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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03시 06분 등록

현대물리학과 동양 사상

프리초프 카프라 저/ 이성범, 김용정 옮김

 

저자소개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는 빈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있다가 미국에 건너가 킬리포니아 대학의 교직에 있으면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Lawrence Berkeley Laboratory)에서 오랫도안 소립자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동양사상과 물리학을 비교하는 많은 강연과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스스로 동양적 명상 수련을 실천하였다.

그가 1975년 펴낸 <<현대물리학과 동양 사상, The Tao of Physics>> 1982년 펴낸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The Turning point>>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이두 저서는 구미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신과학 운동과 신생활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운동이 가열되어 감에 따라 그는 세계 각처에서의 요청에 의해 순회 강연을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1988년에 펴낸 <<탁월한 지혜 Uncommon Wisdom>>는 그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만나 비범한 사람들과의 의견 교환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1984년 스트레트넥(Spretnak, Charlene)과 공저로 펴낸 <<녹색 정치 Green Politics>>는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는 녹색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서독 의회의 당당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녹색당의 이념 정강 및 그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녹색 운동이 미국과 구라파 여러나라에서도 정치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그는 저서『히든 커넥션』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 시스템·역동성·관계·과정·그물망 등은 그의 전체 사상을 아우르는 중심 개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The Hidden Connection, 곧 ‘숨겨진 관계’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카프라는 생물학에서 출발해 인지 과학(인간의 심리와 지식 습득 과정의 상관성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학문)과 경영학, 사회학을 두루 거친 후 첨단 과학 기술, 국제 정치와 전 세계 비정부 기구(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의 약칭으로, 정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민간 국제단체) 등 세계적인 활동까지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 의식의 형성 과정이나 사회·국가가 존재하는 방식도 생명계의 존재 방식과 같은 패턴으로 진행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카프라는, 1999년 세계 무역 기구(WTO,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곧 GATT 체제를 대신하여 1995년부터 세계 경제 질서를 규율해 가고 있는 새로운 국제기구)의 시애틀 회담을 무산시켰던 국제 비정부 기구들의 반세계화 운동을 희망의 신호로 보면서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해법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생태계를 모방하라!” 그래서 그는 ‘생태 읽기’와 ‘생태 설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과학과 기술이 생명과 함께 진화할 수 있는 역동적 과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연 천연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 멸종되어 가는 생명체들 앞에서, 인간이 현재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까? 카프라는 체코 출신의 작가 하벨(Václav Havel, 1936~ )의 말을 인용하며 희망찬 답변을 내놓았다. “희망은 앞으로 무엇이든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무엇이 어떤 식으로 변해가든 간에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란 굳은 믿음이다.” 신과학은 뉴턴 역학과 달리 학문적 엄밀성과 인과 법칙에 의한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줄기차게 받아 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카프라를 주목하는 까닭은 바로 현실과 호흡하는 그의 실천적 고민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모색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저서로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탁월한 지혜>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생명의 그물>, <히든 커넥셕> 등이 있다.

 

출처 : 인터넷 자료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글귀

 

2판 역자 서문

 

p5-6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이 다루게 된 극대 세계와 극미 세게의 현상은 인간 경험의 좁은 영역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그 게계론적 자연관은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지 안을 수 없게 되었음을 그는 역설한다.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p6

서구 문명을 과거 3백여 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哲人)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햇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 (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와 코스몰로지(cosmology)의 세계를 다루게 된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구의 과학은 객관을 관찰하기 위하여 관찰의 과정에서 모든 주관적인 것을 배제했던 것이며, 그 결과로 가치 중립(value neutral)의 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의 학문은 그 궁극적 목적을 선()의 실천에 두고 주관적인 마음을 항시 수련함으로써 도덕성을 함양하여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것을 학문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p8

현대 물리학이라 함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p9

고전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은 전지자(全知者)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만의 극에 달했던 고전 물리학은 태양에 도전했다가 추락한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처럼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이며, 자연은 그 신비의 자태를 되찾게 되었다.

 

고전 물리학을 키워 온 기본 개념들, 즉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그전 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합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여지게 된 것이다.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고전 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없이 거기 존재 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제 속성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며, 따라서 관찰의 과정에서 가변적이요,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주관은 배제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주관적인 감각에 속하는 색이나 음의 본질은 객관적인 파장이나 진동의 수로 대체되고 감각 작용은 사진기, 진동막, 한란계 등등으로 대체된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 등의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인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서 동양 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하고 일체(一切)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 4차원적 시공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p10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同時性)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은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 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記述)로써 양자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이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p11

아직도 현대물리학을 뒷받침할 많나 사상적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고전 물리학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가졌다면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데카르트나 칸트를 찾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 카프라 박사는 이것을 동양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 본 것이다.

 

직관적이며 주관주의적인 동양 사상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사변적이며 객관주의적인 서양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고 그 양자의 사상적 괴리와 상충을 체험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두 개의 사상 경향의 새로운 정신적 용광로에서 융합되고 체계화되는 것이 절실히 요망된다.

 

p12

물질의 궁극체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며,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인 것의 한 과정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의 자연관은 그 보는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 전혀 대조적인 것이지만 동양 사상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p12-13

광대한 우주의 공간 속에 티끌처럼 떠도는 지구의 표면에서의 영겁의 일순(一瞬)을 살다 가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원초적 질문은 우리의 생의 기반에 담겨 있는 비정의 수수께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설문 속에 담겨 있는 공간, 시간, 존재 등의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새롭게 다루어져야 하고, 또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의 한계성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면 이 설문의 내용과 방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p13

현대물리학은 별들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우주의 불인 핵융합의 열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은 인간들에 의하여 대량 학살을 초래할 수 있는 핵무기로 발전되었고, 이에 현대 물리학의 태두들은 많은 회의와 양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문명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모순에 그 죄가 있는 것이지, 이 천상의 불을 지상에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p14

고전 물리학에 뒤따른 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하였으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는 이 물심(物心)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동양의 현인들이 정적의 시간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의 수련에 주력한 데 반하여 현대인들은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인 고독을 두려워하며, 매스컴과 광고의 홍수 속에 불어만 가는 물욕과 갈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길 없고 공간적, 시간적 사회의 분열과 단층은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과 고독감은 가중되며,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져서 진정제와 수면제의 판매량과 정신 분석의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의 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물심의 조화의 달성이 지난(至難)한 것이며 이에의 지름길은 없을지라도 물질관의 새로운 검토가 그 출발점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전 물리학의 유물인 메마른 기계론적 자연관이나 소박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되고 더욱 윤택하며 친화력 있는 전인적 우주관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번역된 것이다.

 

머리말 2판에 부쳐

 

p17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집필하면소도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씌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p18

신비주의는 적어도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막연하고 불가사의하며 대단히 비과학적인 것과 잘못 연관되어 왔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개념과 신비주의 개념 사이에서 발견되는 심오한 유사성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종교보다는 과학,  협동보다는 경쟁, 보전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p19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은 이제 설 자리가 없음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가치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 지워진다. 그들의 상세한 연구 대부분이 명료하게 그들의 가치 체계에 좌우되지 않지만, 그들의 연구를 추진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한 길은 부처님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p20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는 자유 의지, 죽음과 탄생, 그리고 생명, 정신, 의식과 전화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들을 논의했다. 시스템 언어로 표현된 이러한 개념들과 그에 상응하는 동양 신비주의 관념들 사이의 심오한 조화는 영구 철학 (永久哲學perennial philosophy)

이라고도 알려진 신비주의 전통의 철학이 현대 과학 이론들의 가장 일관된 철학적 배경이 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인상적인 증거가 된다.

 

p22

합리적이요 분석적인 사고와 신비적인 진리에 대한 명상적 체험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극복한다는 것은 내게는 여간 아닌 난제였고 지금도 심히 어려운 문제다.

 

현대물리학이 고대 동양의 예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관된 우주고나을 점차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23

이 물질 세계의 가장 진보된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일관성 있고 아름다운 철학적 체계를 동양의 신비주의가 마련해 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살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는 이러한 뛰어듦이 고도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일뿐이다.

 

p27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및 번이고 해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 돈환(Don Juan)의 가르침>>

 

***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1925?.12.25~1998.4.27]

 페루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작가. 멕시코 야키 인디언 주술사의 신비한 비밀에 관한 시리즈를 출간하여 미국 뉴에이지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8년 《돈 후앙의 가르침》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멕시코 야키(Yaqui) 인디언 주술사의 신비한 비밀에 관한 시리즈를 출간하여 미국 뉴에이지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페루의 카자마르카(Cajamarca)에서 태어났다. 문화인류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저술하였으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소설이라고 평하였다. 그의 책들은 17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직찍히거나 사생활이 공개되기를 거부하여 그의 초기 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이 상파울루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미국 출입국관리소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카자마크라라고 기록하였다. 1951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197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스타네타의 책은 마술, 마법, 영육분리 경험 등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1960년대 초 애리조나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그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야키 인디언 돈 후앙을 만났다. 카스타네다는 곧 그의 실습생이 되었고, 이 두 사람은 환각식물들을 이용한 일련의 모험에 착수했다. 1965년 카스타네다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고, 그의 경험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1968년 《돈 후앙의 가르침 The Teachings of Don Juan: A Yaqui Way of Knowledge》이 출판되자마자 이 책은 당시 베트남전쟁에 환멸을 느끼는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어 《분리된 리얼리티 A Separate Reality:Further Conversations with Don Juan(1971), 《익스틀란으로의 여행 Journey to Ixtlan:The Lessons of Don Juan(1972) 등 일련의 시리즈들이 계속 출판되었다. 그는 명성을 얻게 되자 곧 은퇴하고 은거하였으며, 사망한 뒤 2개월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졌다.

p27

현대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 끔 했다.

 

p29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道家)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가용하느냐,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렸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의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p32-33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res cogitans)과 물질(res extensa)이란 두 개의 분학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 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혀용했다. 이이작 뉴턴(Isasc Newton)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펼쳐 천상에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율법으로서 보여진 것이다.

 

p34

데카르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햇다.

 

기계적인 서양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35

동양의 신비주의는 각각의 종파에 따라 세세한 면에서는 다른 점도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거시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우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p36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p50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통찰은 보통 지극히 짧은 순간에 한한다. 동양적 신비주의에서는 그렇지 않고 그것이 긴 기간으로 연장되어서 궁극적으로 부단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 직접적이고 비 개념적인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마음의 준비야말로 모든 유파를 초월한 동양 신비주의와 동양적 생활 양식의 많은 국면에 걸쳐 주목적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오랜 문화사는 엄청나게 다양한 기예와 의식과 예술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말의 가장 넓은 뜻에서 명상이라고 불려질 수 도 있다.

 

p51

노자는 학구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을 닦으면 나날이 지식이 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준다.

 

p53

명상적인 상태와 무사의 정신 자세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무사도의 이미지는 동양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도에서 애송되는 종교 문헌인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의 무대는 하나의 전장이며, 무술은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적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전통에 선의 영향이 강하게 미쳐 소위무사도를 발흥시켰는데, 이 무사도는 검객의 정신적 투시력이 최고조의 완성 단계에 이르는 전사의 길이요 검도의 예술인 것이다. 도교의 태극권은 중국에서 최고의 무예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전사의 마음을 독특한 방법으로 극히 명민하게 하는 느리고도 율동적인 요가와 같은 동작으로 연속된 것이다.

 

p54

현상의 특정한 일군을 연구하는 것은 그 한정된 범위에 국한된 물리적 속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 이론이 근사치가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뉴턴적인 모형은 원자의 구성 단위가 많은 물질과 과속에 비젼해서 작은 속도에만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잇따. 챗째의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고전적 기계론은 양자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고 두번째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상대성 이론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뉴턴의 이론이 꼭 틀리다거나 양론과 상대성 이론이맞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든 모형들은 현상의 어떤 범위에만 타당한 근사치일 따름이다.

 

p55

무엇보다 먼저 신비가들은 실재의 체험에 주로 관심을 가지지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이러한 기술의 분석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동양 사상에는 잘 정의된 근사치란 개념이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동양의 신비가들이 혹시 그들의 체험을 소통하려 한다면 그들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몇 가지 다른 방법들이 동양에서 발전돼 오긴 했다.

 

인도의 신비주의, 특히 힌두교는 신화의 형식을 빌려 이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은유와 상징과 시적 이미지와 직유와 우화가 동원되고 있다.

신화적 언어는 논리와 상식에 의해 훨씬 덜 제약 받는다. 그것은 마력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암시적인 이미지가 풍부하고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적인 언어보다는 신비가들이 실재를 체험하는 방식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에 따를 것 같으면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p56

중국과 일본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언어적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도록 실재의 역설적인 본성을 창출해 내는 대신에 그들은 가끔 사실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가에서는 언어적 소통에서 유발하는 부조화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역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도가들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에서 계승시켰고, 소위 공안(公案)을 가진 선불교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p60

서양 철학의 학파에서 논리와 추론은 철학적 이념을 공식화하는 주요한 도구로 언제나 쓰여 왔으며, 버트란트 러셀에 따른다면 종교 철학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동양 신비사상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가 일상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방의 현자들은 논리와 통상 개념을 뛰어 넘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실재에 대한 모형이 서양 철학의 모형보다도 현대 물리학에 보다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이루게 된 주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p63

당신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생을 주기 이전의 그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당신은 두 손바닥을 맞부딪쳐 소리를 낼 수 잇다. 그럼 이 제 한쪽 손바닥의 소리는 무엇인가?

 

p329

그러한 유사성이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왜 존재하며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p330

생의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은 여러가지 연구 방법을 추구해 왔다. 그 중에는 과학자의 방법도 있고 신비가의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시인의, 어린이의, 광대의, 무당의 방법 등, 이러한 방법들은 언어를 통해서건 아니건 세계의 상이한 면들을 강조하는 상이한 기술을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그 발생한 상황에서는 타당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단지 실재에 대한 기술이나 표현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 중에 어느 것도 이 세계의 오나전한 상을 제공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상 생황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과 유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 있고 충만 된 정신 생활에 대해서 그렇다.

 

비록 유기적 세계관의 개념들이 인간적 규모의 과학과 기술에는 거의 가치가 없지만 20세기의 물리학은 원자적 그리고 아원자적 수준에는 매우 유효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왔다.

 

p331

물리학자들과 신비가들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 서로 다른 연구방법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다른 유사성들을 상기할 때, 한층 더 그럴 듯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방법은 철두철미 경험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 둘 다 관찰 행위인데,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이러한 관찰이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사실 육체의 경험은 많은 동양의 전통에서 강조되며, 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의 관건으로서 종종 이해된다. 우리가 건강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 속 기관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전체로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안녕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유사한 방법으로 신비가는 신체의 연장으로서 경험되는 전우주의 전체성을 자각한다.

 

p332

물리학자와 신비가의 방법들 사이의 더욱 유사한 점은 그들의 관찰이 일상적인 감각에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현대물리학에 있어서 이것들은 원자적, 아원자적 세계의 영역이요, 신비주의에 있어서 그것들은 감각 세계를 초월한 의식의 비일상적인 상태다.

 

p333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p335

물리학자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묘한 방식으로 전우주가 상호연관되었으리라 깨닫게 된 지난 20년 동안에 그 문제는 새로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p336 이를테면, 어떤 신호도 광속 이상으로 빨리 전달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국소연결(local variable) 이외의 다른 형태의 비국소연결(nonlocal variable)이 최근에 밝혀졌다. ; 그 연결은 순간적이고 현재로서는 정확한 수학적 방법으로 예측할 수 없다.

 

 

p337

EPR(Einstein Podolsky Rosen) experiment

아인스타인은 일종의 사고 실험인(Thought experiment) 을 고안했다. 그것이 EPR이다.

1920년 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벨의 정리에 의해서 비국소연결은 증명되었다.

 

p345

S행렬의 접근법은 진행중인 보편적 과정 내부에서 서로 연관된 에너지 패터능로 입자를 보고 있다. 다시말하면 분리할 수  없는 우주 거미줄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상관관계 또는 상호연결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틀 안에서 쿼크구조라는 용어는 이 사상의 그물 조직 내부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전달과 정보의 흐름이 명확히 그어진 선을 따라 진행되며, 중간자와 연관되어 둘임(two-ness)이 표출되고 중입자들과 연괸되어 섯임(three-ness)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이 중입자들은 쿼크로 구성되어 잇다는 주장을 역동적으로 바꾸어 놓은 말이다. S행렬이론에는 서로 구분되는 실체와 기본적 구성체가 없다.; 단지 명확하게 그어진 어떤 패턴을 보여 주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을 따름이다.

 

p346

질서를 가려내는 능력은 합리적 정신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의미로는 어떤 패턴의 지각은 모두가 질서의 지각이다. 물질 패턴과 정신 패턴이 서로의 반영이라는 인식이 점차 높아 가고 있는 연구 분야에서 질서의 개념을 똑똑히 밝히게 된다면 지식의 매혹적인 새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믿는다.

 

p347

봄의 출발점은 깨어지지 않은 전체성(unbroken wholeness)의 개념이다. 봄은 부분의 하나가 어느 의미로는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성질을 전제로 하여 이 함축된 질서를 유추하는 수단으로서 홀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홀로그램의 어느 부분은 완전한 홀로그램이 주는 영상보다는 자세하지 않지만, 그 부분을 조명하면 전체적인 영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동일한 일반 원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고 그 부분마다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p348

모든 실체의 바타으로서 전일 운동(holomovement)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봄의 관점에서 전일 운동은 물질적 우주의 모든 형상들이 흘러나오는 역동적 현상이다. 그의 접근 방법은 이 전일 운동에 내포된 질서를 연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때 대상의 구조가 아니라 운동의 구조를 다루게 되며, 따라서 우주의 통일성과 그 역동적인 본성을 다 같이 고려한다.  함축된 질서이론

 

그 함축된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몸은 의식을 전일 운동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이론에 명시적으로 도입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이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인과의 측면에서 연결되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들은 물질도 의식도 아닌 보다 높은 실재의 상호 내포적인 투사(projection).

 

 

p352

현재 퇴색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수백 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 왔다. 그것은 그동안 현대 서양 사회의 모습을 형성하여 왔으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패러다임은 수많은 사상과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 그 가운데에는 우주를 기본적인 건물 토막으로 이루어진 역학적 시스템으로 보는 견해, 인간의 몸을 기계로 보는 견해, 생면을 존재를 위한 투쟁으로 보는 견해, 경제적 기술적 성장을 통하여 끝없는 물질적 진보가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여성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남성들에게 종속되고 있는 사회가 자연스런사회라는 믿음 등이 있다. 최근 수십년 동안 이런 모든 가정들은 엄밀히 한계가 있으며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수정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따. 지금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기술될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체라기보다 통합된 전체로 보는 전일적 세계관(holistic worldview)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생태학적 세계관 (ecological worldview)으로 부를 수도 있는데 나는 이 용어를 더 좋아한다.

 

생태학적 페러다임은 현대 과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은 생명의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것의 변화와 변형의 순환성 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p353

때때로 영원한 철학으로 불리는 신비주의는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에 가장 일치할 수 있는 철학적 배경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 더욱더 명백해지고 있다.

나는 최근에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를 위한 일련의 기준들을 명백하게 해 보려고 하였다.

나는 여섯 가지 기준을 제시해 보겠다.

처음 둘은 자연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밝힌 것이고 나머지 넷은 인식론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런 기준들이 모든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가 갖는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믿고 있다.

 

p355

첫번째 기준은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이다. 역학적 고전적 패러다임에서는 아무리 복잡한 체제라 하더라도 전체의 역동성은 부분의 속성들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 부분들의 기본적인 속성들과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역학 체계를 이해하기만 하면 최소한 원리상으로 전체의 역동성을 유도해낼 수 잇다는 것이다.

당신은 상호작용이라는 기본 법칙을 지닌 그러한 기본적 토막들을 통하여 보다 큰 전체를 만들고 그것의 부분적인 속성들을 통해서 그것의 역동성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시작되어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20세기 까지 과학적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보다 더 대칭적이다. 우리는 확실히 부분들의 속성을 통해서 전채를 이해하는 동시에 부분들의 속성은 전체의 역동성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가 일차적이며, 일단 전체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나면 최소한 원리상으로 부분들의 상호작용의 속성과 형태들을 유도해낼 수 있다.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양자 이론이 개발됨으로써 과학에서는 처음으로 물리학 분야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연관되고 통일되어 있다는 것의 자각과 모든 현상들에 대한 경험을 근본적인 일자(oneness)가 드러나는 것으로 자각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의 본질이요, 동야적 세계관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사물들을 상호 의존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며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일시적인 양태들로 본다.

 

p356

두번째 기준은 구조(structure)를 통한 사고에서 과정(process)을 통한 사고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옛날의 패러다임에서는 기본적인 구조들이 있고 나서 그 구조들이 힘과 메커니즘을 통하여 상호작용하며, 그것들이 과정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과정이 일차적이며, 우리가 관찰하고 잇는 모든 구조는 근원적인 과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량이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인식은 물질적인 실체의 개념과 기본적인 구조의 개념을 과학으로부터 제거하였다. 아원자적 소립자들은 어떤 물질적인 재료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양태들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내지 과정들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관찰할 경우 어떤 실체도 어떤 기본적 구조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역동적인 양태들, 즉 연속적인 에너지의 율동이다.

 

p357

(세 번째)

현대 물리학에서 기계로서의 우주의 이미지는 사오 연관이 있는 역동적 전체의 이미지로 대체되었으며, 역동적 전체의 각 부분들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며 하나의 우주적 과정의 양태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상호 연관이 있는 관계의 그물 안에서 한 사물을 정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관찰 도구를 가지고 물리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상호 연관된 것의 일부를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양태들을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대상들로 해석하게 된다. 관찰자가 다르면 그렇게 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p358

관찰자의 결정적인 역할을 양자 물리학에 도입한 사람은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비르크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서 말하려면 반드시, 동일한 시간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에 대한 나의 세번째 기준이다. 나는 그것이 모든 현대과학에 타당하다고 믿으며 나는 그것을 객관적 과학으로부터 인식론적과학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르고 싶다. 옛날의 패러다임에서는 과학적 기술(記述)들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관찰하는 사람과 지식의 과정이 별개의 독립된 것으로 믿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인식론, 즉 지식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자연 현상에 대한 기술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비적 지식은 분리되어지고 객관거인 관찰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참여를 의미한다.

 

네번째 기준은

가장 심오하다고 할 수 잇는데, 과학자들로서는 친숙해지기가 대단히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식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는 오래 된 비유와 관련이 있다. 과학자들은 지식이라는 건물의 기초토대를 언급하면서 기초적인법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식은 완전히 확고한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 물질로 된기본적인토막들이 있듯이, 기초적인방정식, 기초적인상수, 기초적인원리들이 잇다. 지식을 단단한 토대를 가진 건물에 비유하는 것은 수천년 동안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서 사용되어 왔다.

 

p359

데카르트는 그이 유명한 저서 <<방법서설>>에서 당시의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나는 그와 같이 흔들리는 토대 위에는 단단한 어떤 것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데카르트는 확고한 토대 위에 새로운 과학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300년 후 아인슈타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양자 물리학의 발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잇다. 그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확고한 토대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지반이 밑으로 부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어떤 진보나 어떤 변화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는 어떤 토대도 엇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 과학에서 확고한 토대 위에 지식을 쌓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건물의 비유를 그물의 비유로 대체할 수도 있다.

 

p359-360

부트스트랩이론에 따르면, 자연은 물질로 된 기본적인 토막처럼 어떤 기본적인 실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자기 모순이 없음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되어야 한다 사물들은 상호 모순이 없는 관계들에 의해서 존재하며 모든 물리학은 그 구성 성분들이 서로 모순이없어야 하고 자기들끼리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를 따라야 한다.

이 부트스트랩 철학은 물질로 된 기본적인 토막들이라는 개념을 버릴 뿐만 아니라 어떤 기본적 실재, 말하자면 어떤 기본적인 상수, 법칙, 방정식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질적 우주는 상호 연관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그물로 보여진다. 이런 그물의 어떤 부분의 속성들도 기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다른 부분들의 속성에 뒤따라 나오며 그것들의 상호 연관성의 전체적인 일관성은 완전한 그물의 구조를 결정한다.

 

p360

자연을 기본적인 것으로 환원해 보려는 것은 원래 그리스적인 접근방식인데, 그것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우주를 기본적 실재가 없는 관계들의 그물로 보려는 견해는 동양적 사고의 특징이다.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에 대한 네 가지 기준은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 기준들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 관찰자를 중요한 구성 요소로 포함하는 관계들의 역동적인 그물로 볼 수 있다.

 

자연현상들은 개념의 그물로 기술되며, 그 그물 안에서는 어떤 부분도 다른 것보다 더 기본거인 것으로 될 수 없다.

 

모든 자연현상은 궁극적으로 상호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다른 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부트스트랩 내지는 그물 철학을 과학적 이론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근사적인 지식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을 근사적인 이해로 만족한다면 그들은 보다 관련이 적은 다른 현상들은 무시한 채 선택한 현상들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p361

다섯번째 기준

현대 과학에서 중요하며 나의 다섯번째 기준, 즉 진리로부터 근사적인 기술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데카르트적인 패러다임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에 의해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과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한계를 가지며 근사적이라는 것이 인정된다. 고학은 결코 완전하고 명확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없다. 과학자들도 진리(기술과 기술된 현상 사이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진리라는 의미에서)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들은 실재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사적인 기술들을 다룬다. 이런 기준에 대한 가장 멋진 표현은 루이 파스퇴로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은 잠정적인 대답을 통해서 자연현상의 본질에 더욱 깊이 도달하려는 일련의 더욱 미묘한 물음들을 향해 나아간다.

 

신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근사적인 지식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절대적인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의 통일에 대한 직접적이면서도 지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경험에 관심을 둔다.

 

p362

마지막 기준은 관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장(advocacy)에 관한 것이다. 나는 핵파괴의 위험과 자연 환경의 황폐화에 직면해 있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고학과 기술의 바탕을 이루는 방법들과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 전화랄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그러한 연관 관계는 17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에 의해 의인화되었다. 그는 과학의 새로운 제국주의적 방법을 주장하고 노골적으로 악의에 찬 말을 자주 하였다. 베이컨은 방화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봉사하도록 해야한다 고 쓰고 있다. 그녀(자연)구속되어야 하며””과학자의 목적은 고문을 해서라도 자연의 비밀을 밝혀 내는 것이다. 자연을 역학적(기계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고문을 해서라도 비밀을 캐내야 하는 여성으로 비유하는 폭력적인 이미지는 17세기 마녀 재판에서 여성을 고문하던 것에 대한 강한 암시을 보이고 있다.

17세기 이전의 고학의 목표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의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다. 생태학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베이컨 이래로 과학의 목표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얻는데 있었으며,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위험스럽고 유해하며 반생태학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p363-364

신비주의의 본성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오해 때문이었다. 과학계에서는 신비주의를 일반적으로 대단히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자신들에게 소중한 이론들을 이와 같이 애매모호하고 의심스런 활동과 비교하는 것은 자연히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신비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는 정말로 매우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신비주의적 전통의 경전들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심오한 신비적 경험이 결코 애매하고 막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명료한 것(clarity) 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을 기술하는 전통적인 비유들로는 무지의 장막을 걷는 것”” 망상을 끊는 것 마음의 거울을 닦는 것””광명이 비치는 것, 더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등이 있는데, 이러한 모든 표현은 대단히 명료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신비적 경험은 지적인 분석을 뛰어넘는다. 따라서 거기서 명료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그러한 경험에 대해서 애매하거나 막연한 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18세기 유럽에서 데카르트적인 과학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는 시대를 기술하기 위해서 계몽시대라는 용어를 쓰지만 사실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말은 신비적 경험을 기술하기 위해서 널리 사용되던 가장 오래 된 말 가운데 하나다.

 

우리의 현재 이론에서 무효로 되지 않고 남게 될 개념들은 신비주의 전통의 사상들과 관련된 개념들이라고 믿는다.

 

p365

뉴턴의 중요한 발견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우주에는 변치 않는 질서가 있다. (there is a uniform order in the universe) 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두 가지 커다란 주제인 우주의 기본적인 통일과 상호 연관성 그리고 우주의 자연현상의 본래적인 역동성은 미래의 연구에 의해 무효로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p366

하나의 실재는 다양한 양상, 차원,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와 신비주의자들은 실재의 다른 양상들을 다룬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수준들을 탐구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마음의 수준들을 탐구한다. 그들의 탐구는 두 경우 모두 그 수준들이 일상적인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하이젠비르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듯이, 만일 그 지각이 보통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 실재는 보통이 아니다.

 

p367

하나의 수준은 높고 다른 하나의 수준은 낮다고 말하는 것은 그물로 비유하지 않고 건물로 비유하던 옛날 패러다임의 사고의 유물이다. 그러나 나는 물리학이 생명, 마음, 의식, 정신 등과 같이 실재의 다른 수준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데는 동의한다. 물리학은 그런 수준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과학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난 수십년 이상 사이버네틱스에서부터  나타났던 살아 잇는 자기조직화 시스템(self-organization system)이론에 가장 적절한 공식을 찾아내게 되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일리야 프리고진 그레고리 베이트슨 움베르토 마투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등은 이 이론에 주도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 사회 체제, 생태계 등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생명, 마음, 물질, 진화 등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관점으로 이끌 수 있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들에 대한 접근은 물라학과 신비주의 사이의 유사점들을 확증시켜 부며, 자유 의지의 개념, 삶과 죽음의 개념, 믕의 본성 등과 같이 물리학의 수준을 넘어서는 다른 것들을 추가한다. 자기조직화 시스템 이론에서 표현되는 개념들과 그에 대응하는 신비주의적 전통에서의 개념들 사이에는 심오한 조화가 있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내가 국가대표 코치 초년벙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내게 펜싱에 관한 많은 영감을 주었던 책이다. 사실 원래 이책을 읽게 된 것은 엉뚱한 착상?!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항상 경쟁에 쫓기면 긴장하던 시절이었고 국제시합이 있는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잠을 자기 위한 방법을 연구한 끝에 무지무지 어려운 책을 보자, 그러면 잠이 오잖아 라고 생각해서 골랐던 책이다. 물리학이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에게 엄청나게 어려운 책이므로  그렇게 해서 접하게 된 이 책은 내가 결국 모두 읽게 되었다. 잠을 자려고 산 책이 되려 잠을 쫓는 책이 된 셈이다.  다르다면 한 쪽은 잠은 자고 싶은데 못 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스스로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거나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이다.

 

Tao 는 道의 중국 발음의 영어 표기법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도에 관해서 상당한 관심이 있으므로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용 속에서 상당히 많은 동양사상에 대한 개괄적인 개념들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펜싱의 지도에 있어서 이러한 개념들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화엄경의 구절들이나 선불교의 공안들은 물론이고 비록 어설프기는 했지만 물리학적 지식을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시간개념이나 공간개념 그리고 관찰되는 현상에 대한 관찰자의 개입이라는 사실은 매우 크게 작용했다.  선수의 움직임에 대한 분석이 분석되어지는 선수의 움직임의 역학적 구조 뿐만 아니라 관찰하고 있는 나의 관점과 주관적인 가치관이 반영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코칭에 있어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해 준 계기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에게 선수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잘 못 알고 있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울러 이 책은 나에게 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재구성하게 해 주기도 했다. 겨우 고전물리학적 지식이 조금 있던 나에게 고에너지 물리학의 지식들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것이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보게 된 이 책은 2004년 판이므로 내가 전에 보았던 책에서 볼 수 없었던 부분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거듭 발전시켜 왔던 펜싱에 대한 통합적인 개념들과 가설들을 증명해주는 카프라 박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6가지 기준과 상통하는 내용들이어서 읽는 동안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펜싱에서 동양적인 방법론을 적용할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일에 생각하여 보면 무의식으로 그리고 상상력을 최대로 동원한 반대의 모방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표지 뒷 면에 있던 카프라 박사의 사진이 내게 주는 느낌은 아주 아주 특별했다. 책표지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물리학자로서의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한 동안 그의 사진을 보고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에 대한 그의 기술은 완전히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나는 지속적인 연구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이나 융의 심층심리학과 만나게 되어 나름대로 완성하려고 하던 펜싱의 전술 훈련을 위한 배경이 될 수 있는 통합적인 가설을 만들었는데 그의 기준에도 나와 있으니 흠 기분이 흐믓하다. 그는 구조에서 과정을 통한 사고로 변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도 그 면에서 상당히 공감한다. 나는 이중의 훈련 방식을 동시에 시행했다. 선수의 수준과 관계없이 경기의 출전을 통해서 얻어지고 있는 선수의 경험과  강점을 수준이나 단계를 무시하고 가르치는 한 편 기초와 기본을 충실히 훈련했다. 그야말로 요즈음 학교에서도 가능해진 현장학습과 학교의 기본 커리큐럼에 의한 학습이었다.

그의 인식론에 관한 견해와 마찬가지로 나는 검술의 인지과정이 없이 수행되는 영역을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결국은 체계적인 인지적 훈련계획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동화의 메커니즘과 습득의 효율성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시바여신의 춤을 극찬하는 그의 태도와 과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동양의 사상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내게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의 어울림을 보여 준 계기였고 보다 더 본질적인 동양무술의 사상에 대한 확신과 실제 훈련과 렛슨을 위한 응용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에너지와 물질로의 호환이라는 개념 원자 충돌 실험에서 나타나는 에너지의 물질로의 전환이라는 개념은 기술적인 정교함이 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나아가 속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

특히 전일성이나 일관성, 그리고 상호역동성이라는 본질에 대한 개념은 기술의 객관적인 관찰의 관점에서 전술적이고 내면적인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했다.

그의 책은 신체적인 조건에서 불리한 한국선수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심리적인 기법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실체화 할 수 있었다.

내가 코칭에 관한 기술적인 서적을 쓴다면 이런 관점과 과정을 통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길이 없는 길을 가야 할 때 그의 책이 내게 항상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연관되지 않는 것의 연관성 찾기는 머리 속의 생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접학문을 접촉을 통한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책은 사람들에게 개똥철학이라고 불리우던 나의 거대이론을 구체화할 수 있는 많은 지식과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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