수세기를 지나면서 융통성 있고 동화력이 있는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부처는 결국 여러 얼굴을 가진 비슈누 신의 한 화신으로 간주돼버렸다 (128).
ü 이들 철학이 그 높은 지적 수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승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상 속에 결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128).
ü 이 체험의 본질은…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싯다르타 고타마가 숲 속에서의 7년 고생 끝에 어느 날 밤 겪었던 체험이다 (129).
ü 불가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깨우친 직후… 유명한 사성제의 형태로써 그의 핵심적인 교리를 밀도있게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맨 먼저 질병의 원인을 검진하고, 다음으로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법을 처방하는 의사의 화법과 드리지 않다 (129).
ü 제 1 성제는 인간 상황의 두드러진 특성인 ‘두카’ 즉 고뇌 또는 좌절이다.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부처는 말했는데, 이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근본 모습이라는 사상은 불교의 근저를 이룬다. 고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 – 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간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무상의 교리에는 자아, 즉 변화무쌍한 체험의 지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도 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은 하나의 환상, 즉 ‘마야’의 또 다른 형태고 실체가 없는 지적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30).
ü 제 2 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 즉 무명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 (업)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130).
ü 제 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라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지에서는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니르바나는 힌두교의 모크샤와 동일어로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130).
ü 제 4성제는 일체고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다 (131).
ü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131).
ü 임종 때 부처가 한 마지막 말은… “쇠퇴는 모든 복합적 사물에 고유한 것이다 (생자필멸)”라고 그는 입멸 직전에 말했다. “그러하니 정근 정진하라” (131).
ü 부처의 입멸 후… 기원 후 4세기에 실론 (스리랑카) 섬에서 개최되었던 4차 결집 회의에서 500년 이상이나 구전돼 내려오던, 기억에 의한 교리가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되었다. 팔리어로 쓰인 이 기록은 팔리 정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통적인 히나야나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마하야나파에서는 방대한 부피의 경전인 이른바 수트라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100~200년 후에 산스크리트로 쓰여 팔리 경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심오한 방식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있다 (132).
ü 마하야나파는 신도들에게 불성을 얻는 매우 다양한 방법, 즉 ‘능한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자칭 대승불교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교리를 위시하여 현대의 과학 사상과 매우 밀접한 개념들을 포함한 정교한 철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걸쳐 있다 (132).
ü 마하야나 교리의 최초의 해석가는 불교의 조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오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아슈바고샤 (마조)로 그는 기원 후 1세기에 살았다. 그는 <대승신기론>이라고 불리는 한 작은 책에서 마하야나 불교의 근본 사상, 특히 불가의 ‘진여’의 개념과 관련된 사상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여러 점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연상시키는 명징하고 아름다운 이 책은 마하야나 교리에 대한 최초의 대표적인 강론이 되었으며, 모든 마하야나 교파의 으뜸가는 권위가 되었다 (132).
ü 아슈바고샤는 가장 지적인 마하야나 철학자인 나가르주나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나가르주나는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들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하여 고도로 세련된 대화법을 사용했다. 그는 명석한 논증으로 그 당대의 형이상학적 명제를 뒤엎고 궁극적으로 실재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널리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수냐타’, 즉 공성 또는 ‘공’이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아슈바고샤의 ‘타타타’, 즉 ‘진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모든 개념적인 사고의 무익함이 인식되면 실재는 순수한 진여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132~3).
ü 그러므로 실재의 본질적인 성질이 공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진술은 흔히 그렇게 오해되는 허무주의적 진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낳은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재 즉 공 자체는 단순한 무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이다 (133).
ü 여기까지 소개된 마하야나 불교의 관점은 그것의 지적, 사변적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불교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이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불가의 종교적 의식인 믿음과 사랑과 자비다. 대승 불교에서 참으로 깨친 지혜, 즉 보리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즈키 다이세쓰가 불교라는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불렀던 것은 초월적인 지혜 혹은 직관적 지성인 프라주나와 사랑 혹은 자비인 카루나다 (133).
ü 다르마카야 (즉, 존재의 몸= 법신)는 힌두교에서의 브라만과 비슷하다. 그것은 우주 내의 모든 물체에 충만되어 있고, 또한 각지인 보리로서 사람의 마음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다 (133).
ü 지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특징적인 발전 중의 하나인 보디사트바 (깨달은 중생)의 이상에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왔다. 보살은 성불의 도정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이끌어 내 주는 것이며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개오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에 다른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를 서원한 사람이다 (133~4).
ü 보살의 이상은 무아라는 불가의 교리와도 역시 합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기 따로 떨어진 개별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한 개체가 혼자 열반에 든다는 생각 또한 이치에 닿지 않는 까닭이다 (134).
ü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불교 사상의 절정은 동명의 수트라에 기초를 둔 아바탐사카파 (화엄종)에서 달성되었다. 이 수트라는 대승 불교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는데, 스즈키 다이세쓰는 다음과 같은 가장 열광적인 말로써 이것을 칭송하고 있다 (134).
n 아바탐사카 수트라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실로 불교 사상과 불교 감정, 불교 체험의 극치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 문헌도 이 수트라에서 달성된 것과 같은 개념과 장엄함과 감정의 깊이, 웅대한 스케일의 구성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의 영원한 샘이며, 이 샘은 그 어떠한 종교인도 부분적으로만 만족하여 목마름을 그대로 지닌 채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ü 대승 불교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될 때 중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의 마음을 고취시킨 경전은 무엇보다는 이 <화엄경>이었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한편으로 하고 인도인을 다른 한편으로 한 대조는 너무나 커서 가히 인간 정신의 두 극점을 나타낸다고 말해질 정도다. 전자는 실제적, 실용적, 사회적인 정신인 반면에 후자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월적이다 (135).
ü 아바탐사카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물과 물건의 통일과 상호 작용으로서 이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기본 요소의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 (135).
7장. 중국 사상
ü 약 1세기경 불교가 중국에 도착하자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문화와 마주쳤다 (137).
ü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138).
ü 유교는 대체로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 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이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 (138).
ü 유교(Confucianism)란 명칭은 공부자에서 유래하였다. … 그의 가르침은 이른바 육경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 대의 철학적 사상서인 <예>, <악>, <시>,<서>,<역>, <춘추>로, 이것들은 중국 고대의 ‘성스런 현자’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그 자신의 사상은 <논어>, 즉 공자 어록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몇 제자에 의하여 편찬된 금언집이다 (139).
ü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다. …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체로 그냥 <노자>라고 불리는데 서양에서는 <도덕경>, 즉 <길과 힘의 경전 Classic of the Way and Power>이라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39).
ü 두 번째로 중요한 도가의 책은 <도덕경>보다 훨씬 장문인 <장자>로서, 이 책의 저자인 장주는 노자보다 약 200년 이후 사람이다 (140).
ü 중국인들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찰하는 삼라만상의 배후에 그것을 통일시켜 주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141).
n 여기에 세 용어가 있다- 완전, 전표용, 전체. 그 이름은 다 다르지만 그 찾는 실상은 동일하다. 일자를 가리킨다.
ü 그들은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141).
ü 그 원래의 우주적 의미에서 도는 궁극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이런 점에서 그것은 힌두교의 브라만과 불교의 다르마카야 (법신불)와 가까운 것이다. …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 (141).
ü 중국인들은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 특징임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전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유형이 있어 인간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자들은 이 유형을 지각하여 여기에 맞게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도와의 합일’을 이루게 되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을 누리며,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뜻대로 달성되는 것이다.
ü 기원전 2세기의 철학자 회남자의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142).
n 도의 길에 순응하고 천지의 자연 순리를 따르는 자는 전 세계를 쉬이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ü 그러면 인간이 깨달아야 할 우주적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142).
ü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 때부터 또한 생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인들은 어떤 상황이 그 극한에서 발전하면 반드시 되돌아 그 반대로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본적 신념의 덕분으로 고난의 시기에도 그들은 용기와 인내를 지닐 수 있었고, 성공했을 때에도 조심성 있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나아가 도가와 유가에서 다 같이 믿는 중요의 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자는 과도와 낭비와 탐닉을 피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142~3).
ü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 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 (143).
n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ü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 한 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그것은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143).
n 지금 어둡게 하는 것이 이제 밝음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도다.
ü 오랜 옛적부터 자연의 원형적인 두 극은 명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남/여, 강/약, 상/하에 의해서도 표상되었다. 양상,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창조적인 힘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음, 즉 어둡고 수동적이고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요소는 ‘땅’으로 대표되었다. … 양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남성적인 지성을, 음은 복합적이고 여성적이고 직관적인 마음을 나타낸다 (144).
ü 음양의 역학적인 특성은 태극도라고 불리는 고대 중국의 상징으로써 도해되고 있다. 이 도표는 어두운 음과 밝은 양이 대칭적으로 배열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대칭이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단한 순환 운동을 강하게 암시하는 회전적인 대칭이다 (144).
n 양은 주기적으로 시발점으로 돌아가고, 음이 그 극에 달하면 양에게 자리를 내준다.
ü 이 도표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두 힘의 어느 하나가 그 극에 도달할 때 마다 이미 그 자체 안에 대립자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상징화한 것이다 (145).
ü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 (145).
ü 전통적인 한의학 역시 인체 내에 있는 음양의 균형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떠한 질환도 이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전체적으로 얘기해서 신체의 내부는 양이고 표면은 음이다. … 인체 내부의 각 기관도 음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각 부분 사이의 균형은 ‘기’, 즉 활력있는 에너지 흐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이 기는 경혈, 즉 침점을 간직한 ‘경락’의 계통을 따라서 흐르는 것이다. … 이 음과 양 사이의 흐름이 막히면 신체는 병들게 되고 따라서 그 질병은 경혈에 침을 놓아 기의 흐름을 자극하여 회복시켜 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146).
ü 중국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음양의 갖가지 배합을 계속 연결하여 우주적 원형의 체계로 발전시켰다. 이 체계는 <역경>, 즉 <변역의 서 Book of Changes> 속에 정교하게 완성되어 있다 (146).
ü 이 <번역의 서>는 유가의 육경 가운데서도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며,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핵심에 놓인 저작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146).
ü 저명한 중국학자인 리하르트 빌헬름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가 번역한 <역경>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146).
n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기원은 고대의 신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내에서는 오늘날까지 가장 탁월한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따.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ü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의 소인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148).
ü 실제에 있어서도 <역경>이 지혜의 책으로서 쓰이는 바가 예언서로 쓰이는 것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 (148).
ü 노자는 자신이 가장 심오한 경구 가운데 몇몇을 바로 이 원천에서부터 인용하였다. 공자는 이것을 철저히 연구해서 이 책에다 대부분의 주석을 붙임으로써 이 책의 후경을 완성시켰다 (148).
ü 공자 주석의 중심에는 <역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모든 현상의 역학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의 쉼 없는 변용은 이 <변역의 서>의 핵심을 이루는 메시지다 (148).
n 천변만화가 한 권의 책일지니/ 그것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네/ 그 도는 영원히 변하나니/ 쉼 없는 변화, 움직임/ 공허한 여섯 장소 속을 흐르나니/ 고착된 법도 없이 생하고 멸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며/ 하나의 법률 아래 얽매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 그것은 오직 변역일 뿐이어라.
8장. 도교
ü 중국 사상의 두 가지 주요 경향인 유교와 도교 가운데에서 후자는 신비적인 데로 나아가 우리가 현대 물리학과 비교하는 데 보다 적절한 바가 있다. 힌두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도교는 추론적인 지식보다 직관적인 지혜에 보다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 중국 문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도교적 해방은 특히 인습의 엄격한 규율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155). (
ü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결코 도를 해득할 수 없다는 공고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장주의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다 (155).
n 아무리 넓은 지식이라도 도를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고, 이성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자는 이런 방법들에 반대해 왔다.
ü 장주의 책은 추론과 변설을 경멸하는 글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56).
n 개가 잘 짓는다고 좋은 개로 인정받는 게 아니고/ 사람이 능숙하게 말한다고 슬기롭다고 인정되는 게 아니다.
n 논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 증거다.
ü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 도가의 현자들은 강한 신비적인 직관과 결합된 주의 깊은 자연 관찰로써 현대의 과학 이론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 깊은 통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6).
ü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157).
n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와 변용의 분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ü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 (157).
ü 장주는 이렇게 말한다 (157).
n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 ‘저것’과 ‘이것’이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이다. 오직 이 본령만이 말하자면 하나의 축으로서 가없는 변화에 응답하는 원궤의 중심인 것이다.
ü 도가들은..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158).
n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ü 다른 한편,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 하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158).
n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ü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장주는 이 점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다 (159).
n 옛말에 “옳은 것을 따라 섬기면 그른 것과 관계되지 않고, 안정된 선정을 따라 섬기면 혼란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하니 이것은 천지의 이치와 사물의 제각기 다른 성질은 심득치 못한 소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음을 따르고 섬기면서 양을 고려치 않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길은 가히 따를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분명치 않은가.
ü 그리스의 ‘도가’는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였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단한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노자와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가 순환적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계질서를 “얼마 동안 타오르고 얼마 동안 꺼져 있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에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음과 양의 주기적 상호 작용 속에 그 자신을 드러내는 도의 중국적 개념과 참으로 유사한 이미지다 (159).
ü 그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립하는 쌍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고, 이러한 모든 개념들의 상대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60).
ü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이 두 현자의 세계관 사이에 보이는 이 커다란 유사성이 일반적으로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놀랍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현대 물리학과 연관해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도교와 연관해서는 좀체 얘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연관 아래에서 보아야만 그의 세계관이 신비적인 것이며, 그의 사상과 현대 물리학 사이의 유사성이 올바른 조망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60).
ü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161).
ü 그래서 도교 현자들의 행위는 그의 직관적 지혜 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그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나 자기 주변의 어떤 것도 강제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도의 운동에 자기의 행위를 순응시켜 나갈 따름이다. 회남자에 의하면 이렇다 (161).
n 자연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ü 이러한 행동 방식을 도교 철학에서는 ‘무위’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글자 뜻대로 하자면 ‘비행동’을 뜻하는데, 조지프 니덤은 이것을 ‘자연에 어긋나느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 번역하고 이 해석을 <장자>에서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와 정당화하고 있다 (161).
n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
ü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 (162).
ü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162).
ü 이는 일종의 도가의 이상향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장자>의 다음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162).
n 혼돈의 상태가 아직 개발되지 못했을 때의 옛 사람들은 이 전 세계에 속하고 있었던 평정한 정온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음과 양이 조화되어 평온스러웠고, 쉼과 움직임이 요란하지 않게 나아가고, 네 계절이 제각기 절기를 가지고, 단 하나의 사물도 해를 입지 않고, 요절하는 생물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지식을 가졌어도 사용할 경우가 없었다. 이런 것을 이른바 완전한 지일의 상태라 한다. 이때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런 행위도 없었고 자발성의 표현뿐이었다.
9장. 선
ü 기원후 1세기경 중국 정신이 불교 형태의 인도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발전이 나란히 일어났다. 한편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이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하여 그들 자신의 철학적 조명 아래서 인도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하였다 (165).
ü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 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 (선)이란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 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200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165).
ü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 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165~6).
ü 다소 특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부처 자체, 즉 선에서 사토리로 알려진 체험적 개오의 얻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66).
ü 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처의 깨달음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정수다. 방대한 불경 속에 상술돼 있는 여타의 교리는 보충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166).
ü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166).
ü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역시 완고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도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게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장주는 말했다 (166).
ü 그런데 선 체험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선에 적합한 특수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네 글귀를 통해 선은 요약 기술되고 있다 (167).
n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ü 이 ‘곧바로 가리킨다’는 기법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선사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일체의 이론화와 공론을 경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갑작스럽게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말로써 진리를 곧바로 가리키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내가 언급한 공안처럼 개념적 사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 체험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사고 과정을 정지시키는 것을 뜻했다 (167).
ü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69).
n 이건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 나는 장작을 져 나르고, 물을 긷는다.
ü 그러므로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많은 선어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하게 들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서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유명한 선가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69).
n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ü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선문의 강조는 확실히 그 도가적인 뿌리를 보여주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강조의 기반은 엄연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대선사 백장은 불성을 찾는 데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황소 등에 타고서 황소를 찾는 것과 너무나 같다.” (170).
ü 오늘날 일본에는 교시의 방법을 제각기 달리하는 선의 두 주류가 있다. 임제종, 즉 돈오파는 이 앞의 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은 공안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산젠 (참선)이라고 부르는 스승과의 주기적이고 공식적인 문답에 중점을 두어, 이 자리에서 제자는 그가 풀려고 하는 공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요구받는다. 공안을 푸는 것은 치열한 정신 집중의 오랜 기간을 거쳐서 돌연히 개오의 통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스스로 증득한) 스승이라면 제자가 돌연한 개오의 벼랑 끝까지 다다른 때를 알고 죽비로 내리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것과 같은 예상 밖의 행동으로 그 제자를 개오의 체험 속으로 들도록 충격을 가할 수 있다 (170).
ü 조동종, 즉 점수파는 임제종의 충격법을 피하고 “꽃망울이 피어나도록 쓰다듬는 봄날의 미풍처럼” 선 제자들을 점진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정좌와 범사의 활용을 명상의 두 가지 형태라고 주창했다 (170).
ü 선시에 이르기를 (171).
n 고요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
ü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171).
ü 그것들은 모두 기교의 완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숙련은 기교가 초월되어 무의식에서부터 움터 난 ‘인위 아닌 기계 (artless art)’가 될 때에야 비로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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