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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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
▣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 (1939~ )
프리초프 카프라는 1975년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를 펴냈으며, 1982년에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펴 냈다. 그밖에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등 세계적 베스트 셀러 저자이다.
그는 1966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센터, 런던대학교 등에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했으며, 버클리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책을 펴 낸지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널리 읽힐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쓰게 된 계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1969년 어느 늦여름 오후, 그는 산타크루스에 있는 한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고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나오려는 에너지 폭포를 ‘보았던 것’다고 한다.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양자 이론이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 사상의 불가사의 함에 이끌렸다.
1년 후 그는 런던에 있는 임페리얼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리고, 1970년 늦가을 런던의 임페리얼 대학 근처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영감으로 도안한 춤추는 시바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점은 언젠가 상식이 될 것이라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유사점을 철저히 탐구하고 그것들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느꼈다.
그는 5년 후인 1975년 가을에 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전 세계로 번역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팔리고 있다. 이 후에 쓴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패러다임들의 사회적 의미를 연구한 책으로 이 또한 베스트셀러로 자리 맥임 했다.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카프라는 지난 30여 년 동안 현대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왔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 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등에서 수많은 TV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토크쇼 등에 화제의 인물로 출연한 바 있다.
물리학자인 카프라의 영감의 주요 근원이며, 과학적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물리학자 베르너 아이젠 베르크와 제프리 추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문리학과 철학>은 양자 역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고전 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는 젊은 학생 시절에 그이 책을 처음 읽고 커다란 여향을 받았다. 카프라는 1970년대 초에 하이젠베르크를 만났으며 그와 몇 차례 긴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을 끝마쳤을 때 각 장을 그와 함께 검토하였다. 그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씨를 부린 사람이 바로 하이젠베르크라고 말한다.
카프라는 제프리 추에 대해 평하기를,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사고에 혁명을 가져왔고,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양자 역학의 해석으로 변화를 가져왔듯이, 추는 20세기 물리학에서 세 번째 혁명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소립자에 대한 구두끈 이론으로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으며, 기초 과학에 대한 서양적 접근방법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단절 시킨 그의 과학이론과 철학에 매료되어 가까이 사귀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세워 발전 시켰으며, 탁월한 동료들과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제2판 저자 머리말
§ 서양 문화 – 서양 사상과 감정, 가치관과 태도, 사회와 정치 구조-의 심각한 불균형을 중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나는 중국의 음양 사상이 그와 같은 불균형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20]
§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實在觀)이 출현하게 된다.[21]
§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 길은 부처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21]
제 1판 저자 머리말
§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다. 그러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24]
§ 나는 그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나오려는 에너지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4]
§ 나는 이론 물리학의 분야에서 오랜 수련 기간을 가졌고, 수년간 그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양의 신비주의에 강렬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현대 물리학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양자이론(量子理論)의 불가사의를 연상시키는 선(禪)의 불가사의함에 특히 이끌렸다.[25]
§ 수년간의 정밀한 분석적인 사고 끝에 정신적 직관이 나에게 떠오르자 그 압도적인 감격에 나는 눈물을 흘렸으며 그 순간 나는 카스타네다처럼 그 인상을 종이 쪽지에 황급히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25]
§ 나는 수년간 적지 않는 노트를 기록하게 됐고, 계속 발견한 그 유사성에 관한 수 편의 논문을 썼으며, 이제 그 경험들을 한데 묶어 이 책 속에 담기에 이른 것이다.[25]
§ 신비주의란 무엇보다도 책으로서는 터득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주의적 전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 속에 실제 뛰어들어서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26]
제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 현대 물리학은 인류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자연 과학의 기술 고학이 결합은 행.불행 간에 지상의 생존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켰다.[33]
§ 오늘날 원자 물리학의 성과를 이용하지 않은 산업은 거의 없을 정도며, 이것이 원자 무기에 이용됨에 따라 전 세계의 정치 구조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아원자 물리학에 있어서의 물질의 개념과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실체관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공간, 시간, 인과율과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다.[34]
§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사이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논의되어 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체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34]
§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이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35]
§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을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또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35]
§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賢人)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즈스(physis, 자연)’라 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hpysics)’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37]
§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후대에 그리스인들은 밀레토스 학파를 ‘물활론자(物活論者, hylozoist)’ 즉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 사실 그들은 모든 물질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해 있다고 선언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인체가 공기에 이해 유지되듯이 우주는 우주의 숨결인 ‘프로미아(pneuma, 靈魂)’로 지탱되는 일종의 유기체라고 본 것이다.[37]
§ 동양사상과 유사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에페수스(Ephesus)의 해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훨씬 뚜렷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生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37]
§ 헤라클라이토스는 세계 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雙)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다, 이 대랍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38]
§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Elea)학파로 시작되었으며 제신과 인간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 되었으나 이후에는 이 세상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知的)이요, 인간적인 신으로 보이게 했다,
§ 이렇게 해서 정신과 문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사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38]
§ 엘레아의 라프메니데스는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일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는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이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 했다.[38]
§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립적인 관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케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 원리 –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 했으며, 물질은 몇 개의 ‘기본적 구성체’로 만들어 져 있다고 보았다.[38]
§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라는 아이디어를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적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000년 이상 서양사상을 사로 잡는다.[39]
§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하고 조직화 되었는데..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문명이 그토록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문명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다.[39]
§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39]
§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점에서 그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40]
§ 정신.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는..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40]
§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이 기계론(전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게 후반에서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40]
§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식 분열의 결과로…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40]
§ 의식과 무의식적 본능 사이게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작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단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이러한 분열-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 잡은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미든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41]
§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그 기원을 두었으며, 또 이러한 관점에서만이 진실로 그 발전이 가능했던 과학이 20세기에 와서 이제 그 분열을 극복하고 초기 그리스와 동양 철학에 표명된 전일(全一)의 이데아로 다시금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41]
§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람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다.[41]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事物)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全一性)을 강좌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건, 불교도건, 고가건 간에 그들이 지상의 목적은 모두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個別我)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42]
§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개오(開悟-지혜를 얻어 진리를 깨닫는 이)라고 부르는-은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 체득이며 그 구경(究竟-가장 지극한 깨달음)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 그래서 동양적 관점에서는 자아를 쪼개진 대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도 활동하고 무상하게 변전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42]
§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불의 실재로서 보이는 것이다.[42]
§ 따라서 신성(神性)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는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 이 책은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뛰어 넘어 물리학의 길-도(道)-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程)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44]
2. 아는 것과 보는 것
§ 먼저 현대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명된 정밀 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들은 직관(直觀)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 없다고 주장되는 정신적 수련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방식부터 다루어야 한다.[45]
§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推論的) 인 것과 직관적(直觀的)인 것의 두가지 지식과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 인정되어 왔다.[46]
§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절하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다.[46]
§ <우피니샤드>에서는 하급 지식인 각종의 과학과 상급지식인 종교적 자각을 연결시켰다. 불가에서는 ‘상대적’지식과 ‘절대적’ 지식, 또는 ‘조건적 진리’와 ‘초월적 진리’에 관하여 말한다.[46]
§ 그런가 하면 중국 철학에 있어서는 직관성과 상보적 성질을 항상 강조하여 왔으며 중국 사상의 기반을 이루는 음양론(陰陽論)의 원형이 바로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16]
§ 합리적 지식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환경에서 그 대상과 사건들을 경험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하고 분리하여 비교하고 측정하여 범주화하는 기능을 가지 지성의 영역에 속하는것이다.[47]
§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이나 완전한 정각형은 들어 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 현대 물리학의 말해 주듯이 막막한 우주 공간까지도 휘어져 있는 것이다.[47]
§ 이론적 지식이 추정하고 정량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과학을 그 영역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방법들로부터 획득한 어떠한 지식도 그 한계가 현대과학에서 점점 두드러지고 있으며, 바르너 하이젠베르크의“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48]
§ 불교도들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차별이 없고 불가분하며 한정되지 않는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의 이해는 동양 신비 사상의 중핵을 이룰 뿐만 아니라 모든 신비스런 체험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49]
§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 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52]
§ 과학적 추상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리는 그 대기도 치러야 한다. 우리의 개념 체계를 더 정확히 정이하고 그것을 더욱 능률화시키며 그 연결을 더욱 엄밀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54]
§ 동양의 신비주의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체험의 기반 위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을 그 지지자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강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55]
§ 기예의 기본적 목적은 사고하는 마음을 누르고 깨달음을 추론적인 데서 직관적 의식의 모습으로 바꾸는데 있는 듯하다. 수 많은 명상의 형태에 있어서 이 추론하는 마음을 침묵시키는 것은 이를 테면 숨결이나 만트라 소리나 만다라의 영상처럼 한 가지 것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61]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 노자
§ 동양의 신비주의는 실재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 위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현대 문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알고 있다.[63]
§ 물리학에 있어서는 실험의 해석을 모형이나 이론이라고 부르며, 모든 모형이나 이론들이 근사치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현대과학 연구의 밑바탕을 이룬다.[64]
§ 뉴튼의 이론이 꼭 ‘틀리다’거나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맞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모형들은 현상의 어떤 범위에만 타당한 근사치일 따름이다.[65]
§ 무엇보다 먼저 신비가들은 실재의 체험에 주로 관심을 가지지 그 체험의 기술에는 흥미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이러한 기술의 분석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동양사상에는 잘 정의된 근사치라는 개념이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66]
3. 언어를 초월하여
§ 원자의 세계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원자와 아원자적 실체를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70]
§ 동양의 신비 사상은 실재의 역설적인 면을 다루어 내는 몇 가지의 유별난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힌두교에서는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우회한 반면에 불교와 도교는 그 역설을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했다. 도가의 주요한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이다. 그것은 당황스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단단하고 강력하고 지극히 시적인 언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논리적인 추론의 낯익은 상궤에서 떨쳐내 버린다.[72]
우리는 수천 ‘칼파(kalpa, 겁(劫)’ 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다이토 대선사가 천황 고다이고를 만났을 때
§ 선종은 대화에서 야기되는 불일치에서부터 지덕을 창출해내는 특별한 비결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언어로써가 아니라 공안의 체계를 가지고 온전히 전수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시켜 왔다.[73]
§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 세계 자체는 우리들의 자각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76]
§ 원자 물리학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의 일단을 과학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77]
4. 새로운 물리학
§ 현대 물리학의 제 발견은 공간, 시간, 물질, 대상, 인과 등과 같은 개념들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들의 세계의 경험방식에 매우 기본적인 것으로 그 개념들을 변화 시킬 수 밖에 없었던 물리학자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80]
§ 이러한 변화로부터 새롭고도 아주 다른 세계관이 나왔고, 그것은 현재의 과학적 탐구에 의하여 아직도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다.[80]
§ 그리하여 동양의 신비가들과 서양의 물리학자들은 거의 동일한 혁명적 경험을 통하여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된 듯하다.[80]
고전 물리학
§ 모든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던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82]
§ 뉴턴 역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사건들은 상호의 인력, 즉 중력에 의해서 야기되는 공간에서의 물리적 점들의 운동으로 환원된다.[83]
§ 이와 같이 자연의 기계론적 견해는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 이 거대한 우주 기계는 완전히 인과적인 것, 결정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다.[84]
§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결과로 세계는 객관적으로, 즉 인간이라는 관찰자에 관해 전혀 언급함이 없이 기술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객관적인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84]
§ 이 기계적인 모델의 엄청난 성공은 19세기 초의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우주가 진실로 뉴턴의 운동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거대한 역학적 체계라고 믿게 하였다. 이러한 법칙은 자연의 기본 법칙으로서 이해되었으며, 뉴턴 역학은 자연 현상의 궁극적인 이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뒤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뉴턴 모델의 한계를 나타나게 하고 그 모델의 어느 특성도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발견되었다.[86]
§ 첫 번째 것이 전기 및 자기적 현상의 발견과 탐구였는데, 이것은 역학적 모델로는 적절히 기술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새로운 타입의 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86]
§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각 전하는 다른 전하가 나타나면 어떤 힘을 느끼도록 그 주위의 공간에 ‘산란’ 혹은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이라고 부른다.[87]
§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물리학자들은 상이한 현상들에 적용되는 두 개의 성공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으니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 역학이 그것이었다. 이리하여 뉴턴적 모델은 더 이상 모든 물리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89]
현대 물리학
§ 현대 물리학의 초기에 비범한 지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이 곧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에 간행된 두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두 혁명적인 추세를 창도했다. 그 하나는 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적 복사에 대한 새로운 고찰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그 후 원자 현상에 관한 이론인 양자론의 특성이 되었다.[90]
§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90]
§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90]
§ 상대성 이론에서 물리적 현상의 토대가 되는 뉴턴의 절대 공간의 개념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91]
§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이 시간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물체의 존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폐기시킨다.[92]
§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전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빈 공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93]
§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98]
§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98]
§ 우리의 지구에 있어서도 태양의 중앙에서 발생하는 핵 작용들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지상의 환경을 유지해 주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우주와 우리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태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출이 무한히 작은 세계의 현상인 핵반응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현대 물리학이 거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104]
§ 지난 수십 년 동안에 행해진 고에너지의 산란 실험들은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입자 세계의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물질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났다. 모든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것들은 에너지에서 생겨나 에너지로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소립자’, ‘물질적 실체’ 혹은 ‘독립된 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전 우주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 모형들의 역동적인 그물로서 나타난다.[110]
제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 힌두교는 그 정신적 원천을 <베다 경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베다의 ‘예언자들’인 무명의 현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고대의 성전을 집대성한 것이다.[118]
§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마지막 부분은 베다의 실천적 내용을 완성한 것이다.[118]
§ 그러나 인도의 일반 대중들은 <우파니샤드>를 통하지 않고 웅대한 서사집에 수집되어 있는 수많은 민간 설화- 이것은 방대하고 다채로운 인도 신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를 통하여 힌두교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그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에는 인도인들이 애송하는 경전인 <바가다드 기타>라는 아름다운 영적인 시가 실려 있다. 보통 ‘기타’라고 줄여서 불리는 이것은 크리슈나 신과 전사인 아르주나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다.[119]
§ 대부분 힌두교가 그렇듯이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실일 뿐이라는 사상에 있다. ‘브라만’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120]
가장 순수한 정수 – 온 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아트만이다. 그것은 당신이다.
§ 마야의 본래 의미는 ‘창조적인 마력’으로써….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꾸어 왔다. 애초엔 신선한 행위자와 마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 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들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121]
§ 흰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122]
§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 유희, 즉 활동하고 있는 전우주의 실천원리인데, 여기에서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역동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122]
§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123]
§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서양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가 인간 존재의 불가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신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육욕을 의식적인 의지로써 제어하려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전 존재로써 스스로 깨닫는 데 목표를 두었다.[124]
§ 힌두교에서 언제나 여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면이 전적으로 신성의 불가분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 풍부한 여신상들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힌두의 여신들은 성처녀로서 나타나지 않고 뇌쇄적일 만큼 아름다운 관능적 포옹상으로 나타난다.[125]
6. 불교
§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와 마하야나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있는 태도를 보여준다.[128]
§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이 체험의 본질은 지적인 분별과 대립이 세계를 넘어서 이친다, 즉 무사의(無思議)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실재가 분할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 ‘진여’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싯다르타 고타마가 숲 속에서의 7년 고생 끝에 어느 날 밤 겪었던 체험이다.[129]
§ 부처는 깨우친 직후, 그 유명한 사성제(四聖제)의 형태로써 그의 핵심적인 교리를 밀도있게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맨 먼저 질병의 원인을 검진하고, 다음으로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법을 처방하는 의사의 화법과 드리지 않다.[129]
§ 고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 – 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간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무상의 교리에는 자아, 즉 변화무쌍한 체험의 지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도 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은 하나의 환상, 즉 ‘마야’의 또 다른 형태고 실체가 없는 지적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129]
§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 (업)에 의해서 몰아쳐진다.[130]
§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131]
§ 기원 후 4세기에 실론 (스리랑카) 섬에서 개최되었던 4차 결집 회의에서 500년 이상이나 구전돼 내려오던, 기억에 의한 교리가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되었다. 팔리어로 쓰인 이 기록은 팔리 정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통적인 히나야나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마하야나파에서는 방대한 부피의 경전인 이른바 수트라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100~200년 후에 산스크리트로 쓰여 팔리 경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심오한 방식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있다.[132]
§ 마하야나 불교의 관점은 그것의 지적, 사변적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불교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이것을 보완해 주는 것이 불가의 종교적 의식인 믿음과 사랑과 자비다. 대승 불교에서 참으로 깨친 지혜, 즉 보리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133]
§ 지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특징적인 발전 중의 하나인 보디사트바 (깨달은 중생)의 이상에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왔다. 보살은 성불의 도정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이끌어 내 주는 것이며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개오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에 다른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를 서원한 사람이다.[133]
7. 중국 사상
§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138]
§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138]
§ 유교는 대체로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 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이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138]
§ 인간이 깨달아야 할 우주적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142]
§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 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143]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고, 한 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그것은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143]
지금 어둡게 하는 것이 이제 밝음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도다.
§ 양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남성적인 지성을, 음은 복합적이고 여성적이고 직관적인 마음을 나타낸다. 음양의 역학적인 특성은 태극도라고 불리는 고대 중국의 상징으로써 도해되고 있다.[144]
§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145]
§ 실제에 있어서도 <역경>이 지혜의 책으로서 쓰이는 바가 예언서로 쓰이는 것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148]
8. 도교
§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156]
§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157]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와 변용의 분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장자
§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157]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 ‘저것’과 ‘이것’이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이다. 오직 이 본령만이 말하자면 하나의 축으로서 가없는 변화에 응답하는 원궤의 중심인 것이다. – 장주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노자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158]
§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159]
§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161]
§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161]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장자
§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162]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노자
9. 선
§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166]
§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166]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 이 ‘곧바로 가리킨다’는 기법이 선에 독특한 풍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선사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일체의 이론화와 공론을 경멸하였다. [167]
§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많은 선어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하게 들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서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169]
§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선문의 강조는 확실히 그 도가적인 뿌리를 보여주고 있는 일이지만, 이런 강조의 기반은 엄연히 불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본성의 완전함에 대한 믿음이요,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170]
§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171]
제3부. 대비
10.만물의 통일성
§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으로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175]
§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어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176]
§ 그러므로 동양의 신비적 전통들의 주목적은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고 가라앉혀서 재조정하는 것이다.[176]
§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177]
§ 다음에 이어질 논의는 이른바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1920년대 말기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아직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델이다.[178]
§ 아원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179]
§ ‘관찰 대신에 참여’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겨우 최근에야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생각이다. 신비적 견식이란 단지 관찰에 의해서만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의 존재 전부를 쏟아 넣는 전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진다.[189]
§ 그들은 더 나아가, 깊은 명상 속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의 구별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고 차별이 없는 전체에로 용해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189]
이원성이 있는 곳은 말하자면 다른 것을 보고, 하나가 다른 것을 냄새 맡고, 하나가 다른 것을 맛보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곳에서는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본단 말인가? 무엇에 의하여 무엇을 냄새 맡는다는 것인가? 무엇에 의하며 무엇을 맛본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 양자론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대상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관찰자의 개념을 참여자로써 대치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세계를 기술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깨닫고 있다. 그것은, 그 대부분들이 이 전체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정의되는 물리적, 정신적 관계들의 상호 연결된 망으로서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190]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12. 공간 - 시간
13. 역동적인 우주
14. 공과 형상
15. 우주적 무도
16. 쿼크 대칭들 - 하나의 새로운 공안
17. 번역의 모형
18. 상호 관통
맺음말
§ 동양이 종교적 철학들은 추론적인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무시간적이며 신비적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현대 물리학의 관계는 다른 여러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381]
§ 그러므로 내가 어는 정도 이룩하고자 바라는 것은 어떤 엄밀한 논증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주요 이론들과 모델들이 동양 신비주의의 견해들과 내용이 일치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내는 것으로,…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381]
§ 이러한 조화를 체험한 사람에게 있어서 흥미로운 문제는 그러한 유사성이 존재하는냐 안하는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왜 존재하며,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는 것이다.[382]
§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가 유기기적 우주관 둘 다 정당하며 유효하다. 전자는 과학과 공업에, 후자는 균형 있고 충만 된 정신 생활에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주위 환경이 차원들을 넘어서면 기계론적 개념들은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신비가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처럼 매우 흡사한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이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던 현대물리학이 본질적인 경험이다.[382]
§ 물리학자들과 신비가들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방법은 철두철미 경험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383]
§ 사실 육체적 경험은 많은 동양의 전통에서 강조되며 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의 관건으로 종종 이해된다. 우리가 건장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 속 각 기관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전체로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이 안녕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383]
§ 신비가와 대조적으로 물리학자는 사물의 본질적 성질에 관한 그의 탐구를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서 시작한다….그는 또한 그 자신과 그 의식이 이 통일성이 불가결한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384]
§ 따라서 신비가와 물리학자는 하나의 내적인 영역으로부터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외적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견해들 사이의 조화는 외부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의 내부의 실재인 아트만과 일치한다면-범아일여-고대 인도의 지혜를 확인해 준다.[384]
§ 현대물리학에 있어서는 이것들은 원자적. 아원자적 세계의 영역이요, 신비주의에 있어서 그것들은 감각 세계를 초월한 의식이 비일상적인 상태다.[384]
§ 나는 과학과 신비주의를 각각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 두 능력을 지닌 인간의 상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385]
§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386]
§ 신비적 지식을 체득하는 것은 변혁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은 곧 변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86]
§ 오늘날 물리학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이론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물리학자의 대부분이 기계론적이고 단편적인 세계관에 여전히 근거를 두고 있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과학이 이러한 견해를 넘어서 우리의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인 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우주의 통일성을 향하여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386]
§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역동적인 형평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요구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혁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386]
§ 우리의 전체 문명의 생존이 우리가 그러한 변화를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동양적 신비주의의 어느 정도의 음적 태도를 채택할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연의 전체성을 경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역량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386]
제3판 후기: 신물리학의 미래
§ 과거 15년 이상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은 내 기대를 훨씬 뛰어 넘는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나는 지금 이 책이 그와 같은 호평을 받는 주요한 이유는 그런 문화적 상황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406]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계기를 주었는가? 그들이 경험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점을 깨닫는 것은 보다 폭넓은 운동, 즉 세계관이 근본적인 변화나 과학과 사회의 패러다임들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407]
§ 그러한 수정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계를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체라기 보다 통합된 전체로 보는 전일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부를 수 있는데, 나는 ‘생태학적’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408]
§ 그와 같은 깊음 의미에서의 생태학적 인식은 모든 현상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가 자연의 순환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408]
§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든 생명이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리고 변화와 변형의 순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409]
§ 인간 정신이 각 개인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의식의 형태로 이해될 때 생태학적인 자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는 것임 여백 해지고 실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정신적인 전통에 대한 통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409]
§ 새로운 세계관은 생태학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정신적 자각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학이나 다른 과학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신적 전통을 지난 많은 사상들과 조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409]
§ 나의 영감의 주요 근원이며, 나의 과학적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저명한 두 분의 물리학자 베르너 아이젠 베르크와 제프리 추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하이젠베르크의 <물리학과 철학>은 양자 역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나는 젊은 학생 시절에 그이 책을 처음 읽고 커다란 여향을 받았다.[410]
§ 1970년대 초에 하이젠베르크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와 몇 차례 긴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끝마쳤을 때 각 장을 그와 함께 검토하였다.[410]
§ 제프리 추는 아이젠베르크나 양자 물리학의 다른 창시자들과는 다른 세대에 속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사고에 혁명을 가져왔고,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양자 역학의 해석으로 변화를 가져왔듯이, 추는 20세기 물리학에서 세 번째 혁명을 이룩했다. 소립자에 대한 그의 부트스크랩 이론(구두끈 이론)은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으며, 기초 과학에 대한 서양적 접근방법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단절 시키고 있다.[411]
§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 첫 번째 기준은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이다.[411]
§ 새로운 패러다임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보다 더 대칭적이다. 우리는 확실히 부분들이 속성을 통해서 전체를 이해하는 동시에 부분들의 속성은 전체의 역동성을 통해서 전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양자 이론이 개발됨으로써 과학에서는 처음으로 물리학 분야에서 일어났다.[412]
§ 점차적으로 물리학자들은 원자 수준으로서의 자연은 기본적인 토막들로 구성된 역학적 세계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그물로 나타나며, 결국 이런 상호 관련된 그물에서는 어떠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412]
§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연관되고 통일되어 있다는 것의 자각과 모든 현상들에 대한 경험을 근본적인 일자가 드러나는 것으로 자각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413]
§ 두 번째의 기준은 구조를 통한 사고에서 과정을 통한 사고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옛날의 패러다임에서는 기본적인 구조들이 있고 나서 그 구조들이 힘과 메커니즘을 통해서 상화 작용하여, 그것들이 과정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과정이 일차적이며,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모든 구조는 근원적인 과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과정을 통한 사고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물리학을 등장시켰다.[413]
§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역동적인 양태들, 즉 연속적인 에너지의 율동이다. 과정을 통한 사고는 동양적 신비주의 전통들의 주요한 특징이다.[413]
§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서 말하려면 반드시 동일한 시간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에 대한 나의 세 번째 기준이다. 나는 그것을 과학으로부터 ‘인식론적’ 과학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르고 싶다.[414]
§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인식론, 즉 지식의 과정에 대해 이해가 자연 현상에 대한 기술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야 한다.[414]
§ 네 번째 기준은…지식은 완전히 확고한 ‘토대’위에 세워져야 한다.
§ 다섯 번째 기준, 즉 진리로부터 근사적인 전환을 나타낸다. 데카르트적인 패러다임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과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한계를 가지며 근사적이라는 것이 인정된다. 과학은 결코 완전하고 명확한 이해를 제공해 줄 수 없다.[418]
§ 여기서 우리는 현대 과학자와 신비주의자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근사적인 지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절대적인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우주는 모든 현상들의 본질적인 상호 연관성을 잘 일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흔히 어떤 단일한 현상도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419]
§ 나의 마지막 기준은 주장에 관한 것이다. 나는 핵파괴의 위협과 자연 환경의 황폐화에 직면해 있는 인구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바탕을 이루는 방법들과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419]
§ 17세기 이전이 과학의 목표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베이컨 이래로 과학의 목표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얻는 데 있었으며,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위험스럽고 유해하며 반생태학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420]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계관의 변화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가치관의 변화, 즉 실제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협력과 비폭력적인 태도로 완전히 바꾸려는 마음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420]
§ 이런 태도는 철저히 생태학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도한 정신적 전통의 특징적 태도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대 현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 했다. “자연의 질서를 따르려는 자는 도(道)의 흐름을 따라 흘러간다.”
§ 신비주의적 전통의 경전들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심오한 신비적 경험이 결코 애매하고 막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명료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421]
§ 신비적인 경험은 지적인 분석을 뛰어 넘는다.[421]
§ 다행히 신비주의를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것으로 잘못 연관 짓는 태도는 요즘 바뀌고 있다. 동양적 사고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으며, 명상은 더 이상 우스꽝스럽거나 의심스런 것으로 비치지 않기 때문에 신비주의는 과학계 안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421]
§ 나는 현대 물리학의 두 가지 커다란 주제인 우주의 기본적인 통일과 상호 연관성 그리고 우주의 자연 현상의 본래적인 역동성은 미래 연구에 의해 무효로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는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이며…기본 주제들은 무효화 되기보다는 강화될 것으로 믿는다. …생물하고 심리학에서 두드러진 새로운 발전으로 확증되고 있다.[423]
§ 한편 나는 서양의 정신적 전통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치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내가 약술한 실재에 대한 통찰에 대응하는 정신은 생태학적, 지구 중심적, 탈가부장주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428]
▣ 내가 저자라면
물리학과 동양사상. 제목만으로 물리학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내던지고 싶은 책이고 그나마 익숙한 동양 사상의 측면을 보면 잡고 싶은 책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물리학적 이론이 3부 부분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으로 행간을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쉽게 덮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물리학을 안다면 무릎을 치며 읽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충격 1. 고도의 과학이 비과학적인 동양사상으로 이론을 뒷받침 하려 하다니!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이 힌두교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다니 놀랍지 않은가?
현대 물리학이 양자 역학이 대두 되면서 4차원의 세계를 많이 거론 하는 것을 보았었다. 공간, 시간, 물질, 대상 등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 현대 물리학 이며 그것을 안 물리학자들은 어떤 충격을 받았다. 원자 물리학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에 신비가들과 마찬 가지로 물리학자들도 비감각적 경험을 다루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들이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에너지의 일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현대 물리학이 순수 객관적의에서 주관주의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적 동양사상에 관심이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때까지 동양의 신비주의는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설득력 있고 동양이 심미적이고 직관에 가까운 주관적인 체험과 견해가 현대 물리학의 개념과 유사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6세기부터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서양인들이 말하는 신비주의가 고도의 과학인 물리학이 인정할 만큼 과학적이었다는 것인가? 현대 물리학과 동양철학이 궁극적인 지점이 같다는 것은 신비주의가 과학적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부처의 깨달음이, 선사의 선 사상이 과학적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사실 그것이 과학적이다 아니다로 잘라 말하긴 이르다. 양자역학을 득도했다고 말하기 우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동양사상이 우주의 생성과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가 보이던 과학이 결국에는 그 곳에 도착한 것이다.
충격 2. 서양 물리학자가 쓴 동양철학의 예찬
이것은 충격이라기 보다 신선했다. 저자는 물리학자이면서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날 바닷가에서 동양적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선 수련도 직접 했다. 그래선지 동양이 신비사상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사상, 그것도 물리학의 이론과 유사함을 증명하기 위해 동양사상을 힌두교, 도교, 불교, 선을 깊이 있게 다룬 면은 흥미로웠다. 약간의 신비함을 가지고 서양인들에게 동양철학의 경험적이고 명확함을 알리고자 노력한 모습이 역력했다. 동양에 살지만 동양철학의 근본 사상을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매우 유익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이 부분을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까?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서 동양철학 부분을 더 많이 이해한 것처럼 그들은 서양 과학의 발전과 현대 물리학에 더 많은 이해를 하지 않을까 싶다.
충격 3. 접하기 어려운 물리학 세계의 이해
과학, 특히 물리학은 나에게 아주 동떨어진 세계이다. 이 책에 나온 물리학의 이론은 양자역학에 이르러 ‘입자가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주 개념적으로만 이해된다. 이 책에 고전 물리학 부분에서 새로운 물리학의 출현까지 자세히 다르고 있어 물리학의 발달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을 근본 정신인 동양사상과의 비교 때문이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과학의 발달로 변하는 세계관을 논하는 사이 사이로 인간의 모습이 비친다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철학에서 과학, 나아가 물리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테카르트적 분할과 기계론적 세계관인 서양적 관점보다 초기 그리스와 유기적인 동양의 세계관이 양자역학의 개념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모양이다.
현대 물리학의 토대는 뉴턴의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이다. 모든 물리학 현상을 일으켰던 뉴턴식 우주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 공간으로 그것은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이 절대적 공간, 절대적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뉴턴적 세계의 요소들은 물질적 입자였는데 이것을 변형하면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러한 이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 기초를 둔 것이었고 그 결과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이야 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는 뉴턴 역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보였다. 그 뒤 백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비판되었으며,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로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한계를 드러낸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도 별개의 실체가 아니며 둘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절대 공간과 시간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은 분리 될 수 없으며 물체의 존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이후에 나온 양자론은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띠는 추상적인 실체로 보았다.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양자론적 개념은 물리학자들의 상상력에 대해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입자는 다른 입자가 될 수 있으며 에너지는 에너지로 있다가 소멸할 수 있다.
이러한 물질의 궁극체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며, 물질적 존재란 전일적인 것의 한 과정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에서 카프라는 주관주의이자 신비주의인 동양 사상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제시한 동양사상이 양자이론에 어떤 도움이 될까. 카프라는 이 책 이후의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제시하면서 그 효과를 말하고 있지만 이원론에 입각했던 서양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충격 4.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유사성 확인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현대 물리학은 가지 중립적 과학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고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부처로 나아가는 길과 다른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에 대한 해답은 맺음말과 3판 후기에서 읽을 수 있었다.
§ 우리의 지구에 있어서도 태양의 중앙에서 발생하는 핵 작용들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지상의 환경을 유지해 주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우주와 우리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태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출이 무한히 작은 세계의 현상인 핵반응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현대 물리학이 거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104]
결국 카프라는 과학자들이 이러한 도취에 빠져 자연을 파괴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오늘의 산업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는 객관적 지식만을 강조한 현대 과학의 태도에 주요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의 유사점을 깨닫는 보다 근본 적에 대한 세계관이 변화와 고학과 사회의 패러다임에 대해 생태학적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 그것은 과학의 틀을 넘어서 모든 생명이 일체성,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의존성, 그리고 변화와 변형의 순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409]
사실 이러한 자각은 동양에서는 예전부터 존재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문명이 서양의 과학문명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 그런 세계관이 묻혀 있었을 뿐이다.
서양 정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르겠지만 서양 정신에 흐르고 있는 객관주의가 이제 자신과 그 의식의 통일성이 불가결을 알고 주관적 개념으로 접어든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386]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물리학자들이 단편적이고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사회를 지지하여 자연 환경과 우주의 통일성을 해할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의 서양문화의 심각한 불균형을 중화하는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성찰이 통합된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 자연에서 관찰하는 조화로운 상호 관계가 반영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핵파괴의 위협과 자연 환경의 황폐화에 직면해 있는 인구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바탕을 이루는 방법들과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때에만 가능하다고 강조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나 또한 지지한다.
더불어 그의 연구가 계속되고 새로운 다른 개념들로 대체되어 과학자들의 가치 중립적인 신화가 이루어지고 많은 과학자들이 부처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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